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살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4년 전으로 돌아간다.
'여긴... 어디지?'
가진 것 하나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 종말이 시작될 것만 같은 두려운 곳이다. 잃을 것 없는 자는 위대함을 소비할 곳이 없어 낡고 해진 고동색 지갑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다 낙심한 표정으로 푹 소리 나게 덮었다. 그 아이는 모든 것이 두려워 눈과 귀와 입과 코를 막았으나 간신히 숨을 쉬며 살아간다.
어둠에 잠식된 늪지 -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영롱한 샘.
'벽이자 늪인 그곳'은 철갑을 견고하게 여러 겹 두른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검붉은 샘이기도 하며, 핏빛 샘을 잔잔하게 비추는 횃불들을 품은 생명의 근원지이다. 보이지 않는 부모님들의 안온한 마음이 한데 담겨 갈망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삶의 샘과 죽음의 늪. 그 중간의 어디쯤이기도 하다.
심오한 둥지는 긴고아를 튼 원숭이들을 하나둘 내뱉었고, 그들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해 수천 년간 바닥만 헤집던 동면을 비집어 단단한 알껍질을 깨고 나와 황량한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저 멀리 동굴이 보이자 정교하게 정조(釘彫)된 손으로 새카만 벽을 짚어 희미하게 반사되는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삶은 어렵게 시작되었다. 그이는 야윈 몸을 자의적으로 이끌기 힘들었다고 하며, 오죽했으면 주변 어른들이 부추길 정도였다고 한다. 네 살짜리 미숙아에겐 이 세상을 딛고 꼿꼿이 일어나 걸어 다니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는 선천적으로 통뼈였다.통뼈를 가진 이는 외골격의 부피 밀도가 일반인보다 일정량 높기에 신체를 지탱하는 힘이 근본적으로 강하다. 아이는 그러한 이점을 지혜로이 이용하여 두 손을 쥐락펴락 해 작은 근육을 조밀하게 단련했고, 짧지 않은 수련기간을 거쳐 광활한 세상에 걸음을 내디뎠다. 우연히 마주한 검은 창고는 곰팡이 빵 공장이었다. 빵을 집어 허겁지겁 입에 욱여넣었고, 하악을 상하로 움직여 잘게 부서진 빵조각을 녹여내 삼켰다. 강도 높은 고통은 어둠에서 불씨 같은 가능성을 발현한다. '어려운 삶'을 이겨내는 힘은 '명경지수의 마음가짐과 노력의 정도'라는 정조적인 진리를 어렵게 깨달은 뒤, 생존의 외길인 어두운 방에 그려진 샛노란 창을 바라보았다.
한 심리상담사가 말하길 사회발달 장애를 의심해봐야 한다나. 사회심리 발달장애는 또래와 비교하여 유독 잘 웃지 않고, 달래기 어렵거나, 비협조적이고,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의 사회심리적 갈등을 겪는 대상을 말한다. 이를 겪는 대상의 변주곡과도 같은 독특한 행색은 어릴 때부터 눈에 띄게 발현되며 생후 18개월이 넘어도 말보다 몸짓을 중심으로 이어나간다. 언어발달은 개인차가 크게 작용하여 지능의 업그레이드 시기가 유전학적인 요인과 정서적인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유형의 특이점을 가진 이들의 치료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대안은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특성, 자원, 성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발달 교육을 1차 목표로 삼는 것이다. 마치 유기견 보호소에서 자란 강아지에게 대외적인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 작은 단계부터 성취하기 쉬운 목표를 부여하고 성공적인 절차를 밟고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식으로 말이다.
노력은 꾸준함이며 곧 사랑이다. 부러운 삶이 있으면, 부러운 삶을 사는 자를 잘 관찰하는 '꾸준함'이 필요하다. 그들의 일상적인 행실과 행동을 주의 깊게 조사하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녹아들 수 있도록 반복적인 시도를 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수로 있어야 한다. 존경하는 사람이 지향하고 실행하는 삶을 반면교사 삼아 자신의 발전에 자연스레 베이도록 상당한 시간을 기여해야 하는 것. 이것이 노력이자 정열적으로 불타오르는 사랑이다.
생명은 산소가 차단되지 않는 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심지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작열통으로 남은 생을 맹추격한다. 진리와 거짓의 선상에 인간을 둘로 나누어 우악스럽고 참혹하게 괴롭힌다. 생명을 가진 한 인생의 어느 지점을 만나 단계의 흑막을 깨부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더욱 커다란 진실의 표면의 발끝조차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생명에 책임을 갖고 산다는 건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괴로움을 깨닫는 순간 필시 가볍게만 여겼던 진실의 일부를 단숨에 깨우치기도 한다. 삶은 진실이란 마트로시카 인형의 중심 속에서 끊임없이 탄생하는 우주정거장이며, 죽음이 다가오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디 있는지 모를 번뇌 반복 장치가 거듭 발동한다. 이를 위기일발로, 스스로 연명하기를 명령한다.
