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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묵상글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 우리는 권고로 충분한 사랑꾼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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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는 권고로 충분한 사랑꾼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 규칙의 첫 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작은 형제들의 수도 규칙과 생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수도회 수도자들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작은 형제들만 복음을 실행하는 사람이냐?
우리도 복음을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수도자란 가난과 정결과 순종으로 대표되는
복음의 권고를 살기로 약속한 사람들이지요.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많은 권고를 하셨습니다.
그 많은 복음의 권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이요,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요,
세 마디로 요약하면 가난의 사랑과 정결의 사랑과
순종의 사랑을 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수도자라면 누구나 복음적 권고를 살기로 공적으로 약속한 사람들이고,
그것을 자기 수도회의 수도 규칙에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지요.
그런 것인데 프란치스코가 작은 형제들의 수도 규칙과 생활을
복음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굳이 못 박은 것은
복음보다 수도 규칙에 매일까 봐 그런 거지요.
사실 복음을 제대로 그러니까 완전하게 실행하면
수도 규칙이 따로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이 프란치스코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보다 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수도 규칙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복음보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복음을 놔두고 수도 규칙에 매일 수 있고,
복음을 단순하게 실천하면 되는데 수많은 규칙을 만들고는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그 규칙들에 얽매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놔두고
인간의 전통에 매인다고 질타하신 것과 같은 잘못을 범하는 셈입니다.
수도 규칙이 나쁜 것은 분명 아니고 분명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 하느님을 가리는 우상이 되듯이
수도 규칙이 복음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고 그래서 나쁜 것이 될 수는 있습니다.
복음 대신 수도 규칙에 얽매이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의 율법주의인데,
예수님께서 없애려고 하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입니다.
무슨 주의이든 주의란 그것을 최고로 여기는 것이듯
율법주의는 율법 지상주의 곧 율법이 최고라는 주의지요.
그런데 주님은 복음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이라고 가르치셨고,
그래서 모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우리는 복음의 권고를 사는 것이 규칙을 사는 것의 완성이라고,
권고가 법보다 가벼운 것 같아도 더 완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법으로 강제해야만 사는 우리입니까?
권고로도 충분한 사랑꾼들이 아닙니까?
오늘부터 한 주간,
저는 모 수도회 피정 지도를 합니다.
그래서 한 주간 강론은 수도자를 위한 강론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곳 피정의 집이 실내에서는 전화 수신이 차단됩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연락하실 일이 있으시면 이메일로 연락 주세요.
제 이메일은 lkofm@hanmail.net입니다.
앞의 i가 아니고 L의 소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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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맨 먼저 성전에서 마귀 쫓아내는 일과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셨는데, 그것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구마와 음식을 먹으면서는 정결례 법과 단식법을 어기셨고, 또 율법을 가르치시면서는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셨고, 죄를 용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겉으로는 ‘율법의 파괴자’처럼 비쳐졌지만, 오히려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문자적이고 형식적으로 지켜지던 율법을 본래의 정신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실행, 성취, 채워짐)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고,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복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계명을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고, 그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그리고 어제 우리가 기념했던,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사랑의 원의’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기를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고,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비록 작은 것 하나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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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확실히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충만히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주변도 정리 못 하면서 어떻게 큰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우리의 행복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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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캠핑을 가면 가져가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침대, 텐트, 의자, 침랑’은 개인 소지품이라 꼭 챙겨야 합니다. 물건을 꺼내는 것보다 물건을 다시 제자리에 넣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주머니에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성격이 꼼꼼하고, 차분한 신부님들은 혼자서도 쉽게 물건을 제자리에 넣는 것을 봅니다. 주머니를 좀 넉넉하거나, 크게 만들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물건은 주머니가 딱 맞게 만들어져있습니다. 억지로 힘으로 넣으려고 하면 지퍼가 고장 나거나, 주머니가 찢어지곤 합니다. 물건은 어찌하면 다시 넣을 수 있지만 사람의 감정은 더 예민하기 때문에 늘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입에서 나간 말을 다시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말실수를 한 적도 몇 번 있습니다. 사제생활 32년을 하면서도 ‘마음 다스림’은 늘 숙제로 남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비우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오늘도 마음에는 풍파가 일어납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몇 가지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첫 번째는 ‘Social Security Number(SSN)’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합니다. 요구되는 서류를 준비하고, 간단한 면접을 하면 우편으로 배송됩니다. 두 번째는 ‘운전면허증’을 받았습니다. 뉴욕은 한국의 운전면허증을 인정하지 않기에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자유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영주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주권을 원하지만 요구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비자가 만료되고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하면 생활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해외에 나갈 수 없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신앙생활에는 ‘SSN’도 필요 없습니다. ‘운전면허증’도 필요 없습니다. ‘영주권’도 필요 없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하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을 전해 주십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므로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신앙생활을 위한 많은 법과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과 규칙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들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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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녀 헬레나의 아들이며,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에 가톨릭을 공식 승인했던 황제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입니다. 어머니의 열성적인 신앙에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가톨릭을 승인했고 드디어 로마의 긴 박해 시대를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세례를 받았을까요? 만약 받았다면 언제 받았을까요?
