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5章 아버지와 아들 얼마나 지났을까? 냉옥룡은 어두운 곳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눈을 떠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 곳은 완전한 어둠에 빠져 있었다. '내가 죽은 것일까?' 냉옥룡은 실소를 흘리며 몸을 일으켜 보려 했다. 몸에 힘이 전해지지 않았다. 또다시 내공을 상실한 것인지, 아니면 죽어 몸뚱이와 영혼이 분리된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상태로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으음……!" 냉옥룡은 눈앞이 점점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명(黎明)! 그렇다면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군.' 냉옥룡은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곁, 여명에 찬란한 검신을 드러내고 있는 자옥신검이 보였다. 혈도가 마비됐기 때문일까? 검을 잡으려 하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스르르륵……! 그리고 그의 몸은 언제부터인가 눈에 묻힌 채 물살이 흐르듯 흐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눈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 희미하게나마 사물이 보이는 이유는 그의 몸이 눈을 따라 흐르다가 눈 밖으로 빠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산 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그의 호신법이 주효했기 때문에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눈에 쓸리며 구식대법(龜息大法)을 쓴 덕에 눈더미에 파묻혀 오랜 시간을 보내고도 살아남은 셈이군.' 냉옥룡은 살았다는 것을 알기는 했으나, 앞으로 오래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하지 못했다. 마염화의 독기를 이용해 겨우 되살았던 내공의 힘이 산산이 사라진 후였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꽁꽁 얼어붙은 후였다. 기혈이 뒤틀려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정도였고, 정신 이외에는 살아 있는 것이라곤 없다 할 정도였다. "후후… 천수옹 사부가 천사성모에게 뺏긴 백 권의 마경이 내가 배운 백 권의 신공비급 못지않은 것들이었군. 천수옹 사부님은 백도제일인 동시에 마도제일인이셨군. 죽은 후에야 그분의 초절함이 밝혀진 셈이구나." 냉옥룡은 눈 위에 뜬 상태로 마냥 흘러갔다. 만 길 높은 곳에서 시작된 눈사태였기에 수십 리 동안 흘러 내려간 후에야 흐름을 중지할 것이다. 그는 눈 위에 뜬 채 떠내려가 죽을 운명인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쿵-! 냉옥룡은 가물가물하던 상태에서 머리가 단단한 물체에 부딪치는 충격을 느끼며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눈에 휩쓸려 흐르다가 바위에 머리가 부딪치며 멈춰진 셈이었다. "금강불괴가 아니었다면 머리통이 박살날 뻔했군." 냉옥룡은 어린아이같이 말하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후… 돌이 머리를 때리는 충격으로 막힌 혈도 부위가 풀려 손발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구나.' 냉옥룡은 만신창이가 된 몸이나,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엉금엉금 기면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곳은 사면이 절벽으로 가로막힌 곳이었다. 눈사태에 휩쓸려 오지 않고는 올 수 없는 절곡이었다. "눈에 쓸려 떨어졌기 때문에 산 것이군." 냉옥룡은 일어나며 몸을 휘청였다. 피부를 살펴보는 눈빛이 한독에 가득 찼다. 추위가 몸을 엄습했고, 고독감이 밀어닥쳤기 때문이었다. 자옥신검이 유난히 무겁게 여겨지는 이유는, 힘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살았다고는 하나,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군." 냉옥룡은 낙담하다가 갑자기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자옥신검을 꽈악 움켜쥐었다. '얼마 전이었다면 이대로 죽을 수 있었을 것이나, 이제는 죽을 수 없다. 추운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 죽겠는가!' 냉옥룡은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피범벅이 된 몸을 움직였다. 