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팔경 금강 둘래길 트레킹
추석날 금산군 월영산 출렁다리를 둘러보고,
영동군 양산팔경 금강 둘레길을 다녀왔네요.
2023년 09월 29일(추석), 다섯째 금요일.(기온 16˚~ 24˚)
양산팔경 금강 둘레길
트레킹 출발 : 강선대 주차장
트레킹 도착 : 강선대 주차장
코스 : 강선대주차장 → 봉곡교 → 용암 → 송호송림 → 여의정 → 송호금강불빛다리 →
함벽정 → 봉양정 → 강선대(유선대) → 주차장(원점회기)
거리및 시간 : 5.52km / 3시간 10분(휴식시간 포함)
함께하신 분 : 마중물 / 청마(靑馬)
사진 청마(靑馬)
오늘은 추석명절인데
월영산 출렁다리를 건너 산행을 할려고 했으나, 하필이면 추석날은 휴무란다.. ㅎ
출렁다리를 건너보고 싶었는데 휴무라 산행은 다음으로 미루고 양산에있는 양산팔경 금강 둘레길을 걸으러
아쉽지만 발길을 돌린다..
양산을 꿰고 흐르는금강변의 아름다운 절경 여덟 개를 꼽아 ‘양산팔경’이라 하여
둘레길을 거닐다 보면 이 중에서 2경~강선대를 시작으로 3경-비봉산, 4경-봉황대, 5경-함벽정, 6경-여의정,8경-용암까지
총 6곳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양산팔경>은 충북 영동군 양산면(陽山面) 금강 상류 일대의 아름다운 경승지로, 영국사(寧國寺), 강선대(降仙臺), 비봉산(飛鳳山), 봉황대(鳳凰臺), 함벽정(涵碧亭), 여의정(如意亭), 자풍서당(資風書堂), 용암(龍岩)을 이르며, <한천팔경>은 황간에서 서북방으로 2km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월류봉 밑 일대의 절묘한 산수 여덟 명소를 가리킵니다.
영동(永同)은 동쪽으로는 백두대간 넘어 김천과 맞닿아 있고, 금강 물줄기에 안기어 옥천, 무주, 금산과는 북쪽, 남쪽, 서쪽으로 잇대어 있습니다. 영동에서 김천으로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는 세 곳이 있습니다. 과거보러 한양 가던 영남 선비들이 피해가던 추풍령(秋風嶺) 고개는 추풍령면에서 김천 시내로 이어지고, 또 한 고개인 괘방령(掛榜嶺)은 매곡면에서 천년고찰 직지사와 이어지며, 고개의 생김새가 길마처럼 생겨서 붙여진 질매재(우두령)는 상촌면에서 지례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백두대간의 자락에 둥지를 튼 삶의 터전인 상촌면, 매곡면, 추풍령면은 한 면에 하나씩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고갯길이 있는데, 백두대간에 위치하는 지역적 동질성과 각각의 길 또한 저마다 지역 특유의 역사, 문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어 ‘상촌, 매곡, 추풍령’ 세 개의 면을 묶어 ‘삼면삼로(三面三路)’의 고장이라 하였습니다.
금강(錦江)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충청도와 전북을 적시며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에 이르러 서해로 흘러듭니다. 발원지에서 강 하구까지 천리를 흐르며 인삼의 고장 금산에서는 적벽강(赤壁江),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는 백마강(白馬江), 국악과 과일의 고장 영동에서는 양강(楊江)이라 불립니다.
이렇듯 충청도를 관통하는 금강이 금산과 영동을 관통하는 강변길은 걷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절경을 빚어놓았는데, 이 길을 ‘양산노사(陽山路史)’라 하며 금산의 제원면과 영동의 양산면을 잇는 길입니다.
