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라는 영국의 여성 지리학자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여러 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우리의 강토 곳곳을 여행한 뒤에 우리의 지리, 사회, 역사, 문화 등을 서구사회에 폭넓게 소개하는 인문지리서를 출간하였다. 몽골리안(Mongolian)의 국가와 지리, 그 민족의 특징을 연구해온 저자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8』이라는 그의 책에서 외국인이라는 제삼자의 전문가적 시각에서 그 당시 우리들의 삶의 모습과 풍경, 사회상황 등을 아주 꼼꼼하고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놓았다.
조선(朝鮮)이라는 당시의 우리 이름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라고 소개하고 있는 비숍 여사는 특히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에 대해 더할 수 없는 찬사를 보내는 글을 이 책의 부분 부분에서 아끼지 않고 있다.
기후는 의심할 바 없이 세상에서 가장 화창하고도 건강에 좋은 곳 중의 하나다. 외국인들은 어떠한 기후병에도 시달리지 않으며, 유럽인 자녀들은 반도의 모든 곳에서 안전하게 양육될 수 있다. 연중 아홉 달 동안 하늘은 일반적으로 청명하다. 그리고 고요한 대기, 맑고 푸르며 구름 없는 하늘, 가혹하지 않은 범위 내의 극도의 건조함, 파삭파삭하고 서리 내리는 밤을 가진 한국의 겨울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하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인화 옮김. 1994. p.22)
입산이 금지된 서울의 산들은 산등성이 사이사이에 검은 바위투성이나 뒤틀린 소나무의 황폐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자줏빛 황혼이 지는 저녁이면 모든 산봉우리가 마치 반투명의 핑크빛 자수정(紫水晶)처럼 빛난다. 산그늘에는 코발트색이 깃들고 하늘은 초록색이 섞인 황금색으로 물들며 저물어가는 것이다. 아주 미묘한 초록색 안개가 베일처럼 언덕을 감싸는 봄이면 경치는 너무나 황홀하다. 언덕바지에는 진달래가 불꽃의 화염(火焰)처럼, 터뜨려진 체리 열매처럼 피어나고, 막 꽃봉오리가 열리려는 벚꽃의 전율을 예기치 않은 골목에서 만나기도 한다. (op. cit p.49)
거의 최저 수위에 있던 한강의 물은 수정처럼 맑았고, 그 부서지는 물방울 조각들은 티벳의 하늘처럼 푸른 하늘로부터 내리는 햇살에 반짝거렸다. (op. cit. p.93)
....몇몇 순간들에서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 번 그 나라를 본 사람이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비록 그 마을이 더럽고 누추할지라도 무성한 숲 가운데, 혹은 부드러운 초원 위에 혹은 물방울 부서지는 시냇가에 모여 있는 깊숙이 처마를 단 갈색 지붕들을 보노라면 그것이 주변의 풍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에 색깔과 생기를 더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예의 그 기묘한 흰 옷을 입고 신중하게 걷는 남자들과 무리지어 걸으며 걸음마다 활기가 넘치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한 번 본 이방인이 결코 이 땅을 떠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정경이 아닐 수 없다. (op. cit. p. 157)
확실히 일본에서, 심지어는 중국에서도 이토록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오월의 저물녘에 매료되는 순간, 수만의 꽃나무와 덩굴들, 그리고 봉오리를 여는 꽃망울, 겹겹의 양치식물들이 내쉬는 향긋한 숨결들이, 천국의 향내가 찬 이슬에, 젖은 공기 속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요함이 피부에 다가왔고, 실상은 봉우리의 개수가 일만 이천 개가 아니라 일천이백 개라는 사실을 토대로 해볼 때 드러나는 한국인들의 과장에도 전혀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op. cit. p.166)
그밖에도 비숍 여사는 이 책을 통해 만주나 시베리아에서 사는 한국인들의 성실하고도 역동적인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 한국의 미래를 아주 밝게 내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쯤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산하의 모습은 어떠한가. 산업화와 근대화, 현대화라는 명분 아래서 급속도로 파헤쳐지고 깎아 내려진 우리의 강토는 예사롭지 않은 난개발과 환경오염에 신음하고 있다. 그때 비숍 여사가 보았던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자수정처럼 맑게 빛나던 아름다운 우리의 자연 모습은 회복이 어려울 만큼 많은 곳이 훼손되어버리고 말았다. 볼품없는 아파트가 대도시이건 작은 시골 읍내이건 제멋대로 숨이 막힐 듯이 들어서지 않은 곳이 없으며 수많은 자동차 길을 만드느라 자르거나 파내지 않은 강과 산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시적인 호칭으로 불리는 데 손색이 없을까?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자동차의 경적, 게임방과 노래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부서져 나오는 기계음의 소리, 도로 곳곳에 높다랗게 세워진 냉담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방음벽들, 아무런 특색도 없는 모습으로 아무 밭 자락이나 언덕, 강변과 산록, 여기저기에 독버섯처럼 불쑥불쑥 세워지는 건물과 가설물.... 아마도 이제는 더이상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산하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부르기에는 적잖은 불편함이 뒤따를 것만 같다. 