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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괴물 백과 사전 시리즈로, 이전에 정리하지 못한 괴물들을 추가로 정리한 증보 81~90편 항목으로 올리는 한국의 괴물 들입니다.
괴물을 정리한 기준은 이전과 같습니다. 즉, 기록과 기록자, 기록시기가 분명한 18세기 이전에 확인된 각종 괴물들만을 정리했습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에 기록된 괴물, 작자가 불분명한 문헌에 기록된 괴물, 소설 속에 등장하는 괴물, 기록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괴물 등등은 모두 뺐습니다.
비슷한 괴물들끼리는 기록을 합쳐서 하나의 보다 묘사가 풍부한 괴물로 정리했고, 반대로 이름이 같은 괴물이라도 현격히 모습과 습성이 다른 경우에는 다른 괴물로 분리해서 싣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괴물에 대한 설명은, 책에 언급된 그대로의 설명을 옮기는 것에 더하여, 다른 기록에 나오는 비슷한 괴물의 묘사, 비슷한 전설, 비슷한 괴물의 그림, 공예품의 모양 등등을 참조하여 덧붙인 것들이 있습니다.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설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기도 하고, 시대 상황을 파악하는 상징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토론하거나 주석, 해설을 달아볼만한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아쉬운대로, 일단은 일부에만 간단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대신 모든 괴물들의 그 기록 출전을 밝히고, 언제 어디서 목격되었는지를 최대한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괴물의 이름이 불분명한 경우에는 제가 임의로 이름을 붙이는 것은 피했습니다. 대신에 원전에서 괴물의 모습을 묘사하는 대목에 나오는 말을 최대한 그대로 발췌해서 옮겨 쓴 것을 항목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가능한 한 한자도 같이 표기했습니다.
이 자료에 괴물들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낸 그림을 곁들였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쉬운대로, 일단은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들 중에서 분위기가 비슷하게 맞는 부분 일부를 발췌하여 참고해 볼 만한 자료로 같이 실었습니다.
81. 구업 (駒業)
(통영 법륜사 산신탱 국가문화유산포털, 공공누리1)
업, 또는 업신이라고 부르는 민간 신앙은 전국각지에 퍼져 있던 것으로 보통 집 안 한 구석이나 지붕에 살고 있는 구렁이가 있는데 그 구렁이가 그 집안의 재물 운을 관장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업신이 그 집 바깥으로 나가거나 죽은 채로 발견되면 그 집은 크게 재물을 잃는다는 식으로 생각하곤 했다. 구렁이 외에 두꺼비에 대해 그런 신앙을 가진 사례도 있으며, 업이 깃들어 있는 곳을 "업단지"라고 하여 쌀을 담아 놓은 항아리를 하나 마련해 놓는 경우도 흔한 편이다.
업신에 관한 조선시대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이자 작가인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업신을 부자집 풍속으로 소개하고 있고 그 집의 창고 속에 있는 신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업신은 구렁이 또는 족제비의 형상이며, 사람들이 흰죽을 쑤어 바치며 신처럼 대접한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특이하게도 망아지와 비슷한 "구업(駒業)"이라는 형태의 업신도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그렇다면 구업이라는 것은 구렁이처럼 숨어 살 수 있는 형태이면서도 망아지를 닮은 이상한 모양일텐데 그렇다면 크기는 아마 아주 작은 형태일 것이고, 상상해 보기에 따라서는 망아지와 비슷하면서도 구렁이나 족제비와 닮은 점도 있는 괴상한 짐승이라고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업신에 관한 풍속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다양한 풍습과 문화가 20세기까지 전해내려 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국민속신앙사전 업맞이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2529 항목 등에서 정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82. 각귀 (角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왕도(제5염라왕)에서 발췌, 공공누리1)
"용재총화"에는 조선 전기의 새해 풍습으로 사람들이 새해 첫날 새벽에 문 앞에 이상한 그림을 그려서 붙여 놓곤 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이때 붙여 놓는 그림으로 소개 되어 있는 것은, 처용(處容), 각귀(角鬼), 종규(鍾馗), 복두관인(僕頭官人), 개주장군(介冑將軍), 경진보부인(擎珍寶婦人), 닭, 호랑이이다. 이 중에 처용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역귀를 내쫓기 위해 붙이는 사람 그림이고, 종규는 중국에서 널리 퍼져 있는 악귀를 내쫓는 사람 그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악귀를 내쫓는 신령들을 나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것은 각종 세시기류 기록에서 다루고 있는 문배(門排) 풍습으로 볼 수 있다. "용재총화"의 기록과 달리 조선 후기에는 장군들의 모습을 그리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내용은 "금갑장군" 항목에서 따로 서술하였다.
