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역사.문화 트레킹
- 위 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서울특별시 송파구. 성남시.하남시
- 높 이 : 522m(남한산)
<단체기념사진>
Ⅰ. 개황(槪況)
1. 일 시 : 2015. 3. 5. 08:00
2. 나 들 목 : 역사관주차장
3. 참석인원 : 23명(새내기 1명)
4. 등산코스 : 역사관주차장 – 동문(좌익문) – 북문(전승문) – 연주봉옹성 - 서문(우익문) – 수어장대.청량당 - 남문 – 제2남옹성 - 동문 – 역사관주차장(원점회귀)
5. 교통정보
- 빠른 길 찾기 정보
▶ 검 색 지 : KBS춘천방송총국 ➠ 남한산성
▶ 거 리 : 106,8km(다음지도)
▶ 소요시간 : 1시간30분
- 다녀온길 : 중앙고속 춘천IC – 서울춘천고속 춘천JC, 미사IC – 서울외곽순환고속 – 중부고속 하남IC – 남한산성로 - 남한산성역사관주차장
- 동원차량 : 강원 70바 1708 박 철 수
6. 날씨상항
◆ 기상전망
- 2015. 3. 1(일)요일 18:00 발표 서울.경기 기상전망은 고기압 가장자리에 들어 가끔 구름 많겠으며 기온은 평년(최저기온 : -3~0도, 최고기온 : 7~11도) 보다 전반에는 조금 낮겠고, 후반에는 조금 높겠다고 전망하였다.
◆ 오늘의 날씨
7. 활동상황
○ 08:00 --- KBS춘천방송총국 앞 출발(가평휴게소 경유)
○ 09:40 --- 역사관주차장 도착
○ 09:50 --- 단체기념사진촬영 및 일정안내
○ 09:56 --- 들머리진입
○ 10:04 --- 동문(좌익문)
○ 10:12 --- 송암정터
○ 10:21 --- 장경사경내
○ 10:38 --- 군포지
○ 10:41 --- 여장, 동장대터
○ 10:44 --- 벌봉입구
○ 11:06 --- 제1군포터
○ 11:21 --- 북문(정승문)
○ 11:31 --- 북장대터
○ 11:43 --- 제5암문 - 연주봉옹성
○ 11:58 --- 서문(우익문)
○ 12:07 --- 병암남성신수비
○ 12:15 --- 점심식사
○ 12:51 --- 수어장대. 청량당
○ 13:31 --- 남문(지화문)
○ 13:40 --- 남장대터
○ 13:51 --- 제2남옹성
○ 14:10 --- 동문(좌익문)원점회귀
○ 14:28 --- 주차장도착
○ 14:30 --- 순교장현양비(성당)
○ 14:40 --- 하산행사
○ 15:10 --- 주차장출발
○ 16:20 --- KBS춘천방송국 앞 도착
Ⅱ. 지역특성
<남한산성>
1. 지역유래
▶ 중부면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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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으로부터 현 중부면 산성리에 도읍을 정하고 남한 위례성이라 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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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0
(고려 태조 23년) 한주(漢州)에서 광주(廣州)로 개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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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남한산성 내를 남동, 북동으로 축소, 성외의 검복리, 불당리, 오전리, 광지원리, 엄미리, 상산곡리, 상사창리, 남성리를 합하여 중부면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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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세촌면, 상대원리, 수진리, 복정리, 창곡리, 탄리, 단대구등 6개리를 중부면으로 편입하여
산성리, 검복리, 불당리, 오전리,광지원리,엄미리, 상산곡리, 상대원리, 복정리, 창곡리,탄리, 수진동의 13개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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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산성리에 있던 광주군청을 광주면 경안리의 구.청사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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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서울의난민을 성남시에 대거 이주시키면서 중부면에 성남출장소가 설치되어 성남의6개리(상대원리, 수진리, 복정리, 창곡리, 탄리, 단대리)를 관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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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3. 21
성남시가 신설되면서 중부면의 상대원리, 창곡리, 복정리, 단대리, 탄리, 수진리가성남으로 편입되고 초월면 상번천리, 하번천리가 중부면으로 편입되고 면청사가 산성리에서 광지원리로 이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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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1. 1
하남시가 신설되면서 중부면의 상산곡리가 하남시로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8개(산성리, 엄미리, 광지원리,상번천리, 하번천리, 오전리, 불당리, 검복리)의 법정리와 11개의 행정리로 구성됨.
- 남산산성 성안의 마을을 山城里라고 한다. 조선조 인조4년에 산성을 축조한 이래 수어청과 광주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인조가 이곳에서 겪었고 45일 동안 산성이 청군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 항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견디지 못하고 끝내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선 인조4년에 읍치가 이곳으로 옮겨온 후 1917년까지 300여 년간 광주의 지방정부가 있던 곳이다. 숙종이후 이곳에 민가가 집단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가장 인구가 많을 때는 민가만 해도 1,400여 호까지 되었다. 대한제국시절에는 동부. 남부. 서부. 북부. 중부로 갈라져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대한제국 시절에 광주부가 광주군이 되면서 남동과 북동으로 되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가 되었다. 남한산성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고,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 마을에서 남문으로 내려가면 성남시, 서문으로 내려가면 서울시 거여동, 마천동과 하남시 감북동이다.
