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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은 이렇게 시작해요.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우리는 매주 이 질문을 던지는 사이가 아닐까 해요. "감정이입은 이야기꾼의 재능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방법이다. 심장마비로 말을 잃어버린 노인, 처형인 앞에 선 젊은이, 국경을 넘는 여린, 롤러코스터를 타는 어린애처럼, 오직 책에서만 접해 본 사람이 되어보는 것 혹은 나와 침대에 나란히 누운 옆 사람이 되어본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금요일 저녁이네요. 지금쯤 누군가가 되어 보는 중이신가요? (과제하고 계신가요?의 돌려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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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
출산 이후 앉기 힘들 정도로 아픈 필자에게 시어머니가 건넨 첫 마디가 “젖 물려야지”라니. 정말 속상해요. 시어머니의 말을 필자는 “나의 고통을 조금도 읽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가족이 아니라는 의미였다”라고 해석하는데요. 심심은 고통을 읽어주는 관계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싶었어요. 그렇다면 “힐책의 말”을 하고, 육아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요. 그럼에도 지금도 함께 하는 건 왜일까요. 남편에게 했던 약속, 그리고 세월호 사건의 영향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외부 영향은 나오는데 필자 내면에는 어떤 마음이 일어나 이런 결정을 했는지 나오지가 않네요. 중요한 결정인 만큼 이유를 적어주면 좋겠어요. 첫 부분에 시어머니의 요리 실력에 대한 서술은 주제와는 거리가 있어요. 지금 필자가 어떤 상황에 있고 고민에 처해있는지 현재 상황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보면 좋겠어요. 저는 이 글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두 가지로 느껴졌어요. 시어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우리는 가족이 될 수 있을까?), 그걸 외면하는 다른 식구들에 대한 이야기(다른 식구들이랑 분담해야죠). 당연히 얽혀있겠지만 두 가지 중 초점을 잡아보세요. 작은 분량에 오랜 시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궁금한 게 많았는데요. 자연스럽게 셋이 가족이 되었다고 했는데 같이 살게된 구체적인 정황, 13년 동안 남편이 나와 원가족에게 헌신했다고 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지금 시어머니의 돌봄을 다른 식구들이랑 분담한다고 할 때, 그 다른 식구들은 누구인지. 정보를 더 채워주세요. (중간 중간 너무 긴 문장은 의미 전달이 어려우니 나눠주세요.)
은유 - 그렇습니다. 서두와 결말에 직접 인용된 문장이 힘 있게 와닿으려면 떠넘기는 ‘다른 식구들’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만 정황이 이해됩니다.
히힛
저도 어릴 때 ‘짱구는 못말려’ 즐겨 봤는데요. 늘 짱구의 시선으로만 봤는데 히힛 글을 보니 엄마 봉미선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돼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 같아요. “나는 그때서야 엄마의 불응에서 엄마의 삶을 읽어낼 수 있었다.” 우연히 만난 간호학과 대학생 언니 덕분에 엄마 삶의 다른 면을 슬쩍 엿보며 시각이 변하는 구성이 좋았어요. 짧은 순간 지나가는 말 한마디이지만 누군가를 향한 내 시선을 바꾸는 장면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결말에서 엄마는 ‘최선을 다하는 엄마’로, 나는 ‘엄마의 침입자’로 딱 갈라 구분하는 부분이 아쉬워요. 엄마의 삶을 긍정하면서도, 어렸던 필자의 마음과 욕구를 함께 긍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필자의 문제 의식처럼 그 모든 요구가 ‘엄마’라는 존재에게 쏠리는 것은 문제지만, 애정을 구했던 아이의 마음도 저는 이해가 가요. 자기 반성보다는 자기 욕구와 엄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은유 - “다른 친구들이 가진 그런 엄마를 가질 수 없는 나 자신만이 불쌍했었다.” 등등 자기 욕구는 중후반부까지 충분히 드러나는 것 같아요. 다만 마무리가 엄마에 대한 이해로 가파르게 전환되는 부분을 도리 조언대로, 좀더 섬세하게 현실의 언어로 수정하면 좋겠어요.) 대학생 언니와 만난 이후 새롭게 알게 된 엄마의 다른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끝나면 좋겠어요. 첫 문단 만화에 대한 설명은 주제에서 벗어나니 줄여주세요.
