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章 십삼 년 주유천하(周遊天下) ① 하늘과 땅이 거센 눈보라로 한데 묶여 있었다. 며칠을 두고 내린 폭설로 인해 세상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버린 지 오래였다. 모든 것이 눈으로 뒤덮인 세상, 설마(雪魔)의 차갑고 독랄한 혓바닥만이 회오리가 되어 천지간을 휩쓸고 지나치면서 굉음을 쉬지 않고 토해 낸다. 우르르릉-! 뇌성(雷聲)과 함께 퍼부어지는 폭설은 수년 만의 대설(大雪)이었다. 건곤일백(乾坤一白). 즐비한 거봉들이 웅좌를 자랑하던 나부산맥(羅浮山脈)이 마침내 하나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소리 없이 내리쳐지는 밤의 장막. 야음(夜陰)과 함께 덮친 한풍설(寒風雪)만이 살아 움직일 뿐,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삼경(三更) 무렵. 바위를 날려 버릴 듯 강하게 불어닥치는 북풍(北風)을 뚫고 돌연 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할… 할아버지, 조… 조금만 더 가시면 마을이 나타날 것입니다." 소년의 목소리였다. 눈보라에 파묻혀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나, 허리까지 빠져드는 눈 위를 걷는 사람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부엉이라도 지척지간을 분간하지 못할 야심한 산중. 휘휙- 휙-! 귀를 찢는 듯한 강풍 소리만이 요란하고 새도 보이지 않고 달도 보이지 않는데 사람이 있다니? "할… 할아버지, 제… 제가 이제부터 할아버지를 업고 가겠습니다. 소자 옥룡(玉龍)의 등에 업히십시오." 입술이 얼어붙은 듯 잘 발성되지 않는 목소리이나, 아주 아름다웠다. 아직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어린 소년인 듯했다. 무섭게 쏟아지는 눈보라 속. 언제부터인가 깊은 눈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검은 옷을 걸친 십여 세 소동(少童) 한 명, 그리고……. "콜록… 콜록… 나… 나는 이제 틀린 것 같다." 피를 토하며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흑의노인 한 명이 눈보라 속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할… 할아버비! 제… 제가 할아버지를 업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할아버지!" 울부짖는 흑의소동은 이제 나이 십삼 세 정도였다. 옷차림이 아주 궁색해 걸인이라 해도 과한 말이 아닐 정도인데, 이목구비(耳目口鼻)는 아주 또렷했다. 빈한한 탓에 음식물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 몸이 장작개비같이 마르기는 했으나, 천부적인 영준(英俊)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옥(玉)같이 흰 피부, 검미(劍眉)라 불릴 정도의 검고 날카로운 눈썹……. 오똑한 콧날에 여인의 입술보다도 더 붉은 입술을 지닌 흑의소동은 몸이 꽁꽁 언 듯, 벌써 얼굴빛이 시퍼랬고… 손등이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또한 흑의가 눈과 땀으로 축축해졌다가는 얼어붙어 살갗을 베는 통에 표정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소년은 흑의노인을 보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이 칠순에 달해 보이는 흑의노인의 용모는 영준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년의 모습에 비할 수 없이 흉측했다. 미간에 주먹만한 혹이 하나 달려 있는데, 얼굴빛은 숯덩이보다도 검었다. 게다가 눈알 하나가 없는 애꾸이고, 얼굴 가득 검흔(劍痕)이 나 있어 흉측하기가 지옥사자(地獄使者) 같았다. "틀… 틀렸다, 옥룡아……." 흑의노인은 소동이 부축하는 데도 일어나지 못하고 허리까지 푹푹 빠져드는 눈 속으로 반쯤 파묻혔다. 두 사람으로 인해 눈구덩이가 하나가 만들어졌다. 휘이이잉-! 야속한 눈보라는 그들이 고통을 느끼든 말든, 전보다도 오히려 매섭고 살기에 찬 것이었다. 흑의노인은 대자연(大自然)과의 투쟁에서 결국 패하고 만 듯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뒷머리를 눈(雪)에 댔다. 그리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너… 너 혼자라면 충분히 살 수 있다. 이… 이제… 나… 나를 따라다니며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홀가분하지 않느냐?" "할… 할아버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할아버지와 제가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라고는 하나, 이… 이렇듯 무정히 말하실 수가……." 흑의소동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그리고. 휘잉-! 뜨거운 눈물은 설마의 입김이 닿는 찰나, 꽁공 얼어 소년의 얼굴 위에 두 개의 고드름을 남겼다. "저… 저도 여기 남겠습지다. 제… 제게는 할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소년이 격동해 외치자. "너… 너는 운(運)이 없는 녀석이다. 나… 나 같은 사람에게 길러지게 되었으니… 으으, 네… 네게 이제껏 뜨거운 음식 한 번 사 먹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까짓 눈보라에 기가 꺾여서야… 과거 녹림맹(綠林盟)을 주름잡던 독안신군(獨眼神君)이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서 원기를 되찾고 일어나십시오." 흑의소동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독안신군! 