2. 남한산 살펴보기
<남한산성도립공원안내도>
- 남한산은 사적 제 57호로 지정된 남한산성이 축조되어 있어서 남한산성으로 더 알려 알려져 있으나 남한산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한산성에는 남한산성을 보호하는 외성(外城)으로 동남쪽에 한봉성(漢峰城)과 봉암성(蜂岩城)이 있다. 남한산은 그 지형의 사면이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개의 고원지는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져서 주단야장(晝短夜長)의 폐가 있지만 이 산성 지역만은 주장야단(晝長夜短)의 독특한 지형을 이루기 때문에 옛 부터 일장산(日長山)·주장산(晝長山)이라고도 불리어 왔다. 남한산성은 두개의 산에 걸쳐있는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봉우리는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482.6m)이고, 북쪽으로 연주봉(467.6m)과 이어진다. 지형도상의 남한산성 최고봉은 동남쪽의 벌봉(515m)에서 한봉(418m)으로 이어지는 남한산성을 보호하는 외성(外城) 능선에 있는 남한산이다. 남한산 산행은 남한산보다 산성 성곽을 둘러보는 성곽답사를 주로 한다.
Ⅲ. 산길여정
<남한산성안내도>
- 오늘은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활짝 펼 수 있는 경칩을 하루 앞둔 절기를 맞이하여 남한산성에서 3월 첫 문을 열었다. 아이고, 추어 죽겠네! 하면서 언 손을 호호 불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느새 산행하기 딱 좋은 절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는 느낌 보다는 두렵다는 느낌이 앞섰다. 왜일까? 시속 68km로 가는 세월에 겁을 먹었나? 곰곰이 생각해 봐도 겁을 먹었다는 표현이 정답일 것으로 여겨졌다. 평소 나 답지 아니 한 궁색한 답변일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상의 답은 구하지 못하였다. 평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마음가짐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도 이런 감정에 사로잡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시방 뭐하고 있는 거야? 나 혹시 미친 것 아냐? 라는 넋두리에 사로잡히면서 갑작스레 나약한 모습으로 변해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한 본인의 심경에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산행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라고 호기를 부리면서 억지를 부려보았지만 정서불안 상황에 깊이 빠져들면서 한동안 그 상황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 남한산성은 지난 1. 22 조령관문 역사. 문화트레킹에 이어 금년 들어 두 번째 역사문화트레킹 일환으로 일정을 잡았다. 성남시 쪽에서 진입하여 남한산 등산 연계코스를 염두에 두기도 했었지만 남한산성 제5코스 순환 일정만으로 하루를 소요하는 것도 그 이상의 의미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산성 단순 트레킹코스에 국한하였다. 남한산성은 수도권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접근성이 수월하고, 또한 봄철 산불조심 입산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부담감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 오늘은 정월대보름이다. 정월 대보름(正月 大보름) 또는 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로, 오기일(烏忌日)이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교적인 명칭으로, 삼원(상원, 중원, 하원) 중 첫 번째이다. 새해 들어 처음 맞이하는 보름날로서 농사의 시작일이라 하여 매우 큰 명절로 여겼다. 대보름 전날인 음력 14일과 당일에는 여러 곳에서 새해의 운수에 관한 여러 풍습들을 행한다. 정월은 한해를 처음 시작하는 달로서 그 해를 설계하는 달이다. 1월 15일인 대보름날에는 점을 친다. 또 율력서에 "정월은 천지인 삼자가 합일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며, 모든 부족이 하늘의 뜻에 따라 화합하는 달"이라고 설명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달은 음에 해당하여 여성으로 본다. 달은 여신, 땅으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으로 출산하는 힘을 가졌다고 여겼다. 달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보름을 설과 같은 중요한 명절로 여겼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대보름날 자정을 전후로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 제사를 지냈다. 전남 해남의 도둑잡이굿, 전남 완도 장보고당제, 전남 보성 벌교갯제, 충남 연기 전의장승제, 전북 고창 오거리당산제, 경북 안동 도산부인당제, 경북 안동 마령동별신제, 강원도 삼척 남근제, 전북 김제 마현당제가 있다. 대보름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으며, 아침 일찍 부럼이라고 하는 껍질이 단단한 과일을 깨물어서 마당에 버리는데, 이렇게 하면 1년 내내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부럼깨기). 또 귀밝이술을 마시고, 밤에는 뒷동산에 올라가 달맞이를 하며 소원 성취를 빌고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하였다. 즉 달빛이 희면 많은 비가 내리고 붉으면 가뭄이 들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오고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대보름의 풍년과 복을 비는 행사로는볏가릿대세우기·용알뜨기·놋다리밟기 등이 있고, 놀이로는 지신밟기·용궁맞이·하회별굿·쥐불놓이(놀이)·사자놀이.줄다리기·차전놀이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더위팔기도 있다.<자료출처 : 위키백과->