"용재총화" 항목에 나타나 있는 조선 전기의 악귀 쫓는 그림 중에는 왜 그런 그림을 붙였는 지 그 연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처용, 종규 이외에 그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신령 그림인 듯한, 각귀, 복두관인, 개주장군, 경진보부인이 같이 언급되어 있다. 글자 대로 뜻을 풀어 보면, 각귀는 뿔이 달린 귀신이라는 뜻이니 악귀를 쫓아 주는 괴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복두관인은 멋진 모자를 쓴 문관 내지는 학자 모습의 신령이며 개주장군은 투구와 갑옷을 쓴 무관 내지는 군인 모습의 신령이니 악귀를 쫓아 주는 남성 신이라고 볼 수 있다. 경진보부인은 아름다운 보물을 들고 있는 모습의 신령으로 악귀를 쫓아 주는 여성 신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의 허균이 남긴 "성소부부고"의 "궁사(宮詞)"라는 글을 보면, 문배 풍습에 해당하는 것으로 천왕(天王)과 선녀(仙女) 그림을 붙인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천왕이 남신으로 복두관인, 개주장군과 통하고 선녀는 여신으로 경진보부인과 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꾸며 보자면, 남녀신인 천왕과 선녀, 즉 복두관인-개주장군과 경진보부인이 그 부하나 동료로 닭, 호랑이, 각귀등을 거느리고 집안에서 악귀들을 물리쳐 주는 역할을 했다는 식으로 상상해 볼 수도 있을 듯 싶다.
뿔이 달린 사람 이야기들을 한번 정리해 보자면, 머리 한 쪽만이 유독 튀어나온 형상인 사람에 대해서는 "강수선생" 항목에서 설명했고, 살덩어리가 뿔 모양으로 둘 튀어나온 형상인 사람에 대해서는 "양륙각" 항목에서 설명했으며, 뿔이 많아서 다섯 갈래로 돋아난 형상인 사람에 대해서는 "생사귀" 항목에서 설명했다.
뿔이 둘 단 괴물에 대해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면, 중종 실록의 1515년 음력 5월 16일 기록에, 노비 억천(億千)이 꿈에 강녕전(康寧殿) 뜰에 늙은이들이 무리를 지어 창호(窓戶)를 마구 때렸으며, 또 꿈에 연산군이 뿔이 둘 달린 귀신을 이끌고 와서 중궁이 있는 곳을 물으며 담을 넘어 들어와서 사람을 때리는 등의 일을 보았다고 해서 궁전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는 이야기를 소개해 볼만하다. 아마도 당시에, 중종에게 옥좌를 잃고 쫓겨난 연산군이 지옥에서 돌아 와 복수하기 위해 늙은이 같은 무리, 내지는 뿔이 둘 달린 귀신 같이 생긴 무리를 이끌고 담을 넘어 다니며 창문을 마구 때린다는 식의 상상이 섬뜩한 이야기로 인기가 있었던 듯 하다.
뿔 달린 괴물에 대해 끝으로 덧붙여 볼만한 이야기는 조선 중기에 악명 높았던 "길삼봉(吉三峯)" 사건이다. 길삼봉은 16세기에 소문이 파다했던 도적으로 "연려실기술"에서 정리된 바에 따르면 천안의 노비 출신으로 화적이 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단히 재주가 뛰어나서 조정에서 잡지 못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길삼봉은 힘이 세서 맨손으로 돌을 쳐서 깨고, 뛰어 오르면 집을 넘을 수 있으며, 신령스러운 병사, 즉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다닐 수가 있어서 멀리서 보면 병사들이 와글와글한 것 같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아무도 없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길삼봉은 16세기 최악의 역모 사건인 기축옥사와 엮이면서 당시 정여립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할 때 길삼봉과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 "길삼봉이 누구냐?" "길삼봉이 어디 있느냐?" 등을 조사하고 고문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당했다.
