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8
#요한계시록 #Revelation 5:9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印封을 떼기에 合當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當하사 各 族屬과 方言과 百姓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And they sang a new song, saying: "You are worthy to take the scroll and to open its seals, because you were slain, and with your blood you purchased for God persons from every tribe and language and people and nation.
et cantabant canticum novum, dicentes : Dignus es, Domine, accipere librum, et aperire signacula ejus : quoniam occisus es, et redemisti nos Deo in sanguine tuo ex omni tribu, et lingua, et populo, et natione :
καὶ ᾄδουσιν ᾠδὴν καινὴν λέγοντες Ἄξιος εἶ λαβεῖν τὸ βιβλίον καὶ ἀνοῖξαι τὰς σφραγῖδας αὐτοῦ, ὅτι ἐσφάγης καὶ ἠγόρασας τῷ Θεῷ ἐν τῷ αἵματί σου ἐκ πάσης φυλῆς καὶ γλώσσης καὶ λαοῦ καὶ ἔθνους,
하늘 보좌의 장로들이 부른 새 노래는 이 땅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 노래이기도 하고 장로들의 마음이 항상 새롭게 충만했기 때문에 새 노래이기도 한다. 극단적인 개혁주의자들은 교회와 신자들의 찬송은 오로지 시편에만 국한되어야 한다는 매우 편협하고 옹졸한 주장을 펼치고 스스로 제약을 걸어놓기도 하는데 교회와 성도들의 찬송이 항상 새로워져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시편과 더불어 성경 전체의 가르침 안에서 새로운 가사와 새로운 음악으로 발전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들의 찬양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으므로 성경과 그다지 상관없는 가사를 만든다거나 지나치게 사람의 감성을 좌지우지하는 현란한 기교의 멜로디는 새 노래로 적합하지 않다. 지난 날 수많은 찬양사역자들이 찬양사역을 한다면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기자신이 주인공이 되려 하였고 성경의 교훈을 노래하기보다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가사로 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을 잔잔하게 하기보다 극도로 고조시키고 흥분시키는 현란한 멜로디로 둔갑시켜 현혹해왔다. 이에 대해서는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선생이 자신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어도 교회 음악의 아름다운 곡조에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 것과, 칼빈 선생을 비롯한 신앙개혁가들이 가급적 단촐한 곡조를 추구하였던 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찬양의 가사와 곡조에 대한 외형적인 발전도 물론 필요하지만 찬양을 찬양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찬양을 부르는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가짐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경 66권으로 완결되었어도 2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심령을 나날이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양도 이전에 지어진 옛 노래를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의 심령이 성령에 충만해 있으면 주님께 새 노래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최신 찬양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의 심령이 성령에 감동되지 않고 그저 육신의 기분과 귀를 즐겁게 하려는 것이면 그것은 단지 세속적인 유행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오늘날 교회 찬양의 폐단 중 하나는 이런저런 잡다한 악기와 세션으로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예배 중 성가대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져서 설교보다 우선순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성가대는 지휘자와 반주자는 봉사가 아니라 사례비를 지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대원들은 대체로 교회 내에서 유력한 교인들인 경우가 많으므로 거의 장로회나 집사회나 권사회만큼의 위세를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심기를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종종 예배의 선을 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2년 넘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기승을 부리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한국 교회들로 하여금 주님 귀를 거슬리게 하는 찬양팀과 성가대를 닥치게 하시려는 하나의 수단일 수도 있다. 교회에서의 찬양은 어떤 특정 음악 전문가들이나 집단이 독점해서는 안되고 가급적 예배에 참여한 모든 청중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 사람마다 음악적 취향과 수준이 제각각으로 다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음악적 다양성을 교회의 예배 찬송에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교회는 가급적 많은 교인들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무난한 곡조의 찬양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교인들은 설령 교회 찬송이 너무 앞서간다거나 뒤쳐진다거나 가쁘다거나 느리다거나 한다고 해서 자기 취향의 곡조만을 강요해서는 안되고 합심하는 마음으로 따라부르며 동참하는 자세와 태도가 요구된다.
