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7章 일 년 후 어느 날 진령(秦嶺). 태백(太白), 종남(終南), 상산(常山)에서 화산(華山), 멀리 태행산(太行山)으로 이어지는 산서성(山西省)의 거령(巨嶺)이다. 그 깊은 곳, 산세가 험하기에 일 년 내내 사람의 흔적을 찾아 보기 힘든 곳이다. 원시림 대신 거친 난석군(亂石群)이 펼쳐져 있는 곳. 금수가 발을 들이기 힘든 곳인데, 언제부터인가 사람의 숨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으음……!" 지옥에서 흘러 나오는 듯, 신음 소리에는 인간으로는 견디기 힘든 처절함과 비애가 실려 있었다. "크으으……!" 그 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뾰족한 바위로 덮인 골짜기 깊숙한 곳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인데,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으흐흑……!" 숨소리는 울음에 가까웠다. 아니, 그 소리는 혈한을 이기지 못하고 전율하며 내는 저주와 같았다. 검봉(劍鋒)같이 날카로운 바위가 난립해 있는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기괴한 모습을 하고 저주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는 산발괴인(散髮怪人) 하나가 있었다. '죽는 것이 더 편하다. 그러나 이 한을 풀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사부님에게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꼭 말씀드려야 한다. 사부님의 제자가 색마가 아님을 밝히리라. 그리고 그 잔혹한 도배들을 기필코 내 손으로 죽이리라!' 가는 신음 소리를 내는 산발괴인, 그는 아주 기이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는 두 발목을 칡덩굴로 감아 돌부리에 달았으며, 몸을 대롱대롱 거꾸로 매단 채 두 손바닥을 한데 합하고 있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것은 옷이라기보다 누더기에 가까웠다. 찢어진 누더기 사이로 상흔(傷痕)이 역력했다. 가장 큰 것은 하복부에 나 있는 검상(劍傷)이었다. 그것은 이미 아문 것이나, 너무도 깊어 한 마리 붉은 뱀이 그의 아랫배를 칭칭 동여매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는 거꾸로 매달린 채 무엇인가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남에 의해 달아매어진 것일까? 이 근처는 무인지경(無人之境)이 아니었던가? 산발괴인은 누구이기에 거꾸로 매달린 것인가? 황혼(黃昏)! 주위가 새빨간 피같이 붉어지고, 삐죽삐죽한 바위가 석양에 붉게 타오르며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거꾸로 매달려 있던 산발괴인은 어느 순간부터 합장한 손을 풀고 두 팔을 거꾸로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틀렸군. 너무 심하게 당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마를 타고 흘러 머리카락을 적셨다. '일 년 내내 고생했는데…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 산발괴인의 눈에 핏발이 칼처럼 일어났다. 너무도 차가운 한망이 소름끼칠 정도였다. '역천진기(逆天眞氣)로 진기를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공력이 일 성만이라도 살아난다면 희망은 있다.' 괴인은 참담한 가운데, 하나의 구결을 외고 있었다. 그는 낙담한 듯 눈을 감고 아주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땟물이 주르르 흐르는 얼굴, 봉두난발이 된 머리카락, 거지라도 입기 싫어 할 누더기가 그가 지닌 전부이나, 더럽고 추악하다고 여겨지기보다는 아주 신비롭게 보였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땟물로 더러워진 얼굴이기는 하나, 너무나도 빼어난 모습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귀골(貴骨)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것은 아주 웅휘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이었다. 그러기에 비천한 처지인데도 남달라 보이는 것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괴인이 거꾸로 매달린 채 잠들었을 때. 돌연, 경미한 파공성과 함께 난석군 사이로 움직이는 백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그는 매우 빠르게 달렸으나 몸이 불편한 듯,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으으, 밀지(密紙)를 훔쳐 간 자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 그… 그 자를 놓치면 일이 생긴다." 백의인은 사람 그림자 없는 바위 골짜기에 이르자, 신법을 약간 늦추며 중얼거렸다. "꼭 잡아야 한다. 그리고 오행마궁(五行魔宮)의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를 알아 내야 한다." 가슴을 움켜쥐고 말하는 백의인은 노승이었다. 그의 옷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여기저기가 검에 베어져 보기 흉했다. "으음……!" 그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한숨을 돌리고 가려는 듯, 등을 바위에 기대고 서서 쓰디쓴 숨소리를 냈다. '어떤 자들이기에 그리도 강한 마공(魔功)을 사용할까? 아, 하여간 대단한 자들이다. 수년 간 우리를 감쪽같이 속여 맹 내에서 당주(堂主)라는 지위를 차지했으니… 그들의 배후에 있는 세력은 실로 막강하리라.' 