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장 난상토론
이번 소림사에 모인 군웅들이 중원무림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당대의 최고수들 중 상당수가 참석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명성이나 지위로 보아 집회를 주관한 소림과 무당의 양파 장문인이 중인들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는 인물이었다.
천룡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중인들의 기대에 찬 시선이 두 사람의 진영 쪽으로 집중되었다. 하나 소림과 무당의 고수들은 모두 덤덤한 표정이었다.
대의 중앙에 서 있는 대현의 얼굴에도 그다지 흥분되거나 격동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번 천룡사의 다섯 번째 중원행(中原行)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위협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공개적으로 중원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장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지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주위가 조용한 가운데 대현의 음성만이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승이 들은 정보로는 그들은 천룡사 뿐 아니라 서장의 대소 12개 문파의 정예들이 모두 모여 있는 사실상의 서장무림(西藏武林) 총연합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느 특정 문파만이 아니라 중원 무림전체의 힘과 뜻을 뭉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판단 하에 이번의 대집회를 열게 된 것입니다.”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집회가 단순한 천룡사와의 일전(一戰)에 대비하기 위한 모임인 줄 알았던 군웅들은 서장무림과 중원무림의 거대한 결전이 벌어지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조금씩 술렁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것은 상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본거지를 침략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무림인들 특유의 맹렬한 투쟁심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대현은 중인들의 술렁거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미 무당파의 장문인인 현령진인께서 서장과 가까운 사천(四川)에 상당수의 고수들을 파견하여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면 상대 세력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우리들은 힘을 하나로 뭉쳐서 일사불란하게 전력(戰力)을 정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다시 무당파 쪽으로 쏠렸다.
사실 무당파는 이번 집회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소림사와 보조를 같이 하고 있었으나, 막상 집회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은 누가 보기에도 그들의 역할이 너무나 미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림사는 거의 전 문파의 힘을 기울여 이번 집회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데 비해 무당파는 장문인인 현령진인을 비롯한 10여명의 고수들만이 참석했을 뿐 별다른 힘을 쏟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현의 말을 듣고서야 중인들은 무당파에서도 이미 이번 일에 대해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 소림사보다는 무당파가 서장에 더 가깝기 때문에 소림사는 중원에서 집회를 개최하고 무당파는 천룡사의 동태를 살피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한 모양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효과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중원인들이 서장의 천룡사를 경외하게 된 큰 원인 중 하나는 그들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이었다. 중원과는 너무도 판이한 그들의 복장과 풍습, 그리고 기괴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괴이한 무공 등이 많은 무림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것이다.
서장의 무공은 대부분이 천축(天竺)의 유가술(瑜伽術)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중원인들의 눈에는 무척 생소해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체내의 잠력(潛力)을 순간적으로 격발하여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방법을 곧잘 사용하는데, 그 때문에 중원인들은 그들의 무공을 방문좌도(傍門左道)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나 그들의 방식은 일반적인 사파(邪派)의 무공과는 달리 몸에 별다른 후유증이 없는 것이어서 중원인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뇌음사의 무공은 유난히 괴이하여 마공사술(魔功邪術)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천룡사는 정통무술에 가까운 데다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능히 소림사의 무공에 비할 만했다.
50년 전에 아난대활불이 처음 중원에 진입했을 때, 많은 고수들이 그에게 두려움을 품었던 것도 그의 무공이 괴이신랄하면서도 정종(正宗) 무공의 당당함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밀종(密宗)의 대수인(大手印)으로 당시 강호 최고의 장법(掌法)의 대가(大家)였던 천뢰상인(天雷上人)을 단 일장(一掌)에 격살한 것은 지금까지도 강호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충격적인 일로, 그 이 대수인은 서장무림의 대표적 무공으로 많은 무림인들에게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대현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천룡사와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우선 우리의 힘을 하나로 응집시킬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렇지 않았다가는 자칫 쓸데없는 혼선을 초래하여 엉뚱한 화(禍)를 초래할 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매우 큰 음성이 들려왔다.
“옳은 말이기는 한데, 이 많은 인원들로 어떻게 체계를 갖추겠다는 말씀이오?”
대현은 슬쩍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쪽에 늘어선 천막 중 한 곳에서 한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부리부리한 눈으로 대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덩치가 우람하고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40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허리춤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보도(寶刀)임을 알 수 있는 고색창연한 칼이 매달려 있었다.
대현은 그 중연인이 하북(河北)의 오래된 명가(名家)인 하북팽가(河北彭家)의 고수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팽력(彭靂)임을 알아보고 조용하게 미소 지었다.