꽃우물
세 편의 영화를 통해 필자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상인지를 읽어냈네요. 가족의 허상을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제가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을 착취한다는 사실도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아닌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를 노출시킬 때 진짜 가족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 질문이 눈에 띄었는데요. 정작 꽃우물의 생각이 나오지 않아 궁금했어요. 정상,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을 떠나 생각했을 때 꽃우물은 가족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 힌트처럼 등장한 “우리집이 정상가족이 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문장을 경험에 근거해 풀어줘도 충분히 정상가족을 비판하는 꽃우물’만’의 글이 나왔을 거 같아요. 이전에 봤던 꽃우물의 글들과 달리 이번 글에는 추상적인 문장이 많았어요. 짧은 분량에 세 편의 영화를 다루다 보니 설명이 충분치 않고, 세 영화가 다루는 초점이 조금씩 달라서 핵심 메시지를 찾기 어려웠고요. 소설을 읽듯 눈앞에 그려지는 문장을 쓰는 꽃우물만의 장점을 살려 경험에 근거한 자신만의 가족 이야기를 써보면 좋겠어요.
재아
아침에 일어나 잠든 옆사람을 관찰하고, 화분과 대화를 하고, 인형까지 괴롭히는 필자. 시각과 후각, 촉각을 총동원해 잠든 옆사람을 관찰하는 모습에서 필자가 상대를 얼마나 애정하는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정말 부지런하네요. 몇 시에 일어나는 걸까요? 해도 안 뜬 새벽일까, 이른 아침일까. 글을 읽으며 시간적 배경이 궁금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집안 풍경을 재아만의 시선으로 세심하게 묘사하여 흐뭇하게 읽었는데요. 읽고 난 후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했어요. 필자는 왜 먼저 눈을 떠서 집안 곳곳을 이렇게 관찰할까요? 산책하거나 잠을 다시 청하거나 할 수 있는데 집안에 있는 사람과 식물, 물건들을 조금씩 건드리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제목이 “먼저 눈을 뜬 아침”인 만큼 이 아침의 의미가 필자에게는 무엇인지 의미화해보면 좋겠어요. “잘 보이려고 그러지 않아도 돼. 꽃이 없어도 가족이야.” 같은 문장은 임팩트가 있는데 그냥 흘러가 아쉬웠어요. 각 장면들의 의미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으면 좋겠어요. (간혹 주어가 없어 헷갈리는 문장이 있었어요. “후각은 예민한 편이다.” 같은 문장은 앞에서 옆 사람에 대한 관찰이 주를 이루던 문단 바로 뒤에 나와서 헷갈렸어요. 주어를 명확하게 써주세요.)
은유 - 초단편 소설처럼 인물이 살아있고, 분위기를 전하는 묘사 능력이 좋으니 주제만 잘 살려주면 좋겠어요.
콩스탕스
사돈어른 생일상 차리는데 콩스탕스의 스케쥴을 확인하다니! 한 문장만으로 상황이 정리되네요. “가족들 눈에는 안 보이는 것 같은 집안일이 내 눈에만 보이”고 “기획 콘셉트보다 저녁 메뉴 고민이 길어질 때” 같이 가사노동의 하중을 홀로 짊어져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좋았어요. 가족 안에서 필자가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제가 몇 년을 지켜본 것만 같아요. “내 시간에도 ‘고모꺼’ 이름표를 붙이자”라는 문장이 없었다면 고구마 백 개 먹은 기분을 해소할 수 없었을 거예요. 결국 필자는 “독립”을 결행하는데요. 저는 독립을 결심하는 과정이 좀더 자세하게 그려지면 좋겠어요. “가족과 같이 사는 일이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나의 호오를 넘어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으니까.”라고 했듯이 독립의 과정도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애인과 살지 않고 혼자 살기를 선택한(맞나요?) 이유도 궁금했어요. 독립 결행이 쉽지만은 않았을 거 같아요. 지금 사는 가족들의 저항은 없었는지도 그 반응도 넣어주세요. 결말에 애인과의 이야기보다는 지금 가족과의 관계 정리, 거리두기를 어떻게 실행했는지 이야기가 들어가면 좋겠어요. 중반에 조카들을 향한 필자의 마음이 드러난 부분에서 인용이 길어요. 그보다는 나의 사례를 넣어주세요. 위트 넘치는 콩스탕스의 글 재밌게 읽고 있어요. (독립 축하드려요. 근데 우리 그럼 이제 동네 친구 아닌가요? ㅜㅜ)
