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生涯
李 一求[戶籍: 福一] 號: 鶴村 貫鄕: 韓山(牧隱先生 二十代孫)
出生 및 成長: 忠南 公州郡 灘川面 長善里 四十參番地
一. 幼少年期 [出生~8歲] 1941(辛巳)~1948(戊子)
1. 出生: 나는 日帝末 平凡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韓山李氏 諱 萬稙과 全州 李氏 사이에서 牧隱 先生 19代孫 諱 宅 珪와
晉州 姜氏 俊善과 綾城 具氏의 사이에 탄생하신 姜 必順 여사 사이에서
韓山 李氏 牧隱 先生의 20代 孫子로 父母님 세 번째로 長男으로 辛巳年 7月 9日 出生하였다.
내가 태어날 때 우리 집에는 祖父母, 父母, 叔父, 姑母 3분, 누님2분 으로
11번째의 대식구 가족 구성원이 된 것이다.
내가 자라면서 祖 父母님은 1944년도와 1945년도에 서거하시고 叔父는
결혼하시고 姑母님들도 모두 결혼하시어 떠나시었고 작은 누님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큰 누님은 결혼하여 연산으로 가셨으며 그동안에 남동생 두 명이 태어나
三 兄弟와 부모님이 가정을 이루어 재미있게 잘 살았다.
동생들과는 나이 차가 많고 너무 늦게 둔 동생들이라 사랑과 자애로 잘
돌보며 끝까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랐다.
2. 가정경제: 自手成家하시는 父母님을 보며 자라다.
조부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은 것 없는 아버지 형제분은
열심히 노력하시어 자수성가로 형제분이 매년 재산이 늘어나 논밭을
사고 집도 새로 짓고 하여 한 울타리 내에 집 두채(실은 네채)를 지어
함께 지내며 생활만 다른 집에서 거주하면서 사이좋게 살아왔다.
[그리하여 내 앞으로 등기되어있는 집터의 반을 몇 년 전에 큰 사촌
동생 앞으로 증여등기를 하여주어 집터를 2분지 1씩 소유고있다]
3. 경제생활: 이 당시는 완전 원시적 농업 생활로 일제의 강점기로 경제가
너무 어려워 겨우 식구들 굶지 아니하면 잘 사는 편으로 분류된 것이다.
아무것도 생산되는 것이 없고 그냥 자급자족하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여자들은 농업작업에 노동력이나 다른 협력을 못 하였으며 채소등을
가꾸고 밭곡식을 생산하여 장과 김치 등 겨울나기 안 살림을 주로 했다.
二. 學窓期 [9歲~20歲] 1949(己丑)~1960(庚子)
1. 초등학교 입학
나는 출생신고도 1년 늦게 되고 몸이 유약하고 병치레를 많이 하여
9살 되던 1949(己丑)년에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출생신고도 만 1년 늦게 하여 입학 적령기와 맞았나 보다. 그러니 동기들
보다는 실제 나이가 한 살 위인 것이었다.
학교에 갔는데 내 이름이 달라 내 이름 외는데도 매우 오래 걸렸다.
내 이름은 일구(一求) 인데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내 이름이 없었다.
어렵게 복일(福一)이란 내 이름을 외우는데 무척 긴장도 되고 매일
선생님께 내 이름을 알려 달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어찌하랴
내 이름은 집에서도 일구 외에는 아무도 다른 이름을 모르는 것을 참으로
어려웠던 난처한 일이었다.
[後에 알고 보니 戶籍에 日本式 이름으로 記載한 것이었다.]
2. 그래도 공부는 잘했다.
나도 집에서도 아무도 평가 내용을 모르는데 어느 것은 100이나 100에 가까운 숫자가
잘했다고 하고 어느 것은 1이나 1에 가까운 숫자가 잘했다고 하니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냥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했더니 일학년이 끝날 때는 통지표와 우등상장을 주어 받아왔다.
지금도 갖고 있는데 어머님이 잘 보관하시어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통지표와 우등상장을 매번 받은 것이 보관되어 있다.
또 6학년 때에는 전교 급장과 전교학생회장이 되어 일을 열심히 하였다.
3. 灘川 중학교 입학
2학년 재학 시 육이오 동란 (六.二五 動亂)이 일어나고 동기들이 많이 바뀌었으나(대개 후배들이 된 친구들이 많았다)
어렵게 1955(乙未)년 복룡초등 학교 제4회 졸업생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탄천면 소재지에 있는
탄천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아 입학하였다.
4. 중학교에 가서도 공부는 여전하였다.
중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향학 열의가 대단하시어 우리가 입학하는 달부터 학력 경시대회 준비를 하여
매월 시험을 보고 일정 점수 이상자에게는 입학 경시대회 응시 자격증을 수여하는 열의로 학생들 수업을
독려하시었는데 나도 처음부터 그 합격증을 매번 받는 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
5. 멘토를 잘 만나다.
나는 집안이나 가까운 친인척 중에 공부나 상식 등의 교육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일학년 때 우연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에게 弘益 人間 등 인생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상식이나 대인관계 등에 대하여 안내를 해주는
절친이 생기는 기회가 되어 그때부터 지금 80이 넘은 나이에도 나의 멘토가 되어주는 친한 친구가 있다.
어찌하다 사돈이 되기도 하여 친구의 딸이 나의 자랑스러운 큰 며느리가 되었는데 참으로 잘하고 있으며
나도 또한 아무 거리낌 없이 생각하고 잘 지내고 있다. 사돈도 되지만 지금도 멘토로 무슨 일만 있으면
도와주고 계신다. 내 일생의 행복이라 생각하며 하늘이 맺어 준 친구로 너무너무 감사하고 살아가고 있다.
6.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진학.
1958년(戊戌) 탄천중학교 5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해야만 하는 해이다. 대학진학을 위하여는 대전고등학교, 안전한 직업을
위하여는 공주 사범학교, 은행을 가려면 강경 상업고등학교를 가야 하는데
나의 성격은 사범학교와 잘 맞는 것도 같고 집안에서도 권하는데 음악, 미술 이 너무 소질이 없어 졸업 후
아이들 가리킬 자신이 없어 갈 수가 없었다.
막상 강경 상업고등학교를 진학하여 은행에 가려면 어려운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 자신도 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집안 형펀으로 강경 상고를 가면 당숙네 집에서 다닐 수 있으니 부모님 걱정은 조금 덜어드릴 수 있다.
고민 끝에 강경 상업고등학교에 가서 열심히 해보기로 결심 하고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아 무사히 합격하여
일학년에 입학하였다.
7. 강경 상업고등학교 학생 생활
혼자서 각오를 하고 온 학교이니 열심히 해 볼 참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과목들이고 주판은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는데 은행에 입행하려면 필수 중의 필수라 아주 열심히 배우고 시간이 나면 연습을 많이 했다.
그래도 특별 활동반에 주산 반에는 가지 아니하고 타자반에 들어갔다. 타자를 잘 치어 나중에 미 8군에라도
들어가 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영어도 좀 하니 타자 치는 기술이 다른 사람보다는 빨랐다.
내가 강상 1학년 4반이었는데 처음에는 강경, 논산 출신 중학교 학생들이 텃세를 부리는 듯하더니 학생이라
공부로 실력을 나타내니 잘 어울리게 되고 우리 반에 독서 클럽이 생겨 1학년 때 소설을 아주 많이 읽었다.
성실한 친구들이 우리 반에 많았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 책중 재미있는 책은 우리 반에서 독차지하여 본 후에야
다른 학생들한테 갈 정도였다.
3학년 때인 1960년도에 3.15부정선거와 4. 19 혁명이 일어나 나도 처음 경찰서에 출두하여 종일 조사도 받아 본
경험도 하고 2학년 때에는 각반에서 몇 명씩 모인 12명이 PRC라는 조그 마고 알찬 클럽을 만들어 약간의 동아리
활동도 하며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에 올라 최후의 경쟁을 해야 했다. PRC 회원 12명은 모두 잘 되어 사회에 진출하여
남부럽지 않은 생활 들을 영위하고 모범적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국은행 2, 조흥은행 1, 수협 1, 국가공무원 2. 지방공무원 1, 교수 1, 투자신탁 임원 1, 대기업 임원 1, 군무원 1,
어학원 원장 1, (12) [송재명, 여만현. 김정환. 윤완식. 이복일, 이성근. 이영진. 이기원. 김동선. 서경환. 한민우. 유재훈].
8. 고등학교 3학년 생활과 졸업
1960년 내 나이 20세에 드디어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왔다. 3학년 2반으로 공부도 잘하는 반이었다.
그러나 3학년 때는 반경쟁이 아니라 모든 시험도 강당에 모여 함께 보는 등 취업반 4개 반이 공동으로 하는
공부가 많았다. 4개 반 종합석차로 은행 등 응시 추천을 받기 때문이다. 20등 정도 안에는 들어야 은행 시험 볼
추천대상에 확실히 들어갈 수가 있다.
나는 열심히 한 결과 추천권 안에 들어있어 어느 은행시험에 응시해야 좋을는지 걱정을 하며 공부하고 있었다.
