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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묵상글 (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조금이라도, 동참이라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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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조금이라도, 동참이라도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계실 뿐 아니라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입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면 하늘뿐 아니라 땅에도 계시고,
성당에 뿐 아니라 술집에도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불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능성 또는 인간의 가능성 외에는 믿지 못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가능성을 자기 또는 인간의 가능성 안에 가두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가능성을 넘는 것은 하느님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Nothing is impossible to God!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이것은 마리아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만 믿으란 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나쁜 가능성은 믿지 않지만
마리아처럼 좋은 가능성은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오셨다고,
이천 년 전에 한번이 아니라 지금도 오신다고,
마리아에게뿐 아니라 사제와 우리에게도 오신다고,
베틀레헴의 구유뿐 아니라 미사 때 제대 위에도 오신다고 믿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려고 오시는 그 첫 번째 오심이 믿기 어렵지,
그렇게 오신 주님께서 매일 제대 위에 내려오시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고,
최후 만찬과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내어주신 그 천 번째 희생이 놀랍지
매일 당신 살과 피를 나눠주시는 것은 그 재현일 뿐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의 애송이가 아닌 우리에게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사는 것이 어렵지, 믿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체와 성혈의 신비는 나를 다 내어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최후 만찬 때 우리가 읽는 복음은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서 ‘끝까지’는 당신의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의 뜻도 있고,
제자들의 배반을 아시고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뜻도 있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당신을 전부 다 주시는 사랑을 하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을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겸손과 사랑에 감탄하면서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가자는 뜻으로 이렇게 권고하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두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다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프란치스코도 알고 주님도 아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다 살아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 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은 살기를.
다 못살 바엔 아예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살기를.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린 주님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그대로 다 살지 못하더라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조금이라도 살고 동참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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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이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성체 성사는 성목요일에 제정되었지만 성주간 등 다른 예식이 있으므로, 수난을 떠나 기쁨의 성체를 축하하기 위해 주일로 정하였습니다.
13세기에 성체 공경에 대한 신심이 발전히면서 시작된 이 대축일은 처음에는 <성체 축일>이라고 불렀고, 그 밖에 <성체 성사 축일>, <하느님 축일>, <지극히 고귀한 성사 축일>, <그리스도의 몸과 피 대축일> 이라고도 불렀다가 1970년 이후부터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아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성체라는 말은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 감사하다)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합니다. 즉 최고의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함을 말합니다. 성체는 밀떡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현존합니다. 가시적인 빵과 포도주는 형태에 불과하나, 실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까지도 그 형태 안에 현존하십니다. 이 성체는 그리스도 말씀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실체로 변화한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인 성혈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피다"(마태 2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혈은 사도시대 이래로 신자들의 흠숭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특히 성체성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미사 때 봉헌되는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로 변화되어 포도주의 외적 형상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과 마찬가지로 성혈을 받아 마심으로써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게 됩니다(요한 6:54-56 참조).
따라서 성체 성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머물러 계시며, 이를 신자들이 받아 모시는 성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며 동시에 은총의 성사입니다.
예수께서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고(요한 6,51), 최후 만찬 때 하신 말씀(마태 26,26-28; 마르 14,22-24; 1고린 11,23-25)으로 성체 성사를 세우셨으며, 이 예식을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결국 성체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시기 위하여 수난 전날 최후 만찬 석상에서 친히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체 성사를 세우신 것은 결코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신 것은, 분명 비유나 상징일 수 없습니다. 만일 비유나 상징이라면 빵과 포도주는 하찮은 음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 음식은 아무리 먹고 마셔도 결코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모든 성사의 중심이며, 우리 신앙의 근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성체 안에 계심을 확신하고, 베풀어 주신 그 크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의 궁극적 결실은 우리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처럼 고통받고 박해받는 소외된 이들의 살과 피가 되어 그들이 참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것입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미사 중의 신부를 구해 준 기적의 제의(察衣)
스위스 -1893년
1893년 8월 24일 사도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사제인 캘린(Kaelin) 교수는 아인지델른의 수도원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신앙심이 깊으며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 청소년 교육자는 이미 수년간 슈비츠의 신학교에서 일하였고, 때때로 여름휴가 때에 자주 그의 고향인 아인지델른에서 지냈다. 그는 지치지 않고 한가한 날에는 아기 예수회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신앙심이 깊은 신부가 8월 어느날 고해성사실 옆의 십자가 제단에서 경건하게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을 때였다. 바아던에서 온 한 젊은 청년이 제대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몸 속에서 총 한 자루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바로 옆 제단에서 성찬의 전례를 마치고 아무것도 예감하지 않은 채 성체룰 높이 들어올린 사제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총알은 미사를 드리고 있는 사제의 장백의(長白衣)에 맞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얇은 제복, 곧 제의 아래에 있는 긴 백색의 옷을 뚫지 못했으며 또 사제를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고 총알이 튕겨나왔다.