“팽대협께서 염려하는 것은 지당하십니다. 사실 이곳에 오신 분들은 활동하시는 지역과 강호에서의 명성, 지위 등이 천차만별이라 특정한 체계를 갖춘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본사에서는 이미 그 점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 끝에 나름대로 해결책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이번 천룡사와의 결전에 참여하실 모든 분들을 소속 문파와 활동지역에 따라 열 개의 지역모임으로 나누는 겁니다.”
팽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웅들을 열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고 해도 각 집단의 규모가 적지 않을 텐데 과연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소?”
“그건 그 지역 모임들을 총괄할 수 있는 집합체를 만들면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대사의 말씀은 결국 무림을 하나의 집합체로 만들자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시 말해서 무림맹(武林盟)을 만들자는 말이 아니오?”
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름 짖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팽력을 비롯한 모든 군웅들의 얼굴에 일제히 흥미로워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무림맹은 그동안 말만 무성했을 뿐, 단 한 번도 실제로 결성된 적이 없었다.
강호무림을 하나의 집합체로 만들어 쓸데없는 분규를 없애고 강호의 도의(道義)를 지키자는 취지 하에 여러 번 무림맹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강호무림 전체가 너무나 넓고 광활한 데다 제각기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무림인들의 다양함을 수용할 수 없어 시도단계에서 흐지부지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50년 전에 아난대활불이 중원을 침략해왔을 때도 무림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저 구파일방의 고수들과 모용세가의 인물들만이 서로 힘을 합쳐 그들에게 맞섰을 뿐이었다.
무림맹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무림인들의 생리(生理)상 어떤 하나의 틀 속에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무림인들은 원래 부평초처럼 강호를 떠도는 것을 좋아하는 무리들인지라, 아무리 좋은 명분으로 집단을 만든다고 해도 그 속에 얽매이기 꺼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각 문파의 이해득실이 복잡하게 얽히게 되면 무림을 하나의 집단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소림사는 정식으로 무림맹의 창립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평상시라면 군웅들도 한 쪽 귀로 듣고 흘려버렸을 테지만 그것이 강호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할 수 있는 소림사에서 나왔고 현재 무림이 커다란 위기를 앞에 둔 상황이기 때문에 한층 주의해서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무당파는 이미 소림사와 사전에 교감이 있었는지 별 반응이 없었지만 그들을 제외한 다른 문파의 고수들은 상당히 술렁이는 모습들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형산파 쪽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무림맹을 만드는 일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닐텐데 어떻게 만들 생각이오?”
말을 꺼낸 사람은 형산파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육순의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반백(半白)의 머리에 얼굴이 대추처럼 붉고 눈썹이 유난히 짙었다.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고 형형한지 어지간한 사람은 감히 그와 눈을 마주하기도 꺼려할 정도였다. 그 노인의 이름은 비응검(飛鷹劍) 사공표(司空彪)라 했다.
형산파에서는 이번에 그들의 최고 고수인 오결검객 중 세 사람을 수뇌급 인물로 파견했는데 비응검 사공표는 그 오결검객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별호 그대로 한 마리 매처럼 사납고 날카로운 검법을 구사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성정(性情) 또한 그와 비슷해서 모두들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대현은 사공표의 성격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지라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즉시 입을 열었다.
“무림맹을 창립하는 것은 여러모로 지난(至難)한 일임이 틀림 없습니다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창립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어야 무림맹을 만드는 기본취지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열 개의 지역모임에서 각기 십인(十人) 정도의 대표자들을 선출한 다음 그 대표자들로 맹을 만드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맹이 너무 비대해져서 조직이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을 염려도 없고 공정성이나 맹의 대표성 문제도 제기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공표의 짙은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지역모임의 대표는 또 어떻게 선출한다는 말이오?”
대현은 이미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해당지역 모임에 참가한 고수들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어느 지역에 누가 대표로 나설 수 있는지는 그 지역에 계시는 분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공표는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막상 무림맹을 만든다면 필연적으로 맹주(盟主)를 비롯한 수뇌부를 조직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소림사의 복안(腹案)을 듣고 싶소.”
사공표가 꺼낸 질문은 몹시 민감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무림맹에 대한 수많은 논의(論議)와 시도가 번번이 좌절된 것도결국은 수뇌부를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대한 이견(異見)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무림인이라면 누군들 무림맹의 맹주 자리를 탐내지 않겠는가?
또한 어느 문파인들 자신들의 문파에서 맹주가 탄생되기를 기대하지 않겠는가?
