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 한백겸 이야기. [外-4]
어제일이 너무 걱정 되어서,
백겸이 전화해 봤지만 들리는건 익숙한 안내 멘트 뿐이었다.
하루 종일 수업도 못듣고 불안해하는 백겸.
결국,
라은의 학교로 찾아간다.
'딩동댕동'
그리고 시작된 방송.
방송반으로 보이는 남학생을 억지로 데려다 방송을 시작한다.
되는데로 말하는 백겸의 방송이 나간지 얼마 안된 후.
벌컥 열리는 문.
"한백겸!!!!!"
다행이다.
라은의 얼굴을 보자마자 생각한 백겸의 마음.
아무 일 없어서 참 다행이다.
픽 웃어본다.
아픈 자신을 이렇게 멀쩡하게 만들어준 라은이 대단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라은이 화난 얼굴로 이끄는데도 가만히 잠자코 따라갔다.
"번번이 학교 찾아와서 왜 사람 곤란하게 만드냐고!"
"그러니까 전화 받으라고 했잖아."
"뭐야?"
"니가 전화 안받으니까 걱정되서 온거잖아, 등신아."
오랜만에, 처음으로.
진실되게 말해봤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모라은에게.
그런 백겸의 말에 흠흠거리며 명찰과 핸드폰을 내미는 라은.
하지만, 백겸은 자신의 명찰을 다시 라은에게 건넨다.
"이걸 내가 왜 가져."
"지켜주는거야."
"뭐?"
"앞으로 내가 매일 너랑 있어줄 수가 없으니까.
그거라도 가지고 다니라고."
항상 같이 있어줄 수가 없으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사실, 백겸은 명찰을 교복에 달고 다닌 적이 없었다.
그치만 라은을 만나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야 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닳도록 달고 다녔다.
그런 명찰을 라은에게 주고,
라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픽 웃어본다.
"한백겸 빨리 학교로 가."
"싫어."
"그럼 니 마음대로해. 나 아직 수업 끝나려면 멀었으니까."
라은이 가버리고.
다른 아이들도 먼저 보냈다.
혼자 가만히 앉아 라은을 무작정 기다리는 백겸.
행복했다.
혼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게 아니라, 라은이 올거니까.
올 사람을 기다리는 게 행복이니까.
한동안 라은을 기다리는데,
백겸의 핸드폰이 울린다.
"어."
-백겸이냐?
"왜."
-지금 급한데! 빨랑 여기로 와!
"뭐? 나 지금 바빠."
-씨발, 정예은 쥐어 터질라고 한다고!!!!!
뚝.
정예은이란 이름에 전화를 끊고 서둘러 뛰어갔다.
미안한 아이니까.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라은을 위해서
이용해버린 미안한 아이니까.
예은의 사랑을 이용한다는 죄책감에 백겸은 달리고, 또 달렸다.
"백겸아!!!"
"씨발, 하아. 뭐야?"
"정예은이 너랑 사귄다고 했나봐. 그래서."
"하. 빌어먹을."
천천히, 조심스레 정예은 쪽으로 다가가는 백겸.
눈물 묻은 얼굴로 예은이 얼굴을 올리고,
곧 백겸에게 안겨버린다.
"백겸아."
그리고, 백겸이 예은을 살짝 떼어내자
바로 등에 가해지는 고통.
상대편 누군가가 각목으로 내려친 것이다.
몸이 안좋아 싸움은 피했던 백겸인데.
어쩔 수 없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맞고, 때리고.
맞은만큼 더 때린 백겸이지만 만신창이가 되어버렸고.
흘리는 피를 막으며 서둘러 나가려한다.
"백겸아, 병원가야지!"
"...됐으니까, 따라오지마."
예은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고 뛰어가는 백겸.
곧 힘겹게 도착한 라은의 학교 운동장엔
나루와 휘월 사이에서 덜덜 떨고 있는 라은이 있었다.
심장이 아려오는 백겸.
라은의 떠는 모습에 심장이 찡해온다.
그래서.
"니들 지금 뭐하냐."
백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고갤 돌리며,
눈물 가득한 눈으로 백겸을 찾는 라은.
꽉 안아주고싶은 백겸이었다.
그만큼 너무 여려보였다.
라은의 눈물이 너무 가슴아팠고, 자신의 상처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백겸."
아기같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백겸을 부르는 라은.