백의노승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갑자기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언제부터인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산발괴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질긴 칡덩굴로 두 다리를 묶인 채 대롱대롱 달아매어져 있는 괴인 하나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눈빛은 아주 이상했다. "아… 아미타불……!" 백의노승은 처음엔 귀신을 보았는 줄 알고 기절초풍을 했다가는, 산발괴인이 귀신이 아니라 아주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불호성을 외우며 높은 바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괴인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슥-! 그가 피 묻은 흥포자락을 날리며 다가가자, 산발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림사 일위도강(一葦渡江)……." 그의 목청에서 울려 나오는 말소리는 너무도 경미해 백의노승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미타불… 빈승의 처지가 풍전등화이나, 중생을 구하는 일을 미룰 수는 없지." 노승은 괴인이 남에게 잡혀 거꾸로 매달렸다고 믿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칡덩굴을 향해 지력(指力)을 퉁기려 했다. 그 때. "스님! 그러실 필요 없소. 줄을 끊지 마시오." 산발괴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맑고 청아했다. 그의 외모와 목소리에는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귀의 모습에 신선의 목소리라고나 할까? "허허… 시주는 어이해 빈승의 보살행(菩薩行)을 거절하는가?" 백의노승이 들어올렸던 손을 내리고 묻자. "나는 스스로 몸을 매단 처지외다. 줄을 끊는다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얼마 후 내가 다시 줄을 써 나의 몸을 달아매는 수고를 되풀이시키는 일에 불과합니다." 산발괴인은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 때, 처음 단순한 호기심과 자비심에 끌렸던 백의노승은 산발괴인의 자세를 자세히 보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비감과 경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 자세는… 불문의 역천현공(逆天玄功)을 수련하는 방법과 똑같다. 설마 이 자가 본사(本寺)의 장경각(藏經閣)에만 있다는 벌근세수경 안의 현공진기(玄空眞氣) 수련법(修練法)을 알고 있단 말인가?' 백의노승은 역천현공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흠칫 놀랐다. 그것은 아주 신묘한 진기 운용법이었다. 몸을 거꾸로 매달아 진기(眞氣)의 흐름을 정상적인 상태에서 완전히 뒤바꿔 막힌 혈도를 타통케 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실전된 것이었다. 피를 역행시켜야 하기에 기초를 닦을 때까지 거꾸로 생활해야 한다. 완성된다면 혈도의 위치가 바뀌게 되어 보통의 점혈법으로는 제압될 수 없는 특이한 신체 구조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역천현공을 얻기까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역천현공이 오묘함에도 불구하고 실전(失傳)의 위기에 빠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역천현공을 익히려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백의노승이 아주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누구이기에…….' 산발괴인, 그가 누구이기에 이렇듯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에서 역천행공을 수련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백의노승이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역천행공은 위기에 처한 사람만이 얻는다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는 사람만이 시전하는 것이 바로 역천행공의 특이한 점일 것이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이 다급했기 때문이리라. 노승이 미심쩍은 눈빛을 띠고 있을 때였다. 돌연, 동쪽과 서쪽에서 휘파람 소리와 장소성이 동시에 들려 왔다. "휘익-!" "우……!" 아주 큰 소리인데, 진기가 충만한 소성이었다. 이어. "……." "어디 계십니까?" 두 사람이 난석군을 향해 오며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청삼에 서생(書生) 차림이고,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여승이었다. 두 사람이 불안해 하는 표정을 하고 난석군 사이로 들이닥칠 때, 갑자기. "아미타불… 빈승 법료(法了)는 건재하오. 그러니 안심들 하시오." 한 곳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나며 흰 그림자 하나가 높은 바위 위로 날아올랐다. 전신을 피로 물들인 백의노승이 환한 표정이 되어 사 장 높이 바위 꼭대기로 날아올라 두 사람이 쉽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아……!" "구대봉공(九大奉公)들의 행방이 백 리 전에서부터 묘연해져 근심이 태산 같았습니다. 