설사 맹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 수뇌부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무림맹의 수뇌부를 어떻게 조직하느냐 하는 것은 무림맹을 탄생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더구나 형산파는 요즘 들어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터라 자칫 이번 일이 소림사와 무당파의 지위를 공고히 해주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소림과 무당에서 무림맹의 맹주와 수뇌부 자리를 독차지한다면 형산파가 그들을 누르고 강호에서 득세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비단 형산파 뿐 아니라 구대문파를 비롯한 여타 문파에서도 은근히 이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대현은 그들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는지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맹도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수뇌부를 어떻게 만들지 논(論)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우선은 이곳에 모인 군웅들을 열 개의 지역모임으로 나눠 그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무림맹의 수뇌부 선출은 차후에 맹이 조직된 다음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공표의 경직되었던 표정이 약간 풀렸다. 만에 하나라도 소림사에서 이번집회를 자신들이 주관한다는 명분 하에 무림맹에 대한 어떤 우선권을 요구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대현의 말마따나 아직 생기지도 않은 맹의 수뇌부를 조직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결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공표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주위에는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가득했다. 각파의 고수들은 서로 나직하게 말을 주고 받으며 분주히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었고, 문파에 소속되지 않은 군웅들은 앞으로의 사태가 어떻게 벌어질지 몰라 다소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다.
낙일방은 쓴웃음을 지으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요. 설마 소림사에서 무림맹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지. 무림맹이 조직된다면 이번 천룡사와의 결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기존의 구대문파를 비롯한 거대문파들이 수뇌부를 독식(獨食)하고 군소문파와 나머지 고수들은 들러리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응계성이 퉁퉁 부은 얼굴로 소리쳤다.
“이건 보나마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소림사의 얕은 수작이야. 생각해 봐라. 말이 좋아 무림맹이지, 사실은 이미 강호에 명성이 알려진 자들만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꼴이 될 게 아니냐?”
낙일방도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떠들어댔다.
“맞아요. 이런 식이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할 거예요.”
진산월은 상원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협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상원건은 처음 무림맹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무림맹이 결성되려면 대다수 무림인들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데, 그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만 일을 진행할 리가 없지 않겠소? 설사 그렇게 하려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낙일방은 듣고 보니 상원건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찌푸렸던 안색을 풀며 재빨리 물었다.
“그럼 우리도 잘만 하면 수뇌부에 들지도 모르겠군요?”
상원건은 빙긋 웃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열개로 나눠지는 지역모임에서대표로 선출되는 게 더 급하지 않겠나?”
낙일방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거야…. 중원 전체라면 몰라도 하남성에서는 그래도 본파가 열 손가락 안에 들지 않겠습니까?”
응계성이 듣고 있다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야, 이 녀석아! 하남성에 문파가 몇 개인데 그딴 소리냐? 게다가 문파에속하지 않은 고수들이 어디 한두 명인 줄 아느냐?”
“어이구…. 사형. 말로 하세요, 말로….”
낙일방이 머리통을 싸잡고 뒤로 물러났다.
응계성은 한 차례 더 낙일방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는 다시 진산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문사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림맹을 만드는 데 찬성이오, 반대요?”
진산월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물론 찬성이지.”
응계성은 물론이고 정해도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진산월이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무림맹이 결성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의 위치에서 도약할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무림맹이 결성된다면 우리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맹의 수뇌부에 들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어차피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림맹은 결성되게 돼 있다. 그러니 이왕이면 흔쾌히 대세를 타는 게 현명한 일 아니겠느냐?”
응계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림맹이 결성되게 돼 있다니…. 그걸 어찌 아시오?”
“소림사에서 아무런 사전 대비도 없이 군웅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냈겠느냐? 모르기는 해도 아마 구대문파의 수뇌부들을 비롯한 강호의 명숙들과 사전에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무림맹을 결성할 확실한 자신이 없다면 소림사에서 결코 앞장서서 이번 일을 거론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인들은 무심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진산월의 말에 확실히 일리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무림맹에 관한 말을 꺼낸 사람은 대현이었지만, 그것이 소림사의 뜻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소림사에서 수많은 군웅들을 모아놓고 정식으로 제기한 안건이 만에 하나라도 부결(否決)되거나 파기된다면 소림사로서는 창피 막심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상원건은 안광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진장문인의 말씀대로라면 무림맹이 결성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문제는 수뇌부를 어떻게 조직하느냐만 남은 셈이군요.”
정해가 큰 머리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 수뇌부도 이미 사전에 내정(內定)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응계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갈아붙였다.
“만일 그렇다면 소림사 중들의 머리통을 모조리 뽑아버리고야 말겠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렇기야 하겠느냐? 구대문파 중 어느 문파도 선뜻 손해 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설사 소림과 무당에서 그런 뜻이 있다고 해도 쉽사리 성사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누가 무림맹주(武林盟主)가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연 새로운 무림맹주가 군웅들을 잘 이끌어 천룡사와의 결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다.”
