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해왕맹의 선전포고 1 둥둥둥둥――! 정오의 적막을 싸그리 날려 버리는 힘찬 북소리가 울리고 이어 그를 뒤덮는 일대 함성이 바 다를 뒤흔들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두 사람. 절대적인 기세를 내뿜는 절대자들이었다. 바다에서 이러한 인물들은 오직 두 사람 뿐이었다. 해왕천사(海王天師) 해천호(海天豪)와 그의 동생인 해왕신검 해천웅(海天雄)이었다. 선창에 나와 있는 해왕천사와 해왕신검은 선발대로 떠나는 해왕풍(海王風) 선단을 바라보며 저절로 어깨가 벌어졌다. "누구도 저들의 기세를 꺾을 수 없다!" 선발대인 만큼 그들의 사기는 바다를 들끓게 만들었고 치솟는 전의로 그들이 탄 함선이 들 썩였다. "와아아―! 소종사님의 원수는 우리 손으로 갚는다!" "중원의 땅개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자!" 창창창―! 일제히 뽑아 든 그들의 검이 하늘을 찔렀고 반사된 빛이 바람을 모았다. 찢어질 듯 그들이 탄 배의 돛이 부풀어 오르며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항구를 박찼다. "와아아아!" 그 소리를 들으며 해왕천사는 그들의 배가 나아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중원은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옆에 선 해왕신검도 강렬한 안광을 쏟아 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드시 보여 줘야 하오! 바다의 힘을 얕본 대가를!" "제이 선발대의 준비는 끝났느냐?" "예, 형님! 앞으로 일 주일이면 십만(十萬)의 고수들이 더 가담할 것이오. 제일 선발대의 오 만 정예고수들이 먼저 그들의 사기를 꺾어 놓고 삼 일 후 출발한 십만 군사들이 능히 중원 을 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 주일 후, 형님은 말 그대로 무혈입성(無血入城)하시게 될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해왕천사의 눈빛이 문득 흔들렸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좋으련만, 왠지 불길하다.' 이어 몸을 돌리며 이를 악물었지만 불안감은 떨쳐지지 않았다. '음모의 냄새가 난다. 내가 저들을 사지로 내몬 것은 아닌가?' * * * "아버님은 돌아오시지 않았다." 용해린은 광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가 가는 방향에는 십 년간 닫혀 있던 아버지의 서고(書庫)가 있었다. 십년지약! 아버지와의 십 년의 약속이 오늘로써 끝난 것이었다. 하나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자신이 십년지약을 지키지 못할 시에는 서고를 열어 보라 하시었다." 그랬기에 그는 십 년 간 닫혀 있던 아버지의 서고로 향했다. 그렇다고 용해린이 아버지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용해린은 아버지에게 불행이나 위험이 닥쳐서 오지 못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설사 지옥이라 해도 아버지 자신이 죽고 싶지 않다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임을 용해린은 잘 알고 있었다. 과연, 그가 가는 아버지의 서고에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 * * 싸늘히 식은 두 구의 시신. 잘려진 목을 붙여 놓은 흔적이 엿보이는 그 시신은 바로 신주오룡의 시신이었다. 방옥과 호불 위의 시신. 가운데에 넓직한 공간을 둔 원탁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리해 있었다. 정중앙에 양문룡이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자리해 있었다. 무림의 중대사가 생겼을 때 소림의 주제로 무림첩이 발동하고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모이 는 십방대의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하제일의 두뇌라는 다지문성 양문룡이 비밀리에 초빙됐다. 태허상인이 진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벌써 해왕맹의 오만 군사들이 출전했다니……." 잠시 침묵이 흘렀고 소림의 혜각선사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양장주." 한동안 침음한 채 침묵하던 양문룡의 입이 열렸다. "그들이 중원에 당도할 기한은 앞으로 삼 일이며 그들을 시작으로 칠 일 내에 해왕맹의 본 진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이는 구파일방의 전체 세력의 오 할에 달하는 세력이며 그들과 맞 부딪친다면 전 정파무림의 힘은 상당히 붕괴된다고 봅니다." "해결할 방법이 없겠소?" 양문룡은 강렬한 시선으로 혜각선사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양문룡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그 한 가지는 장문인들께서 직접 해왕맹을 찾아가 머리를 숙이고 해왕천사에게 용서를 구 함이요……." 순간 매화검선(梅花劍仙) 군불악(君不惡)이 튕기듯 일어섰다. "뭣이! 중원무림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우리들이 한낱 바다 개구리들에게 머리를 조아리 라니!" 양문룡은 반대로 지극히 차분했다. "장문인들의 고개 한 번 움직임에 달린 생명이 수만(數萬)입니다." 군불악은 질 수 없다는 듯 더욱더 노성을 질렀다. "중원무림이 강아지 새끼라도 된단 말이냐! 