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가 있던 자리
양달준
햇불을 들고 찔기미를 잡으러 뻘밭을 쑤시고 다니셨던 아버지는
어느날 큰끝에 절벽으로 가 햇불을 잡고 계셨다
목선을 타고 먼바다에 나간 형은 그 불을 보며 수월하게 배를 몰았다
바닷물이 빠진 저녁이면 나와 누나는 햇불 아래 뻘 밭에서 찔기미를 잡았다
바켓스에 찔기미가 거품을 물며 넘치는 날은 큰끝에를 쳐다보며
아버지 보세요 이렇게 많이 잡았어요 하면
햇불은 알았다는 신호로 끄덕끄덕 불빛을 우아래로 비추었다
햇불은 시커매지고 성한대가 없었다
불 빛도 희미해지더니 아에 꺼져버렸다
아버지의 불빛을 보며 뱃머리를 바로 잡았던 마을 사람들은
더 큰 햇불을
바다에 떠있는 바위에다 세웠으며
햇불이 있던 자리에는
아버지의 봉분이 생겼다
봉분이 있는 자리,
원래는 아버지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던 자리다
ㅡㅡㅡㅡㅡ
안개
양달준
새벽은 늘 선잠이다
비빈 눈을 크게 뜬 사내
1톤 트럭 핸들을 잡고 도로를 달린다
가시거리가 짧은 길은 위험이 안전하지 않다
계기판이 좁아진 시야를 감지하고 비상등을 깜박이자
도로 표지판이 적색 경고를 알린다
급하게 휘어진 커브에서 길을 놓친 사내
안개가 점령한 도로는 절벽이다
그가 걸어온 날들은 늘 그랬다
단속반의 호루라기 소리에 노점을 철수할 때도
그의 앞 길에 빨간불이 켜지고 방향을 잡지 못했다
새벽 청과 시장,
잠시 쟁여 있는 상자들
거주자가 수시로 바뀌는 임대 아파트 같으다
저 상자들은 어디로 가 터를 잡을까
바늘 구멍 같은 도시에 자리를 잡고
과일 박스를 앉혀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내
익숙한 고민도 잠시
짐이 실리고 끙끙대는 바퀴
하루치의 무게를 짊어진 그가
안개의 성벽을 네비에 찍는다
부릉부릉
ㅡㅡㅡㅡ
눈길
양달준
간밤에 첫눈이 내려
온산이 하얗다
여느 때처럼 등산화를 단단히 신고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한참을 걷다
뒤돌아 보니
삐뚤어진 발자국
도장처럼 찍혔다
아,
이적지 모르고 걸어왔던
시커먼 발자국
눈내리지 않았다면
어디 까지 걸어갈 참이었을까
ㅡㅡㅡ
집으로 가는 길
양달준
사막은 고단하지만 다녀오는 길은 아름답지
지는 해가 짜놓은 석양은 빛깔 고운 와인
사막 능선에서 낙타와 배두인은 포도주 한 잔에 젖어 숨을 고른다
불모지의 사막 능선은 미술관
석양 낙타 사람이 조합하여 그려진 한폭의 그림틀은 고흐도 고갱도 붓질을 못한
지상에서 가장 솔직한 그림이지
하루를 횡단하고 돌아오는 언덕에서
지는 해가 부어놓은 다홍빛에 노고를 푸는
낙타와 배두인
모래밭은 거칠어도 집으로 가는 길은
가벼웁고 보드랍지
동물이나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지
ㅡㅡㅡㅡ
모래내
양달준
무작정 걷다 정부치며 살았던 옛까지 왔네
가좌역에 잠시 서있는 열차를 보며
사천교에 서서 젖어드네
이동네 사람들은 사는 일이 버거워서
저녁의 별들이 반짝여도 고개 젖히고 볼 일도 없었네
그래도 살아보자며 갯천가 모래밭에 터를 잡아
무허가 단속반에 차이고 치였던 빽없는 인생들
하룻 밤 자고나면 한 삽이 사라지고
또 한 삽이 사라지고 누가 퍼다 버렸는지,
다들 어디로 가 사는지 가슴 저미어
쓴 쇠주 한 잔에 하많은 날을 곱씹었던
닭내장 그 식당에서
남루했던 옛날을 짚어보는데
아득하여 아득하여 잊혀진 얼굴들이여
모래주머니 같은 곳에 살다 흩어진 이들이여
해뜨면 벌기위해 반짝이며 시멘트 반죽에 섞여
기초를 다졌던 모래 알갱이들이여
안녕하신가
자,
한 잔 하시게
ㅡㅡㅡㅡ
개살구 그 푸른 말씀
양달준
1
좌판에 팔다 남은 살구 한 알을 쪼개본다 아픈 기억이 씨처럼 불거진다 아부지가 생전에 심어 놓았던 살구나무는 해마다 꽃보다 먼저 가난을 마당에 터트렸다 봄이면 빚쟁이들이 찾아와 살구나무를 쳐다보며 화풀이를 하다 우리집 문패를 개살구집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가장이었던 형은 살구나무 그늘에서 청춘을 타작했다 이꼴 저꼴을 살구나무에서 본 어머니는 살구꽃 대신 종이꽃 휘날리며 먼 길을 떠나셨는데 그럼에도 나는 열매를 달고 서있는 살구나무를 보며 풋살구가 익어가는 빛깔로 철들었다
2
어느 해 부턴가 살구나무는 허리를 지탱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도 때마다 열매를 맺어 장년인 나에게 내주었다 나는 살구를 팔아 입에 풀칠을 하는데 사람들은 입맛만 다시다 빛 좋은 개살구 그 듣기 싫었던 말을 뱉어 놓고 간다
그러나 살구는 신맛으로 꾸짖던 내 엄니의 푸른 말씀 내 아버지의 거룩한 유산이었기에 감추고 싶지 않아 쪼갠 살구를 입에 대본다 가득 고이는 신맛 과일장수 나에게 유일한 이문은 개살구 그 푸른 말씀이시다
ㅡㅡㅡ
텃 밭
양달준
이제 일어나 삽처럼 펜을 들고 내안의 시를 파종하여
푸르게 경작해야 겠다
ㅡㅡㅡㅡ
범종
양달준
저물녘 절간에서 퍼지는 소리
아프다
둥글다
아픔이 둥글어 더 멀리 굴러가는 소리
재너머 농가로 팔려간
어린 짐승을 못 잊어 우는
어미소
외양간
그 울음이다
ㅡㅡㅡㅡ
꽃송이 광어
양달준
산소를 공급 받은 수족관
공기 방울 들이키며 납작 엎드러 있는 광어
바다로 가고 싶을 거다
서울 병원 침대에 산소 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던
물고기 한 마리
