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원
갈대가 키워낸 바람은
지구를 몇 바퀴나 돌고서야 돌아왔다
움켜쥐지 않아서 가벼운 몸이
슬쩍 빈자리를 엿본다
공중에 집을 짓던 거미가 먹구름을 살필 때마다
바닥부터 쓸어가는 바람
지상에 깃털을 떨구는 것들은
떠도는 혈통이라서
풍향이 바뀌면
새들이 먼저 날아올랐다
구멍 숭숭한 잎에게 길을 물으면 거미줄 사이로도 바람은 각을 세웠다지 현을 켜듯 계절을 조율했다지 뿌리를 흔들다 우듬지까지 내달렸다지
웅덩이에 달그림자 내고서야 바람은 빗장을 걸었을까
지구 반대쪽에서 길을 물으면
그늘의 힘으로 오는 것
그림자 없이도 자꾸만 흔들리는 게 있다
그런 날엔 내 안에도 몇 개의 바람이 자랐을 것이다
갈대가 키워낸 바람은
돌아와 밤새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바깥의 슬픔
집안의 꽃은 앓은 흔적도 없다
꽃숭어리로 잘 살고 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죽어갔다
냄비에서 꽃게탕이 끓을 때였다
송이마다 뭉친 행간을 고르며 서시를 낭송하던
앵무새도, 이제는 조용하다
새장에서 부른 후렴 한 소절이
마지막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고등어가 프라이팬에서 익을 때였다
부젓가락이 긁어낸 숯불이 재가 되어도
아무 걱정도 없는 밤
그을린 별자리를 떠올릴 때마다
환하게 돋는 식탁에도
나는 갯메꽃이 필 거라고 믿었다
꺼지지 않는 조명 아래서
붉어진 입술이 몇 마디 말을 고르는 동안
그늘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절반의 어둠을 갖는 집어등처럼
안으로만 흘러드는 치어들
접힌 불빛만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계절을 모르는 나는 이제
앓은 흔적도 없다
밖으로 실금만 가고 있었다
최형만_202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23년 천강문학상 시 대상.
《2024 문학춘추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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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갯 메꽃~~
어릴적 고향 바닷가의 모래가 있는 가장자리에
있는듯이 없는듯이 피어있던 꽃.
나팔꽃은 귀화꽃이지만 갯메꽃은 토종꽃이라는 인터넷 기사를
며칠 전에야 보고 알았다.
좋은 시 감사드립니다.
"그림자 없이도 자꾸만 흔들리는 게 있다"에서 잠시
머물러 봅니다.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