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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원각사 초청강연]「신심명」특강, 지금 즉각 부처가 되어라 2강(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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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요. 실전 팁을 주는 경전이라서 현학적인 얘기를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지금 이 순간 견성시키겠다는 의도밖에 없어요. 거기에 응해주시면 돼요. 좋다 싫다 하지 마라고 할 때 잠깐만 놔보세요. 그러면 이게 최고의 참선인 게요. 이 최상승선을 닦으시는 비결은요 힘드실 때 일상에 뭐 안 힘들 때 순경이건 역경이건 찰나 찰나 잠깐만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지가 아니에요. 좋다 싫다만 몰라 해보자 모르는데 괜찮다, 딱 좋다 모른다괜찮다 이렇게 자꾸 잠깐 잠깐씩 정신을요, 이원성(二元性)을 초월시켜 보는 거예요. 그러면 내 본래 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게 면목이 얼굴이거든요. 면목 없다 그러잖아요. 얼굴이에요. 내 본래 얼굴을 만나요, 참나를. 참나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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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하고 특징이 없으면서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 그게 다예요. 왜 여기에는, 왜 이게 열반이고 왜 참나냐? 탐진치(貪瞋癡)가 없어요, 거기엔. 우리 의식 안에는요 탐진치 없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가 참나라는 거고 그 자리가 청정광명심(淸淨光明心)이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알아차리기만 하지 희로애락이 없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를 만나려면 내가 접속을 하려면 나도 좋다 싫다를 안 해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 딱 접속이 되는 겁니다. 원리가 이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거기에는 어떤 이원성도 길다짧다, 아름답다추하다 이런 이원성이 없는 그 의식이 있다. 이 의식 자리에서는 지수화풍도 어떤 개념도 거기에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럼 그 자리 거기에 애초에 그런 게 없는 자리라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원성이 없는 그 의식에 내가 접속하면 되는 거죠. 근데 지금 우리 의식은 이원성에 빠져 있기 때문에 잠깐만 몰라를 해줌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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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본래의 자리가 드러나게 해주는 거 그게 견성(見性)이에요. 이미 우리 안에 있어요.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데 내가 태양에 등 돌리고 있으면 없는 거예요. 근데 내가 해야 될 일은 뭐냐면요 태양을 막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내 마음을 청정광명하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잠깐만 돌아보는 겁니다. 내 뒤의 태양을 돌아보는 게 이거예요. 이원성을 잠깐만 놔봐라 들고 있는, 좋다 싫다를 잠깐만 놔봐라 그러면 좋다 싫다 없는 탐진치 없는 그 자리에 바로 접속될 것이고, 그 태양을 보는 거를 견성 그러는 겁니다. 늘 비추고 있는데 내 뒤에서 늘 비추고 있는데 내가 눈앞에 좋다 싫다만 보고 산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이 좋다 싫다를 우리가 내가 따질 수 있는 거는 뭐가 이걸 비추고 있어서 내가 따지고 있는 거지?” 하고 비추는 의식 자체를 돌아보는 거예요. 이거를 돌아보는 거를 반조(返照)라고 합니다. 돌이켜서 비추어 본다. 이걸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 그래요. 밖을 보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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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싫다만 보던 의식을 돌이켜서 내 본래 자리를 들여다본다. 내 정신의 태양, 태양 자리. 그 자리는요 항상 빛나고 있더라. 이게 부처님 말씀입니다. 항상 빛나고 있더라. 다른 말로 항상 알아차리고 있더라. 여러분 실제로 일상에서 막 분노해서 싸우고 있을 때요. 초연하게 보고 있는 의식 하나 안 느껴지세요? 나는 막 화나서 좋다 싫다를 따지고 있는데 그 너머에서요 초연하게 보고 있는 의식 하나가 있어요. 그 의식이 참나예요. 그 자리를 거기서 딱 돌아보시면요 싸우다가 견성합니다. “허, 이 자리일세. 깨달았도다.”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지금 수시로, 일상에서 어떤 순간에도 잠깐씩만 시간 많이 안 써도 돼요. 5분도 길어요. 잠깐만 좋다 싫다 몰라 해보세요. 그래서 그 자리를 자꾸 만나시는 게 중요합니다. 만나다 보면요 재미가 붙어서 이제 힘들 때, 힘들 때요 다른 데 안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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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부처 자리에 의지하지. 바로 몰라 해버리고. 그게 믿는 마음이죠. 또 진도 나갈게요. 17번.
[17.
귀근득지歸根得旨: 근본에 돌아가면 종지를 얻게 되고
수조실종隨照失宗: 밖으로 비춤을 따르면 종지를 잃어버리게 되니]
근본에 돌아가면 종지를 얻게 된다. 그 참나자리만 알면 종지를 얻게 되고, 밖으로 비춤을 따르면 밖으로 따라다니면, 밖으로 비추면 어떻게 돼요? 그러니까 태양이 지금 의식의 빛이 내 안에 있는데 거기를 안 돌아보니까 진리를 모르게 되고 상황을 파악 못하게 되고 밖으로 비춰지는 좋다 싫다만 따라가니까 어때요? 태양은 안 보고 비춰지는 것들만 따라가니까 종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참나를 놓치게 된다. 좋다 싫다에 매몰될수록 본래 자리는 놓치게 된다 이 소리입니다. 참나자리로 돌아가면 무분별지(無分別智), 무분별지라는 게요 아까 그 빛나는 의식이에요. 거기에는 분별이 없거든요. 주객 분별이 없어서 무분별 지혜라고 합니다. 무분별 지혜로 진리를 바로 알 텐데, 좋다 싫다를 따져버리니까 분별에 빠져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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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놓치게 된다. 무분별지가 그대로 진리예요. 우리 의식은요, 또 왔는데 판서 하나는 할게요. 태극처럼 제가 그리는데요. 이게 지혜예요. 이게 진리입니다. 이때의 지혜를 무분별지(無分別智) 그럽니다. 요 진리라는 건 진여(眞如)자리입니다. 이게 우리 의식의 핵입니다. 그래서 이 핵을 뭐라고 하냐면 이 원리(理)와 지혜(智)가 명(冥), 명상할 때 명(어두울 명)입니다. 합(合). 진리와, 이게(理) 진리예요, 진리를 알아차리는 건 뭐죠? 지혜죠. 진리를 알아차리는 지혜(智)가 구분할 수 없게 합해져 있다. 이게 대승의 종지(宗旨)입니다. 이지명합(理智冥合). 이 자리를 무분별지 자리라고 해요. 무분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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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이 없어서 그래요. 이원성(二元性)이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흔히 아는 분별심은 주객이 있죠. 인식 주체가 있죠. 내가 있어서 이 펜이 있습니다. 여러분, 펜을 보시면 펜은 인식 대상이죠. 그럼 펜을 보는 자는요 인식 주체예요. 주객이 찢어져 있죠. 그런데 몰라를 해버리시면 어떻게 될까요? 몰라를 하고요 어떤 것도 분별하지 않고 딱 몰라하고 있으면요 나만 존재해요. 그래서 내가 나를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가 지를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주객이 없어요. 지가 지를 알아차리고 있어요. 지혜이자 진리예요. 자기가 그대로 지혜이고 그대로 진리예요. 이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참나자리만 알면 진리를 알게 되는데 참나를 놓치니까 진리도 못 본다 이겁니다. 왜? 이때 보이는 진리가 진여 자리인데 지혜를 못 얻으니까 무분별을 못하니까 주객이 찢어져 있으니까 (진리가)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러면 엄청난 진리가 있나?“ 이러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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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아까 부처님이 뭐라고 했죠? “분별이 없는 그 의식 자리에서 일체가 공(空)함을 봤다.” 관자재보살이 뭐라고 했죠? 