하늘 보좌의 장로들의 새 노래는 다름이 아니라 구속사역의 주체이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다. 아무도 뗄 수 없는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떼시고 펼치셔서 앞뒤로 빼곡히 적힌대로 심판을 행하실 권세를 가지신 하늘의 주권자이시면서도 스스로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제물의 어린 양이 되셔서 죽임을 당하셨으며 그 흘리신 피로써 창세 전부터 당신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성도들을 만방에서 불러모아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장로들의 새 노래 내용이었던 것이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애굽 병사들이 홍해에 빠져죽은 후에 여인들을 데리고 나와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애굽을 심판하신 여호와 그리스도의 역사를 찬양하였다. 모세는 40년 간의 그 험난한 광야 이스라엘 지도자 여정을 보내면서도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그리스도를 찬양하였다. 여선지자 드보라와 사사 바락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떼와도 같은 이스라엘로 철병거 9백승을 가지고 있는 가나안 하솔 왕 야빈의 군대를 격파하게 하신 여호와 그리스도를 찬양하였다. 삼손은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 군인 1천 명을 쳐죽이고 한더미 두더미를 쌓았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여호와 그리스도를 찬양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자화자찬 한 것에 불과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숱한 마음고생과 간절한 기도 끝에 아들 사무엘은 얻은 후에 단지 이로 인한 기쁨으로만이 아니라 예언적인 기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애가를 지음으로써 공의로우신 여호와 그리스도를 찬양하였다. 바사 왕 고레스의 명으로 멸망 당한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그리스도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기초를 놓았을 때 환호와 한탄으로 찬양하였다. 얼마 후 학사 에스라에게서 율법의 가르침을 받은 백성들은 울며 회개하며 여호와 그리스도를 찬양하였다. 세례 요한의 아비 사가랴는 요한을 얻고 입이 풀리자마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세례 요한의 어미 엘리사벳은 주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보자 칭송하였으며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던 세례 요한은 태동으로 찬양하였고 마리아는 처녀로서 임신하게 된 위험부담 가운데서도 주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들판의 목자들은 마리아에게서 이제 막 태어나신 예수님을 찾아뵙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였고 동방 나라들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내로라할 박사들은 그 먼길을 찾아와서 주님을 뵙고 예물을 드리며 찬송하였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도 불평하지 않고 도리어 감사와 찬양을 올렸다. 이처럼 우리의 찬송은 자화자찬이나 신세한탄이 되어서는 안되고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전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과 섭리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두루마리를 가지신 분은 보좌에 앉으신 분이시고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어린 양이신데 어린 양이신 분이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으셨다고 해서 두 분이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고 보좌에 앉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시고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시라고 나누는 것도 인간 지성의 빈약한 한계에 근거한 해석일 뿐이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이나 어린 양이신 주님이나 영원 전부터 하나님으로서나 사람으로서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다만 동일하신 주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하심을 드러내는 것이고 주님께서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시라는 것은 구속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 지극히 낮아지셨음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력은 당대에나 사도시대에나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이후부터 장차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성도들, 즉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속사역을 이루어가시는 경륜과 방편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다양하게 적용되며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멜기세덱의 반차에 기반한 제사 효력으로써 구속에 대한 어음을 주셨고 이 땅에 오신 후에는 단번에 죽으심으로써 구약의 어음을 갚으시고 훗날 모든 성도들의 구속까지 이루신 것이었다. 구약시대에는 오로지 이스라엘 히브리 언어만을 쓰는 대상으로 구속의 범위를 한정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다른 언어를 가진 나라와 족속들에게도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므로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복음을 번역하고 전하고 선포하게 하셨다. 하나님 그리스도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후 인류가 스스로 교만하고 스스로 구원하려 할 때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흩으셨으나 이제는 동서고금의 언어가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복음으로 하나되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 전 하나님께서 주최하신 구원협약에 대한 논의에서 배제되셨다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후에서야 성자 하나님께 듣고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의 구원협약에 적임자로서 담당자로서 참여하시고 기꺼이 수용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협약대로 이루신 것이었다. 따라서 하늘의 장로들은 이 구원협약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찬양한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만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므로 절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폄하해서도 안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건너뛰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시도해서도 안되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의 찬양과 경배의 대상에서 제외해서도 안된다.