천년의 고고한 세월 동안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 여 본 적이 없던 우리거늘…… 어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군불악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군장문인! 분노를 좀 가라앉히시오." 혜각선사는 분노에 이까지 부드득 갈아붙이는 군불악을 진정시키며 침중한 음성을 흘렸다. "성을 낼 일이 아니외다. 양장주의 말대로 우리들이 머리를 숙임으로 해서 한 명의 목숨이 라도 건질 수 있다면 본인은 양장주의 말씀대로 하겠소이다." "아니되오이다!" 이번에는 여러 명의 장문인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무당의 태허상인이 그들이 뭐라 하 기 전에 말을 잘랐다. "모두 진정하시오. 아직 한 가지 방도가 남아 있질 않소." 그러자 그들도 양문룡의 말을 되새기고는 이내 모두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두들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태허상인이 양문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다른 한 가지는 무엇이오?" 양문룡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중재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장문인들의 눈빛이 번쩍이며 의아한 얼굴로 양문룡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도 듣지 않는 해룡맹인데 중재자라니?" 양문룡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라면 반드시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태허상인이 재차 물었다. "그게 누구요?" 양문룡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무적해룡!" * * * 슈우우욱― 펑! 한 줄기 섬광이 하늘을 양단하듯 솟아올랐고, 이어 번쩍 빛을 발하며 터졌다. 때마침 아버지 의 서고를 나오던 용해린은 폭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문룡형님이……?" 자신을 부를 일이 있으면 폭풍군도 외곽에서 폭죽을 터뜨리라고 했던 용해린이었다. 하늘을 유유히 떠가는 오색 연기는 바로 용해린을 부르는 것이었다. 슈아악! 동시에 그는 일의 급박함을 느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공으로 솟구쳐 배에 올라타자마자 발을 굴러 뱃전을 차자 순식간에 배는 물살을 가르며 어느 새 백 장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양문룡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무사 하나가 그에게 서신 하나를 건네 주었다. "다지문성께서는 바쁘신 관계로 오시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것을 전해주시라는 부탁을……." 무사는 이어 그에게 한 통의 서찰을 전해 주고 돌아갔다. 용해린은 서신을 펼쳐 읽고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해왕맹이 중원을 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약선어른은 해소저를 해왕맹에 돌려 보내 지 않았단 말인가?" 용해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찰에는 분명 해옥랑이 중원의 인물들에게 살해돼 분노한 해왕맹주가 중원을 심판하려 오 만의 군사를 보냈다고 했다. 하나 해옥랑은 분명 살아 있지 않은가? "오해가 있다. 중원이나 해왕맹 어느 한 곳이라도 손실을 입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는 재빠르게 배에 올랐다. "먼저 약선어른을 만나 봐야 한다." 그가 탄 배는 빛살처럼 나아갔다. 2 "기억(記憶)을 잃었다구요?" "그렇다네." "맙소사." 용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양문룡의 서신을 받자마자 창해약선 담대우를 찾아온 용해린은 어이없는 광경을 보고 말았 다. 담대우의 등 뒤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두려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 그녀가 바 로 해옥랑이었다. 그녀는 기억을 잃어 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거의 죽음에 이르렀던 해옥랑을 살리는 과정에서 그녀의 뇌신경(腦神經)이 손상돼 기억을 잃은 것이었다. 담대우는 그런 그녀의 기억을 되살릴 방도를 찾으려고 자신의 지하약실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허……." 용해린은 어이없는 실소를 흘렸다. 어린아이처럼 수줍고 약간은 두려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해옥랑은 아주 순수한 아름다움 을 발산하고 있었다. 보호본능이 저절로 일어날 정도의 백치미(白痴美)였다. 야생마같던 이전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용해린은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모습을 해왕천사가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허, 할말이 없네." 해옥랑을 깨워 해왕맹으로 데려다 주려던 담대우는, 그러나 깨어난 해옥랑이 기억을 잃었음 을 알자 고민하게 됐다. 