반야바라밀을 했더니, 반야바라밀이 무분별지예요. “반야바라밀을 했더니 오온(五蘊)이 공하더라.” 뭘 봤죠? 공하다는 진리를 봤어요. 그래서 이 텅 빈 의식 자리에 들어갔더니 거기서는 주객이 분별이 없고, 주객이 없다는 건 텅 비어 있더라. 그런데 나는 알아차리고 있더라. 그 상태예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좋다 싫다만 몰라 하고 딱 정신 차리고 있으면 좋다 싫다도 없고 텅 비어 있는데 알아차리는 지혜는 있고 텅 비었다는 진리는 알아차려지죠. 이걸 어렵게 얘기하면 이게 대승불교의 최고 비급(祕笈)이 이거예요. 이지명합(理智冥合)의 경지. 무분별지(無分別智). 무분별지를 다른 말로 반야지라고 합니다. 반야지(般若智).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반야지를 얻었다는 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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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이 없는 상태에 들어가셔서 관찰해 봤더니 거기에는 오온이 없다는 걸 아셨다.” 요게 다입니다. 반야심경이 이게 다예요. 그래서 알아낸 게 “색이, 물질이 그 자리에서 공하더라.” 나오니까 주객이 찢어져 있지 주객을 몰라 했더니 그 자리는 공하더라. 물질이 공하더라. 공한데 또 물질로 이렇게 있더라. 요게 다입니다, 반야심경은. 그래서 지금 이분도 지금 계속 이 얘기하고 싶으신 거예요. 근본에 돌아가면 지혜를 얻게 되는데 밖으로 나가니까 종지를 잃어버리더라.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추어 보면, 잠깐이라도 반조(返照), 밖으로 향한 의식을 안으로 돌이켜서 몰라 하고 잠깐이라도 이 참나자리를 돌아봤더니... 참나자리를 돌아본다는 건 또 어렵게 생각하실까 봐 그냥 좋다 싫다 안 하고 있는 겁니다. 좋다 싫다 안 하고 알아차리고 있으면 저절로 이 상태예요. 주객이 없는데 알아차리고 있잖아요. 그러면 알아차려지는 대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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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잖아요. 텅 비었잖아요. 텅 빔을 알아차리고 있다니까요. 저게 다예요. 실전 팁입니다. 저거 알고 경전 보시면요 어떤 대승 어려운 경전도 다 저기에 근거합니다. 저 논리밖에 안 펴요, 들어가면. 유식삼십송 뭐 온갖 능엄경, 능가경 다 저거밖에 없어요.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도 막판에 가면 법신(法身)을 깨달았다고 할 때, 진여 깨달았다고 할 때 이 얘기밖에 안 해요. “진여 자리에는 주객이 없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객이 없는 걸 깨달았다.” 주객이 없으려면 몰라 하셔야 돼요. 지금 주객이 있어요. 이 펜을 “알아” 하시는 순간 주객이 있어요. 이 “펜”과 “펜을 아는 자”가 생겨요. 이 펜을 보시되 “몰라” 해버리셔야 돼요. 몰라. 몰라 하고 이 펜을 보시면 주객이 없어요. 그래서 예전에 선문답에 “부처가 뭐냐?” 그러면 이렇게 주장자(拄杖子) 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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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라고. 이거를 주객이 없는 마음으로 보라는 거예요. “주장자잖아요.” 그러면 “땡!” 주객이 생겨버렸잖아요. “이 주장자가 주장자냐. 그러면 30방을 때리겠다.” 이런 게 “이게 주장자로 보이냐?” 이거예요. “이게 뭘로 보이냐?” 몰라 상태에서 보면요 이게 나랑 둘로 안 보여야 해요. 나랑 둘로 안 보이면 합격입니다. “나 밖에 주장자가 있는데요.” 하면 땡이고요. 쉬운 듯 어려운 듯 하시죠. 몰라 하세요. 그러니까 이때 왜냐하면 이런 거에 끌려 다니지 마시라는 거예요. “몰라 하라는 게 뭐 속 편한 말이네.” 그게 아니라요. 이런 거에 끌려 다니지 마세요. 상황에 끌리지 마세요. 좋다 싫다에 빠지는 순간 끌려요. 여러분 보이스피싱 걸리는 법이 좋다 싫다에 딱 걸리면 끝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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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들이 납치됐습니다.” “싫다”잖아요. 탐진치를 자극한다니까요. 아! 싫어 빨리 이 상황을 모면해야겠어. “어떻게 하면 되죠?” “입금하세요.” 근데 보세요. “아들이 납치됐습니다.” “모릅니다.” “아들이라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겠어요? 이러면 막 욕할 거예요, 보이스피싱 하는 사람이. “이런 부모가 있다니!” “괜찮습니다. 딱 좋아요.” 못 당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잡념은요, 여러분 잡념은, 일상의 역경은 항상 좋다 싫다를 자극하면서 들어옵니다. 좋다 싫다를 차단해버리는 거예요. “좋은지 싫은지 모르겠는데.” 해버리는 순간에요 완벽히 다 차단된다는 게 아니라 한 생각 딱 돌릴 때 내 안에서 참나가 각성되면서 그 상황을 6바라밀로 주도할 힘이 안에서 나와요. 안에서 초연함이 나오고요 거기서 초긍정의 마음이 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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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바라밀로 상황을 다스릴 수 있는 보시(布施) 베풀 건 베풀고, 지계(持戒) 룰을 지킬 건 지켜주고, 정진(精進) 애쓸 건 애쓰고, 인욕(忍辱) 참을 건 참고, 선정(禪定) 더 깨어 있으면서, 반야(般若)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힘이 다 나와 버린다니까요. 이게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이에요. 좋다 싫다만 집착 안 하면 그 자리에서 마음이 생할 때 6바라밀이 나와 버린다고요. 말만 응무소주 이생기심인데 온갖 거 다 집착하고 있으면서 응무소주. 응무소주라는 것도 또 집착하면 안 돼요. “나는 텅 비어야 돼.” 이것도 아니에요. 텅 빈지 아닌지도 몰라야 돼요. 그게 진짜 텅 빈 상태예요. “하나인지 둘인지 몰라”가 진짜 하나 된 상태입니다. 여기까지 느낌 오시죠. 또 진도 나갈게요. (18번)
[18.
수유반조須臾返照: 잠깐이라도 ‘바라보는 자’를 돌이켜 비추면(返照)
승각전공勝却前空: ‘눈앞의 허공’보다 뛰어날 것이다.]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추어 보면, 참나자리만 잠깐 그러니까 잠깐만 몰라 해보면 눈앞에 허공보다 뛰어날 것이다. 이게 뭔 소리냐면 눈앞의 허공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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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허공입니다. 여러분 선사들이요 “공(空)을 깨달아라” 그럴 때 공은 뭔지 아세요? 지금 저기 이제 외워두세요. 시험에 출제된다 생각하고 외워두세요. 공은 뭐다? “주객이 없는 걸 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공 그러면요 진짜 아무것도 없다가 아니에요. 주객이 없다 예요. 나와 남이 없다 예요. 나와 남이 있으면 공이 아닙니다. 인연의 세계입니다. 즉 이것이 있어서, 내가 있어서 펜이 있잖아요. 보는 내가 있으니까 보여지는 펜이 있죠. 이건 주객이 펼쳐지는 인연의 세계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의 세계. 연기를 날려버리는 방법이요 나와 남을 몰라 해버리면 공의 세계입니다. 나와 남이 없기 때문에. 이게 다예요. 불경을요 어떤 경전이든 다 보세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 풀면 다 풀립니다. “공하다는 건 주객이 없다” 입니다. 경전에서 공하다는 (주객이 없다 입니다).
14:00
그래서 눈앞의 허공, 대신에 눈앞의 허공은요 공간이에요, 그냥. 이건 진짜 공이 아니에요. 공간이에요. 그러니까 색즉시공(色卽是空)은요 물질이라는 것은 주객이 없는 자리가 본질이다. 부처님이 열반의 의식 상태에 들어가 보시니까 거기는 물질이 없더라. 주객이 없더라, 거기는 아예. 그게 공이에요. 주객이 없는 자리에서 물질이 나왔다 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입니다. 그런데 만약에요 과학을 이용해서 설명하시는 건 좋은데 “E= mc^2이 색즉시공이다” 이렇게 풀 수 있죠. 거친 비유예요. 이해는 도울 수 있어요. “물질이 에너지고 에너지가 물질이더라”라고 색즉시공을 푸시면 그 공은요 원래 경전에 나온 공하고 상관이 없는 공이에요. 거친 비유예요. 경전에 나온 공은 주객이 없는 자리를 말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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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상태니 뭐 진공이니 하는 건요 그냥 이 공간적인 겁니다. 에너지가 없는 상태거나 그냥 공간을 말해요. 그렇죠. 그러니까 진공에서 자꾸 소립자가 나온다 하고. 그건 공간이에요. 그러면 눈앞의 허공보다 뛰어나다는 건요 눈 감고 텅 빈 공간을 보면서 “이게 공인가?”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공이 아니라 뭐가 공이라고요? 그걸 알아차리는 의식이 공이에요. 그래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 그래요. 주객이 없는 텅 비어 있는 빛나는 의식, 그게 공인데 이 공을 봐야 되는데 눈 감고 허공을 보고 있어요. “이게 공인가? 공에서 뭐 색이 나오려나?” 그럼 뒷 구절 보시죠. (19번)
[19.