여운달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그래도 큰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력 할 수 있었다.
12월 농업은행에 응시하여 시험을 잘 본 것으로 착각하고 지냈다.
문제도 아는 문제들이 나왔고 어려움 없이 입행시험을 보고 합격통지 날 만 기다렸는데 통지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참으로 허망하고 믿기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결과가 난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공부한 책들을 모두 강에다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참고 고민하며
21세인 1961년 2월 27일 강경상업 고등학교 37회로 졸업을 하고 담임 선생님의 내년에 꼭 다시 은행시험을 볼 수
있도록 꼭 해줄 터이니 걱정 말고 집에가서 계속 공부하고 편지도 자주 하라는 부탁과 위로의 말씀을 듣고 희망에
찾던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마감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1년 늦게 목표 달성을 다짐하고 주위의 낙심을 꼭 해결하겠다는 각오를 더욱 강하게 마음에 결심하며 반드시
입학 당시의 목표를 꼭 달성할 각오를 다시 한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건강하게 3학년을 졸업하고 무사히 돌아온
것으로 만족하시며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집에서 지내자고 하시며 좋아 하시었다. 건강히 고등학교 졸업한 것을
무한 한 기쁨으로 알고 계시었다.
9. 나의 다짐과 결심
나는 속이 너무 탔고 장래가 너무 암담하였다. 또 주위시선이 부끄럽게 생각되고 나 때문에 많은 후배들이
고등학교 진학을 방해받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공부 잘한다는 소문이 나 있는 학생이 강경상업 고등학교
졸업하고 겨우 농사나 지으려 하니 누가 힘들게 아들딸 실업학교에 진학을 시키고 싶겠는가?
그러나 나는 우선은 고등학교 정도 나왔으면 축과 지방은 쓸 수 있어야 생각이 들어 동리에 있는 서당(書堂)을
조금 다녀 한문(漢文)공부를 조금 하기로 작정했다. 제일 나이 많은 학생으로 명심보감(明心寶鑑)을 공부하기로
하고 어린 친구들과 함께 강(講)도하고 독해(讀解) 및 암기(暗記)도 하고 시작(詩作)과 글씨 공부도 하며
1개월에 명심보감을 다 띠었다. 집에서 떡과 술 등 음식을 준비하여 책 뗀 고마움을 표하여 선생님과
동료들에게 책거리라고 하는 잔치도 이행하고 농사철이 찾아와 한문 공부는 끝내고 바쁜 계절이라
부모님의 여러 가지 일을 도왔다. 선생님과의 약속으로 공부는 계속(晝耕夜讀)하며 아는 것 잊지 않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고 있었으며 주위에서는 안타까워 취직을 부탁도 해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취직은 정말 어렵고 갈 직장이 있지를 아니했다. 그때 처음 나온 보리 탈곡기로 아버님이 세명이
동업으로 기계를 사셔서 다른 사람네 보리를 탈곡해 주고 대가를 보리로 받는 일을 내가 대신하였다.
몹시 피곤하였지만 근동을 한번 돌아보고 가정 생활하는 각 가정의 형편도 관찰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참 가지각색의 생활을 하였다.
10. 1961. 5. 16 혁명과 나의 진로 변경.
1961년 5월 16일 새벽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연무대에 임시사시는 누님택에 다녀오는데 힌 완장을 차고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추럭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날 새벽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포고령이 내리고
진종일 라디오에서는 혁명 공약 낭독만 하는 정경이 벌어졌다.
그 후 이 혁명으로 여러 가지 많은 변화가 벌어지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5급 공무원 임용시험이 공고되어
7월 27에 시험을 본다고 공고되어 대전에 사시는 나의 멘토 김민영 형님이 신문을 사서 가지고 오셔서 응시토록
권유하신 후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가시었다. 은행보다 공직이 더 좋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시험이 행정직 재경직
외무직 3개 분야로 분류되었는데 재경직은 은행 시험 과목과 거의 같아서 복습 정도로 자신 있게 응시할 수 있었다.
시험 보기 하루 전 강경 당숙 댁에 가서 자고 통근 열차로 대전 보문고등학교에 가서 임용고시를 보게 되었다.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하자 나의 멘토 김민형 인형이 역에 나와 나를 맞이하여 보문고등학교까지 안내도 하여주고
시험이 끝날 때까지 시험 보는 광경을 지켜보아 주시었다.
그리고 평가도 하시며 잘 보아 이 정도면 자신 있게 합격할 수 있다고 했다.
처음 치러보는 5지 선다형 시험으로 오답에 표시하면 –1을 받는 시험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보문동 멘토 김민영
인형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공직에 계신 아버님을 뵙고 인사도 드렸다. 쓰신 글은 보아 훌륭하심은 알았 지만
용모도 귀인 같으시고 자애롭고 인자하신 자태가 저절로 존경심을 발휘하게 하였다. 후에 대전국세청 과장으로
부임하여 사랑도 많이 받고 또 사장어른이 되시어 자상하신 지도를 받으며 지냈는데 갑짝스런 발병으로 서거 하시어
많은 지도를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1961.7.28일 아침 일찍이 식사하고 대전서부터 걸어서 유성 거쳐서 계룡산을 넘어 공주 우리 집까지 걸어서 가기로
약속하고 출발하여 어두울 무렵 계룡산을 넘어 한밤중에 우리 집에 도착하였다. 좋은 체험을 한 것이다.
시험 본 다음 달인 8월 28일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는데 예상대로 합격하여 공무원의 길로 진로가 바뀌게 되고
은행은 시험을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공무원이 될 수만 있다면 꼭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안에 오랫동안 면서기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라도 공무원이 되어 집 안을 위해서라도 공무원은 되고
싶은 분야였으며 넓은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들었다. 내각사무처에 공무원 임용신청을 해놓고
1년 이내에 임용되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현역군 미필자라 아무래도 불안한 느낌도 들기도 했다.
내각사무처에 질의도 해보았다. 년령 미달 군 미필자는 차별 없이 임용되니 조금만 기다리면 통지가
갈 것이라고 회신이 왔다.
三. 公職 在任期 [22歲~45歲] 1962(壬寅)~1985(乙丑)
드디어 공무원 임용 통지가 오다.
1962. 7. 7일 대전 사세청(司稅廳)으로 발령되었으니 주판을 가지고 모이라는 통지가 왔다. 그렇게 기다리던
공무원에 임용된 것이다. 사세청이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동리 유지이시며 우리 집안과 친한 은자 중자 되시는 어른이 공주에 가시어 알아보고 오시어 세무서는 아니고
세무서를 감독하는 기관이 라고 알려주시었다. 그 당시 세무서라면 아마도 못 갔을지도 모른다.
세무서는 밀조주 조사만 하여 국민을 못살게 하는 기관인 줄로 촌에서는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군청 서기가 최고고 면서기가 다음이었다.
대전 사세청은 재무부 사세국 소관 중앙기관이다.
대전 사세청은 충청남북도, 내에 소재하는 세무서의 국세를 부과 징수하여 국가의 세입을 담당하는 업무를 지도
감독하는 국가 중앙기관이었으며 직급은 대개 서기 이상급이 근무하는 곳으로 청장은 이사관급이며
3개국과 9개 과로 구성되어 재무부 사세국의 지시를 받아 업무를 행는 중앙 행정기관의 하나였다.
3. 처음 발령받으러 모인 19명의 임용 후보자들
19명이 모였다. 가져온 주판으로 시험을 보아 주판시험 성적 순위에 따라 근무할 관서를 배치하였다.
나는 1등을 하여 사세청에 근무하게 되었다. 1등이니까 총무과에 배치되었는데 몇시간 후에 다시 직세1과로
근무처가 바뀌었다. 아마도 직세1과에서 강경 상고를 졸업한 나를 데려가기로 협의를 한 모양이었다.
충남 북에 있는 모든 세무서로 1~2명씩 배치된 것이다. 이 주일쯤 지나 19명을 다시 불러 1주일간의
신규 임용 교육이란 실무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임용 동기가 되어 서로들 지냈다. 기초직무교육을 받고
각 세무서 각과 계에 배치되어 열심들 하였다. 나이가 2명 정도 빼고는 20대 초반으로 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었다. 나는 대전세무서에 배치된 당진 사는 친구 2명과 셋이서 하숙을 하였다.
[윤용길, 이복일, 안병무, 최구옥, 김요일, 시순구, 임철수, 김국평, 전재원, 안정남, 노광희, 김길영,
김무남, 김시봉, 방규철, 송은영, 조병호, 신화남, 임철수]
4. 그해 10월 1일 자로 재무부 수습 세무공무원으로 재발령.
1962년 10월 2일 자로 재무부의 수습 세무공원으로 재무부 공무원 훈련소 입교 명령으로 3개월간의 전문
집중교육을 받도록 하여 서울의 종로에 있는 건국대학교에서 개인, 주세, 소비세, 징세반으로 나누어 300명이
국내 유명교수들로부터 민법 상법 재정학 회계학 세법등 많은 과목을 집중적으로 전문 교육을 3개월간 받고
12월 24일 수료하였다.
