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4章 세 명의 절대마웅(絶代魔雄) ① 참으로 기괴(奇怪)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저주구광자와 십뇌기형겁을 제외하고 세상에 이보다 기괴한 사람 이 있었다니……. 역시 세상이 넓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 기괴한 사람은 반은 남자(男子)였고, 반은 여자(女子) 였다. 반남반녀(半男半女)! 일신에 혈의(血衣)를 걸치고 있는 그는 역시 붉은색의 머리카락 (赤髮)을 치렁치렁 발끝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눈빛은 유리알처럼 맑고 고요한 그의 출현은 실로 순식간에 이루 어진 것이었다. 한 줄기 삭풍에 휩쓸려 온 듯, 그냥 그 자리에서 무형(無形)으로 존재했다가 솟아난 듯,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방 안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형성하고 있는 기괴(奇怪)로운 분위기와 어울려 마치 그를 인간이 아닌 유령(幽靈)으로 보이게 했다. 그는 지금 나타날 때 그대로 팔짱을 낀 모습 그대로 배월에게 시 선을 던지며 조용히 서 있었다. "……." 배월은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연신 인간의 영혼과 심령을 쥐어 흔드는 천만 가지 의 소리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반남반녀의 혈의인 또한 맑고 투명한 눈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일체의 흔들림도 없이 처음 그 자세에서, 처음 그대로의 눈빛으로 배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배월의 눈빛이 마침내 가늘게 변화를 일으켰다. '과연 마정의 정주(井主)인 음양혈군(陰陽血君)다운 정력이다!' 배월은 처음으로 소리 없이 솟은 혈의인에 대해 놀라움의 경탄을 뇌리에 품었다. 그러나 배월의 놀라움은 비단 음양혈군 한 사람에게 그친 것이 아 니었다. 언제 어떻게 스며든 것인가? 아침의 조양이 허공에 떴다 싶을 순간, 창문을 때리는 빛처럼 서 쪽과 북쪽의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이 소리 없이 스며든 것이다. 서쪽의 창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중년의 선비였다. 일신에 눈부신 흰 백의를 걸쳤으며, 이마에 핏빛의 문사건(文士 巾)을 두르고 있는 이 중년문사(中年文士)는 어떤 특별한 신체적 인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전형적인 문사의 유형인, 유악하고 병약한 기질을 함유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유약함 속에 감히 천하에 그 누구라도 촌각 이상을 바라볼 수 없는 무형의 위엄과 기세가 그의 전신에 안개처럼 신비롭게 흐르 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든 핏빛의 섭선(攝煽)과 여인처럼 맑고 수려한 얼굴, 심해처럼 깊고 찬란한 눈빛이 이 무형의 기질과 어울리니… 칼날 처럼 날카롭고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꿈틀… 꿈틀……! 배월의 뇌는 신비하고 투명하게 움직였다. '저들이 바로 집마도주(集魔島主) 자건수사(煮乾修士)와 혈세마교 의 마교팔수라존(魔敎百八修羅尊) 중 제일존(第一尊)인 대마존(大 魔尊)!' 북쪽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대마존은 이미 탁자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물처럼 조용한 자세로. 그런데 전설의 혈사마교를 이끌고 있는 그는 이제 고작 약관의 청 년에 불과했다. 미심(眉心)에 붉은 반점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으며, 두 손은 유난 히 길고 섬세했으며, 미녀들의 섬섬옥수처럼 아름답기 이를 데 없 었다. 그 역시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보면 볼수록 가 공할 기도가 물살처럼 번지고 있었다. 어쨌든 전설의 천중구마역 중 네 곳의 종주(宗主)들이 한 곳에 모 여 있었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었다. 대자해혈공의 배월을 제외하고는……. 