- 또한 내일은 절기상 경칩(驚蟄)이다. 경칩은 일 년 중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정도로 날씨가 풀린다는 날이다.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로 우수(雨水)와 춘분(春分) 사이에 있다. 춘분점을 기준으로 하여 태양이 황도(黃道)의 345도(度)에 이르는 때로 양력3월5일경이다. 경칩은 글자 그대로 땅속에 들어가서 동면을 하던 동물들이 깨어나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무렵이 된다. 개구리들은 번식기인 봄을 맞아 물이 괸 곳에 알을 까놓는데, 그 알을 먹으면 허리 아픈 데 좋을 뿐 아니라 몸을 보한다고 해서 경칩 일에 개구리 알을 먹는 풍속이 전해 오고 있다. 지방에 따라서는 도롱뇽 알을 건져먹기도 한다. 또, 경칩에는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해서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기도 한다. 경칩 때 벽을 바르면 빈대가 없어진다고 해서 일부러 흙벽을 바르는 지방도 있다. 빈대가 심한 집에서는 물에 재를 타서 그릇에 담아 방 네 귀퉁이에 놓아두면 빈대가 없어진다는 속설이 전한다. 한편, 경칩 날에 보리 싹의 성장을 보아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예측할 수 있다고도 한다. 또한, 단풍나무나 고로쇠나무를 베어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을 마시면 위장병이나 성병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약으로 먹는 지방도 있다.
- 지난 1. 15 해파랑길 제49코스를 시작으로 이어진 트레킹 일정 중 최악의 저조한 참석률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지난해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유산에 갖는 기대가 의외로 컸기 때문에 그만큼 실망도 컸을 것으로 본다.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일정을 접으신 분들만 아니었더라도 예년의 평년작 수준은 넘길 수 있었는데 일말의 기대마저 무위로 끝나는 바람에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일상을 열었다. 빠른 길 찾기 안내정보에 따라 09:30분경 현장 도착을 예상했었는데 10여분 남짓 지체하였다. 목적지 성당 앞 넓은 주차장은 텅 빈 상황이었고 우리 일행 분들이 유일한 단체고객이었다.
<남한산성 옹성>
- 남한산성의 기본시설을 아래와 같이 개괄하여 살펴보고 4대문과 장대에 대해서는 따로 관련 자료를 엮어 편집하였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의 해발 460m 고원지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요새지로t서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외침을 막기 위해 토성을 쌓았던 것을 후세사람이 여러 번 고쳐 쌓아오다가, 조선 광해군(1608년) 때 본격적으로 개축한 것이 남한산성이 되었다고 하며,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피신하여 만 2천여 명의 병사와 분전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성내 최고봉인 청량산에 오르면 멀리 인천지역의 낙조를 비롯하여, 서울은 물론 경기도 남양주시, 여주시, 용인시, 고양시, 양평군 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1963. 1. 21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 3. 17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제158호), 5년 후인 1976. 7. 1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을 개장하였고, 2014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북문루와 서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 주변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서·남·북문루와 서장대(西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22일 제38차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11번째 세계유산으로, 경기도에서는 수원 화성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전 세계적인 인류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 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겨졌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 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특히 조선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오늘날의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부터 축성되어 인조 4년(1626)에 완공 되었으며,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숭열전, 청량당, 지수당, 연무관 등이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자료출처 : 광주문화원>
- 남한산성에는 원성과 외성, 옹성, 4대문, 암문, 치, 장대, 포루, 수구, 단, 묘, 공해, 정, 사찰, 제당 등 많은 시설물과 행궁이 있다. 남한산성 성곽이 1963년에 국가사적 제57호로 지정된 이후, 수어장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를 비롯해 숭렬전(동 제2호), 청량당(동 제3호), 현절사(동 제4호), 침괘정(동 제5호), 연무관(동 제6호), 지수당(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 장경사(동 제15호), 망월사지(경기도 기념물 제111호), 개원사지(동 제 119호)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7년에는 남한산성 행궁이 사적 제480호로 지정, 2012년 복원을 마치고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하는데, 원성은 하나로 연결된 본성이며, 외성으로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 남쪽에 신남성이 있으며, 동 · 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원성은 1624년(인조 2년) ~ 1626년 (인조 4년) 사이에 개 · 증축 당시 축성되어 둘레 7,545m다. 원성 내부는 2,135,752㎥로서 대략 627,200평으로 측량되었다. 현재 원성은 남쪽과 북쪽 일부가 훼손된 상태다. 전체 8,888m의 옹성(甕城) 과 3,213m의 외성(外城)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길이는 1만 2355m에 이른다. 성벽은 자연석으로 막돌 쌓기를 하였는데, 높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큰 돌을 아래에 쌓고 작은 돌을 위로 쌓았으며, 성벽은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성벽의 높이는 3∼7m이다.