수료식에서 3명이 받는 표창장과 수료생 모두 받는 수료증을 받고 공주 집으로 왔다. 공휴가 끝난 후 대전사세청에
수료증과 표창장을 갖고 가서 인사를 하고 대전사세청으로 희망지 쓰고 왔다고 하니 다들 좋아하고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집에 돌아와 정식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조금 넘게 기다리는데 참으로 길게 느껴지고
너무 궁금하였다. 그러던 중 1963년 2월 초 대전으로 발령이 났다.
5. 드디어 정식 공무원 발령을 받다.
[1962.7.7.일~1962.12.24.일] 집중 전문 교육을 받은 후 발령이 났다. 1963년 2월 11일 드디어 5급 을류
공무원 발령받다. [사세서기보] 보직은 대전세무서 직세과 개인계로 받았다. 교육도 개인 반이었다.
개인계는 영업세를 조사 부과 징수를 하는 곳인데 직원이 15명으로 제일 말석인 내 자리이니까 내 자리에서는
계장님의 얼굴이 보이지 아니 했으며 직접 소리도 들리지 아니했다. 대 인원의 조직이었다.
발령받는 날부터 1963년 1월 1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된 금산군 영업세 조사 직원 보충으로 2명이 하는
일을 가서 도우라는 명을 받고 금산에 가서 朴 必山 主事 補 반장과 金在一 書記 補의 업무를 협조하였다.
나는 면 소재지 양조장과 정미소 연초 소매 등 확인만 해오면 되었으며 가는 길에 면사무소에 들려 재무 계에 협조
요청만 하고 오면 되었다. 출장은 잘 끝냈는데 문제는 세표 라는 것이 있는데 그 작성업무가 나에게 맡겨젔다.
서로 하지 아니하려고 하는 업무이나 조사한 영업세 부과 징수의 기초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어렵고 아주 귀찮은 일이라 서로 기피 했다. 교육받을 때도 간단한 예로 연습을 해 보았으나 많이 복잡한 작업이라
말단 직원한테 돌아 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내가 담당하였다.
노력하여 열심히 작성하여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지방청에 잘 보고 하여 무사히 통과하였다.
대단하다고 칭찬들이 많았다. 이 모두 강경 상업고등학교에서 열심히 배운 주산 실력이 덕인 것이다.
임용시험, 교육받을 때의 교육과목 대전청의 처음 배치등 모두 강경상업고등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서
교육을 잘 받은 은혜다.
6. 이렇게 공무원 사회에서 잘 어울려 잘 지냈다.
개인계는 오려는 사람들이 많고 총무과 정리계는 떠나려는 사람들이 많아 나는 공부도 해야겠고 이 정도 경험했으면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총무과 정리계 근무를 희망하였다. 鄭東憲 직세과장을 졸라 안 된다는 것을 억지로 총무과로
가기로 하였다. 막상 발령을 받고 보니 정리계가 아닌 행정계였다. 총무과장이 이상하게 잘 본 것 같았다.
처음에 위로 출장으로 충청도 서해 쪽(서산등) 돌아오는 출장도 부담 없이 다녀오도록 해 주셨다. 여기는 정말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또 핵심 일하는 직원이 강상 대선배로 잘 돌보아 주시어 야간대학에 진학하는 행운을 갖게 되어 야간으로
대전실업대학 상학과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일등을 처음 하여 특대 장학생이 되어 돈 안 내고 학교를 다니는
특전도 얻었다. 휴일에는 아무 부담 없이 고향 집에 다녀 와도 업무에 지장이 전혀 없었다.
또 고향에 안 다녀올 때는 등산도 직원들과 함께 다니고 재미있는 공직생활이었다. 또 한 가지는 비밀인데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고 그 여직원 역시 나를 아주 좋아하는 직원이 여기서 같이 근무하니 더욱 좋았다.
나중에 우리 아내한테 이야기하며 못 살면 도와주고 싶다고 했더니 다시 만나 보라고까지 하며 아무 질투도 하지
아니하여 만나 보고 싶던 마음까지 모두 접어버렸다. 삶이 궁금한 그 Y 양 한 사람뿐 이었다. 그 시누이 결혼식에
남자만 둘을 낳아 데리고 와서 만나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데서 무엇을 하던 잘 살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녀는 마음씨 곱고 윤리를 잘 지키기는 훌륭한 인격자였다.
7. 다시 직세과 법인계로 발령이 났다.
이번에는 아무 예고도 없이 전에 근무한 과의 법인계로 발령이 났다. 세무서장이 바뀌어 충주세무서장으로 계시던
박승경 서장이 오시자 얼마 아니 되어 나 혼자만 발령을 받은 것이다.
법인계장은 남정섭 계장이신데 오해를 하여 나에게 일을 주지아니 하였다. 서장이 갑자기 상의 없이 발령한 모양이다.
직세과장님은 서울에서 오신 徐忠錫 과장으로 군자다운 분인데 계장이 하는 일에 관여 아니 하시는 분이다.
얼마가 지난 후에 법인계장이 나에게 법인영업세 조사 결정을 모두 하도록 계획을 하여 나보고 들어온 영업세를 모두
결정 결의하라는 것이었다. 과장님과 상의 했더니 그까짓 것 다 해보라고 하시면서 과장님이 함흥비료 공장 조사 결정
예를 들어 주시며 용기 갖고 영업세 정도는 문제가 안 되니 다 조사 결정 하라고 하시어 용기 내어 모두 처리를 했다.
남 계장과는 오해를 못 풀고(풀래야 풀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서장이 발령한 것을 어떻게 변명을 할 수가 있나) 법인세
조사도 한 건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렇게 지내는데 청주에서 법인계장(姜南浩)이 부임 해 오더니 다짜고짜 자기와
한 반을 만들어 가장 큰 법인의 법인세 조사계획을 세워 나보고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간에 근무만했지 법인세 조사는
경험이 없다고 했더니 안다고 하며 자기와 함께 가자고 하며 아무 걱정말고 아는 대로만 하라고 말하며 함께가서 잠깐
가르쳐 주고 나보고 끝내 보라고 하여 무사히 잘 조사를 끝맺고 멋진조서까지 작성하여 결재를 올렸더니 이제 혼자
다녀도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니 앞으로 일 많이 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반 편성도 청주에서 함께 온 차석(朴興魯)과 함께 짜서 많은 일을 처리하는 계기가 되어 법인 조사
에서도 두각을 나타 나게 되었다. [그 당시 朴 서장님은 나의 결혼 주례도 서주시고 또 내가 서울 강동세무서 부가가치세
과장으로 있을 당시 세무사를 하고 계시어 기장 등 세무대리 업무도 소개하여 드린 적이 있다.]
8. 1966년 10월 25일 나 혼자만 지방국세청 조사과로 이동발령
갑자기 나 혼자만 대전지방국세청 조사과로 이동발령을 받았다. 그 이유는 한곳에 오래도 근무했고 일도 잘하는데
지방청에서 필요 해서 정기인사 때에 이름을 넣으면 서장이 와서 못 움직이도록 조치 하여 조사과장이 필요한 인물로
단독 발령 신청하여 이동된 것이니 오해 말고 일해달라고 말씀하시어 저는 어디서 일해도 국가의 일인데 아무 불만
없이 맡는 일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열심히 일했다.
9. 조사과 근무 몇 달 만에 지방국세청 법인세과로 발령
조사과 田溶根 과장님은 나한테 유심히 관심을 가지고 계셨는데 하루는 자기가 수십년 관리자 생활중에 누구를 함께
발령하여 다닌 적이 없는데 법인세과장은 처음이라 나 보고 법인세과로 함께 가서 도와 달라고 말씀하시었다.
나는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좋은 과장, 나를 인정해 주시는 과장 밑에서 조사과 보다 안정된 법인세과에서 일을하면
아주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과장님 처분에 맡기겠다고 말씀드리고 조사과를 떠나 정기 발령시 법인세과 차석으로
발령받아 내가 맡은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며 과의 단합과 대전청 전체의 법인 세과 직원들 실력향상을 위한 계획을 세워
잘 시행하여 어느 과장때 보다 특색있는 과 운영을 하며 아무도 처음 보는 과장이 처리하는 법인사무를 얕게 보지
못하도록 특단의 노력을 하여 원만하고 화기 넘치는 모범과가 되도록 보필하여 새로 온 법인세과장이 잘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일을 추진했다.