백겸은 한껏 인상을 쓴다.
누가 라은을 이토록 떨게, 울게 만든건지.
가만두고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자신의 상태는 살피지도 않고, 라은을 불렀다.
"모라은."
"........"
가만히.
떨리는 눈으로 백겸일 보는 라은.
"내 옆으로 와."
조심조심.
라은이 백겸의 옆으로 가 선다.
동시에 보이는 나루의 씁쓸한 미소,
휘월의 어이없는 미소.
백겸은 라은의 떨리는 손을 꽉 잡아준다.
옆에 있으니까.
안심하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말한다.
"모라은."
"....응."
"귀 막아."
이제부터 자신의 말은 부디 듣지 말라고.
약해지는 자신의 말은.
그냥, 모른 척 넘어가달라고.
"리나루. 강휘월."
"........."
"......제발 나 좀 살자."
부탁해본다.
처음으로 부탁이란걸해본다.
자신보단 라은이 먼저이니까.
자신이 아프고 괴로운것보단, 라은이 아픈게 먼저니까.
죽고싶을정도로 싫은게, 라은이 우는거니까.
두 손을 부르르 떨며,
휘월과 나루에게 말하는데.
문득.
이번엔 라은이 백겸의 손을 꽉 잡는다.
그제야 백겸의 상처를 본 라은.
하지만, 백겸은 아프지 않았다.
라은이 옆에 있었으니까.
라은이 자신의 손을 꽉 잡아 주었으니까.
사랑하는 라은이.
자신을 걱정해 주었으니까.
[047]
※ 한백겸 이야기. [外-5]
"잠깐. 가서 약 사올게."
덥썩.
슬픈 눈으로 라은을 껴안는 백겸.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다른 건 바라지 않을테니,
라은이만 허락해줬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그만큼.
백겸은 라은을 사랑한다.
"....잠깐만."
놀라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라은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슬픈 목소리에,
라은이 움찔 해버리면.
"...미안하다."
"........."
사랑해서 미안하고, 그 사랑이 널 아프게 해서 미안해.
백겸이 속으로 수없이 하는 말.
속으로만 되뇌이고 라은에겐 할 수 없는 말.
작게나마 말해본다.
정말 미안하다고.
"약 사올게 기다려."
차가운 음성으로.
백겸에게 말하곤 약국으로 뛰어가는 라은.
잠시 놀란 백겸이 곧 피식 웃곤, 고갤 푹 숙여버린다.
고인 눈물을 닦지도 못한채.
다친 마음을 정리하지도 못한채.
역시 자신은 안되나보다.
뚜벅뚜벅, 라은의 반응에 가슴이 찢어지듯 아려 와,
백겸은 멍해진채 집에 향한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워 잠에 들때까지도.
아니, 비록 라은의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밤새 생각한다.
안된다고.
자긴 모라은에게 안된다고.
*
"한번만? 응? 딱 한번만!"
"귀찮다고."
"그러지 말고! 응?"
어쩔수없단 표정으로 백겸이 예은을 따라 나선다.
오늘은 단축수업을 하는 날.
라은은 분명 수업을 하고 있을테니까,
방해가될까 전화도 못하고.
저번처럼 무작정 찾아가면 라은이 혼날까 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자꾸 시내로 나가자며 백겸을 부축이는 예은.
1년 전부터.
백겸이 라은을 좋아했을 때부터.
예은이 백겸을 좋아해버렸다.
늘 매몰차게 거절하곤 했지만, 요새 부쩍 예은을 이용하는 일이 많아.
좋아하는 감정이 뭔지 알기에 미안함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은을 따라 시내에 갔다.
하루 종일 떠오르는 라은의 얼굴로,
재잘거리는건 예은의 몫이었지만.
그리고.
'빵-'
갑작스런 급 브레이크 소리에 시큰둥하게 고갤 돌려보면,
백겸의 눈에 비추는 얼굴.
밤새 그리웠던 얼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
"...픽."
웃어버린다.
픽, 시리게 웃어버린다.
백겸이 피식 웃다가, 얼굴을 굳히고 고갤 돌려버린다.
애써 없는 척, 라은을 무시해버리지만.
역시 잘 되지 않는다.
그게, 한백겸이라는 남자다.
어쩔 수 없이 살짝 곁눈질로 본 라은.