몰골이 처참하고 병약하기가 지푸라기만도 못한 흑의노인이 바로 독안신군이란 말인가? 그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공동산( 山)에 녹림맹(綠林盟)을 세우고, 수십 년 간 온갖 악행(惡行)을 일삼던 독안신군이 아니던가? 독안신군, 그는 녹림제일인(綠林第一人)으로 불리웠던 사람이다. 누구도 그의 아성에 침입하지 못했으며, 어떠한 방파도 녹림맹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상대가 죽어야만 멈추어진다는 탈명최심장(奪命 心掌)! 그 아래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이 원혼이 되었던가? 녹림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독안신군.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추억일 뿐, 지금은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거지 늙은이일 뿐이었다. "십… 십사 년 전, 천사교(天邪敎)에게 멸망한 중원(中原) 흑백도(黑白道) 문파의 수는 수백에 달했지. 으으, 천… 천사교 소교주이던 마서생(魔書生)이 이끄는 오백 천사교도(天邪敎徒)는 하나같이 절정고수였다. 나… 나는… 그… 그 때까지 녹림제일인을 자부했었는데… 어… 어이없게도 그들 중 하수 셋을 당해 내지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으니… 으으, 결국 복수도 못하고 이 지경으로 죽어 가나… 과… 과거가 후회스럽지는 않다." 독안신군은 이미 한기(寒氣)를 잊는 듯했다. 몸이 다 얼어붙은 후이기 때문이었다. "이… 이유는, 네… 네녀석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네… 네녀석을 돌보며 살아온… 십이 년이 내… 내게는 가장 값진 세월이었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나왔다. "할아버지… 이렇게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영약(靈藥)을 구해 기사회생(起死回生)하시고, 과거의 무공을 되찾으시어 다시 녹림제일인이 되셔야 합니다." 흑의소동이 절규하자. "옥… 옥룡아… 너… 너는 나를 존경하고 있다만, 나… 나는 하등의 쓸모 없는… 늙은이이다. 허… 허망한 기연(奇緣)을 위해 어린 너를 이끌고 천… 천하를 주유(周遊)하며… 온갖 고생을 시켰으니……." "할아버지… 왜 그리 나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왜 어제처럼 제가 늦잠을 잔다고 야단치시고, 머리를 지팡이로 때리시지 않고… 흐흐흑… 할… 할아버지… 나를 두고 이대로 떠나시면 아니 됩니다." 흑의소동은 어린 나이였으나, 생각하는 것은 아주 넓었다. 그는 고향(故鄕)이 없는 처지였다. 생각나는 것은 모두 독안신군과의 일뿐이었다. 독안신군은 그가 젖먹이였을 때부터 그를 품에 안고 다녔으며, 젖동냥하며 그를 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인정(人情)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툭 하면 소년을 때렸고, 빌어먹는 일을 맡아 하게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었다. - 이 냉가 어린 놈아! 네놈은 내 덕에 산 것이다. 내가 핏덩이로 버려진 네놈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네놈은 한 살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떴을 것이다. 네놈을 살려 준 은인이 바로 나이니, 나를 위해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해야 한다. 독안신군은 성이 날 때마다 소년을 개 패듯 했었다. 그러나 천사교가 일으킨 대혈겁(大血劫)에 휘말려 무공(武功)과 평생에 걸쳐 이룩한 터전을 잃은 떠돌이가 되고는, 닭 모가지 비틀 힘도 갖고 있지 못하게 된 처지였다. 그의 주먹은 삼 년 전부터 소년을 쓰러뜨리지 못했었다. 독안신군은 소년이 자신에게 매를 맞고도 쓰러지지 않으면 이렇게 말하며 숨을 씩씩거렸다. - 네놈을 키우느라 힘이 더 없어졌다. 고약한 놈! 소년은 독안신군의 분풀이 대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독안신군을 원망하지 않았다. 독안신군이 매일 밤 피를 한 사발 가량 토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십삼 년 간 보며 커 온 처지이니, 어찌 독안신군을 원망하겠는가! 독안신군은 아주 오래 전에 죽었어야 할 몸이었다. 그가 이제껏 살아 있는 이유는, 과거 내외공을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 비슷한 수준까지 익힌 바 있어서였다. 지금의 그를 보고 과거의 그를 연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과거의 그는 실로 뛰어난 녹림효웅(綠林梟雄)이었다. "모… 모두 천사교 무리들 때문이다. 그… 그 놈들이 중원을 집어먹기 위해 천산(天山)에서 중원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나… 나는 아직 건재할 것이고, 너… 너같이 어리석은 놈을 만나 거지로 십삼 년을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독안신군의 피부빛이 더 검어졌다. 그가 죽어 가자 흑의소동은 눈보라가 차다는 것도 모르고 뜨거운 오열을 쏟았다. "흐흑……!" 그로서는 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강한 몸뚱이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독안신군이 가르쳐 준 한 가지 토납좌공(吐納座功)을 시전해 내공을 조금 갖고 있다고는 하나, 그 정도는 일신을 보호하기에도 모자랄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은 닷새 굶은 상태였다. 그리고 반동사(半冬死) 지경이니, 의지력이 희미했다면 아마 안력이 흐트러져 눈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 정도였으리라. 