그냥 이대로 해왕맹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리되면 해옥랑이 이렇게 된 경과도 얘기해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중원과의 마찰을 피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담대우는 해옥랑의 잃었 던 기억을 찾아 주기로 결정하고 치료에 들어간 것이다. 어느 정도 치료에 성과를 보았는데, 그만 이렇게 시간이 경과된 것이다. "이게 어찌 약선어르신의 잘못입니까?" 용해린은 손을 저었다. "이제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라도 해왕천사에게 보여 중원과의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알겠네." 담대우는 해옥랑을 돌아보았다. "얘야, 너는 곧 저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고왔다. 이전의 조금은 괄괄했던 음성은 완전 사라지고 본래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저 사람을 따라가면 너의 아버지를 볼 수 있단다." "아버지?" "그래." "알았어요." 해옥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런 거리낌없이 용해린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다가간 그녀는 스스럼없이 용해린의 팔짱을 끼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팔꿈치에 닿자 용해린은 얼굴을 붉히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헛!" 모든 기억을 잃고 본능만이 남은 해옥랑이었다. 기억을 잃기 이전 용해린에게 마음이 기울 어 있었던 그녀였다.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아 있던 해옥랑은 그래서 마음이 가는 대 로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것이었다. "허헛! 보기 좋으이." "약, 약선어른." "그냥 그녀가 하는 대로 놔두는 게 좋을 것이네. 치료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담대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또한 빠르게 해왕맹으로 가려면 그녀와의 유대감이 필요하지." "음." "시간이 촉박하니 지금 당장 출발하게." "알겠습니다." 세 사람의 신형은 지하 약실에서 사라졌다. * * * 해왕대전(海王大殿). 해왕맹주 해왕천사가 머무는 곳이다. 커다란 중원전도(中原全圖)가 깔려진 하나의 원탁을 둘러싸고 두 명의 인물이 마주하고 있 었다. 해왕천사 해천호와 그의 동생인 해왕신검 해천웅이었다. 해천호는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에 얼굴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번 중원 행은 어쩌면 득(得)보다 실(失)이 많을 것으로 그 일로 인해 해왕맹이 다시 일어 서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해천호의 얼굴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대해의 젊은이들이 피 흘리게 된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의 말은 동생 해천웅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러한 온건한 상념으로 인해 대세를 그르치어서는 절대 아니 되십니다. 은원을 잊으셨습 니까?" 해천웅의 호목은 분노의 불을 뿜고 있었다. 그는 격정적으로 말했다. "형님은 잊으셨소? 해옥랑이 중원의 무사들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으음, 어찌 그것을 잊을 수가 있단 말이냐." "그렇소.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오. 감히 대해의 진주인 옥랑이를 죽게 하다니 중원 놈들을 절대 그냥 둘 수 없소." 해천호는 말없이 동생의 말을 들었다. "형님은 지금껏 오만한 중원 놈들에게 되도록 양보하면서 그들과의 우호를 유지하려고 노력 해 왔소. 헌데 그렇게 해서 기껏 돌아온 대가가 옥랑의 목숨입니까?" "으음." 해천호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동생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런 형을 보며 해천웅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오만하고 버릇없는 중원 놈들에게 이제 우리의 힘을 보여 주어야만 하오. 우리는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해천웅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결전이 시작되면 무수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저라고 왜 모르겠습니까." "음……." "하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입니다. 언제까지 오만하고 독선적인 중원인들의 멸시를 받 아야만 한단 말이오. 이번에야말로 우리는 참아서는 안됩니다." 그의 어조는 강경했다. "우리의 옥랑이를 앗아간 중원 놈들을 난 결코 용서할 수 없소. 옥랑, 그 아이가 어떤 아이 요. 형님의 자식이자 대해인의 꿈이 아니었소. 그런 옥랑이를 중원 놈들이 해한 것이오." 해천호와 그의 동생인 해천웅에게는 달리 자식이 없기에 그들이 해옥랑에게 들인 정성은 대 단했다. 해왕맹의 모든 것을 투자하며 해옥랑을 키워 왔던 것이다. 그런 해옥랑이 중원의 무사들에게 변을 당한 것이니 해천웅의 분노를 이해 할만 했다. 