전공전변前空轉變: ‘눈앞의 허공’이 굴러 변화하는 것은
개유망견皆由妄見: 모두 ‘망령된 견해’로 말미암은 것이니]
눈앞에 허공이 굴러서 변화하는 것은. 그 공간에서 뭐가 막 펼쳐져서 나와요. 모두 망령된 견해로 말미암은 거다. 보세요. 지금도 저를 보세요. 공간이 꽉 채워져 있죠. 여러분 눈앞의 허공에 지금 저도 있고 막 온갖 게
16:00
형형색색 채워져 있지 않나요. 이게 공간에서 지금 펼쳐진 거죠. 그러면 이 공이 여러분이 찾는 공이냐는 거죠. 아니라는 거예요. 이걸 알아차리고 있는 여러분 의식이 공입니다. 그래서 색즉시공은요 이 펜이 색(色)이면 이 펜을 알아차리는 내 의식이 공(空)이에요. 결국 내 의식에서 이 펜이 나왔다는 겁니다. 내가 알아차리니까 펜이 존재하잖아요. 여러분 태어나서 지금까지요 ‘나’와 ‘내 것’이라는 주객을 떠나서 사신 적이 없어요. 깊은 잠 주무실 때 빼고는. 기절하셨을 때나. 그 외에는 다 뭐예요? 나와 남으로 사셨어요.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가 같이 밤하늘의 객관적인 별을 본 적이 없어요. 다 뭘 봤어요? 내 눈에 들어오는 별을 봤죠. 내 마음에 들어온 별을 봤죠. 내 마음에 들어온 지구를 지금 느끼고 있고 나의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형형색색을 체험했지 객관적인
17:00
형형색색 만법을, 만물을 체험하신 적이 없습니다. 태어나서 죽어서 그러니까 윤회하면 영원히 우리는 윤회하는 동안 내 의식 안에 들어온 나의 대상으로서, 즉 다 내 것만 체험한 거예요. 소유의 내 것이 아니고요 내가 경험한 대상, 내 눈에 비친 대상, 내 귀에 들린 소리, 다 내 소리, 내 색깔, 다 내가 경험한 것들밖에 없어요. 나라는 인식 주체가 경험한 것들밖에 경험 못했습니다. 뭐랑 똑같냐면요 여러분이 양말을 신고 지구를 다 돌면요 지구 세계 일주를 하고 나서 여러분이 체험한 그 양말만 느껴져요. 그렇죠. 가죽신을 신고 전 세계를 돌면 가죽신만 느낀 거예요. 여러분은 영원히 우주를 사셔도 여러분의 오온(五蘊)밖에 못 느껴요.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색깔, 소리, 냄새, 맛. 즉 과학적으로 말하면 뇌에서 재구성된
18:00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뇌에서 재구성된 지수화풍(地水火風), 뇌에서 재구성된 색성향미촉 (色聲香味觸)만 체험하십니다. 객관적인 색성향미촉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래서 유식학(唯識學)이 나오는 거예요. “만법이 다 내 의식 작용이더라.” 그러니까 이걸 조금만 더 생각해보시면 지금 내가 사실 죽을 때까지 경험하는 건 나라는 주체가, 내가 내 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내가 내 인식 대상들을 경험하고 산 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일체가 내 마음 작용”이라는 거예요. 나라는 것, 내 것이라는 거 다 내 인식, 내 마음 작용이잖아요. “그놈이 다 어디서 일어났냐?” 보니까 나와 내 것이란 이원성을 몰라 하고 봤더니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밖에 없더라”는 거예요. “그 자리에는 오온도 없고 정신작용도 없고 물질 작용도 없더라”는 게 부처님이 깨달으신 게 이게 다예요. 이거를 계승해가지고 수많은 조사(祖師)들이 같은 얘기만 하는 거예요. “좋다 싫다만 안 하면 바로 참나자리다. 청정광명심자리다. 일체
19:00
만법은 허공에서 펼쳐져 나오는데 그거는 그냥 펼쳐져 나오는 게 아니라 네가 내 것 나니 내 것이니 따지니까 나온 거다. 그것만 안 따졌으면 그냥 청정한 의식 그대로였을 것이다.” 이 말을 한 겁니다. “눈앞의 허공이 굴러 변화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 에고의 이원성 때문에 나온 거다. 좋다 싫다 때문에 나온 거다.” 그럼 공부를 어떻게 해야겠어요? 20번.
[20.
불용구진不用求眞: ‘참됨’을 구함을 쓰지 말고
유수식견唯須息見: 오직 ‘견해’를 그쳐야 할 것이다.]
참됨을 구하려 애쓰지 말고 뭐 해야 돼요? 오직 좋다 싫다는 견해만 멈춰라. 그러니까 “아 나 견성해야 돼.” 하지 말고 좋다 싫다만 몰라 해라. 그럼 그 자리다. 이게 조금 설득되세요? 이분(3조 승찬대사)의 논리 일관되지 않아요? 그런데 이분의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불교의 핵심 종지가. 불교의 핵심 종지는 진짜 어렵지 않아요. 쉬워요. 이거 아시고 “반야심경” 읽으시면요 “반야심경”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냥 “반야심경” 안에 다 들어있는 말입니다.
20:00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할 때 무분별지를 가지고 주객을 초월해서 바라보니까 오온의 본질이 공하더라는 겁니다. 오온이 청정광명심 자리에는 없더라. 지금 만약에 절에서요 불교 학자분들이나 많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온이 왜 공하냐? 오온은 연기하니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으니까 오온은 연기하니까 연기하는 놈들은 항상 변해서 고정된 게 없으니까 공하다.” 이렇게 설명하죠. “땡!” 이거는 선사(禪師)들이 가르친 게 아닙니다. 선사 앞에서 이 지랄하면 바로 “땡!” 입니다. “오온이 왜 공하지? 오온은요 들어보세요. 연기의 화합물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연기 화합물이라는 건 인연법에 의해서 굴러간다는 거죠. 고정된 모습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무자성(無自性)이죠. 그래서 공한 겁니다.” “땡!” 공의 본질은요 주객이 없다예요. 오온의 본질에 들어가면 주객이 없는 자리에 들어가면
21:00
오온이 공합니다. 청정광명심자리에서는요 주객이 없어서 오온이 공합니다. 이게 다예요. “반야심경”에 연기(緣起)해서 없다는 말이 한 구절도 없어요. 그냥 오온은 바로 공입니다. 왜? 반야바라밀, 청정광명심, 무분별지 자리에서 주객이 없는데 무슨 오온이 있어요? 좋다 싫다가 어디 있어요? 길고 짧고 어디 있어요? 증가한다 감소한다, 청정하다 더럽다가 없어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일체 이원성이 없어요, 그 자리는. 아시겠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바로 부처 될 수 있는 이유도 뭔지 아세요? 지금 좋다 싫다만 몰라 하시면요 지금 과거 몰라요. 미래 모릅니다. 부처 좋죠. 하지만 부처 좋은지 모르겠고요. 중생 싫은지 모르겠어요. 딱 존재해 보세요. 지금 의식은 또랑또랑한데 좋다 싫다만 없는 상태, 찰나라도 느끼시면요 이 자리가 부처 자리입니다. 왜? 여기는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이원성이 없어요.
22:00
몇 지 보살도 없어요. 그냥 부처자리지. 어떤 이원성도 없이 텅 비어서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게 부처 자리입니다. 그래서 단박 부처된다고 해서 “직지인심(直指人心)하면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는 얘기가 나온 겁니다. 이거는 그대로 하라는 얘기예요. 이거는 그냥 실전 팁이에요. 무슨 현학적(衒學的)인 이론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학적인 이론이 아니라고 뭐라고 하냐면 “우리 가르침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교학에 나온 거 밖에 따로 전하는 거다. 단박에 부처되는 이런 비급은 교학에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냥 바로 들어가니까. 1지(地) 2지(地) 밟아서 부처 되는 법은 교학에 있는 거고 우리는 몰라 하면 바로 부처니까 교학에 없는 거라 교외별전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하고요. 또 진도 나가죠. 21번이요.
[21.
이견부주二見不住: 두 가지 견해(옳고 그름)에 머물지 말고
신막추심愼莫追尋: 조심하여 추구하지 말아야 하니]
두 가지 견해, 옳고 그름 따지는 거예요. 옳다 그르다에 머물지 말고 조심하여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옳다 그르다 따지지 말라. 처음부터 얘기했잖아요. 지극한 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으니 오직 따지지만 마라. 간택만 하지 마라. 22번이요.
[22.
재유시비纔有是非: ‘옳고 그름’이 생기는 즉시
분연실심紛然失心: 어지러워져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옳고 그름이 생기는 즉시 이게 옳고 이게 그르고, 부처는 옳고 중생은 그르고, 견성은 옳고 탐진치는 그르고 이런 소리 하는 즉시 어지러워져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참나자리에서 튕기게 된다. 마음이 양변에 머물면 참나를 놓치게 된다 이 소리입니다. (23번)
[23.
이유일유二由一有: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것이니
일역막수一亦莫守: ‘하나’도 또한 지켜서는 안 되니]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것이니 하나도 또한 지켜서는 안 된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으니까 하나다 하면 또 둘이다가 생기니까 하나란 말에도 머물지 말고 진짜 좋다 싫다를 모른다 하는 그 상태가 하나인 자리다 이 소리입니다. 즉 좋다 싫다가 없는 자리가 공의 자리인데 공하다는 말을 하면요 또 공에 집착하게 되니까 그 말도 하지 말라. 같은 소리입니다. 하나란 말도 하지 말라. 공하다는 말도 하지 말라. 그냥 모른다 하고 계시면 돼요. 좋다 싫다 모르시죠.
24:00
“아! 이 자리가 하나구나” 이런 소리만 안 하시면 됩니다. “이 자리가 공이구나” 그것도 몰라 하시라. 그러면 공 그 자체입니다. 하나 그 자체고. 그러면 의식이 어느 때보다 밝으실 거예요. 탐진치가 없기 때문에 의식이 밝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그래서 눈빛 보고 알아봐요, 스승이. 눈 똑바로 뜨고 다니세요. 정신 딱 차리면, 정신 차리고요 정신만 차리고 있어도요 좋다 싫다 생각을 못 해요, 사실. 그러니까 “정신 차려” 그러잖아요. 정신 차리는 법, 가장 쉽게 차리는 법이요 몰라 괜찮아 하는 법인데 더 쉽게 차리는 법이요 일상에서 계속 써보세요. 눈 포커스를 좀 맞춰주세요. 그럼 정신 차린 거예요. 사물을 똑바로, 그러니까 꼭 뭐 하나를 또렷하게 보시라는 게 아니라 눈이 딱 초점을, 눈에 좀 초점을 잡아보세요.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초점만 잡으시면요 정신 차릴 때 보세요. 탐진치 있나요 거기? 좋다 싫다 없어요. 눈 똑바로 뜨고 있는 상태.