마정, 혈세마교, 집마도의 이 세 종주들은 겉모습과는 확연히 다 르게 그들은 나이가 이미 백 수십에 달한 자들이었다. 다만 마정(魔井)의 음양혈군. 백 년 전, 금면천무일존 백리자림에 의해 갇힌 일만(一萬) 마인 (魔人) 중 가장 극마극강(極魔極强)한 자였다. 금면천무일존조차도 그를 가두는 데 무려 일백 초를 소비할 정도 로……. 그런 음양혈군이 백 년이 지난 지금, 일만 마인의 일신절학들마저 모두 한 몸에 지녀 버렸으니……. 그 무위(武威)의 깊고 가공함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집마도(集魔島)의 자건수사. 그는 갈 곳 없어 모인 피의 악귀들이 탄생시킨 사도(邪道) 최고의 거웅(巨雄)이다. 천마혈류선(天魔血流煽)으로 펼치는 그의 환상적인 사공(邪功)은 형용을 불허한다. 혈세마교(血洗魔敎)의 대마존은 또 어떤 인물인가? 백팔수라존들의 서열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그는 과거 백 년 전에 천하를 장악했던 혈세천마 독고림의 사부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마교백팔수라존의 모든 장점과 무공을 한 몸에 지녀 그 의 손짓 한 번이면 태산(泰山)이든 사해(四海)든 통째로 날아갈 가공경이할 능력을 지닌 자이기도 하다. 이 세 사람……. 시대를 초월한 경이로운 세 곳의 종주(宗主)들. 역사(歷史) 이래 이들이 동시대에 그것도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 었을까? 스스로 천하는 물론 하늘(天)마저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통천 가공의 힘을 지닌 이들이……. 여기에 대자해혈공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얻은 배월까지 끼였으니, 전설의 천중구마역 중 네 곳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②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었다. 네 사람은 마치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시종일관 처음의 그 자세를 견지한 채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피아아아-! 창문이 엄청난 진동을 일으키며 찢기는가 싶더니, 한 줌의 가루로 변해 허공에 비산되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휘이이잉-! 창 밖에는 여전히 삭풍과 설풍(雪風)이 난무하고 있었지만, 이들 네 사람에게는 눈송이 하나, 바람 한 점 접근하지 못했다. 마치 이들의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막이 쳐진 것처럼 눈송 이든 바람이든 그대로 퉁겨져 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방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온 삭풍은 네 사람의 주변으로 몰려 가는 순간, 그대로 퉁겨지면서 더 강렬한 회오리와 소용돌이를 일 으키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그들의 몸을 중심으로 일어난 회오리에 의해 방 안의 모든 집기들 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산산조각 박살이 나 버렸다. 황촉불이 꺼진 지도 이미 오래 전이었다. 하지만 네 사람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를 견지하고 있었다. 배월은 여전히 여유롭게 침상에 누워 있고, 그의 투명한 뇌는 쉴 새없이 꿈틀거린다. 음양혈군은 동쪽의 창문에서 팔을 비켜 낀 채 배월을 향해 맑고 투명한 눈빛을 던지고 있으며, 자건수사는 여인처럼 맑고 아름다 운 얼굴에 미소까지 띄워 올리고 있다. 대마존 역시 옥탁을 앞에 두고 무심한 눈빛을 배월에게 던지고 있 었다. 그들은 일견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분명 변화는 있었다. 심해처럼 깊고 신비로운 눈빛과는 달리 그들의 이마에 가는 땀방 울이 배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네 사람은 지금 그 어떤 치열한 혈전보다 더한 생 사(生死)의 대결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이미 무공으로 이룰 수 있는 극한의 경지를 너머 지고지순(至高至 順)한 도(道)의 경지에 접어든 그들의 대결에선 어떤 병기나 초 식, 여타의 매개물을 통하지 않고도 생사를 판가름 내는 혈투를 벌일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그렇다. 