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옷을 받아들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대답했지만- 정전은 무슨 정전! 내가 두꺼비집 찾아 이 넓은 집안을 뒤지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는 옆 눈을 가늘게 뜬 채 녀석의 눈치를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대꾸해 주었다.
웬만하면 처음에 좀 넘어와 주지. 내가 무슨 스파이도 아니고 도둑도 아닌데 그 구석진 전기 배선실로 기어 들어가 두꺼비집 퓨즈까지 끊어야겠느냐고!
정진형씨가 적어준 매뉴얼의 두 번째 항목.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두꺼비집 퓨즈를 끊어놓고 집안 가득 촛불을 켜 놓을 것. 이때의 메뉴는 필히 양식으로 준비하는 것에 유의하도록.』
거실 가득 반짝이는 촛불, 식탁 위 은촛대에 꽂힌 세 개의 촛불과 그 빛을 받아 은은한 빛을 발하는 하얀 접시들과 은으로 된 식기들, 역시 무드를 한껏 살리기 위해 나직하게 틀어놓은 로맨틱한 바이올린 연주곡, 후훗. 아무리 봐도 완벽해- 당신은 이제 나한테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저기, 저녁은 지금 드실 거죠?"
은은하게 촛불이 일렁이는 거실을 가로질러 가며 그렇게 회심에 찬 미소를 지었지만,
"지금 저녁이 문제야? 언제부터 정전이었어?"
"저기, 쫌 아까부터 였던 거 같은데요...."
그렇게 대답하기가 무섭게 녀석이 휙 하고 사라지더니 대뜸 인터폰을 들고 아래층 경비실을 호출하는 게 아닌가.
"여기 20층인데 불이 안 들어와서 연락 드립니다... 예, 이유는 잘 모르겠고... 그럼 지금 올려 보내주십시오."
뚝! 기세 좋게 인터폰을 내려놓은 지 정확히 1분30초만에 회색잠바를 입은 남자들 서너 명이 우르르 현관으로 들이닥친다.
"어딥니까? 불이 안 들어오는 곳이!"
"전체가 다 안 들어오신다구요?"
"저런, 그럴 리가 없는데. 김 기사! 우선 배선실로 가서 좀 살펴봐."
"저는 2층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래, 꼼꼼하게 살펴봐!"
선두에 선 풍채가 좋은 대머리 아저씨가 정신 없이 지시하더니 나란히 선 우리 둘을 보고 하하, 웃으며 호언장담을 한다.
"걱정 마십시요, 30분 안에 금방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요..... 나는 혹시나 내가 한 짓이라는 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된 나머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한 명을 따라 다용도실 안쪽의 전기 배선실까지 따라갔다.
"이런, 이런!"
두꺼비집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살펴보던 김 기사라는 사람이 혀를 차며 뒤돌아볼 때는 정말 숨이 넘어갈 정도로 두근두근! 이. 일부러 끊어놓았다는 걸 들킨 건가?!!
"집안에 쥐가 있나보죠? 퓨즈가 끊어져 있네요. 요즘 쥐들이 아주 극성이라니까요."
그러나 김 기사라는 사람은 의외로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용구상자를 열었다.
"예? 예에.. 아, 쥐요..? 하하... 저도 청소할 때 가끔 본 적이..."
천만 다행이다- 하면서 재빨리 동조를 하고 나서는데 순간 녀석은 '집안에 쥐가 있단 말야?' 외치면서 아까보다 한층 찌푸러진 얼굴로 다그치듯 묻는다.
"어디서 봤어?"
"예? 저, 저기, 그게..."
"큰 거야 작은 거야? 설마 들쥐는 아니겠지?"
있지도 않은 쥐가 들쥐인지 집쥐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안되겠어, 당장 잡아야지!"
한참동안 집요하게 나를 추궁하던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거실로 가서 아까 벗어두었던 재킷을 다시 걸쳐 입었다.
"어디 가시게요?"
"보면 몰라? 쥐덫 사러 가는 거잖아. 넌 그동안 쓸만한 미끼나 준비해 놔!"
그리고는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다.
앗, 하는 사이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나는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다가 터덜터덜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식탁 위에는 또다시 오후 내내 정성껏 마련한 저녁식사가 이미 불이 꺼진 촛불아래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줍은 듯한 와인 잔 두개.
"흐흐흐흑!"
그 광경을 보자마자 뭔가가 울컥 솟아올라서 나는 식탁에 얼굴을 묻은 채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쾅 두드려댔다. 정말이지 속 터져서 내가 못 살아- 엉엉엉.
첨벙, 첨벙-
나는 뜨거운 욕조 속에 목까지 담근 채 애써 신음을 참으며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곧 그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장미꽃잎을 띄워놓아 향이 폴폴 풍겨오는 물 속에 잠겨서도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다. 어제의 뼈아픈 실패를 생각하면 정말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지만 최후의 수단이 아직 하나 남아있으니 그냥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1, 2 단계 성공시 자연스럽게 기회가 올 테지만 그래도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서 꼭 한번은 써먹어 볼 것. 자연스럽게 네 정체성을 알릴 수 있음과 동시에 목석 같은 원형이에게 유일하게 자극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임...』
-라는 부연설명과 함께 적혀있는 방법은 바로 무 방비한 모습으로 그의 본능을 자극하라는, 이를테면 육탄공격술.
『목욕 중, 혹은 목욕 후의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가운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서 그를 맞을 것. 포인트는 바로 무 방비한 모습! 갑자기 그를 맞게 돼서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에 너의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톡 떨어져 내린다면- 아무리 저 정원형이라도 완벽한 본능의 포로, 한 마리의 야수로 돌변할 것이다!』
너무 노골적이고 위험 부담이 커서 이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지만 하는 수 있나, 이제 이것밖에는 길이 없는 것을. 어차피 쫓겨날 각오하고 시작한 일 후회나 남지 않게 끝까지 해보는 거다!!
"으윽... 무, 물이 너무 뜨거워..."
하루종일 고민을 하다가 그가 올 시간이 임박해서야 결심을 하고 급한 김에 그냥 받았더니 물 온도 조절에 실패해버렸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것은 물이 너무 뜨거워서인지 얼굴이며 몸이 금방 상기되고 욕실 안도 금방 습기가 차서 일부러 물로 적시지 않아도 머리칼이 이마에 척척 달라붙는다. 너무 다 적시면 추하게 가라 앉아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머리칼을 잡아 끝에만 살짝 물을 끼얹어 주고있는데 드디어 딩동- 하고 기다리던 벨소리가 들렸다.
"아싸, 왔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치며 욕조 안에서 벌떡 일어나 미리 준비해 두었던 얇은 타월지로 된 짧은 가운(오늘을 위해 정진형씨가 직접 건네주고 간 옷이다.)을 부랴부랴 걸쳐 입고는 방을 뛰쳐나가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도 참을성 없는 벨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 가요!"
아, 참, 참! 경황이 없어 본능적으로 타월을 꽉 잡아맸던 끈을 풀어 느슨하게, 상체를 숙이면 안이 슬쩍 들여다보일 정도로만 다시 고쳐 묶는다.
그래, 원래 다 보여주는 것보다 살짝 가리는 게 더 자극적인 법이다. 만화나 영화에서도 남장여자는 항상 뜻하지 않게 신체의 일부가 노출되는 바람에 여자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던가. 가슴아래까지 다 노출해 줄 필요는 없잖아? 그냥 내가 여자라는 것만 눈치챌 정도로 살짝 보이면서 그가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왔을 때 머리에서 물방울이 톡, 떨어지면-
우당탕탕탕-
"엄마얏!!!!"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시야가 거꾸로 뒤집혀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깜박깜박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대체 내가 왜 층계참에 거꾸로 누워있게 된 걸까...?
"무슨 일이야? 너 왜 그래?!"