25:00
눈을 가지고 정신을 챙기는 겁니다. 마음을 챙기는 건데 마음 챙김을 위해서 눈을 이용하시면 좋아요. 눈 똑바로 뜨면 정신도 똑바르거든요. 일단 눈이 풀려 있어요. 정신이 흐릿한 친구들은 눈이 풀려 있습니다. 초점 나가 있어요. 우리가 보고 알아요. 우리가 재미있는 얘기하잖아요. 관심 있는 얘기하면 눈이 똑바로 떠집니다. 약간 재미없는 얘기하면 눈이 포커스가 딱 나갑니다. 초점이 흐릿해져요. 안 듣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정신을 안 챙기고 있다는 거죠. 마음을 챙겨라 이게 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때부터 전해오는 실전 팁은요 마음을 챙겨라. 끝. 마음을 챙기는 동안에는요 탐진치가 못 들어가요. 마음을 안 챙기니까 들어가요. 기독교에서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항상 깨어있어라. 언제 도둑이 들어올지 모른다.” 부처님, “항상 문을 지켜라. 마음을 챙겨라. 언제 탐진치가, 3독이 밀고 들어올지 모른다.”
26:01
정신 챙기고 있으면 못 들어와요. 눈 풀려 있으면 들어와요. 좋다 싫다에 확 끌려가요. 눈 초점 맞추고 있으면 덜 끌려가요. 거기에다가 몰라 괜찮아까지 때리시면 못 들어옵니다. 잠깐이라도 탐진치 못 들어온 상태가 열반자리입니다. 24번이요.
[24.
일심불생一心不生: 하나의 ‘마음’도 생기지 않으면
만법무구萬法無咎: 만 가지 ‘법’에 허물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마음도 생기지 않으면 만 가지 법에 허물이 없을 것이다. 좋다 싫다만 안 하면 이 소리예요. 한 생각 일어나면요, 한 생각 일어나면 좋다 싫다가 딱 생기면요 만법에 허물이 생겨요. 뭐냐면 이거 좋다 하는 순간, 이제 파란색이 좋으면 빨간색이 싫어지죠. 그럼 벌써 내 마음에 나타난 법들 간에 허물이 생겨요. 뭐냐면 아집(我執) 욕심이 생기고요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 아니면 법집(法執) 내 것이라는, 요 파란 게 내 거야 하는 내 것에 대한 집착, 이게 주객에 대한 집착이요
27:00
주관의, 주체에 대한 집착을 아집이라고 하고요 보여지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법집이라 그래요. 만법에 집착한다는 거죠. 만법에 집착하고 만법을 보는 주체인 에고에 집착해요. 여기서 아(我)라는 건 참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탐진치의 주체인 나(에고)에 집착해요. (25번)
[25.
무구무법無咎無法: ‘마음’에 허물이 없으면 ‘법’이 없으며
불생불심不生不心: ‘법’이 생겨남이 없으면 ‘마음’이 없으니]
마음에 허물이 없으면요 법이 없어진다는 소리는요 마음에 허물이 없다는 건요 좋다 싫다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만법이 하나도 내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했죠. 부처님이 “딱 그 열반의식에서 빛나는 청정광명심에 있으니까 한 법도 존재하지 않더라. 다 공하더라. 그래서 법이 생겨남이 없으면 마음도 없더라.” 여기서 뭔 말을 하냐면 법이라는 건 인식 대상입니다. 마음은 참나를 말할 때도 있고 좋다 싫다는 주체, 그 법을 인식하는 주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대상이 없으면 주체도 없고요. 주체가 없으면 대상도 없다는 얘기예요. 26번이요.
28:01
[26.
능수경멸能隋境滅: ‘마음’은 ‘경계’를 따라 멸하고
경수능침境逐能沈: ‘경계’는 ‘마음’을 따라 잠긴다(쌍멸雙滅).]
마음은 경계를 따라 멸하고.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대상이 사라지면 그 대상을 바라보던 나도 사라지고요. 그러니까 대상은 마음을 따라서 이렇게 사라지는 거고.
[27.
경유능경境由能境: ‘경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경계’이며
능유경능能由境能: ‘마음’은 ‘경계’로 말미암아 ‘마음’이니(쌍생雙生).]
또 경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경계가 되니까 바라보는 자가 있어야 바라봐지는 대상이 의미를 지니게 되고요. 둘이 쌍생쌍멸(雙生雙滅)한다는 거예요. 주객은 쌍생쌍멸합니다. 보세요. 딱 펜이 생기는 순간 경계가 있으니까 보는 놈이 생기니까 참나가 아니라, 이제 주객이 찢어진 나를 에고라 그래요, 주객이 찢어진 내가 생기죠. 내가 있고 펜이 있습니다. 이 둘 다 멸합니다. 몰라 하면 둘 다 멸해요. 펜도 없고 나도 없어요. 그냥 깨어있는 의식만 있어요. 그런데 다시 여기서 펜을 딱 들면 또 내가 생겨요. 펜을 보는 내가 생겨요. 딱 깨어있으면 주객이 없어요. 배고프다 하는 생각이 딱 일어나면 배고픔이 대상이 돼서 배고픔과 배고픈 내가 생겨요. 주객이 또 찢어집니다. 주객만 안 찢어지면
29:00
원래 정신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 소리예요. 그러면 주객 없이 어떻게 살아요? 그런데 다만 참나를 만나려면 이렇게 만나라는 얘기입니다. 28번이요.
[28.
욕지양단欲知兩段: ‘양단’(마음과 경계)을 알고자 한다면
원시일공元是一空: 원래 하나의 ‘텅 빔’이다.]
두 가지 극단, 이 주관과 객관을 알고자 한다면 원래 하나의 텅 빔 뿐이다. 원래 텅 빈 공자리다. 이건 눈앞에 허공이 아니에요. 그냥 알아차리는 의식이 주객이 없어서 텅 비었다고 하는 겁니다. 29번이요.
[29.
일공동양一空同兩: 하나의 ‘텅 빔’은 ‘양단’과 한 가지라
제함만상齊含萬象: 온갖 형상을 고르게 머금었다.]
하나의 텅 빔은 두 가지 극단과 한 가지라. 텅 빈 자리에서 주객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별거 없어요. 지금 명상하실 때, 지금 좋다 싫다 몰라 하실 때는 주객이 없다가 딱 눈앞에 펜을 보니까 주객이 생겼죠. 텅 빔에서 또 주관 객관이 나왔어요. 펜과 펜을 보는 내가 생겼어요. 그런데 이걸 치우면 그냥 알아차림만 있어요. 이런 거랑 똑같아요. 거울과 같다. 우리 이 참나자리를요 예전 스님들이 고승들이 거울에 비유하거든요. 왜 좋냐면요 거울은 비추는 능력이 있죠. 애초에 인식 능력이,
30:00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거울이 좋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비추고 있으면 텅 비어 있겠죠. 텅 비어 있는데 거울은 비추는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 그래요. 거울을 거칠게 비유하자면 거울이 우리 의식을 닮았다. 그런데 만약에 거울에다가 이 펜을 대면 거울에 상이 생기겠죠. 그럼 그때 거울은요 텅 빈 상태가 못 돼요. 이제 펜을 비추고 있거든요. 펜을 비추는 거울이 돼버려요. 그러면 그때는 주객이 생겨요. 펜과 펜을 비추는 거울. 그런데 펜을 치우면요? 그냥 거울만 있어요. 이게 하나인 자리예요. 펜을 대는 순간 경계가 생기고 그 경계에 대해서 따지는 마음이 생겨서 둘이 돼버려요. 이게 다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텅 빔은 두 가지 극단과 한 가지라 온갖 형상을 고르게 머금었다. 온갖 형상이 다 그 텅 빈 자리에서 나왔다 이 소리고요. 30번
[30.
불견정추不見精麤: ‘정밀함’과 ‘거침’을 보지 않으니
영유편당寧有偏黨: 어찌 치우치게 편당을 지음이 있겠는가]
정밀함과 거침을 보지 않으니 어찌 치우치게 편당을 지음이 있겠는가. 말이 좀 안 좋죠.
31:01
어렵죠. 근데 결국 이게 뭐예요? 정밀하니 거치니 하는 이원성, 이원성 따지지 마라. 참나자리에는 그런 거 없다. 31번이요.
[31.
대도체관大道體寬: ‘큰 도’의 본체는 광활하여
무이무난無易無難: 쉬울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는데]
큰 도의 본체는 광활하여 쉬울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는데. 쉽다 어렵다도 하시면 안 돼요. 그거 탐진치예요. (32번)
[32.
소견호의小見狐疑: ‘작은 견해’는 여우처럼 의심하여
전급전지轉急轉遲: 서두를수록 더욱 늦어지게 된다.]