게다가 저쪽에 선사(禪師)의 소지품이 떨어져 있어, 우리들은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했다고 믿고 뿔뿔이 흩어져 찾아다니던 중이었지요." 서생과 비구니는 어느 정도 안도해 하며 법료선사 곁으로 다가섰다. 법료선사! 그는 바로 소림사의 이십팔대 장문인이 아닌가? 그는 의당 숭산 소실봉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이례적으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법료는 천사교의 습격에 죽은 법우에겐 사제가 되는 사람으로 소림사 절기 수십 가지가 능통했다. 그의 무공은 당금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끼이는 것이었다. 십구 년 전 잇달아 실종한 백도 십사 기인 중 어느 하나에 비한다면 뒤떨어지나, 후진들 중에서는 가히 고봉(高峰)이라 여겨지는 신공의 소유자였다. 법료에게는 소림사 방장이라는 신분 이외에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다. 그것은 백도맹의 구대봉공(九大奉公) 중 제일봉공(第一奉公)이라는 것이었다. 백도맹은 당금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정파 세력을 말한다. 천사교의 침공 이후 백도는 자연스럽게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그것은 천사교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고, 천 년 간 이어 온 백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자연스런 몸부림이었다. 백도는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지극히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에 타파를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십구 년 전, 천사교의 침공 때 백도가 지리멸렬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천사교 침입으로 백도가 얻을 수 있었던 소득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백도맹에는 수백 개 문파가 속해 있는데, 그 중 거대한 방파 구 개의 지존들이 바로 백도맹 구대봉공이었다. 법료는 두 사람이 자신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근심스러워하자, 자비스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산 한쪽을 가리켰다. "삼 년 간 백도맹의 비밀을 훔쳐 낸 오행마궁의 토존자(土尊子)는 지금 포위당해 꼼짝달싹 못하는 중이오. 빈승을 제외한 여러 봉공들이 연환(連環)해 그를 가로막고 있소. 빈승은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급히 가는 길인데, 사태(師太)가 발견한 그것은 빈승이 일부러 떨어뜨린 것이외다." 법료선사는 조금 전에 비할 수 없이 안도해 하며 말을 이었다. "빈승은 그와 겨루다가 이렇게 다친 것이오. 빈승은 싸움판에 계속 머물 경우, 다른 분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 혼자 몸을 빼 원군을 찾아나선 것이오. 허허… 여러분들이 때맞춰 당도해 주셨으니… 허허허… 백도맹이 이제야 일심(一心)의 경지에 이르러 몸이 천 리 만 리 떨어져 있어도 뜻이 서로 통하는 것 같구려." 법료는 편안함을 가장하려 했으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눈빛이 흐트러지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그를 찾아온 두 사람은 법료에 비해 일배분(一拜分) 뒤진 사람들이나, 강호에서는 최절정 고수로 평가되는 사람들이었다. 화산 청삼서생 낙강룡(洛剛龍), 아미파 결진사태(結塵師太). 현 무림의 중진들이고 백도의 세력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 결진사태는 일신 무공이 입신지경(入神之境)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있으며, 정법사태 이후 최고라 불리는 아미산의 제일고수였다. 결진사태의 손에는 피 묻은 흰 옷자락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법료의 옷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결진은 같은 불도인으로 연민지정을 느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뗐다. "구대봉공이 토존자라는 자를 쫓는 동안, 빈니를 비롯한 백도맹의 추적대들은 근처 삼백 리를 샅샅이 뒤져 토존자와 함께 맹 내로 잠입했었던 마궁(魔宮)의 하수들을 모조리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 그들은 잡히는 찰나, 입 안에 물고 있던 독단(毒丹)을 깨물어 자결해 버렸지요." "그렇소. 그들은 비밀을 지키지 못할 경우 자결하고 있소. 그러기에 이제껏 그 진정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것이오. 그들이 오행마궁이라는 방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알려졌기는 하나, 그것은 표면적인 사실뿐이오. 그들의 배후에는 어떤 놀라운 세력이 있는 듯하오. 지금 백도맹의 고수 오백이 한데 모인 이유는, 그 일의 중대성이 십팔 년 이래 제일 큰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사로잡아야 하오. 그들이 왜 수 년 간 백도맹의 비밀을 훔쳤으며, 또 훔친 비밀을 어디에다가 전했는지, 누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지금 훔쳐 낸 비밀이 오행마궁으로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료는 천하대파 소림사의 지존답게 몇 마디 말로 자신의 심경을 소상히 피력해 냈다. 그는 사실 무공보다는 불경의 도가 심오한 사람이었다. 