싱싱한 지느러미로 물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남쪽 바다로 가고 싶어 몸부림쳤다
저 활어,
칠성판 같은 나무 도마우에 올려지면
숨을 거뒀다는 것인데
도마우에 뱃가죽이 하얀게
흰천으로 덮어 놓은 어떤 죽음 같어
저걸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시퍼런 회칼이 보기좋게 꽃송이를 만들어
다시 태어났다
그해
환하게 마당에 핀 살구꽃
바다로 가고 싶어 했던 한마리 물고기 였다
ㅡㅡㅡ
극락 강역
양달준
극락 강역 낮은 지붕에도 지는 해가 넘어간다
석양이 허리를 풀어 극락 강에 비단을 깔아 놓으면
누가 저물었다는 징조
꽃다운 승객이었다지
운구 행렬을 길게 달고 도착한 열차를 두고
역은,
극락으로 가는 극락 강 문을 열었다지
역무원의 거수 경례를 받으며
강으로 떠나는 오동나무 상자를 지켜 보았다지
하지만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역 답게
유서 없이 강으로 들어간 이들에 흔적은
무성한 억측뿐이어서 더 비밀스런 역
그러나 극락으로 가는 길은 아무나 탑승할 수 없다는 것을
기관지가 헐어 가쁘게 강을 건너고 있는
저 늙은 열차는 알고 있는가
안부로 부치는 기적 소리에
지는 해가 답장으로 물들었는데
극락으로 가는 길목에서 떠나지 못한
저문 잎 하나가 나부끼는
극 락 강 역
수심에 찬 강의 문을
잡아 당긴다
ㅡ극락강역(광주 광산구 신가동에 있는 역)
ㅡㅡㅡ
폭탄 쎄일
양달준
재래시장 옷가게 스피커에서 단 하루
왕창 무너진다는 다급한 소리가 들린다
저 숨넘어가는 소리에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장바구니 들고나온 아줌마들이 술렁인다
주인은 가게 바닥에 폭탄을 수북히 쌓아놓고
속보를 전하느랴 입에 거품을 문다
마이크를 통해 폭탄이 팡팡 터진다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쳐다 볼 수도 없던 벽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폭삭 주저 앉은 잔해더미에서
여자들이 뒤엉킨다
널부러진 파편을 뒤집고 파해치는 닭발들
통통 튕기는 손으로 원피스 한 벌 뽑아
거울 앞에서 모델처럼 뽐내는 얼굴에 윤기는 없지만
미소가 주르르 흐른다
살아간다는 것
폭탄이라도 가끔 떨어졌으면 좋겠다
팡팡 터질수록
즐거운 폭탄
ㅡㅡㅡ
백수의 이력서
양달준
거실 구석진 자리에 수석 한 점 바다에 떠 있는 섬 같으다 저 돌을 보면 우층에 사는 백수 생각이 난다 등대도 뱃고동도 갈매기도 없는 척박한 섬 나한테도 있다며 담배 연기로 뱉으던 그는 부쩍 식구들이 해일을 일으킨다며 그렇다고 피하거나 쓰러진 일 없이 무덤덤 했다는데 다만 돌의 성질로 굳어진 섬도 가슴은 있어 울기도 했고 뭍으로 나가 사람답게 살고도 싶었을 거다 그러고 보니 우두커니 앉아 시간만 갉아 먹다 저무는 앉은뱅이 저 돌이 그의 이력이다 일자리가 생기면 이력서 대신 저걸 들고 가라 해야 겠다 여기저기 보이는 파도 자국은 그에게 있어 화려한 과거 아니던가 당장이라도 종이 한 장이면 될 것을 섬 하나 등에지고 일자리 보러 갈 백수씨 남들은 이력이 가벼워서 탈이라는데 그는 무거워서 병 그 또한 경력으로 칠 것인데
혹시나 돌,
대가리로 찍히면 어쩌나
ㅡㅡㅡ
가을 역 근처 폐가
양달준
다시 가을
버려진 것들은 죄다 아프게 보이지
푸석푸석 결핵환자처럼 누워 있는 양철지붕이
늑골이 나간 담벼락에 허리를 지탱하고 있는 감나무가
급하게 달려온 바람이 문고리를 흔들어도
기척 없는 폐가는 더 그렇지
한 발 건너 간이역에서 무시로 들리는 기적소리는
저들을 더 초조하게 만들지
하지만,
기적소리는 사람이 온다는 기별
그래서 감나무는 기다림을 익히고 또 익혀
홍시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인기척 없이 또 하루가 다갈 무렵
풍경이라면 더 좋고
쓸쓸하다면 쓸쓸한대로 좋은
가을역 근처 폐가
아픈 양철지붕으로 번지는
그리운 빛깔 노을은
먼 곳에서 보낸 소식이겠다
ㅡㅡㅡ
똥
양달준
말들이 초원의 풀잎을 뜯어 잡수는건 한 끼니 식사뿐이다며 우기는 당신은
잘 모르는 말씀,
뗄감 나무가 없는 몽골 유목의 마을
풀잎이 말들의 배를 채우고 말들은 풀잎을 삭히고 삭혀
한덩어리 똥을 배설하면
눈이 순한 여자들은 그 똥을 소쿠리에 모아
저녁의 뗄감으로 불을 지핀다지
한덩어리 말 똥이 노을보다 더 진하게 타오르면
사람의 밥은 따듯해지고
손님을 대접하는 차 한잔은 넉넉해
유목민들은 말들과 끈끈한 유대를 지키고 사는데
고약한 인간의 똥보다 더 착한
짐승의 똥
냄새 한 번 맡으고 싶으다
ㅡㅡㅡ
낙타
양달준
어둑해지는 하늘에 별 한 점 반짝인다
모래산 너머
저 먼 곳에 저녁 별은
푹푹 빠지는 사막지대를 걸어서 우주까지 당도한
낙타
길을 만들며 걸었던 길을
무릅 꿇고 꿈벅꿈벅 내려다 보는
낙타
사람들은
밤하늘 종착지 낙타를 보며
희망을
쓰기도 하지
ㅡㅡㅡ
달팽이
양달준
별명이 달팽이었던 시절
늘어 터진다는 놀림때문에 무공해 별명을 시궁창에다 차 버렸다
틈이 벌어진 아스팔트
시커먼 개미들 들락날락 난리통인데
틈 사이 풀잎에서 꾸물대고 있는 달팽이
달팽이는 느림의 원조
그래서 낙오자로 지목 당할까
낙오자의 아픔은 발견을 통해 아물기도 한다는데
나는 달팽이 세계에서 이탈하여
공장의 기계처럼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데