이들은 지금 해옥랑이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비록 시신을 찾지 못했으나 앞뒤의 정황으로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이다. 해옥랑이 죽은 것으로 간주한 그들은 중원과 전면전을 하겠다고 선포를 했고, 남해의 모든 해왕맹도들은 거기에 동조하며 무사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중원은 오랫동안 대해를 업수히 여겨 조롱해 왔소. 지금 그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히 대해를 시시하게 여길 것이고, 우리의 후손들은 더한 모욕을 받을 것이오이다." "으음." 침음성을 삼킨 해천호는 멀리 창 너머의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런 것들은 잘 안다. 하나 중원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대지이다." "……." "그곳을 힘으로 해서 짓밟는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는다. 더구나 현 무림은 최고의 전성 기를 구가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은 나도 압니다. 하나 우리들 해왕맹의 무사들도 용맹하고 강해요. 어느 중원 무사들에 게도 꺾이지 않을 것이오. 또한 우리는 사기가 충천해 있소." "중원은 기세와 사기만으로 이길 대상이 아니다." "그것만이 아니오. 우리의 단합된 힘을 믿기에 하는 말이오. 현 중원의 그 어떤 세력도 본 맹을 따르지 못하오. 본 맹은 단일 세력으로는 최강이오. 이 점을 잘 살린다면 중원을 무릎 꿇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오." 해천웅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선단을 이끌고 장강(長江)을 따라 중원을 관통해 각개 격파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 다. 해옥랑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인 중원의 십대방파는 단합된 해왕맹의 상대가 되지 않 을 것이다. 규모 면에서 단일 세력으로 그들의 오 분의 일도 되는 세력이 없었다. "만일 처음부터 중원이 연합해 우리를 상대한다면 본 맹은 상당한 고역을 치를 것이나 우리 는 그들이 뭉치기 전에 일을 마칠 것이오. 승산은 충분히 있습니다." 해천웅은 외모와는 달리 지혜가 있는 인물이다. 비록 열화 같은 성품을 지녔으나 그의 지모는 보통이 아니었다. 선단을 이끌고 중원의 세력을 각개격파 한다는 그의 이론대로 한다면 중원은 실로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헌데 그때였다. 돌연. 펑……! 서쪽 하늘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맑은 하늘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더욱 환히 밝히는 폭 죽. "이… 이 신호는?" "으음. 해왕맹의 존망이 걸린 일이 벌어질 때만 쏘아 올리는 적혈폭화(赤血爆火)가 터지다 니……?" 해천호와 해천웅은 모두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적혈폭화! 그것은 해왕맹에서 만든 특수한 폭약으로 그것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상황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해왕맹의 존망이 걸린 일이 일어날 때 쏘아지는데, 그것이 쏘아지면 해왕천도 둘레에 열 겹 의 선단진이 펼쳐지며 전 해왕맹의 무사가 해왕궁으로 모여들어 거대한 천라지망이 형성된 다. 헌데 그런 폭화가 터진 것이다. 펑! 폭화는 이천 장 밖에서 터진 것이나 너무도 또렷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해천호는 반각 후에야 폭화가 왜 터져오르게 됐는지를 순찰당주(巡察堂主)를 통해 알게 되 었다. 순찰당주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지극히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궁문(宮門)에 급변이 일어났습니다." 궁문이라면 해왕궁을 들고나는 십 장 크기의 거대한 문이 아닌가? 그곳에는 해왕궁의 무사들 중 가장 강한 무사들 수천여 명이 항시 상주하며 해왕궁을 보호 하고 있었다. "돌연 나타난 자가 잇달아 오진(五陣)을 깨고 해왕궁으로 들어섰으며 가로막는 본 맹의 검 진들을 모두 깨뜨렸습니다." "그런 일이!" "어이가 없군." 해천호와 해천웅이 어이없어 할 때 순찰당주는 계속 보고를 올렸다. "이어 삼백 육십 명의 검수들이 그를 막았으나……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으음." "그 자는 혼자이더냐?" 해천웅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는 면사를 쓴 어떤 여인 하나를 대동하고 있었습니다." "뭣이라? 여인 하나를 대동하고 있는 데도 막지를 못했단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 자가 사용하는 무기는 말로만 듣던 창룡노로 보여져 그는 무적해룡 같았습니다." "무엇이? 무적해룡이라고……?" "그 자가 어이해 본 해왕궁을 공격한단 말이냐?" 해천호와 해천웅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적해룡이라면 그들이 너무도 잘 아는 이름이다. 그 지닌 바 무공의 대단함은 그들도 경원시하는 것이 아닌가! "으음, 무적해룡 그 자 하고는 엄연히 세력권이 다른데 어인 일로 본 맹에 들어왔단 말인 가?" "분명 무적해룡이 맞는가?" "예! 틀림없는 무적해룡입니다. 