백겸은 어느순간 휘월에게 꼼짝없이 안겨있는 라은을 보고,
뚜벅뚜벅.
강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간다.
'퍽'
"뒤질래?"
백겸에게 뺨을 세차게 맞은 휘월이 씨익 비웃는다.
백겸이의 눈이 살기어려질때쯤.
"..병신새끼."
".........."
"지 여자친구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딴년이랑 바람이나 피냐?
바람피려면. 안걸리게 잘 피던지."
백겸이 라은의 눈을 응시한다.
너무 미안해서 다가갈 수도 없는데, 이렇게 놓치고 싶진 않았다.
아파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욕심 한번 부리고 싶었다.
"...오늘만이다.
강휘월이 마음 넓게 피해주는 거. 딱 오늘까지."
저 녀석은 다 알고 있겠지.
백겸은 생각한다.
자신의 일이라면 시시콜콜 간섭하기 좋아하던 녀석이니까.
이번에도 재미나 보려고 하는 웃긴 놈이니까.
근데.
그 눈빛이 여느때완 다르게 진실되 보여서.
심장이 미친듯 뛰어왔다.
"모라은."
"......."
"어디봐."
라은이 다른 남자를 보는게 싫어서,
살짝 손으로 고갤 자신의 쪽으로 옮겨 놓았다.
늘.
모라은만 생각한다.
이렇게 좋아져 더더욱 나오기 힘겹게 되었는데도.
".....멍청이."
"........"
"..얼굴이 그게 다 뭐야."
자신을 걱정해주는 라은이 진심으로 좋다.
따뜻하고 예쁜 아이가.
너무 좋아서, 이젠 못된 척 구는 것도 더 힘들어졌다.
"어제 그냥 가버렸으면 병원이라도 가던지."
"..........."
"............."
"........."
"오늘도 안돼?"
눈물 가득한 눈으로 걱정스레 백겸을 바라보며 말하는 라은.
백겸이 그제야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는 라은을
궁금한듯 쳐다본다.
"치료. 오늘도 내가 해주는거 마음에 안들어?"
피식.
귀여운 그 모습에 백겸이 웃어버린다.
왜안되겠냐고.
어서 가자고 이끌려던 백겸.
그런 백겸의 손이 허공에서 맴돈건.
"정예은!!!!"
라은의 뺨을 있는 힘껏 내려 친 예은의 손때문에.
급하게 뛰어와 라은만 노려보는 예은.
그 모습에 백겸이 어이없는듯 커다랗게 소리를 지른다.
"내가 이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정예은."
"너 진짜 웃겨, 모라은. 알아?"
"그만해라."
잠잠하게 깔린 백겸의 목소리.
그가 화났다는 걸 단박에 보여주는데도
예은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기지배가 남의 남자를 뺏어?"
"....그만."
"어제 한백겸이 왜 그렇게 다쳤는지 알아?"
그리고 그 마지막 말에.
"정예은!!!"
"정예은때문에. 나때문에."
백겸의 마지막 기회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버린 정예은의 말에.
라은이 놀란 눈으로, 상처받은 눈으로 뒤돌아버린다.
"모라은."
이렇게 백겸을 뒤에 두고선,
등을 보인다.
"...치료해줘야지."
"........"
가슴아픈 백겸의 말에도, 상처 될 그 아이의 대답이.
슬프게 중얼거리듯 튀어나왔다.
"정예은이 해주겠지."
라고.
*
"....작작 까불어."
"......."
지긋이 입술을 깨무는 예은.
그런 예은을 자신의 등 뒤에 세워 놓고선 애써 꾹 참는 목소리로,
힘겹게 한자한자 내밷는 백겸.
"내가 오냐오냐 해주는건."
"......."
"니가 불쌍해서야."
하.
어이없는 실소와 함께 정예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알고 있는 백겸이지만, 궂이 멈추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예은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자신에겐 라은 뿐이니까.
더이상 예은에게 헛된 꿈을 꾸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서 빨리 정예은이 자신을 포기해줬으면 생각하곤 했었다.
"앞으로 내 일에 끼어들지마."
"........"
"다시 한번 이러면."
.....
"내가 죽을거다."
가장 슬픈 말.
'너를 죽일거야' 가 아니라,
'내가 죽을거다'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말.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
백겸은 알고 있었으니까.
사랑이 뭔지.