발을 놀리기가 아주 거북스러웠다. 그리고 그는 깊은 눈구덩이에 쌓인 상태였는지라 마른 땅을 찾아 디딜 수 없어, 디디다가는 눈을 헛딛고 휘청거리곤 했다. 상처 부위가 찬 기운에 닿으면 말할 수 없이 쓰라렸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 나가려 했으나, 하늘이 그를 돌봐 주지 않는 것 같았다. "헉헉……!" 냉옥룡은 아픔과 피로에 지쳐 결국 무릎을 꿇었다. 뱃속이 타는 듯했다. 그는 기갈(飢渴)을 느끼며 눈을 한 움큼 쥐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찬 눈을 먹자 입 안이 불에 데이는 듯 화끈거리며 어느 정도 냉정이 회복되었다. "휴!" 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올려다보았다. 높디높은 암벽이 보였고, 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새가 아니고는 빠져 나가기 힘든 곳이군." 그는 허리를 바짝 꾸부리며 걸어야 했다. 뱃가죽이 갈라져 허리를 펴고 걷기 힘든 것이다. 허리까지 푹푹 파여 드는 눈길을 걷는 기분은 그가 아주 오래 전에 경험한 바 있는 것이었다. 오래 전, 독안신군과 함께 걷던 기분이 그랬던 것이다. '후후… 나는 눈 속에서 죽을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인 모양이다.' 냉옥룡은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죽음에 직면했으면서도 웃음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수양이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심오해졌다는 증거였다. 얼마를 갔을까? 냉옥룡은 몸 수십 군데에 장인과 지인을 지닌 몸뚱이를 하고 걷다가 이상한 장소를 보게 되었다. 검은 암벽이 빙벽에 연이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 곳도 원래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냉옥룡이 휩쓸렸던 거대한 눈사태 때문에 돌벽이 나타난 모양인데, 검은색이 눈의 흰빛과 어울려 이상한 흥취를 자아내게 했다. "눈이 얼어붙은 두께가 수 장이군." 냉옥룡은 천산의 만년설이 굉장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암벽을 향해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세웠다. "사… 사람이……." 냉옥룡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얼음이 무너져 내린 암벽 아래쪽에 사람 한 명이 있기 때문이었다. 흰 옷을 입은 젊은이 한 명이 사지를 활짝 편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와 냉옥룡 사이의 거리는 삼 장 정도였다. "으으, 사… 사람이 있다니… 죽… 죽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옷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이 곳으로 떨어져 정신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냉옥룡은 백의인영이 꼼짝 못하고 있자, 경악에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래도 정신은 붙이고 있는데… 아, 저 사람은 정신마저 잃고 있구나. 내가 가서 구해야겠군.' 냉옥룡은 외로움 속에서 오히려 용기를 느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를 고독감 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었다. 푹- 푹-! 냉옥룡은 눈을 헤치며 걸었다. 그의 몸이 닿는 곳의 눈이 흰빛에서 붉은빛으로 변했다. 몸에서 피가 쏟아지기 때문이었다. 이 장 갔을까? 눈을 헤치고 가던 내옥룡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죽은 사람이군. 살색이 회색이군." 냉옥룡은 낙심천만이 되었다. 산 사람인 줄 알았던 백의인이 시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휴, 나도 저 사람 꼴이 될지 모르겠군." 냉옥룡은 어깨에 힘을 빼며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시체는 하늘을 쳐다보는 자세를 하고 죽어 있었다. 그의 몸에는 검상이 수십 군데나 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두 다리는 장력에 당해 산산이 박살났고, 아랫배에는 사발만한 구멍 세 개가 뚫려 있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죽어 있었다. 눈을 감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표정이 아주 야릇했다. 허탈한 표정이라고나 할까? 눈을 뜬 채 죽어 있는 사람의 나이는 갓 스물 정도로 보였다. 