맹수의 대열에 합류 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 별명을 달팽이로 한다면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움막 한 채 달랑 짊어지고
국유지든 사유지든 간섭없이 들어가
푸른 풀밭에서 엉금엉금 살고 싶은데
늦었다
내 이름도 때가 많이 타
행구지 못할 것 같으다
ㅡㅡㅡ
수인선 철길 시흥구간
양달준
열차가 철길을 버렸을까,
열차 대신 수인선 철로 시흥 구간에는 계절이 왔다 가고
다시 눈발이 도착했다
이 철길의 종착지는 소래포구 지나 제물포
그러나 철로가 녹슬어 연인들이 해종일 머물다
폐염전의 마을로 돌아가는 곳
어디선가 기적 소리 들린다
협궤열차가 덜컹대며 달려 오는 갑다
칙칙폭폭칙칙폭폭 열차는 희미한 옛 이야기
철 길은 뻗어 있어 여기에 발디디면
그리움 하나 저 철둑 너머에 있다
칸칸마다 소금 가마니를 싣고 달려가는
열차 꼬리를 보며
도시로 가버린 엄마 찾아
은하철도처럼 뿌앙뿌앙 달리고 싶었던 시절이 있어
콧잔등이 시려지는데
그때처럼 눈발 휘몰아치고
아아,
열차도 엄마도 오지 않는 수인선 철길 시흥구간
유기견 한 마리
철로를 서성이고 있다
ㅡㅡㅡ
심원 마을
양달준
문풍지 틈새로 송곳 바람이
폐부까지 파고들던 밤,
나는 이리 추운 냉골에서 잘 수 없다며
첩첩 산골 골바람을 피해
정령치 고개를 아슬아슬하게 넘어
온천마크가 빨갛게 보이는 읍내 여관을 두둘기며
서울 사람 행세를 했는데
다시 가고 싶으다
은하의 열차가
푸른 별 하나
가슴이 따습도록 뜨거운 별 하나
수많은 뭇별들을 칸칸마다 태우고 달려와 부려놓은
하늘 아래 첫 동네
거기 가고 싶다
ㅡㅡㅡ
재즈바 여인
양달준
밤이면 밤마다 춤추는 여자
오늘밤엔 색소폰 소리 더 구슬프게 흘러 내린다
사랑이야 이별하면 그만이지만
두고두고 아픈게 상처라지
사랑해서 아팠고 이별해서 아프다는 여자
파고들 남자 품이야 없겠냐만은
순정은 남아 있어
거울 보며 혼자 춤추는 여자
젖어 있는 마스카라가 조명 빛에 들통난
애처로운 콩새 한 마리
창 밖에 겨울 비 나린다
비에 젖은 마음 둘곳 없어 술병에다 채우면
사랑도 이별도 옛이야기
추적추적 부질없이 뿌린다
이별이 여자를 두고
가버린 날도
찬비 혹독하게 나렸다지
ㅡㅡㅡ
아내의 자전거
양달준
자전거에 타고 일나가는 아내가
바퀴에 바람이 빠져 다리가 힘들다던 때
빵구난 바퀴처럼 한자리에 주저앉아
헛바람질만 하는 나를 보는 일이
더 힘드는 것 같아
바람빠진 바퀴를 끌고
삼천리 자전거포에 갔네
빵빵하게 바람을 넣다 보니
닳고닳은 두 바퀴가
우리집 앞 날을 짊어진 아내의 신발 같아
가슴 저미었네
그래도 진짜 바람 한 번 제대로 넣고
뿌듯했던 시절
머언 옛날인데
아직도
풍차처럼 돌고돌아 알전구에 불을 켜는
신발이여
두 바퀴여
ㅡㅡㅡ
감나무 밭 하루
양달준
까치가 좋아하는 대봉시는
깡통이 질러대는 소리로 익어간다
시끄러운 소리는
틈을 노리는 적을 묶어 두는데 적중한다
그 사이 시퍼런 감은 붉어진다
그럴수록 입맛을 다시는 까치
느슨해진 허공은 기회
감나무가 가늘게 흔들린다
흔들린 만큼 깡통은 아프게 두들겨 맞는다
까치도 양심은 있어 방향을 틀어 포기 한다
올해는 까치 피해도 덜해 좋다만
중얼대며 일손을 터는 사이
과수원 너머 서산에
하루 종일 벌겋게 익은
홍시 한 개가
값도 안쳐주는
서울 쪽으로 기울고 있다
ㅡㅡㅡ
숏타임
양달준
해지고 마음 둘곳 없는 해안가에서
갈 곳은 여인숙뿐이었네
하룻밤의 거처는 칙칙하고 눅눅해
얌전하게 잠들 수 없었네
나무 창문 틈새를 쑤시고 들어오는 유혹의 바람에
분홍 캐시밀론 이불을 자꾸만 뒤척였네
징역살이 같었네
다오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어둠의 바다를 바라 보았네
거칠게 부는 바람에 알몸을 맡긴 바다는
거품을 물며 파도쳤네
바람,
내 스스로 감당 못해 뻐근해진 아랫도리에도 불었네
불쑥 들어와 꼬리 없이 불었던 미지근한 바람
늦바람으로 다시 불자는 약속도 없이
선창가 등대불을 피해 에돌아 갔네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 바람
비릿한 바닷가에 가면 생각나네
여씨 성에
인숙씨
ㅡㅡㅡ
그리운 실패여
양달준
사랑은 그때 절단 났다
도적처럼 한 여자 끼고
부석사 무량수전 보러 갔던 스무해 시절
오밤중 농간 때문에 절마당에 발도 들여 놓지 못하고
부처님 대신 데려간 여자 앞에서
싱거운지 짠지 간도 모르고
정신팔린 수저질은
나에게는 실패의 첫 길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며 공을 드려야
여자도 생기고 사랑도 만들어진다는
부석사 법문 같은 밥 집 말씀
한귀로 듣고 한귀로 까먹은 그날의 나는
많은 세월을 멀리 했다
다시는 갈 수 없는 부석사여
그리운 실패여
어둠이 적막하여
풍경소리 하나 둘 뜬밤을 보냈던
사랑이여
부디,
ㅡㅡㅡ
1983년 가리봉
양달준
공돌이 공순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살던
가리봉이
진화를 거듭해 가산동으로 변했네
미추리들이 낄낄대던 약속의 장소 오거리는 그대로
변한게 있다면 주변을 색칠해 펫션의 거리라 하는데
꽃무늬 수놓던 여공 안자는
촌스런 이름을 바꾸겠다던 입버릇은 고쳤는지,
같은 주소 같은 번지에서
봉숭아 꽃물 들이던 애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문맹들만 모였던 가리봉은 디지털 단지로 변해
미싱 박던 아가씨들은 떨어진 꽃잎처럼
가뭇없이 흩어졌지만
구닥다리 시절
아날로그 공중 전화로 약속을 정하고
포장마차 불 빛 아래서