그가 눈물을 끊지 못할 때. "네… 네녀석은 신비한 데가 있다." 독안신군이 손바닥을 들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나아진 듯했다. 표정도 아주 부드러웠고, 그토록 심하게 하던 기침 소리도 내지 않았다. "너… 너는… 내가 왜 너를 끌고 천하를 십삼 년 간이나 주유했는지 아느냐?" 그는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영… 영약을 구하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할아버지?" 소년의 눈알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그러자. "아니다, 그것이 아니란다." 독안신군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 할… 할아버지가 저를 이끌고 천하를 주유한 이유가, 할아버지의 내외상(內外傷)을 치유할 영약을 찾기 위함이 아니었다고요?" 그가 크게 놀라자. "나… 나는 오래 전부터 무공을 되찾는다는 꿈을 버렸다." 독안신군이 평소와는 아주 다른 말투로 말을 이어 갔다. 아주 부드러운 말투로. "내… 내가 그토록 찾은 것은 영약이 아니었다. 내… 내가 찾은 것은… 명사(名師)였다." "명사라니요?" "너… 너를 맡아 줄……!" "저… 저를요?" 소년은 놀라 머리카락을 빳빳이 일으켰다. "그… 그렇다. 너… 너를 맡아 줄 기인이사를 찾아 이제껏 천하를 주유했던 것이다." 독안신군은 천천히 말하며 소년의 오른손을 꽉 쥐었다. 그의 손힘이 전과 달리 아주 세게 느껴졌다. "네… 네게 보여 줄 것이 있다." "예?" "이제껏 네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네가 절세신공(絶世神功)을 익힌 명사의 제자가 되어 기인(奇人)이 될 때 말하려 한 것인데… 지금 말할 수밖에 없구나. 내 품을 만져 보아라. 붉은 천으로 싼 물건 하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꺼내라!" "할… 할아버지! 제게 무슨 비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소년은 경악과 함께 소년다운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다. "품… 품안에서 그것을 꺼내라!" 독안신군이 재촉하자, 소년은 떨리는 손끝을 그의 더러운 옷자락 속에 넣어 뒤적이다가 붉은 천으로 싼 물건을 끄집어 내게 되었다. "이… 이것이옵니까?" 소년이 꺼내 쥔 물건은 아주 작았다. "퍼… 펴 봐라……." 독안신군은 숨을 헐떡이며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도 그런 인간다운 구석이 있다는 것은 정말 상상 밖의 일이었다. 죽음이 그를 누그러지게 한 것인지, 아니면 언젠가 이러리라 여기고 있던 것을 실행하고 있는 것인지……. 소년은 붉은 천으로 싸인 물건을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놀려 천을 벗겨 냈다. 작은 옥패(玉牌)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 이것입니까?" 반투명한 자옥패(紫玉牌).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으나, 단순한 옥덩어리는 결코 아니었다. 모양이 네모 반듯해 인공(人功)이 닿은 흔적이 역력했고, 끝에 금사슬이 있어 목에 걸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년이 그것을 들어올리자. "네 것이다. 십삼 년 만에 네게 돌려주게 되는구나." 독안신군의 말이 소년을 놀라게 했다. "제… 제 물건이라니요? 저… 저는 천애고아(天涯孤兒)인데, 어찌……." "아니다. 너… 너는 나와 같이 신세가 천한 사람이 아니다. 네… 네게는… 출신(出身)이 있다. 그… 그것을 말해 주겠다." "출… 출신이요?" 소년의 눈빛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졌다. 부모님에게 버림받은 고아라 여기며 살았는데, 출신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그 때. "네… 네게 나의 녹림절기(綠林絶技)를 전수하지 않은 이유를 아느냐? 네가… 못마땅해 나 독안신군의 절예를 전수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이유는, 네가… 녹림도상(綠林道上)에 들 수 없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 소년은 할 말을 잃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마는 것이었다. 천지간의 떠돌이에게도 뿌리가 있었단 말인가? 그가 멍청해졌을 때. "너… 너는 자부선자(紫府仙子)의 아들이다. 세상이 존경했던 젊은 여기인(女奇人) 천…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 자부선자가 너의 어머니인 것이다. 흑… 흑도(黑道)나 녹림도 사람들에게도 활선(活仙)이라 불리는… 자부선자가 바로 너의 생모다." "자… 자부선자라는 여인이 제 어머니라고요? 누… 누가, 누가 그런 말을……?" "자… 자부선자가 너… 너를 내게 맡기며 한 말이다. 죽… 죽어 가며……." "죽… 죽어 가며 말하다니요? 그… 그럼, 그분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시군요?" 소년은 흥분하다가 다시 낙담했다. "……." 독안신군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는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잠깐 궁리하다가 소년의 손을 꼭 쥐며 한 자 한 자 알아듣기 좋게 끊어 말했다. "나… 나는… 십삼 년 전 자부에 가서 자부신단(紫府神丹)을 얻을 작정이었다." "……." "자… 자부신단은 아주 귀한 것으로, 백골(白骨)에 살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 그것을 얻는다면 내공을 찾을 수 있기에, 부… 부상당한 몸을 끌고 자부로 갔던 것이다. 