더 이상 기다리지 못했는지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온 녀석이 내 꼴을 보자마자 층계로 달려와 버럭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깐 뭐야, 당신 카드 키 갖고 다녔잖아? 근데 왜 매번 벨을 눌러대면서 나한테 문 열어주게 만들었지...? 정신이 날아갔는지 층계 맨 아래층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상황에서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그는 다시 다급하게 묻는다.
"계단에서 미끄러졌어?"
심한 충격 때문인지 나는 대답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겨우 눈동자만 움직여 보인다.
"일어나. 일어날 수 있겠어?"
녀석이 내 머리와 등에 손을 넣어 일으켜주는데 순간 등허리가 욱씬 아파 와서 '아이구!'하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이런, 아야! 도 아니고 아흑! 도 아닌 아이구! 가 뭐야, 아줌마처럼.... 흑흑.
"머리 부딪쳤어? 야, 이거 몇 개로 보여? 응?!"
손가락을 쫙 피면 다섯 개지 몇 개야.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아?! 통증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녀석의 얼굴이 왠지 창백해 보여서 다섯 개요- 하고 정확하게 대답해 주었다. 내 대답을 듣자 그제야 안심을 했는지 작게 숨을 돌린 그는 나를 번쩍 들어서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아 주었다.
이게 바로 '공주님 안기'라는 거구나. 추한 꼴로 넘어지긴 했지만, 등도 굉장히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제법 잡혔잖아?
그 와중에도 기대로 잔뜩 부푼 나는 그의 손이 가운의 앞섶으로 다다오자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기대로 바들바들 떨리는 눈꺼풀을 살포시 감았다.
드. 드디어 정원형이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겠구나. 모. 몸은 잘 씻어뒀으니 괜찮겠지만.... 그. 그래도 한꺼번에 확 벌리면 곤란한데..!! 아. 아무래도 가슴 아래는 막아야겠어!!!
생각하면서 눈을 번쩍 뜨는 순간, 엉뚱하게도 녀석의 손에는 하얀 튜브모양의 연고가 들려있는 것이 아닌가.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목욕하다 말고 뛰어내려왔지! 계단이 온통 물투성이인데 그런데서 뛰다가 잘못해서 척추라도 다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너 바보야?"
녀석은 목 부분만 조금 젖혀놓은 사이로 투명한 젤 같은 연고를 짜낸 다음 양손으로 내 목덜미를 꾹꾹 마사지해 가면서 약을 발라주며 나무랐다. 아마도 아까 넘어지면서 목덜미에 큰 멍이 들었던 모양이다.
"너 꼼짝 말고 누워있어! 목 움직이지 말고 고개 위로 약간 쳐들고 자!"
그 말만 남기고 녀석은 갈아입을 옷과 노트북을 챙긴 채 성질을 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은 것은 축축한 침대 시트 위에 억울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뻣뻣이 쳐든 자세로 누워있는 나.
"으흐흐흐흐흑-"
세상에 재수가 없어도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을까. 나란 인간은 평생 이렇게 재수 하나 없이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 버릴지도 몰라, 엉엉엉엉- 최후의 수단까지도 어처구니없이 실패해 버리고 말자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나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밤새 울며 몸부림치고 말았다.
(17)
"...그래서 결국 몽땅 다 실패했단 말이지...."
어제를 마지막으로 최후의 수단까지 실패과정을 낱낱이 털어놓으니 그의 형 정진형씨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이제 정말 끝이로구나.' 생각하자 기분이 축 처져서 입술을 깨무는데 달칵,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 영업전이라서 마땅한 안주 거리가 없네요. 일단 들고 계시면 계속 완성해서 올리겠습니다."
아직 영업이 시작되기 전 임에도 기꺼이 룸을 하나 통째로 내 준 욱이 형이 양주 두어 병과 과일 안주 한 접시를 내오며 겸연쩍게 웃었다.
"어머, 아니예요. 전 원래 과일안주밖에 안 먹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언제 심각했냐는 듯 정진형씨가 살짝 미소 띈 얼굴로 상냥하게 대답하자 욱이 형은 귀까지 발갛게 물들어 들뜬 어조로 대답한다.
"그러세요? 그래서 이렇게 날씬하고 미인이셨군요! 아까 가게 들어오시는데 웬 수퍼 모델이 들어오나 하면서 깜짝 놀랬었습니다, 하하."
아, 그랬구나!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나도 저 정진형씨가 설마 남자인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었으니 욱이 형이 반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게 이해가 간다. 솔직히 어지간한 여자보다 훨씬 미인이잖아.
"칭찬이 너무 과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참, 괜찮으시면 제가 한잔 드려도 될까요?"
"아, 아 이거 정말 영광입니다~"
아주 난리났네, 난리났어!
정진형씨가 익숙한 솜씨로 병을 따서 잔에 채워 내밀자 욱이 형이 얼른 받아 한 입에 털어 넣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잔을 채워 두 손으로 공손하게 그에게 내밀었다. 그 역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숨에 잔을 비우고는 다시 욱이 형의 잔을 채워주고... 그러게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얼굴을 안주 삼아 잔을 비우는 통에 앗, 하는 사이에 벌써 가져온 양주가 반병이나 비워져있었다.
"두 분다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큰일 나겠어요!"
"걱정 마, 이 정도 가지고는 안 취하니까. 술장사는 그냥 하는 줄 아냐?"
"그럼. 내가 이래봬도 혼자서 양주 세 병은 기본이라니깐~"
하도 걱정이 돼서 말려봤지만 둘 다 자신의 주량을 뽐내듯이 대답하더니 '자, 너도 얼른 한 잔 마셔~'하면서 내게도 가득 채운 잔을 내밀었다.
"저. 저는 술 잘 못 마셔요.."
손사래를 치면서 도와달라는 듯 욱이 형의 얼굴을 보는데 오히려 형이 더 마시라며 재촉을 해온다. 평소에는 술이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라며 일을 시켜도 절대 못 마시게 막고 자신도 영업하는 날은 절대 입에도 대지 않던 형이었는데- 오늘은 아예 이성이 날아가 버렸나?
"정신차려, 오늘 영업 안 할거야?"
"괜찮아, 괜찮아, 하루 쉬지 뭐. 그거나 얼른 비우고 내 잔 좀 채워 줘봐."
"그래, 때로는 술이 약이 될 수도 있는 거야. 오늘 하루는 실컷 마시고 스트레스 좀 풀어 보자고~"
두 사람의 계속되는 권유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한 나는 잔을 받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밥 안 해 놓고 나와서 녀석이 들어오기 전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며칠 동안 요리를 하네 어쩌네 사다놓은 음식 몽땅 다 써서 냉장고에도 먹을 게 하나도 없을 덴데..... 걱정하다가 문득 에라, 될 대로 되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이판사판이라구. 삼일 동안 나 물 먹인 녀석이 뭐 이쁘다고 일일이 거둬 먹여! 한끼쯤 굶는다고 죽기야 하겠어? 아니다, 그 녀석은 좀 굶어봐야 정신 차릴 거야!! 이틀 연짱을 하루종일 힘들게 만들어바쳤던 음식들을 그냥 버리게 만들었던 원한이 떠오르자 나는 잔을 든 손을 꼭 움켜쥐고는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코를 막고 한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크으...!!!"
코를 막았는데도 입안에 퍼지는 쓴맛과 독한 향에 얼굴을 찡그리려니까 욱이 형이 우유가 가득 담긴 잔을 마시라도 내민다.
"마실 때마다 우유도 한 모금씩 마셔둬, 안주도 좀 집어먹고. 술만 마시면 속 다 버린다, 너."
"자, 아~ 해봐. 아~"
이번에는 정진형씨가 오렌지를 까서 포크에 찍어 내 앞에 내밀면서 상냥하게 권하자 나는 왠지 코끝이 찡해져와서 순순히 입을 벌리면서 헤헤, 소리내어 웃어 보였다.