강호가 험난하지 않았다면 아마 불경을 읽으며 평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는 고통을 망각한 듯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팔대봉공이 지키고 있는 한, 토존자는 도망가지 못하오. 사실 구대봉공이 모두 나선 이유는, 그의 무공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자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오. 지금 두 분이 팔대봉공을 찾아가 빈승이 부상당해 비운 자리를 메운다면… 허허허… 그는 오늘 밤이 다하기 전, 사로잡힐 것이오. 그러니 어서 진령의 접천단(接天壇)으로 가 보시오." 법료는 그렇게 말한 후, 고개를 돌렸다. 그는 뒤쪽 한 곳을 바라보다가 크게 놀라게 되었다.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은 없고, 대신 끊어진 칡덩굴이 밤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떠났군. 으음, 이목을 숨기고 떠나다니… 보기와는 달리 절세신공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그는 의혹을 이기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를 일이군.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는 단 한 번 보았을 뿐인 산발괴인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그것은 아주 신기한 일이었다. 세속사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소림 장문인에게 그리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 있다니……. 하여간 당금 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인 백도맹의 명숙들은 수구회의를 하다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슥-! 그들은 곧 모습을 감췄다. 대저 역사란 이렇듯 비밀스러운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다 떠난 후. "백… 백도맹……." 바위 아래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껏 숨을 꾹 참고 있던 괴인(怪人) 하나가 세 사람이 떠나가는 것을 보며 눈에서 기이한 광채를 발했다. 원한에 찬 눈빛이랄까? 아니면, 동경에 가득 찬 눈빛이랄까? "그 곳이 벌써 열렸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자들이 아니면 백도맹이라 불릴 수 없을 것이다. 더러운 것들!" 괴인의 눈에서 기이한 살광(煞光)이 일어났다. 보기에도 섬뜩할 정도의 살광. 그 눈빛에 접하는 사람이라면 야차(夜叉)와 눈이 마추쳤다고 여길 것이다. "흐흐… 다 지난 일이다. 흐흐……!" 그는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공을 되찾는다면 강호로 들어갈 것이나, 그렇지 않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장소에 머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음식과 거처가 없는 곳이라면 살 수 없으나, 나는 어디에서든 잘 살 수 있다.' 그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나는 금수(禽獸)만도 못한 존재이니까. 흐흐… 그러기에 금수만이 살 수 있는 곳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이지.' 그는 천천히 걸었다. 똑바로 걷지 못하고 삐뚤삐뚤 걷는데, 이유는 오른쪽 다리가 불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체 거꾸로 매달려 무엇을 했던 것인지, 왜 무림고수가 도우려 했는데 슬쩍 모습을 감춰 도움의 손길을 뿌리쳤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는지……. 얼마 후, 산발괴인은 마른 동굴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가, 아주 작은 짐꾸러미 하나를 둘러메고 걸어 나왔다. "떠나자." 그는 차게 내뱉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진령에 무림천하(武林天下)를 흥분시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대충 알게 되었는데도 일말의 호기심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속으로는 흥미를 느끼나, 표정만은 무정했다. 하여간 산발괴인은 백도맹 사람들로 인해 천라지망으로 뒤덮인 진령에 머물러 있기 싫은 듯,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점점 더 깊은 산을 찾아 들어갔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석양의 붉음이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빈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하나둘 별이 나타났다. 후두둑 별빛이 떨어져 내렸고, 유성 하나가 긴 꼬리를 끌며 검은 하늘 위를 가로질렀다. 산세가 험해지면서 길이 사라졌다. 전인미답의 곳. 아니, 너무 험해 산짐승도 가지 않는 곳. 괴인은 한시도 쉬지 않고 비틀거리며 발길을 옮겼다. 가다가는 비탈길에서 굴러 떨어졌고. "흐흐……!" 그는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데에도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비웃음을 흘리며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별빛만이 그와 벗이 되는 듯……. 