이들은 분명 단지 자신들의 기(氣)만을 움직여 처절한 생 사의 결전을 벌이고 있음이 분명하리라. 지금 배월이 누운 침상의 네 다리는 바닥으로 한 치 이상 파고들 어 갔으며, 자건수사는 그의 전신을 벽에 반쯤 파묻고 있는 상태 였다. 대마존의 이마에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졌고, 입에서 가는 선혈이 쉴새없이 흘러 나왔으며, 음양혈군의 두 다리는 허벅지 깊숙이까 지 바닥을 파고들어간 채 칠공으로 가는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오오, 일천 년 무림사를 통해 이들처럼 극강한 고수들의 이러한 무형의 격전이 있었던가? 문득 투명한 뇌를 쉴새없이 꿈틀거리고 있던 배월이 천천히 침상 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순간이었다. "으윽!" 억눌린 신음과 함께 대마존이 주르르 밀려 나갔다. 또한 음양혈군은 가슴까지 바닥에 박혔으며, 자건수사는 자신의 애병(愛兵)인 천마혈류선을 떨어뜨린 채 쉴새없이 가는 신음을 흘 려 냈다. 맑고 고요했던 그들의 눈은 아예 시뻘건 핏덩어리였다. 그리고 터지는 경악! "과… 과연… 천마잠혈세 한천우란 이름을 도용할 정도로 대단하 다!"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에 가는 선혈을 쏟아 내는 음양혈군의 말에 자건수사 역시 떨어뜨린 천마혈류선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들며 말 했다. "그리고 천외구성역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질 만큼 가공하다." 그들의 말에 이어 대마존이 입을 열었다. "그렇더라도 그대는 천마잠혈세 한천우가 될 수 없다!" 그러자 배월이 그들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흘려 냈다. 부르르……! 그 웃음이 만들어 내는 신비롭고 찬란한 아름다움에 세 사람은 동 시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동시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없이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배월의 신비스런 미소와 황홀한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배월의 모든 것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세 절대마종의 의식과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세 사람의 귓속으로, 영혼 속으로 배월의 신비스런 힘 이 깃든 음성이 흘러들었다. "그대들이 이 곳에 온 목적은 단순히 내가 천마잠혈세 한천우가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함이었소?" "……." "……." "그 목적으로 온 것이라면 애석하게도 그대들은 헛걸음을 한 것 같소만……." 영혼을 낚아채는 배월의 음성에 세 사람의 몸이 거센 진동을 일으 켰다. 그 때, 다시 배월의 음성이 그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본인이 바로 천마잠혈세 한천우요." 순간, 세 사람이 격렬한 분노를 터뜨렸다. "끝까지 그분의 행세를 하려 들다니……!" 츠츠츠츠츠-! 그들이 분노를 터뜨리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침상이 마치 얼음처 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루가 되어 먼지처럼 허공에 흩날려 버린 것이다. 그 속에 분노에 찬 음성. ③ "우리들은 비록 그대와 삼기공(三奇功)의 대결에선 패했으나, 그 것이 우리들의 전부라곤 생각하지 말라!" "다시 한 번 더 그대가 천마잠혈세 한천우라 주장한다면, 우리들 의 진실한 능력을 모두 보게 되리라!" 순간, 배월의 얼굴에 차가운 기류가 스치고 지나갔다. "협박인가?" 동시에 그의 얼굴에 핀 차갑고 냉기가 서린 아름다움! 그 모습 또한 세 사람의 가슴을 온통 뒤집어 버렸다. "그대들은 분명 모든 면에서 무림 사상 최고의 마웅들이라는 절대 구마제를 능가한다. 그러나……." "……?" "……?" "그대들은 본좌를 부정하지 말라. 본좌를 계속 능멸한다면 그대들 또한 나의 진정한 능력이 어떤지 보게 되리라." 