결국 실제로 길삼봉을 보았다는 명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길삼봉은 그저 소문으로만 돌았던 허상 속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 진상에 대해서는 어이 없는 이야기 하나가 알려져 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길운절"이라는 사람이 당시 조정에 불만이 많았는데 머리에 튀어 나온 부분이 셋 있어서 어릴 때 부르던 별명이 "길삼봉"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점 같은 것이 튀어나온 것이 셋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머리에 뿔이 셋 난 사람으로 와전되고, 나중에는 신비로운 괴물 같은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 같고, 나중에 그 이야기가 절대 잡히지 않는 신비의 도적 길삼봉으로 확대되어 역모에 얽혀 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83. 홍도 (洪桃), 대죽 (大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자미상선경도, 공공누리1)
유몽인의 "어우집"에 실린 "송이윤경수광부안변도호부서(送李潤卿 睟光 赴安邊都護府序)"에는, 안변에서 갈 수 있는 서해안의 어느 섬에 신선의 세계 같은 신비로운 곳이 있다는 전설이 소개 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깊은 골짜기의 바위 위에 궁전이 서 있는데 그 이름이 "봉래지전(蓬萊之殿)"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며, 그 섬사람들은 말 대신 사슴을 타고 다니고 새를 타고 날아다닐 수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곳의 음식 담는 그릇은 도자기로 굽거나 쇠를 녹여 만든 재질이 아니었고 먹는 것도 밭을 갈거나 우물을 파서 마련한 것이 아니어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 섬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괴상한 식물이 소개 되어 있는데, 복숭아가 매우 거대해서 씨앗이 바가지 만하고 열매는 한 말 한 되 단위로 따질 만큼 큰 크기였다고 하며, 대나무도 아주 거대해서 죽순이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크기였다고 한다. 이러한 복숭아와 대나무를 각각 홍도(洪桃), 대죽(大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섬을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선이 산다는 신비한 산, 삼신산(三神山)으로 추정할 만하다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는데, 결말에서는 안변에 새로 부임하는 이윤경이 정치를 잘 한다면 이 신비의 섬으로 떠났던 사람들도 대죽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홍도를 먹으면서 바다를 건너 다시 안변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농담 비슷한 말을 하면서 멋지게 응원하고 있다.
홍도는 중국 고전에서 신선세계의 복숭아를 뜻하는 말로도 쓰이던 말이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신비한 섬에 거대한 식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 글 이외에 다른 사례도 보이는 데, 예를 들어 우산국, 즉 울릉도에 대한 전설에서 흔히 쓰이던 문구와 이 글의 표현은 통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울릉도의 대나무 크기가 기둥 만하고, 쥐는 고양이 만큼 크고, 복숭아는 되 처럼 크다고 되어 있다.
84. 백귀 (白鬼)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남주노인 가면, 공공누리1)
"조선왕조실록" 1468년 음력 8월 18일 기록을 보면, 세조의 장난으로 궁전 뒤뜰에 일부러 무서운 귀신으로 꾸민 사람을 보내 두고, 안효례, 최호원 두 신하들을 놀래켜 주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때 그 형상은 사람이 아래 윗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머리에 흰 것을 이고 있으며 몽둥이 내지는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이 무렵 조선 시대 사람들은 전형적인 무서운 귀신 형상으로 몽둥이를 들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에 머리에 뭔가 허연 것이 있는 헐벗은 사람 모습을 떠올렸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이와 통하는 기록으로 조선 후기 허목이 쓴 "척주기사"를 보면 태백산 신령을 "백두옹(白頭翁)"이라고 하여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사람들이 먼 곳에서 와서 복을 빌기도 하고, 백두옹의 저주를 받으면 관청의 사또가 줄줄이 죽어 나기도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소문에 따르면 꿈에 백두옹을 보면 죽는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이익이 쓴 "우부승지 이공 행장(右副承旨李公行狀)"에는 산의 수풀에서 나오는 귀매(魅) 형태의 괴물이 흰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비슷한 느낌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괴물은 기운이 센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노려보면 물러난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귀신 들려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병을 앓게 하는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례가 나와 있다. 이 글에서는 흰 옷을 입은 귀매라는 뜻으로, "소의매(素衣魅)"라고 이 귀신을 부르고 있다.