얼마나 아픈건지.
일부러 예은에게 더 못되게 말한다.
어서 진짜 사랑을 찾아 가라고.
자신은.
죽어도, 죽어서도.
정예은이 아니라, 모라은 뿐이라고.
[048]
※ 한백겸 이야기. [外-6]
"...뭐야."
갑작스레 피곤이 몰려와 잔뜩 쳐진 목소리로 전활 받는다.
그럼, 상대편에서 들리는 높은 목소리.
-어이, 한백겸이. 잘 있으셨나?
"...뭐야, 너. 선덕고 똘마니 아니냐?"
-어. 아이고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인데?
이런 놈과 상대할 힘은 정말이지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끊으려 했는데.
"용건 없음 끊어라."
-아. 용건. 그래 있지, 용건.
지금 니 여자친구 여기 있거든? 어쩔래? 올래?
여자친구.
분명, 또 정예은이 나서서 그랬겠거니.
하고 대수롭게 여겼다.
헌데.
"정예은인가? 그 기지배 지금 여기 있거든?
오냐. 빨리 와라~ 아참.
한기지배 더 있긴한데. 모라은인가?"
모라은.
또 그 여자가 심장에 박혀버렸다.
떨려오는 심장에.
혹시나 자신때문에 그 여자가 다치진 않을까.
걱정되고, 화가나서.
"..건들면, 진짜 죽여버린다."
미치도록 달렸다.
*
'끼이이익-'
급하게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맷을 벗으며 모라은을 찾는 백겸.
뚫어지게 라은을 응시한다.
"이새끼, 보기보다 사랑에 약하네?"
"낄낄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신경들이 모라은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고.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진정시키며 모라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어딜!"
그치만, 그리 호락호락하게 라은을 넘겨줄 놈들이 아니었다.
단박에 열댓명의 무리가 백겸을 둘러 쌌고,
백겸은 심장을 라은에게 고정시킨채 말했다.
"이렇게 쉽게 구해주면 영화가 안살지. 안그래?
이 형님들이 멋지게 해줄테니까. 넌 그냥 죽을 준비나 하면돼."
"양아치새끼들."
"뭐?"
"모라은. 눈 감아."
이런 나쁜 모습은 보지 말라고.
넌 예쁜 모습만 보라고.
"...좀참았어야됐어."
"뭐래냐, 이새끼."
"다른거 다 건들여도. 모라은은 좀 참았어야됐어."
모라은을 건드는 건.
죽자는 것 뿐이다.
백겸에게 가장 소중한 모라은을 건들인건.
세상 사는 동안
가장 현명하지 못했던 일이다.
"오늘."
"........"
"우리 전부 다."
"......."
"뒤지는거다."
죽을 각오로.
한명, 한명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금새 모두 쓰러뜨렸는데.
"야!!!!!!!"
놀란 얼굴로 고갤 돌리는 백겸.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오돌오돌 떨며 눈을 감은 라은의 위로
각목을 들어올린 한 남자의 모습.
백겸은.
그렇게, 아픈 몸을 날렸다.
★
왁자지껄.
구급차로 백겸이 병원에 도착했고,
피 범벅 된 백겸의 모습에 병원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어떻게 된 거죠?"
"학생들끼리 충돌이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간호사와 구급대원의 대화.
곧, 구급대원이 또다른 환자의 이송을 위해 나가버리고,
간호사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에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런."
"왜요, 선생님? 아는 분이세요?"
"후. 혈소판 무력증 환자예요."
"네?"
많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떠보인다.
아직 신입인 간호사에겐 많이 낯설고 무서운 병이었으니까.
아직 치료할 방법도 모르는 희귀병.
"몸에 많이 무리가 갔을테니까, 특별히 잘 관리하세요."
"네."
"아참. 보호자나 병문안 오는 사람들한테는 이 환자 병명 말하지 말구요."
"네? 왜요?"
".......환자가 거부한 사항입니다."
*
흰 시트.
온통 흰 공간에 상처 가득한 얼굴로 누워 있는 백겸.
한동안 조용해서 무서울 정도로 긴 침묵이 태빈과 형동, 나루와 그 외 수공고 학생들의 등장으로 깨졌다.
금새 시끄러워진 병실.
"야. 니들 먼저 가라."
"네?"
"백겸이 안정 취해야 한다니까, 우리 셋만 남고 다 나가라고."