차가운 냉기가 섞인 배월의 음성은 어떤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세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다. 세 절대마종의 전신에 가닥가닥 경악이 터졌다. '미… 믿지 않았었다!' '처음 태성후, 태요후, 태마후가 우리 세 사람이 힘을 합쳐도 결 코 죽일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우리 사마 역 외에 최소한 삼성역(三聖域)이 합쳐야 비로소 그를 죽일 수 있 는 확률이 일 할이라고 했을 때 얼마나 비웃고 조소를 터뜨렸던 가?' '하지만 이제는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들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은 물론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저 자는 아예 신의 능력마저 능가하고 있 다.' 그들의 경악과 놀라움이 극을 치솟아 또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때, 낮고 싸늘한 배월의 음성이 그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천마잠혈세 한천우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대들은 오늘 밤 이 풍운백화루를 책임지고 경비하도록 하라!" "뭐… 뭣이라고?" "이… 이런 찢어 죽일 놈!" 세 사람은 무섭게 분노했다. 천하의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해도 시 원찮을 판국에 하급무사들처럼 객잔을 경비하라고 하니, 어찌 그 렇지 않으랴? 그러나 그들의 노화에도 배월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그것은 그대들을 살리고자 하는 본인의 최대 아량이다. 또한 태 성후, 태요후, 태마후는 오늘 밤 본인과 함께 보내지 않으면 음기 가 충만해 죽게 된다. 그러면 그녀들과 이미 영혼이 결합된 그대 들 세 사람도 역시 죽게 되니… 그렇게 되면 진정 불행한 일이 아 닌가?" "으으……!" 세 절대마종은 눈에 핏발을 곤두세우고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배월의 음성이 그들의 귓속으로 칼끝처럼 파고들었다. "그대들이 살고, 그대들이 사랑하는 세 여인을 살게 하려면 그 방 법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노라!"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크하하핫……!" "크흐흐하하핫……!" "아핫핫핫핫……!" 세 사람이 일제히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비애와 분노와 통곡을 담 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곧 허탈하게 잦아 들고 있 었다. ④ 묻노니 신(神)이여!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 당신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즐기고자 하여 정(正)을 만들고 사(邪)를 만들어 이 땅에 내렸는가? 이것이 당신에겐 한낱 낙(樂)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이 정사(正 邪)의 굴레 안에 우리는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어야 한다. 너는 정(正)이니 살아남아야 하고, 나는 사(邪)이니 죽어야 한다 는… 당신이 내린 진리(眞理) 마냥 떠도는 이 말. 묻노니… 신이여! 대체 당신은 무엇을 정(正)이라 하고, 무엇을 사(邪)라 칭했는가? 그리고 당신은 이 땅의 무리들 중 누구를 정이라 하고, 누구를 사 라 칭하는가? 이 암울한 정사(正邪)의 소용돌이가 일으키는 피의 행진을……. 오오, 신이여! 스스로 만들어 베푼 당신마저도 그렇게 묵묵히 침묵을 지킨다면, 도대체 이 땅의 정사(正邪)는 어떻게 되어 간단 말인가? 어디서 비롯하여 어디서 끝나는, 아득한 정사의 대혼돈의 귀결점 은 어디인가? 정(正)은 정이로되 정이 아니고, 사(邪)는 사로되 사가 아니니… 다시 붙잡고 목놓아 울어 볼 정도 없고, 사도 없노라. 정은 사가 되고, 사는 정이 되는, 진리가 거꾸로 흐르는 세상에 내 감히 검을 들어 세상을 심판하리라! 당신이 심판하지 못할 정사라면 내가 검을 들어 심판하리라. 또 묻노니, 신이여! 