10. 1967년 5월 서울지방 국세청으로 이동발령
1967년 국세영역이 확대되고 국세청이 발족되어 세무관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지방근무 직원들이 서울로 차출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처음에는 잘 근무하고 있는 대전에 그냥 남고 싶었고 1962년 교육성적우수자로 서울 어디고 근무할
수 있었는데도 대전으로 내려온 생각을 하여 서울에 가지 아니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모두 올라 간다고
하여 나만 남으면 뒤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어제 신청마감된 서울 전출 희망을 아침에 출근하여 전용근 과장님께 상의
들였더니 그렇다면 추진해 보는데 늦지 아니했나 모르겠다며 함께 총무과로 가서 확인하니 모두 결재가 나서 막
발송하려 한다고 하였다. 전과장님이 총무과장에게 내가 청장 결재는 맡을 테니 이 복일을 추가해 달라고 하여 한번
해보자고 하여 제일 마지막에 추가로 서울 전출자 명단에 기재되어 서울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서울로 간다니까 이웃과 관리자들께서 내가 법인세과장한테 소개한다 내가 직세국장한테 소개한다 간세국장이 동기 다
하시며 모두 도와 주시려는 관리자들이 많이 계셨다. 참으로 사람은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느끼고 대전에서 인심 잃치 않고 동료직원이나 다른과의 관리자들 한테도 공손히 그리고 묵묵히 내일을 책임지고 일을
잘 하며 처신도 잘했다는 자부심이 들었으며 앞으로도 어디서 어떤일을 하던지 지금과 같은 마음과 자세로 해야만
하겠다고 결심했다. 서울에 와서는 몇 일기다 렸다 근무지 배치를 받았는데 많은 사람 중에 두 번째로 이름을 불러
이상하게 여겼는데 서울지방 국세청 징세조사국 조사과 근무 명령을 받아 다시 조사과 일을 맡았다.
대전에서 법인세과에 근무경력이 있는 직원들은 모두 조사과로 발령이 나서 조사과 총 12명 중 3명이 대전청 출신이며
또 다른 서울청에서 발령받은 직원도 충청도가 고향인 친구가 몇 명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조사과장이 서산사람이신데 본청에서 처음 조사과장보직을 받았는데 특명이 조사과는 여직원까지
전원 교체하라고 하는데 일선 근무를 하지 아니하여 누가 일을 잘하는지 적임자를 찾을 방법이없어 고향인 대전청에서
법인 사무를 본 사람은 대부분 발탁하고 몇명은 서울청 관내에서 법인 사무를 오래 본 사람들을 선발했다고 들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출신의 점잖으신 인격자 과장님을 모시고 그 골 아픈 일 많은 조사과에서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였다. 1년 근무 후 승진 인사가 있는데 조사과에 2명의 주사 승진 티오가 왔는데 주사보는 3명이며 주사보 된
일자가 동일자이어서 누구 한 사람을 탈락시켜야 해서 나를 불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이번에 양보하면 다음에
1순위로 승진시켜 주겠다고 하여 나는 나이도 가장 젊고 과장님의 입장이 어려우신데 제가 양보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때 승진 못 하니 장기간 승진 못 하여 좋은 기회도 놓치고 여러가지 불리한 공직생활을 하게 되었어도
그래도 후회는 안 했다)
11. 국세청 근무 발령을 받다
이번에도 나 혼자 서울청 조사과에서 국세청 기획관리실 예산담당과로 발령을 받았다. 본청 예산담당 사무관 지창수
계장과 서울청 조사과장 한용석 과장이 서울상대동기로 예산과 인원이 그만두어 사람을 추천을하라니까
나를 추천했던 것 같다. 그곳에 가서도 열심히 하였다.
김재덕 국세청차장, 노용환 기획관리실장, 김복일 예산담당관, 지창수 예산담당 사무관님을 관리자로 모시고 주로
국회쪽을 담당 하였다. 마침 국회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동창인 친구가 근무하고 있어 실무적으로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잘 처리해주어 원만하게 일을 보았다. 지창수 담당관은 미국 연수를 떠나시어 미국에서 승진하시었고
기획 관리실장님이 부산에서 부임하시어 1970년 4월 정기인사때 근무연한 불구하고 이동을 원하는 자는 모두 일선으로
나가도 된다고 하여 나는 서울청으로 나와 중부세무서로 희망하여 그때 중부세무서 송순 서장이 대전청 국장 출신이라
중부세무서 법인세1과 2계에 배치를 받았다.
그때 국세청 총무과장이 부산청 출신으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여 법인세 1과 40여명 중 몇 명만 충청도 등 출신이고
모두 경상도 출신들이었다. 여기서도 내무 즉 보고 등을 볼 사람이 정기인사 시 장기 근속으로 다른 곳으로 발령되어
내가 그 자리를 보게 되어 법인1계로 옮기고 장기근속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장 4명 과장 3명을 모시며 3년 넘게
같은 과에 근속하는 영광을 가졌으며 중부세무서 법인세1과 윤 세익 과장님과는 오래 함께 근무 하면서 정이 듬뿍 들어
지금까지 안부를 전하고 지낸다. 그리고 내가 1973년도 을지로 세무서 법인세1과 1계 차석을 거쳐 10월 1일 재무부에
근무하게 된것도 중부세무서 법인세1과 윤 세익 과장님과, 법인세 2과 이 덕길 과장님이 추천하여 재무부 보험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12. 재무부에 근무
장기근속으로 중부세무서를 떠나 바로 같은 건물 옆에 붙어있는 을지로세무서 법인세1과 1계 차석으로 또 그 보고를
보기 위하여 발령을 받았다. 이미 다 알고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격이었다.
서울지방국세청 법인세과에서 직세국장이 전달한다고 아는 친구한테 서울청 법인세과 근무라고 말했는데 막상
열어보니 을지로 발령이 난 것이다. 어디면 어떠한가 성실하게 근무하면 되는 것이다.
을지로에서 잘 근무하고 있는데 중부법인세 과장님들이 잠깐 오라고 하여 가서 상의한 결과 재무부 보험과에 자리가
났는데 의사가 있으면 들어가도 좋다고 했다. 그래서 희망을하여 담당 사무관을 만나 보고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오랜동안
연락이 없더니 9월 말경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재무부에 들어가서 만났더니 자기는 내가 적격자인데 위에서 이사람 저사람
막 들이대어 거절하다가 이번에는 할수 없이 다른 사람이 오도록 내버려 두어 미안하게 되고 다음 기회가 생기면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2일이 채 못되어 지방국세청 인사담당이 이복일 인사청탁 했구나 하며 농담을 걸고
10월 1일부로 재무부로 전출명령이 났으니 재무부로 갈 준비를 하라고 말해 주었다.
믿어지지 아니하여 중부세무서에서 함께 근무하다 재무부로 전근 간 직원한테 확인을 부탁했더니 발령이 나서 보험과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재무부에 출근하여 인사과에 들렸드니 재무는 1년은 근무해야 승진이 되니 승진요건은
충분하나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기다린다고 하고 그 뒤 아무 이야기도 아니 했는데 전입한 다음 해인 1974년 3월 2일
그 오랜 기간(7년 넘게) 못하던 주사로 승진을 했다. 나는 공직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험 없는 승진을 한번 해보았다.
서기보에서 서기, 서기에서 주사보 모두 승진 경쟁시험을 보아 승진했다. 아주 오랜만의 승진이다. 주사승진 후 만 3년
만에 갑짝이 사무관 승진시험을 보라고 하여 아무 준비 없이 여관에 들어가 공부하여 33명이 승진시험을 보아 당당히
합격하여 주사승진 후 만3년만인 1978년3월 초 말단 공무원들이 꿈에 그리는 사무관이 되어 오래 근무한 보험국에서
세제국 조세정책 계장으로 보직 발령을 받아 자리를 옮겼다. 나를 국세청 예산담당관실로 발령요청 하셨던 지 창수
사무관이 부이사관이 되시어 국세청 직세 국장으로 세제국에 가끔 들르시고 하시는데 나한테 관심을 두시어 세제국에
있지 말고 기회 되는대로 국세청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13. 국세청 공무원(간부)으로 다시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기회가 되어 국세청 전출을 희망하고 승인되어 성남세무서 법인세과장으로 발령을 받아 1년 근무하고 안양세무서
법인세 과장 으로 전보되어 근무한 후 지방청이나 서울시내 과장으로 가려는데 그때 인사권을 갖인 서울지방국세청장이
지 창수 청장님이시니까 문제없이 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투서가 들어와 대전지방국세청 재산세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대전지방국세청은 세 번째 근무가 된다.
처음 보조수 때 법인세과 근무, 주사보 때 조사과, 법인세과 근무, 이번 재산세과장으로 3회를 근무하게 된 것이다.
1년 4개월 근무 후 단독으로 강동세무서 부가가치세과장으로 전보되어 다시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강동으로 들어 온지
채 1년이 못되어 서울지방 국세청 조사국 조사과 제7조사 담당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다음 해 4월 조사1국 조사1과
제4조사 담당 사무관으로 근무하며 서장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년 근무하면 다 일선으로 나가는데 1985 년도에는
조사국 근무 사무관 중 3인이 남게 되었다. 한 사무관은 년령이 많아 일선 나가면 자리를 찾아 나가기 어려우니 다음에
나가 기로 하고 또 한 사무관은 수석사무관으로 승진을 하여 나갈 차례이고 나도 사무관 근무 년 수가 길고 성실하니
서기관 승진을 하여 나가 라고 하여 안 나가고 3월 서장후보자 교육도 마치고 서기관 발령 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6월 초 무엇이 잘못되어 건강을 완전히 해치고 1985년 9월 의원 사직을 신청하여 원에 의하여 사무관직을 사직하여
23년 넘도록 정들었던 국세청을 그만두고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여 병마와 투병하며 지내다가 통원 치료해 보자고 하여
집에서 조금도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치료만 하였다. 그러나 병세는 좋아지지 아니하여 집에 만 1년 이상 있자니
너무 답답해서 다른 사업을 강구 해 보았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어려워 세무사 개업과 부동산 임대업 사업을 영위해보려고 어렵게 막내아우 도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든 사회활동을 막내아우 도움으로 하며 여려 모임에도 참석하고 고향 향우회에도 참석하게 되어
그래도 갑갑하지는 아니했다.