- 원성은 높이가 약 3~7m내외로 다른 성곽에 비해 전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것은 이 산성이 조선 시대 부터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서 여러 차례 수축이 되어왔고, 1971년 산성 전역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성벽에 대한 보수작업이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성벽은 지반 위에 잘 다듬은 장대석을 쌓고 막힌줄눈 바른 층 쌍기를 하였다. 성돌은 지대석의 크기가 50 cm × 30 cm 정도이고, 그 위로 두께 20 cm 내외에 폭 30~50 cm 정도 크기의 면석을 정다듬 하여 쌓았다.
- 외성은 숙종 12년에 쌓은 봉암성, 숙종 19년에 쌓은 한봉성, 영조 29년에 쌓은 신남성의 3가지로 구분된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원성에 대해 새로 쌓은 성이란 뜻으로 '신성'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동쪽에 있어서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봉암성의 여장은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성벽 몸체는 비교적 잘 남아있는 편이다. 성벽은 약 2~3m의 높이만 남아있다. 숙종 31년에 2개의 포루를 증축했다. 한봉성은 봉암성의 동남쪽에서 한봉의 정상까지 지어진 외성이다. 병자호란 이후 숙종 19년에 수어사 오시복이 신축했다. 한봉성은 다른 성과는 다르게 닫힌곡선 형태를 이루지 않고, 일직선으로 연결된 용도(甬道) 형태의 성이다. 한봉성이 신축된 이후 청나라 사신이 숙종 31년에 와서 한봉성을 헐었고, 영조 15년에 수어사 조현명이 다시 개축했다. 일반적으로 한봉성의 성돌은 장방형이나 정방형에 가깝고, 폭은 60~80cm, 두께는 약 45cm 정도이다. 신남성은 제7암문에서 남쪽으로 검단산 정상부에 있다. 신남성은 남격대, 또는 대봉(對峯)이라고도 불리며 동쪽과 서족에 두 개의 돈대가 있다. 동돈대는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원형에 가깝게 축조되었는데 1996년 보수 과정에서 상당부분 신재로 보충되었다. 서돈대는 동돈대에서 서쪽으로 약 200여 미터 지점에 있다. 서돈대와 동돈대는 영조 29년에 함께 수축된 것이다.
- 옹성은 주 성곽에서 바깥으로 길게 뻗은 작은 성곽으로, 성벽에 달라붙은 적군을 옆에서도 공격할 수 있어 적의 공격을 막는 데 효과적이다. 일반적으로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지만, 남한산성의 옹성은 모두 성벽에서 길게 뻗어서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남한산성의 경우 돌출된 옹성에서 봉화대 역할도 겸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에는 현재 연주봉 옹성, 장경사 신지 옹성과 남문 쪽의 옹성 3개를 비롯하여 총 5개의 옹성이 있다. 연주봉옹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성 축성이후에 건설된 것으로 남쪽에 3개, 동쪽에 1개, 북서쪽에 1개가 있다. 제1남옹성은 남문 쪽의 옹성 3개중 서쪽의 첫 번째 옹성이다. 둘레는 423m이고, 옹성 끝에는 8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뒤로 장수의 지휘를 위한 축대가 설치되어 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 여장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의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로 축조한 평여장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 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타구가 마련되어 있고, 남한산성의 여장 규모는 길이 4.2m, 높이 1.3m, 폭 0.8m 내외가 일반적이다.
- 성문은 산세와 지형의 영향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형상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 중간에 암문을 많이 두어 활용했다. 남한산성에 있는 4대 성문은 밑에 홍예문을 두고 위에는 문루를 세운 것이다. 문의 규모는 남문이 가장 크고 다음 북문, 동문 그리고 서문의 순서로 규모가 크다. 문루는 모두 정면이 3칸이지만, 측면은 남문이 3칸, 북문 2칸, 동문 2칸, 서문 1칸으로 되어있다. 지붕은 모두 팔작지붕 양성을 바르고 동문의 무익공 홀처마를 제외하고는 모두 겹처마의 초익공을 하였다.
- 암문은 남한산성에 16개가 있으며,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많은 암문을 가지고 있다. 암문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이다.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고 형식은 평거식과 홍예식으로 구분된다. 암문은 은밀하게 식량과 무기를 운반하거나 원군이나 척후병이 출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크기가 작고 장식이 없다. 암문의 안쪽에 쌓은 옹벽이나 흙은 유사시에 무너뜨려서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 동문 남쪽에 수문이 있다. 해발 370~400m 정도의 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남한산성은 지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대부분의 물이 동문 남쪽에 있는 수문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가고 있다. 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고 전해진다. 수구문 바닥과 천장에는 홈이 파여져 있는데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쇠창살을 가로질러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문(좌익문)>
- 10:04 동문 경유
- 오늘은 남한산성 제4코스 7,7km/2시간20분 코스로 일정을 잡았다. 북문으로 진입하여 서문과 남문을 거쳐 주차장까지 원점 회귀하거나 이을 역으로 운영하는 코스가 가장 일반적인 탐방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쩨쩨하게 구간을 나눠 일정을 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전 구간 일순하는 코스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문이 들머리가 되었다. 동문 앞에 승용차주차장이 개설되어 있었지만 이를 미처 챙기지 못하는 우를 범한 관계로 주차장에서 동문까지 0,6km/8분 정도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 동문은 산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좌익문이라 한다. 성문의 폭은 3.1m, 높이는 4m이다. 다른 문에 비하여 동문은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고 계단을 구축하여 우마차의 통행은 불가능하였다.
