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가 아뢰기를,
“오위 장 한명련과 홍대방은 용렬.
2.7. 스스로 변방으로 떠나다. 파직과 유배 상소가 올라오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한명련이【해서의 천민이었는데 난리가 일어나자 입신하여 전공으로 2품의 지위에 이르렀다.】북방의 사변을 목격하고 자신이 가겠다고 청하는 상소를 하였으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용기가 매우 가상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5월 20일 기사 中
사헌부가 아뢰기를,
“외람되이 역말을 사용한 죄에 대한 율이 지극히 엄하니 드러나는 대로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황해도 기린역에서 3월에 역말을 사용한 것에 관한 성책을 가져다가 고찰해 보니, 행 사과 한명련은 당초 역말을 타라고 한 명이 없었는데도 원산ㆍ연양 두 역의 기복마(騎卜馬) 각각 1필씩을 공공연하게 외람되이 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4년 5월 15일 기사 中
(선조가)비망기를 내렸다.
“한명련은 장사로서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적을 수없이 베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죽을 힘을 다해 국가에 보답했는데 이번에 차질이 생겨 유방의 죄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그 사이에 깊은 실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이 없어 잘못하여 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차 죽게 된 어미를 버려두고 멀리 부산(釜山)으로 유배간다면 모자가 각각 한쪽 하늘가에 있게 되어 오직 꿈속에서나 오갈 뿐일 것인데 나는 그에게 차마 그러한 처지가 되게 하지 못하겠다.
조선왕조실록 1604년 6월 2일 기사 中
2.8. 광해군 집권기에 다시 기용되다.[편집]
비록 상중에 있는 자라 하더라도 한명련 등과 같은 드러난 역전의 장사는 기복시켜 올라오게 하고,
조선왕조실록 1609년 3월 3일 기사 中
한명련을 길주 목사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 1615년 4월 17일 기사 中
회령부사가,‘우리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냈지만 명나라 군의 의 뒤에 있을 것’이라 유시하였습니다.
[7]
책중일록 1619년 3월 8일 기사 중 中
의주 유학 주의립이 상소하기를
(중략)
순변사 한명련은 군졸들을 잘 보살피고 부윤과 함께 한마음으로 성의를 다하여 죽음으로 지킬 것을 기약하였으니 모두 논상하기를 청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622년 6월 12일 기사 中
2.9. 인조반정 이후 사직을 요청하나 거절당하다. 역모혐의로 내몰리다.[편집]
순변사 한명련이 소장을 올려 면직을 비니, 답하였다.
“내가 요사이 서쪽 변방에 대한 걱정이 늦추어진 것은 오직 경이 변방에 있기 때문이다. 노병으로 사피하지 말고 다시 면려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역신 이괄과 역신 한명련은 당초 그 아들이 반역을 꾀한 것이 드러났기에 사신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더니, 역신들이 감히 사신을 죽이는 등 명령에 항거하고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24년 2월 10일 기사 中
이괄이 자기의 재능을 믿고 국가를 경시하여 불궤를 음모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잡히게 되자 자기 휘하를 협박하고 한명련과 연합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두 역적은 모두 용병(用兵)을 잘하여 ..
조선왕조실록 1624년 2월 11일 기사 中
2.11. 결정적인 전투에서 충장 남이흥의 기지로 인해 패하다.[편집]
원수 장만이 처음에 둘러싸고 지켜서 적을 지치게 하려 하였는데, 정충신이 말하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곧바로 안현에 올라가 적과 싸우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병법에 이른바 먼저 북쪽 산을 차지한 자가 이긴다는 것이다.’ 하니 남이흥이 그 계책을 찬성하였다. 이에 정충신 등이 밤을 틈타 안현에 진을 쳤다. 적은 이미 거침없이 진격하여 대궐을 침범하였으므로 대적이 없다고 스스로 믿고 싸우지 않아도 패주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이튿날 아침에 무리를 전부 출동시켜 성을 나와 길을 나누어 전진하였는데 험한 곳을 우러러보고 공격하므로 포탄과 화살이 적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제장들은 또한 적을 성에 들어오게 한 죄를 스스로 알고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웠는데 이미 지세가 험한 데를 얻은 데다가 하늘이 또 도와서 교전하는 처음에 풍세가 갑자기 바뀌었다. 관군이 승세를 타게 되자 사기가 절로 배나 되었다. 적이 드디어 크게 패해서 달아났는데, 적병 4백여 급을 베고 3백여 인을 사로잡았다.
조선왕조실록 1624년 2월 11일 기사中
상이 이르기를,
“김경운은 역전하다가 죽었으니, 매우 애석하다. 그날 한참 동안 접전하였으나 관군은 죽은 자가 전혀 없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지형이 좋은 곳에 진을 쳤으므로 적의 포탄과 화살이 미치지 못하거나 넘어가 버려서 그러했던 것입니다. 김경운이 탄환에 맞고 나서는 군사들의 마음이 잠시 꺾이는 듯하였는데, 한명련을 닮은 적의 좌영장(左營將) 이양이란 자가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죽자 모든 군사들이 한명련이 죽었다고 여겨 환호하면서 사기가 한없이 치솟았습니다.”하였다.
첫댓글 같은 천민 출신 정충신에게 패하는 소드 마스터
도원수 권율, 부하장수 김응서가 한명련을 빼앗아가자 분노하다.[편집]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기를,
당초에 신이 한명련을 별장으로 삼은 것은 위급한 일이 있을 때 김덕령과 협동하여 여러 방면으로 사용하려고 계획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병사 김응서가 순찰사 서성의 말만을 신빙하여 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한명련을 강제로 자기 진영의 위장으로 정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신이 한명련으로 하여금 비변사가 서성의 장계 건에 대해 ‘우선 가덕의 임무를 수행하지 말고 그대로 별장의 일을 겸하라.’는 분부를 받고 행이한 관자를 보내어 보여주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응서가 한명련에게 회송한 통보에 이르기를 ‘비록 도원수의 별장이라 하더라도 일단 변방의 장수가 되었으면 병사의 명령을 묵살하고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잡사를 제쳐놓고 포수와 살수를 뽑아 거느리고 있다가 변을 당하면 대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한명련으로 하여금 신의 절제를 받지 말고 전적으로 자기의 호령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7월 14일 기사 中
2.3. 선조의 관심과 총애를 받다
이순신, 권율과 함께 조선의 양장으로 인정받다.
명나라 제독 마귀가 말하기를
귀국인 가운데 정기룡ㆍ김응서ㆍ한명련은 모두 의협심이 대단한 사람들로
왜적을 잘 사살하니 함께 적을 토멸할 만합니다.'''
.명나라 마귀
이괄의 반응을 살피려 한명련을 추포해 가는데 이괄이 구함 ㅡ불행히 이괄난에 중심에 섬ㅡ이괄 패배 조선 정예병 무너짐 ㅡ병자호란 터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