그… 그러나 자부는 세상에 없었다." "없… 없다니요?" "멸문(滅門)된 것이다. 내가 닿기 바로 전에……." "으으……!" 소년이 주먹을 쥘 때,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나… 나는 허탈했다. 그… 그래서 한동안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메워진 자부를 떠날 줄 몰랐다. 그… 그러다가 너… 너를 안고 있는 자부선자를 보게 된 것이다." "아……!" 독안신군은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네… 네 어머니는 죽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핏덩이인 어린 너를 안고 있었다. 자… 자부가 괴고수(怪高手)에게 쉽게 당한 이유는, 네… 네 어머니가 너를 낳은 직후이기 때문이었단다. 네… 네 어머니는 나보다 강한 무림계의 절정고수였다. 그리고… 신기한 의술과 연단술(煉丹術)을 지니고 있기에, 세외일선자(世外一仙子)라 불리우며 정사의 모든 고수들에게 존경받았었다. 하나, 천… 천사교의 대침공 때 많은 부하를 잃고 피비린내 에 질려 봉문(封門)해 자부를 금지(禁止)로 만든 채 일 년을 보냈지. 그… 그러다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것이다." "어… 어느 놈들이……!" 소년이 크게 외치자. "나도 모른다. 그리고 네 어머니도 모르는 채로 죽어 갔다. 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었다." 독안신군은 눈을 다시 스르르 감았다. 그의 뇌리 속으로 떠오르는 한 폭의 그림이 있었다. 십삼 년 전, 그는 정사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육했던 천사교도들에게 당해 무공을 잃은 폐인이 되어 자부를 찾은 처지였었다. 영약이 많이 비장(秘藏)되어 있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자부는 소문과는 달리 한 폭의 지옥도였고, 그는 다 죽게 된 여인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핏덩어리를 안고 있었고, 핏덩이는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 젖을 빨고 있었다. 여인은 독안신군이 자신 곁으로 오자, 핏덩어리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었다. "이… 이 아이를 부탁합니다. 이 아이는 냉옥룡(冷玉龍)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아이입니다. 그러나 분명 자부(紫府)의 아이이니, 바르게 키워야 합니다. 이… 이 아이를 무림명사(武林名師)의 전인으로 들여보내 자부의 원한을 해결하도록 해 주십시오. 자옥패로 이 아이의 신분을……." 자신이 자부선자임을 밝힌 여인은 이렇게 말하며 사신(死神)을 따라 이승을 떠나갔었다. 처녀로 소문난 여인, 자부선자가 아니었던가? 강호 출입이 거의 없고, 다만 행운으로 자부의 소재지를 알고 찾아온 몇몇 무인에게 영단을 하사해 선녀 소리를 듣던 자부선자의 최후는 그런 것이었다. "그… 그것이 너와 나의 첫 대면이었다." 독안신군은 자옥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그 패에는 비밀이 있다. 하나, 나… 나는 그 비밀을 풀지 못했다. 너… 너를 남에게 맡기지 못한 이유도 그것이다. 나는 그… 그것이 자부의 신패임을 밝히고 싶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그리고 나는 과… 과거 악행을 많이 한 자라, 백도고수들 면전(面前)으로는 나서지 못할 처지였다. 그… 그래서 네 어머니가 내게 부탁한 것을 아직도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말은 거짓말 같았다. 소년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멋대로 꾸며낸 말 같았다. 하나, 그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해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 여긴다는 것은 그를 너무도 천박히 보는 것이리라. "나… 나는 녹림도에서는 절정이나, 천… 천하무림계에서는… 말석(末席)도 차지하기 힘든 하수다. 게다가 탐…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악행을 많이 해 비참해지고도 어느 한 군데 갈 곳조차 없는 처지였다. 모… 모두 내가 저지른 일 때문이지. 하나, 네… 네게는 정말 미안하다." "할… 할아버지… 제… 제가 어찌 할아버지를 미워하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저의 은인이십니다. 그리고 저의 스승이고, 저… 저의 친할아버지 이상이십니다. 저를… 저를 두고 떠나지 마십시오!" 그가 흐느끼자. "너… 너를 그간 모질게 대한 이유는 강… 강호가 험난해… 강… 강한 사람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너… 너는 나… 나이답지 않게 강하다. 어… 어떠한 시련이라도 참고 이길 수 있다. 나… 나는 네… 네게 시시한, 아주 시시한 녹림의 무공을 가르치는 대신… 네… 네 끈질긴 기백을 가르쳐 준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나… 나와는 아주 달리… 평생을 착하게 산 네… 네 어머니 자부선자가 부러웠고 존경스러워… 네… 네게 나의 마지막 충정을 다한 것이다." 그는 점점 기력을 잃어 갔다. "절대… 내가 널 키웠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도 험난한 세상…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네가 나로 인해 곤욕을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독안신군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기는 하나, 들리지 않았다. 휘이잉-! 찬바람 소리가 그의 말소리를 완전히 가려 버린 것이다. "할… 할아버지! 