"오오, 필씅 꼬레아아~ 오오, 필씅 꼬레아아~ 오오오오레, 오레오레오레!!"
"야아, 너 노래 진짜 잘한다, 얘! 그거 월드컵 주제가 맞지?!"
분위기에 휩쓸려 목청껏 노래를 뽑아내니까 정진형씨가 까르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준다.
"한 곡조 뽑았으니 목이 칼칼하지? 자아, 한 잔 시원하게 비우자구!"
이번에는 욱이 형이 내민 잔에 쨍그랑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 잔을 부딪친 다음 나는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단숨에 잔을 비워냈다.
"캬아~"
"어어, 취한다..."
"웨이러 미닛! 난 잠깐 실례~"
술에 취해 잔뜩 돌아간 혀로 잠깐! 외치더니 정진형씨가 휘청휘청 방문을 나섰다.
쿠당탕-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욱이 형이 벌써 벌떡 일어나 '괜찮아요? 다친 데 없으세요?' 하면서 룸을 뛰어나간다.
뭐야, 정진형씨가 밖에서 넘어져 버린거야? 생각이 들자 걱정스러워져서 나도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을 힘껏 밀어 열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저벅저벅하는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싸늘한 한기와 함께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진다.
응? 왜 이러지?
"형, 보일러 고장났어? 갑자기 왜 이렇게 추워어?"
그러나 형은 아무 대답 없이 입을 반쯤 벌린 채 내 등뒤만 응시하고 있을 뿐. 유령이라도 나타난 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나는 휙- 하고 그 자리에서 덜렁 들려 짐짝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척, 하니 걸쳐졌다.
"꺄아아아~ 너 누구야아..."
아무거나 손이 닿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발버둥치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싸늘하게 나를 위협해온다.
"시끄러. 바닥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입 다물고 있어."
어쭈우, 이것 봐라아?!
"던져, 던지면 될 거 아냐! 그럼 누가 무서워할 줄 알어?"
어깨에 걸쳐진 채 마구 머리를 흔들면서 반항하자 욱이 형이 기겁을 하며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았다.
"어이, 김승연. 까불지 말고 데려가 줄 때 얌전히 따라가라구!"
데려가 주긴 뭘 데려가 줘? 이 인간이 누군 줄 알고 함부로 막 따라가....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 싸가지 없는 말투하며 이 싸한 향수냄새하며, 오라, 네 놈은 정원형이렷다?!
"오냐. 너 잘 만났다. 야! 너 이거 안 내려놔? 내려놔! 당장 내려놔!"
고래고래 소릴 질러대며 버둥거렸지만 녀석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나를 어깨에 걸치고는 성큼성큼 홀 안을 가로질러 나왔다.
"안 내려놓는다 이거지? 야아, 니가 그렇게 잘났어? 엉?!”
주먹으로 넓은 등판을 쾅쾅 때리고 짖어대도 요지부동. 차안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뒷 자석에 던져진 채로 운전하는 녀석의 시트 뒤를 발로 차고 반항해도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를 몰더니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자마자 또 나를 뒷 자석에서 끌어내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어깨 위에 둘러멨다.
"어이, 똑바로 안 해? 그러나 나 떨어지면 어떡할꺼야아..."
어찌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칼칼하게 아파 와서 한 풀 꺾여 있는데 그 새 벌써 집에 도착한 녀석은 쾅,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문을 열자마자 기세 좋게 거실로 들어가 나를 소파위로 집어 던지듯 내동댕이쳤다.
이씨.. 여자를 이렇게 세게 집어 던지다니, 이 매너도 드럽게 없는 놈!
꿈틀거리면서 몸을 확 틀어 소파 위에 길게 드러누운 자세로 위를 보았더니 화를 억누르려는 듯 팔짱을 낀 무시무시한 그림자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쳇, 그래봤자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물 가져와!"
버럭 소리치자 잠시 허점을 찔린 듯 뭐? 하면서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물 가져오라고, 물! 아주 찬 걸로! 아, 얼음 팍팍 넣어서 가져와라!"
"너 정말...!"
"너? 너라니, 너라니! 야. 니 형한테 물어보니깐 내가 너보다 지그만치 6개월이나 먼저 태어났드라? 너보다 6개월이나 연상이라고! 그런데 어디다가 대고 함부로 반말이야? 엉?!"
"......"
"물 가져와! 빨리 안 가져와?"
"갖다주면 될 거 아냐!"
마침내 폭발한 듯 녀석도 버럭 목소리를 높여온다. 그러나 그런 걸로 기가 죽기에는 나는 너무 취해서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래! 가서 후딱 가져오너라, 아가."
쨍그랑 하고 크리스털 잔에 얼음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만족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등뒤에 푹신하게 와 닿는 고급 수입 소파의 촉감이 오늘따라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마셔."
어느새 다가왔는지 녀석이 얼음이 찰랑거리는 차가운 물 잔을 내 입가에 가져다 대준다. 찬물이 입술에 닿는 순간 나는 허기진 아이처럼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물 잔을 꼭 잡고 단숨에 들이마셨다. 몰랐었는데 꽤나 갈증이 났었던 것 같다.
"고맙습니다아."
어릴 때부터 콩 한쪽이라도 받으면 꼭 인사를 하라고 교육받은 탓에 몸에 밴 습관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는 하, 하고 기가 막힌 듯 웃는다.
뭐야, 인사를 해줘도 불만이야?
인상을 쓰며 눈을 치뜨자 녀석은 내 손에서 물 잔을 빼내 테이블 위에 놓고 명령조로 말했다.
"오늘은 일단 가서 자. 얘기는 내일하자."
"지금 해두 돼. 나 하나도 안 취해써."
고집스럽게 올려다보며 얘기하자 이마에 손을 짚고 심호흡을 한 번 한다.
뭔가 심상치 않은 제스추어.
"가서 자. 안 잘래?"
"싫어! 나 안 취했다니깐!"
"똑바로 걷지도 못하면서 니가 안 취했다고?!!"
끝까지 우기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른다.
쳇, 그러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지가 내가 취했는지 어떻게 알어? 언제 나한테 관심이나 있었어?"
"뭐?"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말야, 너도 인생 그렇게 싸가지 없이 살면 안 돼!"
화르륵-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놈의 얼굴이 정말 말 그대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술에 취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지금 아니면 이런 말 언제 또 해보겠냐고.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그렇게 싸. 가. 지. 없. 이. 살면 안 된다고 그랬다, 왜!"
술기운의 힘을 빌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나는 눈까지 희번떡하게 치켜 뜨고 소리질렀다.
"그래, 내가 어디가 그렇게 싸가지가 없는데..?"
"사람이 말야 들어오면 들어온다, 나가면 나간다, 말을 하고 다녀야 될 거 아냐! 핸드폰은 뭐 뒀다 국 끓여먹을 꺼야?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전화번호 여 섯 자리를 왜 못 눌러서 사람 목 빼고 기다리게 만들어?!"
"그렇게 기다려지면 니가 먼저 전화하면 되잖아!"
"뭐야, 너 그래서 지금 니가 잘했다는 거야?!"
으드드득- 대답 대신 어금니 가는 소리.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려는 듯 녀석은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한참 만에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잘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그리고는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휙 돌린다.
그래 상대하기도 싫다 이거지? 그래, 나도 이제 힘들어.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혼자서 짝사랑하는 거 이제 지쳤어. 그만두고 싶단 말야!
"흐윽... 흐으윽..."
불현듯 눈물이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해서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자 나를 지나쳐 복도로 가던 녀석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뭐야, 너 왜 울어?"
"나, 나 말이야.. 흐윽...."
"그래. 네가 뭐?"
그가 내 쪽을 돌아본 순간 나는 비틀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내딛다가 그만 발이 걸려 크게 휘청이며 그의 품안으로 쓰러져 버렸다. 팔이 닿은 순간, 밀쳐버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녀석은 내 팔을 꽉 움켜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겨준다.