19세기의 기록인 "임하필기"에도 이와 통하는 기록이 있다. 조현명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사당 앞에 있는 오래된 나무 위에서 갑자기 흰 기운이 일어나더니 형체가 변해 꼭 장삼을 걸친 승려의 모습처럼 되었다고 한다. 조현명의 부인은 그것을 보았으나 조현명은 보지 못했다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백귀(白鬼)"인데 그것을 본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 항목의 제목은 여기에서 따 와서, "백귀"로 붙였다.
85. 초란 (招亂)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취발이탈모양 그림, 공공누리1)
"초란"은 현대에는 보통 "초라니"라고 하는 가면 놀이의 등장인물인데, 이상한 가면을 쓰고 떼지어 다니면서 주로 익살과 장난을 치면서 웃기는 역할을 하는 무리들을 말한다. 초라니라는 말의 어원은 불명이지만, "청강선생후쇄어"에는 "초란(招亂)"이라는 표기와 함께 "초란광대(招亂廣大)"라고 나와 있으며, "목민심서"에는 "초란이(焦蘭伊)"라고 표기하고 있고 "설나규식"에는 "초라(俏儺)"라고 표기되어 있다. 비교적 시대가 앞서는 "청강선생후쇄어"의 기록에서 "초란"의 한자를 "혼란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뜻으로 써 놓은 것은 아마 초라니라는 역할의 성격을 나타내는 점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초라니는 궁중에서 새해 첫날 새벽 악귀를 쫓기 위해 하는 "나례(儺禮)" 행사의 진자(侲子)와 통하는 듯 하다. "용재총화"를 보면, 나례 행사에서는 방상씨 탈을 쓴 사람이 진자라고 하는 아이들 수십명과 같이 음악과 함께 행진 하는데, 이때 진자 역할은 궁궐 바깥에서 초청해 온 어린이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원래 방상씨와 진자를 데리고 나례를 하던 풍습은 중국 풍습을 가져온 것인데, 중국에서는 이러한 행사가 송나라 이후 차차 쇠퇴했던데 비해 조선에서는 꾸준히 이어진 듯 하다.
이후 "설나규식"이나 "봉성문여" 같은 자료를 보면, 민간에서 설날 행사를 할 때에 "걸립" 또는 "걸공"이라는 이름으로 무리가 행차를 하며 놀이를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때 궁중 나례의 진자 역할에 대응되는 역할을 시골 마을에서는 초라니가 맡았던 것 같다.
한 가지 눈에 뜨이는 점은 "용재총화" 및 다른 조선의 나례 행사를 나타낸 기록을 보면 방상씨가 악귀를 쫓는 시늉을 하면 진자들이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비는 시늉을 하는 장면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마도, 진자들이 사람을 괴롭히는 악마 같은 역할을 어느 정도 상징하는 것으로 치고 공연을 했던 것 같다. "용재총화"에 따르면 진자의 모습은 붉은 옷, 붉은 두건 차림이라고 되어 있고, 가면을 쓴다는 묘사도 같이 보인다.
정리하자면, 조선의 진자 내지는 초란은 어린이와 비슷한 형상인데 괴상한 가면 같은 얼굴을 하고, 붉은 옷, 붉은 두건 차림으로 돌아다니면서 갖가지 장난과 우스운 소리로 사람을 골리는 것으로 사람의 악운을 상징하는 작은 악마 같은 것에 가까워 보인다. 속담 중에 "초라니탈에도 차례가 있다"는 말이 있고, "양반의 집 못 되려면 초라니 새끼난다"라는 말도 있는데, 그만큼 초라니 역할을 하는 공연자가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우며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던 듯 하다.