영동(永同)이란 지명은 영동의 중심을 흐르는 영동천(永同川)이 주곡천(主谷川)과 양정천(楊亭川)의 두 물줄기[二水]가 합류하여 생겼는데 이수(二水)를 한 글자로 표기하면 영(永)자가 되고, 이두문(吏讀文)의 발음에 따라 길동(吉同)의 길(吉)도 ‘길=영(永)’이 되어, 영동(永同)은 이수(二水)와 길동(吉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길동(吉洞), 계주(稽州), 영산(永山), 계산(稽山)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때 비로소 영동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영동은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 계주자사(稽州刺史)를 두었고 1018년(현종 9) 경상도 상주에 소속되었으며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고, 1176년(명종 6)에 현령으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감무를 두었고 뒤에는 폐지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속시켜 현감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 칙령에 따라 영동군이라 칭하고, 군내, 군동, 남일, 남이, 서일, 서이, 북일, 북이, 양내, 양남일소, 양남이소, 용화의 12개 면을 관할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4년 부, 군, 면(府 郡 面) 폐합령에 의하여 황간군, 옥천군 및 경상도 상주군 일부를 합병하여 영동, 용산, 심천, 양강, 양산, 용화, 학산, 황간, 매곡, 상촌, 황금의 11개면으로 개편하였고, 1940년 영동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으며 1991년 황금면이 추풍령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1읍 10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동에는 영동과 황간(黃澗)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영동에는 양강 변의 수려한 절경에 아름다운 정자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영동과 옥천 남쪽의 하천이 양강(楊江)을 이루어 호수를 뚫고 금강으로 흘렀으니, 이 호수를 금호(錦湖)라 불렀습니다. 호수 위에 있던 환선루(喚仙樓)가 큰물에 허물어지자 이 고장 선비 37명이 1938년에 무주에 있던 한풍루(寒風樓)를 옮겨다가 옛터 옆에 세웠으나, 1971년 무주의 요구에 따라 한풍루를 반환하고, 현 위치에 다시 지어 금호루(錦湖樓)라 하였습니다.
채하정(彩霞亭)은 원래는 강선대(降仙臺) 옆에 있었으나, 오래 되어 무너진 것을 25명의 선비들이 뜻을 같이하여 계를 조직하여 1935년 새로 지었으며, 다시 무너질 위기에 봉착해 후손인 상속계원(相續契員)들이 성금을 모아 1990년 중수하고, 채하정중수공적비를 세웠습니다. 정자 안에는 동강(東江) 김영한(金寗漢)이 지은 <채하정기>를 비롯하여 전태언(全泰彦)의 상량문과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여의정(如意亭)은 연안부사였던 만취당(晩翠堂) 박응종(朴應宗)이 관직을 사직하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강 언덕 위에 전원을 마련, 여러 되의 해송 종자를 손수 뿌려서 송전(松田)이라 불렀고, 정자를 지어 만취당이라 하고 예의와 풍속 및 정치와 역사를 설교하며 시간을 보냈던 곳입니다. 1935년 문중에서 새로 콘크리트 건물을 짓고 여의정이라 하였습니다.
빙옥정(氷玉亭)은 고려 말 전객령(典客令) 김영이(金令貽)가 맏사위인 정랑 박원용(朴元龍), 둘째사위 한성판윤 장비(張丕), 셋째사위 대제학 박시용(朴時庸)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갈건야복(葛巾野服)으로 학문을 강론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입니다. 후손들이 이들을 추모하여 정자를 짓고 얼음과 같이 맑고 구슬과 같이 윤이 난다는 뜻으로 ‘빙옥정’이라 하였습니다.
봉양정(鳳陽亭)은 금운(錦雲) 이명주(李命周)가 동문수학(同門受學)하던 13명과 함께 힘을 모아 정자를 지었던 곳입니다. 어진 새들이 아침볕(朝陽)에 와서 울어대서 봉양정이라 하였고 이곳이 일만 가지 기상이 있다고 여겨 옛날부터 소상팔경(瀟湘八景)에 버금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선대(降仙臺)는 금강 기슭의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진 곳으로 아래를 감돌아 흐르는 맑은 강물과 멀리 퍼진 넓은 들의 경관은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곳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강선대라 하였으며,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훌륭한 시가 남아 있습니다.