냉옥룡은 죽은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백의인의 시체 바로 곁까지 다가가며 아주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의아해 하는 이유는, 백의인의 얼굴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은 미남이었다. 상처가 나 있기는 했으나 천하에 다시 없는 미남이라 해도 좋을 정도인데, 이상하게도 아주 낯익은 용모였다. "비… 비슷하군!" 냉옥룡은 시체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의 얼굴과 아주 비슷하군.' 그가 알굴을 만지는 이유는, 시체의 용모가 그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냉옥룡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협공당해 죽은 것으로 보이는 백의인의 얼굴 모습은 천하제일의 미남자, 냉옥룡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검미에 봉목, 유난히 우뚝한 콧날, 꽉 다물려져 있는 입술의 매무새, 사나이답게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아래턱……. 정말 비슷한 얼굴이었다. "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냉옥룡은 암벽 바로 아래 죽어 있는 백의인의 시신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눈길을 암벽에 고정시켰다. 암벽에 글이 적혀 있었다. 백의인이 죽기 전 남긴 글 같은데, 처음에는 한 자 깊이였고 나중에 가서는 반 치 깊이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백의청년은 글을 쓰다가 죽은 것 같았다. 냉옥룡은 눈을 찌푸려 안력을 돋구어 암벽에 새겨진 글을 살폈다.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원수에게 속아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죽어 가는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한 자 한 자에 원한이 스며 있는 글이었다. 냉옥룡은 눈을 부릅뜨고 글을 계속 읽었다. <나는 너무나도 후회스럽게 살았다. 원수를 사부로 섬겼으니… 아, 나의 사부가 나의 가문을 피로 씻은 원수일 줄이야! 그녀가 나를 전인으로 취하기 위해 나의 가문을 멸망시킨 장본인일 줄이야…….> 백의인은 한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었다. 그가 지니고 있던 한은 냉옥룡이 품고 있는 한보다도 오히려 더한 것이었다. <나는 천애고아인 줄로만 알았다. 사부가 나의 구명지은인(救命之恩人)인 줄로만 알고 사부에게 신명을 다해 충성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제자로 거느리기 위해 나의 가문인 냉가장원(冷家莊院)을 멸문시킨 괴수였을 줄이야! 나는 원수를 사부로 삼은 것을 한탄한다. 그리고 원수에게 속아 세상에 피바람을 일으킨 것을 한탄하다. 가장 원통한 것은, 나를 사모한 여인 곁에 남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용은 점입가경(漸入佳景)이었다. 냉옥룡의 표정 또한 달라져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숨도 쉬지 않았다. 글의 내용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 것이었다. <그 여인은 내가 마서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나를 구했다.> 그런 글이 냉옥룡의 얼굴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마… 마서생!" 냉옥룡은 한순간 글에서 눈을 떼며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스물로 보이는 청년이 이십 년 전, 천사교 고수 오백 명을 이끌고 중원을 피로 씻은 마서생 냉철무였단 말인가? "으으, 믿… 믿을 수 없다." 냉옥룡은 눈빛을 흩트리며 쭈그리고 앉아 글을 계속 읽었다. <그녀는 자부선자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천사교법(天邪敎法)을 어긴 죄로 제명당해 쓰러진 나를 구했고, 내게 몸을 바쳤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신분을 숨겼다. 속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사모하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녀와 행복하게 살 생각을 했던 것인데… 아,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는 운명인 듯… 내공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내공이 살아나자 천사교가 왜 나를 제명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나는 자부선자가 잠든 틈을 이용해 몰래 자부를 빠져 나와 이 곳으로 왔다. 