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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놀과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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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이야기(국내) 스크랩 서울 부용지 가을풍경(11.10)
설악산 추천 0 조회 57 07.11.25 09: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용지 가을풍경(11.10)


예전에 창덕궁을 늦가을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형형색색의 단풍 색깔을 보고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다시 가을에 창덕궁에 와야지 했었지만 바쁜 일과로 해서 올 수가 없었습니다.

금천교를 지나고 진선문을 지나고 숙장문을 지났습니다.

궐내각사 자리를 지나는데 어차고가 비어 있더군요.

지난 번 올때 까지만 해도 차며, 가마 등등이 있었는데 해설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고궁박물관으로 이전을 했다고 합니다.

창경궁으로 통하는 문 옆으로 후원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대조전 뒤 천장문으로 해서 가기도 했었는데 길이 두군데입니다.

이번에는 후원으로 가는 길로 해서 갔었는데 지나가는 풍경에 드문 드문 단풍나무가 선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1시에 출발을 했는데 일반관람으로 12시 45분에 출발한 사람들로 부용지 근처에는 만원이었습니다.

주위 경관이 절정을 아니지만 그런대로 단풍이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예전에 어수문 옆 단풍을 배경삼아 필름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오늘 살펴보니 그 단풍은 아직은 검은 빛이 많았습니다.

저 단풍은 약 1주일은 있어야 새빨간 색으로 변할 것같았습니다.

어떤 아이가 물고기 모양을 보고 있어서 그 물고기 무지 유명한 것이라고 하니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따라 부용정의 풍경이 또 달리 보이는 것같았습니다.

영화정 옆의 나무도 단풍이 있어 아름다운 빛깔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은희의 궁궐이야기 홈페이지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후원에는 그늘을 머금은 골짜기가 있고 숨은 듯이보이고 보이다가 사라지는 오솔길이 있다. 깊은 골짜기와 굽이치는 길은 바깥세상과 직접적으로통하지 않는다.

바깥 세상과 교섭이 차단된 분위기란 결국 세상 먼지에 젖지 않고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안정된 경지라 할 것이다. 길을 따라 모퉁이를 돌다보면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부용지가 문득 눈앞에 나타난다.

이미 바깥 세상관과는한참 멀어져 있는 것이다. 이별천지 같은 부용지 일대에는 고요가 감돈다.

부용지에 살짝 발을 담그고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부용정이고, 맞은편 높은 언덕에 날아오를 듯한 웅장한 건물이 주합루이다.

주합루 발아래 작고 아담한 문이 있으니 어수문이고, 어수문에서 조금 내려오면 영화당이 있다. 영화당 왼쪽으로 넓은 마당이 있으니 , 이 일대가 당시에 전시(殿試: 임금이 임한 자리에서 보는 과거시험)을 보던 자리이다.

지금은 화장실고 구명가게가 있어 그 때의 분위기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옛날에는 청운의 뜻을 품은 젊은 선비들의 도포자락이 넘실대던 긴장감이 도는 장소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만나는 낙선재 뒤쪽 지점, 곧 창덕궁의 내의원 동쪽 담장을 끼고 북쪽을 바라보면 두 개의 대문이 서 있는데, 오른 쪽이 창경궁으로 왼쪽이 후원으로 들어서는 대문이다.

이대문을 지나면 창경궁과 창덕궁 담장 사이로 난 언덕길이 나오고,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고개 마루에 서게 된다. 이곳에서 한 숨쉬는 동안 부용지 주변의 주합루와 멀리 펼쳐진 후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경관에 변화를 주는 수법은 셋째 영역인 관람정 지역으로부터 넷째 영역인 옥류천 지역으로 접근할 때를 비롯하여 이곳 후원의 여러 곳에서 접하개 되는 수법이다.

부용정은 숙종 33년 (1707)본래 택수재로 지은 것을 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부르게 된 정자이다.정면3칸, 측면 4칸되는 '아자(亞)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동산쪽 평면의 일부를 돌출시켰기 때문에 완전한 ╋자형의 아(亞)자형은 아니다.