함벽정(涵碧亭)은 봉황대의 동쪽 강변 바위에 있는 정자로, 강변 백사장에는 물새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비봉산 낙조를 볼 수 있는 위치 때문인지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읊고 학문을 논했다고 합니다. 봉황대(鳳凰臺)는 처사 이정인이 소일하던 곳으로 양산면 수두리 들머리 양강 위에 있으며 8경 중 으뜸가는 경치로 꼽히나 지금은 누각은 없어지고 바위만 남아 있습니다.
관어대(觀魚臺)는 도로변에 기암이 우뚝 솟아 양강에 불쑥 튀어나와 강물은 대(臺)를 휘어 감아 맴돌고, 깎아 세운 듯 벼랑에 송림이 우거져 있어 고기가 노니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절경입니다.
민욱(閔昱)이 아우 민성(閔晟)과 더불어 이곳에서 놀며, 고기가 노는 모양을 장난하며 보았기에 이름을 ‘관어대’라 하였는데 민욱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호는 석계(石溪)이며 관어대란 현판은 시남(詩南) 민병석(閔丙奭)의 친필입니다.
삼호정(三乎亭)은 1860년(철종 11) 치당(治堂) 성대식(成大植)이 세웠고, 양강(楊江)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앞에는 긴 강이 뻗어 마치 유단(油單)을 펼쳐 놓은 듯하고, 뒤에는 높은 산들이 병풍을 두른 듯하여 모든 번뇌를 씻고 산색을 우러러 심신을 바르고 고요하게 할 수 있어 선비들이 수양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한천정(寒泉亭)은 백우(白愚) 이시연(李時然)의 문인들이 그를 추모하여 세운 정각으로 만취(晩翠) 이찬연(李燦然)의 기문 등이 남아 있습니다. 양산면 수두리에서 강을 건너 대곡 입구 언덕 강안에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양산들이 한눈에 보이고 금강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양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8곳중 이곳 강선대는
양산 2경으로 꼽히는 곳으로 신선이 내려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질 만큼 경관이 뛰어난 곳에 위치해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
양산팔경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곳이 바로 강선대이다. 강선대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가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오롯이 서 있는 육각정자로 멀리서 보면 주변 노송들과 어울려 우아하고 고상한 멋이 흐른다. 정자 위에 서면 푸른 강물이 거칠게 부딪치는 바위 절벽이 아찔하다. 강선대는 물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려 삼합을 이룬 곳이라고도 한다. 양기(陽氣)강한 바위와 음기(陰氣)의 물을 소나무가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조선의 이안눌과 <한우가>로 유명한 임제의 시가 정자 안에 걸려 있어 풍류를 더한다.
영동에서 서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양산면(陽山面) 송호리(松湖里) 앞을 휘 돌아 흐르는 양강 물 속에 우뚝 솟아 있는 한 바위가 있으니 이 아름다운 바위를 강선대(降仙대)라 일러 온다. 일찍이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강선대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시를 남긴 이 대(대)는 오늘날 양산팔경(陽山八景)의 하나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아 오고 있거니와 강선대란 이름이 그야말로 신비스러운 지상의 낙원이었다.