고요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역동적인 움직임과 부단한 변화가 한시도 쉬지 않고 무섭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강토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개발과 성장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는 우리의 강토는 물론 가정과 사회의 사람들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한없이 고요하고 소박했던 우리의 옛 정취, 맑고 아름다웠던 우리의 옛 모습들은 소위 현대화된 거대함과 복잡함, 퓨전화된 뒤엉킴 속에 우리의 고유한 옛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모두가 매몰되어 버렸다. 더이상 우리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이곳을 떠날 수 없을 만큼 황홀하다고 적었던 비숍 여사의 것과 같은 느낌을 지닐 수 있는 외국인들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제 우리가 과거에 누릴 수 있었던 고요의 참맛과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의 진수는 우리에게서가 아닌 우리의 이웃 나라에서 찾아야만 할 것 같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200여 Km쯤의 거리에 있는 ‘라오 까이(Lao Cai)’라는 산촌 휴양 마을까지는 기찻길로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기차를 타고 달리며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산야의 풍경은 한마디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노을이 지는 서편의 어둑한 산마루 위로 펼쳐져 있던 붉게 물든 하늘, 지는 해의 낙조를 받아 은빛과 붉은빛의 물결이 무수한 조각들로 반짝거리던 홍강(紅江) 상류의 물색, 초라한 듯 보이지만 들판의 짙은 녹음과 숲에 어루만져져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만 보이던 한가하기 그지없는 시골 마을의 풍경....
내가 1996년 하노이에 짐을 풀고 살 집을 구하기 전에 일주일 여를 묶었던 곳은 호텔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호텔이라고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은 기숙사와 같은 곳이었다. BSC이라는 이름의 그 호텔은 큰길에서 조금 벗어나서 호수공원이 시작되는 숲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심 속에 있는 호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숙소치고는 아마도 가장 조용한 호텔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방이 적다 보니 체류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적었고 자동차가 워낙 드문 곳이 되다 보니 호텔 안으로 들어오는 자동차는 웬만해서는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호텔은 하루종일 고요와 적막 속에 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새벽 한때, 그 고요함을 깨는 유일한 소리가 있었다. 새벽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는 정확히 말해서 돼지의 멱을 따는 소리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호텔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이른 아침에 노상 시장이 서고 있었다. 매일 새벽마다 들려오는 돼지 소리는 그 아침 장에서 팔 돼지고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러 마리도 아니고 꼭 한 마리가 호수공원의 물가에서 도살되고 있었다. 그날 새벽에 잡은 돼지가 그날 아침에 다 팔려나가지 않으면 보관상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항상 모자라는 듯하게 물건을 준비한다고 했다.
여하튼 나는 이렇듯 조용한 호텔에서 1주일쯤의 시간을 보내며 마치 고요한 자연 속에서 살았던 나의 옛 유년의 시기로 되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돼지가 애처로운 울음을 우는 소리가 새벽 한때 구슬프게 들려오는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바로 그곳 베트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내가 해외 근무 발령을 받아 하노이로 떠나기 얼마 전인 1996년 5월에 찾았던 미얀마의 모습은 한결 더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위 근대화나 개발이라고 하는 가치의 현재화 정도와는 역으로 보존되어 살아있게 되는 것이 바로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과 고요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미얀마는 민주화를 추진하던 ‘아웅산 수 지(Aungsan Su Kyi)’여사를 무력으로 실각시켰던 ‘탄 쉐(Than Shwe)’장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철저히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펴나가고 있었다. 커다란 발전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미얀마는 군부에 의한 오랜 철권통치로 인해 소위 말하는 개발은 한참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내가 그때 머물렀던 ‘인야 레이크 호텔(Inya Lake Hotel)’은 미얀마의 수도인 양곤(Yangon)에서는 가장 좋은 호텔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미얀마의 수도는 2004년 미얀마의 중심 지역에 새로 건설된 네피도로 이전되었다). 건물의 3분의 2쯤이 서자호(西子湖)라는 이름의 호수로 둘러싸인 호텔은 도심을 조금 벗어난 곳에 있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조용했다. 도심을 오가며 큰길 옆으로 보이는 양곤 시내의 작은 골목길에서는 마치 어린 사절 골목길을 뛰어놀며 숨바꼭질하던 친구가 곧 튀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만큼 소박한 모습이었다.