그는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적극적인 권유에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겨우 세례받았는데, 세례를 계속 미뤘던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면 신자답게 살아야 하므로, 죄악에 빠질 자유를 잃는다.”
이렇게 늦게 세례받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컷 죄를 짓고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세례받으면 가장 깨끗한 상태로 구원에 이르게 될까요?
주님을 멀리할수록 영혼은 병들게 됩니다. 육체의 병이 생기면 치료받아야 하지요. 또 혹시 모를 병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예방접종도 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병이 생기기 전까지 건강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함부로 몸을 굴리다가, 병에 걸린 다음에 치료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영혼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병도 치료해야 하고 또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예방접종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하지만 병이 생긴 뒤에 치료받겠다고 합니다. 과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실컷 놀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다가 나중에 힘 빠지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합니다. 점점 영혼이 병들어 가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후회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주님 안에서 더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망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지요. 자유와 해방의 법을 율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율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 안에서 진정으로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하십니다.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사랑의 율법은 지금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만을 쫓다가 먼 훗날 힘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회개하고 “자비를.”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삶, 영적으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랑의 율법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로소 큰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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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을 향해서 배를 저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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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
-사랑이 답이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편25;4.5)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만민의 공통언어가 사랑의 순수한 마음입니다. 공통적 좋은 반응을 일으키는 제 시詩들도 한결같이 사랑이 주제입니다. 미국에 있는 신심깊은 조카를 통해 조카 친구가 만들어 주는 시화詩畫들이 참 반갑고 마음에 듭니다. 어제도 수도원 입구 빨간 넝쿨장미 아치형 입구 공간에 위치한 시가 참 좋아 많은 이들과 나누었습니다.
-“사랑합니다!”
감동에 벅차 당신을
안을 때마다
주님을 안 듯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을
살아 있는 소우주를
살아 있는 성경을
살아 있는 성인을
안 듯 당신을 안는다
가슴 벅차오는 기쁨이요 행복이다-2023.6.11
사실 이 시는 제 체험적 고백입니다. 긴 면담성사후 감동에 젖어 형제자매님들이 너무 장하고 고맙고 사랑스러울 때 사죄경과 더불어 강복을 드린후 이 시의 마음으로 안아드립니다. 이 시화를 받은 다섯 분 도반의 감사 답신입니다.
1.“아, 멋진 말씀을! 넝쿨 장미 성전입구 사진을 편집까지, 너무 감동입니다. 말씀만 보아도 행복인데 정성들인 사진으로 만들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액자로 만들어 간직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예수님 품인듯, 따뜻하고 힘차게 안아 주시는 신부님께서 갑자기 확 제 앞에 계신듯 하네요. 감사드려요. 신부님, 좋은 하루 되시길요."
3."사랑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신부님!"
4."아멘, 신부님, 멋지고 아름다운 예수님께 대한 사랑고백이십니다. 감동입니다."
5."어제 인용하신 이 시도 참으로 감동입니다."
또 “사랑합니다!” 시작되는 시 2편이 생각납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의 예수 성심상 앞을 지날 때 마다 바치는 행복기도(예닮기도)중 첫연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2018.10.16
아, 다음 시를 쓸때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저에게 시는 짜내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총처럼 발견되어 줍는 선물입니다. 그때는 고풍의 돌집 성당 입구에 있었던 물앵두나무 빨간 열매들이었습니다.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빨간 앵두열매들입니다.