四. 專門職. 事業期[47歲~79歲] 1987(丁卯)~2019(己亥)
1987년 5월 2일 세무사무실을 개설하여 세무사 업무를 시작하였다. 몸이 불편하여 집에서 지내보니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렵더라도 개업하여 활동을 개시하면 몸도 조금은 나을지 힘들여 역삼역 앞 경진빌딩 1층을 세를 얻어 세무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업무를 개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막내아우가 다 했다.
2. 삼성생명과 강호진 사장한테서 제의가 들어왔다.
삼성생명에서 옛 의리를 못 잊어 세무사 개업했는데 조정계산이라도 주어야 되겠는데 회장까지 결재 맡아 주어
보았자 1년이라 큰 도움이 못 되니 신사동 땅을 팔지 아니하였으면 건물을 지어보라고 하였다.
건물 짓는 자금은 자기들이 모두 대출해 줄 것이며 건물완성 후 임대가 안 되면 자기 회사 지점을 하나 옮겨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급히 주선하여 설계도 하고 명도도 하려니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렇게 하여 계룡 빌딩이 지어
졌으며 임대는 완공 전에 현대 산업개발에서 통임대 요청이 와서 허락하니 대출금도 해결되고 들어 오는 임대료는
그대로 순수수입이 되었다. 또 하나의 진주산업 강호진 사장이 남양유업을 공동 인수하고자 하니 자기는 잘 몰라 업무
추진이 어려우니 감사는 자기가 하고 세무관계를 전담하여 1주일에 3일, 4일을 회사에 와서 자기 일을 해주고 거래처
모든 기장과 회사의 세무 관계를 적극적으로 처리해 달라고 하였다.
[이는 진주산업 강 사장이 암으로 별세하여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3. 양재동에 조그마한 빌딩을 짓다.
1988년 계룡 빌딩을 4층으로 완공하고 1989년 다시 추가 증축허가를 받아 2개층을 더 올려 6층으로 증축하였다.
증축공사가 끝난 후 양재동 매입에 매입 해둔 땅에 김장군님과 상의하여 근생시설을(사무실)짓기로 하고 자금은 먼져
계룡 빌딩식으로 삼성생명의 도움을 받아 짓기로 했다.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허가받아 지상 5층과 6층은 주택으로 지어 우리가 사는 것으로 하였다. 순조롭게 공사가 완공되어 1990년4월30일 우리가 먼저 이사를 왔다. 이사 온 후 사무실 세를 놓으니 잘 나갔다.
수입도 좋고 아무 이상 없이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다. 임대료를 좀 싸게 받으니 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나가도 바로 들어 오는 사람이 있었다. 작은 빌딩이지만 주차장이 넓게 있고 승강기도 갖추어져 있으니 불편이 별로 없는 사무실로 아주
적당했다. 수입금도 나누어 갖고 몇 년을 지냈는데 김장군 집에서 매각을 하고 싶어하여 매매가액을 정하도록 위임을 했다.
급매물 가액으로 매수자를 선택하여왔다. 우리도 같이 매도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 했으나 자금도 모자라고 집 구하기도
어려워 팔려는 매매가액에 몇억 원 더 해드리고 우리가 인수하기로 하여 계약서를 만들어 약속대로 이행하고 등기이전을
처의 이름으로 하여 나와 동업하는 사업자등록을 하였다.
그리하여 은행에서 대출금을 6억원을 받고 나머지 돈을 채워 잔금을 납부하여 아무 부담 없이 우리의 공동재산이 된 것이다.
처가 세상을 떠나고 보니 유일하게 처의 재산은 이것뿐이었다. 그것도 부채가 6억 원이 있는 재산이니 실재산은 조금 밖에
되지 아니했다. 그러나 재산이 자기명의로 없다고 말 한마디 불평을 들은 적이 없다. 서로 믿고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 이름의 재산이면 어떠한가? 그럭저럭 계룡 빌딩 배당금도 많이 배분되고 떼었던 돈들도 우연히 내가 대출받아 다시 사놓았던 것이
많이 올라 매매하여 큰 손해 없이 회수되어 3남매의 주택으로 가장 작은 아파트도 한 채씩 마련하여 기초재산은 모두 확보
해 주었다. 모두 집사람이 알아서 한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생각만 들 따름이다.
지금은 돈이 있어도 그렇게 아파트를 매입 해 줄 수가 없가 없으며 위치도 강남에서 좋은 편에 들어가 매매나 전세 등
활용이 편리한 지역에 있어 작은것이라도 매매하여 다른 지역으로 가면 큰것이 된다.
강남에 오래 산 덕으로 아들 딸들이 강남에 집을 갖게되니 다행스럽다.
五. 家事 및 主要 記
[急 하게 推進된 나의 結婚]
나의 결혼[1965년 추석이 지난 후 결혼 추진 성사]
나는 장남으로 어머님의 건강 악화가 되어 나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집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결혼을 할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집에 가서도 애인 Miss Yoon 이야기를 하여 집으로 한번 데리고 오라는 승낙까지 받아 두었으나
아무래도 Y의 결혼 순서나 Y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도 나와의 결혼은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갑짝이 추진하여 약혼에 이어 결혼하기 전 Y에게 이야기하기 어려웠 지만 솔직히 이야기하고 그 후에도 변함없이 잘
지내자고 하였다. 둘이 다 용기가 부족했고 또한 깨끗한 교제를하여 가능하였다고 본다. 내가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Miss Yoon을 나의 가장 친한 친구한테 소개하여 두 번 만나고 세 번째 만나기로 한날 연락 없이 오지 않는 다고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내가 전화했더니 서울까지 왔는데 다른 사정이 발생하여 연락도 못 할 사정이 발생하여 내려왔다고 말하며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전화를 끝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 오면 잠자는 친한 친구가 자기 오빠를 소개 하여 못 만나게 하여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후에 그 친구와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되었다.
우리 둘 사이에 손이라도 제대로 잡았다면 어떻게 아주 친한 친구한테 소개하여 결혼하도록 하여 평생 친구의 부인이
되도록 추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자부하지만 아주 떳떳한 남 녀간의 교제였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대전 실업 대학도 Y가 주선해 주어 다니게 하였다. 가끔 영화 구경도 가고 대전에 하나밖에 없는 양식집
상록에서 만나 양식을 먹고 다방에 가서 음악감상도 함께 감상하였으며 등산도 다녔다.
아마도 나의 처도 절친한 여직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으로 안다. 부여 같은 동래에 처가가 있는 직원이 있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직장생활이나 사생활의 모든 것을 대충은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父母에 極盡한 妻의 奉仕]
2. 부모님에 대한 내 처의 봉사
나는 1965년 12월 25일 결혼한 지 1년이 훨씬 넘도록 고향 집에서 부모님을 봉양하며 첫아들을 출생한 후에 대전으로 나와서 함께 살게 되었다. 객지 생활을 할 때도 많은 식구를 데리고 살고 또한 고향 여러 대소사에 빠짐이 없이 참석하여 편안할 날이 전혀 없었다.
어려움이 많이 있었어도 아무 불평 없이 살아간 집사람의 생활이 생각하면 할수록 고마운 마음뿐이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처에게 모든 일을 맡기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큰 짐을 지도록 한 것 같다.
[結婚 2年이 넘어 大田으로 이사(移徙)]
3. 1967년 봄 대전으로 처음 이사를 왔다.
결혼 후 처음 대전에 나와서 살림을 하게 되었는데 형편이 어려워 방 한 칸을 얻어 둘로 나누어 살면서 큰동생을 대전공업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도 업는 줄을 모르고 식사만 해결하면 되는 줄 알고 지냈다. 우리 첫째아들 백일잔치를 대전에 이사 온 집에서 친구들끼리 모여 아침 식사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대전의 퇴 미 고개라고 문화동 넘어가는 대사동 문간방에 첫 살림을 나온 것이다. 거기서 걸어서 사무실 출근하기가 아주 알맞은 곳으로 값도 싸고 돈 없는 공무원들이 많이 사는 동리이다. 1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다음 해인 1968년 초에 대흥초등학교 가까운 대흥동에 독방 두 개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집이 별채로 있었다.