쉽다 어렵다가 본래 없는데 작은 견해 쉬우니 어려우니 하는 견해가 여우처럼 이렇게 의심하면서 일어나면 서두를수록 더욱 늦어진다. 이 얘기는 뭐냐면요 공부 빨리 하고 싶으시죠. 그러면 그게 탐진치거든요. 오히려 돌아가게 된다는 거예요. 급한 마음이 생겼다는 건요 도는 원래 좋다 싫다 없는 게 도인데, 쉽다 어렵다가 없는데 빨리 하고 싶은 마음, 빨리 쉽게 하고 싶은 마음에 쉬운 길 없을까 하는 마음이 오히려 돌아가게 만든다. (33번)
[33.
집지실도執之失度: 집착하면 법도를 잃게 되어
필입사로必入邪路: 반드시 사특한 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집착하면 도를 잃어버리게 되어 반드시 사특한 길에 들어가게 만든다. 좋다 싫다를 너무 따지다 보면 반드시 상황은 안 좋아진다. 34번.
[34
방지자연放之自然: 내려놓으면 스스로 그러할 뿐이니
체무거주體無去住: ‘본체’는 가고 머묾이 없다.]
32:00
내려놓으면 스스로 그러할 뿐이니. 그때 좋다 싫다 말 안 하면 스스로 그러한 참나자리에 딱 머무니까 본체는 가고 머묾이 없다 간다. 머문다 없이 항상 본체 상태에 접속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만 하지 마라. 막 본체에 머물려고도 하지 말라 이런 말입니다. (35번)
[35.
임성합도任性合道: ‘본성’에 탁 맡기면 ‘도’(진리)와 합하고
소요절뇌逍遙絶惱: 그 자리에서 소요하면 번뇌가 끊어진다.]
본성에 탁 맡기면 도랑 하나가 되고 그 자리에서 소요하면. 소요한다는 건 노닌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노닐면 번뇌가 끊어져 버린다. 탐진치가 없죠 그 자리에는.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36번이요.
[36.
계념괴진繫念乖眞: ‘생각’에 붙잡히면 ‘참됨’에 어긋나며(의식)
혼침불호昏沈不好: ‘흐리멍덩함’에 빠지면 좋지 않도다(무의식).]
생각에 붙잡히면 참됨에 어긋나며 흐리멍텅함에 빠지면 이것도 좋지 않도다. 이 소리는요 생각은 의식 세계예요. 의식이 활발하게 움직여도 참나에서 멀어지고 그렇다고 무의식에 빠져 졸고 있으면 그것도 참나랑 상관없다. 그러니까 졸아도 안 되고 막 머릿속 복잡해도 안 된다. 좋지 않다. (37번)
[37.
불호로신不好勞神: 좋지 않으면 정신이 수고로워지니
하용소친何用疎親: 어찌 멀리하고 친애함을 쓰겠는가?]
33:00
좋지 않으면 정신만 괜히 수고로운 거니까 뭘 하라는 거예요? 그냥 몰라 해라. 뭘 더 사랑하고 뭘 더 멀리하고 하지 말고 좋다 싫다 하지 말라. 자꾸 좋다 싫다만 계속 쓰기 그러니까 이것도 자꾸 바꿔 봐요. 옳다 그르다 했다가, 빠르다 늦다 했다가, 쉽다 어렵다 했다가, 이제 멀리하고 친애하고, 소원하게 지내거나 친애하게 지내거나 “난 얘가 좋고 얘는 별로야” 이런 소리 하지 말라. “이 상태는 좋고 저 상태는 싫어” 이런 거 하지 마라는 거예요. 수련하다가 참선하다가 “난 이럴 때 딱 좋고 저럴 때 딱 싫어” 이런 소리도 하지 말라. 딱 정신 차리면 그 자리다. 정신만 딱 마음 챙기고 있으면 그게 그대로 열반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탐진치가 못 붙어요. 해보세요. 정신 차리면서 탐진치 일으켜 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러다 보면 탐진치에 빠져요. 정신 차리는 게, 이제 정신 차리는 게 오히려 탐진치를
34:00
더 강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가고 끝나버릴 수 있어요. 다만 정신 차리는 걸 계속 지키고 있다 보면 탐진치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정신을 적당히 챙겨서 탐진치에 빠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정신을 계속 챙기고 있으면 탐진치가 못 들어온다. 해 보세요. 38번
[38.
욕취일승欲趣一乘: ‘일승一乘’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물오육진勿惡六塵: ‘여섯 가지 경계’를 싫어해서는 안 된다.]
일승(一乘)에 나아가고자 하면. 일승이라는 게 뭐겠어요? 한결같은 이 길이, 곧장 부처되는 길을 일승 그래요. 소승(小乘)되는 길이 있고 대승(大乘)의 길, 보살의 길이 있잖아요. 6바라밀 닦는 대승의 길도 아니고, 아라한이 돼서 열반에 머물자는 소승의 길도 아니고, 곧장 부처가 되어버리자는 길을 일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선불교의 가르침을 일승(一乘)이라 그래요. 바로 부처 되어 버리자는 거거든요. 그래서 부처되어 버리고자 나아가고자 한다면 6가지 경계를 싫어해서도 안 된다. 즉 여러분 보이는 색깔, 들리는 소리,
35:00
향기, 그쵸, 냄새, 맛, 촉감, 그리고 알아차려지는 수많은 개념들. 이게 육경(六境)이거든요. 6가지 경계에 대해서 싫어하지도 말라는 건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말라는 거예요. 이거를 혐오하면 소승이 돼버려요, 떠나려고 하면. 떠나지도 말고 그냥 좋다 싫다만 하지 말아 달라. 그러니까 육경을 다 경험하되 좋다 싫다만 하지 말아 달라. 이 느낌 아시겠죠. 그러니까 여러분 소리가 들리고 이거 언제 제일 유용하겠어요? 층간 소음에. 제일 싫은 소리잖아요. 층간 소음. “아, 또 위에서 누가 뭐 한다.” 이럴 때 거슬리는 소리잖아요. 좋다 싫다만 하지 마라. 소리를 없앨 수는 없는데 소리를 싫어하지 말라 이 소리입니다. 잘 안 돼요. 층간 소음에는. 너무 세요 그거는. 그래서 이사 가야 끝납니다. 그래서 다만 이 어떤 원리인지
36:00
아시겠죠? 층간 소음 같은 극단적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내가 싫은 육경이 있어요. 소리, 보고 싶지 않은 색깔, 듣기 싫은 소리, 맡기 싫은 악취, 그때 한번 수행의 도구로 써보세요. 그때 “이거 한번 몰라 되나 해보자. 좋다 싫다 몰라. 싫은 거 몰라, 싫은 거 몰라.” 그러면 찰나라도 참나 접속이 되면서 잠깐 내면에서 황홀함이 일어나고 평안함이 일어나면 역경을 이용해서 견성체험하신 겁니다. 그렇게도 써보시라. 그리고 거기 계속 있지 말고 잘 피하시라. 내 역량의 한계를 아셔야 돼요. 갑자기 내가 부처려니 하시면 안 돼요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게 이제 버릇이 돼야 돼요. 방금 제가 말씀드린 좋다 싫다 안 하기가요 버릇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버릇 그러면 우리 좀 요즘 과학시대에
37:00
이런 심리학적인 용어라서, 버릇을 들인다는 게 우리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의 종자를 심는 거거든요. 자꾸 행동을 반복하는 게요 아뢰야식에 있는 종자를 강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무의식에 그게 저장돼 있다가 자꾸 튀어나와요. 그런데 뇌과학적으로 이해하면 더 쉬워요. 우리가 어떤 일을 자꾸 하면요 뇌신경회로가요 그 일을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재조합을 합니다. 실제로. 자꾸 여러분이 좋다 싫다 몰라 해버릇 하시면요 그거 하시는 걸로 이 신경회로가 딱 조합이 돼요. 그래서 그 일을 그냥 무의식중에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월하게 처리하게 도와줘요. 그런데 만약에 이제 며칠 열심히 하니까 생겼어요. 근데 한 달 쉬어요. 그러면 다시 다른 일 하는 데 최적화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몰라 하려면 낯설어해요 뇌가. 버릇이 안 돼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신경회로가 다시 다른 일의 용도에 맞게 재조합돼서 그래요. 그러면 당황하지 마시고
38:00
그냥 하세요. 그냥 몇 번 더 하시면요 아, “이거 하라고” 하고 다시 재조합됩니다. 그리고 그걸 또 반복만 해주시면 이게 견고해져요. 뇌에서 그 일을 처리하는 데 최적화되게 만들어놔요. 그러면요 이제 무의식중에도 막 됩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도 막 하시다 보면요 익숙해져요 그게.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견성자가 되시는 겁니다. 주객이 바뀌어요. 오히려 이게 편하고 저게 힘들어져요. 그래서 옛날 견성한 스님들이 뭐라고 하냐면 “낯익던 게 낯설어지고 낯설던 게 낯익어지면 견성한다” 그래요. 지금은 낯익은 놈만 계속 낯익고, 낯선 놈은 계속 낯설잖아요. 그런데 낯선 게 낯익어지면 돼요. 그렇게 활용하시고요. 이제 거의 막판을 향해 가니까 빨리 좀 나가볼게요. 다 어려운 얘기 없습니다. (39번)
[39.
육진불오六塵不惡‘여섯 경계’를 싫어하지 않으면
환동정각還同正覺도리어 ‘바른 깨달음’과 하나가 될 것이다.]
6가지 경계를 싫어하지만 않으면 바른 깨달음과 하나가 된다. 좋다 싫다 하지 마시라는 얘기고요. 40번
[40.
