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포항 현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전적비’
● ‘옥쇄한 학도의용군’
현 포항여고 앞에는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가 있다.
전사자는 48명인데 전적비 뒷벽에 새겨진 전사자 이름은 14명이다. 전투가 끝난 뒤
보름가량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돼 상당수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11일 학도의용군 71명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국군 3사단 지휘소로 사용되던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적에게 포위된 채 전투를 벌였다. 나이는 16〜21세로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피란 왔다 참가한 고등학생과 일부 대학생들이었다.
북한군 5사단과 766 유격부대는 이날 새벽 3시 반부터 4차례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해왔다.
학도병들은 M1 소총과 각자 250여발의 실탄, 수류탄이 가진 무기의 전부였으나 북한군은 장갑차까지 동원됐다. 실탄이 떨어진 뒤에는 육박전까지 벌이는 혈투로 11시간 반을 버티다 48명이 전사하고 13명은 포로가 됐다.
부상자 6명은 초반에 후송되고 4명은 행방불명이었다.
이들이 피로 버티며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많은 시민들이 피난 갈 수 있었고 사단 지휘소의 주요
서류와 물자도 후방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1129일간의 전쟁 6·25’, 602〜7쪽)
이우근 학생의 편지사연.
전적비 옆에는 이곳 전투에서 전사한 서울 동성중 3학년 이우근 학생이 ‘결전’ 하루 전날 메모지에
쓴 피 묻은 편지가 소개되어 있다. 편지는 시신을 수습할 때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지금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엎드려 있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인데 적병은 너무 많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니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는 다시 편지를 쓰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끝인 형산강 강가에 최후의 방어선 ‘워커 라인’ 표지적이 세워져 있다.
학도의용군의 활약을 기리는 기념탑은 여러 곳에 있지만 전승기념관은 포항이 유일하다.
● 최후의 방어선(워커 라인)이자 학도병 성지, 포항
포항 형산강은 6·25 전쟁 최후의 방어선으로 ‘워커 라인’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다.
특히 학도병의 활동이 활발해 국내에는 유일하게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있다.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를 출발해 포항시 충혼탑〜전몰학도 충혼탑〜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전몰학도 기계 안강지구 전투전적비〜기계 안강지구 전투격전지
조망대로 이어지는 ‘호국 문화의 길’은 학도병의 전투를 기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건물 앞의 학도병과 어머니 동상.
전승기념관 앞 돌 비석에 새겨넣은 학도의용병 사진은 교과서에서도 봤던 널리 알려진 사진.
그런데 그 앞에 한 어머니가 두 손을 뻗어 마치 죽은 아들을 부르듯 안타깝게 무릎을 꿇고 있는 조각이 설치됐다. 병사나 학도병, 소년병 할 것 없이 생떼같이 귀한 자녀를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른 전쟁터에
보내는 안타까운 모정(母情)을 보여준다.
낙동강 방어선의 포항 형산강 전투 등을 기념하는 경북 포항의 포항지구전적비.
● 개전 4일 만에 나선 학도병
‘학도병은 1950년 6월 29일 이후 ‘학도의용군(재일동포 학도의용군 포함)’으로 육·해·공군 또는
유엔군에 배속돼 1951년 2월 28일 해산할 때까지 근무한 자로서, 전투에 참가하고
그 증명이 있는 자를 말한다. 전상(戰傷)으로 중간에 나온 자도 포함한다.’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 전시된 학도의용군 신분증.
학도병은 6월 29일 수원에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구국 비상학도대’가 시작이다.
6월 28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상황에서도 결사적으로 한강을 도하해 수원에 모인 학생 2백여명이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했다. 그 후 다양한 학도병 조직이 나타났는데
정훈군은 신분증도 발급했다. 다른 학도병 단체의 모체가 된 수원 비상학도대는 한강 방어선의
노량진 전투에 투입돼 상당수가 희생됐다.
‘의용군’이라는 용어는 북한 인민군이 남침 후 양민을 동원하면서 사용해 용어의 혼란을 피해
‘학도의용병’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학도병은 학생으로 군번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만 해당된다.
군번이 있으면 정규군으로 신분이 바뀐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학생 중 군번을 받지 않았으면
복귀령 이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군번을 받은 경우 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경북 포항 형산강 도하작전의 호국 영웅 연제근 상사 특공결사대상.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의 한 축인
형산강에서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2일까지의 형산강 전투에서 형산강을 지켜내는데
특공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남 순천시의 호남호국기념관. 호남지역에서는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1951년 1월 제18전투경찰대대가 전북 정읍의 칠보발전소를 지켜냈고, 호남지역 학도병들이
화개전투에 참여하는 등 호남의 호국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전남 여수시의 6·25 참전 학도병 기념비.