어린 처남을 대흥초등학교로 전학시켜 대전중학교에 진학을 시키려고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대전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한밭 중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앙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대학도 잘 못 가서 할 수 없이 대전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후 1년을 다니고 서울에 있는 대학인 경기대학교 행정학과에 어렵게 편입하여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5월 서울지방국세청으로 이동발령 났을 때 나혼자 올라온 것도 이런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처남을 어데 하숙시키기도 어렵고 또 고등학교 다니는 큰동생도 그렇고하여 또다시 처에게 무거운과제를 맡기고 나만 홀로 서울에 와서 친구와 둘이서 서울역 뒤의 서계동에서 하숙하였다. 그 친구는 대전청에서 전입된 친구들이 가장 많이 발령 받은 신설된 동부세무서에 근무하고 나는 덕수궁 바로 옆에 있던 서울지방국세청 조사과 조사2계에서 직원 6명이 사이좋게 일하며 그렇게 바쁘지 않게 지내고 출퇴근도 정확히 하였다. 토요일에는 대전집으로 내려와 일요일에 올라가는데 아들이 서울에 못 가게 하여 집을 나오기가 무척 어려웠던 날이 많이 있었다. 함께 따라서 온다고 떼를 부리던 기억이 새롭다. 둘째 아들이 내가 서울에 온 후 음력 5월 1일에 태어났으니 양력으로 6월이나 7월 초쯤 될 듯하다.
또 이해 가을(戊申年 陰 9月 12日) 아버님의 회갑연을 정성을 다하여
차려 근동 어른들과 집안들을 초청하여 찬치를 잘하였다.
서울과 대전에서 친구들이 찾아와 아버님 회갑을 축하해 주었다.
[서울 이사(移徙)]
1968년이 지나고 나도 불편하여 하숙집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곳에 방 두 개가 있는 집을 얻어 서울로 이사를 왔다.
처남은 얼마간 대전 선배(善培) 아저씨 댁에 맡기고 1969년 이사를 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집은 별채에 방이 두 개지만 우리 꼬마 아들들은 집주인 애들과 선을그어 놓고 여기까지가 우리 집이다 아니다 하며 놀기도 하고 서로 다툼도 하며 살았다. 집은 있어야 했는데 서계동 쪽은 밤에 안 들고 하여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려 하니 막상 갈 곳이 적당치 아니하였다.
서울에 먼저 올라와 사시는 아저씨 댁이 금호동이라 금호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침가서 보니 방 두 개에 대청이 있는 조그마한 집이 있어 흥정하여 샀는데 이사 날이 맞지 아니하여 상당한 애를 먹고 택이네 집 신세지고 날자를 맞추어 이사한 적이 있다.
[서울에 처음 집을 매입하다]
4. 1970년 초에 서울에서 처음 집을 매입하였다.
세를 살다 보니 아이들이 자라 집을 마련해야만 했는데 경제가 넉넉 하지 못하여 금호동(아저씨가 사시는 곳이라) 산꼭대기에 판자집 비슷한 대지가 19평이며 건물은 20평도 안 되는 낡은 집을 구하게 되었다.
처음 내 명의로 내 집을 매입한 것이다. 어린 애들이 내집 네 집 하며
다투기도 하고 하여 집이 필요하여 우선 아는 사람들이 사는 금호동을선택하여 최소의 비용으로 집을 처음 마련 이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사 날이 맞지 아니하여 택 이네 집에 가서 20여 일을 신세를진 후에 작은집이나마 우리 집으로 이사를 하여 살게 되었다.
그런데 살 사람은 많은데 방이 두개라 할 수 없이 조그마한 방 하나를 더 만들어 처제들이 살도록 하여 또 대식구가 한집에 살게 되었다.
하여튼 우리만 정신과 몸이 고달펏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무 불평없이 살았다. 중부세무서에 오래동안 함께 근무하는 직원이 하루는 우리 집에 왔었다. 나보고 이사하라는 것이다. 그런 산꼭대기 오두막집에서 사느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이사가 쉽지 아니했다.
1971년은 어머니 회갑이 되시는 신해년이었다. 어머니 생신이 6월이라
6월에 회갑연을 하기는 어렵고 하여 날을 당기어 양력 4월 4일과 5일
2일간 회갑 잔치를 하기로 하고 준비하였다. 아버지 때보다 더 잘해보기로 했다. 준비도 더욱 많이하고 봄이라 해도 길고 하여 많은 손님을 맞아 성대한 회갑 잔치를 해드렸다. 그때는 중부세무서에서 오래 근무 중이라 서울에서도 동료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었다.
[금호동 집 매도와 영등포 신길동 집 매입]
5. 1971년 8월 금호동 집을 처분하고 신길동에 집을 매입하다.
그러다 그 친구가 화곡동에 집을 잘 짓다가 불경기가 와서 그 친구가 급전이 필요하게 되어 나 보고 그 조그만 집이니 잘 팔리지 않겠 야고 하여 부동산에 문의하였더니 역시 잘 매매된다고 하여 이야기했다.
그럼 그 집을 팔아서 주고 있는 돈 있는 대로 주고 자기 집을 나머지 돈은 생기는 대로 주든지 하고 사라는 것이었다. 영등포 신길동에 있는 그 집은 방이 5개쯤 되어 우리 식구들이 살기는 충분하였다.
그런데 대문이 골목길 북대문이라 조금 꺼렸지만 살기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하여 매수하기로 하고 계약서도 안 쓰고 구두로 약속하고 금호동 집을 팔고 조금 갖고 있던 현금을 보태어 주고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또 이사할 날이 잘 맞지 아니하여 그 집에서 동생과 자취하던 동료 친구를 미리 내보내고 우리 식구들도 다른 곳 가서 몇일 씩 살다오고 그 친구네 식구도 새집 일부로 미리 이사하여 함께 고통을 나누어 가지고 이사를 하였다. 넓은 방과 마당이 있는 집다운 집에서 살게 되어 몇 년을 잘 살았다. 손님들이 오셔도 주무실 방도 있고 하여 아버님도 현직 대부님과 호암 작은 재당숙을 모시고 오셔서 몇일 계시다 가신 적도 있었다. 또 1971년 10월 9일에는 나의 딸이 태어 나기도 하여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1976년 말에 생각하니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고 하니 다른 사람들은 교육 때문에 서울로 오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니 아니 되었다. 지금 우신초등학교에서는 제법 공부를 잘한다고 하니 나도 자녀 교육을 잘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러면 으로 생각해 보고 방법을 강구 해야 하겠는데 그렇게 하려면 학구가 좋은 곳으로 가서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어느 학구가 좋은지 잘 몰라 문교부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현재는 종로구인데 모든 일류학교가 모두 강남으로 이전하니 강남으로 이사 가라고 해서 강남에 가서 집을 좀 보라고 처에게 이르고 나는 결정을 할 때 볼 테니 잘 고르라고 하며 기왕이면 중심지인 키스트 단지 쪽을 택하여 보라고 하였다.
[아이들 敎育을 爲하여 일찍 江南으로 이사]
6. 1977년 5월 강남에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역삼동(매입 당시는 삼성동) 영동전화국 뒤에 있는 키스트 단지 내에 82평 대지에 잘 지은 2층 집을 일천 칠백 만원에
매입하고 영등포 집 팔고 대전에 사두었든 철로 부지가 많이 올라 일부를 매각하여 집값을 내고 이사하여 교통은 좀 불편했으나 집은 좋은 집에서 이상적인 안정된 삶을 살게되어 평생 살듯한 기분이었다. 그 당시 차고에 정원에 보일러에 갖출 것은 다 갖춰져 있었다.
[큰 불행한 일이 연속 연 년 발생]
7. 불행의 연속 발생
1984년도에 처남이 대학을 졸업하여 초여름에 대기업 그릅에 취업을
하여 잘 근무하고 있어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휴가를
다녀와서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결별하였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함께 지냈는데 너무 억울하고 슬픈 마음이었다. 외아들을 잃은 나의
장모님을 생각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래서 장모님은 나의 집
으로 오시게 하여 어머니와 함께 지내시도록 조치를 하였다.
1985년 6월 나의 불행이 겹치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2개월의 서울대학교 입원 치료를 마치고 도저히 치료 가능성이 없어
통원치료를 하기로 하고 퇴원하여 집에서 1년이 넘도록 치료를 해도
별 효과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약으로 치료하며 아마도 평생을 복약
해야 될것 같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암담하고 답답한 지경이었다.
목숨을 건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남은 세상을 살아갈 각오였다.
[아무 불편 없는 정든 집을 매도하다]
8. 집다운 집을 매입하여 잘 살았던 정든 집을 처분하다.
정남향에 동문을 두고 있는 좋은 집이지만 불행을 두 번이나 연속하여 겪은 집이라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떠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나도 별로 여기서 더 살고 싶지 아니하여 1986년 10월 상당한 값을 받고 집을 팔고 대치동 미도맨션 아파트에 세를 얻어 들어가 살아 보기로 하였다. 몇 년간 세든 아파트에서 잘 살았다.
그러나 아파트를 사지는 아니하고 개인주택을 선호하여 아파트 전세를 살아본 후에 사는 결정을 하기로 했다. 막상 살아보니 별로 였다.