참고로 "변강쇠가"에 초라니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는데, 박동진 판 가사에서 그 대목의 초라니 묘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구슬상모 덤벙거지 되게 맨 통장고에, 동정 없는 누비 저고 리, 때가 묻은 붉은 전대 제멋대로 들어 메고, 조개장단 주머니에, 주황사 벌매듭, 청삼 승 허리띠며, 버선코를 길게 빼어 오산장 짚신 신고, 푸른 헝겊 둘러메고, 오십살 늘어 진 부채 송화색으로 수건 달아 덜미에다 엇게 꽂고, 앞뒤꼭지 쑥 내민 놈, 앞 살 터진 헌망건에, 자개관자 굵게 달아 당줄에다 눌러메고, 굵은 무명 벌통 한삼 무릎 아래 축 쳐지고, 몸통은 집동 같고 뱃통은 물항아리라. 두리두리 두 눈구멍은 고리눈에 테두르 고, 납짝한 코잔등에 주석 대갈 총총 박고, 꼿꼿이 슨 양수염은 양편으로 팔랑팔랑, 반 백이 넘은 놈이 목소리가 새된 것이 비지땀을 씻어가며 헛침을 탁탁 뱉고 "
86. 주계 (珠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봉두, 공공누리1)
"고운당필기"에 실린 이야기에 따르면 "주계(珠鷄)"라는 닭은 늙으면 뱀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특히 변하는 중간 단계인 몸이 뱀으로 변해 꿈틀거리는 정도가 되었으면서도 두 발과 꼬리는 닭인 상태를 귀하게 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얼핏보고 닭털이 듬성듬성 빠진 것 같아 보였다고 착각했다는 묘사가 있으므로, 전체적인 형상은 머리와 몸통은 뱀이면서 몸 곳곳에 깃털이 좀 남아 있고 거기에 닭의 다리와 꼬리가 달린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잡아서 삶아 먹으면 고치기 힘든 어떤 병이 낫는 약이 된다고 한다.
"고운당필기"의 저자 유득공은 충주에 사는 친척에게 들은 이야기라면서 이 일을 기록해 두고 있는데, 그렇다면 주계에 관한 이런 이야기는 18세기 충주 지역에 퍼져 있던 소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주계는 얼룩무늬가 있는 흰 닭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현재 주계라고 부르는 새와는 다른 것이다.
"고운당필기"에서 이 항목의 제목은 "주계화사(珠鷄化蛇)" 즉 "주계가 뱀으로 변했다"라고 되어 있으며, 저자 유득공은 몸에 난 사마귀가 개구리로 변했다는 이상한 이야기 바로 다음 이야기로 이 이야기를 써 두었다.
(항목외). 비웅 (非熊 곰은 아님, 비훼非虺: 살무사는 아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귀면와, 공공누리1)
커다란 맹수로 키는 사람의 두 배 좀 못되는 정도(한 길)이고 허리도 그 키와 버금가는 정도다. 그러니 몸집이 크고 오동통한 형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손바닥만한 크기의 커다란 비늘로 몸이 뒤덮여 있고 그 비늘은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는 아주 이상한 색깔이다. 그 색깔이 너무 이상해서 뭔가 말려 버릴 듯 했다고 한다. 강한 독을 갖고 있어 대적하기가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시일이 지나면 주변 일대의 다른 짐승들을 전멸시킬 수 있을 만큼 무서운 짐승이다. 하늘을 날 거나 적어도 하늘을 날 듯이 높고 멀리 뛸 수 있다. 아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며, 사람을 쉽게 물어 죽일 수 있다.
원문을 보면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니고 살무사(내지는 이무기)도 아니고 뱀도 아니라는 묘사가 있으므로, 아주 이상한 짐승, 신령스러운 짐승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호랑이, 곰, 살무사/이무기, 뱀을 골고루 닮은 점이 있는 짐승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짐승은 태조 이성계의 형 이원계가 이성계와 함께 사냥에 나섰다가 발견되었는데, 이성계는 독이 있을 듯 하여 위험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이원계는 화살로 공격했다가 괴물의 역습을 받았다는 전설 속에 등장한다. 이 전설은 “동패”와 천리대 소장판본 "동패락송"에 실려 있다. 이러한 전설은 실제 역사 속에 남아 있는 이원계의 최후와는 전혀 다르다.