지자무위智者無爲: 지혜로운 사람은 하는 것이 없는데
우인자박愚人自縛: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를 결박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는 것이 없는데
39:01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결박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냥 몰라 하고 잘 사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좋다 싫다에 빠져가지고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근데 이게 말이 쉽지 우리 중생은요 이게 중생의 맛이거든요. 좋다 싫다 때문에요 인생 꼬이는 게 우리 중생의 맛입니다. 좋다 싫다에 빠져가지고요 좋은 게 우리 보통 중생들이 다 같이 좋아하는 게 부귀입니다. 다 같이 싫어하는 게 빈천(貧賤), 빈티 나고 싼티 나는 거. 좋은 게 뭐예요? 부티 나고 귀티 나는 거. 이거는 욕망을 너무 단일화해서 본 건데요. 그런데 공통적으로 말하면 이거(부귀). 그리고 이 부귀 자리에 여러분이 원하시는 어떤 욕망이건 넣어보면 다 맞아요. 이 부귀 가지고 육도(六道)를 돕니다, 탐진치로. 탐진치로 육도를 돌아요. 그런데 인간계 안에서도 육도가 바로 굴러갑니다. 육도가 이 부귀 자리에 부귀를 희망을 가지고
40:00
삼선도(三善道)라고 있죠. 선한 쪽은요 희망적이에요. 삼악도(三惡道) 쪽은요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부귀를 열심히 건강하게 추구하고 있는 상태가 ‘인간계’예요. 그러니까 부귀건 내가 원하는 목표, 뭐든지 인간계. 그런데 그래서 추구하다가 많이 가진 놈을 보면 막 질투가 나고 짜증 나는 게 ‘수라계’, 조금만 하면 될 것 같고 막. 그러다가 부귀 안주, 부귀를 성취하면요 ‘천상계.’ 부귀 추구 ‘인간계.’ 부귀 질투 ‘수라계.’ 부귀 안주 '천상계.' 안주(安住)라는 건요 애쓰지 않아도 밑으로 안 떨어지는 단계예요. 백만장자 잘 안 떨어져서 백만장자예요. 그 위에 또 있어요. 억만장자. 그 선은 돌파했다는 얘기죠. 밑으로 잘 안 떨어진다는 얘기죠. 뭐든지요. 저 같은 경우는 이제 집이, 집에서는 제가 지금 막 인간계입니다. 언젠가
41:00
자가(自家)를 살 거야. 안주가 안 돼 자가 아니면 불안하죠. 전세 월세면 불안하죠. 뭐든지 내 것으로 쟁취하면 안주(安住), 못 얻었으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추구하거나 이렇게 질투하게 돼 있어요. 그래도 이거는 건전한 희망이 있는 세계입니다, 삼선도는. 삼악도는 어떨까요? 아귀,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아귀는요 희망은 없는데 아직 욕심이 나서 죽겠는 게 ‘아귀계’예요. 그래도 갖고 싶다. 포기하면 ‘축생계’입니다. “됐다. 나 초식남, 나 풀 먹을래.” 되게 고기 좋아하는데 고기를 먹을 수가 없으니까 오늘부터 풀 먹기로 그냥. 그러니까 포기하면 부귀 포기 ‘축생계.’ 부귀에 아주 막 갈망에 빠져 있으면 ‘아귀계.’ 성취가 안 됐는데요 희망은 없는데 너무 갖고 싶어서 찰나찰나 괴로우면 ‘지옥’입니다. 부귀 지옥.
42:00
자 여기에 지금 인간계 안에서 육도(六道)가 바로 돕니다. 지금 어딘가 하나에 계시죠. 그러니까 대상만 바꿔보세요. 그러니까 부귀는 천상계일 수 있어요. 돈은 많아요. 결혼을 못했어요. 그러면 이성에 있어서는 지금 아귀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만 가지고 재단하지 마시고 뭐는 이건데 뭐에서는 이거고. 그리고 찰나찰나 찰나찰나 여러분 아침에 일어났는데 칫솔이 없어요. 그럼 칫솔 아귀. 칫솔 지옥. 작은 거 하나에서 또 육도가 굴러간다니까요. 그래서 자기 마음을 육도 중에 어디 있는지 빨리빨리 파악해 보세요. 희망이 있는지? 희망이 없는지? 막 짜증나서 죽겠는지? 포기 상태인지? 괴로운지? 이렇게 이게 다 뭐로 시작됐죠? 좋다 싫다. “이거 좋아 이거 싫어”에서 육도가 바로 펼쳐집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게 무서워요? 좋다 싫다가. 그래서 이 좋다 싫다만 몰라 하는 순간 정토(淨土) 접속이 돼버립니다. 육도 어디 있든지 바로 정토에
43:00
접속이 돼요. 지옥에 있다가도요 좋다 싫다를 몰라 해버리면요 여전히 없어서 괴로운 마음이 49%인데 51%가 고요하고 평안하고 막 이럽니다. 이상한 상태에 들어가요. “너 오늘부터 해고야” 했는데 해고 받아서 기분 나빠서 나오다가 “좋다 싫다 하지 말랬지. 좋다 싫다 하지 말아보자” 하면 해고당해서 괴로운 마음 49%인데 51%가 여여해지면요 기분이 황홀해지고 평안하고 희열에 가득 차면요 이 분은 지옥인데 정토에 접속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인간계에 있는 사람들 정토 접속시키려고 정토종이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시면 재밌죠. 그래서 좋다 싫다 무서운 게 이겁니다. 바로 육도,지옥부터 천상계를 돌고 돌게 만든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는 게 없어요. 몰라 해요. 항상 정토에 살아요. 어리석은 사람은요 좋다 싫다 때문에
44:00
육도를 돌아요. 스스로를 결박한다. 41번.
[41.
법무이법法無異法: ‘법’에는 다른 법이 없는데
망자애착妄自愛着: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한다.]
법에는 다른 법이 없는데, 다 참나 작용인데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한다. 이건 좋고 저건 싫다고 한다는 겁니다. 모든 법은 다 똑같이 참나의 작용일 뿐인데 이건 좋고 저건 싫다. 부처는 좋고 중생은 싫다. 스스로 분별해 애착한다. (42번)
[42.
장심용심將心用心: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려고 하니
기비대착豈非大錯: 어찌 크게 그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려고 하니 어찌 크게 그르치지 않겠는가. 좋다 싫다 하지 마라 이겁니다. 마음을 또 다스리려고 마음을 쓰는 거, 용쓰는 것 자체가 또 좋다 싫다 예요. “이건 좋고 이건 싫으니까 난 이렇게 해야지” 또 제 얘기 듣고 “아귀는 싫고 천상계는 좋고” 이러지 마라는 겁니다. 그 말 안 하면 바로 정토다. 요게 묘미입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끌고 가는 게. (43번)
[43.
미생적란迷生寂亂: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며
오무호오悟無好惡: 깨달으면 ‘좋음’과 ‘싫음’이 없으니]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한 생각 좋다 싫다 따지면 이렇게 고요하니 어지러우니 고요한 건 좋고 어지러우면 싫고 또 이런 말이 나오고요. 깨달으면 좋다 싫다도 없다. 오늘 막 귀에 피나게
45:00
지금 들으시죠. 귀에서 피 나실 것 같은데. “좋다 싫다 없다. 좋다 싫다 없다.” 좀 말이 좀 극단적인 감이 있어요. 그런데 견성시키려고 이렇게 몰아가는 겁니다. 44번. 그냥 견성하고 못 이기는 척하고 가세요.
[44.
일체양변一切二邊: 일체의 ‘양변’은
양유짐작良由斟酌: 진실로 짐작으로 말미암음이다.]
일체의 양변(兩邊)은 진실로 짐작으로 말미암음이다. 짐작이에요, 좋다 싫다는 짐작. 그래서 자꾸 양변이 생긴다. 플러스마이너스가 생긴다. (45번)
[45.
몽환공화夢幻空華: 꿈이며 환영이며 헛된 꽃일 뿐인데
하로파착何勞把捉: 어찌 수고롭게 붙잡으려고 하는 것인가?]
꿈이며 환영이며 헛된 꽃일 뿐인데 어찌 그렇게 수고롭게 붙잡으려고 하는가? 다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홀로그램인데 우리 마음 작용일 뿐인데. 헛된 꽃이 허공꽃인데요 눈병 생겼을 때 보이는 헛것이에요. 실체는 없는데 눈에 뭔가 이상한 게 보여요. 여러분 눈 누르시면 뭐가 보이죠, 이상한 게. 그런 걸 허공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게 참나에서 나툰 그냥 이런 주객이 펼쳐져서 노는 그냥 환상인데, 그런데 가짜라는 건 아니에요. 왜냐면 가짜면요 꿈이 진짜 가짜죠. 꿈은 꿈속에서 우리 살인해도요.