"괜찮아?"
"괜찮아, 난 다 이해해. 괜찮아."
"뭐?"
"흐윽, 나. 나 있잖아..."
나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기세로 녀석의 셔츠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나, 니가 아무리 싸가지 없고 못되고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내가 꼭 그렇게 해줄게.."
"...뭐?"
"난 자신 있어. 니가 냉혈한이라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도 다 이해해 줄 수 있어! 난 찮다구! 그러니까.. 그러니까..... 흐흑......."
좋으니까, 당신이 정말 너무너무 좋으니까. 당신이 아무리 차갑고 냉정하고 나한테 무관심하더라도 난 그런 당신까지도 다 이해해주고 감싸줄 수 있을 만큼 좋아하니까......
차마 끝까지 입에 내지 못하는 고백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의 값비싼 실크셔츠 앞판을 온통 눈물로 적셔대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거실이 떠나가라 울어댄다.
".......미치겠네."
몇 번 나를 떼어내려다 내가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자 포기했는지 녀석은 나를 번쩍 어깨위로 들어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는 어디로 옮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지칠 만큼 울고 난 뒤라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기운이 없어 나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끅끅거렸다.
"흐윽, 나, 나 잘 하께.. 나 원래 밥도 잘 하구, 청소두, 빨래두 잘한단 말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아...."
우는 사이사이 눈물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린 말을 그가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접착제라도 붙은 듯 죽기살기로 녀석의 어깨에 꼭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혀지는 느낌이 들었어도 필사적으로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매달렸다. 그 서슬에 녀석의 셔츠 앞판이 투둑, 뜯겨져 나갔지만 울기에 바빠 그걸 깨달을 정신도 하나 없었다.
"......대체 내가 왜 하필이면 너를....."
한 시간이 넘게 그렇게 씨름을 했을까, 마침내 손에 힘이 다 빠져버려 축 늘어진 나를 간신히 침대에 눕히며 녀석이 화가 섞인 말투로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18)
다음날 아침 녀석은 극도로 저기압이었다.
이른 새벽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 비몽사몽간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여섯시를 넘은 시각이라 깜짝 놀라 후닥닥 씻고 나와보니 다행히 그는 여느 때처럼 완벽한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뒷모습에서 왜 그렇게 살기가 느껴지던지.
식탁에 앉아 밥을 깨작깨작 씹으면서도 왠지 모를 위화감에 나는 계속 맞은편에 앉은 놈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때는 차갑긴 해도 살벌하진 않았는데 오늘따라 눈매가 굉장히 사나워 보이는 게...
혹시 아침메뉴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수저로 국을 뒤적이다 말고 나는 눈어림으로 식탁에 오른 반찬의 가짓수를 대충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슬쩍 녀석의 밥그릇을 넘겨다보니 다른 때 같으면 다 먹고 일어설 시간인데도 채 반도 비워져 있질 않다.
이상하네..... 밥그릇 한 번 쳐다보고 그의 얼굴 한 번 훔쳐보고 국그릇 한 번 쳐다보고 그의 얼굴 훔쳐보고 하는 과정을 서 너 번쯤 반복하다가 나는 문득 어젯밤 일이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욱이 형네 가게에 가서 정진형씨랑 다 같이 마시기 시작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설마, 내가 어제 술 취해서 녀석에게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는 여자다'라는 고백을 했다거나......
'고백'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등허리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물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아무리 답답하다해도 당장에 쫓겨날 그런 폭탄고백을 했을 리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한 손으로 억누르며 나는 심호흡과 함께 할 수 있는 한 자세히 어젯밤 일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게- 난생 처음으로 필름이 끊긴다는 경험을 해본 것이다.
대체 내가 언제 어떻게 취했는지도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어떻게 기억 하겠냐구. 일어나 보니까 내 방 침대 위에 얌전하게 드러누워 있던데. 이걸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애를 태우고 있는데 별안간 탁, 하고 수저 놓는 소리와 함께 놈이 기세 좋게 식탁에서 일어섰다. 아, 이제 나가는 건가?
"안녕히 다녀오세요."
뭔가 지은 죄가 있는 것 같아 두근두근하며 현관에 서서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더니 녀석이 나가려다 말고 도어를 잡은 채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선다.
"...너 말야."
"예, 예에? 왜. 왜요..?"
저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바싹 쫄아 바지자락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채 현관 옆 신발장에 붙어 섰다.
"평소에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분하다는 듯 잇새로 내뱉는 어조였다.
뭐, 뭐라구요?!
그러나 내가 미처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녀석은 쾅!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나?
덩달아 인상을 쓰며 허리에 손을 짚고 거실로 돌아오다 나는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보고 그래! 하고 무릎을 쳤다. 어제 욱이 형네서 마셨으니까 형한테 전화해보면 되겠다!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수화기를 집어 드는데 때마침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승연이니?]
"어, 형!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전화하려고 그랬는데 잘됐다."
[어.. 그래? 그 정원형씨는 학교 갔어?]
"응, 방금 갔어. 그보다 참, 나 어제 무슨 일 없었어?"
[어어? 무슨 일?]
그 말에 왠지 형이 움찔,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급한 마음에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침에 깨보니까 머리는 아픈데 어젯밤 일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거든."
[그.. 정원형이란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해...?]
뭐, 알 수 없는 말을 한 마디 하긴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일 줄 알아야지.
"글세.. 그보다 나 집에는 누가 데려다 준거야? 정진형씨야, 형이야?"
[어, 어? 그. 그 사람이 데려다 줬는데....]
욱이 형의 말에 나는 안도한 얼굴로 테이블 옆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정진형씨가 데려다 줬구나? 참, 어제 나 데려다주고 그 사람 어디로 간 거야? 혹시 알아?"
[아. 아니, 나도 잘... 참, 승연아!]
"응, 왜?"
[미안한데 나 지금 좀 바쁘거든? 나중에..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래. 잘 있어, 형."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그럼 그렇지, 하면서 식당으로 가 녀석이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음식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별 일도 없었는데 괜히 분위기잡고 난리야! 정말 속을 알 수가 없는 놈이라니깐. 오늘 기분이 나쁜 건 확실해 보이는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도통 말을 하지를 않으니 내가 뭘 알 수가 있어야지. 포커페이스도 그런 포커페이스가 없다니까.
"하긴 그게 또 매력이긴 하지만..."
저도 모르게 흐믓하게 중얼거리다가 나는 앗,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술기운이 남았나, 왜 헛소리가 튀어나온담! 나는 뜨악한 얼굴을 하고 남은 설거지 거리를 세척기에 담아 익숙하게 작동시켰다.
...그나저나 녀석이 계속 기분 나쁘면 내가 더 불편해지는데.... 간만에 특식을 좀 해줘볼까?
지난번에 실컷 만들어 갖다 바쳤지만 결국 녀석은 입에도 못 대보고 다 버린 터라 내 솜씨를 못 알린 것도 아쉽고, 또 아침을 깨작대며 남긴 것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 꼭 녀석하고 분위기를 잡자는 게 아니라 그냥 기분전환용이라 생각하자구!"
아무도 없는 거실에다 대고 변명하는 것처럼 소리내어 말한 나는 지난번에 녹화해 둔 요리 테이프를 찾기 위해 장식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역시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갈비찜이 유독 괜찮게 된단 말이야~"
온 집안에 진동하는 고소한 냄새에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무쳐놓은 나물의 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거실에서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려댔다.
"여보세요?"
[여기 한남대교야.]
그러더니 전화가 뚝. 뭐야, 장난전화야? 하여튼 요즘 할 일 없는 사람들 많다니까.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식당으로 가서 나물들을 각각 접시에 소복하게 담아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강남 타워레코드 앞이야.]