두 사람이 그림자 한 개를 만들었던
그때를 잊지 못하지
삶은 침침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죄가 되지 말자던
가리봉 그밤을
ㅡㅡㅡ
담쟁이
양달준
내 몸에 달싹 붙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푸른 줄기
그것을 그대라고 치자
그대 매일 매일 어린 잎을 경작하여
삼각 탑을 올렸네
푸르른 노동은 나를 밟고
한단 한단
꼭지점을 만들어 나를 가두었네
사랑은 불멸 그징표로
이집트 여왕이 잠든
사막의 피라미트를 만들어
나를 묻었네
천년 만년
나를 지켜보겄네
ㅡㅡㅡ
소주병
양달준
아파트 마당 분리 수거통에
빈 병을 던지는
아줌마
빈둥대다
모가지 잡혀
투명했던 자존심 마저 깨지는
이 시대의 강제 퇴직자
쨍그랑
아프다
ㅡㅡㅡ
민들레
양달준
애야
여기는 이제
옥토로 가꾸었으니
저 멀리
척박한 땅으로 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거라
ㅡㅡㅡ
엽서
양달준
녹슨 철길을 끼고 도는 강가에 나룻 배는 지금도 고요만 한 짐 태우고 있겠지요,
이 기별 받으시면 세느강으로 오시어요
쇼팽이 피아노를 치고 비틀즈가 다녀 갔던
밤중이면 뭇별들이 내려와 염전처럼 반짝이던
강 언덕 거기
저 먼저 달려가 회양목 창가에 열아홉 순정같은 홍차를 시켜놓고
강을 건너오는 바람소릴 읽으며 기다리겠어요
이왕이면,
해 종일 잠기다 지칠 때쯤 노을빛으로
마주했으면 좋겠습니다
ㅡㅡㅡ
억새꽃
양달준
건조한 벌판
부는 바람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억새꽃들
저 집단은
키르기스스탄 유목의 마을에서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양떼들
한 철 살다 떠나는 방랑의 길
깃털을 들쑤시는
싸늘한 바람도
보드랍다
ㅡㅡㅡ
사춘기 바로 잡기
양달준
못은 망치질을 차분하게 해야 제대로 박힌다
성질 급하게했다가는
핑소리를 내며 엉뚱한 곳으로 튕기고 만다
ㅡㅡㅡ
아가꽃 봉분
양달준
평생을 들에서 일만하셨던 우리 엄니가 이다음 세상이 있다면
들꽃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더니
어머니 무덤에 애기똥꽃 피었다
ㅡㅡㅡ
운주사 와불
양달준
천년을 누워 있는 와불 앞에서
순간이라도 새빨간 욕심 빌지 마라
너 욕심을 들어주는 와불이라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기적을 볼 수 있으리
기적은
지구 밖에서나 생기는 것
보이신다
부질 없는 욕심은 등짝으로 누르고
근심 걱정만
가슴으로 받아 드리는
그래서
일어날 수 없는
몸이시다
ㅡㅡㅡ
낙화
양달준
백마강에 연분홍 꽃들 투신했다
마음을 비우고 얼굴을 가리고
가벼히
수 천년의 전설
삼천 궁녀가 몸을 던진
그 누구도 수심을 알 수 없는 시퍼런 강물이
추락하여 멍든 꽃잎을 데리고 간다
꽃진 자리에 이름 모를 재즈 가수가
이별을 한탄한다
청춘을 방탕으로 탕진한 노래
사랑도 맹세도 절정도
부질없어라
추락하는 저 꽃들
절벽도 손 놓고 있어
재너머 뻐꾸기
아프게 운다
ㅡㅡㅡ
감나무 하네 그리고 나 셋이서
양달준
감식초 군번 땡감나무에 이파리 한개라도 없어 질 때마다
골목대장이라는 이유로 따 먹었다는데
그 집 앞에서 장난치며 놀던 날이었던가 영감이 염치좋게 날 부르더니 들고 있던 간지대를 툭 던지며 못따겠다는데 아따 하네도 못딴 감을 나가 어츠께 딴다요 잉 그래도 따보라는데
뒤집어쓴 일이 어저께 같아서 그라믄 하네는 소쿠리 들고 주서담으씨요 잉 손에 힘을 있는대로 써서 간지대를 휘두르며 나가 언제 따묵디야 따묵디야 맷맛하냐 맷맛하냐 감나무 한테 따지자 끄터리가 삐쭉한 땡감들이 소쿠리 들고 쳐다보고 있는 하네 볏겨진 머리로 우박에 질새라 툭툭 떨어지고
나는 싸게싸게 말해 나가 그라디야 안그라디야 감나무를 족치고 하네는 아이구메아이구메 도팍같은 감새끼들이 감새끼들이 잉잉 오마오마 니는 먼소락때기를 모락스럽게 쓴다야 하네는 머리에 쌩피가 여러군데 찔금찔금해 수건을 붕대처럼 칭칭 감았다
저녁 무렵 우려서 먹으라며 아짐찮게 준 땡감 한 바가지 들고 오면서 생각했다 성할랑가 몰라
ㅡ하네(할아버지) 전라도 고흥 사투리
ㅡㅡㅡ
벚꽃 오후
양달준
낚시터
매끈한 잉어 한 마리 저수지 수면 위로 튄다
가출이다
잠잠하던 물이 파장을 일으키며 그물을 쳐
다시 들어간 잉어를 가둔다
사단이 난 저 풍파는
누구나 한 번쯤은 비밀로 해보고 싶은 일이다
콜라택이었는지 숨겨둔 남자쪽이었는지
바같으로 튀었다 다시 들어간 이웃 집 여자는
저 물고기와 같은 처지
그 여진이 상당한지
이웃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지 못했다는
후담만 무성해 행방이 궁금한데
밖에서 보자며 던져 놓은 미끼줄에
타전을 기다리는 낚시꾼
벚꽃이 조급해 진다
ㅡㅡㅡ
칠월
양달준
궂은날이었지
떨어진 빗물 흩어지는 바닥을 보며
비 그치면 우리도 그럴거라는 사실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그날의 비는 예보하고 있었던가
무겁게 입다물고 눅눅했던
우리 사랑 결별을
그때처럼 구름이 으르렁대고 장대비 쏟아진다
삭신이 아프고 몸이 쑤신다
오십견이라는 진단에 물리치료가 처방이라지만,
우기철이면 도지는 통증
그녀가 나를 관통하여
마음이 아픈거다
ㅡㅡㅡ
옛 사랑
양달준
능금을
좌판에 진열하려고
목장갑으로 쓱쓱 닦았다
누군가의 입술처럼
도톰하고 빠알간 것
문득
옛 여자 생각 들어 한 입 깨물었더니