천하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누구냐 할 때, 산발괴인은 제외되지 않을 것이다. 얼마를 걸었을까? 산발괴인은 발바닥이 찢어질 때까지 걷고 또 걷다가 한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길을 잘못 택했군.' 그는 짙은 운무(雲霧)가 달빛을 가리고, 앞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나자, 쓴웃음을 흘리며 등을 돌렸다. '이 곳으로 계속 가면 평지가 나타난다. 내가 가고 싶지 않은 인간 세상이 거기 있을 것이니… 흐흐… 가서는 아니 되지.' 그는 악랄한 표정이 되어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그가 황량한 산비탈을 지나 울울창창한 원시림 근처에 이를 때였다. "으으, 이… 이것을 전하지 못하면… 오백 관외족(關外族)이 모두 독살(毒殺)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우… 우리 종족(種族)을 위해서다." 원시림 안에서부터 처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숲에서부터 비틀비틀 달려나오는 흑의복면인 하나가 있었다.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피로 물들인 자인데, 왼손이 있어야 할 곳이 빈 소맷자락뿐이며 양쪽 옆구리에서 창자가 쏟아져 나올 정도로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그러나 달리는 속도는 아주 빨랐다. 스슥-! 그는 미친 듯 치달리다가 갑자기 걸음을 세웠다. 산발괴인이 자신이 달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흑의복면인은 한쪽 다리가 불편한 찢어진 가죽 옷차림의 괴인을 발견하는 찰나, 눈에서 살광을 폭사해 냈다. '들켰군!' 그는 이를 악물다가 젖먹던 힘을 다해 진기를 일으키며 산발괴인을 향해 오른손을 힘껏 쳐냈다. 쉭-! 그의 손바닥이 흔들리며 핏빛 장영이 일어났다. 산발청년은 혈색 장영이 몸을 휘감아 오자, 야릇한 표정이 되었다가 눈을 꾹 감았다. 순간. 펑-! 돌이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상체가 뒤로 크게 제쳐졌다. 산발괴인은 쓰러질 듯 휘청이다가 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아주 야릇한 표정이 되었다. 순간. "이… 이럴 수가? 네… 네가 노부 토존자(土尊子)의 장력에 적중당하고도 살다니……." 흑의복면인이 경악에 가까운 음성을 토해 냈다. 비록 상처를 입고 있다지만 그의 일 장은 청석을 가루로 만들 정도로 위맹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내공은 강기( 氣)만을 전적으로 파괴하는 극강의 무공이지 않은가. "쯧쯧, 어디서 혈영마공을 배웠는지 모르나 제대로 배우지 못했군. 가장 중요한 구결을 알지 못하기에 혈영마공이 제 위력을 다 발휘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극심한 내상을 입어 그 위력이 한결 떨어지는 것이다. 그 정도로는 나를 죽게 하지 못한다." 산발괴인은 담담히, 그러나 지극한 한기를 심어 말하며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며 몇 걸음 가자. "너… 너는 노부를 뒤쫓는 백도맹의 정예가 아니구나." 흑의복면인이 말하며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으으……!" 그는 일 장을 친 탓에 상세에서 이전보다 몇 배 더한 고통을 느꼈던지 오공(五孔)에서 피를 줄줄 흘렸다. 그의 앞가슴에 이상한 검흔(劍痕)이 남아 있었다. 무지개가 그 위를 스쳐 지나갔다고나 할까? 매우 독특한 검식에 당한 흔적이었다. 산발괴인은 지나쳐 가려다가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검흔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낙성검법(落星劍法)에 당한 흔적이로군. 일 식(式)으로 스물네 군데를 점하는 검법은 그것뿐이지!" 그의 말소리는 아주 비정했다. 목소리로 보아서는 약관 나이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나이답지 않은 냉막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중얼거리자. "백… 백도맹의 수법에 대해 잘 아는군." 흑의복면인이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며 더듬더듬 말했다. "노… 노부는 소림사 법요라는 놈과 내공을 겨뤄 놈의 무상금강력(無上金剛力)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상처를 입었다. 그 후 낙성궁의 이대궁주에게 가슴을 다쳤고, 표묘장의 이웅(李雄)이라는 놈의 비검(飛劍)에 한 팔을 잃었다. 그리고 노부의 양 옆구리에 난 상처는 단장곡주(斷腸谷主)가 낸 상처다." "……." "하나, 흐흐… 그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노부가 쓰러진 척하자 안심하고 다가서다가 암습에 당했지. 흐흐… 태백파 장문인이 죽었고, 개방주의 두 다리가 으스러졌다. 그리고 전진파 장문인이 배에 구멍이 뚫려 쓰러졌지. 흐흐… 단신으로 그 정도에 그쳤으니, 대단하지 않느냐?" 그는 산발청년에게 호감을 느낀 듯, 제법 부드럽게 말하며 품안에서 작은 목갑 하나를 꺼냈다. 산발청년도 떠날 마음이 사라진 듯, 우뚝 서 있었다. 그가 기우뚱히 서 있을 때, 흑의복면인이 손가락을 놀려 목갑을 열었다. 목갑이 열림과 동시에 지극히 냉량(冷?)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영단(靈丹)이 들어 있군.' 산발청년이 눈을 꿈벅거렸다. 그 때. "흐흐… 이것을 먹으면 노부는 불사신(不死神)같이 살아날 수 있다. 모든 고통을 잊고 이전보다 더 힘차게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이지!" "흠, 그럼 어서 복용하시오!" "흐흐… 그런데 문제가 있다." "무슨 문제요?" "노부는 오백 명에게 쫓기고 있다. 