역삼동 김장군님과 함께 양재동에 대지를 매입하여 건물을 신축하여 임대를 하고 위층에 개인 주택을 마련하여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임대도 잘되고 살기도 조용하고 주위 환경이 좋아 1990년 봄 신축하여 입주한 후 오늘까지 살고 있다. 이 건물이 팔리기 전에는 이사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건물관리도 문제지만 큰 불편이 없고 조용해서 좋다.
교통도 나쁘지 아니하고 고향 다니는 데는 가장 좋은 장소인 듯하다.
건축한 때가 너무 오래되어 낡은 곳이 많아 약간 불편한 편이다.
[稅務士 開業과 不動産 賃貸事業 始作]
9. 세무사 개업과 계룡 빌딩 신축
미도맨션 아파트에 살면서 1987년 세무사 개업하고 1988년 계룡빌딩도 신축하고 1989년 계룡 빌딩 증축과 양재동 조그만 빌딩을 짓게 되어 1990년 4월 양재동에 지하 1층 지상 6층 사무실 건물을 지어 5층과 6층을 주택으로 지어 양재동으로 이사하여 조용한 곳에서 큰 불편을 모르고 살았다.
IMF와 금융위기를 지나면서 자금이 없어 고생한 이야기는 모두 생락하는데 정말 돈 없는 사람이 돈 마련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있을 적에 아껴야지 없어서 필요할 때는 아낄 방법도 없다.
[잘 運營된 稅務士 事業과 不動産 賃貸事業] 및 다시 학업을 시작
9. 세무사 사업도 잘 운영되고 사회 활동에도 잘 참여하였다.
그래도 도움이 남아있어 세무사 사업도 잘 유지되고 사회 활동도 왕성하게 활발히 하며 잘 지냈다.
공직생활 할 때 그렇게 동경하여 보던 학업도 다시 하여 옛날의 추억을 그려보고 싶었다. 재무부에서 사무관 승진시험공부를 하면서 느낀것인데 이렇게 잘 되는 공부면 일찍이 희망을 갖고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를 치러 진로를 바꾸어 보는 건데 후회가 되었다. 지금도 사무관 시험에 출제되었던 각 과목 시험문제와 답안이 생각이 기억이 똑똑히 난다. 이렇게 몇 개 과목만 더 했드라면 일찍 사무관이나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나의 최초의 원했던 법관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희망을 갖었어야 했던 것을 모르고 현직에 열성을 다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늦게서야(함께 시작한 공무원들이 비하면 아주 빠르게 승진)
사무관 시험에 합격한 것이 후회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서울시민대학도 혼자 어렵게 연습 삼아 다녀보고 동사무소에서 컴퓨터 중급교육을 받았다. 조금 자신이 생기니 못한 공부를 다시하고 싶었다.
서울 Cyever-Univercity 3학년 편입
장애인으로 공부 할수있는 방법을 찾아보니 좀 어려웠다.
부동산 사업도 하고 있고 공직 생활시 부동산과 관련된 업무를 많이 취급하여 부동산 공부를 하려고 하니 서울 사이버 대학교가 검색되어
자세히 알아보니 내가 가도 되는 대학교이며 가서 열심히 하면 좋은
지식도 더 배울 수 있다고 판단되어 3학년 편입원서를 냈다.
61학번이 우리 동기들 학번인데 03학번이니 40년 늦은 공부를 한번 해보려 한다. 역시 입학하니 최고령 학생이 되었다. 자랑스러웠다.
장애인으로 최고령으로 하고 부동산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열성을 다 하여 대학교 공부를 다시 하여 부동산학사와 경영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외국대학 1학년에 들어가 1년 과정의 외국대학 과정 공부도 해 보며 공부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기도 하였다. 동기도 많이 생기고 동아리 활동도 하여 지금까지 5인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울주변 등 관광을 많이 하고 청와대 관광도 다녀왔다. 요즈음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세상사 이야기 자기 이야기 등을 많이 나눈다.
재학시절 KBS 방송에 소개되어 몇 시간 집에 와서 촬영하여 방송이 되기도 하였다. 사이버 대학교에서 방송국에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최고령 학생은 1년만 하고 다음연도에 단국대학교 총장을 오래지낸 박사님이 입학하시어 10년 선배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2년을 열심히 공부도 하고 각종 모임 행사도 참석하고 시간 가는 줄모르고 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하였으며 졸업전에 부동산학과 졸업예정자들이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다녀왔다. 아주 뜻깊은 여행으로 정들었던
교수임의 인사 말씀 도중에 목이 메어 말을 못 잇고 눈물로 인사를 하신 열성을 다하신 교수님이 계셨다. 이재웅 교수님이신데 그 열정의
힘으로 다음연도 총장이 되시어 학교 발전에 전력을 다하시고 총장 임기 맡이시고 다시 교수로 학생들을 열성적으로 교육하고 계신다.
나는 몇 년 후 다시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유림지도자 과정에 입학하여 2년의 수업을 받고 성균 관에 열심히 참여하여 옛날 조선의 공 교육 활동에 관심을 갖고 고려 공민왕 때 성균관을 재창건하신 나의 20대 할아버지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부 하며 선조 목은 선생이 직접 써 놓으신 목은고(牧隱藁)를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였다. 목은고는 시고(詩藁)와 문고(文藁)로 되어 있고 시고 35권 제목 4,370 제목 시 10,000 여수가 넘으며 문고는 20권으로 233 제목이나 글자의 수가 138,000 여자로 사서삼경(四書 三經 즉 맹자, 논어, 대학, 중용과 시경, 서경, 역경)의 글자 수 135,768자 보다 많아 그 분량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집안을 대표한 유림활동으로 성균관을 출입하며 성균관대학교 동창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어 유학에 빠져 있기도 하였다.
나는 적령기에 못했던 공부도 마음껏 해보고 나이 들면 하여야 하는
종사(宗事)와 선조현창(先祖顯彰) 하는 일을 하며 지낸다.
[餘有가 있으니 宗會에도 關與하여 오랜 期間 宗事를 보다]
10. 한산이씨 대종회 대의원 4년과 이사 12년을 지내며 대종회가 잘 운영되도록 노력을 하였다.
이사는 6년까지가 임기인데 6년을 더하여 대종회가 잘되도록 노력하였으나 방해하는 무리 들이 항상 있어 많이 힘들었으며 그래도 우리 이사 몇몇이 맡고 있어서 큰일은 일어나지 아니했다.
대의원으로 있을 적에 대종회 회계가 규칙에 전혀 맞지 아니하여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우선 임대빌딩 사업을 법인으로 보는 사단으로 국세청의 승인을 받아 법인과 같은 낮은 세율로 법인세를 납부하도록 하여 대종회에서 임대소득에 대한 세금을 많이 납부하지 아니하고 임대에서 남는 금액을 조금이라도 더 우리 대종회 사업에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 아낀 금액만 하여도 지금 몇십억 원에 달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 문화재에 관심이 있어 가정 목은 인재 삼대 선생의 문집 판각을 국보 승격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하고 있다.
[비운의 2018년]
12. 2018(戊戌)년은 비운(悲運)의 해이다.
1973년부터 46년간 동업을 이 상규 동료의 7월 타계에 이어
건강하게 잘 지내던 나의 반려자이며 친권자인 아내가 갑짝이
11월 16일 세상을 떠나니 너무도 허무하고 사람이 살았다고
할 수 없다. 1985년 6월부터 나 혼자는 아무것도 못 하여 꼭 함께
해주던 집사람이 떠나니 나의 신세가 참으로 암담하다.
다행히 딸이 있어서 일생생활은 지장이 별로 없이 지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생활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무 의욕이 없이 지내고
그저 시간이나 소비하면 되었다.
[오랜 기간 보유하던 정든 계룡 빌딩과 토지를 매각하다]
13. 2019년 5월 계룡 빌딩 처분
1973년 봄에 매입한 신사동 토지를 46년간 함께 투자하여 동업하던 이사장이 2018년 7월 별세하고 연이어 11월 나와 53년을 일심동체로 살던 집사람마저 나를 버리고 갑작스럽게 저세상으로 가니 모든 것이 의욕을 잃어 어느 일에도 실증이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급매가액으로 계룡 빌딩을 사겠다는 금융기관이 나타나 그냥 헐값에 양도 처분하고 사무실은 양재동 2층이 마침 공실로 있어
그곳으로 그냥 이사를 왔다. 의욕을 상실하고 나니 그 공들였던 사업
계룡 빌딩 처분마저 무덤덤하며 나에게 어떻게 이런 좋은 운이 돌아와 말년까지 경제적 고통을 완전하게 해결해 주었는지 참으로 고마운 마음뿐이다. 정년 퇴임 후 남향에 동대문 내는 집을 짓고 살려고 동료와 함깨 무진 애를 먹으며 매입한 땅이 지하철역부지가 되고 출입구 바로 앞 땅이 되어 상가빌딩을 짓고 30여 년 잘 운영되어 지하철 들어올 때 토지 매입대 원리금을 다 보상받고 남은 토지의 원가가 없는 땅을 평당 일억원이 넘는 상당히 고가를 받고 처분하니 감회가 무한할 뿐이며 감사한 마음뿐이다. 한가지 서운 한점은 이 모든 것이 세상을 떠난 아내와 함께 이룩했는데 그 대금을 혼자서 쓰자니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 이 땅을 지키려고 많은 고생을 한 아내가 있었으면 반은 주었을 텐데 돈이 있어도 줄 사람이 없는 것이 너무 한 스럽고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쪼록 잘 쓰고 욕 안 먹고 아이들에 별 탈 없이 넘겨주고 깨끗이 떠나는 유종의 미를 거두는 정리가 되었으면 한다.