핑돌던
그 첫 키스 같은
단 맛
맛있어
묻는 소리에
가슴이 덜컹했다
ㅡㅡㅡ
간고등어
양달준
싸락싸락 싸락눈 소리가 들린다
저 결정적 소리는 생선가게에서 소금 뿌려
간을 하고 풀을 죽이는 일이지
성질이 지랄이었던 나는
검푸른 심해를 휘젓고 다녔던 한마리 고등어였다
그러나 등푸른 시절 오래가지 못했다
한 여자 그물에 걸려
그가 뿌린 소금에 풀죽었으므로
그 입맛에 든 간고등어로 살고 있으므로
그나저나
생선가게서 휙휙 뿌리는 마술에
보기좋게 포개지는 고등어 두 마리
당신과 나 같으네
싸락싸락 눈뿌리던 그 밤
꼿꼿한 지느러미를 포기하고
나란히
같이 누웠던
ㅡㅡㅡ
다리미씨 세탁소
양달준
지난 어제도 구겨진 바지 대신 술병 들고온 화상들
골목 세탁소는 페업 직전이다
다림질로 먹고 사는 세탁소 다리미씨
바람난 여자 야밤 도주하고 앞날이 꼬이더니
다리미 잡어야 할 손이 술병만 잡고 있어
다리미가 열받았는지,
작업대에서 스팀을 연거푸 뱉어내고 있다
희뿌연 한숨 같기도 한데
그가 그만두지 못한건
다 이유가 있다지
구겨진 여자 제대로 다려 걸어두고 싶어서
수소문 중이라는데
다리미 판에서
시커머케 타는 흰 와이셔츠
타들어가는
그의 가슴팍이다
ㅡㅡㅡ
께냐
양달준
당신에 다리 구실을 했던 왕대나무 지팡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불어요 구멍이 숭숭 뚫린 대나무에서 신음이 흘러나와요 관절이 안 좋아 다리뼈가 쑤시고 아프다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럴수록 나는 손마디가 떨리고 호흡은 험준한 고개를 넘어 고산지대에 들어서기도 해요 생을 마친 사람에 정강이뼈로 만들어 불었다는 잉카의 나라 악기처럼 당신이 두고 간 왕대나무 지팡이로 만든 피리에다 내 입술을 대고 인공 호흡을 하면 둥근 무덤에 뚜껑이 열리고 어느 영혼이 슬픈 음악을 주문해요 그럴 땐 나는 악보를 따라 찬 숨을 들이키며 당신의 몸 한 부분을 따습게 잡고 전설을 불어요 그러면 콘도르 한 마리가 마추픽추에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여기까지 날아와 창공을 날다 가파른 협곡으로 날개를 틀어 저녁 바람을 재우며 빙빙 돌기도 해요 내 입술에 힘이 부칠때 까지 우리는 하늘과 지상에서 곡예를 해요 측백나무만한 인디오 여인 구멍난 다리뼈 그 까닭을 짚으며,
ㅡ께냐(죽은 연인의 정강이 뼈로 만든 잉카의 전통 악기 피리)
ㅡㅡㅡㅡ
어떤 평화
양달준
노점상들과 단속반들이 대치중이다
잡초는 짓밟혀 비벼진대도 다시 고개를 쳐들어야 잡초라며 끝까지 버티자는 사람들
저것들은 보도블럭에서는 클 수 없다며 뽑아야 한다는 관할 용역꾼들
밀고 당기는 팽팽한 긴장속에
정오의 해가
다 같이 먹고 살자는 일에 일단은 점심이나 들고 보자며
카드를 꺼내들자
대치를 풀고
그늘을 찾아 도시락에 열중하는
저,
느긋한
평화꾼들
ㅡㅡㅡ
바람부는 날에 배를 타러 그들은 그곳에 간다
양달준
바람이 검문하여 출항을 금지 당한 구릿빛들 조업에 차질이 생기면 방파제 같은 꽃마담 선술집은 저들이 거쳐가는 곳 하지만 바람은 그곳에도 분다 일기예보를 빗나간 치맛 바람
누가 저 비릿한 바람을 두고 바람불어 좋은 날이라 했던가 크라스에 바다를 퍼다 마셔도 모자랄 뱃사람들이지만 눈을 흘긴 마담의 알랑방구에 맛이가 끝장을 볼참이다 한물간 뽕작은 갈때까지 가보자며 삼각 스텝까지 질러댄다 그래 씨발 제대로 한 번 놀아보자 우리같은 뱃놈 들이 불알 빼면 뭐있어 배타는 일에는 선수라는 이가 마담에게 눈빛을 주며 좆팔 배는 무신 오늘 못타믄 사람꺼라도 타믄 탄건 똑같은 거여 고것도 요런날 타믄 죽지죽어 그말이 무슨 말인지 저들은 잘안다
배에 올라 탄다는 말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다는 건가만다는 것인가, 저들만의 유행어 같은데 어차피 뱃놈소리 듣고사는 마당에 저정도 호기는 있어야지 저 배를 탈까 이배를 탈까 술맛 걸죽한 저물녘 만선호 흰깃발은 바람의 속도를 재느랴 펄럭이고 항구는 풍랑으로 과부 치맛끈처럼 단단히 묶였는데
누가 초저녁 부터 배로 올라탄다
앗,갈매기다
선수는 선수다
ㅡㅡㅡ
소하동에서
ㅡ기형도를 생각하며
양달준
냇가에 느티나무가 아침의 햇살을 받아
잎을 키우며 살았던
뚝방촌,
소식도 없이 고속철도 역이 생기고
쓰러지는 낮은 지붕들에 신음을
포크레인이 퍼다 버려
원주민들은 먼지로 흩어졌지만
가뭇없이 가버린 한 사람의 흔적은 남아 있어
안양천변에 개망초들이 해마다 찾아오지
별들도 저무는 밤중이면
숲속의 자작나무들이
흰 눈을 뜨고 지켜주던 뚝방에 앉아
샛강에 푸른 잉크를 뿌리며
가난한 날들을 기록하였을
안개의 시인
그는 먼저 갔으나 알고 있으리
개발 앞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뚝방촌의 절망을
다시 또 찾아와 희망으로 만발하는
들꽃들을
두 눈뜨고
지켜보고 있으리
ㅡㅡㅡ
올챙이 같은 누나
양달준
배에 복수가 차 임산부처럼 누워 있는 누님을 보며 해산날이 언제냐고 농을 건넸다 이 나이에 아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 그말이 가루약처럼 쓰디쓰게 들렸다 지금 한 여자의 몸 안에는 복수 꽃 한창이다 그꽃 보러 여럿 다녀갔다 사람들은 꽃이 얼마 못 가 시들 것 같다며 조의금 같은 흰 봉투를 두고 갔다 채칵채칵 시계 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불씨마저 꺼져가는 시간 가망이 없다지만 손을 써봐야지 작은 조카는 지몸의 일부를 덜어 한마리 올챙이에게 접을 붙여 주기로 했다 한고비 넘긴 병실 거죽이 쭈글쭈글한 눈만 꿈벅이는 외계인 배에 청진기를 대본 주치의는 복수가 빠졌으니 차차 사람이 될거라는데 죽었다 살아난 누님 어느 우주에 다녀왔을까,