정자의 구조를 살펴보면 기단은 운두가 낮은 장대석으로 한벌대로 쌓은 낮은 기단이다.이위에 다듬은 8각형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두와 익공 두 개를 놓아 단면이 둥근 굴도리로 짜맞춘 이익공 집으로 하였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합각을 형성한 팔작지붕 모양이다. 정자의 양측면과 남면 기단 위에는 돌계단을 놓아 툇마루에 오를 때 딛고 올라서게 하였다.

북쪽은 연못 속으로 두 다리를 넣었는데 기둥 밑 초석은 팔모로 된 다듬은 기둥 모양의 초석이다.

전면 창호들은 모두 접어 들쇠에 매달 게 되었고 안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 1칸과 연못 쪽 1칸을 모아 2칸을 주변 칸과 다르게 꾸몄는데, 이 칸 3면에는 불발기 창호를 달았다.

불발기 모양은 8각 교살, 원형의 귀갑살, 네모의 정자살 등 다양하다.

툇마루에 두른 난간의 연못 쪽은 계자 난간이고 남쪽 동산 쪽은 평난간으로 그 살대의 짜임새 들이 재미있다. 정자의 남쪽은 낮은 동산인데 여기는 단이 지게 흙을 파내어 고르고 그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단마다 꽃을 심거나 석함을 놓아 치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 정원에서의 화계라 부르는 것이다.

화계는 글자 뜻 그대로 꽃을 심어 만든 계단을 말하는데 궁궐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이나 정자, 누대등이 서 있는 주변에 구릉이 있는 곳이면 하계를 꾸민다.

우리나라는 전국토 3분의 2가 산지이기 때문에 곳곳에 산과 구릉이 많아서 이런 화계를 두는 것이 일반적인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화계는 특히 뒤뜰 뒷동산을 중심으로 두기 때문에 예부터 윗동산을 잘 가꾸어 왔고 이를 가꾸는 사람을 '동산 바치'라 불렀다. 동산 바치는 오늘날 정원사이다.

부용정 화계 위에는 석함이 있고 석함에는 괴석이 담겨져 있는데 일종의 정원을 꾸미는 석물이다.

괴이하게 생긴 그러나 운치 있는 괴석을 담아 두는 석물이라 하여 석함이라 부르며 때로 괴석을 받쳐주는 대라는 뜻으로 괴석대라고 도 한다.

석함은 일반적으로 정방향이나 장방형이지만 때로 육각형, 팔각형이기도 한다.

그 높이도 다양하여 바닥에 닿는 낮은 것에서부터 높은 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괴석을 담은 석함을 올려 놓기도 한다.

또 부용정 기둥에는 기둥마다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한시들이 초서체로 새겨져 있어 이들 시구를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시흥에 젓고, 더더욱 부용정의 공간정서에 몰입하게 된다.


부용정 북쪽으로는 널따란 장방형 연못이 있다.

이방지의 크기는 세로 34.5미터, 가로 29.4미터나 되는데 가장자리는 장대석들을 바른층쌓기로 하여 마감하였다. 또 못 가운데에는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둥근 섬이 하나 있다. 연못이 네모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났다"고 하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못은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둥근 섬이 하나씩 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루어져 왔다.

[삼국사기]의 백제의 무왕 때 기록을 보면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 20여리 밖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네 가장자리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방장 선산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고 쓰여있다.

여기서 네 가장자리라는 것은 바로 못이 네모난 방지임을 말해주고 방장 선산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산다는 방장, 봉래, 영주의 세 선산 가운데 하나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 사상이 일찍부터 정원 조영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게 해 준다.

곧 부용지의 조영에는 음양론, 도가 사상등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오래된 조형 원리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있다.

부용지의 물은 지하에서 솟아오르고 또 서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연못 서쪽에 있는 용머리의 석루조로 들어오는데 1800년대에 그린'동궐도'에는 석루조가 없고 가운데의 섬도 지금보다 훨씬 작으며 배가 2척 떠있다.