그리고 비밀을 알게 되었다. 천사성모가 나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냉옥룡은 너무도 놀라 얼굴을 백지보다 희게 물들였다. "자… 자부! 으으……!" 그는 뒤통수에 쇠망치를 맞은 기분이 되었다. 마서생이 자신과 닮았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듣기는 했으나, 아직 설마 설마 했던 냉옥룡이었다. 그런데 이 글로 인해 모든 것이 밝혀지고 만 것이다. "이… 이분이 나의 아버님이시군." 냉옥룡은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라는 세 자를 입에 올렸다. "아… 아버님……!" 냉옥룡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서생은 그의 아버지였다. 그것은 이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죽은 마서생 냉철무. 그가 간직하고 죽은 분노가 시공을 초월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비운의 부자(父子), 그들은 이렇게 이십 년 만에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마서생은 자신에게 아들이 있는지 모르고 죽은 사람이었다. 그의 시체가 청년의 시체로 남아 있는 이유는, 죽은 후 만년설에 묻혀 시체가 냉동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체는 이십 년 간 눈 속에 묻혔다가 눈사태로 인해 이십 년 만에 세상에 나타난 셈이었다. 자신이 남긴 유복자의 눈앞으로……. 그의 글은 계속되었다. <나는 천사성모가 기재(奇才)를 천사교로 모으기 위해 혈겁(血怯)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그렇고, 나를 해한 혈서생도 그렇다. 천사성모는 광마(狂魔)다. 그녀에게 속아 산 것이 분하기만 하다. 그녀가 익힌 일백 가지 마공은 하나같이 초절하다. 보통 수법으로는 꺾기 힘든 것이다. 내가 자부에서 자부선자의 간병 아래 사는 몇 달 간 터득한 파옥삭철강살(破玉削鐵 煞)이 그녀가 익힌 마공을 박살내는 유일한 수법이 될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해 여기 적어 둔다. 우연히 나의 시체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이 구결(口訣)을 아낌없이 선사한다. 대신, 중원 항산에 있는 자부의 자부선자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봐 주기 바란다. 그녀가 나를 잊지 못하고 있거든,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기 바란다. 그것은, 자옥부(紫玉符)를 남겨 두고 떠난 냉씨 청년은 죽은 사람이 되었으니… 그를 기다리지 말라는 말이다. 나의 부탁은 그것이 전부다.> 그 글 아래 한 가지 내공 구결이 적혀 있었다. 마서생 냉철무가 무공을 잃은 폐인이 되어 자부선자와 함께 살던 기간 중 심득(心得)을 얻어 창안한 것인데……. <파옥삭철강살(破玉削鐵 煞)> 그런 여섯 자 이름을 갖는 것이었다. 냉옥룡은 글을 다 읽은 다음, 얼어 죽어 이십 년 간 늙지도 썩지도 않은 아버지 냉철무의 시체를 부둥켜안았다. 아버지의 시체는 차가웠다. 그는 영원한 청년으로 죽은 셈이었다. "아… 아버님! 소… 소자를 알아보셔야 합니다. 아… 아버님이 자부선자의 배에 잉태시킨 씨앗이 바로 접니다. 아버님! 저… 저는 옥룡입니다." 냉옥룡은 눈물로 옷을 적시며 몇 차례씩이나 정신을 잃었다. 마서생 냉철무는 원래 산서(山西) 지방의 토호(土豪)이던 냉가장원의 독자였다. 그는 한 살 때 백 권의 어려운 글을 줄줄 외운 천하의 기재였다. 그의 암기력과 오성은 백 년에 하나뿐이라 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고, 그의 근골은 상승무공을 익히기에 더없이 좋은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살신지화를 불렀던 것이다. 우연히 냉철무의 근골에 대해 알게 된 천사성모는 자신을 위해 싸워 줄 기재로 냉철무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녀는 냉가장원을 피로 씻었고, 다섯 살 된 냉철무만을 죽이지 않았다. 냉철무는 화적이 자신의 집을 피로 씻은 줄 알고 세상을 저주하게 되었다. 바로 그 때, 천사성모가 우연히 그를 발견한 듯 나타나 그를 전인으로 거둬들이고 그에게 마공을 전수했었다. 냉철무는 천사성모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대은인이라고 믿고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었다. 