그가 항시 지니고 다니는 창룡노는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 형태는 잘 알려져 있는지라……." "으음." 해천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내일이면 중원으로 진군하려는 이때에 무적해룡의 방문을 받다니." "그 자가 어이해 본 맹으로 온 것이지……?" 그들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낭랑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3 "맹주와 단독회담을 하기 위해서요." 갑자기 한소리 청아한 음성이 들려 오며 어느 새 대전의 앞에는 한 인물이 서 있었다. 오광을 발하는 검은 색의 창룡노를 들고 선 자, 바로 무적해룡 용해린이었다. 우르르르……! 용해린의 뒤쪽으로 그를 따라온 무수한 무사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 중 한 명이 해천호 앞에 나서며 무릎을 꿇었다. "맹주, 면목이 없습니다." 무릎을 꿇은 자는 해왕궁의 경비를 총괄하는 자였으며 해룡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를 통 감하며 무릎을 꿇은 것이다. 수하의 보고에 상관하지 않은 채 해천호는 자신의 앞에 선 용해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자다.' 해천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말로만 듣던 무적해룡을 오늘에서야 직접 본 것이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세 배는 더 강하다.' 해천호와 용해린은 말없이 서로를 주시했다. 그들 사이에 잠시 정적 같은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해천호였다. "본좌와의 단독 회담을 원한다 했는가?" "그렇소!" "감히." 주변의 해왕무사들이 분기탱천하며 금시라도 출수할 태세였다. 비록 무적해룡의 명성이 남해에서 드높은 것은 아나 그래도 이제 어린 애송이일 뿐인데, 그 자는 자신들이 하늘같이 받드는 맹주에게 감히 단독 회담을 갖자고 요구하는 것이다. 해왕무사들이 검을 용해린에게 겨누었다. 언제라도 출수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나 용해린은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해천호를 직시했다. 그는 지금 수천 명의 고수들에 에워싸여 있었으나 그 어디에도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용해린의 모습을 보며 해천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본좌와의 단독 회담이라니…… 역시 무적해룡이다." 해천호는 역시 거인이었다. 그는 형형한 안광을 발하며 용해린을 쳐다보았다. "단독 회담이라…… 그래, 주제는 무엇인가?" "천하(天下)!" "천하……?" "그렇소." "으음. 천하라……." 해천호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용해린의 입에서 천하란 말이 나올 줄이야. 그의 시선이 용해린을 뚫어지게 직시했다. 철벽이라도 뚫는 듯한 그의 강렬한 안광에도 용 해린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윽고 해천호의 입이 벌어지며 명이 떨어졌다. "해왕전사들은 모두 물러가라!" 뜻밖의 명령에 해왕맹의 수하들은 의아함을 느꼈으나 그들은 곧 대청에서 물러났다. 해천호의 말은 곧 법이었다. 수하들이 모두 물러갈 때 곁에 있던 해천웅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는 비로소 용해린의 등 뒤에 선 면사여인을 볼 수 있었다. "설, 설마……?" 격동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시선을 쫓던 해천호의 두 눈이 더 커 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어느 새 용해린의 품에 안겨 있는 면사여인! 얼굴을 가리고 있으되 어찌 아버지된 자가 이십여 년을 애지중지 길렀던 딸의 모습을 모르 겠는가. 그렇다. 해천호는 한눈에 그 면사여인이 해옥랑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옥랑아!" 해천호가 부르짖으며 용해린을 향해 다가섰다. 하나 해옥랑은 놀랐는지 더욱 용해린의 품으 로 파고들었다. "허……." 해천호가 멈칫 그 자리에 서며 어이없어 했다. 아비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피하며 사내의 품으로 파고들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해천호와 해천웅이 어이없어 할 때 용해린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해하시오. 해소저는 기억을 잃었소." "기억을 잃었다고?" "그런 일이." * * * 오늘따라 빗발치듯 몰아치던 장강의 바람이 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 장강의 물결도 그 기세 를 잃고 침묵을 지키는 듯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 위를 기둥처럼 정박해 있는 삼십여 척의 함선들이 일정한 진세를 유지하며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배들 위에는 승(僧), 도(道), 속(俗)의 수많은 무사들이 한 점의 미동도 없이 곳곳 에 선 채 장강의 물결이 향하는 방향 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날아드는 전서구들이 한 번씩 침묵을 깨트릴 뿐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내질 않았다. 