이야기 속에 나온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니고 살무사도 아니고 뱀도 아니다"라는 묘사는 "육도" 같은 중국 고전에서 강태공을 만나기 전에 꾼 꿈 풀이에서 등장하는 어구를 변형한 것이다. "육도"에서 이 말은 아주 신기한 것을 만날 징조가 있는데 그 신기한 것이 보통 희귀한 짐승이 아니라 귀중한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는 그저 아주 이상하고 희귀한 짐승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시를 지을 때, "육도"에 실린 이 표현을 따 와서 훌륭한 신하가 될 수 있는 인재라는 뜻의 비유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때 "곰도 아니다"라는 뜻의 "비웅(非熊)"이라는 말만 따와서 쓰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비웅"이라는 말이 제목으로 어울릴만 하다고 본다. 한편 "동패락송" 원문에는 다른 곳에서는 잘 쓰지 않는 "살무사도 아니다" 즉, "비훼(非虺)"라는 말이 나와 있는데, 이것도 독특해 보이므로 이 역시 제목으로 어울릴 것이다.
* 천리대본 "동패락송"은 18세기 문헌으로 추정되는 다른 판본 "동패락송"과 달리 훨씬 후대에 재편집된 판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므로, 우선은 항목 외로 따로 편성했습니다.
87. 목객 (木客)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동자석, 공공누리1)
"순오지"에는 온 몸이 털로 뒤덮여 있으며 깊은 산 속을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 비슷한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이 이야기는 "안시객" 항목에서 소개했는데, "순오지"의 저자 홍만종은 이 이야기가 중국 고전에 나오는 "목객(木客)"이라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고 덧붙여 써 두었다.
"목객"은 중국 고전에서 깊은 산 중에 사는 희귀한 원숭이 비슷한 것으로 종종 언급된다. "남강기" 같은 글에서는 형체는 완연히 사람이고 높은 나무에 살며 다만 발은 새의 발톱을 가진 모양이라고 되어 있다. 중국 시인들이 깊은 산 속 외딴 곳의 풍경을 읊을 때 "목객이 살 것 같다"라고 쓰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이에 영향을 받아, 고려와 조선의 작가들도 목객이라는 것을 산 깊은 곳에 사는 이상한 요정 비슷한 짐승으로 종종 시에서 "목객"을 언급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기록인 "북관기사"에는 조선에서 충분히 토속화된 구체적인 "목객" 전설이 실려 있다. 여기에 따르면 조선 북쪽 지역의 목객은 백두산 깊은 곳에 산다고 하는데 모양은 완연히 7, 8세된 어린이 모습과 닮았다고 하며 나무를 타고 달리는데 날아가는 듯이 잽싸다고 한다. 사람이 목격한 적도 있다고 되어 있는데, 묘사로 봐서는 작은 원숭이와 사람 어린이의 중간 형태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원숭이 비슷한 이상한 짐승으로는 "산도(山都)"라는 것도 있는데, "고운당필기"에는 저자 유득공이 산도 이야기라고 보아야한다고 기록해 둔 괴상한 이야기가 하나 실려 있기도 하다.
금산에 사는 농부가 아침에 일어나서 외양간을 보니 너댓살 아이만한 귀신 같은 것이 벌거 벗은 채로 소를 타고 앉아서 털을 뽑고 있었다고 한다. 소는 압도 되었는지 덜덜 떨면서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고 하며, 몽둥이를 휘둘러 이것을 공격하자 몽둥이만 빼앗겼을 뿐 이것은 태연히 소털을 계속 뽑았다고 한다. 농부는 소를 괴롭히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소털을 뭉텅이로 삼태기에 담아 놓은 것을 던져 주었더니 그것을 들고 산 속으로 떠나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 울타리 옆에 그 삼태기를 도로 던져 준 것이 있길래 열어 보니, 소털 대신에 산삼이 가득 있었고 그래서 농부는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한 귀신은 조선의 목객 이야기와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 유득공이 이 이야기를 "산도" 이야기라고 했다는 점에서도 목객 이야기와 비슷한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이상한 괴물을 잘 대해 주었더니 갑자기 그 괴물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는 형태의 줄거리는 전형적인 도깨비 이야기와도 통하는 느낌이다.