으흐흑……!" 소년의 울음소리가 설마의 포효(咆哮)를 능가했다. "저… 저를 두고 가시면… 저만 이 세상에 떨어뜨리고 무정히 가시면, 저는 어이 살란 말씀이십니까?" 소년은 울며 뒤로 나뒹굴었다. 몸뚱이가 내팽개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눈보라가 이는 순간, 두 사람의 몸뚱이가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② 폭설은 새벽 무렵에 그쳤다. 그 언제 성난 설마(雪魔)의 광란이 있었더냐 싶게 순백으로 화장한 나부산에 은밀하게 여명이 다가왔다. 한 길 넘게 쌓인 설상(雪上)을 흐르는 뽀얀 연무, 새벽 빛에 어슴푸레 보이는 설수(雪樹), 설암(雪岩)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산중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휘익-! 돌연, 나부산(羅浮山)의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 회의인영(灰衣人影)이 있었다. 한 번 움직일때마다 사십 장씩을 나아가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곧 관(棺) 속으로 들어갈 듯 보이는 계피학발의 늙은이였다. 쥐색 장포를 걸쳤고 머리 위에는 털모자를 썼는데, 이상하게도 뒤통수 부분에는 머리털이 없었다. 완전한 대머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미타불… 대자연의 힘은 무한하군." 질풍같이 치달리는 회의인은 노승이었다. 눈빛이 아주 흐릿하고 양쪽 태양혈이 밋밋한데, 겉보기와는 완전히 달리 축지성촌술(縮地成寸術)로 치달리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에 초연해야 마땅할 승문의 사람이거늘, 짓고 있는 표정이 그리 밝지는 못했다. "천하가 이리 좁단 말인가? 단 하나의 기재를 찾기 위해 백 일 간 천하를 주유했는데, 쓸 만한 기재를 찾지 못하고 곡(谷)으로 돌아가야 하다니……." 노승은 몹시 실망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들은 나와 사람을 보는 눈이 다르니, 기재라 할 재목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노승은 속으로 말하며 간간이 눈살을 지푸렸다. "천사교는 꼭 돌아온다. 그 날이 되면… 중원천하가 지금의 설국(雪國)보다도 더 꽁꽁 얼어붙는다. 그것은 자명하다." 노승은 중얼거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부처님이시여! 소승(小僧) 천륜(天輪)이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눈에 차는 인재를 찾지 못한 것인지 일러 주십시오." 노승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계속 치달렸다. 그의 목적지는 어디인지 모르나, 혼신공력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갈 길이 급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휘익-! 회색 선(線)을 그으며 달리기를 일식경(一食頃). 노승이 눈 위를 달리면서도 발자국 하나 내지 않고 스쳐 지나가 나부산의 산신을 깜짝 놀라게 하며 이름 모를 설곡(雪谷)에 당도했을 때였다. 돌연. "으음……!" 갑자기 한 줄기 바람 소리와도 같은… 노승의 고막 속으로 파고드는 아주 경미한 신음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정말 경미했다. 주위가 아주 고적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회의노승이 삼 갑자 수위의 절세내공을 지니지 못했다면 바삐 달리는 가운데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으음……!" 신음 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졌다. "아미타불… 이런 눈 속에 어느 불쌍한 중생(衆生)이 있단 말인가?" 노승은 신음 소리에 발목이 잡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순간, 이제껏 시체의 눈빛같이 멍하기만 하던 그의 눈빛이 혁혁한 청망을 폭사해 새벽의 어스레함을 환히 밝혔다. '이 근처인데…….' 회의노승이 귀를 쫑긋 세우며 천이통(天耳通)의 수법을 시전할 때. "할… 할아버지… 으으, 저… 저는……." 어린아이의 소리가 노승의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엇!" 회의노승은 말소리에 끌려 눈길을 돌리다가 일순 한곳에 모으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른 곳에 비해 눈이 조금 불룩하게 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눈 속에서 쑥 빠져 나와 있는 손 하나가 있었다. 아주 작은 손인데, 빛깔이 시체와 같았다. 그러나 경미한 신음 소리가 날 때마다 손이 조금씩 움직이며 눈더미가 흐트러지곤 했다. "누군가 눈 속에 파묻혀 있구나……." 회의노승은 중얼거리며 눈에서 빠져 나온 손이 있는 곳을 향해 신형을 폭사시켰다. 노승은 일위도강신법(一葦渡江身法)이라는 불문신법(佛門身法) 한 가지를 이용해 십 장을 단번에 가로질러 눈더미 곁에 이르렀다. 그 곳에 이르자 멀리서는 볼 수 없었던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상반신을 눈 밖으로 드러낸 채 눈을 꾹 감고 있는 흑의소동 하나가 있었다. 얼굴이 자색(紫色)으로 물든 십삼 세 정도의 소년인데, 옷이며 피부가 모두 얼음으로 뒤덮여 동사(凍死) 직전임을 쉽게 알게 했다. 소년은 한 손으로 눈을 휘젓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한 가지 물건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자옥패였다. 노승이 흑의소년을 자세히 살필 때. "으으……!" 흑의소동의 코에서 두 줄기 검은 피가 주르르 흘러 나오며 그의 신음 소리가 조금 전에 비해 훨씬 거칠어졌다. 