달려가 숨을 헐떡대며 받았더니 그리고는 또 뚝.
"뭐야, 대체!!"
바빠 죽겠는데 누가 이렇게 자꾸 장난전화를 하는 거야? 한번만 더 그러기만 해봐!!
전화기에 대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끊기가 무섭게 다시 울려댄다.
"여보세요!!"
[지금 신사 사거리 지났어.]
"아, 당신 누구야?!"
이미 끊어져서 뚜우, 뚜우, 거리는 데가 대고 소리치다 말고 나는 문득 이 목소리가 어쩐지 굉장히 귀에 익은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 인간이 미쳤나? 왜 5분마다 전화를 하고 난리야?!
눈을 가늘게 뜨고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는데 또 벨소리.
"여보세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받았더니, '문 열어. 집 앞이야.' 라는 녀석의 사나운 목소리가 들린다.
뭐야, 니가 왜 그렇게 사납게 말해?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날듯이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다녀오셨어요?"
괜히 쫄아서 허둥지둥 인사를 하자 흘깃 보더니 거실 테이블 위에 차 키를 집어던진다. 금속제의 열쇠가 유리에 부딪치는 소리가 거실 안에 날카롭게 울렸다. 살벌한 녀석의 태도에 나는 다시 한번 알아서 기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피해 슬슬 거실로 뒷걸음질쳤다.
"식사하세요, 상 다 차려놨어요."
이럴 땐 얼른 피하는 게 상책이야- 일단 배부터 채워주고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으면 알짱거려야지. 그가 한마디 말도 없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거실로 피신했다.
여느 때 같으면 밥 먹는 녀석의 옆에서 물도 따라주고 국도 나르며 비위를 맞춰주겠지만 오늘은 그의 분위기가 음산한 게 까닥하다간 불벼락 맞기 쉽상이겠다.
참, 생각난 김에 거실 커튼이나 뜯어 놓을까? 저번 주부터 세탁소에 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정진형씨가 등장하는 바람에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던 게 생각나 나는 잽싸게 식당으로 가 의자 하나를 끌어왔다.
"으이차!"
거실 테라스로 통하는 창 앞에서 의자를 끌어다 놓고 발돋움을 한 채 커튼을 뜯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내 키의 두 배는 넘음 직한 통 유리창 위에 붙은 커튼엔 아슬아슬하게 손만 닿을 뿐 도무지 풀어낼 수가 없다.
아우. 창이 정말 왜 이렇게 높은 거야? 몇 번이나 버둥거리다 간신히 제일 가장자리 매듭에 손끝이 닿아 나는 세운 발끝에 힘을 주어 스물 몇 개 짜리 매듭을 차례로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에고... 이제 하나만 더..."
한 손으로는 커튼을 움켜쥐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 팔을 뻗고 있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문소리가 들렸다.
어, 어.....
한 손엔 커튼을 한 손엔 매듭을 잡고 내려다보자 금방 샤워를 마쳤는지 녀석이 젖은 머리칼을 하고 똑바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맨날 올려다 보다 내려다보니 기분이 묘하네.
"잠깐 내려와 봐."
언제나처럼 변함 없는 명령조.
"왜요?"
"말할게 있어."
무. 무슨 얘길 하려고... 제법 심각한 어조에 어깨를 움츠리며 반항해봤지만,
"저기, 이거 다 하고 내려가면 안 되요?"
"안 돼. 중요한 얘기야."
단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는데 그게 더 무섭다.
"저기, 그래도 이거 금방 끝나는데..."
"내려오라면 내려오는 거지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녀석이 버럭 소리치자 그렇지 않아도 얼어있던 나는 뛸 듯이 놀라 그 탓에 균형을 잃고 허공에서 바닥으로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졌다.
"아아악...."
"이봐, 괜찮아?!"
그러게 사람 놀래게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냐고!
나는 딱딱한 거실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등을 새우처럼 구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가 간신히 팔다리의 힘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별로 높은 곳이 아니라 저번에 계단에서 굴렀을 때처럼 심하게 아픈 데는 없는 것 같다.
"괘. 괜찮은 거 같애요..."
떨어질 때의 쇼크로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펴며 눈을 뜨려다 시야에 가득 차는 깎아놓은 듯한 얼굴에 헉, 하면서 반사적으로 등을 바닥에 대고 납작 달라붙었다.
"어. 어... 저. 저기요...."
뭐. 뭐야! 대체 얼굴을 왜 이렇게 바싹 들이대고 있는 거야?!
믿을 수 없겠지만, 정말로, 내 얼굴에서 불과 3c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다. 어찌나 가깝던지 그가 깊이 잠들었을 때에나 볼 수 있던- 녀석의 촘촘하고 새까만 속눈썹이 볼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도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다.
조. 조금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입술이 닿을지도 모르는데... 어떡해!!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심장이 입을 통해 밖으로 튀어나와 버릴 것처럼 요동을 치고, 호흡이 가빠지고, 피가 전부 머리로 몰려서, 나는 그의 건장한 몸 아래 깔리다시피 누워서 흡사 급속 냉동으로 얼린 금붕어처럼 뻣뻣하게 굳어진 채 숨만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 이 시츄에이션은 만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자주 벌어지는- 그러니까 키스신으로 이어지곤 하는 그런 장면인데, 서. 설마 녀석이 나에게.... 눈동자만 굴리며 부지런히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내 쪽으로 조금 더 고개를 숙여온다.
훅-
싸한 시트러스 향이 풍기는 숨결이 내 입술 위에 끼쳐 왔을 때, 엉뚱하게도 그 순간에도 이마에 느껴지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의 감촉이 굉장히 부드러웠다고 생각했다면 정말 내가 미친 걸까. 하지만 촉각이 온통 그의 그린 듯 선명한 입술에만 쏠려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애서 생각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저. 저기, 아까 말할 게 있다고..."
내 눈동자가 뚫어져 버릴 만큼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주시하는 그의 눈동자에 사로잡히기라도 한듯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다가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용기를 그러모아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
거의 닿을 듯 말 듯 한 내 입술 위에 따듯하게 젖은 숨결을 토해내면서 의미심장하게 속삭이고는 바닥을 짚고 있던 한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 속으로 찔러 넣으며 손바닥 전체로 감싸듯이 받쳐든다.
나. 난 몰라아아-
감당할 수 없는 흥분에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 나는 그와 마룻바닥 위에 엉키듯이 누워있다는 사실보다는 지금 막 내 입술을 포옥 덮고있는 그의 녹아버릴 듯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더 흥분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입술이 벌어져 고른 치아로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물었을 때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 버릴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드디어 왕자는 공주님을 알아본 거라구! 자고로 왕자님이 키스를 해 버리면 모든 것은 디 엔드- 그것도 해피엔드 아니겠어?! 이제 '이윽고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만 남은 거라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순간의 나는 잊고 있었다,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얼마나 운이 없었는지를.
그러니까, 내가 막 입술을 벌려 조금은 난폭하게 헤치고 들어온 그의 뜨겁게 젖은 혀를 수줍게 맞아들이려는 순간이었다.
(19)
쾅쾅쾅쾅! 쾅쾅쾅쾅!
<야, 문 열어! 너 그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왔어!!>
누군가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발로 현관문을 차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뭐야, 이건?"
그 탓에 나를 누르고 있던 그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어 내 몸 위에서 일어서자 '이런 시간에 대체 누구야!'하는 원망이 왈칵 솟아 나 역시 짜증스럽게 현관을 째려봤다.
<이 문 안 열어, 양승연?!! 너 없는 척 해도 소용없어! 끌어내기 전에 어서 나오지 못해?!!>
헉! 야. 양승연? 게다가 이 목소리는 설마....!!!