윤팔
딸과 함께 갔던 겨울 제주 여행. 엄마와 단둘이 시린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아이에게 이 여행이 어땠을까 상상하며 읽었어요. “오름이든 해변이든 마을 길이든, 나보다 먼저 뛰어가 바람을 맞고 뒤돌아서 ‘엄마 빨리 와’ 나를 이끄는 너” 사랑은 절로 관찰하는 힘을 주는가 봐요. 아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4년 전 여행을 이토록 상세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처음 읽을 때는 ‘우리가 누굴까?’ ‘아이는 누굴까?’ 궁금해 하다가 하나씩 9살 딸이라는 걸, 그리고 둘이 간 첫 여행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저는 이 정보들이 맨 처음에 나오면 좋겠어요. 4년 전, 9살 딸과 첫 여행을 갔다는 정보를 알고 이 글을 읽는 것과 아닌 것에 차이가 커요. 그래서 전 두번째 읽을 때 더 좋았어요. 아 ‘둘만의 첫 여행’이 얼마나 애틋할까 하면서요. 인물이 나올 때는 누구인지 최소한의 정보값을 주지 않으면 궁금해서 독자는 집중이 잘 돼요. “아마 몰랐을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믿고 따랐다는 것을.” 이 문장 감동적이네요. 결말에서 딸과 “가족을 넘어선 유대를 꿈꾼다”는 이야기가 좋았는데요. 마지막 문단에 “흔들림 없는 어떤 태세를 갖추”겠다고 해서 의아했어요. 전 유대는 서로의 취약성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 일어난다고 생각했거든요. 흔들림 없는 태세를 갖춘 엄마보다는, 윤팔이 어떤 모습으로 딸과 유대를 만들어 가고 싶은지 그 이야기를 적어주면 좋겠어요.
은유 - 둘만의 여행에 관한 관념적 해석이 반복되고 후반부까지 길어지는 느낌이에요. 그보다 여행 이전에 일상은 어떠했고 둘의 관계는 어땠는지가 배경으로 나와야 여행의 특별함이 더 살아날 것 같아요. “쉽게 흔들리는 내 자신을 허락하지 않겠다” 등 이런 문장은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혼란을 주네요.
프롬
“책임에 짓눌린 엄마의 삶은 불행해 보였다.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건 저런 모습이구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문장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네요. 필자에게는 책임이라는 단어가 불행한 엄마의 이미지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구나 공감하며 읽었어요. 아빠의 빚을 책임지는 엄마를 보며 가족이 곧 속박이라고 느꼈던 필자. 각자도생을 마음에 새기고 경제적, 정서적으로 독립된 생활을 꾸려가는데요. 고양이 꼬북을 만나며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네요. 역시 고양이는 놀라운 존재에요. 저는 이 전환이 중요해보여요. 애인 이야기는 필자가 가족을 원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문장만으로도 충분할 거 같아요. 그 부분을 덜어내고 고양이를 돌보며 어떤 전환이 일어났는지르 서술하면 좋겠어요. 그 과정이 생략되니 ‘고양이를 돌보는 나’과 ‘남편의 빚을 갚아야 했던 엄마’를 연결하는 과정이 비약으로 느껴져요. 프롬은 꼬북을 돌보는 자신에게서 어떤 엄마의 모습을 발견했을까요? 그 과정에서 엄마의 어떤 모습을 새롭게 이해하게 됐을까요? 엄마를 개인으로 보겠다는 결론은 추상적이에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된 엄마의 모습을 프롬의 시선으로 이야기해주어야 이 글의 의미가 삽니다. (“느닷없이 고양이를 데리고 왔다”라고 했는데 동거인들 동의 없이 그럴 수 있나 의아했어요. 구조한 고양이였던 걸까요? 설명이 필요해 보여요.)