#20200318 #출애굽기 #Exodus 제 4 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능력을 주시다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어쩌면 모세가 그렇게 여러번, 하나님께서 역정을 내시기까지 반복적으로 거절한 것은 그저 자기의 초라한 처지로 인한 두려움과 더불어서 하나님께 대한 서운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40년 전 애굽에서 한창 혈기도 왕성하고 능력도 있고 지위도 있으며 더욱이 왕궁에서의 부귀영화보다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 당하는 것을 더 좋아할 정도로 믿음이 강건했을 그 때에는 정작 자기와 함께 하셔서 백성들을 구해내지 않으시다가 애굽에서 도망치고 40년이나 흘러서 이제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초라한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느닷없이 백성들을 인도하라 하시니 모세 입장에서는 감히 하나님께 배째라는 식으로 제대로 심통이 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때에 이제는 가지고 싶지 않은 그것을 선물이랍시고 주는 것과 같다. 내 입장에서는 상대가 타이밍도 타겟도 모두 빗맞춘 것과 같아서 빈정 제대로 상하게 되는 것인데, 아마도 모세도 하나님께 대해서 그런 빈정상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지금 모세의 심정은 니느웨에 가서 멸망을 선포할 것을 명령 받은 요나보다도 더 비뚤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볼 때 그런 모세를 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의 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부모라면 자녀가 부모의 선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투덜대더라도 자녀의 상한 기분을 풀어주려 할 것이고, 연인이라면 상대가 자기의 선물에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면 도리어 미안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분위기는 마치 모세가 투더대든지 말든지 하나님께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닥치고 명령에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 같다. 상대가 어떤 마음인지 뻔히 다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표면적으로만 대응해서 일부러 부아를 돋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굳이 모세를 다독이지 않으시고 그렇게 강경하게 대하시는 것은 모세가 그럴만한 위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한두번 툴툴대면 됐을 것을, 모세답지 않게 계속 심통을 부리니 하나님께서도 마침내 모세에게 역정을 내시며 모세가 스스로 언변이 둔하다 했으니 말 잘하는 모세의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세울테니 이제 그만 아닥하고 가라 하신다. 아무리 4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모세는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애굽 왕실에서 모든 학문과 무예 등을 배운 자였다. 그러므로 그런 그가 언변이 둔하다는 것은 그저 하기 싫다는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게다가 일반인이라면 자기 수준보다 더 높은 어떤 아이템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뱀으로도 변하게 하시고 손에 나병이 생겼다가 없어지게도 하시고 물을 피로 변하게도 해주신다고도 하셨는데도 이에 감탄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가지 않으려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다
18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렇게 하나님께 혼쭐난 모세는 더이상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히고 돌아와서 장인어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모세의 말을 들은 장인 이드로는 그의 말에 가티부타 하지 않고 마치 드디어 올 때가 왔다는 듯이 흔쾌히 복을 빌어준다. 어쩌면 이드로도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증표를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모세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서 자기 집 식구가 되었듯이 어느 날 홀연히 떠나게 될 것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는 이후에도 모세와 함께 광야에 머물면서 모세에게 여러가지 지혜를 전수해 준다.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히브리 남자 아이를 죽이라 명했던 바로는 모세를 구한 공주의 아비였고 모세가 애굽에서 장성했을 때의 바로는 공주의 오라비 또는 남동생이었을 것이다. 이제 40년이 지난 지금의 애굽의 바로는 공주의 조카, 즉 모세와 동년배나 어린 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바로가 여러번 바뀌었어도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정책만큼은 꾸준히 잘 유전되었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바로에게는 수백년 전 한 히브리 총리가 애굽 전체를 살린 역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자의건 타의건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애굽으로 떠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같은 명령을 계속 반복하시며 모세에게 주지시키신다. 그리고 여기서 이미 바로가 어떻게 반항할 것과 그런 바로가 마지막에 어떤 무시무시한 재앙을 당하게 될지도 미리 말씀하신다.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이 부분은 사실 나로서는 그 이유와 정황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모세가 히브리인이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는 할례를 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할례의 의미도 몰랐을 것이다. 부모는 석 달 동안 그를 철저히 숨겨야 했기 때문에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했을리는 만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도 잊어버린데다 고된 노역으로 인해 할례를 행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기 전에 미리 모세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지시하실만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는 두가지 추정이 가능해 보인다. 하나는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할례를 행하고 갈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준수하지 않았을 경우다. 그래서 갑자기 애굽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아내 십보라에게도 자세히 논했을 것이고 십보라는 할례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모세가 (알고 그랬건 모르고 그랬건) 할례를 행하지 않고 바로 떠나자 십보라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따라 나서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붙들고 죽이려 하시자 그제서야 다급하게 자기가 아들의 포피를 베어 할례를 행한 것 같다. 그런 연유라면 십보라가 남편 모세에게 역정을 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로써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준수해야 한다는 것을 죽음의 위협을 통해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례에 대한 언질을 주시지 않고 바로 죽음으로 위협하시면서 모세에게 할례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과연 십보라가 그 원인을 할례인 줄 알고 대처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십보라가 여자임에도 아들의 포피를 벤 것과 남편 모세에게 그 포피를 집어 던지며 피남편이라 역정을 낸 것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침해했다고 비판하고 지적하는데, 막상 십보라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아니면 그 일을 맡을 사람도 없는데다 하마터면 남편이 죽을 뻔 했기 때문에 철렁했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비판이라고 본다. 만약 십보라가 질서를 지킨다고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면 남편 모세가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모세에게 역정을 낸 것은 한편으로는 그만큼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생사를 염려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십보라의 행위는 아마도 바로의 명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히브리 남자 아이를 살리고 바로에게는 거짓말 한 히브리 산파와 비슷하게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보라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그리스도께서 남자들에게만 맡기신 사역을 여자가 해도 된다고 성급한 일반화를 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통상적으로 명령하신 것을 우선해야 하고 십보라와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서 극히 예외적으로 하나님만의 주권으로 허용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27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28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아마도 백성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은 모세보다는 형 아론에게 더 크게 있었던 것 같다.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40년 동안 헤어져 있던 동생 모세를 만나 반갑게 맞이하고 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백성들과 장로들을 모아 그들을 설득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모세는 여전히 그렇게 자발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40년 만에 늙은 목자의 차림으로 돌아와봤자 과연 누가 반겨주고 자기 말을 믿어줄 것인가 걱정하기도 했을 것이다. 다행히 형 아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기 말을 대신 백성들에게 전해주기는 하였지만서도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계속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다.