세상의 잔인한 바람결에 갈가리 찢겨간 내 가슴의 상처를 붙들고 비정에 이빨을 갈아붙인 나를 살수지황으로 이르나, 당신께서도 나를 살수지황이라 하겠는가? 세상의 날카로운 부리에 찢긴 내 통곡쯤이야 아예 잊어버린 채 뜨 거운 피라곤 한 방울도 없는 악마의 덩어리라 하겠는가? 다시 한 번 더 묻노니… 신이여! 지금 내가 가는 길, 잔인한 비정의 길이라 이름하고… 빙하(氷河) 로 깨어지는 내 가슴의 상처를, 억만년 지구와 최초로 만난 사라 이름하고 기어이 막으려 하는가? 그리하여 당신은 이 땅의 정은 오직 금면천무일존 백리자림이라 이름하고, 그의 앞길에 찬란한 영광을 내리려는가? 신도, 기적도 승천하여 버린 이 땅, 이 하늘, 이 바다에……. ⑤ 북경성벽(北京城壁)을 따라 광활히 펼쳐진 설지(雪地)는 어지럽도 록 찬란하다. 성벽을 따라 불을 밝히고 있는 초병등(哨兵燈)이 처량하기도 한,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을 듯한 성벽을 따라 인세(人世)를 털어 가 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한 쌍의 남녀가 걷고 있었다. 정(正)의 하늘을 찬란히 수놓는 백리대하와 구현천주인 지다무후 주아영이었다. 지금 주아영의 병약한 얼굴은 어느 정도 홍조를 띠고 있으나, 그 녀의 얼굴에 서린 비애(悲哀)와 고통의 빛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야위어 보이게 했다. 사박- 사박- 저벅- 저벅-! 밤의 북경 성곽을 따라 돌고 있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엔 긴 침묵의 강(江)이 가로놓여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서로를 아끼며 사랑했던 두 사람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그들이었고,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그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 사이에 놓인 이 머나먼 마음의 강(江), 그 광활 한 강은 생전 처음으로 그들의 가슴에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타인(他人),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 생소한 이방인 같은 말.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될 두 사람의 가슴에 자리한 이 싸늘한 타인 의 강! 도대체 누구 때문인가? '짐승 같은 놈! 찢어 죽일 놈!' 문득 성벽을 따라 침묵으로 걷고 있던 백리대하의 두 눈에 미미한 섬광이 폭사되었다. 그 때, 이미 인간사의 감정 따윈 모조리 내버린 듯한 주아영의 죽 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대작……!" "……." 백리대하는 말이 없다. 다만 그가 밟는 눈 속의 발자국이 깊이를 더했을 뿐이다. "이번 북경파월겁은 당신의 패배로 끝나게 될 거예요." 이 낯설고 낯선 타인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아영의 음성에 백리대하의 넓고 허무로운 등이 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 영웅의 귀에 죽음을 연상케 하는 주아영의 무색한 음성이 다 시 흘렀다. "대작, 그는… 그는 천마잠혈세 한천우가 아니예요." "……." "스스로를 천마잠혈세 한천우로 만들어 가는 대단한 인물이에요." "……." 백리대하는 여전히 침묵이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는 엄청난 분노와 비애가 흐르고 있었다. '왜 그토록 무심한 음성을 흘려 낼 수밖에 없는 거요, 아영? 왜 이토록 타인임을 느끼게 하는 음성만 흘려 내는 거요, 아영?' 백리대하는 까닭 모를 분노가 치밀어 그의 가슴을 완전히 태워 가 는 듯했다. 그러나 영웅의 비애 서린 마음을 철저히 배신하는 주아영의 음성 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는 제이의 북경파월겁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순간, 백리대하의 음성이 주아영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아영, 그가 그대를 취한 것이며… 나를 분노케 하여 북 경파월겁을 유도했단 말이오?" "……." 무겁고 낮으며, 어떤 분노와 비애마저 담은 백리대하의 음성이 이 어졌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또한 나의 계획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 았소?" 