-“사랑합니다!”
마침내
빨간 열매로
사랑을 고백하는 앵두나무
초록빌 나뭇잎들
믿음 사이로
수줍게 살며시 얼굴들 내밀고
사랑을 고백하는
빨간 앵두 열매들
부끄러워 빨갛게 물들었네”-1996.5.30
어제 월모임을 하고 간 코이노니아 자매회 공동 카톡란에 제가 올린 격려글입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랑의 압축인 성호경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사랑의 예수님과 일치됨으로 변질되지 않고 참소금으로 참빛으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살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오늘 복음을 요약하는 성호경입니다. 사랑의 기도, 사랑의 회개입니다.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가 평생 변질되지 않는 참소금, 참빛의 주님 사랑으로 살게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의 어떠한 세부사항도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여기서 진실로는 히브리말 “아멘!”을 음역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을 고백하는 말마디 “아멘”입니다. 율법 하나하나가 하느님 사랑이 알알이 맺힌 빨간 앵두열매들과 같으니 어느 하나 작은 것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으니 모든 율법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 때 이런 사랑은 그대로 율법의 완성이 됩니다. 어느 율법하나 다치지 않고 사랑의 완성을 이룹니다. “완성하다”로 옮긴 그리스말 동사 “플레로오”는 “충만하게 채우다”는 뜻으로 마태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예언성취 도식에 즐겨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텅빈 충만, 바로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바로 산상설교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가 구체적으로 율법의 완성이 사랑임을 입증합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깊이 깨달은 사랑의 사도, 성령의 사도 바오로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성령이 사랑입니다. 성령충만, 사랑충만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성령의 직분은 얼마다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성령의 직분을 지닌 새 계약의 일꾼으로, 사랑의 성령의 일꾼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때 어느 하나 율법도 다치지 않고 완성하여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 불릴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에, 날로 주님 사랑을 닮아 가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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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위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맞아, 맞아, 주님은 완성하러 오신 분이야!’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그래서 정확히 무엇을 완성하러 오셨냐고 물으면 잘 대답을 못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도 완성하러 오셨지만 그중 저는 겸손과 순종을 오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화보는 것 좋아하시나요? 십자가에 달려계신 주님에 관한 성화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 어떤 그림들은 그 십자가의 땅속을 그려놓은 성화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속에는 해골이 그려져 있는데 그 해골은 바로 ‘아담’을 상징합니다. 왜 십자가 밑에 아담의 해골을 그려 넣은 걸까요? 그것은 바로 아담이 저지른 죄를 십자가로 주님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저지른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만과 불순종입니다. 선악과의 유혹은 ‘이것을 먹으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교만이 그 출발입니다.’ 또한 그 교만은 하느님의 말을 어기는 즉, 불순종의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태초의 인간과 더불어서 모든 인간의 교만을 겸손으로 완성하십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면서 순종의 모습으로 아담의 불순종 또한 완성하셨습니다.
‘나는 완성하러 왔다.’하신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참되십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서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께서는 겸손을 완성하시고 순종을 완성하십니다. 그리고 그 겸손과 순종의 선물로 하늘나라와 하루하루의 기쁨을 선물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안에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완성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겸손하고 순종하며 그렇게 사랑이 완성되기를 희망합니다.
김밥
김밥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사실 안 좋아하는 게 없습니다.
제가 못 먹는 것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없어서 못 먹고, 안 줘서 못 먹고, 몰라서 못 먹고….^^
여하튼 김밥 좋아합니다.
참치김밥, 소고기 김밥, 땡초 김밥, 김치김밥….
김밥에 쫄면도 좋아하고, 김밥에 라면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는 화려한 김밥도 좋지만
그렇게 화려하지 않아도 저는 좋아합니다.
즉, 김 앤 밥
밥 위에 진미채를 얹고 그것을 김에 싸 먹으면 진미채김밥.
밥 위에 조개젓 얹고 김으로 싸 먹으면 조개젓 김밥.
밥 위에 메르치볶음 얹고 김으로 싸 먹으면 메리치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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