굉장히 오랜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에 익은 그 걸걸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가능성이 떠올라 전신의 피가 싹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아닌데,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 년, 안 나와? 진짜 안 나온다 이거지! 양승연, 이 찢어 죽일 년아!!!!!>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도 바깥에서는 계속 고함을 지르며 쾅쾅 문짝을 부수기라도 하려는 듯 막무가내로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아아, 저 욕설을 들으니 확실하다. 무식하고 지긋지긋한 내 호적상의 부친 양영준이 들이닥친 것이다!!!
"어떤 자식이야?"
완전히 패닉에 빠져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으려니까 아니나다를까 원형이 얼굴을 팍 찌푸리면서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아. 아. 안돼에에에에에에에에-!!!!!!
그러나 슬라이딩까지 해가며 뛰어든 보람도 없이 녀석이 현관으로 가 벌컥 문을 열더니 그에 맞먹는 성량으로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너 뭔데 남의 집에서 시끄럽게 야단이야?!"
으흐흐흐흑, 이제 다 틀렸어......
"어쭈? 네놈이 바로 내 딸년 기둥서방인 게로구나? 니 놈이랑 계산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승영이 이 년부터 나오라 그래! 어딨어, 이 잡년?!!"
어. 엄마야앗!!!!!
기억에 남아있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살벌하고 기세 등등한 형상을 한 양아버지가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선 순간 나는 충격과 공포로 그 자리에서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어버렸다.
"뭐? 너 지금 뭐라 그랬어?!"
그러나 살벌하기는 이쪽도 마찬가지. 씩씩거리며 코뿔소 같은 콧김을 내뿜는 양아버지도 살벌하지만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위압적인 자세로 현관에 서있는 원형도 이제껏 보지 못했던 살기 등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살해한다는 게 저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막무가내인 양아버지도 그 기세에 주눅이 들었는지 눈에 보이게 움찔, 했다가 다음순간 그의 뒤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명분이 생겼다는 듯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오라, 니년이 거기 숨어있었던 게로구나! 이 천하에 몹쓸 년! 니 까짓게 도망가면 나한테 안 잡힐 줄 알았드냐? 이 년아, 끌어내기 전에 당장 거기서 안 나와?!"
치뜬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벌겋게 핏발이 선 데다 역시 벌건 목에 힘줄이 불퉁불퉁 나온 모습을 보니- 너. 너무너무 무섭다. 분명 내가 손에 잡히자마자 머리채부터 휘어잡고 발로 허리를 밟으려고 할텐데....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자 그걸 보고 화가 치밀었는지 원형이 양아버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대뜸 막아선다.
"뭐야 당신! 끌어내기 전에 당장 내 집에서 안 나가?"
"어린 새끼가 싸가지 없기는! 아, 내 딸년 내가 찾아가겠다는데 니 놈이 무슨 상관이냐?!"
조금 아까 까지는 기가 죽어있더니 양아버지도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어진 모양인지 대놓고 행패를 부릴 기세였다. 허나 성질이 불같기로는 그도 결코 만만치 않다.
"딸? 여긴 당신이 찾는 사람 없어, 쟨 남자야. 번지수 잘 못 찾아왔으니 끌어내기 전에 당장 사라져!"
"남자? 이것들이 어디서 돼먹지도 않은 수작이야?! 내가 저년을 몇 살 때부터 키웠는데, 남자아? 아, 씨바, 너 같은 또라이 새끼랑 더는 말 못 섞겠다! 잔말말고 양승연 너 이년 당장 나와!"
"시, 싫어! 못 가, 나 죽어도 안가!!"
나는 무식하게 구둣발로 거실로 들이 닥쳐서 막무가내로 머리채를 휘어잡으려 드는 양아버지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소파 팔걸이를 붙잡고 버텼다.
억지로 끌고 나가려다 내가 필사적으로 반항을 하는 데다가 원형에게까지 막혀 뜻대로 되지 않자, 천성이 무지막지한 양아버지는 핏발이 선 눈을 희번덕대며 주위를 둘러보다 급기야는 엄청나게 값비싸 보이는 크리스털 장식품을 머리위로 집어 들고 말았다.
미. 미. 미쳤어! 그게 대체 얼마짜리일 줄 알고 겁도 없이 깨겠다는 거야?!!
경악한 나와는 달리 원형은 흥, 하고 코웃음치더니 팔짱을 끼고 그 사이 냉정을 되찾은 듯 명백히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7억 5천만원짜리니까 변상할 자신 있으면 깨 보시지."
"뭐. 뭐여?! 씨바, 이 새끼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는지 그렇지 않아도 벌건 얼굴이 한층 더 시뻘개진 양아버지가 치켜올린 장식품을 확 내던지려는 찰나, '안 돼!' 소리치면서 나는 바람처럼 달려가 그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안 돼, 그거 놔요! 깨지면 큰일난단 말야!!"
당신이 그거 깨고 나면 우리 엄마만 또 뼈꼴 빠지게 고생해서 갚아야하잖아. 그거 우리 엄마랑 내가 둘이서 평생 죽도록 벌어도 다 못 갚는 액수란 말이야!!!
"이 쌍년이, 어딜 붙잡아?!"
그러나 매달린 보람도 없이 다음순간 나는 양아버지가 휘두른 팔에 맞아 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아으으으..."
10년이 넘도록 맞고 살았는데도 그새 잊고 있었는지 오랜만에 맞으니 대번에 눈물이 펑펑 쏟아질 만큼 아프다.
퍽!!!!!!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시무시한 파열음과 함께 거실과 식당사이의 강화유리로 된 파티션이 박살이 나며 양아버지가 그 위로 뒹군 것은. 세상에, 얼마나 세게 쳤으면 그 두꺼운 강화유리가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게 아닌가!
"두고 보려고 했는데 안되겠어. 당신이 아직 무서운 꼴을 못 본 모양인데 어디다 감히 손을 대? 오늘이 제삿날인 줄이나 알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형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쓰러진 양아버지의 멱살을 붙잡아 거실로 끌어내 무차별로 두들겨 패기 시작하는데- 난 정말 태어나서 그렇게 끔찍한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미 최초의 일격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 쓰러져 있는 양아버지를 집어 던져가며 퍽퍽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대는데, 저러다 죽이지나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일어나, 두 번 다시 그 손을 못 쓰게 해줄 테니까!"
거실 바닥의 호피무늬 양탄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길길이 날뛰는 그를 붙잡고 말리기 시작했다.
"제. 제발 그만해요! 그. 그러다 죽으면 어떡해요-"
"지금 그게 문제야?!"
그, 그럼 뭐가 문제야! 당신이 이 인간을 죽이기라도 해서 교도소 같은 델 가버리면 난 어떡하라고....!!!
결국 간신히 그 소란이 진정된 것은 일이 벌어지고 한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뒤늦게 경비 아저씨가 달려오고 방범대원에 경찰까지 출동해 피투성이로 의식을 잃은 양아버지는 '무단 가택 침입죄'와 '소란 및 기물 파손죄'로 끌려갔다. 그 인간이 항상 가죽잠바 안에 넣고 다니던 잭나이프도 증거물로 더해져 '특수강도' 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경찰은 말했다.
그 뒤에 남은 건 아수라장이 된 실내와 그 와중에 깨져버린 강화유리와 크리스털 장식품의 파편들, 그리고............
"......그래, 너하고 그 진욱인지 하는 놈에다 우리형까지 서로 짜고서 날 속여왔단 말이지...."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 원형이 이를 갈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총을 빗맞은 맹수처럼 거실 안을 사나운 기세로 서성거리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살벌하던지 간이 오그라붙은 채 그 자리에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까 양아버지가 쳐들어왔을 때도 무서웠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는 더 공포스러운 것 같다.
"저. 저기요, 그때는 너무 갈 데가 없어서 아주 잠깐만 있으려고 했던 거였거든요...."
맨발로 온통 깨진 유리 조각 투성이인 거실을 서성대다 혹여 발이라도 베일까 걱정을 하면서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시끄러! 손 똑바로 못 들어?!"