그가 나의 육체를 취했으니, 당연히 그 자의 것이라는 백리대하의 말은 주아영의 마음을 잔인하게 뭉개고 있었다. 그러나 주아영은 무심과 꿋꿋함을 애써 가장하려는 노력을 보였 다. 그런 그녀의 귀에 백리대하의 음성이 계속 흘러들었다. "제이의 북경파월겁은 단순히 그 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소." 저벅- 저벅-! 그가 밟아 가는 설지가 더욱 깊이를 더하여 패여 갔다. 그만큼 그의 마음에 이는 격정이 크다는 얘긴가? "세상은 팔 년 전의 북경파월겁이 정(正)의 힘이 합쳐 이룩한 무 림사에 영원히 기억될 일대쾌사(一大快事)라 여기고 있소." 사박- 사박-! 고독한 영웅의 옆에서 걷는 것만이 그녀의 의무인 것처럼 성곽을 따라 걷고 있는 주아영은 이 순간, 까닭 모를 슬픔이 저며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무너져 내리는 가슴 한 구석으로 뜨겁게 차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철저히 그녀의 전신 구석구석에 배인 그의 숨결……. 순간, 그녀는 미칠 듯이 그 사람이 그리워지는 충동을 느꼈다. '왜? 왜? 왜……?' 주아영은 악받치듯 자신에게 반문을 던졌다. 그 때, 비애와 분노를 담고 흐르는 백리대하의 음성이 그녀의 귓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무림에 내 손으로 또 하나 무림사에 영원히 기억될 일대 쾌사가 이루어질 것이오." "……." "바로 이 북경성에서 말이오." "……." "그리하여 후세인들이 북경성만을 떠올려도 정의 위대함에 뿌듯한 자부심을 갖도록 하겠소." 백리대하의 음성은 결연하게 끝을 맺었다. 그 때, 그저 걸어야 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걷고만 있던 주아영 이 깊은 고뇌를 실은 탄식을 터뜨렸다. "할 수 없군요. 끝내 고집을 버리시지 못하다니……."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는 주아영의 눈에서 결연한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누르고 눌렀던 분노가 폭발한 것인가? 그녀의 음성이 매섭게 변했다. "그렇다면 소녀는 당신을 위해, 정파무림을 위해 이 북경성 전체 에 천추만상대라진(千秋萬象大羅陣)을 펼치겠어요." 이 음성엔 분명 자신을 심하게 질책하는 빛이 역력했다. 바로 이 때였다. 언제 어떻게 나타난 사람인가? 그들이 걷는 저만큼에서 핏빛 혈의를 입은 한 여인이 서 있었다. ⑥ 어두운 밤인 데도 그녀의 주위엔 불꽃 같은 정열이 팽만하며 형용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구겁예황 모용하였다. 그리고 짙은 정열의 불꽃을 읽을 수 있는 그녀의 음성. "이 구겁예황도 사파무림을 위해 영겁번뇌무상진(永劫煩惱無常陣) 을 펼치겠어요." 창해대작과 주아영은 그녀가 나타났을 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의 음성이 흐르자… 약간 경이로운 눈빛을 흘려 냈다. 모용하는 다시 정열의 불꽃이 섞인 음성을 토해 냈다. "이것은 그를 천마잠혈세 한천우로 인정치 않으려는 저의 최소한 의 자존심이에요." 백리대하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귀하는 단지 그 자존심을 지키려고 나를 돕겠다는 것이오?" 모용하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녀의 말에 백리대하가 허공을 향해 호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하… 좋소, 좋아. 이쩌면 이번의 북경파월겁은 정과 사가 합 친 최초의 선마무계(仙魔無界)나 마선무계(魔仙無界)의 시발점이 될 것 같소." "헉헉!" "아아……!" "으으……!" 세 가닥의 신음 소리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설을 헤집었다. 아니, 헤집었다는 표현보다는 삭풍이 실어 날리는 폭설을 요(妖) 와 사(邪)와 성(聖)의 세 가닥 기운으로 녹여 버렸다. 물론 이 기운은 무형으로 존재했으며, 무심히 흩어지는 신음 소리 에 은근히 배어 나는 것이었다. 만일 지금 이 순간에 누군가가 이 세 가닥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면 처음엔 평범한 사람의 신음 소리라 여겼을 것이나……. 어느 새 영혼을 촉촉이 적셔 버린 요사성의 세 가닥 기운에 머리 카락을 쥐어뜯고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하리라. 