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년~1446년)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대왕의 왕비. 문종과 세조, 안평대군등
세종대왕의 8남 2녀의 어머니이자 단종, 예종, 덕종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청송 심씨로 개국공신 심덕부의 손녀이며, 청천부원군 심온의 큰딸이다.
태조의 딸 경선공주에게 시조카가 된다.
충녕대군과의 혼인
세종보다는 2살 연상으로, 1408년(태종 8년), 태종의 3남 충녕대군과 혼인하여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의 동생 심종과 혼인한 태종의 여동생 경선공주가
시조카인 소헌왕후를 충녕대군의 배필로 추천했다고 한다.
왕비가 되다
이후 1417년(태종 17년), 경숙옹주에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당시 세자이던 양녕대군의 망나니 비슷한 짓이 절정에 달하자,
시아버지인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내쫓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덩달아 심씨도 세자빈이 되어서 경빈(敬嬪)으로 봉해졌고 곧 왕비가 되었다.
본래 세종대왕이 즉위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검비'(儉妃)라고 호칭을 지어 주었으나,
시아버지 태종은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공비'(恭妃)라고 고쳤고 그래서
세종실록 초반부에는 '공비'라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왕이 왕비에게 비호를 지어주는 관습은 1432년(세종 14년)에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이 숙청되다
세종이 왕이 되고, 세종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심온이 영의정에 부임한 건 태종 본인의 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에 대해선 보통은 태종이 심온을 숙청하기 위한 사전 위장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외척을 경계하여 알레르기만큼 싫어하던 태종은 강상인의 옥에 심온을 연루시켰다.
강상인은 군사 업무를 주상인 세종에게만 보고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에 대해 "상왕(태종)을 모욕했으며 왕명 없이 함부로 군을 움직였다"는
누명을 씌우고 여기에 심온까지 연결시켰다.
사은사로 세종의 즉위를 명나라에 고하러 갔던 심온은 국경을 넘어
평안도 의주에 도착하자마자 결국 사약을 받았다.
이때 심온] 숙청에는 심온과 정치적 라이벌인 박은이 실무적인 주도를 하였는데
박시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심온이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다시는 반남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마라!"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야사를 실었다.
실제로 심온의 가문은 박은의 가문과 사돈을 맺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이때 비단 심온 뿐만 아니라 심온의 형제와 다른 자식들까지 죄다 귀양을 갔고
그나마 자신의 비인 원경왕후의 남동생들(처남)을 사형시켰던 것과 달리
심온의 아내와 자식들은 다행히 살아났지만, 대신 변방의 관노로 전락하거나
관로가 막히는 등 가문이 완전히 풍비박산났다.
이들은 태종이 1422년(세종 4년)에 사망한 뒤에야 사면되었다.
참고로 심온의 아내, 즉 소헌왕후의 어머니가 죽은 해는 세종 26년인 1444년이다.
이때 숙청을 진행한 박은과 유정현 등은 역적의 딸이라 하며
소헌왕후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태종 사후에 소헌왕후가 보복을 행할 것을 두려워한 것 같기도 하고
심온 숙청 직후 태종이 세종에게 이미 아들 셋이 있지만 더 많을수록 좋다고 하자
박은 등은 태종이 소헌왕후를 폐하고 애 잘 낳는 새 왕비를 들이자는
식으로 돌려서 해석한 것 같기도 하다.
유정현이 즉시 이에 영합하며 "예로부터 제왕은 자손이 번성한 것을 귀하게 여겼으니,
빈(嬪)과 잉첩(媵妾) 2, 3명을 들이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고
종도 자신이 직접 세종에게 청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즉시 의금부가 호응하여 소헌왕후를 폐하자고 청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평민의 딸도 시집을 가면 친정 가족에 연좌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심씨는 이미 왕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폐출하겠는가.