양곤의 북쪽으로 80Km쯤 떨어져 있는 바고(Bago)라는 도시로 가는 길은 아주 한적한 시골길을 가는 기분이었다. 간선 도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바고 행 길은 차량은 물론 사람들의 통행마저도 별로 없었다. 산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한적하다 못해 적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바고로 가는 길 중간쯤의 거리에서 도로 확장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들은 주로 아낙네들이었는데 주먹만 한 크기로 깬 돌들을 싸리나무로 만든 소쿠리 같은 데다 담아서 머리로 이어 나르는 모습 또한 들판의 고요함을 깨지는 않았다.
몇 년이 지난 뒤인 1999년 6월에 찾았던 몽골의 기억 또한 미개발이라는 뒤늦은 시계가 붙잡아두고 있는 그 나라 특유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한다. 울란바토르의 유일한 호텔이었다고 할 수 있는 징기스칸호텔은 시내의 중심부에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호텔의 한편으로 훤히 트여 있는 바깥은 가꾸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야생 정원이었다. 야생의 정원이라고 해보았자 강우가 극히 적고 여름도 짧은 그곳 야생의 공간은 몇 그루의 나무와 키 작은 풀들이 거친 잔디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파이어처럼 맑고 푸른 하늘, 이미 하얀색 홀씨들을 가득히 여물리고 있는 민들레꽃의 무리, 밝은 햇살과 초가을의 공기처럼 신선한 바람, 그리고는 아득한 고요함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하룻밤을 머물렀던 시외의 가쵸르트라는 마을에서의 저녁과 아침은 더욱 고요하고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과 부드러운 언덕 위에는 때마침 제철을 맞이하고 있던 갖가지의 풀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들의 모습과 가끔 들판을 달려가는 말들의 모습은 목가적인 전원의 운치를 한껏 북돋아 주었다. 비행기 위에서 고운 연둣빛 색감이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모습을 홀린 듯 창을 통해 내다보았었는데 불과 사흘이 지난 시간, 땅 위의 모습은 녹색의 천지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은 영원히 아무에게도 훼방 받지 않을 만큼의 영역과 공간을 끝없이 확보하고 있었다.
몽골의 경제사회개발을 국제사회가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를 놓고 여러 나라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 갔던 나로서는 우리가 개발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그곳의 고요한 풍경과 때 묻지 않은 평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2003. 9. 5.)
첫댓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소개된 삼천리 금수강산은 점점 삼천리 쓰레기 강산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는 글을 쓴 적이 있지요.개발과 발전이란 구호 아래 이루어지는 난개발과 과다한 쓰레기 배출의 불법 현장을 태풍이 지나간 후 댐으로 몰려드는 쓰레기 더미에서 잘 확인 할 수 있지요. 이제는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야 할 대한민국의 자연과 환경보호를 위한 실질적인 홍보와 실천이 범국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됩니다.
산업화와 자연보호는 양면성이 있지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오염되지않은
자연모습을 지니고있으나 반면 산업
화가 멈처버린 후진성이 있을수 있
어요.
따라서 산업화를 하더라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는 노력
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따른 불가피한 과정 때문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깨질 수밖에 없지요. 남북 분단만 아니라면 우리도 좀 더 차분하고 내실있게 전통을 중시하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겠지요. 북한을 극복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부터라도 아름다운 옛 모습의 정취를 찾아가는데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난개발로 얼룩진 우리 국토 ㅡ 독일처럼 농촌을 가꾸는 장기적인 개발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