- 동문은 가장 사용빈도가 많았던 문으로, 성의 남동쪽에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좌익문(左翼門)이라 한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폭은 3.1m, 높이는 4m로서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은 홍예식 성문으로, 지면이 성문보다 낮아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안쪽에는 가로 31센티미터, 세로 16센티미터의 철린으로 보강했다. 성문 위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 동문입구부터 본성 성곽을 따라 사면 계단 길로 이어졌다. 8분정도 올라가면서 송암정터에 이른다. 송암정은 우리말로 솔바위정자라는 뜻이다. 송암정에는 황진이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 송암정터를 지나 10여분 남짓 더 가면 장경사 경내에 이른다. 장경사는 경기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676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의 축성이 시작되자 인조 3년에 승도청(僧徒廳)을 두고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사역을 돕게 하였다. 승군의 숙식을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玉井寺) 외에 1638년(인조 16) 개원사(開元寺)·한흥사(漢興寺)·국청사(國淸寺)·천주사(天柱寺)·동림사(東林寺)·남단사(南壇寺) 등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때 함께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축성 뒤에도 승군을 주둔시켜 수성(守城)에 필요한 승군의 훈련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훈련시키는 한편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을 교체하며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된 3칸 동향(東向) 건물이며 요사채 3동과 진남루(鎭南樓)·칠성각·대방(大房) 등이 있다.
- 장경사를 지나 성 내 비밀통로였던 제2암문,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건물이 있던 군포지, 4대 장대 중 하나이었던 동장대터, 위례둘레길코스로 이어지는 벌봉입구 암문, 제4암문, 제1군포터를 지나면서 북문(전승문)에 이르렀다. 위례둘레길코스로 이어지는 벌봉 입구까지는 선발대 맨 앞에 자리하였지만 제4암문 구간에 이르면서 고문님, 회장님을 비롯한 중간그룹 일행 분들과 합류하여 동행하였다. 이 구간 중 제2암문에서 벌봉 입구 까지는 잔설이 남아있어 착지가 불안한 조심걸음 구간이었다. 어제 저녁 친구로부터 오늘 스틱을 가지고 가야하느냐는 문의 전화가 왔을 당시 산성 본성을 따라가는 탐방코스인 만큼 스틱은 필요 없을 것이라는 답변을 줬었는데 후회막급이었다. 친구고 뭐고 믿을 놈이 한 놈도 없겠다면서 투덜거릴 친구 입장을 생각하니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중에 북문을 지나 연주봉옹성을 다녀오는 과정에서 후미일행 분들과 합류하면서 그 상황을 눈여겨 본 즉 스틱을 짚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꾀 는 많아 가지고 할 짓은 다 하는구먼 이란 속말을 뇌까리면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북문(전승문)>
- 11:21 북문 경유
- 북문을 경유하면서 탐방로가 혼잡을 이뤘다. 주차장에서 곧바로 북문으로 진입한 탐방객과 산책 나온 주민들과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장이 너무나도 비교되었다. 우리 일행 분들은 너나할 것 없이 배낭을 멘 중무장 차림이었던 것이다. 배낭 없이 간편한 복장으로 진입을 시도해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점심식사가 문제였다. 점심식사를 하산 후로 미루자니 14:00 이후의 늦은 점심식사가 되기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하고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아니하였다.
- 북문에는 편액이 붙지 않았다. 북문하단 출입문 앞에 설치된 북문안내판을 확인한 후에야 북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문에서 10여분 남짓 가면서 북장대터가 나온다. 북장대터 역시 4대 장대 중 한 곳이지만 장대는 없고 터만 남아있다. 북장대터에서 10여분 남짓 더 가면서 제5암문에 이르렀다. 언 듯 보아도 주변 정황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제5암문을 빠져나가면서 곧바로 양쪽으로 성벽이 둘러쳐진 연주봉 옹성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남한산성에 와서 연주봉 옹성을 간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옹성 전망대에서는 서울시 송파구일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이 옹성의 기능은 요즘 전방지역 GOP와 그 기능이 유사할 것으로 여겨졌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천연요새였던 것이다. 고문님, 회장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과 동행하여 옹성을 다녀오는 과정에서 후미일행 분들과 합류하여 자연스럽게 후미제대가 편성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연주봉 옹성을 그냥 지나친 중간그룹 일행 분들과는 내내 합류하지 못하고 따로 국밥신세가 되었다. 연주봉 옹성 성곽 밖 한편에 음료 등 간식을 판매하는 노점상이 눈길을 끌었다.