혼돈의 바닷속에서 아이는 어린 시절에 몸으로 꾸역꾸역 익힌 헤엄치는 법을 용케 잊지 않았다. 분명, 그 아이 또한 꺼지지 않는 지옥불 같은 '불멸의 사랑'을 받았으리라. 이제 그 아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곳은 부모로부터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한 요보호 아동에게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인지적, 정서적인 성장발달에 필요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나아가 사회의 어엿한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재단 단체이다.이 재단의 창설자이신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 슈월츠' 신부님은 한국전쟁의 상흔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1957년에 마지막 피난지인 부산에 가톨릭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의지할 곳 없이 거리를 헤매는 많은 전쟁고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신부님은 병들고, 굶주리고 지친 이들을 위해 기꺼이 그들의 아버지가 됨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 믿었고 1970년대의 고질적 문제였던 영화숙, 재생원 아동들을 받아들이면서 이곳 소년의 집을 설립하게 되었다.한국 이름 소재건. 소년의 집의 아이들은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을 '소 신부님'이라고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랐다. 소 신부님은 "가난하게 살다 보면 가난한 이들과 같은 파장에 머물 수 있습니다."라는 대의적인 말씀을 남기고 영면하셨다. 그리고 기부금이 생길 때마다 소년의 집 운영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했지만, 당신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살기를 자처하셨다. 나는 소 신부님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고 있지 않지만, 가급적이면 장을 볼 때 많은 물건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물건만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최소한의 물건으로 최대한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스트'로 살고 있다. 신부님의 인본주의적인 헝그리 정신을 물려받아 가난하거나 소외받은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 원대한 꿈을 향한 여정의 작고 애증스런 과정이기도 하다.
부산에 있는 시설은 현재 영유아를 위한 시설, 초등학생을 위한 시설이 있다. 그 외 다른 시설은 14살부터 19살까지의 청소년 아동이 수녀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시설의 보호를 받는다. 서울에도 같은 이름의 재단 시설이 있다. 영유아부터 일부 정신 장애아동, 초등학생 아동이 각기 다른 건물에서 생활하며 두 개의 남녀 생활관에 8~13살 나이의 학생이 주로 생활한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생전 모습
정부는 아동양육시설, 공동생활가정, 가정위탁 등의 보호를 받다가 만 18세 이후 보호가 종료되어 홀로서기에 나서는 청년을 '자립준비 청년'이라 부르기로 했으며, 자립 후 5년간 수당을 지급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나는 8년 전 보육원을 퇴소한 자립준비 청년이다.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에 위치한 보육시설은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생활하던 곳이다. 유아기, 아동기를 이곳에서 보냈으며 유년기는 부산에 있는 보육시설에서 생활했다. 길었다면 긴 시간, 짧았다면 짧은 시간. 그곳에서의 경험은 '무(無)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누군가의 손길을 떠나 도착한 이곳, 유럽 중세시대에나 있을 법한 요새 같은 웅장한 이미지였다. 탁 트인 정문과 마주한 7층짜리 큰 건물, 깔끔하게 정리된 화단, 가지런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측백나무와 소나무들. 참나리를 붙잡은 오돌토돌하고 반질반질하지 못한 크고 작은 돌담, 그 사이를 시원하게 가리는 비비추, 보육원에 들어오는 이들을 반기는 고동색 얼굴의 해바라기들. 야외 풀장 위에서 정지비행하는 고추잠자리 떼와 여린 몸에 비해 커튼만큼 큰 두 날개로 나풀대며 화사한 꽃밭을 날아나니는 배추흰나비.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차가운 기운이 감돌아 적어도 40년의 세월은 훌쩍 넘긴 오래된 허연 건물. 죽음의 숨결을 불어넣은 듯한 화단, 생명을 잃은 연갈색 측백나무와 송곳 끝처럼 노련하게 앙칼진 소나무들, 냉랭한 분위기가 풍기는 진회색빛깔의 돌담, 생을 다해 썩어 메마른 흙에 묻힌 비비추, 강추위에 바짝 말라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자 머리를 잃어 본래 모습을 잃은 해바라기들. 툰드라 지대에 견줄만한 매서운 강철바람과 서림, 꽝꽝 얼어붙은 야외 풀장. 공허함의 오싹함, 의심쩍은 오래된 장물아비 문짝의 살결에서 거뭇한 촉감이 느껴지는 흉흉함.
살을 에는 적색비로 피부에 스며든 이데올로기적 견해의 풍경은 언제 다시 봐도 믿기지 않았다.
"분명 따뜻한 마룻바닥에서 자고 있었는데..."
아마도 4살. 그때부터였을까. 어머니의 품을 떠나게 된 때가. 다시 꾸지 못할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꿈이라면 언제 꿔도 좋을 재미있는 것이라 기대했건만...
꿈을 꾸면 나는 초능력자가 될 수 있었고,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 동물로 변장할 수 있었고 바다가 아닌 곳을 자유로이 헤엄칠 수 있었다. 하늘을 마음껏 날아 온누리인 당신이 되었고, 하늘보다 깊은 곳에서 원하는 데에 손과 발을 마음대로 뻗어 만물을 창조할 수 있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는 바람에 몸을 맡겨 전혀 상상해보지 않은 장소를 무한히 탐험할 수도 있었다. 악몽을 꾸기 전까지는.
그곳은 왜 나를 어둠으로 이끌었나. 살기 위해 짊어져야 할 정직한 과정.
한 아이가 평생 풀어야 할 운명의 첫 과제.
[십자가의 길]
자아를 찾아 떠난 여정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