경들의 말이 옳지 못한 것 같다."라고 하면서 이를 물리쳤고, 세종에게도
"죄인의 딸인 까닭으로 외인이 반드시 이를 의심하지마는, 그러나 이것이
어찌 법관(法官)이 마땅히 청할 바이겠느냐."라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이에 조말생, 원숙, 장윤화가 "만약 형률로써 논하오면 상교(上敎)가 옳습니다.
그러나 주상의 처지에서 논한다면, 심온은 곧 부왕의 원수이니,
어찌 그 딸로써 중궁에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겠습니까.
은정을 끊어 후세에 법을 남겨두시기를 청합니다."라고 청했으나 씹혔고
박은이 역적의 딸을 중궁으로 들 수 없다고 여론을 조성하고 다녔다.
이에 태종은 유정현, 허조, 허지와 의정부 당상관들을 불러 "《경》(서경 書經)에,
‘형벌은 아들에게도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니, 하물며 딸에게 미치겠느냐.
그전의 민씨(閔氏)의 일도 또한 불충(不忠)이 되었으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왕비를 폐하고 새로 왕비를 맞아 세우자고 의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내가 전일에 가례색(嘉禮色)을 세우라고 명한 것은
빈(嬪)과 잉첩(媵妾)을 뽑으려고 한 것뿐이다."라고 하며
세종의 후궁을 들이자고 하던 자신의 이전 명령은
소헌왕후를 겨냥한게 아니라고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태종의 심중을 이해한 박은이 "신 등도 또한
금지 옥엽(金枝玉葉)이 이와 같이 번성하오니, 왕비를 폐하고
새로 세우고 하는 일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니, 빈과 잉첩을 갖추게 하고자 함이
심히 마땅합니다."라고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시전했다.
이후 11월 28일, 태종은 영돈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
예조판서 허조, 지신사 하연을 불러 "그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딸이
후비(后妃)가 된 일은 옛날에도 또한 있었으며, 하물며 형률(刑律)에도 연좌한다는
명문(明文)이 없으므로, 내가 이미 공비(恭妃)에게 밥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뜻을 알라."라고
소헌왕후를 보호할 뜻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신하들은 "상교(上敎)가
진실로 마땅합니다."라고 하며 이후 소헌왕후 폐출론은 사그라들게 된다.
태종 입장에서는 이미 심씨 가문의 숙청은 완료되었고, 소헌왕후가 딱히
야심을 내보이거나 하는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굳이 아들 잘 낳는
며느리까지 쫓아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듯하다.
애초에 외척의 발호를 막으려고 단행한 숙청인데 왕비까지 폐출해버리면
새 왕비를 맞아야 하고, 그러면 새로운 외척이 등장할 가능성이 열리니
인간적 감정을 떠나 정치적으로 봐도 손해다.
이후로는 조용히 내명부를 통솔하다가 세자의 정실(세자빈)
휘빈 김씨의 미신 사건, 순빈 봉씨의 말도 안되는 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두 세자빈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실록에는 "자애로우면서도
기강이 엄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종 8년(1426) 한양에 큰 불이 났을 때에는 당시 '강무(講武)'라고 하는
사냥 겸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지방에 나간 세종대왕과 세자 문종을 대신해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천 가구가 넘는
집을 태웠을 정도로 규모가 큰 대화재였다.
당시 소헌왕후는 후일의 금성대군을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모든 일을 진두지휘했다.
이 때문에 당시 정승 황희는 통상적인 보고절차를 무시하고 중전 소헌왕후에게 직접 보고를 올렸다.
말년에는 병이 생겨서 자주 피접을 나갔다가, 1446년(세종 28년), 이질 때문에
향년 52세로 차남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눈을 감았다.
수양대군도 어머니 소헌왕후에게 효자로서 갖은 효도를 다 하였다고 기록되었고
둘째 며느리인 정희왕후도 시어머니 소헌왕후에게 총애를 받았다.
특히 부부인 시절 정희왕후가 장남인 도원군을 출산할 때가 가까워지자, 소헌왕후가
관례를 깨고 궁으로 직접 불러들여 궁궐 안에서 출산하도록 조치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