- 북문은 해발 367m 지점으로 인조 2년(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다. 전승문이라 칭하며, 문의 폭폭은 3.25m, 높이는 3.65m이다.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전승문(戰勝門)이라고 한다.
-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동으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면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칭하였다. '전승문'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이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서문(우익문)>
- 11:58 서문 경유
– 서문에는 우익문이란 편액이 걸려있어 쉽게 서문임을 식별할 수 있었다. 이미 예고했던 점심식사시간이 임박한 시간대이었으므로 점심을 먹고 가자는 제의에 따라 바람기 없이 아늑한 밥자리를 잡기 위해 발길이 바빠졌다. 서문에서 10여분 남짓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진행방향 왼쪽에 자리한 병암남성신수비 앞에 이르렀다. 병암산성신수비는 그 당시 건축실명제를 실시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사료이다. 정조3년에 수어사 서 명 응이 남한산성을 50여일에 걸쳐 대대적으로 개보수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병암남성신수비 앞 안부에서 점심식사를 할 요량이었지만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기가 장애물로 등장하는 바람에 샛길 안부로 내려가 밥자리를 펴고 시급한 민생고를 해결하였다. 오늘 점심에서는 회장님과 오 경 희 부회장님께서 준비해 오신 담근주가 인기 만점이었다.
-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우익문이라 한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 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했던 문이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이다.
- 서문은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우익문(右翼門)이라 한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여 당시 물자를 수송하던 우마차 등은 이 문으로 드나들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문처럼 홍예식으로, 장방형 홍예기석 위에 5 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이 문을 지났다고 한다.
<수어장대>
- 12;51 수어장대. 청량당 경유
- 점심식사 후 10여분 남짓 오르면서 수어장대 역내(域內)에 들어섰다. 쌀쌀하던 날씨가 풀리면서 수어장대 앞은 얼음이 녹아 신발이 푹 빠질 정도로 질펀하였다. 본래 장대는 전투 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설치한 지휘소이다. 현대와 달리 장군이 직접 전장을 관찰하며 지휘했던 당시에 지휘소의 역할을 하는 장대는 성내에서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보통 우리나라의 성에서 장대는 단층 형태가 주류이나, 남한산성은 2층 누각형태다. 이와 같은 형태는 경기도 수원시의 수원 화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한산성은 넓어서 총 5개의 장대를 설치했는데, 18세기 중엽에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다. 1751년에 이기진이 영조의 명을 받아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다시 세웠지만, 현재 남은 것은 서장대뿐이다. "守禦將臺"란 편액이 붙었다. 수어장대라는 이름은 서장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서장대의 편액을 수어장대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의 수어장대 건물은 1896년 유수 박기수가 재건한 것이다.
- 수어장대는 서문과 남문사이에 있다. 수어장대는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하여 단조로운 난간을 둘렀다. 내부 천정에는 장반자를 귀틀 위에 깔아 단청으로 시문하였고 툇간 위의 반자는 연등천정이다. 내진과 외진 사이 바닥에는 전을 깔고 한쪽에 계단을 설치하여 2층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2층은 1층과 달리 변주에 판문을 달아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있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수어장대의 목부에는 모로단청을 시문하여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
- 수어장대 域內 한편에 청량당이 있다. 청량당은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妻妾)을 모신 사당이다. 1972. 5. 4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본당은 목조 단층와즙 한식 건물로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면적은 108평이다. 본당의 전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 우편에는 벽암대사(碧岩大師)와 이회의 처첩 초상화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원래의 것은 6·25전쟁 때 분실되었고 지금 있는 것은 그 뒤 새로 만든 것이다. 이회는 조선시대인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성의 동남쪽을 맡았던 공역의 책임자였다. 그러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안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도와 삼남지방에 가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이회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 부근의 바위에 앉아 사람들을 노려보다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 보니 그가 맡았던 부분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무죄가 밝혀졌고, 서장대(西將臺) 옆에 사당을 지어 이회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 해마다 한 차례씩 지방 무속인 들이 제사를 지낸다. 당시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고 부른다.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수어장대 역내를 빠져나와 남문으로 향하는 내리막 구간에 접어들면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확인해 본즉 소방차가 출동했던 것이다. 수어장대에서 서울 방향 계곡에서 산불이 났던 것이다. 곧이어 소방헬기가 동원되어 진화작업에 분주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산불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새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남문(지화문)>