한 발을 발사하고난 살인자는 곧 자기 가슴에 대고 총을 쏘았다. 그러자 그는 바닥에 쓰러져 죽었다.
그러나 캘린 교수는 하나도 다치지 않은 채 미사성제를 끝까지 집전하였다. 바로 성찬식의 주님과 성모 마리아께서 그 사제를 보호해준 것이다.
1893년 잡지 “펠리칸”에 실린 이 총격사건은 아마도 제정신이 아닌 한 청년이 복수를 하기 위해 저지른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청년은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는 것을 거절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총탄에 구멍이 난 제의는 오늘날까지도 아인지델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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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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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51)
오늘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몸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이제 우리는 곧 당신 몸과 피를 우리의 양식으로 내어준 그 크신 사랑을 먹을 것입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마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반복해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니므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3)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몸과 말씀으로 우리를 양육하고 계심을 알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라고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도 형제들과도 한 몸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요! 찬미하고 찬양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참으로, 어마어마한 말마디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단지 “내려온 빵”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줄 빵”이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은 바로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 빵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생명을 줄 빵은 그 빵이 되기에 앞서, 밀이 바수어져 물과 함께 반죽이 되듯, 그렇게 부서지고 쪼개지고 피 흘리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빵”이 될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참된 양식, 참된 음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양식은 결코 우리가 획득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셔서 받은 것입니다. 은총입니다. 당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빵”과 “살”과 “생명”입니다. 이는 같은 지평에 자리 잡은 인간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주목할 수 있는 단어는 51절고 58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려 온”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와 그 존재양식이 가 닿을 수 없는 신적인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온 빵”인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 존재와 존재양식 모두를 신적차원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곧 하늘의 몸과 땅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쪼개진 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쪼개진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요한 6,5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신적 생명을 “먹고 마셔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세 가지로 알아들어 봅니다.
<첫째>는 당신께서 ‘생명의 밥이요, 양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신명 8,3)
<둘째>는 ‘예수님과의 사귐’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2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리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의 사귐이요,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사귐이 아니겠습니까?”(1고린 10,16)
<셋째>는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음’을 말해줍니다. 이를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요한 6,56)
그리고 이 모두는 ‘빵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고,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며, 우리 안에 머물며, 한 몸이 되어 주십니다.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증여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됩니다. 갈라지고 패인 우리 가슴 골골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피, 구원과 생명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이 크신 사랑에, 우리의 가슴은 벅차오릅니다.
