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과학자의 시초, 과연 누구일까?
바로 장영실이다.
오늘은 그가 조선 최고의 발명왕이 되기까지의 생애와 그의 발명품은 어떤것들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1. 장영실의 생애
장영실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 즉 노비로 태어났으며 부친은 원(元)나라 사람으로 소주(蘇州),항주(杭州)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고 전해진다.
부친은 관노가 아니었지만 모친의 신분으로 인해 관노로 자란 장영실은 태종 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기술자로 종사하였으며, 제련, 축성,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다고 한다.
1421년(세종 3년)에는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고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가 되며 관노의 신분을 벗게 되었다.
그 후 뛰어난 재주로 많은 발명품을 발명해오다 1442년(세종 24년)에 장영실은 임금이 탈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고, 제작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그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고 장영실을 비롯한 가마 제작자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는 것은 물론, 곤장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 때 장영실은 세종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불구, 세종은 곤장 100대 형을 80대로 감해 준 것이 전부였다고 전해진다. . 그 뒤 장영실은 대호군 자리에서 파면된 후로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이에 사람들은 간의대 사업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려 했다는 주장과 천문의기 프로젝트가 끝나 장영실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는 주장으로 나뉘었지만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는 않다.
2. 장영실의 업적
전통적인 농업국가였던 조선에서는 농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천문학이 매우 중시되었던 시대다. 세종 때에는 이러한 관심이 잘 반영되어 천문학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과학발명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1414년에는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게 하여 전국의 강우량을 측정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에서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습니다.
또한 흠경각을 만들어 경복궁 내에 설치하였다.
이는 옥루에 기륜(물시계)를 설치하여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기륜이 회전하면 안에 있는 인형들이 북, 종, 징 등을 치면서 시간을 알리도록 한 것이다.
그 외에도 천체(별, 태양, 달, 행성 등)을 관측하던 천체관측기기(天體觀測機器)인 혼천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등을 이용해 천체의 움직임을 살폈다. 이에 바탕을 두고 세종 24년에는 「칠정산」이라는 달력을 만들었다. 이는 우리 나라 역대의 역법에 원, 명의 역법을 도입하여 서울을 표준으로 작성한 우리 나라의 달력이다.
사회가 안정되었던 세종때에는 중농책과 함께 성리학자들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과학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세종 때의 뛰어난 과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官奴) 출신이었는데, 그는 제련, 축성,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나 1423년(세종5년)에 궁중 기술자가 되어 간의대(簡儀臺), 천문의(天文儀) 등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후 혼천의(渾天儀) 제작과 함께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 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천체관측용 대,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 등을 제작 완성하였고, 또한 측우기와 수표 등을 제작하는데도 참여하였다.
3. 장영실의 발명품
[혼천의(渾天儀) ]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
1433년(세종15년) 장영실, 이천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관천대(觀天臺]
조선시대의 천문관측시설로 현재 창경궁 관천대 등 2개가 남아있다.
[앙부일구(仰釜日晷)]
14 34년(세종16 년) 세종대왕의 명으로 장영실이 제작한 해시계이다.
[자격루(自擊漏)]
1434년(세종16년) 장영실, 김조, 이천 등이 제작한 물시계이다.
[수표(水標)]
1441년(세종23년)부터 1442년에 걸쳐 제작된 수위계측기이다.
조선시대에 큰 비가 내리면 청계천이 넘쳐 주위 집들이 큰 피해를 입었었는데
이를 위해 수위를 측정하여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제작되었다.
[측우기(測雨器)]
1441년(세종23년)에 발명된 세계 최초의 우량계이다.
강우량 측정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때 발명된 측우기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되었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437년(세종19년)에 만들어진 천제관측의기로,
조선시대에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했다.
[갑인자(甲寅字)]
1434년(세종16년)인 갑인년에 만든 동활자로 일명 '위부인자'라고 하며
현재는 그 인쇄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4. 관기의 자식으로 태어난 장영실
어릴 적부터 호기심도 많고 재능도 뛰어났던 장영실의 재주를 알아본 어머니는 서당을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더불어 장영실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한 주변 많은 이들의 도움과 자신의 꾸준한 노력을 인정받아 주자소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알던 것과 달리 세종대왕이 아닌 태종이 먼저 장영실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후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대왕을 만나며 장영실의 뛰어난 재능이 제대로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뽑았던 태종과 세종대왕이 있었기에 장영실의 위대한 업적이 존재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