은유 - “꼬북을 위한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 됐다.” 이것을 지극히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과 동일시한 것이라면 모성을 신성시하고 절대화하는 느낌도 들어요. 그보단 앞부분 고양이의 물, 밥, 화장실 등 일상을 챙기면서 엄마의 돌봄을 이해하는 식으로 연결지어주면 자연스럽겠습니다. 가족 제도를 후려치지도 말고, 각자의 마음에 집중하기. 이 부분이 좋은데, 필자의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변한 걸까요? 그 부분이 궁금했어요.
다인
새벽 한 시에 울린 카카오톡 알람. 시작부터 불길한 예감에 바짝 긴장했어요. “이걸 지금 확인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내면 묘사를 따라가며 필자가 된 듯 몰입해서 읽었어요. ‘선생님이라면 이래야 해’라는 검열 없이 있는 그대로 속마음(내적 갈등)을 적어주어 공감갔어요. 뒷부분에서 “학교의 부재는 가려져 있던 가족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문장이 나오는데 전 주제가 갑자기 바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두만 보고는 학생들을 돌보는 일이 일상을 침범해 들어와 고뇌하는 교사의 이야기인 줄 알았거든요. 뒷부분의 돌봄 공백으로 인해 방치되는 아이들의 문제가 주제라면 문자를 보고 갈등하는 부분은 줄여도 좋겠어요. 첸이 위험한 상황에서 상의할 어른 하나 없이 혼자 있었다는 것이 강조되도록요. 마지막 두 문단이 핵심 메시지인데 추상적인 내용이라 아쉬워요. 교사로서 필자는 언제 가족 안으로 들어가 아이가 잘 돌봄받는지 확인하는 게 어렵다고 느꼈는지 그 사례가 나와주면 좋겠어요. 코로나 시대에 “가족이란 허울 속에” 돌봄을 제대로 받지 않는 “이름 모를 아이들”을 떠올리며 글을 읽었어요. 교사로서 필자가 이 아이들을 위해 노력함에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게 하는 구조적 한계가 무엇인지 경험적 근거와 사례를 들어 짚어주세요. 다인의 글을 보면 어린 시절 나도 다인 같이 따뜻한 교사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올해 5학년 담임선생님께 잘 '토스'했다고 생각했는데.” 토스란 표현이 물건을 떠올리게 해 마음에 걸리네요.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은유 - “곁에 있는 내가 보낼 수 있는 ‘응답’에 대해 생각했다.” 이 마무리 문장이 좋아요.
딜리아
“엄마는 평생을 자식들에게 뭐든 받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사셨다.” 저도 엄마가 참기름 하나 사드리는 데도 “큰일 날 것”처럼 미안해하는 모습이 늘 마음에 걸려요. 부모, 자식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대등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 완벽히 대등한 관계는 없지만, 이 기울어진 시소가 조금이라도 균형을 맞춰야 눈을 맞출 수 있을 텐데요. “이제 엄마만 생각하면서 살아요!”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식들에게는 엄마처럼 미안한 마음을 품는 필자의 내적 갈등에 공감이 갔는데요. “나는 어쩔 수 없이 여자이고 엄마이다.”라는 결론이 아쉬웠어요. 풀기 힘든 삶의 갈등을 쉽게 해소해 버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헌신과 희생의 모성이 여성의 본성이라는 듯 표현되어서요. 또 집을 박차고 나와 뉴질랜드에서 2년을 공부했던 글쓴이의 캐릭터하고도 거리가 있어요. 이 글을 통해 필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욕망하는 것(희생과 헌신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사는 것)과 각인된 습(“아이 낳으면 엄마가 봐줄게”) 사이의 부조화에서 오는 내적 갈등일까요. 엄마와는 다르게 살고 싶고, 딸들도 그랬으면 하는 마음일까요. 저는 엄마로서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소화하고 바라볼 것인가가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쩔 수 없는 엄마’에서 한 발짝 물러나 필자가 살고자 하는 삶의 지향이 무엇인지 들려주세요.
행행
“남편에게 부담일까 동네 바로 뒷산도 한번을 같이 가지 않았”는데! 주말에 바닷가 캠핑이라니. 나는 늘 시댁에 가면 설거지를 하는데 남편은 배부르다 소리만 하면 된다니. 동등한 관계가 맞나 질문하지 않을 수 없네요. “나는 남편의 대를 이어주기 위해 아이를 낳은 적이 없으니 (중략) 남편의 아버지에게 받을 것은 감사가 아니라 축하라고 생각했다.”