"네."
한, 두명.
아이들이 빠져나간 자리엔 형동과 태빈, 나루만이 남았다.
'철컥'
"어, 라은이 왔네."
평소와 달리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태빈.
라은의 모습은 정말이지 위태로워 보였다.
땀과 눈물 범벅된 얼굴로 걱정을 가득 묻힌채.
백겸의 얼굴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데리러 갔어야됐는데."
슬프게 중얼거리는 나루.
나루의 말에 라은이 백겸에게 집중된 눈을 돌리지도 못하고,
고개만 살짝 젓는다.
그럼, 나루가 씨익 웃는다.
많이 슬픈 얼굴로.
"백겸이. 백겸인 괜찮아?"
"하필 머릴 맞아서. 응급수술 하긴 했는데.
아직 깨어나질 않아."
".........."
형동의 말에, 라은이 무너지듯.
형동이 앉았던 자리를 양보하자 곧장 앉아버린다.
다리에 힘이 풀렸을테니까.
절망감에 가득한 얼굴로.
슬픔에 구겨진 얼굴로.
"흑. 흐흑."
"왜울어, 라은아!"
놀란 태빈이 오빠처럼 라은의 등을 토닥거린다.
하지만, 쉽게 그치지 않는 눈물.
라은이 눈물로 새어나오는 말을 한다.
"내가. 흑흑. 내가 백겸이......"
"니가 백겸이 다치게 한거라고?"
고갤 끄덕이는 라은때문에 피식 웃는 형동과 태빈.
"그런말이 어딨어."
"전화받고 저새끼 얼마나 급했는지 모르지?"
".........."
태빈의 말에 이어 들린 형동의 말.
라은이 고갤 번쩍 든다.
"저자식.
지금도 자면서 걱정할지도 몰라.
그만큼 물어볼새도 없이 급하게 뛰어나갔으니까."
한백겸은.
......그렇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플 사랑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049]
※ 한백겸 이야기. [外-7]
조심스레.
백겸의 눈이 떠졌고, 이내 환한 빛에 다시 감긴다.
"백겸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혹여나 라은일까, 조금의 기대를 갖고 눈을 떠본다.
하지만, 백겸의 눈에 비친건 예은.
자신의 기대에 허탈해진 백겸이 픽 웃어버린다.
"....괜찮아?"
"......."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게 다 싫었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한백겸."
"......가라, 그냥."
지친건지, 귀찮은건지.
살짝 몸을 일으킨 백겸이 축 쳐진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그런 백겸의 말을 무시하고.
"....백겸아."
백겸에게 안긴 정예은.
'툭'
예은을 떼어내려던 백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고,
이내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뭐야."
"백겸아. 혹시 어제 그 놈들 아닐까?
응? 또 온거면 어떡해? 응?"
"내가 나가볼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
덜덜 떠는 예은을 애써 안정시키고, 백겸이 발을 옮겨
병실 문을 열었다.
"모라은."
자신의 눈 앞에 뒤돌아 등만 보여주는 라은.
가슴이 아팠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라은이 있었으니까.
눈을 떴을 때, 라은이 반겨주었으니까.
"잠깐. 미안, 먼저 가볼게."
덥석.
가려던 라은의 손을 잡아 안아버렸다.
죽을 것 같이 괴로웠던 머리가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라은에게서 풍기는 아기 향기가.
백겸은 너무 좋았다.
하루종일 맡고 싶을 정도로, 라은의 모든 것이 그저 좋기만 했다.
"...안죽었네, 모라은."
"........너야말로. 죽는 줄 알았어."
픽.
걱정 가득한 라은의 말투에 백겸이 픽 웃어버린다.
그래서 깜빡 잊은게 있다면.
"하아, 너네 지금 뭐하는거야?"
구겨진 얼굴로 울먹거리며 말하는 예은.
황당하게 웃는 예은의 기척에,
백겸이 살짝 라은의 어깨를 잡고 떼어낸다.
싫었으니까.
또 라은에게 상처를 줄까 너무 싫었으니까.
지금 자신이 라은을 껴안은 자체도.
나중엔, 라은에겐 독이 될테니까.
이 작은 사소한 것조차 자신과 라은에겐 용납될수 없으니까.
"한백겸."
"정예은. 먼저 가."
"한백겸."
"...그냥 오늘은 먼저 가라."