소년은 죽어 가고 있었다. "쯧쯧, 피가 다 얼어 버린 모양이군. 어떠한 연유를 가진 아이이기에, 이 험한 산중에서 길을 잃고 눈에 파묻혔단 말인가?" 노승은 자비심의 발로인지 애달픈 표정을 지으며 급히 흑의소동의 오른손을 쥐고 위로 끌어당겼다. 푹-! 흑의소동의 몸뚱이가 노승의 손에 끌려 눈에서 빠져 나올 때,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한 구의 시체가 나타났다. 꽁꽁 얼어 죽은 흑의노인의 시체가 흑의소동의 몸뚱이 밑에 있었던 것이다. "……." 회의노승은 얼어 죽은 노인의 시체를 보자, 인생 무상을 느끼는지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아미타불… 중생을 구하는 것이 불가인의 도리이거늘… 아, 영웅전(英雄殿)에서 십사 년을 지내느라 그 엄숙한 일을 소홀히 했구나." 회의노승은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가 흑의소동을 눈 위에 반듯이 눕혔다. 노승은 품안을 뒤져 작은 목갑을 꺼냈다. 목갑 뚜껑을 열자 청아한 향기가 물신 퍼져 나왔다. 그 안에 든 것은 한 알의 금단(金丹)이었다. 크기가 오리알만한 것인데, 겉에 밀랍이 발려 있었다. '대환단(大還丹)을 쓰지 않으면 이 아이는 죽는다. 세상 사람들이 백만금보다 귀히 여기는 소림대환단이나, 지금 이 소년의 꺼져 가는 생명의 값에 비할 수는 없다.' 노승은 자비스러운 표정이 되어 미소짓다가 단약에서 밀랍을 떼어 냈다. 그러자 향기가 한결 짙어졌다. 잠시 후. "이 늙은 중이 길을 서둘렀다면 네가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 너의 할아버지가 죽은 것은 모두 내 잘못이다." 노승은 자신이 늦게야 이 곳을 지나치게 되었음을 후회하는 투로 말하며 단약을 소년의 입술 사이에 넣었다. 소림대환단. 백팔 가지 약재를 소림비전의 약방문으로 만든 신약인 바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고, 복용한다면 일 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는 무가지보이다. 대환단은 침에 녹으며 소년의 뱃속으로 흘러들었다. 직후. "으으……!" 이제까지 정신을 잃고 있던 흑의소년이 감았던 눈을 무겁게 떴다가는 다시 스르르 감아 버리고 말았다. 한순간의 일이었으나, 노승에게는 정말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노승의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의 두 눈을 스쳤던 너무나도 영롱한 눈빛에 영혼이 마비되어 버린 듯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심기(心機)를 지닌 아이는 아니다. 눈빛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긴, 보통 아이였다면 벌써 얼어 죽었겠지." 노승은 중얼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소년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진기를 소년의 몸 안에 불어 넣어 주기 위함이었다. 한데. '으음, 희미하기는 하나 진기(眞氣)를 지니고 있군. 어렸을 때부터 토납운기(吐納運氣)를 해 오지 않았다면 이런 진기를 지니지 못할 텐데… 이 소년은 무가의 자제란 말인가?' 노승은 소년의 체내에 진기를 주입하던 중, 아주 경미하기는 하나 진기의 흐름이 있음을 발견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무가의 자제라면 눈 속에서 길을 잃고 얼어 죽지는 않을 것인데 어이해 이런 사경(死境)에 처했는지, 게다가 놀라운 것은 옷차림이 거지 중의 상거지라는 것이었다. "모를 일이군." 회의노승은 고개를 갸웃하며 진기주입을 계속했다. 노승은 지금 촌각을 다투는 몸이다. 동사 직전의 소년을 구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마냥 눌러 앉을 시간이 없다. 진기의 힘으로 대환단의 약효를 북돋워 준다면 소년은 빠르게 회복할 것이다. 진기를 주입한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아… 아미타불……!" 회의노승이 소년의 몸에 대었던 손을 떼어 내며 두 손바닥을 한데 합했다. 그는 합장하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부처님의 가호다. 아, 백 일 내내 찾아다녔던 천하기재가 바로 이 아이다.' 노승의 눈에 엷은 물막이 생겼다. 노승에게는 하나의 염원이 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십사 년을 사용했고, 그 일에 적합한 인재를 찾기 위해 지난 백 일 간 천하를 주유(周遊)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소년의 체질은 그가 그토록 불망하던 천골지체였다. 아니, 그가 바라던 바 이상이었다. 노승의 눈은 소년의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상승무공(上昇武功)을 익히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근골(筋骨) 이군. 가히 백 년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근골이다. 게다가 눈 속에 빠지고도 얼어 죽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단한 심성(心性)을 가졌을 것이니… 아, 이제 이 아이에게 천부적인 오성(悟性)과 암기력(暗記力)만 있다면 빈승의 걱정은 모두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회의노승의 눈에서 신광이 쉬지 않고 흘렀다. '제일 좋은 조건은, 이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내공법을 익히기는 했으나 조악한 것은 하나도 있지 않아… 그 기운이 지극히 정순(精純)하다는 것이다. 가히 얼음처럼 티없이 깨끗한 체질이 아닌가!' 노승은 매우 기뻐하며 손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파팍-! 