ㅡㅡㅡㅡㅡㅡㅡ
대설특보
양달준
공장 굴뚝의 연기는 함박눈인가
지하의 기계들이 잘도 도는지 펄펄 날린다
굴뚝의 연기는
공돌이 공순이들에 노동이다
뭉텅한 연기는
지하에서 고단한 몸들이 두팔 벌리고 쳐다보고 싶은
공중에 눈발이다
대설특보가 내려지면 공장의 손과 발들은
쉴틈이 없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굴뚝은
허리도 비대해 사장을 빼다 박았다
굴뚝은 밤새도록 대설특보다
그 누군가의 명령으로
ㅡㅡㅡ
벌래와 황도
양달준
우주 한 개를 통째로 먹다
외계인을
만났다
ㅡㅡㅡ
탈출을 꿈꾸다
양달준
자고나면 잘려나간 산이 또 보인다
이 도시는 벌목으로 숨조차 가누기 힘들다
늦었지만
원시림 같은 산림으로 가야한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송진 램프를 켜는 저녁이면
숲의 문장을 읽으며
황폐해진 마음을 싸목싸목 다스리고 싶다
의료보험증을 발급해준 이 도시는 사막
사람들은 고갈되어 누렇다
너나 모두가 나무 한 뿌리 없는 노숙자
뿌리를 찾아 가고 싶으다
사시사철 푸른 천등산 비자림은 나에 본적지
바람의 자양분으로 번창한 숲
거기 움막 하나 짓고
별뜨면 별을 불러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싶다
몰골이 누런 이 도시로 부터 추방 당해
망명하고 싶으다
ㅡ천등산 비자림(전남 고흥군에 위치한 산)
ㅡㅡㅡ
나무 관찰학
양달준
바람 부는 날
나무를 보시라
바람이 홈런처럼 빠른 속도로 담장을 넘어가면
나무 이파리들은 반짝이며
파도 타기를 하다가도
불던 바람이 병살타처럼 멈추면
고개를 숙이고 잠잠해진다
바람 부는 날
나무를 보면
한국 시리즈 결승전을 치르는
잠실구장 관중석이 보이고
함성과 탄식이
들린다
ㅡㅡㅡㅡ
청상과부
양달준
카랑카랑 바람 부는 전라도 담양 땅이다
대나무가 울고 있다
울음이 피리 소리 같다
유리에 금가는 소리다
휘어지는 아픔이 부러지는 일보다 고통으로 보이는데
자빠지다 다시 일어나는 탄력은
가늘디가늘다가 굵게
그러면서 길게 뽑아내는 남도의 명창 같다
일찍부터 혼자였던 내 엄니가 그랬다
뒤뜰에서 대나무가 울던 흐린 밤중이면
어린 나를 옆에 두고
육자배기를 구슬프게도 불렀다
흔들리며 한 대목 걸죽하게 우는
낭창낭창한 저 푸른 마디처럼 아슬아슬하게 한대목 꺾다
막걸리에 사카린을 타 마신 날은
더 시퍼렇게 울기도 했는데
대나무
막걸리 한 대접 자시고
저러시나,
ㅡㅡㅡ
외짝구두
양달준
길바닥에 신발 한 짝
원래는 밋밋한 구두였다지
시꺼먼 구두 약을 칠하고 부터
삐까삐까
놀음판에서 빛나는 광이었다나
광은 광인데
그것으로 부족해
똥광이나 비광을 잡으러 쏘다니다
결국,
길거리 신세
노숙자라지
ㅡㅡㅡ
유목의 마을
양달준
히히힝 히히힝 말들이 돌아오고
램프가 심지에 불꽃을 댕기는 저녁
둥근 텐트에서 밀빵 한 조각에 차를 마시며
걱정없는 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밤이면 설산 너머 우주들이 훔쳐보는
사람의 경전이
지구 한 쪽에 거처를 잡고 풀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문명의 접근을 마다한 초록은 더 무성해지고
땔감으로 쓰이는 가축의 똥은 넉넉해
그것으로 삶이 풍족한 그들은
가축을 숭배하는 유목민
북두칠성은 그 곳을 유적지로 점치고 있어
사람도 가축도 유물로 보이는
방목의 울타리에
도굴꾼들은 다녀가지 않았다는데
값으로 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지
ㅡㅡㅡ
모텔 출판사
양달준
샤롯데 모텔로 배달을 갔다
명절 선물 사과 상자를 두고 돌아서던 차에
누가 독약 한 사발을 마시고 있는지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테르 연인 롯데 같은 여자가
저러겠지 짐작하며
자가용 번호판이 죄다 덮개로 가려져 있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생각했다
젊은 베르테르 슬픔은, 사랑인가
아니면 고전시대 불륜인가
어쨌건 간에
대낮에 작업 소리 요란한 모텔 샤롯데
첫 페이지만 읽다 덮어버려
끝장이 근질근질 했는데
괴테 어른 없이도 명작 한 권을 찍어대던
모텔 출판사
기승전결 확실한 수작이었을 거다
ㅡㅡㅡ
저녁의 별
양달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가슴이 뜨겁다
모두가 별이다
내가 사랑하므로
그들은 반짝이고
글썽인다
ㅡㅡㅡ
설악산 단풍
양달준
부탁했던 단풍 한 잎 도착했습니다
고맙게도 설악산 심장 가장 붉은 쪽을 보내주셨습니다
가을병이 도진 한 사람
이식 수술에 들어갑니다
ㅡㅡㅡ
소록도와 녹동항 사이
양달준
녹동과 소록도 가운데 바다는
죄없는 소록도 사람들에게는 철조망이다
바다는 푸른 희망,
시인 한하운 어른은 바다를 바라보며
얼마나 절망했을까
통통선 한 척
녹동항 앞 바다를
부수고 지나간다
원통해서
ㅡㅡㅡ
고래가 보고 싶다
양달준
내 유년의 바다에는 숨은 여라는 바위가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 몸통을 드러내고
바닷물이 차면 가물가물하게 보여
숨은 여는 한 마리 고래 같은 것이었으므로