"...한백겸."
예은의 슬픈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 복도를 울린다.
눈물 방울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애절한 예은의 목소리.
"모라은 있는데서. 지금 여기서."
".........."
"똑똑히 말해."
"................"
"어제 그렇게 힘들게 뛰어온거."
"......."
"모라은 때문이야, 나때문이야?"
어이없는 물음.
당연히 라은때문인, 너무 쉽고 쉬운 질문.
하지만 딱 한사람.
한백겸에겐, 죽고사는 문제가 달린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
"........말해."
정예은이 아닌, 모라은을 사랑한다.
그래서 정예은이다.
그럴수밖에 없다.
모라은을 사랑하니까.
그 아이가 다치고, 우는 게 너무나도 싫으니까.
자신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줘도
자신은 슬플것같지 않으니까.
오히려 울고 힘들어 하면, 더 자신이 아플 것 같으니까.
라은이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해줬으면 좋겠으니까.
차라리 이렇게 잠시잠깐 울고 말았으면.
자신의 죽음으로 평생 울지 않고, 지금 하루만 딱 울면 되니까.
"....정예은."
말해본다.
모라은이라고 심장이 외치고 있지만.
조용히 말해본다.
부디, 아프지 말아달라고.
"하. 그래, 정예은. 니가 이겼어."
"............"
"내가 착각했나보네.
멍청이같이 또 혼자 속졸이고 힘들어했나보네.
그럴필요 없었을텐데. 바보같이.."
심장이 찢어졌다.
더이상은 찢어질수조차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심장이.
또 한번 갈기갈기 찢어진다.
라은의 말 한마디에.
백겸의 온 몸이 불타버리는듯 아프다.
죽을만큼.
차라리 죽는게 좋을만큼.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는 것보다 더 한것도 하고싶을만큼.
"..정예은."
"응?"
".......사라져."
활짝, 눈물 묻은 얼굴로 웃던 정예은의 표정이
슬픈 백겸의 말로 굳어버린다.
"모라은 저 기지배 때문에 이래? 그깟 기지배가!!"
'짝'
예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차오르는 예은의 눈.
하지만, 백겸은 차갑게 시린 눈 뿐이었다.
"뭐야, 너?"
"...빨리. 지금 당장."
".....하."
"사라지라고!!!!!!!!!!!!!!!!!!"
멈칫.
놀란 얼굴로, 뒷걸음질치는 예은.
곧 가버리는 예은의 모습에, 백겸이 하하 웃어버린다.
어이없는 웃음을.
"....하하."
눈물 한방울을 흘려보내며.
*
"국태빈."
"엉?"
"오늘 모라은 학교에 좀 가봐."
"응?"
"묻지말고. 이거 들고 가봐."
"와. 웬꽃?"
"내가 주는거라고 하지 마라. 알겠어?"
아침 일찍.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한 장미 꽃다발.
라은에겐 꽃 한번 준적이 없어서.
어떤걸 주면 좋아할까 고민해봤지만 모르겠어서.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장미 꽃으로 준비했다.
조심스레, 태빈에게 전해주고는.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창가 너머 밖을 바라보는 백겸.
이제, 얼마나 볼 수 있을까.
그 아이, 이 세상.
"야, 한백겸."
"나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밖이나 보면서, 라은이 아니라면 아무도 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백겸을 가만 놔주지 않았고,
"나가라고, 씨발!"
이것저것 집어 던지기 시작하는 백겸.
병실이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야, 저새끼 잡아!!!"
대여섯명이 백겸에게 달라붙어 백겸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에 커다란 목소리로 소릴 지르는 백겸.
"놔!! 씨발, 안놔!!!!?"
그게 반항이었다.
세상을 향한 반항.
자신을 무참히도 버려버린 세상을 향한.
...작은, 외침.
[050]
※ 한백겸 이야기. [外-8]
더러워진 병실.
백겸의 팔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
병실에 들어온 라은의 입이 떡 벌어진다.
"야, 야. 한백겸!"
"빨리 저 자식 말려!"
곧, 백겸이 다시 옆에 있던 꽃병을 손에 집에 던지려한다.
백겸의 친구들이 말려봤지만, 역시 힘에 부치는 일.
결국, 라은이 살짝 미소지으며 고갤 끄덕이자 그 친구들이 병실을 나갔다.