몸이 낫는다 해도, 포위를 뚫지 못한다는 것은 매일반이다. 그것이 문제다." "그럼 할 수 없지 죽을 수 밖에." 산발청년이 비정히 말하자. "흐흐… 노부는 네놈이 남다른 놈임을 안다. 네놈의 눈빛은… 흐흐… 죽음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 노부는 네놈이 노부와 마찬가지로 일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음을 이미 알아봤다." 흑의복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목갑을 내려놨다. 그 후, 그는 눈길을 산발청년 쪽으로 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노부는 토존자(土尊子)라는 사람이다. 너는 누구냐?" "이름을 잊은 지 오래요. 말하고 싶지 않소!" 그가 비정히 말하자. "흐흐… 꼭 알고 싶다. 노부는 일각(一刻)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네 이름을 안다 해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 한 번 말해 봐라." "알고 싶은 이유가 뭐요?" "흐흐… 네놈의 기도는 남다르다. 철천지한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런 기도를 보일 수 없다." "흠……!" "흐흐… 너는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이나 다름없다. 하나 그것뿐, 내공은 갖고 있지 못하다." "……!" 산발청년은 입을 꽉 다물었다. "흐흐… 진짜 그렇다면 너와 노부, 상호를 위해 좋은 길이 하나 있다." "흥! 나는 세상에 관심 없소. 노인이 죽건, 죽지 않건!" 그가 비웃듯 말하자. "흐흐… 세상에 관심을 두라는 말이 아니다. 노부의 말은… 흐흐흐… 노부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 주는 대신, 너의 소원을 풀라는 것이다." 토존자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상대의 심기를 알고 싶은 듯, 강렬한 시선으로 산발청년의 두 눈을 꿰뚫어보았다. 그러나 산발청년이 어떤 생각인지 알아 낼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아주 비정하고, 거만했다. 이 세상 어떤 유혹에도 걸리지 않을 듯. 산발청년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자. "흐흐… 단적으로 말하겠다. 토존자가 전보다 더 득의해 하며 말했다. "노부가 꼭 해야 하는 일을 대신해 준다면… 흐흐… 너는 잃어버린 내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순간. "……." 산발청년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솟아났다. '내… 내공을 찾을 수 있다고?' 그가 숨을 죽일 때, 토존자가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너나 노부 모두를 위해 유익한 거래다. 너는 환골탈태(換骨奪胎)할 수 있을 것이고… 흐흐… 노부는 안심하고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안심하고 죽다니?" "흐흐… 노부는 일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종족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노부는 형제와 후손들을 위해 상전들의 명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 "그 덕에 하고 싶지 않은 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수없이 많이 했었다. 이제껏 잘해 냈는데… 흐흐… 요사이 백도맹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막강해져 그만 마각(馬脚)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흠……!" "흐흐… 노부는 결국 궁지에 몰린 것이고, 상전의 명을 불이행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으나, 할 수 없이 상전들의 명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 나의 처지이다. 노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종족을 위해!" "장하시군!" "흐흐… 비참한 일이지, 장한 일이 아니다. 하나, 어려운 일은 다 지나갔다. 그들은 우리 종족들에게 백 가지 명을 내렸었다. 우리들은 십수 년 간 천지를 떠돌며 구십구 가지를 완수했다." "그럼 하나가 남았군!" "그렇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은 것이다. 이 일이 완수된다면 그들과 우리 사이의 거래는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고, 우리 관외족(關外族)은 자유를 찾는다." 관외족! 그것은 정말 수백 년 만의 용어였다. 과거 지독한 수법을 능수능란히 구사해 중원(中原)과 새외(塞外)를 오가는 대상(隊商)들을 공포에 빠뜨렸던 종족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관외족인데, 몇 가지 신비함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천부적인 안력(眼力), 기발한 후각(嗅覺), 강철보다 단단한 몸뚱이,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력과, 목표로 한 것은 백 년이 걸리더라도 꼭 찾아 내는 끈질긴 추적력을 가진 자들이 바로 관외족들이었다. 그들은 극소수로, 손이 번창하지 못해 이백여 년 전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마지막 후예가 대막(大漠) 가운데에서 모여 산다는 풍문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한데, 지금 토존자가 관외족을 자칭한 것이다. "우리 종족은 원래 중원무림계에 끼여들려 하지 않았다. 