그녀가 시키는 일이라면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일지언정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백 명의 고수와 함께 중원의 오백 개 문파를 피로 씻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천사성모에 대한 충성심이 하늘 밖에 닿는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도의 저항은 상상 이상이었다. 마서생은 천사성모의 꿈, 중원 정복을 포기한 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천사성모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고, 마서생은 다친 채 중원을 떠나다가 길목을 지키고 있던 그의 사제 혈서생에게 당해 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 때 그를 구한 사람이 바로 자부선자였다. 자부선자는 당시 일천 개의 자부신단을 백도맹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자부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녀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냉철무의 정체를 모르고 자비심에 따라 구했는데, 일이 묘하게 되느라 그녀는 냉철무에게 사랑을 느끼고 몸을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냉옥룡이 나타나게 된 동기였다. 냉옥룡은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흐느껴 울다가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르르릉-! 냉옥룡은 뇌성 벽력 소리와 함께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 그는 너무 울어 새빨개진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피다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꽈르르릉-! 어두워지는 설곡을 휩쓰는 눈사태는 냉옥룡을 아버지 곁으로 데려다 준 눈사태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이었다. 우르르릉-! 눈사태는 십 리 안을 뒤흔들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냉옥룡은 눈사태가 일어나는 소리에 정신을 되찾게 되어 장탄식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버님을 편히 모셔야지……." 냉옥룡은 젊은이로 죽은 아버지 마서생 냉철무의 시신을 안고 무덤을 세우기 좋은 장소로 찾아다녔다. 그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효행인데, 어찌 고통이 느껴지겠는가! 그는 글이 있는 곳에서 십 장 떨어진 곳까지 갔다가 일단 냉철무의 시체를 반듯이 눕혔다. 그 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이끼로 덮인 맨땅이었다. 설곡은 다른 곳에 비해 이상한 지형을 갖고 있었다. 호리병 같은 모양인데, 어떤 곳은 극한지기(極寒之氣)에 쌓여 있고 어떤 곳은 초겨울같이 쌀쌀한 것이다. 골짜기의 지형이 울퉁불퉁 들쑥날쑥하기 때문에 아주 추운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는 것이다. "이 곳에 묻어 드리고 싶지는 않은 데… 기왕이면 중원 자부로 모셔 가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안장해 드리고 싶은데, 내 처지가 살아 나가지 못할 처지이니……." 냉옥룡은 눈물을 흘리며 시체에 절을 했다. 한 번 절을 하고 두 번 절하기 위해 몸을 일으킬 때. "으응……!" 냉옥룡의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있었다. 어디서 그런 달콤한 향기가 흐르고 있는지, 향기를 들이마시자 피로가 사라지고 이상한 힘이 솟구쳐 올랐다. '어디서 이런 선향이 날까?' 냉옥룡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살피다가 이끼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일 장 방원을 덮고 있는 이끼는 보통 이끼가 아니었다. 느낌이 솜같이 부드러운데, 빛이 황금빛이었다. 냉옥룡은 그제서야 그것을 알아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이것은 용연초(龍延草)라는 것이고, 얼음 밑에서만 자라난다는 용연초가 눈사태 때문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군." 냉옥룡의 얼굴빛이 잘 익은 자두빛으로 화했다. 용연초를 뜯어 먹을 경우, 회춘의 힘을 발휘하는 영약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 놀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용연초는 영약이다. 그러나… 그것은 용연초와 함께 자라는 영약에 비해 영약이라고 불리지 못하는 것이다.' 