히익!!! 그 말에 더 화가 치밀었는지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러오는 통에 기겁을 한 나는 엉거주춤 들어올리고 있던 팔을 번쩍 더 위로 치켜올렸다.
그는 거실 한 구석에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들고 벌벌 떨고있는 나를 죽일 듯 쏘아보더니 너무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힘줄이 파랗게 일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 격렬한 걸음으로 쿵쾅쿵쾅 거리며 거실 이쪽부터 저쪽까지 수 백 번은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차라리 두들겨 맞는 게 낫지 너무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뭐, 아무것도 기억을 못해서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애니까 제발 데리고만 있어 달라고? 어릴 때 하도 못 먹고 자라서 발육부진에다가 여자애처럼 비리비리 말랐지만 남자애가 틀림없으니까 부담 같은 건 하나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허걱, 욱이 형,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했었던거야?! 그가 욱이 형에게 들었던 말을 읊어대며 쏘아붙이는 말을 듣고 나는 사색이 되어 등뒤의 벽에다 몸을 딱 붙였다.
엉엉, 차라리 그냥 이 벽 속에 구멍을 파서 기어 들어가 버렸으면 좋겠어......
내 통탄한 심정은 아랑곳없이 녀석은 한참이나 그렇게 거실을 왔다갔다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거실 창 앞에까지 가서 홱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너!"
헉!
"예. 예에...?"
"솔직히 말해. 그 인간이 네 부친 맞아?"
"친아버지가 아니고 그냥 엄마가 재혼하시면서 그 사람 호적에 올려놨어요."
"그런데 여기 주소는 왜 알려줬어?"
"아. 아니예요. 절대 그런 적 없어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부인하는데 문득 예전에 엄마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낸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전화를 걸때마다 번번이 통화가 안 되기에 생각 없이 보낸 거였는데- 설마 그게 화근이 된 거였나?!
"저. 저기, 예전에 엄마한테 편지를 한 통 보낸 적이 있었는데... 혹시 그걸 보고...."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그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이마 위에 흐트러져 있던 자신의 머리칼을 난폭하게 쓸어 올렸다.
"너 바보야? 편지에 여기 주소를 쓰면 '찾아와라'고 알려준 것하고 뭐가 틀려?!"
그래, 나 바보야, 알아. 알고 있으니까... 제발 그렇게 난폭하게 왔다갔다 좀 하지마. 보는 내가 더 초조하고 무서워 죽겠다구..... 흑흑흑.
한참을 더 그렇게 거실을 서성대며 나를 기절직전까지 몰아가던 그는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좀 진정이 되었는지 나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다행이다 이 정도로 끝나나 봐! 나는 이게 어디냐 싶어서 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층에 올라가서 내가 내려오라고 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말고' 있어. 알았어?"
"이, 이층에요?"
"그래. 지금 니 얼굴만 봐도 화가 나서 아무 거나 다 때려부수고 싶으니까 올라가서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 내려오지 마. 알아들어?!"
녀석은 그렇게 명령하더니 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다시 돌아서서 흘러내린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나는 잠시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서 그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얼굴만 봐도 화가 나서- 라고 지금 분명 그렇게 말했지. 싫어, 내가? 얼굴조차 보기 싫을 정도로....?
"뭐해, 올라가라는데!"
간신히 그 말뜻을 깨닫자 눈가에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서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는데 그가 다시 성급하게 소리쳤다. 흠칫, 놀란 나는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가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음장 같이 싸늘한 시선을 깨닫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라져주면 되잖아... 사라져 주면......
무슨 정신으로 올라왔는지도 모르게 휘청휘청 이층으로 올라와 내 방 침대에 앉았을 때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벌어졌던 일에 너무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를 대하는 녀석의 싸늘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겁을 먹은 건지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설움이 치밀어 올라 펑펑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다 끝났어. 이제 다 끝나버린 거야! 내 얼굴조차 보기 싫다는데..... 한 번 시작된 울음은 쉽게 그치질 않는다. 처음엔 침대에 걸터앉아 옷소매로 눈물만 훔치다가 나는 숨이 막혀 버릴 정도로 가슴이 아파 와서 침대에 엎드려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내어 흐느꼈다.
어쩌면 이미 예정된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와야 할 일이 조금 더 빨리 온 건지도 모르지만- 울고, 또 울고.... 나는 침대에 앉아 눈가가 짓무를 만큼 하염없이 울면서 그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제나 저제나 혹시라도 그의 화가 풀려 나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기다렸지만, 끝내 그는 나를 부르지 않았고.... 동이 터올 무렵. 쾅 하고 세차게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내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집까지 나가 버렸을까."
나는 텅 빈 집안에서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더듬더듬 낡은 배낭을 찾아 그 안에 아무렇게나 옷가지들을 쑤셔 넣었다. 그가 나를 다시 보면 이제 분명히 나가라고 할텐데 그렇게 되기 전에 알아서 없어져 줘야지. 여기서 더 이상 비참해지기 전에.
"정진형씨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 될 줄은 나도 정말 생각 못했어요......"
녀석이 제 형한테까지 화를 내면 어떡하지? 그 사람은 다 나를 위해서 눈감아 준건데... 그치만 정진형씨, 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노력했거든요. 난 정말 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았어요... 엉엉.
그렇게 울고도 아직도 눈물이 남았는지 축축이 젖어오는 눈가를 닦으며 나는 낡은 가방 안에 내 옷가지들을 모두 넣고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차림 그대로 얇은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칭칭 둘렀다.
남은 것은 침대 아래 흩어져 있는 그가 얼마 전에 사준 라벨도 떼지 않은 새 옷가지들. 그 중에는 내가 제일 소중하게 아끼는 노란색 스웨터도 섞여 있었지만 나는 쓰라린 마음을 참고 그 옷들을 하나하나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가방을 질질 끌면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방 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지만 열려진 현관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그런 나의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이제 가야지....."
그가 돌아오기 전에. 그가 와서 이런 모습을 본다면 나는 잘못했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그에게 비굴하게 매달릴지도 모를 테니까. 아수라장이 된 거실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지질 끌 듯이 하면서 현관으로 향했다.
"............안녕."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문이 닫히기 전 작별을 고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잠에서 깨어난 당신을 볼 수 없겠지. 두 번 다시 당신을 위해 커피를 끓일 수도 없겠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없고 현관에 서서 인사를 할 일도 없겠지.... 그래도, 꼭 건강해야 해. 당신은 위가 안 좋으니까 꼬박꼬박 아침도 챙겨먹고 하루에 커피는 꼭 한 잔만 마셔. 너무 밤늦게까지 책보지도 말고. 그리고.. 그리고............
"....이 나쁜 놈아...."
나는 당신을 정말로 좋아하는데. 나한테 아무리 바보라 그러고 나한테 아무리 멍청하다고 그래도 나는 그런 당신까지도 몽땅 다 좋아했는데. 당신이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았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눈에 띄게 잘 생기지 않았어도 나는 당신을 좋아했을 텐데. 당신을 같은 집에 내가 있다는 것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정이 떨어져 버린 거야.....?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새벽녘의 거리를 여기저기 정처 없이 헤매었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이 칼날처럼 매서웠어도 그 집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잘 있어."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4개월 동안을 살았던 아파트를 가로등 아래에서 한참이나 애처롭게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총총히 어슴프레한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20)
성명: 양승연 (원래 김승연이지만 호적상에는 양승연으로 되어있다.)
생년월일: 198*년 2월 28일
최종학력: 서울시 성북구 ** 중학교 2학년 중퇴.
특기: 가사.
경력: 4개월 동안 가정부 일을 했었음.
....또 뭐가 있더라...... 뭐, 더 이상 쓸 게 없군.
"....어휴...."