46:00
깨고 나서 “아, 그럴 것까지는 아니었는데” 하고 말지, 뭐 웃고 말지 더 신경 써요? 현실에서는 그러면 잡혀갑니다. 그러니까 홀로그램 같다는 게 완전히 헛것이라는 건 아니에요. 의식의 작용으로 펼쳐진다는 얘기를 꿈같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꿈보다는 뭐랑 같냐면요 사이버게임, VR 세계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사이버게임에서 룰 안 지키면요, 각자대로 다 접속해서 즐기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룰 지켜줘야 돼요. 그러니까 나 혼자 꾸는 꿈은 아니라는 거예요. 꿈같다는 얘기를 그렇게 주관적인 환영이라고 보시면 안 돼요. 객관적인 환영입니다. 그래서 이 안에서 우리가 지지고 볶고 또 보살도도 하고 막 돕고 해야 돼요. 46번.
[46.
득실시비得失是非: ‘이득’과 ‘손실’과 ‘옳음’과 ‘그름’을
일시방각一時放却: 한꺼번에 내려놓아라!]
이득과 손실 옳고 그름, 다 이원성이죠, 한꺼번에 몰라 하자.
[47.
안약불수眼若不睡: 눈이 잠들지 않는다면
제몽자제諸夢自除: 모든 꿈이 스스로 사라질 것이며]
눈이 잠들지 않으면, 즉 깨어있으면 꿈은 사라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다 싫다 안 하고 참나를 깨달으면 일체의 이 환영 같은 세계가 실상이 드러날 거다. (48번)
[48.
심약불이心若不異: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만법일여萬法一如: ‘만 가지 법’이 모두 한 덩어리와 같을 것이다.]
마음이
47:00
달라지지만 않는다면, 마음이 좋다 싫다로 변질만 안 된다면 만법이 모두 주객이 없는 한 덩어리랑 같을 것이다. 마음에서 주객이 찢어지지만 않는다면 ‘나’니 ‘내 것’이니, 인식하는 주체인 ‘나’와 인식되는 대상인 ‘내 것’ 이것만 안 쪼개지면 원래 다 한 덩어리다. (49번)
[49.
일여체현一如體玄: 한 덩어리와 같으면 ‘현묘함’을 체득하여
올이망연兀爾忘緣: 우뚝하여 인연을 잊게 될 것이다.]
한 덩어리와 같으면 현묘함을 체득하여 우뚝하여 인연, 좋다 싫다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는 그 인연을 잊게 될 것이다. 그렇고요. (50번)
[50.
만법제관萬法齊觀: 만 가지 법’을 한 덩어리로 관조하면
귀복자연歸復自然: 스스로 그러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법을 한 덩어리로 관조하면, 주객만 몰라 하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자연이 참나의 세계죠. 스스로 그러한 참나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51번)
[51.
민기소이泯其所以: 그 ‘원인’을 없애면
불가방비不可方比: 바야흐로 비교할 짝이 없다.]
그 원인을 없애면 바야흐로 비교할 수가 없다. 주객이 없어져버리니까 누가 더 좋으니 싫으니따질 수 없게 될 것이다. (52번)
[52.
지동무동止動無動: 고요하면서 움직이면 ‘움직임’이 없고
동지무지動止無止: 움직이면서 고요하니 ‘고요함’이 없다.]
고요하면서 움직이면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고요하니 고요함이 없다. 뭔 소리냐면요 텅 빈 중에 알아차리고 있는 게 고요하면서 움직인 겁니다. 텅 빈 중에 알아차림,
48:00
즉 고요함 없는 움직임은요 이원성의 움직임이고요. 고요한 중에 정신이 작용을 일으켜서 알아차리고 있는 건 진공묘유(眞空妙有)라서 이건 괜찮다는 겁니다. 고요한 중에 알아차리거나 알아차리는 데 고요하면 된다. 이거는 이제 주객을 초월한 자리를 말하는 거고요. (53번)
[53.
양기불성兩旣不成: ‘둘’이 이미 이루어질 수 없다면
일하유이一何有爾: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둘도 이미 없는데 하나가 어찌 있냐. 하나니 둘이니 따지지 마시라. (54번)
[54.
구경궁극究竟窮極: ‘구경’이며 ‘궁극’의 경지라
부존궤칙不存軌則: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다.]
구경(究竟)이며 궁극의 경지라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다. 이 참나자리는 오직 모를 뿐이다. 뭐 자꾸 개념 붙이지 말라 이거고요. (55번)
[55.
계심평등契心平等:‘마음’이 ‘평등’(자타불이)에 계합하면
소작구식所作俱息: ‘경계’와 ‘작용’이 모두 그치게 된다.]
마음이 평등에 계합하면 즉, 좋고 싫음이 없는 게 평등이죠. 좋고 싫음이 있으면요 좋은 건 이렇게 높아 보이고 싫은 거는 낮아 보입니다. 평등해 보여야 됩니다. 그러면 좋고 싫음이 없다는 얘기죠. 마음이 평등에 계합하면, 계합한다는 건 딱 부합하면 마음이 짓는 바가 모두 그치게 된다. 마음에 쓸데없는 조작이 멈추게 된다. 참나랑 하나 된다 이 소리죠. (56번)
[56.
호의정진狐疑淨盡: 여우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면
정신조직正信調直: ‘바른 믿음’(둘 아닌 자리)이 조화롭고 곧도다.]
여우같은 의심. 꼭 여우를 끌어들여요.
49:00
여우가 의심이 많나 봐요. 그래서 여우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면 바른 믿음이 조화롭고 곧도다. 그때 바른 믿음이 선다. 이제 “신심명” 본래 취지로 돌아온 거죠. 좋다 싫다 안 하는 게, 믿는다 안 믿는다 말 안 하는 게 바른 믿음이다. (57번)
[57.
일체불류一切不留: ‘일체’에 머물지 않으면
무가기억無可記憶: 기억할 것이 없으니]
일체 머물지 않으면 기억할 것이 없으니. 몰라 하고 있으면 기억할 게 없죠. (58번)
[58.
허명자조虛明自照: 텅 비되 밝게 스스로를 비추면
불로심력不勞心力: 심력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텅 비어 있되 밝아 스스로 비춘다. 이게 정광명심이죠. 텅 비었다는 건 뭐예요? 주객이 없다. 주객이 없는 중에 스스로 비추는 의식이 있다. 이게 형체는 없지만 스스로 빛나는 의식이 있다는 석가모니 가르침 그대로죠. 심력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 자리만 각성하면 묻고 따질 거 없다. 그냥 그대로 여여하다. (59번)
[59.
비사량처非思量處: 생각으로 따질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정식난측情識難測: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가 없다.]
생각으로 따질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가 없다. 아직도 있어요. 남았네요. 빨리 갈게요. 그래도 한번 맛은 보셔야죠. (60번)
[60.
진여법계眞如法界: ‘진여의 법계’는
무타무자無他無自: 나와 남이 없으니]
진여의 법계는
50:00
나와 남이 없으니. 계속 같은 얘기라서 쉬우시죠. 또 따지지 말자고요. 아무튼 제가 잘못했습니다. 진여의 법계는 나와 남이 없으니. (61번)
[61.
요급상응要急相應: 그 자리와 곧장 상응하고자 한다면
유언불이唯言不二: 오직 ‘둘이 아님’을 말할 뿐이다.]
그 자리와 곧장 상응하고자 한다면 둘이 아님만 말해라, 말할 뿐이다. 좋다 싫다만 하지 마라. 나와 남만 따지지 말라.(62번)
[62.
불이개동不二皆同: ‘둘이 아님’은 모두 ‘똑같음’이니
무불포용無不包容: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둘이 아니면 모두 똑같다는 거니 포용하지 않음이 없는 거다. 즉 여러분이 나와 남만 몰라 하시면 일체를 포용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즉 몰라 하는 마음은요 자비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일체를 가르지 않잖아요. 나와 남을 가르지 않으니까 우리가 몰라 해버리면 그게 자비라는 겁니다, 그대로. 일체를 하나로 껴안아버리는 마음 아니냐. 즉 좋다 싫다가 없음에서 나와 남이 없음, 즉 자비까지 끌어낸 거예요. (63번)
[63.
시방지자十方智者: 시방의 지혜로운 사람은
개입차종皆入此宗: 모두 이 ‘종지’에 들어갔다.]
모두 이 종지, 지혜로운 시방의. 시방이라는 건요 상하팔방 온 우주의 모든 지혜로운 존재는 다 이거 알아서 지혜로운 거다 이겁니다. 이 자리 알았을 뿐이다.
51:00
그러니까 이 자리만 알면 온 우주의 지혜로운 사람의 대열에 들어갑니다. 그 모임에 들어가는 거예요. (64번)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이 종지는 짧지도 길지도 않으니
일념만년一念萬年: 한 찰나가 만 년이며]
이 종지는 짧지도 길지도 않으니 한 찰나가 만년이며 이런 얘기 좀 불편하시죠. 65번
[65.
무재부재無在不在: ‘있음’도 ‘없음’도 없으니
시방목전十方目前: 시방이 눈앞이다.]