이 문장이 통쾌하고 명료하게 다가왔어요. 온당한 한 사람으로 며느리를 바라본다면 ‘축하’가 맞겠죠. 사례 하나하나 가슴을 치며 읽었습니다. 궁금했던 건 시가에 다녀온 뒤 배가 허전한 이유였어요. 마음이 허전한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걸까요? 이유가 나오지 않아 궁금해요. 뒷산 나들이도 친정 부모님과 함께 가는 거겠죠? 부모님댁이 아니라 갑자기 뒷산 이야기가 나와서 헷갈리더라고요. 독자가 궁금해할 정보들을 채워주면 좋겠어요. 전체적으로 긴 문장이 많았어요. 문장이 너무 길어지면 내용 전달이 안돼요. 쓰면서는 문장을 의식하면 생각이 잘 안나니까요. 우선 생각나는 대로 쓰고, 퇴고할 때 긴 문장을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수정해보세요. 글의 전달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거에요.
예) “우리 가족은 파주의 시가 근처에 살다가 올해 4월에 나의 육아휴직 복직을 앞두고 서울 우리 부모님댁 근처로 이사했다.”
-> 올 4월 나의 육아휴직이 끝났다. 복직을 하며 시댁 근처에서 친정 근처로 이주했다.
은유 - “너와 나는 가족이지만, 너의 가족은 나의 가족이 될 수 없음을 그도 그의 부모도 알 것이다.” 마무리 문장 현실적이라서 좋습니다.
불가사리
이 짧은 글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네요. 처음에는 왜 엄마한테 “마음 불편해질 말을 일부러 고르”는 걸까. 궁금하고 마음이 불편했는데요. 중반에 “나도 너네들 다 키워놓고 일했어. 그때 해도 돼”라는 어머니의 대사를 보고는 이해가 갔어요. 가장 공감받고 지지받고 싶었던 순간에 곁에 있는 사람이 손 잡아주지 않았으니 필자 마음이 어땠을까요. 저는 육아를 돕지 않겠다는 말보다는 여성인 네가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크게 남았어요. 그런데 또 반전이 있네요. “엄마는 절대 손주를 봐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자 오히려 우리 관계는 좋았던 시절로 돌아갔다” 이 문장 밑줄 쭉 그었어요. 기대라는 것이 그림자가 되어 상대를 보는 내 시선을 왜곡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기대를 지우자 자기 삶을 사는 입체적인 엄마 캐릭터가 보이고, 그런 엄마가 내 삶의 롤모델이 됐다는 결말이 좋았어요. 그런데 해소되지 않는 고민이 남아요. 앞서 말한 엄마의 말들이요. 갈등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라 지금은 그 일을 어떻게 소화하고 해석하고 있는지 짚어줄 필요가 있어요. 입체적인 삶을 살겠다는 말이 참 좋았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했어요. 뒷부분에 이 내용을 보강해주세요. “진짜 문제는 가족 밖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로 끝나면 주제가 모호해져요.
마사
같이 농사를 지었는데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던 엄마. 그 세월이 30년 이상이라니. 명절 이틀 쉬는데 제사상을 차려야 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읽었어요. “내가 더 힘든 일 하기 때문에 괜찮다”는 아버지 말을 들으니 일전에 봤던 여성 청소 노동자의 글이 떠오르네요. 남자들은 주로 큰 기계 다루고, 여자들은 몸으로 하는 온갖 궂은 일들을 해야 해서 오히려 힘들다고요. 저는 필자의 생각을 바꾸게 한 페미니즘 책이 궁금했어요. 중요한 전환이기 때문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언급해주면 좋겠어요. 이 글은 전반에는 엄마의 노동과 삶에 대한 이야기, 후반에는 엄마와의 여행 이야기로 나뉘는데요. 전반은 주제가 뚜렷한 반면, 후반은 모호하다고 느꼈어요. 엄마와 여행을 더 가야 하는데 못 가서 미안하다는 걸까? 여행에서 본 엄마의 생활 습관이 그간 살아온 엄마의 삶을 반영한다는 얘기인 걸까? 비건인 나와 전혀 다른 엄마의 여행에서의 경험을 말하고 싶은 걸까? 초점이 많은데요. 앞부분과 연결할 수 있는 후반부의 주제를 찾거나 여행 이야기는 독립된 글감으로 써도 좋겠어요.