연못의 가득 찬 물은 동쪽 연못 가장자리에 뚫어 놓은 수구로 간다. 그리고 부용정 쪽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하였는데 한 돌에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부용지의 잉어조각, 이무기 , 배기구

연못 석축을 따라 부용정을 향해 가다보면 석축 모퉁이에 물고기 한 마리가 물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비록 작은 물고기 조각에 불과하지만 이 잉어 한 마리가 이 일대 공간의 성격을 얼마나 극적으로 암시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남아로 태어 났으면 출세욕과 명예욕을 가지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그 욕망의 표현방법이 지금과 달랐다. 직설이 아니라 은근한 비유로 그 뜻을 표현하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옛사람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장원급제하기 위해 면학에 힘쓰는 선비를 잉어에 비유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변해 용이 되는 것에 비유하였다. 이것은 용문(龍門)에 얽힌 어변성룡(漁變成龍)설화에서 연유한 것이다.

용문은 중국 황하의 상류 산서성 하진현과 섬서성 한성현 사이에 있는 급류가 흐르는 협곡이름이다. 그런데 잉어가 이 용문의 급류를 오르면 즉시 용으로 화한다는 전설이 있다.

해마다 봄철이 되면 강에 사는 뭇 잉어들이 상류의 용문으로 모여드는데, 물살이 너무 빨라 보통의 잉어들은 오르지 못한다.그러나 그 중 힘센 잉어가 있어 이협곡을 뛰어 넘어 용으로 변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잉어가 변하여 용이 되는 것을 입신출세나 명성이 높은 것에 비유하였다.

옛날에 용문을 과거시험장의 정문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나, 근래에 와서 전도유망한 대학을 지칭하여 등용문이라고 하는 것도 모두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어변성룡의 설화 내용은 민화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물위를 뛰어오르고 있는 잉어를 그리되,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 있고, 입언저리에는 긴수염과 이빨이 날카롭게 그려져 있다.

완전한 용의 모습이 아니라 몸은 물고기 형상으로 머리는 용의 형상으로 묘사함으로써 잉어가 변하여 용이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부용지 일곽에는 잉어의 등용문설화와 관련된 상징물들이 도처에 있다. 예의 잉어가 새겨진 축대의 건너편 돌계단 위의 문이름을 어수문이라고 한 것도 그냥 지나칠 것이 못되지만 , 문설주에 새겨 놓은 용조각도 잉어가 변하여 용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궁궐에 있는 문설주에 용을 장식한 예가 없는 것을 보면 어수문의 용조각이 특별히 등용설화와 관련되어 있음이 증명된다.

어수문 안쪽 주합루(宙合樓)에 오르는 계단 소맷돌에는 유운(流雲) , 십자운(十字雲)등 구름문양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주합루가 운기(雲氣) 감도는 구름위의 누각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후한서>이응전에도 이와 같은 비유를 볼 수 있으며, 조선의 이규보가 정득공이 그린 잉어 그림에 제 한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

도화랑(桃花浪:복숭아꽃이 필 때 시냇물이 불어나서 위로 흐르는 물결)이 하늘에 닿을 듯 불어날 때면 용문에 들어가 꼬리를 감추고 훌쩍 날아볼까.

이는 때가 되면 벼슬을 해볼까 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사정기 비각 북쪽에 골짜기가 있고 거기에서 맑은 물이 흐러내려 연당으로 들어간다.

물이 주입되는 자리에 이무기 형상을 조각한 주입구가 설치되어 있다.

둥근 눈이 어리석게 생긴 이무기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물이 그 벌린 입에서 나온다.

연당 가장자리를 무사석으로 말쑥하게 쌓아 정리해서 주변은 정숙한 중에 지상으로 굴뚝처럼 생긴 작은 석조물이 보인다.

연당의 고였던 물이 넘어서 흘러 나갈 때 무넘기에서 공기의 저항을 받을까 봐 배기구로 설치한 매우 과학적인 시설물이다.


부용지 북쪽 높직한 언덕 위에 2층 다락집인 주합루가 우뚝 서있다.