그렇다. 폭설의 발길을 헤치고 풍운백화루로 향하고 있는 세 사람 은 십뇌기형겁의 세 영혼부인인 태성후, 태마후, 태요후였다. 그런데 그녀들이 설야에 모습을 드러내니, 갑자기 천지가 현란한 대낮처럼 밝아지는 충격에 사로잡히게 했다. 성의 아름다움, 요의 아름다움, 마의 아름다움……. 천 년에 걸쳐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태어난 세 여인의 아름다움 은 어둠을 간단하게 쫓아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이, 어떻게 이런 폭발적인 미의 유혹을 뿌려 내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상상이나 하였겠는 가? 더구나 지금 가는 숨결을 토해 내며 진한 정염까지 토해 내니, 하 늘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폭설의 설야(雪夜)를 헤치는 이 미의 세 여신(女神)들. 문득 전신에 사기(邪氣)로운 아름다움과 사기로운 유혹을 뿌려 내 는 태마후가 입을 열었다, 참을 수 없는 욕정이 서린 음성을……. "으으… 겨… 결국… 자건수사, 대마존, 음양혈군이… 당했다!" 그러자 뜨거운 욕정과 요기로움으로 하늘이라도 녹여 버릴 듯한 태요후가 말을 받았다. "헉헉… 놈… 그 어린 마물… 시간이 흐를수록… 헉헉… 더욱 가 공할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젠 누구도 그 어린 마물을 당해 낼 수 없다. 헉허헉……!" 그녀의 음성은 주변의 공기까지 흔적 없이 태워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태성후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다만 가늘게 내뱉는 신음 소리로 세상을 온통 성스러움과 성결함 의 물결로 채워 낼 뿐이다. 그런 그녀의 아름다움은 야설과 어울려 미극미선(美極美仙)으로 보이게 했고, 천하만물을 성(聖)과 미(美)로 지배하는 인극(人極) 의 미신(美神)으로 보이게 했다. 스으으으… 스으으으……! 아예 지면에 발을 내딛는 법이 없이 폭설을 헤치는 미의 세 여신 (女神)이 지나는 자리에 극요, 극마, 극성의 기운만 폭풍처럼 깔 렸다. 이 때, 열릴 것 같지 않았던 태성후의 입이 돌연 성결한 숨결을 토해 냈다. "아아, 오늘 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십뇌기형겁… 그분을 배신 해야 하는 패륜을 범하게 되었으니……."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을 주르르 흘러내렸다. 온통 성의 기운으로 뭉쳐진 그 눈물 속에도 역시 참을 수 없는 욕 정의 빛이 부운하고 있었다. 그 때, 태요후와 태마후의 음성이 차례로 흘렀다. "헉헉… 저주받을 그 놈과 정사(情事)를 나누면서까지 살아야 하 다니… 헉헉……!" "하지만… 복수를 위해서는… 으으으…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한다." 스으으으… 스으으으……! 허공을 땅 밟듯 풍운백화루를 향해 나는 그녀들의 몸엔 욕정과 살 기가 천지를 메우며 흘렀다. ⑦ 스르르르……! 배월의 구름 같은 흑발이 열어 놓은 창문의 바람에 의해 아름다운 포말을 일으켰다. 지금 그의 시선은 깜깜한 심야의 밤하늘을 표연히 주시하고 있었 다. 그런 아름다운 배월의 동공에 일고 있는 기이한 물결은 분명 참을 수 없는 욕정의 물결이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욕정을 참아 내기 위해 서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했다. '이 곳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다.' 그의 두 눈에 피어나는 욕화가 어떤 떨림을 더해 갔다. '팔 년 전의 북경파월겁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 이다. 아니, 무림 전체의 힘이다.' 휘이이잉-! 때마침 불어 온 삭풍에 배월의 흑발은 또 한 번 구름 같은 포말을 일으키고. '그리고 북경성 전체를 뒤덮는 두 가지 상반된 가공할 기운! 그렇 다. 드디어 구겁예황 모용하와 지다무후 주아영이 힘을 합한 것이 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그들이 십뇌기형겁의 세 영혼 부인을 절대 그대로 이 곳에 보낼 리 없다는 것이다.' 휘이이잉-! 삭풍과 폭설은 연하여 끝이 없고. '구겁예황과 지다무후 역시 나와 세 영혼부인과의 영적인 결합을 알고 있을 것이니, 그녀들을 이용해 나를 제압하려 들 것이다. 