- 13:31 남문 경유
- 남문은 오늘 일정 중 마지막 관문이다. 성남시에서 진입하면 남문으로 들어선다. 여기서 도로를 따라 곧바로 주차장 진입이 가능한 지점이다. 북문으로 진입한 탐방객 대부분이 남문에서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앞서 가시던 일행 분들 대부분이 남문에서 주차장으로 진로를 잡았다는 후문을 들었다.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우왕좌왕하다가 동문방향으로 진로를 잡지 아니하고 쉬운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진로선도나 진로안내 미숙으로 인한 우발사안으로 접수하고 그 분들에게 죄송스런 마음 금할 수 없었다. 성곽을 따라가는 코스였기에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 남문은 성의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다. 산성수축(인조 2년 1624)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고 지화문이라 하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구분되며, 홍예문은 높이 4.75m 너비 3.35m 길이 8.6m로 원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건축 양식이 잘 갖추어져 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 남문은 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남문은 정조 3년(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되어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 붙여졌다. 다른 문들처럼 문루와 홍예문으로 나뉜다. 남문은 홍예기석 위에 홍예석 17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동문보다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조금 높다. 현재의 문루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남문 밖에는 성남시에서 보호수로 지정 한 약 35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남한산성 성곽 준공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도에 재정비하여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후미일행 분 중 한 분께서 동문방향 성곽 길로 동행하는 것에 부담을 갖으시고 곧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가셨다. 나머지 분들은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면서 우왕좌왕하다가 마음을 다져먹고 성곽 길로 접어들었다. 마지막 구간에서는 남장대터를 경유하여 제2남옹성에서 오름 구간 정점에 이른 후 내내 내림구간으로 이어졌다. 제2남옹성에서 20여분 남짓 내려가면서 동문(좌익문) 맞은편 주차장에 원점 회귀하였다. 오늘 하산예정시간은 운영시간을 4시간을 잡고 14:00까지 역사관 앞 주차장 하산을 예고했었는데 후미기준 20여분 상당 지체하면서 일상을 갈무리하였다.
- 오늘 하산행사는 주차장 한편 남한산성순교성지 성당 앞 쉼터에서 갖았다. 순교성지에서 먹자판을 벌린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현장의 여건을 감안하여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Ⅳ. 주요(주변)볼거리
- 오늘 주요(주변)볼거리 편은 남한산성순교성지를 선정하였다. 주차장 계곡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성지는 일부 관심 있는 분들께서 순례하는 정도에서 일정을 갈무리하였기 때문에 관심 있으신 분들을 위한 정보제공차원에서 남한산성순교성지 사이트에서 소개한 내용 전문을 참고자료로 올렸다.
▢ 남한산성순교성지
- 남한산성이 보장처로서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광주부는 고을의 지위가 부윤제로 또 유수제를 오가다 1795년(정조 19년) 유수제를 확립하여 한 말까지 유수(정2품)가 임명되었다. 부윤제 하에서 부윤은 도(道)와 행정 실무를 주관하였으나 유수제로 상향조정 되면서 종5품 판관과 종9품 검률이 산성 안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남한산성은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는 특정한 곳으로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고, 광주유수는 행정권과 군사권을 갖고 지휘하게 되면서 광주 일대를 포함한 한강 이남을 통제하게 되었다. 광주가 부윤으로 승격되고 1695년(숙종 21년)부터 광주부윤은 토포사를 겸하게 되었는데, 토포사란 반역도당들을 토벌하고 떼강도와 같은 큰 도적을 잡는 일을 직임하는 관리이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년)에 광주부윤에서 광주유수로 승격하면서 토포영이 여주로 옮겨 갔고, 1760년(영조 36년)에 유수제가 혁파되면서 다시 광주부윤으로서 토포사를 겸하게 되다가 1795년(정조19년)다시 광주 유수로 확정되면서 토포영은 양주로 이전하게 된다. 그러나 토포영은 이전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수어영의 전영장을 맡고 있던 판관이 토포사를 맡아 치안을 담당하였다. 관방의 요지며, 보장처로서 주목되어 산성이 축조되고, 행정치소가 산성 안에 마련되고, 나아가 광주유수가 임명된 남한산성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순교성지로 바뀌게 된 이유는 광주부윤이 토포사를 겸하면서 이곳이 바로 형장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토포사는 광주 고을의 치안을 맡으면서 동쪽으로는 양근의 용진, 서쪽으로는 안산의 성곶이, 북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이천, 여주, 양지, 용인에 이르는 고을 안에서 강도나 역도들을 섬멸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면 토포군관들은 위의 지역으로 나가 천주교 교우들을 잡았던 것이다. 광주 토포사가 관할 광주에는 1784년 공식적으로 교회가 이 땅에 출범하기에 앞서 천주 신앙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였던 천지암을 비롯해 교회가 창설되면서 신앙 운동이 우선적으로 전개되었던 곳이다. 교회의 선구자 이벽(李檗)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운동에 나선 권일신(權日身)은 광주, 양근 일대에 신앙공동체를 조성하였고, 정약종과 정약용은 마재에 공동체를 조성하였는데 이같은 공동체는 박해에 따라 토포사의 표적이 되었다. 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치죄한 최초의 광주 토포사, 즉 광주부윤은 이가환(李家煥)이다. 