● 다양한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다부동 기계·안강, 영천, 포항 등에 총 30여만명이 참가했다.
그중 5만여 명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그 외 인원은 후방 선무, 공작 활동 등을 맡았다.
7천여명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 전사했다. (‘1129일간의 전쟁 6·25’, 597쪽)
6·25 전쟁은 개전 초부터 많은 전사자가 발생해 병력 보충이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낙동강 방어선뿐 아니라 다양한 전투에서 소년병과 함께 긴급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국군 해병 1연대에도 제주도에서 급히 모집해
배에서 소총 작동법만 배우고 투입된 학도의용병이 포함됐다.
전남 여수 순천 광양 등 호남 동부지역 학생 180여명은 7월 초 혈서를 쓰고 학도병에 자원입대한 뒤
7월 25일 섬진강 화개전투에 참가했다. 이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1천여명과 전투를 벌이다 7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이는 6·25 전쟁에서 학도병이 치른 첫 번째 전투라고 한다.(순천 ‘호남호국기념관’)
정부는 병력 충원이 원활히 이뤄지면서 1951년 3월 학도병은 학교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부의 학교 복귀 지시나 대통령의 담화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곳에서는 학도병 활동이 중단되지 않고
휴전 때까지 계속된 곳도 있었다.(‘학도의용군 연구’, 73쪽)
● 관심 연구 지원 부족한 학도병
학도병의 활약과 희생을 주제로 한 영화가 ‘학도의용군’(1977), ‘포화속으로’(2010), ‘장사리,
잊힌 영웅들’(2019) 등 여러 편 나왔다. 학도병은 국군이나 미군에 배속되어 활동하거나,
적지에서 유격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공식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연구 평가 지원 등이 다른 참전 용사들에 비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대부분의 참전자들이 사망하거나
이제는 고령으로 직접적인 증언을 듣기도 어려워지고 있다.(‘학도병 연구’, 2쪽)
재일학도의용군들이 태극기에 참전 결의를 가득 적었다.
일본에선 태극기를 구할 수 없었던 탓에 6·25 당시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한인 학생들이
일장기에 파란 물감을 덧칠하고 4괘를 그려 만들었다.’
● 재일학도의용군
6·25 개전 직후부터 일본의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청년 및 학도 지원병을 전선에 파견하기로 했다.
재일 한인 청년들은 미군 극동사령부의 심사를 거쳐 동경 아사카 캠프에서 유엔군과 함께 2주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일본에 머물던 거류민단 소속 부녀회가 제작해 준 의용군 휘장을
미군 군복 상의나 군모에 달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제1진 69명은 1950년 9월 11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발한 유엔군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 3차례, 원산과 부산에 각각 한 차례씩 5차례에 걸쳐
653명이 참전했다.(‘1129일간의 전쟁’, 608쪽)
경기 연천 최전방 태풍전망대에 ‘소년전차병’ 기념비가 있다. 중학생 120여명이 소년전차하사관으로
M36 전차를 운용하는 57전차중대에 편입돼 폭풍전망대 인근 전투 등에 투입됐다는 설명이다.
● 소년병
전쟁에서 전사 부상으로 병력 소모가 늘어나면서 병력 보충이 시급해지자 학도병은 물론 소년병도
자원이나 모집을 통해 전선으로 보내졌다. 전국에서 모인 소년병 부대는 1950년 8월 초 기계 안강전투에서
국군 25연대에 배속돼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전투는 소년병이 도착해도 명단을
작성할 겨를도 없이 전선에 배치돼 누가 전사하고 후송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급박했다고 한다.
(‘1129일간의 전쟁’, 609〜617쪽)
‘소년병’은 징집 연령인 18세 미만으로 주로 12~17세 청소년들인데 이들에게는 군번이 부여됐다.
군번이 부여되지 않은 학도병은 정부의 학교 복귀령에 따라 돌아갔다. 그런데 더 어린 소년병은 군번이
부여돼 정식 군인 신분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군 생활을 계속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된 뒤에도
전역하지 못해 5~7년간 더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쟁 기간 소년병은 2만7천여명이 참전해
2570여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국가유공자로서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형제의 상’ 전투에서 국군과 북한군으로 만난 형제를 형상화했다.
길거리에서 징병관에 의해 모집되기도 한 소년병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6시간가량 훈련을 받은 후 바로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징병되어 가면서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경우도 있다.
소년병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낙동강 전투시 주변 학교 여학생들이 행정병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북한군에 의용군으로 붙잡혀 가면서 전투에서 형제가 국군과 북한군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이는 그야말로 동족상잔이 벌어졌다.
카투사(KATUSA)
국군은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미 지상군의 병력보충을 위해
카투사(KATUSA·Korea Augmentation to the US Army) 제도를 시행했다.