존재함도 존재하지 않음도 없으니 시방이 눈앞이다. 이거 아주 쉬워요. 보세요. 과거 몰라요. 미래 몰라요. 존재하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죠. 지금 이 순간에서 딱 바라보면요 이 종지는 짧지도 길지도 않다는 건 시간성을 초월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성을 초월하고 보면요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영원이에요. 여러분 지금 이 순간밖에 없지 않아요 시간이? 시간을 초월하고 보면요 온 우주가 한 덩어리로 지금 이 순간이에요. 시간 전체가 한 덩어리라고 생각하시면요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만년이고요, 영원이고. 공간적으로 말하면 “여기 있네 저기 있네 여기 없네 저기 없네”라는 공간을 초월하고 보면
52:00
지금 여기가, 여기가 온 우주예요. 이해되세요? 이게 사실인 게 이건 팩트입니다. 이거 막 말 죽이네 이게 아니고요. 여러분 지금,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경험하는 우주는 지금 이 순간밖에 없지 않으세요. 지금 이 순간밖에 없어요 시간이. 딱 정신 차리고 보시면. 그리고 여기밖에 없어요. 우주는 여러분 마음에 등장한 게 우주의 전부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지금 보시는 이게요 이게 온 우주예요. 지금 이 순간이 영원이고요 지금 보이는 이게 내 온 우주 경험하는 전부예요. 생각을 굴려야 이 집 밖에 누가 있고 누가 있고가 따져집니다. 생각 굴리지 말고 그냥 겪으세요. 이 순간밖에 없고 여기밖에 없다는 얘기를 이렇게 써놓은 거예요, 멋있게. 이 순간이 만년이고 여기가 온 우주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밖에 없어요, 내 우주에.
53:00
이 시간밖에 없어요. 뭔가 알 듯하면 된 겁니다. 66번 67번도 쉬워요. 66번.
[66.
극소동대極小同大: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큰 것’과 같으니
망절경계忘絶境界: 경계가 모두 끊어지며]
지극히 작은 것은 지극히 큰 것과 같으니. 또 이상한 말을 하시는데 이분이 또 막판에 자꾸 이제 좀 기교를 부리시는 것 같아요. 경계가 모두 끊어지며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뭔 말인지 맞춰보세요. 퀴즈입니다. 지극히 작은 건 지극히 큰 거랑 같으니 경계가 모두 끊어지며,
[67.
극대동소極大同小: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이 같으니
불견변표不見邊表: 끝과 겉을 볼 수가 없다.]
지극히 큰 거는 지극히 작은 것과 같으니 끝과 겉을 볼 수가 없다. 이 화이트보드 보세요. 여기에 지극히 작은 점 하나 찍으려면 찍을 수 있을까요? 지극히 작아야 돼요. 이거 점찍어도 벌써 이거보다 더 작은 거 있을 거 아니에요. 더 작고 더 작고 더 작고 더 작고 하면 경계가 없어지겠죠. 못 찍어요. 지극히 작은 것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큰 거를 표현해 볼까요? 이게 큰가요? 더 클 수 있잖아요.
54:01
“더 클 수, 더 클 수, 더 클 수” 하면 끝이 없어요. 이렇게 보면 어떻게 되죠? 지극히 작은 거랑 지극히 큰 게 통해버려요. 왜? 표현을 못해요. 둘 다 경계가 없고 끝이 없어요. 옛날 분들 이러고 노셨어요. 별거 아니죠. 뭔 말하고 싶냐면 양극단이 하나로 통한다는 거친 비유를 하나 들어주신 거예요. 이게 별건 아닌데 “봐라. 지극히 큰 거랑 지극히 작은 놈이 하나로 통하는 거 재미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양극단, 좋다 싫다도 하나다. 부처랑 중생도 하나다. 좀 큰 시각에서 보면 하나다. 그러니까 양극단이 하나다. (68번)
[68.
유즉시무有卽是無: ‘있음’이 바로 ‘없음’이며
무즉시유無卽是有: ‘없음’이 바로 ‘있음’이니]
즉 있음이 없음이요 없음이 있음이 된다. 양극단을 하나로 봐라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 하지 마라는 좀 더 멋진 또 동기부여를 해주시는 거예요. 좋다 싫다 하지 마라. 다 하나다. 양극단을 하나로 봐라. (69번)
[69.
약불여차若不如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불필수수不必須守: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챙겨야 할 공부가 아니다.
55:00
만약에 이런 공부 아니면 내가 권하지도 않았다. 이런 공부, 이런 양극단을 초월하는 공부 아니면 하지도 말라 이 소리예요. 공부는 모름지기 이런 공부를 해야 된다. (70번)
[70.
일즉일체一卽一切: ‘하나’가 바로 ‘일체’이며
일체즉일一切卽一: ‘일체’가 바로 ‘하나’이다.]
하나가 바로 일체요 일체가 하나다. 이 말은요 여기서 이 티끌 하나를.. 이 티끌은 너무 작으니까 요게 티끌이라고 할까요. 요 티끌 하나에 우주가 다 들어있다는 거 아시겠어요? 왜 그럴까요? 요게 있으려면요 지구가 받쳐줘야 되고요 우주가 덮어줘야 돼요. 이거 하나에 온 우주가 다 반영돼 있습니다. 이거 하나가요 목성의 어디쯤에 있는 이건 거고요 북극성의 어디쯤에 있는 이 펜이에요. 이 펜 하나를 좌표를 잡으려면 온 우주가 동원됩니다. 이 티끌 하나를 받쳐 주는 데 온 우주가 지금 기여하고 있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 여러분 하나를 지금 받쳐주려고 지구가 밑에 있고 별이 위에서 비춰주고 있어요. 그래서 일체가 온 우주인 거예요. 하나가
56:00
이 티끌 하나가 온 우주 덩어리랑 하나로 통하는 거예요. 이 얘기 갑자기 왜 했냐? 방금 바른 신심을 가지고 좋다 싫다 몰라 해서 찰나의 부처 되셨죠. 그게 그대로 부처라는 겁니다. 방금 막 깨달은 그 자리가 부처 자리라는 얘기를 합니다. 왜냐? 여기서 공부해서 나중에 부처 되겠죠. 그런데 이 시공을 한 덩어리로 놓고 보면요 저 끝에 부처가 지금 여기서 시작했겠죠. 여기서 참나 접속한 여기서 시작해서 부처가 나중에 되시겠죠. 그런데 이거는 시간상 배열해 놔서 그렇지 시간을 한 덩어리로 보면요 이미 부처됐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 화엄 논리입니다. 이미 부처됐다. 티끌 하나에서, 작은 불성의 싹에서 부처를 봐요 이분들은. 그래서 일체가 벌써 견성 안에 성불 있다는 거예요. (71번)
[71.
단능여시但能如是: 단지 능히 이와 같다면
하려불필何慮不畢: 어찌 공부를 마치지 못함을 근심할 것인가?]
단지 능히 이와 같다면 어찌 공부를 마치지 못함을 근심할 것인가? “내가 방금 이렇게 좋다 싫다 안 해서 부처를 잠깐, 1초 부처는 됐지만
57:00
영원한 부처가 되려면 오랜 세월 닦아야 되는데 이 공부 언제 하겠는가?”라는 말 하지 말라. 1초 부처도 부처다. 1초 부처가 결국 부처된다. 그래서 시간성에서 놓고 보면 먼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하나 안에 일체가 들어있듯이 지금 이 시작 안에 끝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하시는 직업을 돌이켜 보세요. 언제 그 직업이 시작됐죠. 뭔가 한 번 잘못 길 들어설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어요? 뭐가 하나 좋아 보였을 때. 그러다 그러다 여기까지 오셨죠. 그러면 이게 한 덩어리로 보시면요 그때 이미 이게 있는 거예요.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약에 있어요. 그런데 어렸을 때 잡지 보다가 ‘와! 이거 예쁜데.’ 그러면 돌이켜보면 거기서 시작된 거 아니에요. 그 ‘이쁜데’에요 디자이너, 유명 디자이너가 이미 들어 있었던 거예요. 지금 여러분은 만약에 싹 하나가 났더라도
58:00
부처의 어린 시절입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때 견성했지.” 그러니까 이 얘기예요. 견성했으면 이미 부처다. 사자 새끼는 이미 사자다. 그러니까 공부 마치지 못할 거 걱정하지 말라. (72번)
[72.
신심불이信心不二: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며
불이신심不二信心: ‘둘’이 아님이 ‘믿는 마음’이다.]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니니 믿는 마음이다. 의심하지 말라. 이미 부처랑 둘이 아니다. 내가 되고자 하는 부처랑 둘이 아닌 이 자리가 바로 믿는 마음이다. 이미 부처다 이겁니다. (73번)
[73.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비거래금非去來今: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도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과거 현재 미래가 없도다. 이 자리에서는요 좋다 싫다 과거현재미래 다 몰라 해라 이겁니다. 그러면 지금 즉시 바로 부처다. 얼마나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시는지 느껴지지 않으세요. 공부 안 한다고 할까 봐 부처다. 넌 이미 부처다. 저기 복싱계에 가면 홍수환 씨가 그래요. 주먹 대충 휘두르면 잘한다고. 챔피언 깜이라고. 그러면 “잘하나 보다” 하고 막 해요. 그런데 다 그래요. 누구한테나. 이런 선사(禪師)들이요 이렇게까지 얘기한 건요 시작부터 보세요. 지극한 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으니.
59:00
“제발 제발 해줘” 이겁니다. “제발 이거 좀 해줘. 좋다. 싫다 말하지 말아줘. 그러면 이미 견성이야. 이미 견성이면 이미 부처야. 당신은 이미 부처야. 묻고 따지지만 마.” 이겁니다. 지금 즉시 부처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59:18
[출처] (녹취) [2024 원각사 초청강연]「신심명」특강, 지금 즉각 부처가 되어라 2강(59:18)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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