그의 손가락이 무수한 지영(指影)을 날릴 때마다 소년의 몸뚱이가 조금씩 흔들렸다. 노승의 손가락은 소년의 몸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손가락 끝에서 일어나는 무형지공(無形指功)은 허공을 격해 소년의 몸 속으로 파고드는 중이었다. 아무 데나 마구 점(點)하는 것이 아니라 요혈(要穴)만을 골라 점하는 추궁과혈(推宮過穴)이었다. "으음……!" 소년은 시간이 흐를수록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자색이었던 얼굴빛이 제 살색으로 돌아온 지 오래이고, 지금 그의 얼굴빛은 잘 익은 홍시같이 붉었다. 반면 회의노승은 한여름을 만난 듯 땀을 뻘뻘 흘려 속옷을 축축이 할 정도였다. 추궁과혈하는 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기를 소모하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른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소년의 몸은 우윳빛 기류로 덮여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류는 더욱 짙어졌으며, 나중에는 안개 덩이만 보일 뿐이었다. ③ 얼마가 지났을까? 흑의소년은 꿈결인 듯한 독경(讀經) 소리를 들으며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으음……!" 소년은 눈을 찡긋하다가 눈까풀을 떴다. 입 안을 감도는 향긋한 내음이 느껴졌다. 주위가 아주 훤하게 보였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회의승려 한 명이 작은 흙무덤을 앞에 두고 극락왕생경(極樂往生經)을 외우고 있는 것이었다. 늙은 중의 독경 소리는 창노(蒼老)하고도 낭랑(朗朗)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릴 만했다. 그는 누구를 위해 극락왕생경을 외우고 있는 것일까? 그 앞에 있는 흙무덤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을 독경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일까?' 흑의소년은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이제껏 남에게 천대받으며 살아온 처지였다. 가장 가까운 노인이 그를 개 패듯 학대했고, 그가 동냥할 때마다 사람들이 그를 괴롭히며 조롱했었다. 그의 천성이 지극히 후덕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나이답지 않게 거칠고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는 것은 짧다면 짧은 십삼 년 세월이 그에게 가르쳐 준 한 가지 교훈이었다. 그는 겁먹은 표정이 되어 노승의 뒷모습을 살피다가 갑자기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아… 아니?" 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 내가 죽었단 말인가? 으으, 추위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무게가 느껴지지 않다니……." 소년이 깜짝 놀랄 때였다. "아미타불… 빈승이 너의 임독양맥(任督兩脈)을 타통(打通)시켜 주었다. 그래서 춥지 않은 것이다." 이제까지 독경하고 있던 노승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얼굴이 주름살로 덮인 노승의 표정은 너무도 인자해 보였다. "스… 스님!" 흑의소년은 노승의 자상한 눈초리를 받기 괴로운 듯, 얼른 눈길을 돌렸다. 남에게서 도움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해 사람만 보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는 모양이었다. 노승은 소년이 벌벌 떠는 것이 측은한 듯 쓴웃음을 짓다가 소맷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슥-! 미풍이 일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소년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어… 엇!" 흑의소년이 유령에 홀린 듯하자. "아미타불… 너는 능공섭물진기(凌空攝物眞氣)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이로구나!" 회의노승이 진기를 회수해 소년을 눈 위로 내려서게 하며 미소를 지었다. "능… 능공섭물진기가 무엇인지요?" 소년의 목소리는 겁먹은 것이나,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의 얼굴도 정말 아름다웠으나, 가장 아름다운 것은 두려운 듯 약간 떨리고 있는 봉황을 닮은 눈빛이었다. "허허… 능공섭물진기란 내공력을, 허공을 격해 발사해 물건을 움직이게 하는 이물공력(移物功力)이란다." 노승이 웃자. "그… 그럼 스… 스님은 무림고수시군요?" 소년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렇단다. 그런데 너는 어떤 아이냐?" "저… 저는 냉옥룡(冷玉龍)이라고 합니다." 흑의소년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냉옥룡이라… 허허… 정말 좋은 이름이구나. 그런데… 네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더냐?" 노승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제 할아버지는 독안신군(獨眼神君)이십니다." 냉옥룡의 대답이 노승을 흠칫 놀라게 했다. "독… 독안신군? 공동산 중에 녹림맹을 결성한 다음, 온갖 악행을 한 녹림맹주가 바로 네 할아버지더냐?" 그가 깜짝 놀랄 때. "이… 이제 보니… 으으……!" 냉옥룡이 흙무덤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할아버지의 무덤이구나. 할아버지가… 시체가 되어 차가운 흙 속에 드러누우셨단 말인가?' 냉옥룡이 눈빛을 흐트릴 때. "흠……!" 