나는 수시로 그 바위를 보며 꿈을 키웠다
바닷물이 빠지면 사람들은 바윗등에 올라타
갯것을 잡으러 물질은 했지만
바위를 끌고 뭍으로 오지 않았는데
객지살이 십 수년
이리저리 끌려 다닌 나는
파도치는 바다 그자리에 그대로 있는
숨은 여가 보고 싶다
다도해 해안에서 하루에 한 번씩 나타나는
한 마리 고래
도시에서 표류하며 살아가는 나는
숨은 여
고래가 보고 싶다
ㅡㅡㅡ
슬픈 악사
양달준
라이브 카페 홍씨는 악사다
농사꾼 아버지가 암소를 팔아 대처 유학길에 올랐다는 그는
딴따라 인생은 막장이었다
그의 건반에 7080 술구세 들이 뽕짝을 올려놓고
밤을 탕진하면
그는 여러 곡을 타작해야 한다
노래가 끝이 나고
가뭄비 같은 지폐 한 장이 허공에 날리면
팔아먹은 소가 눈에 밟혀
피눈물이 난다는 홍씨
무덤에서 그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황진이 한 곡 기차게 뽑았을 밤도 있었을텐데
별이 지는 시간
밭갈이를 마치고
뚜벅뚜벅 골목을 걸어가는 그림자
외양간을 찾아 가는
지친 소 한 마리 같으다
ㅡㅡㅡ
애월에서
양달준
이 세상 모서리에서 다치고 지친 몸을 만월의 바다에 눕히면
애월이 서방님 하며 달려들 것 같다
그런 사랑 한 번 저질러 보고 싶다
하지만 응큼한 생각 말기로 했다
저,
둥근달이 애월
그녀의 문은
구릿빛 어부들만이 열어보았거나
목숨 걸고 열었던
암스트롱 말고는 없으리
애월,
불러는 보대 싸가지 없는 생각 거둬라
이곳은 유배지 같은 곳
들통나면
육지로 나갈수 없다
ㅡㅡㅡ
만원짜리 푸른 닢
양달준
한파가 오기전에 월동 준비를 해야겠다며
긁어대는 바가지 소리에
추리닝 바지에 운동화를 꺾어 신고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하는 농협에 갔네
창구 앞에서 서성이다
바닥난 예금을 탈탈 털어
배추 한 푸대 들고 집으로 왔네
속이 튼실한 배추를 절쿠는 사람
만원 짜리가 한 푸대면 얼마나 좋을까
혼잣말 그 옆에서
소금대신 눈물을 뿌렸네
엄동설한 걱정 덜은 푸른 닢
짜디짠 눈물로 절쿤
배춧 닢
아,
푸른 닢 푸른 닢
ㅡㅡㅡ
미시령
양달준
보이는건 눈발과 암흑
분간이 안간 고갯 길
눈 덮힌 도로 표지판은
여기서 부터라며 령의 길이를 알린다
길이는 줄과 같으므로
줄을 제대로 잡아야 출세한다는데
사람들은 여기서 줄을 여러 번 놓치고 만다
그러면서 다시 잡는다
단지,
때절은 마음이
동해를 만나고 싶어
ㅡㅡㅡ
첫 눈
양달준
점찍었던
첫 사랑 정순이
두고두고 잊고 사는데
어쩌자고
해마다
발랄하게
오시는가
ㅡㅡㅡ
폭설
양달준
일기 예보는 오일장이라 했다
산 아래 누옥 한채
상복 차림으로 허리를 구부린 감나무
조문객 대신 머리를 쪼아리는 콩새
하늘에서 보낸 국화 송이 사흘째
두절이 만든 풍경은
수묵화 한 점 같기도
흑백 사진 한 장 같기도 한데
경주땅 신라 고분 같은 눈더미 속에
멀둥멀둥 눈뜨고 있을
노부부
오일장은
지루하겠다
ㅡㅡㅡ
수수꽃 인생들
양달준
골목길 인력시장
급하게 달려온 승합차가
초조하게 서있는 몇몇을 호명한다
난민처럼 가방을 껴안고 도착한 곳은
주식회사 신축현장
토막난 각목들이 불타는 드럼통 앞에서
언손을 녹이던 차
붉은 완장을 찬 아침 해가
작업지시를 내린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인생들
벽돌을 짊어진다
벽돌은 주식과 같아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올라갈 때마다 바닥을 치는 저들을
개잡부라고 부르는 공사판
철근처럼 녹슬고 휘어진 삶이 무거운데
하루를 감독한
저문 해가
품삯으로 수수꽃 몇송이
서녘에 두고간다
ㅡㅡㅡ
즐거운 저울질
양달준
이 세상 아줌마들은 무게에 민감하다
저울 앞에서 표정을 바꾸는
그녀들 얼굴을 보면 안다
바야흐로 비타민의 계절
아줌마들의 입 맛을 돌게한 딸기를 저울에 올린다
저울의 바늘이 파르르 떨다 값의 눈금에서 멈춘다
금이 야박하다며 데굴데굴 구르는 드럼통들
비겁하게 그녀들은 볼록한 뱃살과
풀어진 젖가슴을 올려 놓은
동네 목욕탕 저울에서는
s라인 눈금과 거리가 멀다며
구시렁댔을지 몰라도
나는 달작지근한 유혹앞에서 맘대로 무너진
그녀들 지방꽃을 보며
양심을 후하게 얹어준다
저울의 바늘이 오바를 떨 때까지
가벼운 바늘에 즐거운 무게를
팍팍 보태준다
ㅡㅡㅡ
낮 달
양달준
낮 달이 보고 싶어
애쓰는 사람 그리 많지 않다지
낮 달은 사무쳐야 보인다지
남쪽의 노모를 하늘 요양원에다 모시고
습관이 생겨
대낮에 하늘을 쳐다보면
때마다,
구름재 너머
수수밭 고랑에
어머니가 보인다
야위고 휘어진 등으로
지심메는 엄니는
그믐달이다
ㅡㅡㅡ
동백지다
양달준
한발 늦었더군
하필이면 추운 날만 골라 기다리다
이불 뒤집어쓴 굼벵이 같은 내가 괘씸해서
가 버렸다더군
꽃보러 갔던 작년에
지고만 동백꽃대신 붉은 입술 한없이 대주며
나를 달래 주던
여자
기다리다 지쳐
붉은 립스틱 싹지운 티슈만
동백나무 밑둥에 버리고
보란듯이
가버렸더군
ㅡㅡㅡ
다시 봄
양달준
밑둥만 남은 나무에서 싹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바같을 살핀다
엄동설한 문걸어 잠그고 감감 무소식이던 장성 양반이시다
ㅡㅡㅡ
두 손 모아
양달준
어부가 건진 등푸른 희망
염부의 노고로
시장 좌판에 소금꽃 반짝이는 염전
저녁 밥상에 자반 고등어
잘 먹겠습니다
ㅡㅡㅡ
봄밤
양달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던 각시가
좋은 시절 다 지났다며
푸념을 한다
달빛에
목련이 환한 초저녁 밤
한 수 거들었다
젊어지고 싶은가?