라은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르는 백겸이, 꽃병을 집어 들면,
뒤에서 백겸을 꽉 껴안는 라은.
백겸이 멈칫.
"..............."
"........백겸아."
놀란 백겸이 손에 힘이 쭉 빠져, 꽃병을 놓쳐버린다.
깨져버린 꽃병과 파편으로 긁혀 볼에 피가 흐르는 라은.
백겸이 서둘러 뒤돌아 라은을 뚫어지게 본다.
"......씨발, 진짜."
".........."
"우린 진짜."
답답했다.
왜 자신들은 안되는건지.
이게 뭔지.
왜 하는 일들마다 자신은 라은에게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건지.
너무 화가났다.
그래서, 다시 뒤돌려 했는데.
라은이 재빠르게 백겸의 허리를 껴안았다.
"....비켜, 피묻어."
"묻어도 상관 없어. 한백겸 피로 목욕한다고 해도.
.....한백겸이니까."
혹시나 자신의 심장소리가 라은에게 전달될까봐.
일부러 꾹 참고 라은을 떨어뜨리려 하는데,
곧 들리는 라은의 말에.
백겸이 살짝 미소지어보인다.
하지만, 백겸이 웃음을 지우고 고갤 흔든다.
이러면 안되는 거니까.
답답하고 미칠듯 괴롭지만.
자기만 아프면 다 끝날 일이니까.
라은이 아픈 건 죽어도 못 보겠으니까.
"나."
"........."
"매일 너 울게만 했었거든.
너 다치게만 했었고, 위험하게만 했었어. 이제 그만 비켜."
나쁜척.
차갑게 목소릴 내보지만 역시나 라은을 향해 나온 목소리는
너무나도 슬펐다.
라은을 떼어내려 손을 들면,
라은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힘겹게 소리지른다.
"좋아한다구!!"
좋아한다고.
자신은 할 수 없는 말.
평생 듣고 싶었던 말이지만, 지금은 아닌 말.
세상 무너지는듯 들리는 말.
그래서.
지금도 세상이 원망스런 말.
"......등신."
"........"
"...그냥. 차라리 증오나 하지."
자신은 아니라고, 속으로 수없이 외쳐본다.
제발.
자길 원망해 달라고.
결국은 울릴 수밖에 없다고.
자신이 울리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외쳐보지만.
그것뿐이다.
라은에겐 들리지 않을테니까.
"뭐하러 좋아하냐, 나같은 놈."
"....백겸아."
"근데."
애달픈 라은의 목소리가, 백겸을 잡지만.
어쩔수없다.
나쁜놈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더이상 라은과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끝날때가 된 것이다.
"..난 너 좋아할수가 없거든."
툭.
풀려진 라은의 팔.
백겸이 슬픈 미소를 지어본다.
이제 됐다고.
이제 끝이라고.
이제.
......이제.
"...........하."
너무 아파서.
자신에게서 물러나려던 라은의 손을 꽉 잡는다.
이렇게 심장이 뛰어.
모라은을 보면 심장이 미쳐버려.
근데.
좋아할수가없어.
".....하, 왜? 응? 하하. 이유가 뭔데?"
"비밀."
"...한백겸."
씨익 웃는 백겸의 얼굴이,
눈물이 차올라버린 라은의 눈에 비친다.
너무 슬프다.
분명, 언젠가 라은에게 이런 말을 할때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런 추억도 없는 두 사람이었기에.
아직은.
너무 빠른 이별이었기에.
".......나쁜놈."
"........."
"개자식."
"..........."
"...................미친놈."
백겸의 가슴을 라은이 내려친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라은에게 맞는 가슴보다, 뛰고있는 심장이.
얄밉게 새근새근 뛰는 심장이.
더 많이 아프고, 쓰라려서.
이렇게 라은이 자신을 미워해주는데도.
원하던 일이었는데도.
심장이 많이 아프고 아프다.
".....모라은."
".....흑."
"............픽."
라은의 손길을 맞고 있던 백겸이,
문득.
라은의 손을 잡고 그대로 거칠게 안아버린다.
그리고.
살짝 라은을 떼어넨 후.
미칠듯 아픈 미소를 지으며.
너무 슬프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맞춰버린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한백겸만 이별을 준비하는.
....모라은은 모르고,
한백겸만 아는, 한백겸만 슬픈 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