노승의 헛기침 소리가 그의 뇌리를 세게 두드렸다. "윽!" 냉옥룡은 쇠종 소리가 고막을 파고드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무… 무슨 기침 소리가 이리도 크단 말인가?' 냉옥룡은 귀신에게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어찌 불문 사자후신공(獅子吼神功)을 알겠는가? 그가 눈알을 떼구르르 굴릴 때. "너하고 함께 있던 흑의인이 독안신군이었더냐?" 노승이 아주 굳은 얼굴로 물었다. "예?" "너는… 그와 어떤 사이냐? 친손자냐?" "아닙니다." "그럼… 그의 전인(傳人)이냐?" "아닙니다. 저는… 할아버지와 함께 천하를 주유하는 처지였습니다." "어떤 사이이기에 함께 다녔는지 소상히 말해 봐라." 노승은 한 가지 생각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기에 냉옥룡에 대해 빠짐없이 알려 했다. 냉옥룡은 천성이 남을 속이지 못하는 듯, 자신의 추악하고도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아주 소상히 이야기했다. "저는 태어날 때 버려졌습니다. 할아버지가 저를 거두어 길러 주셨는데, 이제껏 한 군데 머물러 살지 않고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했습니다." 그는 아주 또박또박 말했다. 독안신군이 과거의 녹림맹주답지 않게 상거지가 되어 자신과 함께 십삼 년 간 천하를 돌아다녔다는 것, 그 이유는 영약을 구하기 위함인 줄 알았는데… 어젯밤 진정한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급기야 그는 자신이 자부선자라는 여인의 아들이라는 것마저 밝혔다. 그가 자옥패를 쥐고 말할 때. "자… 자부선자라고? 네… 네가 백도맹을 위해 자부신단 천 개(個)를 기증한 세외일선자(世外一仙子) 자부선자의 아들이란 말이냐?" 노승이 깜짝 놀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매우 의혹스럽다는 눈빛이 되었다. '자부선자는 당시 십구 세의 처녀였다. 이 아이가 자부선자의 아들이라면, 자부선자가 백도맹에 자부의 모든 영단을 전한 직 후 이 아이를 배었다는 말이 아닌가? 흠, 결백하기로 천하제일이던 자부선자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 소문도 내지 않고 아이를 배는 그런 일을… 독안신군이 이 아이에게 살아 나갈 희망을 주기 위해 그런 일을 꾸며 냈을 것이다. 용기를 갖고 살라고…….' 노승은 그런 생각을 하며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부선자는 아주 훌륭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십사 년 전, 천사교도들이 중원천하를 피로 물들일 때 세상을 위해 자부신단 천 개를 내놓았단다." "예… 에?" "부상자가 많았기에 그간 자부에서 만든 모든 영단을 백도를 위해 희사했던 것이지. 그리고 훌쩍 세상을 떠나 은거했는데… 아미타불… 의문리에 죽어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구나. 하나, 너는 자부선자의 아들임을 속단해서는 안 된다." "왜… 왜요?" "이유는 네가 더 자라면 알게 될 것이다." "……." 냉옥룡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세상이 독안신군이란 인물을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지 안다면, 아마 그런 어색한 표정은 짓지 않았을 것이다. '독안신군이 무공을 잃고 떠돌이가 되어 세 끼 밥 먹기도 힘들게 되자, 연약한 아이를 노예같이 부렸던 게로군. 착한 아이… 노마(老魔)를 위해 갖은 수발을 다들며 모진 학대를 받았으면서도 이렇듯 씩씩하게 자라다니… 정녕 부처님의 가호를 받은 아이이다.' 회의노승은 미소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달리 갈 곳이 있느냐?" "없… 없습니다." 냉옥룡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빈승과 함께 가지 않겠느냐?" "예… 에? 스님께서 저… 저같이 어리석은 아이를?" "허허… 네 마음먹기에 달렸다." "스… 스님이 버리시지 않는다면… 스… 스님을 따라가 스님을 위해 밥도 짓고 빨래도 하겠습니다. 저… 저를 이대로 두고 가지 마십시오." 냉옥룡은 지극한 외로움을 느끼는 듯, 꿇어앉으며 노승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는 울고 있는데,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아미타불… 너를 하인으로 부리기 위해 데려가는 것은 아니란다. 하나, 너는 편히 지낼 수 없다." "어… 어떤 것이든 감수하겠습니다." "온갖 시련이 있을 것이다. 일곱 가지의 난관이 있고, 네 명의 마귀 같은 무서운 사람이 너를 들볶을 것이다." "저…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대… 대신……." 냉옥룡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흠, 무슨 부탁이 있구나." 노승이 슬며시 웃자. "예." 냉옥룡의 눈빛이 전과 달리 샛별같이 반짝거렸다. "서슴없이 말해 봐라!" "제… 제게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무슨 고생이든 다 하겠습니다." 냉옥룡이 절규하듯 말하자. "허허허……!" 노승은 말로 대답하는 대신 웃으며 냉옥룡의 등덜미를 쥐고 위로 훌훌 날아올랐다. 휙-! 그는 단번에 사십 장 멀리 날아갔다. 그 신법은 나부산 위로 오를 때보다 조금 뒤지는 것인데, 이유는 냉옥룡을 위해 진기를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곧 사라졌다. 그리고 하나의 쓸쓸한 흙무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첫댓글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깊아가는 초겨울의 밤에 마음은 무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