잠시 후면, 우리는 “아멘”이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할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몸’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말합니다. 그리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서 친교와 사귐으로 관계 맺음을 배워야하고, ‘예수님의 피’에서 내어줌으로 유대와 일치를 배워야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건네주신 당신의 성체성혈을 먹고 마시는 우리는 예수님이 지니셨던 그 사랑과 생명을 살게 됩니다. 이웃과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 제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믐달처럼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가볍고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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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먹힘으로써 살리시는 주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은 마침이 없으십니다. 이 시간 영원히 지속되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첫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최상의 방식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있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지 않으면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빵과 포도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으시고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지체입니다 (1코린12,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아멘’(예, 그렇습니다)이라고 대답하고 그 동의가 진실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하셨습니다. 물론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보고서라도 믿을 수 있게 기회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1896년 설립된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은 1914년 성체성혈대축일에 지방에서는 최초로 성체거동(성체현양대회)을 하였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서 성체께 흠숭을 드리고 성체께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며 영성체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많이 생기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100년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2013년 4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미사를 마치면서 성체현시를 하고 오후 4시까지 기도를 이어가며 성체강복으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2013년 5월 30일을 시작으로 2014년 6월19일 현재까지 제가 확인한 것만, 21차례, 그 후에도 10월 성체거동을 하는 날까지 12차례. 당신 현존의 모습을 성체안의 예수님 이미지로 보여 주셨습니다. 교회의 공식 인준을 받지 않았으나 교구에 보고는 하였고, 함께 기도하던 많은 사람이 그때마다 목격하였으며 은혜로움을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 강조하였고, 체험을 말하려면 삶의 변화를 통해 말하라! 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성체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주기 위해 보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체를 흠숭하고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이 더 커지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원하시는 것을 행하시고 주십니다. 우리는 그저 황송하게 은총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영양을 취해야 합니까? 육적인 건강은 음식을 통해 보충하지만, 영적인 양식은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 채워집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6,56-57).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 안에서 성체를 영함으로써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요한복음 1장1절에서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장 14절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고 적혀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렇다면 성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천인 말씀에로 가야하고 말씀을 듣다 보면 성체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체와 말씀은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9개월의 감옥살이 동안 “가장 큰 고통은 미사를 드릴 수 없고, 성체를 모실 수 없는 것이었다.” 고 회상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동료들에게 “ ‘내가 더 이상 미사를 거행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거든,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시오.”하였고, 성 필립보 네리는 “성체는 나의 보약입니다.”하고 영성체의 중요성을 말하였습니다.
더더욱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예를 들면 나무를 접목할 때 두 나무가 비슷할수록 접목이 더 잘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고해성사는 영혼과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해 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공산정권에 의해 1975년 투옥되어 1988년 석방되신 구엔반 투안 주교님께서는 감옥살이 중에서도 남몰래 손바닥에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하셨습니다. 그는 그 미사에 대해 “이것이 불사불멸의 약이었고 죽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해독제였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잔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축성 말씀을 암송하며 제 피에 섞인 그분의 피를 통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과 저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미사는 삶의 모두였고 주님과의 하나 됨을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오늘 부속가를 보면 선인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 달라 삶과 죽음 갈라진다(17). 악인 죽고 선인 사니, 함께 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18).천상의 빵 길손음식, 자녀들의 참된 음식, 개에게는 주지 마라(21). 하며 합당한 준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디 성체성사를 통하여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영혼을 풍요롭게 하시고 위로와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떼어 나누어진 빵으로 오십니다. 밥이 되어 오십니다. 당신이 스스로 먹힘으로써 영양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상대를 밥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이십니다. 우리도 상대를 위한 영양밥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인들은 말합니다. “성체를 단순한 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그분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으로 확신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맛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사랑의 신비’를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성 치릴로). 그리고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잠시 동안 당신이 받아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따라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깊은 믿음을 가지고 모셔야 합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영세한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반모임 미사참례를 하셨는데 성체를 모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말씀드렸습니다. ‘혹 죄를 짓거나 잘못한 것이 있으시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잔칫집에 오셨으면 기쁘게 음식을 나눠야 합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성체를 단순히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설사 큰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손길로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빵을 쪼개는 순간 눈이 열렸던 제자처럼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을 의미하며, 사랑을 생산합니다”(토마스 데 아퀴노).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은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미사의 연장입니다. 성찬에 걸맞은 내어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님께서는 쪼개지고, 나눠지며, 먹히는 빵의 단순함 안에 계십니다. 영성체를 통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분의 모습으로 나를 변화시키도록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 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이기 때문 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 토마스 모어는 총리를 하면서 매일 미사참례를 하여 영성체를 하였 다.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 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 회들을 멀리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스승이십니다”(성 토마스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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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추모예배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주관하는 추모예배는 처음 다녀왔습니다. 