하나 힘이 약해 남에게 제압당했고, 결국 철저히 이용당했다. 그러나 그 덕에 많은 것을 얻었다.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고, 초절한 무공을 얻었다. 이제 자유를 찾게 된다면… 흐흐… 오행마궁(五行魔宮)으로 뭉친 관외족은 소림, 무당보다 강한 문파가 되어 중원천하의 일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토존자는 아주 즐거운 듯 껄껄거리며 말했다. 한 팔이 잘리고 배에 구멍이 뚫린 상태에서 그리 유쾌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 종족은 특이한 후각을 지니고 있다. 흐흐… 노부는 네 몸에 영웅의 냄새와 함께 의지견정(意志堅定)한 정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노부의 말은 거의 정확할 것이다." "……." 산발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토존자는 왼손으로 턱을 쓰다듬다가 입술을 뗐다. "장안성(長安城)까지만 가면 된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으음……!" 산발청년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이 자의 육감(肉感)은 남다르다. 내가 거래에 응하려 한다는 것을 벌써 육감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정말 무서운 자다. 이들의 무공이 영웅전 안의 무리들 같다면, 가히 가공할 세력이 될 것이다.' 그는 쓴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존자를 믿겠소. 부탁을 들어 주겠으니, 대신 내가 무공을 찾을 길을 꼭 일러 주셔야 하오." "흐흐… 장부끼리의 거래다." 토존자는 어깨를 으쓱하다가 왼손으로 상투 속을 더듬었다. 얼마 후, 그는 밀랍으로 싼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을 장안성 가빈루(嘉賓樓)에 전해라. 가빈루 삼층에 가서 낭랑(娘娘)을 찾아왔다고 하면,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주면 된다. 그것으로 노부의 부탁을 다 들어 주게 되는 것이다." "나의 소원은?" "흐흐… 그것은 노부가 강호를 주유하다가 우연히 찾은 비곡(秘谷)에서 풀어질 것이다. 태행산중(太行山中)의 혈무곡(血霧谷)이 바로 그 곳이다. 노부는 그 안에 인형설삼(人形雪蔘)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인… 인형설삼?" "그렇다. 그 냄새가 혈무곡에서부터 풍겼다. 그것을 복용한다면, 네가 지금 어떤 상처를 갖고 있건 나을 것이다." "그…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취하지 않았소?" "흐흐… 취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혈무곡 근처는 기문진(奇門陣)으로 보호되어 있다. 감히 혈무곡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기문진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라고 기문진에 대해 잘 알겠소?" 산발청년이 거칠게 말하자. "흐흐… 다 방법이 있다." 토존자가 득의해 하다가 왼손으로 품속을 더듬었다. 잠시 후, 그는 품안에서 얄팍한 책자 한 권을 꺼내 산발청년 발 앞에 내던졌다. "백도맹 안에 잠입해 임무를 수행하던 중 훔쳐 낸 것이다. 그것을 보면 혈무곡의 기문진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흐흐… 그것은 노부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좋소, 믿겠소." 산발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책자를 주웠다. 그 겉장의 글은 학문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면 봐도 글인지 모를 기괴한 문자로 적혀 있었다. 갑골문자(甲骨文字)인데. <천기진도(天機陣圖)> 바로 이런 네 글자였다. 산발청년은 갑골문자를 잘 아는 듯, 그 글을 보는 순간 손바닥에 땀을 쥐었다. 오래 전 읽은 한 권의 고서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천기진인(天機眞人)이 만든 기문도서가 있다. 일컬어 천기진도라는 것인데, 그 안에 천하의 모든 기문진에 대한 변화가 수록되어 있다. 산발청년이 책의 내용을 훑어볼 때, 토존자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놀랍군. 갑골문자를 알고 있는 듯하니… 풀려고 해도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없어 무용지물이라 여겼는데…….' 토존자는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중원으로 나와 돌아다녀 보며 중원에 인재가 없다고 여겼었다. 하나… 흐흐… 너를 보니, 역시 중원천하에는 인재가 많다는 것을 알겠구나. 너와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만, 추적자들이 일 리 안으로 들어선 것 같아 떠나야겠다." "일… 일 리 안?" "그들의 냄새가 난다. 흐흐흐… 그들은 나를 뒤쫓는 것이지. 하나… 흐흐… 노부를 잡는다 해도 사정을 알아 내지는 못한다. 분근착골(分筋錯骨)이나 착골수혼(錯骨搜魂) 같은 고문 아래서도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관외철골족(關外鐵骨族)이기 때문이지." 그는 중얼거리며 뒷걸음질쳐 갔다. 얼마 후, 그는 십 장 정도 멀어진 다음 청년에게 말했다. "노부가 먼저 꺼내 둔 영단을 먹는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 힘이 살아날 것이다. 그것을 먹도록 해라." "……." 산발청년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흐흐… 이제 네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없겠느냐?" 