팔 장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검! 길이는 네 자. 무게는 열 닷 근. 가히 크지도 무겁지도 않은 예리한 쇠뭉치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을 짓누른단 말인가! 그 하나의 검에 지키려는 자의 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숨결이 들어 있음에야, 그리고 거기에 무림동도들의 모든 미래가 달려 있음에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중원으로 점점 복수의 검을 들이대고 있는 해왕맹을 맡기 위해 결성된 제 일 결사대들이었다. 소림의 혜천선사가 백팔나한대진의 제자 백 팔 명을 대동했고, 무당의 태청상인이 이백여 명 등등 구파일방에서 일차적으로 선발된 삼천여 명의 선발대가 출전했다. 그 중 화산파는 다른 문파에서는 장로급을 수뇌로 파견한 것에 이례적으로 장문인이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가담하였다. 다른 파의 장문인들은 아직도 이번 사건을 피를 보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었 으나 유일하게 화산장문인인 군불악만이 해왕맹에 대해 불같이 분노를 토하며 첫 대전이 될 지도 모를 이번 전투에 참가한 것이다. 중앙에 위치한 어느 한 거선의 선실. 이번 구파일방의 제일 결사대의 수뇌급 인물들 몇 명과 양문룡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십방대의에서 길길이 날뛰던 군불악의 분노는 이 자리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해전에 강한 그들이오! 헌데 어찌 바다와 다름없는 이런 장강에서 그들과 맞서 싸우려 한 단 말이오, 양장주!" 그러자 청성의 제일장로 운하성검(雲霞星劍) 단무외(旦武巍)가 동조했다. "맞소이다! 우리는 이런 해전에 익숙하지 못할 뿐더러 수에 있어서도 열세에 있소이다." 양문룡은 중한 모습으로 나직이 물었다. "묻겠소. 누구를 위한 싸움이요?" 그러자 뜻밖의 말이라는 듯 군불악이 되물었다. "양장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그의 옆에 있던 점창의 삼절쾌검(三絶快劍) 도공우(桃珙優)가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무림 동도 모두를 위한 싸움이 아니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문룡이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일갈했다. "허면!" "……?" 말과 함께 양문룡은 탁자를 쾅! 하고 내리치며 노한 음성으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장강을 내어 준다면, 그들의 진격 속도를 무엇으로 감당 한단 말이오? 그리고 후에 도착하는 해왕맹의 후발대는 어찌할 것이오?" 그의 말에 중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양이 앞에 쥐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만의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한 마디라도 했다간 다지문성이란 별호에 맞게 양문룡에게 질펀하게 면박을 당할 것 이 뻔했기에 그저 속으로만 투덜거릴 뿐이었다. "결사대의 목적은 적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것일 뿐! 싸움은 언제나 최소한의 희생을 강요 하는 법이오!" "……!" "그러나 본인은 한 사람의 희생이라도 줄일 것이며, 또한 오해로 빚어진 싸움이니 만큼 그 것은 해왕맹에게도 똑같은 경우로 적용될 것이오." 양문룡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으려다 문득 돌아서며 못을 박듯 말했다. "후의 일은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질 것이며, 본인을 따르는 이상 그대들의 안전은 보장할 것 이오. 그러나 다시 본인에게 그런 반발성 언행을 했다가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테니 그리 알고들 계시오!" 탁!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고수들의 얼굴은 걸직한 똥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 는 듯 뇌까렸다. "믿으라니 믿을 수밖에!" 양문룡은 배 위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내심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급조된 결사대이니 만큼 미완된 부분은 많으나 가히 일당백의 무사들이다!' 문득 허공을 휘도는 까마귀의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까악…… 까아악! 양문룡은 허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죽음의 기운이 감돈다. 그러나 난 최소한의 희생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동시에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매제, 부탁하네!" 4 용해린의 모든 말을 들은 해천호는 은공인 그에게 대례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핏줄이라고는 단 하나,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이후 그는 오직 해옥랑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천호는 강인하면서도 항시 정에 굶주려 온 사내였다. "공자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은혜라니요,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다행히 따님을 구한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런 데……." 