여러 형제에도 조금씩은 성의를 표하여 서운하지 아니하게 해 주고 나머지는 내가 경제활동 못 할 때까지 내가 운용하고 내가 좋게 잘 써 볼 작정이다. 그런데 막상 쓰려니 쓸데가 별로 없고 모을 때 고생했던 생각이 나서 아무 데에는 줄 수가 없다. 그리고 자금이 너무 적어 꼭 쓸데는 쓸수도 없는 것이다.
[공주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지었다]
14. 나의 처 생전에 공주에 집을 지으려 건축허가를 받아
둔 것이 있어 그대로 집을 지었다.
2019년 아버님 묘역과 같은 지역에 어렵게 타인의 종산을 조금더 매입하여 처의 묘를 옮기고 부모님 묘역에 의물(儀物)을 갖추고 우리집안 조그만 가족묘지를 깔끔하고 아담하게 조성하였다. 가보면 가볼수록 마음이 안정되고 잘 조화가 되는 길지(吉地) 명당에 뫼신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라도 보여 줄 수 있을 정도로 규모는 작지 만 장소가 너무 좋고 속흙은 정말 귀한 토질로 아무도 그런 흙이 있는 땅을 처음 본다고들 했다. 방향과 위치 등도 좋고 집에서 거리도 아주 가깝다.
그런데 제례를 올리는 장소가 묘소 외에 별도 재실(齋室)이 없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형제들이 자란 집터를 이용하여 집을 짓기로 하고 2020년에 완공을 하였다. 30평에 방 한 칸 거실 한 칸을 만드니 넓고 어지간한 집안 행사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어 제례 및 집안 행사하기에 알맞은 장소를 확보하여 비 눈바람 등 자연 현상에 아무 불편 없이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부여의 처가 집을 잘 고쳐 멋있게 해놓고 나의 고향에도 집을 지어볼
계획을 세워 건축허가를 받아 두었던 것으로 건축을 하였다.
대지도 한 300평이 되고 집 앞뒤로 여유 공간이 많이 있어 좋다.
2020년에 인재유고(麟齋遺稿)를 문헌서원(文獻書院) 장판각(藏版閣) 판각(板刻)에 의한 원문(原文)으로 다시 발행하고자 열성을 다 했지만
코로나-19의 갑작스런 큰 전염병 유행으로 끝내지 못하고 미루어 오고 있으며 2021년도 넘겼으니 2022년도에나 발간하여 나누어 볼수 있으면 다행이라 하겠다.
[季弟 死別]
15. 잘못 보낸 2021(辛丑)년 사랑하는 막내아우와 死別
신축년은 처음부터 잘 풀리지 아니했다. 년초 매입주식이 잘오르 더니 어찌나 빠지는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으며 그것을 피하려고 서천에
부동산을 조금 샀더니 그것도 입찰가를 너무 높게 써넣어 고가취득이
되어 앞으로 계획을 잘 세워서 시행해야 원가를 유지할 듯하다.
1년에 10여억 감소 된 기분이다. 그러나 현찰이 주식과 부동산으로
바뀌어있으니 큰 문제는 아닌 듯싶다.
1985년부터 나를 간호 보호하던 막내아우가 10월 24일 남양주 등산 길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나니 처에 이어 동생마저 나를 버리고 야속하게 가고 나니 너무 허전하다. 세무사 일은 나는 관여를 하지아니 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또 수임 업체도 몇 개 없으니 정리 하면 될 것 같다. 막상 정리하자니 이것도 좀 어려움이 따른다.
다행한 건 돈거래가 전혀 없다. 채무는 없으며 채권은 좀있으나 모두 부실채권이라 추심기간 경과로 소멸시효 완성 채권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성격이 꼼꼼하여 10월분은 완전정리를 해놓았다. 11월부터 내가 검토하여 상의하여 돌려줄 것은 다른 곳 으로 이전 하도록 하고 우리 것과 대가 안 받는 곳 몇 업체는 떼기가 좀 쉽지 아니하다. 받는 수수료가 월 30만 원이니 월세도 어림없고 생활비 벌기는 정말 거리가 멀어 일찍이 정리했으면 좋았을 것 이라 생각된다.
1987년 4월 27일 등록하여 개업했는데 참 오래도 운영했다.
동생은 아이들도 잘 두고 말년에 다가구 주택을 매입하여 주거하면서 관리하여 조금 수입도 생기고 인플레이션 방지도 하며 재미있게 사는데 청천벽력같이 점심 먹고 산에 친구들과 만나 바람쏘이러 갔다가 영원히 못 돌아오게 되니 고생한 것이 너무 안쓰럽고 그래도 내가 가끔 준 것이 있어 내 마음이 조금의 짐은 덜어주는 느낌이다.
2019년 1억 원도 참 잘 증여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마저 하지 아니했다면 얼마나 후회가 될 뻔했을까? 같이 있던 정리로 얼마쯤 더 해주어야 하는데 마음만있고 아직 실천은 아니 했으나 이야기는 했다.
3월에 자금을 마련하여 오천만 원을 송금하였다.
[舒川土地 活用]
16. 서천 토지 활용과 주식의 처분[자산운용의 합리화]
계룡처분 자금이 세금(양도소득세) 많이 내고 보니 재투자 재원이 되지 아니하고 또 갑짝이 부동산이 오르기 시작하여 천정부지로 오르니 어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급하여 2021년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아직 결과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야 안다
조금남은 자금은 잘 지켜보도록 하자. 그리고 좋은 일은 한번 해보자. 인간이 별것 아니다. 재산 좀 남겨 놓으면 자식들간 의 끊어지는 원인만 된다. 우리 집은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이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얼마 안 되는 것 모두 기증할 수도 없다. 기증한다고 하여도 차후 문제가 발생 된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운명 인것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모두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있으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조금은 나을 것 같이 생각된다.
韓山에도 뜻있는 것을 하나 해놓고 싶다.
또한 稼亭, 牧隱. 麟齋 三代 先生 글과 木板 板刻의 價値를 드높이는
事業을 하고 싶다. 文集이라도 分析하여 發行할 覺悟이다.
鼎峙里에는 간단히 노력만 하면 될 수 있을 듯하다. 仁字敷字 郡守 公 부터 穫字 垾字 <이상 海州> 貴賢, 壽萬, 尙吉, 翊季, 洛聖, 敬稷, 胤在字 高祖父母까지 神壇造成. 合同墓域 二個造成. 墓誌石 만들면 될 듯하다.
이렇게 되면 始祖부터 現代 우리 代까지 모두 이어진다.
始祖(諱 允卿 戶長公 부터 7世 牧隱 先祖까지 韓山 墓所에 8,9,10世 麟齋公 直講公 郡守(文疆))公 3대는 海州에 副尉公(專)은 善山(現 龜尾市) 延興에 郡守公(仁敷)과 穫 先祖는 海州에 惟信, 垾, 흔富는 灘川(井峙)에 貴賢, 壽萬, 尙吉은 連山에서 翊季, 洛聖은 扶餘 介自里 咸朴山에서 敬稷은 寺洞에서 胤在는 介自里 咸朴山에서 灘川(井峙) 으로 遷墓하여 時享을 올리고 있으며 承字 부터는 각 집안에서 便利한 대로 뫼 시기로 하여 우리는 家族 墓地를 別途로 마련하였다.
즉 7世까지 韓山, 8世 麟齋公(韓山 神壇) 9, 10世 直講公, 郡守公 (善山 神壇) 11世 副尉公 墓所(善山) 12, 13, 14, 15世 郡守公, (仁敷) 穫, 惟信(墓所), 垾(鼎峙神壇) 16世 흔富(墓所) 17, 18, 19世 貴賢, 壽萬, 尙吉, (鼎峙神壇) 20世 翊季(遷墓) 21, 22, 23世 洛聖, 敬稷, 允在(鼎峙神壇) 24世 承厚(遷墓) 25世(祖) 26世(父) 27世 求字 28世 馥 29世 遠 30世 洙, 濬이다.
公州(灘川 鼎峙里) 入鄕祖는 16世(求字 11代祖 흔富公 通政大夫 僉知 經筵 中樞 府使이시며 1679年 7月에 建立된 最初 碑는 現存 碑 地下에 埋立되어 있으며 文人石 二具와 望柱石만 처음 세운 채로 存在하고 있다. 매우 어렵게 내려오는 家門의 一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