하 지만 그것 역시 이미 나의 계산 속에 있었던 것.' 배월의 허공을 향한 얼굴에 신비한 미소가 걸렸다. '정파인들이 세 영혼부인의 앞길을 제지할 것이나, 누구도 그녀들 을 막을 수 없다. 이 순간 그녀들의 능력은 평소보다 열 배는 가 공해졌으니까.' 그의 얼굴에 걸린 신비한 미소가 더욱 짙게 깔리고, 긴 상념과 욕 정의 불길에 휩싸였던 배월의 얼굴이 천천히 숙여졌다. 무엇이 시작되는 것인가? 그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줄기 빛이 스치고 지나갈 때였 다. 꽝-! 창문을 박살내며 한 사람이 벼락처럼 뛰어들었다. 아니,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 세 사람이었다. 도홍의(桃紅衣)와 혈의(血衣)와 백의(白衣)를 걸친 세 여인. 그녀들이 들이닥침에 따라 실내는 온통 요(妖), 사(邪), 성(聖)의 세 기운이 터질 듯 팽창되었다. 그리고 그 기운 속에 천지를 온통 빛으로 던질 판이한 개성을 지 닌 극미(極美)한 아름다움의 세 미신(美神). 당연히 이 여인들은 십뇌기형겁의 세 영혼부인들이었다. 그런데 누구와 한바탕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온 듯 세 여인의 호 흡은 급박하고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역시 배월의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었다. 그녀들이 풍운백화루를 향해 오고 있는 동안 무수한 정파인들이 그녀들을 막아 선 것이고, 결국 정파무림의 참혹한 패배로 끝난 것이다. "으으음……!" "으으……!" 그녀들은 불같이 뜨거운 신음을 쉴새없이 토해 냈다. 엄청난 욕화와 욕정을 참아 내려는 안간힘으로 깨문 입술에 피가 흐르기까지 했다. 파아앗-! 배월과 그녀들의 눈빛이 일순간 불꽃을 튀겼다. "태성후, 태마후, 태요후!" 조용히 그녀들과 눈빛을 맞부딪치며 이름을 불러 가던 배월의 가 슴 속에서 욕념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욕화(慾火)는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그의 팔만사천 모공을 굉렬한 힘으로 질타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현상은 십뇌기형겁의 세 영혼부인들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들의 눈빛이 한꺼번에 어지러워지는가 싶더니 엄청난 정화를 내뿜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내뱉는 음성은 오히려 복수와 원한의 덩어리였 다. "어… 어린 마물! 헉헉… 네… 네놈을… 지금 이 순간 죽일 수 없 다니……." 원한과 분노가 철철 넘치는 태요후의 말에 이어 태마후가 이를 갈 며 소리쳤다. "으으, 우리가 이 곳에 온 것은… 요… 욕정 때문이 아니라… 사 … 살기… 위함이었다." 배월이 알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십뇌기형겁의 그 무엇이 그대들을 이토록 철 저히 사로잡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으으… 네… 놈이 감히 그분에게… 무례하다니!" 그러자 배월이 빙긋 웃으며 그녀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따지고 보면 본인은 그대들을 십뇌기형겁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은인이거늘……." 순간, 세 여인이 노화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닥쳐라!" "그분은 결코 둘이 될 수 없었던 우리들의 하늘! 그분을 죽인 네 놈이 어찌 은인이란 말이냐?" "네놈과 우리는 하늘 아래선 마주 설 수 없는 원한 서린 관계! 허 허헉……!" 하나 그녀들은 치밀어오르는 욕화를 더 이상은 참아 낼 수 없는 듯 자신의 극미한 몸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뱉어지는 불길 같은 음성, "그… 그분의 한을 씻기 위해… 네놈과 정사를 나누긴 하지만… 으으……!" 배월이 싸늘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만약 당신들과의 정사를 본인이 거절한다면?" 순간, 태요후가 전신이 터질 듯한 요기로운 웃음을 내뱉었다. "호호호호… 호호호호……!"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