이가환은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종손이며,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의 숙부로서, 그 자신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한 순교자이다. 그러나 한때는 박해에도 앞장섰는데 1791년(정조5년) 광주부윤으로 임명되어 조정의 뜻을 지키고자 각 면리에 이단 배척의 뜻을 명령하고, 장시에 방을 붙여서 널리 사학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수배를 통해 천주교 신자 4~5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들에게 곤장을 쳐서 신문하고, 결국 마음을 바꾸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 주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 후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에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가 체포되어 1801년 12월 28일(음력) 동문 밖에서 처형되면서 천주교 신앙의 잊을 수 없는 순교지가 되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에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구산의 김만집(金萬集), 김문집(金文集), 김주집(金?集)과 그의 아들들이 체포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구산의 김성희(金聖熙), 김차의(金次熙), 김경희(金敬熙), 김윤희(金允熙), 최지현(崔址鉉), 심칠여(沁七汝)와 서문 밖의 홍희만(洪喜萬), 홍학주(洪鶴周), 이천 단대의 정은(鄭?) 등 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으며 끝내 신앙을 증거 하다가 순교하였다. 광주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상 요충지였으며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1595년(선조 28)에 현재와 같은 성곽이 축조되었고, 1621년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있은 뒤 1626년(인조 4)에 광주 유수의 치소와 마을이 성안으로 이전되었다. 이처럼 광주유수의 치소가 이전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고, 박해 때마다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함으로써 잊을 수 없는 "치명터"가 되었다.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81)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1801) 때에는 이곳에서 최초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1839)와 병인박해(1866)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 행적과 성명을 알 수 있는 순교자들의 수는 극히 적다. 이에 순교자 형양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순교정신을 전하고 있다.<자료출처 : 남한산성순교성지 사이트>
Ⅴ. 특기사항
- 김 정 복 고문님 호두과자(가평휴게소) 협찬
- 김 성 해 부회장님 안착행사(부부촌생선조림) 주류 협찬
Ⅵ. 남한산성 트레킹을 마치고
- 오늘은 남한산성 역사.문화 트레킹을 통하여 아래 두 가지 사항에 큰 의미를 두고 그 의의를 되새기고자 한다.
▶ 첫째,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한산성을 관심 있게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갖았다는 점이다.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 11번째, 산성 중 수원 산성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는 유산에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그리고 문화와 자연유산의 성격이 혼합된 복합유산 등 3가지의 유형이 있다. 이 가운데 문화유산은 기념물·건조물군·유적지 등 3개의 범주로 구분하고 있다. 기념물에는 건축물, 기념적 의의가 있는 조각 및 회화, 고고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유물 및 구조물, 금석문, 혈거 유적지 및 혼합유적지 중 역사, 예술 및 학문적으로 현저한 세계적 가치를 갖는 있는 유산이 속한다. 이 범주에 속하는 유산 중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다음 선정기준 중 하나 이상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인간의 창조적 천재성으로 이룩된 걸작품을 대표하는 유산, 둘째, 전세계 문화사적으로 건축·장식예술·도시계획·조경 등 분야에서 인류가치의 중요한 교류현상을 보여주는 유산, 셋째, 현재 존재하거나 사라져 버린 문명 또는 문화전통에 관한 독특하고 예외적인 증거가 되는 유산, 넷째, 인류 역사의 발달 단계를 보여주는 뛰어난 유형의 건축물이나 건조물 집합체 또는 조경 유산, 다섯째, 뛰어난 유형의 전통 인간 거주지 또는 급격한 변화로 파괴의 위험에 직면한 문화의 대표적 유산으로 토지에 기반을 둔 유산, 여섯째, 행사·생활전통·사상·종교 등 세계적으로 우수한 예술 및 문학작품에 직접적이거나 가시적으로 관련이 있는 유산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굴암. 불국사(1995년), 해인사장경판전(1995년), 종묘(1995년), 창덕궁(1997년), 수원화성(1997년), 경주역사 유적지구(2000년), 고창 · 화순 · 강화 고인돌유적(2000년),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7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대부분 일상을 통하여 체험한 문화유산들이지만 그 의미를 크게 인식한 일상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 둘째, 순교성지 중 한 곳을 순례할 수 있는 기회를 갖았다는 점이다. 지난 1. 22일 조령관문 역사현장 트레킹 당시 김 대 건 신부님과 최 양 업 신부님의 얼이 서린 성지순례에 이어 오늘 조선말 신유(1801), 기해(1839), 병인(1866)년 천주교 박해 당시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로) 등 300여 분이 순교한 성지를 순례할 수 있는 기회를 갖은 것에 감사하면서 큰 의미를 뒀다. 성지는 종교의 발상지이거나 종교적인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을 일컫는다. 우리나라 가톨릭의 경우 전국 곳곳에 성지가 많은 편이다. 한국 가톨릭은 전래 과정에서 많은 박해를 받았고, 상당히 힘든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해받던 시절 순교자들이 많이 발생한 곳이나 신자들이 숨어서 신앙촌을 만들었던 장소를 성지로 지정하여 선양하고 있다. - 끝으로 오늘 일정운영에 협조해 주시고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리면서 남한산성 역사.문화 트레킹 일상정리를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