나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며 이력서 쓰던 손을 멈추고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지하에 있는 욱이 형의 가게 뒷방은 한낮에도 볕이 잘 들지 않아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침침하다. 서랍장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디지털 시계가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곧 욱이 형이 올 시간인데.... 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쯤이면 나도 나가서 홀도 한 번 쓸어줘야 하고 쟁반도 날라야 하고 테이블도 정리해야 하는데. 그런데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아니 하고 싶지가 않다.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기력함에 빠져 차가운 방바닥에 기운 없이 뒹굴거리고 있는데 덜컹, 하고 가게의 주방과 뒷방 사이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욱이 형이 어깨에 묻은 눈을 털면서 방안으로 들어섰다.
"야, 밖에 눈 진짜 많이 온다. 근데 승연이 너 어두운데 불도 안 켜고 뭐해?"
말하다 말고 놀란 얼굴로 방 한구석에 누워있는 나를 쳐다본다.
"으응,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구겨진 이력서 쪼가리들을 더듬더듬 한쪽 구석으로 치웠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맨바닥에 그냥 누워있어? 전기장판이라도 좀 켜지."
목도리를 풀어 방 한구석에 던져놓은 욱이 형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밥은 좀 먹었어? 혜정이가 그러는데 너 오늘 하루종일 꼼짝도 안 했다면서?"
"맨날 일도 안 하고 노는데 밥은 무슨..."
"어허, 또 또 그런 소리한다."
"신경 쓰지 마, 형. 내가 알아서 할게."
맥아리가 하나 없는 내 목소리에 욱이 형은 뭔가 더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대신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들었다.
"또 이력서 쓰는 거야?"
"응, 그 인간이 언제 또 출소해서 가게에 들이닥칠지 모르잖아. 얼른 일 구해서 나가야지."
"너도 참...."
걱정스럽다는 듯 다시 크게 한숨을 내쉰 욱이 형은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렇게 잠시 우리 둘 사이에는 질식해 버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형."
"어, 왜?"
한참만에 나직하게 부르자 욱이 형은 깜짝 놀라더니 곧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한테 연락 온 거...... 없지?"
"............응."
그렇겠지, 예상하고 있었어. 하지만 지독한 실망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다.
"승연아."
내가 고개를 숙이자 욱이 형이 안쓰럽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 형.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마.
"서로... 사는 세계가 너무 다르잖아."
무릎 위에 떨구어진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면서 욱이 형이 조심스레 건네는 한 마디.
망설이다 망설이다 한 말인 걸 아는 만큼 고개를 들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어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웃음 같은 건 죽어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눈물을 참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집을 나와서 하도 울어 눈물은 이미 말라버렸지만 여전히 놈을 생각하면 죽고 싶을 만큼 가슴이 아프다.
그 집을 나온 날 새벽녘의 거리를 헤매다 아무래도 갈 곳이 없어 욱이 형에게 전화를 하자, 형은 놀란 얼굴로 택시를 타고 달려와 주었다. 그 집에 들어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빈 몸으로 낡은 가방만 하나 달랑 든 채 나는 눈물이 얼어서 아프게 느껴지는 얼굴을 욱이 형의 어깨에 묻었다.
그리고 더듬더듬 울면서 욱이 형에게 이실직고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만큼 아프고 아팠기 때문이다.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욱이 형은 내가 이야기를 다 마치고 탈진해서 자리에 눕자 형이 잘못했다며 나만큼이나 서럽게 뚝뚝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열흘째.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에게서는 전화 한 통 오지 않는다. 하지 않을 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연락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사실은 날마다 녀석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집을 나와버렸으니 내가 간 곳을 모르더라도 욱이 형에게라도 연락해 보지 않을까. 아니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라도 나를 찾아주지는 않을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갈수록 나는 그것이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그렇게 힘들게 나를 찾을 필요는 없는 거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를 속이고서 들어가 내내 거짓말을 하며 살았으니 그의 성격상 그런 나를 용서해줄리 없었고, 몇 달 동안 자신의 집을 채웠던 자리는 다시 다른 입주가정부를 들여서 채우면 될 테니까.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 후회하고 있단 말야. 이렇게 당신이 보고싶을 줄 알았다면 어떤 수모를 받더라도 그 집에서 참고 견뎌보는 거였는데. 말없이 집을 나와버리기 전에 좋아했었다고 고백이나 한 마디 해볼 걸. 당신이 내 첫사랑이라고, 태어나서 누군가를 그렇게 절실하게 좋아해 본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고.....
끝내 전하지 못했던 그 고백이 이렇게 가슴에 피멍이 되어 두고두고 숨이 막히도록 아플 줄은 몰랐다.
"키우던 개가 집을 나가도 찾기 마련인데, 아무리 그렇다고 찾아볼 생각도 한 번 안 하냐..."
욱이 형이 나가 버리고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나는 볼을 적시는 눈물을 닦으며 야속하기만 한 그를 하염없이 원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언제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비탄에 잠겨있을 수도 없어 나는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스리고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일도 안하고 누워만 지내면서 욱이 형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너무 미안해 이리저리 알아본 끝에 형이 아는 친구의 선배가 한다는 작은 도시락 집에 취직이 되었다. 열 다섯 평이 채 못되는 작은 가게였지만 주변에 오가는 사람도 많고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젊은 부부만으로는 힘들어 시간제로 나를 채용해 준 것이다.
비록 아르바이트지만 일하는 시간에 비해 보수도 제법 좋고 주인 부부도 친절해 될 수 있으면 꾸준히 일을 배울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은 주문이 들어오면 부인이 만들어 놓은 반찬을 깔끔하게 담아 포장하고 가끔씩 단체주문으로 들어온 김밥을 싸는 정도였다.
복잡한 일은 아니지만 포장이 많으면 정신이 없고 단체주문까지 겹치면 두 세시간은 물 마실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처음 일주일간은 집에 들어와서도 팔다리가 뻐근해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러나 차차 일이 손에 익자 몸이 한결 편해졌고 한가할 때는 새벽에 들여놓은 야채들을 다듬는 일도 자처해서 도왔다. 바쁜 게 좋았다. 생각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정신 없이 바쁜 게 좋았다. 그러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끊임없이 머리 속에서 맴도는 그의 모습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게 될 테니까.
저녁에 일이 끝나면 잠시 가게를 비우고 나와주는 욱이 형과 함께 방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가진 돈이 얼마 되지 않아 선택의 폭은 좁았지만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닌 결과 형네 가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동네에 욕실과 부엌 하나가 붙은 간소한 방을 월세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다세대 주택이었지만 장판에 담뱃불 자국이 좀 있는 걸 제외하면 내부는 깨끗했고 무엇보다도 남향이라 볕이 잘 든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사하는 날엔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의 부부와 욱이 형, 형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몇 명 와서 도와주었다. 욱이 형은 마치 딸내미를 시집보내는 엄마 같은 얼굴로 내가 싫다는데도 억지로 중고 냉장고와 티비를 들여주었고 내가 일하는 가게의 안주인은 안 쓰는 밥솥과 냄비 같은 것을 잔뜩 남편에게 들려서 가지고 왔다.
그렇게 구한 집에서 나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밥을 먹고 조용히 잠을 잤다. 아침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에 기대 소란스럽게 노는 동네 아이들을 구경하다 시간이 되면 출근하고 저녁 때 집에 돌아오면 죽은 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이 차차 안정되어 가는 듯 싶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원형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 그 집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 마냥 현실성 없이 아련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나를 부르던 녀석의 목소리, 그에게서 나던 시트러스 향의 싸한 체취, 눈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의 촘촘하고 새까만 속눈썹의 그늘... 같은 것들을 행여라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꼭꼭 싸서 기억의 바닥으로 앙금처럼 깊이 가라앉혀 버렸던 것이다. 다시는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이 없도록. 다시는 꿈속에 나타나는 원형 때문에 울면서 눈을 뜨는 서러운 아침이 오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