성당의 장례미사와는 달리 ‘말씀’이 많았습니다. “찬송, 기도, 약력소개, 추모사, 말씀, 가족인사, 찬송, 축도”의 순서였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 고별사”에 익숙한 저는 조금 생소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확신에 찬 설교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목사님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비록 부족함이 많을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심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추모예배에 온 사람들에게도 꼭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고인의 아내께서 남편의 손에 묵주를 쥐어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되는지 물어서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고인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추모 예배 후 1997년 보좌신부였을 때 청년성가대를 하던 자매를 만났습니다. 당시에 혼인하여 곧 아이를 낳았으니 아이도 어느덧 대학을 졸업했다고 합니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어느덧 50대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바람결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금 자리를 잡으려고 하면 새로운 도전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남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남편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자매는 힘든 시간들 속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주님께 의탁했다고 합니다. 쉬는 날이면 노숙자를 위한 급식봉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영적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세미나를 듣는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갈 것이라고 위로하였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어릴 때 성체에 대한 성가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늘에 별수가 얼마인지 아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강변에 모래알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바다에 물방울 누가 셀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논밭에 이삭 수 누가 알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나무에 잎사귀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영원과 무궁을 깨달을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매일 축성되는 성체의 수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32년 동안 제가 미사를 통하여 축성한 성체의 수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은 성체가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감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만나’보다는 영혼을 살리는 ‘성체와 성혈’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해집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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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복음을 읽다 보면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뒤에 군중이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장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고도 합니다(요한 6,15 참조). 놀라운 빵의 기적을 통해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군중이 예수님을 쫓아다녔을까요? 그러나 돈 많은 부자같이 먹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쫓아다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냈던 놀라운 장면에서는 쫓아다녔다는 말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육신의 배고픔이 채워지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집트에서 탈출하면서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예수님은 구원자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배고픔보다 더 큰 문제인 영적 배고픔과 갈증을 보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빵과 물고기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적 배고픔과 갈증을 채워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100%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 언젠가 내려올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즉,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나의 행복 전체가 될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이것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계속된 굶주림과 갈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즉 주님의 뜻을 다르며 함께할 때 진정한 포만감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계속된 굶주림과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상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성체 성혈을 통해 진정한 충만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성체와 성혈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지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을 보지 못하면 성체와 성혈의 은총을 얻기가 힘들어집니다. 세상의 것만을 얻으려는 마음만으로는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미사성제를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그분의 사랑을 우리 삶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사제가 나눠 주니까 당연히 받는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 삶이 변화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참 구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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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기 위해 등불을 켜면 결국 자신의 길도 밝히는 것이 된다(벤 스위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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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영원한 생명의 양식
작고 소박한 빵, 주님의 살이신 빵은 친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귀한 몸이 되지 않으시고 너무나 흔한 빵이 되셨을까요? 빵은 공기와 물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으로 매우 친숙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이 발전하고 식습관이 변한다해도 빵은 여전히 필요한 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가장 가까이, 함께 하시기 위해 빵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사람의 손위에 올릴 수 있는 작은 빵조각, 언제라도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작은 빵조각이 되셨습니다. 더 없이 겸손하고 소박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빵은 헌신의 사랑입니다.
빵은 음식으로 사용될 때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작게 나눠지는 고통과 형체가 없어져야만이 사람의 몸안에서 음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마지못해 고통과 부숴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뿌리깊은 헌신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류를 위해 언제나 작게 나뉘어지고 녹아없어지고,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간절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류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부서짐으로 우리의 상처는 치유되고, 잘게 나누어지신 예수님으로 인해 강해졌습니다.
빵은 친교의 사랑입니다
빵은 사람의 몸속에서 소화되어야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 옆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언제나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튼튼하고 생기있는 나뭇가지는 물론 시들어가는 나뭇가지, 그 어떤 나뭇가지도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포도나무 줄기이십니다. 줄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나뭇가지와 같은 친밀한 결합으로 당신의 피와 살을 내 주기 위해 스스로 빵이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살과 피가 완전히 녹아들기 위해 스스로 파괴되셨습니다. 이보다 더 긴밀한 결합이 어디있겠습니까?
빵은 혼자보다 식탁 위에서 서로 나누어 먹을 때 더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스스로 빵이 되셨고 사랑으로 하나되는 형제애를 위해 당신께서는 잘게 부숴지신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 가장 큰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성체성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겸손하지 않다면 성체 성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내 것만을 생각한다면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이 무슨의미가 있습니까?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혼자 살아간다면 성체성사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몸이신 작은 성체는 친밀과 헌신과 나눔의 사랑이 담겨있는 작지만 거대한 사랑입니다.