두 이야기를 합해 보자면, 산 속에 사는 작은 어린아이 같은 짐승이면서 몸은 털로 뒤덮여 있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몽둥이로 공격하면 조금도 겁내지 않으면서 날쌔게 피하면서 오히려 몽둥이를 빼앗을 수 있고 소 위에 앉으면 소를 압도하며 소 털을 뽑는 것을 좋아하고 산삼을 많이 갖고 있는 괴물로 요약해 볼만하다.
88. 월전 (月顚)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얼굴무늬곱새기와, 공공누리1)
"삼국사기" "악지"의 "향악잡영" 부분에 보면 최치원이 "월전"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신라에서 유행하던 춤과 노래를 묘사한 시가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월전"이라는 것은 높은 어깨에 목은 움츠리고 있으며 머리카락 끝은 일어선 모양이라고 한다. 이후 소매를 걷고 술잔을 들고 다투는 모습,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에 대한 묘사와 함께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지치도록 웃었다는 묘사가 있다. 정확히 어떤 장면을 묘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몇몇 학설이 있을 뿐 명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아주 웃긴 춤과 노래가 있었고 그것을 공연하는 웃긴 외모의 이상한 것이 있었던 듯 하다.
비슷한 묘사가 등장하는 고려시대의 이색이 쓴 "구나행"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월전"과 비슷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따른다면, 월전은 아마 서역, 중앙아시아의 외국인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귀신 쫓는 새해 새벽의 행사를 묘사한 시, "구나행"에는 "금천지정(金天之精)"이라는 표현을 써서 서역에서 온 것이 등장한다고 하면서 "혹은 검고 혹은 누런 모습에 눈은 푸른색으로 빛나는데 그 중 늙은 사람은 키는 크면서 허리는 굽었다"라고 묘사한다. "구나행"에서는 이 모습을 보고 사람의 목숨을 다스리는 별인 남극성과 같은 모습이라고 보고 여러 사람이 경탄했다는 말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월전”과 “구나행”이 통하는 것이라면, “월전”이란 아주 웃긴 춤과 노래를 공연해 주는 것인데, 높은 어깨에 목은 움츠리고 있으며 머리카락 끝은 일어선 모양에 키는 크면서 허리는 굽었고 눈은 푸르게 빛나면서, 행색은 검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고, 그러면서 생명을 다스리는 신령 같은 것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좀 넘겨 짚어 보자면, 이러한 “월전"은 신라 사람들에게 "코미디의 신"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싶다.
현대의 연구에서는 향악잡영의 다른 시, "속독"이 소그드를 나타낸 것과 같이 지금의 카자흐스탄 동부 지역과 겹치는 "우전(于闐)"국이라는 나라를 "월전"이라고 표현했으며, 이 내용은 우전국 출신 사람의 웃긴 춤과 노래를 따라한 것이라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 웃긴 가면을 쓰고 춤과 노래를 보여 주는 것이라는 학설도 있고, 일부러 키가 작은 척 하는 동작을 표현한 공연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한국 지역에서 고대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일본의 "고토쿠라쿠(胡德樂)" 춤과 통하는 것 아니냐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세부 사항은 알 수 없다.