하늘에 있는 선녀 모녀는 어느 화창한 초여름날 신비스러운 땅을 내려다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마마마 소녀는 어디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에 가서 목욕이나 하고 오렵니다.」 선녀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기를 「보아라 저 아래 아름다운 강물 속에 소나무 우거진 석대가 솟아 있고 그 옆의 강물에 몸을 담그어 보고 싶지 않는냐-」 선녀는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 보았다. 과연 강 속에 우뚝 솟은 3십여척(약10m)되는 석대에 해 묵은 소나무가 그림처럼 솟아 있고 초여름의 강물이 햇살에 비쳐 은비늘처럼일렁이고 있었다. 선녀는 기쁨의 소리를 지르고 그곳에 내려왔다. 구름을 타고 석대에 내려 온 선녀는 주위 산천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한동안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동쪽을 보니 푸른 잎이 공중에 떠서 푸른 안개가 된 것은 천마산(天摩山)이요, 서쪽을 바라보니 공중에 가득하여 하늘을 가린 것은 묵험산이며 남쪽을 보니 오색이 하늘에 나르는 것은 비봉산(飛鳳山)이오 북쪽을 보니 눈섭같이 눈을 사이에 두고 꿈틀거리는 산은 마니산(魔尼山)이라 언덕과 산이 무르녹은 모습을 그려내어 마치 선녀가 사는 하늘과 비슷한 이 땅의 별천지에 선녀는 그만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선녀는 지금의 저 양산 송호리 강가 모래밭에 옷을 벗어 놓고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 모양을 강물 속에 있는 용바위가 힐끔 힐끔 훔쳐보고 있다가 어느 사이에 용바위는 선녀의 아름다운 몸매에 그만 넋을 일고 말았다.
용바위는 바위이기는 하였지만 숫용이었다. 이 숫용 바위는 목욕하는 선녀를 보더니 금새 검은 마음이 일었다. 용바위는 물 속에서 선녀 쪽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옮겨갔다. 한참 정신없이 목욕을 하던 선녀는 물 속에서 무엇이 자기쪽으로 옮겨 오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용의 모양을 한 바위가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선녀는 그만 기겁을 하고 놀라 서둘러 옷을 걸쳐 입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이 바위를 강선대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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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
용암은 목욕하는 선녀를 보느라 승천하지 못하고 강가에 남게 되었다는 용암의 이야기가 있다.
묵묵히 양강의 물살을 견디고 있는 용암의 경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여름이면 여름대로 푸르게, 가을이면 색색이 단풍으로 강가를 화려하게 수놓는 송호관광지의 나무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한 곳이라는 강선대(2景)와 목욕하는 선녀를 보느라 승천하지 못하고 강가에 남게 되었다는 용암의 이야기가 짝을 이룬다.
여의정
여의정은 송호관광지 솔밭 바위 위에 세워놓은 정자로 만취당 박응종 선생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강선대와 마주하며 그와 버금가는 절경을 만들어 내는 정자가 여의정이다. 조선시대 때 연안부사(延安部使)를 지낸 만취당 박응종이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해 강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붙여 ‘만취당’이라 한 것을 1935년에 후손들이 다시 짓고 ‘여의정’이 라 이름을 고쳤다. 여의정을 감싼 송림은 박응종이 전원(前園)을 마련한 후 주변에 손수 뿌린 소나무 종자가 자라 가꿔진 것이다. 100년 묵은 송림이 무려 1만여 그루나 자라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송호관광지는 28만 4000㎡ 규모의 부지에 방갈로, 풀, 산책로, 놀이터 등을 갖추어 놓고 관광객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이한다.
송호관광지
284,000㎡의 부지에서 조성된 송호관광지는 관리사무소를 비롯하여 주차장, 취사장, 체력단련장, 어린이 놀이터, 산책로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분수대, 장미꽃터널, 살구꽃동산 등산물을 형상화한 조각공원 등으로 송호관광지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금강상류의 맑은 물과 100년 이상된 송림이 어우러져 삼림욕과 더불어 가족 단위 및 청소년 심신수련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송호관광지 주변에는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강선대와 승천하려던 용이 선녀가 목욕하는 것에 반하여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졌다는 용바위, 만취당 박응종이 말년에 후학을 가르쳤다는 녹음방초의 여의정이 있다. (양산8경) 영국사, 강선대, 비봉산, 봉황대, 함벽정, 여의정, 자풍당, 용암
우리 국문학상 신라가요 목록에서 중요하게 헤아리는 양산가(陽山歌)의 고장 송호관광지는 양산을 꿰뚫고 남에서 동북으로 흐르는 금강 상류 연안에 위치한 명승지로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다울 뿐만아니라, 신라와 백제의 끊임없는 싸움의 역사 속에 신라 김흠운 장군의 애환과 양산가의 유래가 깃든 곳으로 유명하다. "사나이로서 몸을 나라에 바친 다음에야 남이 알건 모르건 마찬가지다. 어찌 구태여 이름을 구할것이냐." -김흠운-
김흠운(金欽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내물마립간의 7대손인 잡찬 달복이다. 화랑 문노의 낭도로 있을 때 태종무열왕의 사위가 되었다. 655년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북부 33성을 빼앗기자, 낭당대감으로 출전하여 양산(지금의 충북 영동) 밑에 진을 치고 조천성(지금의 비봉산성)을 공략하다가 백제군의 습격을 받아 패배했다.