성체의 주님,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영원히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찬식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까?
2. 미사 중에 주님의 몸이신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느껴보십시오.
3. 성체를 통해 주님의 사랑과 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주님의 살이신 성체를 모셨다면, 나의 몸 속에 살아계시는 주님과 함께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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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사랑의 성체성사의 은총-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인 오늘 대축일입니다. 24절까지 이르는 긴 성체송가가 생명의 빵으로 오시는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표현인 주님의 성체에 얼마나 감격해 있는지 절절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아름다운 마지막 23-24절을 인용합니다.
“23.참된음식 착한목자 주예수님 저희에게 크신자비 베푸소서.
저희먹여 기르시고 생명의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
24.전지전능 주예수님 이세상에 죽을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하고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얼마나 고마운 사랑의 참된음식 성체성사인지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그대로 성체성사 미사의 은총입니다. 아침성무일도때 흥겹게 부른 후렴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신백성을 천사들의 음식으로 배불리셨고, 하늘의 빵을 그들에게 주셨도다. 알렐루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리라.”
하늘의 빵, 살아있는 빵, 천사들의 양식인 성체를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빵대신 밥으로 표현하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와닿는 기분입니다.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 제가 사제서품 받던 해, 그러니까 34년전 41세때 오늘 지금 여기서 1989년 5월28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때 강론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앞부분만 다시 그대로 인용합니다.
-속담에서 말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 없다”, 밥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나게 하는 말들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
아주 현실적인 적나라한 고백이지만 마음 한구석 허전해 짐은 어쩔수 없습니다. 과연 먹고 마시며 즐김으로 나의 영적 갈망을 채울 수 있을까요? 불교의 스님들은 식사전 오관게(五觀偈) 음식공양 기도문입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道業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공양이란 명칭으로 그 품격이 한결 높아지지만 그래도 미진한 느낌입니다. 삶의 감격과 기쁨이 미미하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 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이 보다 성체성사의 핵심을 꿰뚫코 있다며 한국의 세계적 민중신학자 고故 안병무 박사가 극찬極讚했던 시입니다. 밥이 하늘이라는 폭탄과 같은 선언으로 기존 종교관념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립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숙명적인 인간한계를 드러내는 동물적 행위도, 육신을 지탱하는 약도 아닌 바로 하늘을, 하늘이신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행위, 성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34년전 성체성혈 대축일 강론 서두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농사農事와 더불어 식사食事요 성사聖事입니다. 성사중의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저는 네 측면에 걸쳐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사랑의 성체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합니다.
첫째, 광야 여정중의 성사입니다.
신명기 모세의 말씀은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여라.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특히 강조되는 것이 기억하는 것이요 잊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광야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하느님 말씀으로 격퇴하셨습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성체와 말씀의 만나로 우리를 살리시고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게 하십니다. 광야 여정중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날로 예수님을 닮게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 마다 구원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우리들이요 광야여정의 인도자이신 주님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야 옛 탈출기의 백성들처럼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내용을 다시 나눕니다. 광야 인생 여정의 치열한 영적전쟁중 우리는 세 부류의 인생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인이냐, 괴물이냐, 폐인이냐 셋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정말 심신이, 영육이 온전한 사람 드문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너무 아프고 병든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정신 건강, 영혼 건강, 마음 건강입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는 누구나 건강한 정신의 성인이지만 주님을 떠나 세상 우상들에 종되어 살 때, 또 세상 맛에 중독되어 살 때는 여지없이 괴물이요 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혼 건강의 성인이, 참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답은 단 하나 평생의 광야 여정중 성체성사를 선택하여 훈련하듯 자주 성체와 말씀의 만나를 모시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구원에 이르는 거룩한 선택, 거룩한 훈련, 거룩한 습관입니다. 비록 미사를 못하더라도 날마다 기도와 말씀의 생명의 빵, 참 만나인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이래야 영혼 건강의 성인이 되고 영적전쟁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일치의 성사입니다.