그만큼 사람을 웃기는 것은 명쾌하고 알 수 없다는 뜻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래는 "향악잡영"의 "월전" 전문이다. 연구들 중에는 이 시에서 밤새 휘날리는 깃발을 묘사한 대목을 술 마시는 놀이를 하는 장면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시 속의 팔을 걷은 여러 무리라는 대목을 두고 선비들을 조롱하는 장면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여기에 진정한 코미디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肩高項縮髮崔嵬 어깨는 높고 목은 움츠렸는데 머리카락은 꼿꼿이 솟은 모양
攘臂羣儒鬪酒盃 팔을 걷은 여러 무리 있으니 술잔을 다투는구나
聽得歌聲人盡笑 노래 소리 듣고 나서는 지치도록 웃고
夜頭旗幟曉頭催 밤에 세운 깃대 깃발은 새벽이 되도록 날리누나
89. 오금잠신 (烏金簪神)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용궁부인도, 공공누리1)
"남명선생별집"의 "김성암유사"에 따르면 삼척 지방의 풍습으로 검은 색의 금 비녀를 신령으로 여기면서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비녀를 백겹으로 싸서 보관해두었다고 되어 있다. 19세기 이후의 기록인 "척주선생안"에서는 혼례가 있는 집에서는 특히 아름다운 비단으로 모습을 만들어 신령에게 입힌다고 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말도 보인다. 조선 초기의 "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의 "척주지"에는 매년 단오에 이 신을 숭배하며 크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비녀가 고려 태조 시절의 유물이라는 설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목민심서"에는 검은 금 비녀 신을 "오금잠신"이라고 표기하여 그에 대한 풍습이 안동에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삼척의 오류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오금잠신이 신라 공주라고 믿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단오가 되어 굿판이 벌어지면 무당과 광대들이 이끄는 굿 행렬이 생기는데 그 무리를 "단오사(端午使)"라고 부르고 있다. 단오사에 제물을 바치며 돈을 쓰다가 파산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되어 있다. 단오날 삼척의 굿판을 시로 묘사한 것이 "망미록"의 "오금잠가"에 나와 있는데, 이에 따르면 오금잠신의 말을 전하는 나이 많은 무당은 화려한 옷을 입고 행렬을 이끌고 있으며 커다란 머리 장식에 큰 부채를 들고 춤을 추며 악사들은 생황과 퉁소로 슬픈 노래를 연주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꿇어 앉아 앞다투어 돈을 바쳤다고 한다.
정리해 보자면, 오금잠신은 신라가 멸망하던 무렵의 신라 공주를 여신으로 숭배하는 것으로 삼척 지역에서 단오날 열린 여름맞이 축제의 주인공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동해안 지역의 잘 알려진 단오제, 단오굿과 비슷한 풍속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모습은 검은 빛의 금 비녀 모습인데 그러면서도 아름답고 화려한 비단 옷을 여러 겹 입고 있으며 커다란 머리 장식을 하고 있고 큰 부채를 든 모습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단오사"라는 무리들은 그 오금잠신이 이끌고 다니는 부하 내지는 신도들이다.
"오금잠가"에는 사람들이 믿고 있던 오금잠신의 힘을 묘사하면서, "산상강액(産祥降厄)이 모두 내 권세다" 즉, 행운을 낳고 액운을 내리는 것이 모두 자기 권세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미수기언"의 기록에 따르면 이 굿 기간 동안에는 장례를 할 때 곡을 하지 않았고, 나그네를 재우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신이 노할까 봐 슬픈 일이 생겨도 슬픈 척하지 않아야 한다는 금기가 있었고, 또한 이 기간 동안 외부 사람은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대체로 삼척 사람들이 이런 신을 믿으며 단오의 여름맞이 축제를 크게 벌였는데, 미신이라고 하여 관리들이 금지시키거나 축소시킨 사례에 대한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 많은 편이다. 삼척 지역에서 나무로 만든 조각상을 숭배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비녀와 함께 그 비녀의 신을 나타내는 나무 조각상이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90. 파상마립자 (波上馬立者)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동물형토우, 공공누리1)
"열하일기"에 수록된 "상기(象記)"라는 글을 보면, 저자 박지원이 새벽 즈음으로 추정되는 시각에 동해에 나갔을 때 바다 멀리 파도 위에 꼭 말처럼 서 있는 커다란 것이 있었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은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게 물고기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하늘을 향해 우뚝하니 서 있는 모습은 집채 같이 컸다.
사실 이 글 “상기"는 코끼리에 대한 글인데, 박지원은 나중에 코끼리를 처음 보았을 때 바로 이것을 본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니 코끼리와도 닮은 느낌이 있는 짐승일 것이다.
박지원은 해가 뜨면 자세히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그 전에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하여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이상한 것처럼 기록해 두고 있다.
다시 정리해 보자면, 이것은 거대한 코끼리 같은 느낌을 주는 짐승인데 바다의 파도 위에 서 있을 수 있으며 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무리지어 떼로 다니는데 서 있는 모습은 말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짐승인지 물고기인지 애매한 모습으로 동해에 살던 것이다. 도대체 박지원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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