응계성은 아직도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채 못마땅한 눈으로 진산월을 흘겨보았다.
“장문사형은 참 보살(菩薩) 같은 말만 하는구려. 하지만 생전 알지도 못하는 놈이 무림맹주랍시고 나를 부려먹으려 한다면 나는 그 꼴 못 보오. 무림맹이든 천룡사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종남산으로 돌아가 버릴 거란 말이오.”
진산월의 표정이 돌연 엄숙해졌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곳에 모인 군웅들이 모두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인물이 맹주로 선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무림맹의 수뇌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룡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데 일조(一助)하여 본파의 명예를 되찾자는 것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응계성은 화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진산월의 표정이 변한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은 평소에는 좀처럼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지만, 지금처럼 표정이 심각해지면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결코 섣불리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성격이 아님을 모두들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대 위에서는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림과 무당을 제외한 구대문파와 남궁세가(南宮世家)를 비롯한 세칭 사대세가(四大世家) 등은 주로 질문을 던지는 편이었고,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을 대현이 매끄럽게 받아넘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남궁세가의 유명한 고수인 철검서생(鐵劍書生) 남궁조(南宮潮)였다.
강남의 남궁세가는 예로부터 부귀와 검술로 천하에 그 명성을 떨쳐왔다. 그들은 대대로 강남의 중심지인 금릉(金陵)에 자리를 잡고 권세를 누려왔거니와, 당금에 이르러서도 천하의 사대세가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남궁조는 남궁세가의 당대 가주인 남궁탄(南宮灘)의 막내 동생으로, 남궁세가는 물론이고 강남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절세의 검객(劍客)이었다.
철검서생이라는 별호답게 그는 얼굴이 준수하고 기개가 헌앙(軒仰)했으며, 30대 후반의 한창 나이에 걸맞은 침착함과 패기만만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현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무림맹이 창립된다면 그것은 100년 내 무림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될 겁니다. 그런데 과연 무림맹이 천룡사와의 대결이 끝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건지, 아니면 그 이후에도 계속 존립하는 것인지를 알고 싶군요.”
대현은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도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차차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봅니다.”
남궁조는 대현을 빤히 응시하며 빙긋 웃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소림사의 생각입니다. 아마 소림에서는 이미 나름대로 방침을 정해놓고 있을 거라고 보는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것입니까?”
대현은 남궁조의 약간은 도발적인 질문에도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물론 본사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의견들이 오고 갔습니다만,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형편입니다. 우선 시급한 것은 무림맹을 창설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여러가지 문제는 그것이 결정된 다음에 의논하는 것이 순서라고 봅니다.”
대현의 말은 남궁조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 내용은 이곳에 모인 모든 군웅들을 향한 것이었다. 사실 많은 무림인들은 무림맹의 창설에 대해 설레는 기대감과 막연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 안건을 제시한 곳이 오랫동안 무림을 영도(領導)해 온 소림사라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일말의 두려움과 망설임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남궁조는 안광을 예리하게 번뜩이며 다시 물었다.
“만일 무림인들의 의견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말해서 무림맹을 만들자는 쪽과 만들지 말자는 쪽이 팽팽하게 대치한다면 자칫 이번 일이 쓸데없는 분규(紛糾)로 확산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본사에서도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무림인들의 절대다수가 찬성하지 않는다면 무림의 단합을 위해서라도 금번의 안건을 철회한다는 것이 본사의 의견입니다.”
남궁조의 질문은 집요했다.
“절대다수란 너무 막연한 말 같군요. 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겁니까?”
“이곳에 오신 군웅들 중 4분지 3 정도면 모든 분들이 만족하리라 봅니다.”
그 말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4분지 3이라면 확실히 압도적인 다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궁조도 내심으로는 3분지 2정도만 돼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전혀 엉뚱한 것을 물어 보았다.
“무림맹을 창설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에 대한 복안(腹案)은 있으신지요.”
지금까지 평정을 유지하던 대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야릇하게 변하며 눈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그 눈빛을 받자 남궁조는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서운 눈빛이군. 저 정도라면 큰 형님의 내공(內功)에 전혀 뒤지지 않을 것이다. 대체 소림에는 저런 고수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는 강호의 소식에 나름대로 상당히 정통하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도 소림사에 대현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있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들어보았다.
그럼에도 그의 풍기는 기도나 인상이 예사롭지 않자 새삼 소림사에 대한 두려움이 솟구쳐 올랐다.
대현은 이내 다시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나직하게 불호를 외며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본사에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고려치 않고 있습니다. 남 시주께서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궁조는 오히려 대현이 화살을 자신에게로 넘기자 일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엉겁결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그중 남자는 남궁조가 자신을 쳐다보자 눈썹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