냉옥룡은 이마에서 땀을 흘렸다. "용… 용연초가 있다는 것은… 이… 이 근처의 어딘가에 빙극설지초(氷極雪芝草)가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냉옥룡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다가 용연초를 한 움쿰 뜯어 먹었다. 그 맛은 아주 썼다. 그리고 용연초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차게 식어 가던 몸뚱이가 불덩이같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상처 부위가 더 쓰려 왔다. 하나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내공의 힘이 느껴졌고, 사지백해에 힘이 느껴졌다. "찾아보자. 그것을 찾는다면 이 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냉옥룡은 용연초를 몇 주먹 뜯어먹은 후, 원기를 얻고 눈 위를 치달리기 시작했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걸음이긴 했으나, 너무도 쾌속한 걸음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는 자신을 깨웠던 또 한 번의 눈사태가 일어난 곳 근처에 이르러 너무나도 화려한 향기에 취했다. 눈사태가 일어나 흙이 보이는 곳이 있었다. 검은 흙이 아주 탐스럽게 보이는데, 언제부터인가 황금빛 꽃송이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는 지초(芝草) 한 송이가 있었다. "저… 저것이다." 냉옥룡은 꽃송이를 보며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가 내게 선물한 것이리라.' 냉옥룡이 눈물을 씹어 삼키며 꽃 있는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얼마 후, 그는 유난히 많은 솜털을 갖고 피어나 있는 황금빛 꽃송이를 얼굴 아래 두고 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흙을 파자, 인삼 뿌리같이 생긴 뿌리가 나타났다. 냉옥룡은 여인의 가슴을 애무하는 듯 섬세한 손길로 뿌리를 뽑아 든 다음, 그것을 두 손바닥에 받쳐 들었다. "빙… 빙극설지초(氷極雪芝草)! 바… 바로 이것이 전설로만 알려져 있는 북천산의 영초, 빙극설지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있는 구엽의 금색(金色) 지초(芝草)는 잎사귀 하나만으로도 백골에 살을 붙인다는 구엽금지초(九葉金芝草)였다. 그 잎사귀는 설삼보다도 더한 영약이 되는 것이었고, 그 뿌리는 어떠한 독이라도 해독시키는 해독약이 되는 것이었다. 냉옥룡의 얼굴은 눈물로 뒤덮였다. 이십 년 간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가 아들에게 발견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눈물일 것이다. 설곡이 눈보라에 잠겨 있을 때였다. 우르르릉-! 마치 장마 때 천둥치는 소리가 나며 광풍설이 휘몰아쳐 한 자 앞쪽의 경물을 알아보기 힘들게 할 때, 돌연. "우……!" 수백 리를 뒤덮는 눈보라를 일거에 흐트려 버리는 장소성(長嘯聲)이었다. "우……!" 장소성이 점점 더 요란해지며. 꽈꽝- 꽝-! 수 장 두께로 얼어붙었던 만년빙이 거북이 등가죽같이 쩌억 갈라져 버렸다. 장소성에 실린 진기를 이기지 못하고 깨어져 버리는 얼음 덩이들. 그뿐이 아니었다. "우……!" 장소성 소리가 더 요란해지더니, 설곡의 절벽 위쪽에서부터 아주 엄청난 눈사태가 일었다. 우르르르릉-! 천만 근의 눈이 한꺼번에 떨어지며 근처가 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렸다. 삼경이라 주위가 지척지간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둡지 않다면 일대 장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꽈르르릉- 꽝-! "우……!" 산사태, 눈사태 나는 소리와 한데 어우러지는 장소성은 천하에서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일임에 틀림없었다. "우……!" 창룡후(蒼龍吼)라는 음공과 함께 신형을 폭사시키는 야청년(野靑年) 한 명이 있었다. 짐승 가죽으로 된 옷으로 하체를 겨우 가리고 있는 젊은이의 등판에는 자옥신검 한 자루가 메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은 가슴 앞쪽으로 반듯이 내밀어져 있는 상태인데, 양 팔뚝 위에는 한 구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청년은 하늘을 향해 구슬픈 장소성 소리를 내며 허공을 밟으며 날아올랐다. 등에 메어져 있는 자옥신검도 날아올랐고, 양 팔 위에 걸쳐져 있던 흰 옷 입은 사람의 시체도 그의 몸뚱이와 함께 사라져 갔다. 설곡은 그와 함께 아주 쓸쓸한 곳으로 화해 갔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잼 납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