하느님이 원하는바 일치요 사탄이 원하는바 분열입니다. 죄중의 죄가 분열입니다. 참으로 분열의 치유도, 영적 건강도 주님과의 일치에서 가능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살아갈 때 공동체의 일치요 내 자신의 내적일치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우리들이 아니라 바라보는 방향이, 바라보는 중심이 같아야 일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게, 행복하게, 자유롭게, 풍요롭게 하는 주님과 일치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일치의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옛 만나를 먹은 백성들은 모두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 온 이 성체의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성체의 힘, 예수님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게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일치, 참나의 내적일치의 비결도 단 하나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의 살아 있는 중심인 주님을 떠난 일치의 삶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정화하시고 성화하시며, 날로 주님과 일치를 깊게하는, 주님을 닮아가게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셋째, 나눔의 성사입니다.
바로 성체성사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정신 번쩍나게 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빵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아, 모두가 한몸의 지체들인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주님이요 살아있는 성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서로 나누며 섬길 때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 공동체의 일치, 참나와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일상에서의 사랑의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 완성되는 성체성사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천상 영광을 앞당겨 사는 성사입니다.
교회는 옛 기도문에서 성찬의 신비에 대해 이렇게 환호합니다. “오 거룩한 잔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며, 그분의 수난을 기념하고, 은총으로 가득 차며, 다가올 영광의 보증을 받는도다.” 그러니 성찬례 미사시간은 “주님 파스카의 기념이고, 우리가 제대에서 받아 모시는 성체를 통하여 하늘의 온갖 은총과 축복을 가득히 받으므로 천상의 영광을, 천상의 맛을 미리 맛보는 시간”입니다(가톨릭교리서1402).
참으로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 큰 희망에 대하여 성찬례보다 더 확실한 보증과 분명한 징표는 없습니다. 안티오키아 이냐시오는 “실로 이 파스카 신비인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고, 영생을 위한 약이요 죽지 않게 하는 해독제이며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빵을 나누어 먹는다.”말합니다(가톨릭 교리서1405).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가 177장도 이런 천상의 기쁨을 앞당겨 노래합니다. 만나를 먹은 백성들은 다 죽었을지라도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이들을 영원히 살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곳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177장 2절)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성체성사, 바로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성체성사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성체성사의 신비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고 참나의 성인이 되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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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짜 살과 진짜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도 그리스도교는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신다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도 박해를 더욱 가혹하게 만든 하나였습니다.
영적인 성경은 그 모든 말씀을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살과 피는 주님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것은 바로 그분의 희생과 사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희생과 사랑이라는 말은 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살과 피를 내어주는 고통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라면 이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부모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과 사랑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이날은 대축일로 지내는 의미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그렇게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 삶을 채우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그분을 만나십시오. 오늘도 희생으로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그분을 만나보세요.
두리안
두리안을 아십니까?
두리안을 과일의 황제라고 부릅니다.
저도 말로만 듣다가
외국 생활을 시작한 즈음 처음으로 그 실물을 만났습니다.
사실 과일의 황제라는 말 때문에 기대 많이 했었는데
역한 향기, 즉 화장실 향기를 풍기는 황제를 만난 후
한동안 근처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요?
너무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입니다.
사실 과일이라면 다 좋아합니다.
두리안은 그 속살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도 황제답습니다.
알맹이를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갑옷 같은 껍질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은 가히 과일의 황제라고 불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겉은 단단한 갑옷을 입은 것 같지만 속은 여리디여린 것이 두리안입니다.
꼭 우리 같기도 합니다. 겉은 강한 척하는데 속은 여리고 화장실 향기는 아니지만 인간 냄새 솔솔 풍기는 우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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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이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땅 깊숙이 온전히 스미시려고
살점 하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으시고
송두리째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악악되는
모질고 차가운 사람 세상을
찰진 밥으로 뜨거운 피로
새로 살맛나게 이루시려고
아낌없이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먹히기만 한 작은이에게는
고마움과 북돋움의 밥으로
먹기만 한 큰이에게는
뉘우침과 돌아섬의 밥으로
똑같이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당신의 살을 먹는 이를
당신의 살로 만드시고
당신의 피를 마시는 이를
당신의 피로 만드시려고
기꺼이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당신의 살과 피가 된 이가
당신처럼 먹힘으로써
죽임에 게걸들린 사라질 세상 안에
살림의 영원한 나라 이루시려고
늘 그렇게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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