당시 일본 주둔 미군은 감소 편성되어 있는데다 전선에 투입된 이후 많은 전투력 손실이 발생했다.
육군본부는 8월 16~24일 8600여 명 카투사를 1차로 선발해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에 보냈다.
8월 20일부터는 한국에서 전투 중인 각 사단에도 각각 250명을 보냈다. 카투사는 경계, 정찰,
진지구축, 방어진지 위장 등의 보조임무를 수행했다.(김철수, 130쪽)
훈련 중인 카투사 부대원들. 출처 영문위키
●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에 투입
1950년 8월 16일 최초의 카투사 313명이 부산항에서 요코하마로 떠났다.
8월 24일까지 8623명의 카투사가 당시 일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이던 미 육군
제 7사단에 급하게 보충되었다. 그들은 겨우 기초훈련만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초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있던 대구와 부산 등에서 불심검문을 통한 강제징집이 실시되었다.
피난민 숙소를 급습해 자고 있던 장정들을 골라내는 이른바 ‘토끼몰이’ 방식도 있었다.
미리 준비한 M1 개런드 소총을 어깨에 메고 섰을 때 소총 개머리판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의
키만 되면 징집대상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처음 출발한 카투사 313명 중에는 부인을 위해 약을 구하러 나섰다
끌려온 유부남부터 책가방을 든 15세 중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배 위에서 입영명령서를 스스로 작성했다.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해 후지산 기슭 미 7사단 훈련소로 갔다.(문관현, 182쪽)
한국전쟁 기간 전체 카투사 4만3660명 중 6415명이 전사해 전사율 14.7%로 미군의 전사율 2.2%보다
7배 가까이 높았다. 북한군은 카투사를 붙잡으면 ‘미제의 앞잡이’라며 더 가혹한 대우를 서슴지 않았다.
2012년 62년 만에 북한에서 돌아온 용사들의 유해 12구는 미 제7사단 제31연대 전투단에 배속돼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던 약 800명의 카투사 중 일부였다.(애플먼, 역자 서문)
‘장진호 동쪽’에 투입된 미 7사단 31연대에 ‘뻐꾸기 대대’로 편입된 32연대 1대대는 캠프 맥네르에서
500명의 카투사를 받았다. 대대가 장진호에 도착했을 때는 약 300명으로 줄어 있었다.
카투사는 3개 소총 중대에 각각 45명에서 50명이 할당되었다. 이들은 중대병력 숫자의 약 4분의 1을 구성했다. 그런데 미군 분대장들이 한국군 분대원과 만족스럽게 소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장진호 동쪽 전투 시 이같은 소통부족은 큰 장애가 되었다.(애플먼, 84쪽)
● 정전 협정 이후에도 지속
카투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낙동강 방어선이 북한군에게 거의 돌파되려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있던
시기였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은 한국에서 전투 중인 미군 3개 사단에 초급 보병장교와
하사관, 경험있는 소총수들을 채워주는 보충부대 역할을 수행했다.
무초 주한 미 대사는 일찍이 한국군 정규 병력을 미군 부대에 배속할 것을 제의하였다.
한국군을 주일미군 기지에서 훈련시킨뒤 미군과 한국군 1명씩 짝을 지어 작전을 수행하는 이른바
‘버디 시스템’(Buddy System)까지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군부대 한국군 배속 방안을 건의한 것이었다. 그러다 ‘카투사 제도’로 공식화되었다.
카투사 제도는 정전협정 이후에도 부족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존속하고 있다.
워리어 베이스의 임진스카웃 대원들. 출처 영문 위키
● ‘임진스카웃’ 활동
1960년대와 70년대 북한의 도발이 최고조로 올랐을 당시 카투사들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2사단의 특수부대인 ‘임진스카웃’ 정찰대에 편성되어 북한군과 근접 전투를 수행했다.
카투사와 한국군 장교로만 이루어진 ‘임진스카웃’은 미군 2사단에 배속된 대간첩중대(CAC)였다.
임진스카웃은 1965년 9월 경기 파주에서 처음 결성됐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 침투 등 충돌이
많을 때는 미 2사단의 첨병으로 활동한 ‘전투 보병의 꽃’이었다고 한다.
임진스카웃과 북한군 특수8군단은 창과 방패처럼 맞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임진스카웃은 1991년 10월 한국군 1사단에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경계 임무를 넘겨주고
26년만에 사라진 뒤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다 2002년 6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가
임진스카웃 배지 착용과 인증서 수여 등 일부 임진스카웃 제도를 부활시켰다.(문관현, 11쪽)
이번주 여행도 가까운 거리 포항~영덕간 동해바다 절경들을 여행 하면서
여유있게 노후삶을 즐기면서 행복한 여행을 하였습니다.
|
첫댓글 늘~~건강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