엄마를 한 번 한 사람 -> “엄마는 엄마를 한번 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은유)
당근
남편은 김치찌개만 끓여도 칭찬받는데, 나는 온 육아의 책임을 지고도 잠깐 쉴 때마다 “애는 누가 보고 있냐”는 질문을 받아야 하다니! “남편과 아이들의 인생에서 나를 끄집어낸다”는 표현에 공감이 갔어요. 저는 육아를 하진 않지만 가끔 애인과 반려견에게서 나를 끄집어내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거든요. 육아서 대신 나를 위한 책으로 서재를 채웠다는 말이 상징적으로 들렸는데요.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적어주면 필자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욕구했는지 드러날 거 같아요. 성취하고 싶은 자격증이 뭐였는지, 듣고 싶은 강좌는 뭐였는지. 고유명사를 적어줄수록 자기 자신이 드러나 글의 개성이 생깁니다. 남편이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고 집안일도 잘하는 사람이었다는 정보는 서두로 적절하지 않아요. “큰 아기 돌 무렵 회식에서 삽겹살을 불판에 올리자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로 시작하면 좋겠어요. 마지막 문단 메시지가 좋은데 추상적인 표현이 많아 아쉬워요. 필자는 어떻게 자신을 끄집어내고 있는지, 구체적인 자기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좋겠어요.
은유 - “아이들 때문에 참고, 피곤해서 참고, 무엇에 화가 났는지 잊어버려서 참았다.” 삶에서 나온 문장이 힘이 있습니다.
달래
달래가 과제를 하는 모습이 그려지네요. 어떤 상황 속에서 과제를 제출하는지 알고 나니 한번도 빠지지 않고 글을 올린 달래가 더 존경스럽네요. 이 글을 요약해보면 “필자는 모두의 예상을 빗겨나 27살에 빠른 결혼을 했고, 당시에는 결혼과 출산이 어떤 영향을 줄지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었다. 요즘 들어 비혼이 새로운 선택지로 등장하는데, 반가우면서도 억울하다.”인데요. 저는 “누구도 내게 결혼과 출산 후의 여자의 삶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으니까.” 이 문장에 눈에 들어왔어요. 이 부분이 결혼을 하면서 “별 생각이 없었다”, “현실감각이 없었다”는 내용과 연결되는데요. 결혼 전 필자는 어떤 환경에 있었는지, 왜 결혼과 출산 후에 대한 정보를 별로 얻지 못했는지 궁금했어요. 개인적인 특수성인진, 사회구조적인 문제인지 구체적 경험을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서요. 필자의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또 필자가 결혼 아닌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게 된 이유, 결혼과 출산 이후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 등을 구체적으로 풀어주면 좋겠어요. 앞부분 노교수 이야기는 덜어내면 좋겠어요.
박상은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보다 화면 안의 글자들이 가족같았다.” 입원실이 없어 분만실에서 보냈던 하룻밤을 필자는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의 위로로 견뎠네요. 읽다가 눈물이 왈칵 났어요. 왜 대부분의 남편들은 결정적 상황에서 코를 골며 잘까요. 첫 문단이 그려지듯 생생하고 강렬해 빠져들 듯 읽었어요. 저도 아이폰을 쓰는데 생각해보니 지난 7년을 함께 한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네요. 모두가 각자의 핸드폰 역사를 써봐도 재밌을 거 같아요. 두번째 문단에 아이폰에서 육아 정보를 습득한 필자가 “신생아에게 강박적으로 계속 말을 걸었”고 “남편에게도 종용했다”고 했는데요. 그런 행동은 아이들이 크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걸까요? 이후 과정이 나오지 않고 10년 후 그 영상을 보며 “거의 미쳐있었군. 웃음이 나왔다”로 끝나서 궁금했어요. 그 갈등이 해결된 건지, 여전히 존재하는지도 궁금했고요. 그래야 마지막 문장 “나는 내 이상을 강요하느라 괴롭히지 않고 그저, 가능할 때까지 식구들을 자주 안아줄게.”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 수 있겠어요.