주합루는 그 아래 남쪽으로 비탈진 바닥에 설치한 지대석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는데 계단 앞턱에 정문격인 어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길이 12척 1.4치, 폭 7척 4치의 기둥에 우진각 기와지붕을 얹은 일주문인 어수문은 일종의 삼문형식이지만 가운데의 어문과 좌우 양쪽의 협문이 각각 따로 떨어져 있다.

2층 다락집인 주합루의 정문으로서는 몹시 작은 편이지만 지나치리 만큼 화려한 장식이 베풀어져서 다른 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기에 기둥과 기둥 사이만은 넓게 잡혀 있으나, 재목마다 작게 마름되어서 창방, 서까래, 부연등이 아주 작고 따라서 공포도 작으며 기와도 그에 맞추어 적당히 줄여졌다.

살창문을 단 좌우의 협문도 조그마한데, 그런 중에 문인방을 활 모양으로 구부정하게 해서 드나들기 편하게 되어 있다. 널판으로 이은 지붕도 적당히 둥글려서 제법 맵시가 난다.

맞배집 양편에 팔(八)자 모양으로 두꺼운 널판을 붙인 박풍도 지붕의 곡선에 맞추어 할 모양으로 휘어서 막아 놓았다.

이렇듯 어수문은 그 짜임새가 치밀하고 건실하여 능숙한 건축가에 의하여 설계되고 지어진 것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어수문은 주합루의 정문답게 높은 품격을 갖춘, 참으로 아름다운 공예품이 아닐 수 없다.

어수문 앞턱 돌계단 양쪽 가장자리의 소맺돌 바깥쪽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는데,

이것은 이돌계단을 오르면 구름 위, 즉 하늘로 오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어수문(漁水門)이라는 이름도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물고기와 물에 비유한 뜻으로 영민한 물고기가 맑고 깊은 물을 만나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여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서 살펴보면 어수문 좌우의 작은 협문옆으로 넝쿨을 말아올리는 시설을 하여 여기에 푸른 식물들이 뒤?여 있어, 마치 푸른 병풍을 둘러 놓은 듯하다.

이런 시설물 곧 취병(翠屛)은 '동궐도'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이곳 어수문 양쪽에서와는 달리 그 길이가 짧고 전각의 안뜰에 설치되었다.

어수문 양쪽으로 둘러친 긴 취병은 어수문 위족 주합루의 공간과 부용정, 부용지의 아래 공간을 커다란 2개의 공간으로 갈라 놓는 역할을 한다.


창덕궁 후원의 정문에 해당하는 취화문을 들어서서 수림이 우거진 고개를 넘으면 가장 먼저 다다르는 곳이 정조의 꿈이 담긴 주합루일대다. 원래 이곳에는 문신과 무신의 전시를 치르던 춘당대가 있고, 그 옆에 임금이 전시에 임어하는 영화당, 그리고 부용지 남쪽에 택수재라는 정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한 뒤로 이곳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부용지 북쪽 언덕이자 영화당 서북 언덕에 2층누각을 짓고, 위층은 주합루, 아래층은 규장각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정면 다섯칸, 측면 네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규장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별중에서 문장을 맡은 별인 규수가 빛나는 집이라는 뜻이다. 주합이라는 말은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니, 자연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하겠다는 정조의 큰뜻이 담겨있다.

정문인 어수문을 들어서서 여러 단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노라면 먼저 주합루 팔작지붕이 그리고 다음으로 누의 공포, 창방, 기둥들이 눈앞에 다가오다가 1층 규장각 제일 중앙어칸(御間)을 마주하게 된다.누의 건축은 장대석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밖으로 방주(方柱)를 세우고, 안쪽으로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에 익공 2개를 놓아 이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팔작 기와지붕을 덮었는데 용마루는 양쪽에 회를 발라 양성을 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얹고 추녀 마루에 잡상들을 얹어 한껏 치장을 하였다.