ㅡㅡㅡ
바닷가 봉분 또는 폐선
양달준
다시 찾은 고향 어촌
한 집 건너 또 한 집 날만 기다리고 있는 노인들
바닷일에 골병 들어 거동은 못하지만
평생을 바람의 바다와 싸우며 만선의 깃발을 날렸지
세월의 두께 만큼 상한 곳이 두꺼워
바닷 물을 거침없이 밀고나갈 자력을 잃고
뻘 밭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저들을
폐선이라 부르는데
이미 거처를 산으로 수습하여 누워 있는
폐선의 봉분을 보면 죄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생전에 만들었던 어장을 잊지 못하고 있는걸까
가끔은 뚜겅을 열고
바다에 나갔다 돌아 왔을지도 모르는
바닷가 봉분들
저 아래 골골대며 폐선들이 누워 있는 산으로 올라오는
목선 한 척
자리를 잡으러 오는갑다
ㅡㅡㅡ
비오는 날엔 너가 그리웁다
양달준
이렇게 보슬비 나리면
잉잉 젖어
그대가 두고 간 발 자국마다
눈물이 고여요
고인 눈물 넘치면
그대 사는 강마을 까지 흘러 갈 수 있을까,
울어도 울어도 모자란 눈물
얼마나 더 울어야
그대 가슴
적실까요
ㅡㅡㅡ
하바나 블루스
양달준
혁명 그딴 것 이제는 바라지 않아
저들은 체 게바라에게 미래를 맡길 수 없었다지
어두운 새벽이여 태양을 꿈꾸는 암울한 청춘들이 악보를 따라 춤을 추면 거리는 뜨거워지고 연인들은 손등에 입술을 포갠다지 내일은 우리의 시대 혁명은 지루해 부둣가 맥주잔엔 파도가 넘쳐 뱃고동 소리는 밀항을 포기 한다지 하바나 하바나 사랑은 빵처럼 부풀어 자꾸만 달콤해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 낭만을 버릴 수 없어 거리에 악사들이 기타를 치지 하바나 하바나 저녁별 아래서 카브리 해변처럼 출렁이는 연인들에 가슴엔 밤마다 뜨거운 피가 돌지
부앙부앙 뱃고동 소리에 흔들어 봐
자유는 찾아가는 것보다 만드는 것이 더 짜릿해
하바나 하바나
우리 밀착해
가슴끼리
ㅡㅡㅡ
구로공단 굴뚝
양달준
하얀색칠의 기다란 굴뚝
연기가 폴폴난다
한까치 담배 같으다
한 시대 공순이들이 두고간 구로공단
디지털 이 시대
콜센터 상담사들이 그 빈자리를 이어 받았다지
누가 알까,
도처에 깔려 있는 언어 폭력이 저들에 삶인 것을
닭장 같은 휴식 공간에서
쌓인 것 뱉어내는
입에 댄
저 굴뚝
ㅡㅡㅡ
봄비
양달준
겨울 창문처럼 마음에 문을 닫고 잊기로 했던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었네
갑작스런 소식에 나는 날궂이처럼 헛소리를 했네
그녀의 목소리는 먹구름처럼 무거웠으며
우리가 이상기류로 비구름을 만들어 눈물 뿌렸던
그날처럼 그녀가 먼저 울었네
우우우 우우
어린 잎들에 손등을 적시는 푸른 눈물은
모과차 마시며 다정했던 시절이었네
한 번 간 사랑은 다시 올 수 있을까,
간절한 기다림은 갈증이라지
가물었던 내가슴에도 비가나리네
우우우 우우 어색한 침묵도 잠시
촉촉해진 나는
그녀를 다시 파종하고 싶어
그래 목마르게 기다렸어 그말을 참지 못하고
나도 울었네
같이 울었네
ㅡㅡㅡ
목련
양달준
음 삼월은 허파에 바람들기 좋은 달
아파트 창문들을 사방에다 두고 나는 늘 하던 습관으로 욕실에서 거실로 나와 알몸을 닦다 건너의 창문들이 수상했던가 뒤통수가 뜨듯해 뒤돌아 본 순간 젖 가슴 봉곳한 여자와 마주쳤지
아아 ,
꽃이었지
나하고 꽃 사이에 이상한 바람 불었지 실없이 허둥지둥대다 고민했던 문을 활짝 열었지 쓸만한 근육질을 훔쳐본 꽃하고 아싸하게 좋았던 내 인생에 최고의 봄날
겁도 없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해 그 봉곳한 꽃
저기
ㅡㅡㅡ
1980년
양달준
해떨어지면
홍은동 백련사에서 범종이 울었다
저녁은 둥근 밥상에 평온하게 보내거라
늘어지게 딩 딩 딩 울리면
내 뱃속에서는 또랑물 소리가 급하게 들렸다
그러나 열여덟 직공살이에게 범종은
밥도 수당도 없는 연장의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용접을 배우던 철공쟁이 나는
산소통을 들고가
그 입을 땜질해 버리고 싶었던 생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쇠망치질을 멈추고 가만 듣다보면
사람은 고파야 큰다는 부처의 고함 같아
때를 거르더라도 맘을 밥처럼 든든하게 먹으라는
남쪽의 당부 같아 저절로 기다려지던
빈 그릇에 고봉밥 같았던
그 범종의 소리
21세기 이시대에
누가 또 듣고 있을까
ㅡㅡㅡ
꽃답게 시들거라
양달준
한 번 피었다가 미련 없이 시드는 것이 꽃이다
장례식장 쉴낙원
조문을 마친 조화
리본에 이름들이 가차없이 칼질 당해도
국화꽃은 살아남아
1톤 트럭에 다치지 않게 실려 부릉부릉 출발한다
얼핏 들었던 조화의 행방이 궁금해진다
어디로 갈까,
너에 이름은 꽃이다
꽃답게 시들거라
ㅡㅡㅡ
농부가 쓴 시
양달준
빗물이 가득찬 다랭이논
한 장의 원고지다
굽은 등의 촌부가 한 줄 두 줄 문장을 만든다
힘겨운 노동이다
농가의 대물림 모심기는 농부가 허리 굽혀 쓴
꿈틀대는 푸른 글씨다
저녁이면 둥근 달이 어린 글씨를 비추고
개구리가 낭송 할
세상으로 나가
한 그룻 따신 밥이 될
저런 시,
나도
써보고 싶으다
ㅡㅡㅡ
즐거운 식사
양달준
풋살구 빛깔의 꼿꼿한 새순은 보약 같은 밥이라지
유랑간 양들이 돌아와 느긋느긋 잡수고
뒤따라 달려온 말들이 허겁지겁 뜯어대는
몽골 초원은
걸게 차려진 큰 밥상
흰 두루마기에 점잖게 앉아서
삼베옷 종들은 서서
음식을 즐기는
조선시대 잔칫 집 같은
시끌벅적한 풍경
먹다 말고
히히힝 히히힝
아랫 것들은 맛나서
촐랑댄다
ㅡㅡㅡ
하관
양달준
밭둑에 매화 꽃 한창
땅에 가시 없는
고슬고슬한 오후 두 시
씨를 묻으려 파놓은 구덩이에 호박씨를 앉혔다
생각하건데
저세상 가는 길도 이런날 묻힌다면 캄캄하지 않겠다
눈감은게 아니겠다
너는
여기와서 눕거라
뻐국뻐어꾹 기도 소리에
흙 한 삽을 뿌렸다
ㅡㅡㅡ
늦 가을
양달준
차갑게도 비가 온다
적색의 잎들은 고개를 더 숙였다
비야 속절없이 왔다 가면 그만이지만
징후 없이 닥친
누군가의 작별은 비에 젖어 아프고 춥다
모퉁이 그 길에도 비가 오겠지
그 해,
그 길에서 비를 맞으며 이별을 겪었다
빗 물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길 바닥에 뿌리며 저물도록 걸었다
바람불어 휘청거릴 때마다
노오란 손수건 흔드는 은행나무 똑똑히 보았다
나의 사랑은 계절의 명령으로 이별하였으니
나는 외로운
한 그루 나목이었다
그때처럼 찬비 나리는
아,아
한 사발 독약 같은 늦가을
다시,
불거지는 통증
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