아론의 말을 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한 것은 참된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당장 하나님께서 애굽을 멸하시고 자기네들을 해방시키셔서 애굽 땅의 주인이 되어 떵떵거리게 살게 해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경배가 참되지 않은 것은 이후 그들이 모세와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태를 보면 명확하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은 하늘의 복음 때문이 아니라 그저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다. 심지어 제자들 조차도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교회와 교인들은 전무하다. 이 땅의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고작해야 이 땅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좀 더 많이 받아먹고자 하는데 있다. 그런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신앙을 가진 교회와 교인들은 결국에는 40년 동안 줄기차게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하고 대적하다가 광야에서 엎드러져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다.
#20200318 #출애굽기 #Exodus 제 5 장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서다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6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10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이 나가서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바로가 이렇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11 너희는 짚을 찾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2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13 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
14 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15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17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19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왕 또는 국가의 수장을 알현한다는 것은 그에 합당한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애굽의 피지배 민족 히브리인인 모세와 아론은 바로를 알현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지금의 바로는 어려서부터 모세와 함께 왕궁에서 교육받고 자랐을 것이므로 눈엣가시 같은 모세가 40년 만에 애굽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가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론은 아마도 당시 히브리인들의 장로대표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종종 왕궁에 불려가 바로의 명령을 전달 받았을 수도 있다. 어쨌건 그렇게 모세와 아론은 바로를 만나 사흘 정도 백성들이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바로에게 아론의 요청은 그저 시건방진 말에 불과한데다, 40년 만에 본 모세는 과거에 자기를 알게 모르게 위협하던 그 자신만만한 반항아 모습은 간데 없이 그저 애굽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늙고 힘없는 목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개다가 모세는 자기 스스로 말하지도 못하고 모든 것을 아론을 통해서 말하는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로로서는 자기 보기에 한낱 미천한 날파리 같은 두 명의 히브리인들의 허황된 요구를 들어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는 버르장머리 없는 모세와 아론에게 제대로 본 때를 보여주기 위해서 애굽인이라면 속시원한 사이다 같은 명령을 내리는데, 그것은 벽돌을 구울 때 주는 지푸라기 공급을 중단하면서도 갯수는 동일하게 맞추라는 것이었다. 히브리인들로서는 지금도 헉헉대며 간신히 벽돌 수량을 맞추는데 이제는 노동력의 얼마는 지푸라기를 모으는데 써야 하므로 수량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책임을 모세와 아론에게 돌리며 저주하기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가 예상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아론의 말을 들을 때만 해도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웠다 하면서 기뻐하며 경배했으나 이로 인해 직격탄을 맞게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한다. 이런 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애굽 전역의 하수와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과 개구리 재앙과 먼지가 변한 해충 이의 재앙을 애굽인들과 같이 받게 되는 댓가를 치르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고난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복음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길은 절대로 넓고 평탄하지 않으며 좁고 협착하며 험한 길이다. 그 험한 길을 불평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믿고 가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다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모세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바로가 호락호락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 번 들었으면서도 이제 꼴랑 한 번 거절 당했다고 하나님께 징징대는 것으로 봐서 그가 얼마나 이 명령을 따르기 싫어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이랬던 모세가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 가는지를 관찰하며 읽어나가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하나님께서 직접 대면하여 친구처럼 만나신다는 모세도 처음에는 이렇게나 별 볼일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