토존자가 복면을 고쳐 쓰며 아주 밝은 눈빛을 뿜어 냈다. "나는……." 산발청년이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말하기 아주 거북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냉옥룡이라는 사람이오. 하나, 과거의 이름일 뿐이오." 그가 고개를 젓자. "무명소졸이군. 흐흐… 네 이름은 중원천하의 고수 천 명(名) 가운데 끼여 있지 않다." 토존자가 껄껄 웃다가 위로 날아올랐다. 슥-! 그는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신법을 이용해 칠 장 날아올랐다. 산발청년이 그를 올려다볼 때. "으하하하… 삼 년 간 너희 백도맹의 순찰당주 행세를 했던 오행마궁의 토존자가 바로 여기 계시다!" 토존자의 목소리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직후, 토존자는 대붕전시(大鵬展翅) 수법으로 몸을 뒤집어 가며 울울창창한 원시림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진 후. "저 곳이다!" "쫓아라!" "백도맹의 비밀을 훔친 자이니, 놓쳐서는 안 된다. 구대봉공을 암수로 물리친 자라고는 하나,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다!" "와……!" 사방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흰 옷을 입은 강호고수 수백 명이 속속 나타나 토존자가 소리치며 사라져 간 곳을 뒤쫓아 가는 것이었다. 소란은 한바탕 야음을 흔들다가 산발청년이 있는 곳에서 아주 멀어져 갔다. "무서운 사람이다." 산발청년은 주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숨을 멈추고 있었다. '집요한 자인데… 아, 그를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천외천(天外天)이로군.'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그가 머물러 있던 곳을 내려다보았다. 뚜껑이 열린 목갑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 안에는 잘 익은 자두만한 자색(紫色) 환약(丸藥) 한 알이 담겨 있었다. 그 향기가 청년을 마비시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어떤 것이기에 이리 좋은 냄새가……?" 그는 중얼거리면서 목갑 바로 앞까지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가 목갑을 손에 쥐었다. 단약이 확연히 보이는데, 표면에 금자(金字) 두 개가 박혀 있었다. <자부(紫府)>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토존자가 그에게 주고 간 단약은 바로 자부신단이었던 것이다. "자… 자부라고? 그… 그럼 이것이… 이것이 바로 나의 어머니의 자부신단이란 말인가?" 청년의 얼굴이 자부라는 글로 인해 확 달아올랐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부인 줄 알았는데… 으으으… 자부신단이 어떻게 토존자에게 남아 있단 말인가? 토존자가 자부선자와 친한 사이였단 말인가? 나의 어머니 자부선자와……?' 그는 자부선자를 어머니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 진짜 믿고 있는지는 그만이 아는 일이리라. "아, 진작 봤어야 했는 데……." 자부신단을 쥐고 땅을 치는 청년은 바로 냉옥룡이었다. 일 년 전, 영웅전의 팔 기재 중 가장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가 파문당해 죽게 되었던 그 냉옥룡이란 말인가? 그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단 말인가? 안탕산(雁蕩山)에서 이 곳 진령까지는 수만 리 길이 아닌가?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된 처지로 수만 리를 걸을 수 있었단 말인가? 사실, 그 모든 것을 냉옥룡도 아직 자세히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영웅전에서 빠져 나왔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영웅전 내 뇌옥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진령 후미진 곳에서 정신을 차렸었다. 그것이 바로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지난 일 년 간 내공을 되찾기 위해 온갖 종류의 시도를 해 보았다. 바위에 거꾸로 매달려 역천현공법(逆天玄空法)을 쓴 것도 그 중 한 가지였다. 하나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점점 더 폐인이 되어 갔다. 그러던 중 오늘 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이… 이것이 왜 그에게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내가 자부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아야 한다." 냉옥룡은 그것을 거머쥐고 등을 돌렸다. '토존자는 백도맹에게 잡혔을 것이다. 하나 그의 상전은 장안성에 건재할 것이니, 그에게 물어 보자.' 그는 토존자가 먹으라고 준 자부신단을 아주 귀중한 보물로 여기고 소중히 간직한 채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틀거리며 걷는 냉옥룡. 그것은 과거가 그에게 준 산물이다. 영웅전의 고독한 용, 그는 지금 한 마리 야수에 불과했다. 지난 일 년의 고행이 그를 가장 지독한 심성의 소유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에게서 과거의 준미함과 공손함을 찾는다는 것은 얼음 속에서 숯불을 찾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