 집의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1층과 2층 모두 기둥 밖으로 닭다리 모양의 난간인 계자각(鷄子脚)을 세우고 여기에 난간 두겁대를 얹은 계자 난간을 둘렀다.1층은 장방형의 평면 안쪽에 세운 기둥을 따라 띠살 창호들을 달아 정면 3칸, 측면의 큰 공간을 만들었는데 그 둘레는 1칸 폭으로 개방하였다.

 이 큰 공간은 중앙만이 우물마루 방이고, 양쪽 1칸씩은 온돌방으로 하였다.2층의 누에서는 중앙 3칸, 측면 2칸의 기둥 아랫부분은 우물마루에 붙여 하방(下枋)을 돌림으로써 바깥 앞쪽과 안쪽을 구분하였다.

 이런 수법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바닥 자체에 높낮이 차를 두고 좌석의 높고 낮음을 표시하고자 한 수법과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규장각의 정실(正室) 원래 규장각은 숙종이 종친의 업무를 관장하는 종부시에 세운 것으로 , 어제(글), 어필(글씨)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정조는 그 이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규장각이라고 했으나, 단순히 어제, 어필을 보관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 학문을 연구하면서 임금을 보필하는 국왕직속의 근시기구로 개편했다는 점에서 종전의 규장각과 전혀 다르다.


 근시기구로서 규장각건물 배치와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합루에는 정조가 지은 어제, 어필, 어진(초상), 정조가 받은 임명장(보책), 인장 등을 보관했다. 정조 12년 8월에는 여기에 경쇠와 쇠북을 봉안하기도 하고, 정조 18년 1월에는 사서와 삼경을 보관했다. 주합루라는 편액도 정조의 어필이다.

 정조 임금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세칭 사검서(四檢書)로 알려진 초정 박제가 , 아정 이덕무, 혜풍 유득공, 서이수등이 드나들며, 옛것을 배우는 '수학호고(修學好古)'와 나를 다시 돌아보며 실리를 추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일으킴으로써 조선왕조의 문예부흥에 크게 이바지한 무대였다.

 순조 2년에는 주합루에 보관했던 어진 4본을 선원전으로 옮기고, 순조7년 11월에에는 단종의 역사를 적은 [장릉사보]를 봉안했다. 순조 12년 6월에는 세자 익종의 이름을 정하여 주합루에 봉안하고, 14년 3월에는 정종의 문집인 [홍재전서]와 사도세자의 문집인 [경모궁예제]를 여러권 만들어 한권은 주합루에 봉안했다. 27년 8월에는 순조의 어제를 , 30년 4월에는 순종의 어진을 봉안했다.

 헌종 3년 4월에는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주합루에서 경모궁, 망묘루, 경우궁등으로 옮겼으며, 철종12년에 4월에는 철종의 어진을 봉안했다. 이는 세도 정치기에 규장각 기능이 약화되는 추세와 관련이 있다.

 고종은 정조를 본따 근대화를 이루려 했기에 규장각 제도를 원래대로 왕권을 뒷받침하는 근시기구로 복구하려고 노력했다. 고종 2년 7월 역대 임금의 묘지(죽은 이의 이름, 신분, 행적등은 기록한글)와 행장(죽은 이가 평생살아온일을 적은글)을 모은 책 1백부를 만들어 여러군데에 봉안하는 가운데 주합루에도 한권을 봉안했다. 고종 10년 8월에는 주합루와 서향각을 모방하여 경복궁에 건청궁을 세웠다.

이렇게 역대 임금의 글과 글씨, 초상화등을 보관하고 있던 신성한 주합루는 통감부가 설치된 순종 대 이후 일본 관인들의 접대소로 변질되었다. 1908년 7월 12일에는 순종이 통감 이토히로부미를 주합루에서 접견하고 여러종친, 대신들과 함께 음식을 대접했다. 7월 20일에는 부통감이 데리고 온 일본인 화가를 접견하고, 그가 후원의 경치를 그려바치자 이완용, 송병준, 임선준, 이병무등 친일파 대신들에게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바치게 했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일본인들과 친일 인사들의 관광지와 유람지로 전락했던 주합루는 해방후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으나 이곳에 보관했던 왕조의 유물은 다른곳으로 옮겨지고 빈집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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