눈팅냥
“‘결혼’을 선택한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오래오래 남아 있었다.” 이 문장을 쓰기까지 눈팅냥이 자신의 속을 얼마나 들여다보고 돌아봤을까요. 누구도 나를 책임진 적 없었기에 나약해져서는 안되었던 청소년기를 보냈고, 의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성장 배경이 다른데도 이상하게도 꼭 제 이야기인 것만 같아요. 다른 이야기에서 비슷한 고민을 발견하니 울림이 크게 남아요. “도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자립한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신선하고 마음에 와닿는데요. 막상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은 거 같아요. 결혼 생활을 통해 필자가 생각이나 마음을 전환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남편과 나는 서로 어떤 도움을 주고 받으며 성장했을까요? 필자의 경험적 근거가 나오지 않으면, 저 감동적인 문구가 당위가 되어버려요. 저 문구를 필자의 삶으로 끌고와 구체적인 현장을 보여주면 좋겠어요.
은유 - “미성년이었던 내 도움요청을 외면한 사람들이 내 가족이란 사실에 오랜 시간 분노했고, 이것은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되었다.”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 이게 중요한 부분이라서 어떤 불신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예화가 필요합니다. 글이 후반부에서 주옥 같은 말이 많은데 설명과 다짐 위주인 점이 아쉬워요. “부부가 서로에게 의존하기를 선택하는 일이다.” 같은 핵심 메시지는 일상의 맥락에서 사례로 근거를 주어야 저 말에 힘이 붙습니다.
별이
“묶인 엄마의 손목을 볼때면 내 손목도 아파왔다.”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를 책임져야 했던 필자가 스무살이 넘어서도 엄마의 고통에 무뎌지지 않았다는데 놀랐고, 그 마음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해서 또 놀랐어요. 첫 문단부터 독자를 붙드는 힘이 강한 글입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상황을 정확히 그려주니, 필자가 무엇을 경험하고 느꼈을지 감정이입이 되고,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중간에 “회사 화장실에선 죄송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해야했다.”라고 했는데 왜 화장실에서 사과를 했는지 궁금했어요. 뒷 부분에는 알콜 중독자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전무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는데요. 중요하고 필요한 문제제기라 지금보다 더 정보를 채워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국가는 그런 엄마를 ‘근로 능력이 있는 상태’라고 판단했다.”라고 했는데 이때 그 판단을 한 정부 기관은 어디였고, 어떤 근거로 그렇게 판단한 건지, 필자는 그 판단이 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지 적어주세요. 이걸 말해야 독자도 이게 정말 문제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각 지역 중독센터의 프로그램은 참여 자격조차 갖기 힘들었다” 역시 이유가 궁금했어요. “여전히 내 탓 같을 때가 많다.”란 문장이 끝부분에 들어가니 문제의식이 흐려져서요.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며 죄책감을 양산하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왜 내 탓이라고 느꼈는지 설명이 더 필요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타인의 감정에 대해 단정하는 느낌이 들어요. “저 아저씨의 아내와 딸과 아들들은 안녕할까.”에서 끝나면 어떨까 해요. 질문이 주는 여운이 큽니다. (전화벨이 울리면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건 오래된 학습효과다. -> 전화벨이 울리면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오래된 학습 효과다. / 불필요한 단어를 빼면 문장이 더 선명해집니다.)
은유 - 저 아저씨에게 처자식이 있다는 가정은 성급한 일반화가 될 수 있지도 않을까요? 노모가 볼 수도 있고, 일인가구일 수도 있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으니까 조금 더 열린 표현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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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와... 4차시에는 다른분들 과제를 다 읽었어요. 그러고나서 리뷰도 다 읽으니 정말 감동이...ㅠㅠ 이거 쓰시는거... 보통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아니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분의 글과 리뷰를 같이 읽는것도 도움이 많이 되네요! 제 글에대한 리뷰도 물론 너무 감사하구요. ㅜㅜ 사례보강!! 이번주 과제에는 꼭 신경쓰겠습니다!!
감사해요 이 소중한 리뷰....♥ 곱씹으며 제 노트에 손수 옮겨적어보고 말씀해주신대로 퇴고도 해보겠습니다!!!!
와 선물같은 리뷰 감사합니다:) 염려했던 부분과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자세히 짚어주셔서 다시 고민해보게 되네요. 밀도 높은 리뷰를 읽고나니 에너지가 생겨요! 고맙습니다.
리뷰계의 정은경!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