대사 전지가 후일을 기약할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하고 싸우다 대감 예파·소감 적득과 함께 전사했다. 죽은 뒤 일길찬에 추증되었다. 〈양산가 陽山歌〉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불려진 노래이다. 딸이 신문왕의 왕비가 되어 효소왕을 낳았다.
함벽정
함벽정은 봉황대의 동쪽 강변 바위에 있는 정자로 이 강변 백사장에는 물새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비봉산 낙조를 볼 수 있는 위치 때문인지 옛날 선비들이 이 곳에 모여 시를 읊고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송호리에서 금강을 따라 약 500m 올라가면 강가, 커다란 나무에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서 있는 정자가 함벽정이다. 위치가 하도 좋아 옛날부터 시 읊고 글 쓰는 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강론했다. 함벽정에서 보이고 들리는 경치를 ‘함벽정팔경’ 이라 해 따로 즐겼을 정도로 풍치가 탁월했다. 비록 지금은 보고 들을 수 없지만 함벽정에 올라 눈을 감고 ‘함벽정팔경’을 상상해보면 시간은 어느새 과거로 흐르고 한바탕 꿈을 꾸는 듯하다.
트레킹후
양산팔경 7경 숨은명소 자풍서당에 들려봅니다 ↓
자풍서당(資風書堂)은 정종과 태종 연간에 이 지역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서당으로, 남수문, 이충범, 김문기, 박수홍, 전팽령 등을 배출하였고 이후 이충범(李忠範)이 제자들을 양성하던 곳입니다. 원래는 풍곡사(風谷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조선의 배불숭유 정책에 따라 사찰을 폐하고 그곳에 새로 집을 짓고 풍곡당(豊谷堂)이라 하다가 1614년(광해군 6) 한강 정구(鄭逑)가 이곳에 머물며 ‘자법정풍(資法正風)’으로 학문을 장려하였다는 뜻으로 자풍당(資風堂)이라 하였고 다시 자풍서당으로 바뀌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유교 건축물 내에 불탑이 있다는 것입니다. 1989년 지하에 매몰된 석탑의 옥개석(屋蓋石)이 발굴되어 이 탑이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며 공식 명칭은 ‘두평리오층석탑’입니다.
1989년 10월 1일 지하에 매몰된 5층 석탑의 옥개석 발굴로 귀중한 탑파의 연구 자료로 그 빛을 더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는 탑이다. 모형으로 보아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것으로 보이며, 옛날 이곳은 풍곡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초 배불숭유 정책에 따라 유교의 보급과 치도의 이념 확대를 위해서 많은 사찰을 폐하여 향교나 유학 진흥에 이용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 곳에 자풍서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마당 한편에 있는 석탑은 영동 두평리 오층석탑이다. 고려시대 이곳에는 풍곡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터에 자풍서당이 세워졌다. 오층석탑은 근처 폐사지에 묻혀있던 부자재를 1989년 찾아내 자풍서당 앞마당에 세웠다고 한다. 탑의 조각수법과 층급받침의 형태로 보아 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자풍서당이 풍곡사터였음을 추측한다.
트레킹을 하고
제원면 어죽먹으러 이동중에 담아봅니다
용강 매운탕집에서
조림하고 새우탕 그리고 어죽으로 추석명절 트레킹을 마무리합니다.
아래 사진은
영동으로 일보러 가다가 잠시 차에서 내려담은 사진입니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