용해린이 말끝을 흐리자 해왕신검이 물었다. "뭐 분부하실 일이라도……?" 용해린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따님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중원 진군을 멈춰 주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해천웅이 발끈 하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아니 되는 일이오. 귀하도 보았듯이 구파일방이 먼저 우리 해왕맹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석연치 않은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해천호가 물었다. "무엇이 석연치 않단 말이요?" 용해린은 그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그때 제가 따님을 공격했던 세 사람을 상대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들의 말투며 행동은 도저히 명문정파의 제자라 할 수 없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 다. 만약 그들이 구파일방의 제자가 아니라면……?" 해왕신검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시체 두 구의 신분을 확인한 결과 그들은 신주오룡 중 아미와 곤륜의 제자임을 확인 했소이다." 용해린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 소림을 위시한 구대문파 모두 진산비급을 도난 당했다고 하외다. 그 도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고수들이 바로 신주오룡이었고, 그런데 따님의 품속에는 개방의 진산 비급인 용호풍운보가 있었소이다." "그게 사실이오?" 해천호가 묻자 용해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해천호는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는 일이군. 옥랑이와 개방과는 아무 연관이 없을 터인데……." "유추해 보건데, 과정은 알 수 없으나 신주오룡은 용호풍운보가 따님의 품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따님을 쫓아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싸움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소이다." 해천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야……." "여하튼 음모의 냄새가 짙게 나는 것은 확실합니다. 따님의 기억이 살아나야만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해천호는 딸을 돌아보았다. 해옥랑은 용해린의 팔에 매달린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항상 남자 같은 모습만 보아 온 해 천호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라 얼떨떨했지만 보면 볼수록 딸의 지금 그런 모습이 더 어울 린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해천호의 뇌리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적해룡과 딸을 맺어 주는 그런 생각이 말이다. 용해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제 생각에는 신주오룡, 그들은 어떤 암중의 단체가 심어 놓은 내부의 첩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천호가 물었다. "어떤 단체라니?" "해왕맹과 중원무림과 충돌함으로 해서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이득을 챙겨 좀더 손쉽게 중 원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무리, 혈마천(血魔天)!" 해천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마천?" "사실 중원의 구파일방은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두문분출하고 있소이다. 그런 그들이 왜 애 써 해왕맹과 충돌을 일으킬려고 하겠소이까?" 고개를 끄덕이던 해천호는 용해린에게 붙어 있는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안쓰러워 하는 부정 (父情)의 눈빛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모든 것은 옥랑이가 깨어나야만 알 수 있겠군." 해천호는 해옥랑에게 다가가 딸아이의 손을 어루만졌다. 해옥랑은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언제 깨어날 것 같소?" "창해약선께서 수시로 약을 지어 보내실 것입니다. 그것을 꾸준히 먹이시라 했습니다." "음. 폐를 끼치게 되는군." "별말씀을. 약선어르신이 말씀하시기를 잃어 버린 기억을 빨리 되찾으려면 살던 곳의 경물 과 사람들을 많이 대하라 하셨습니다." "이 해천호가 진심으로 고마워한다고 전해 주시오." 해천호와 해천웅은 말없이 용해린을 주시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무한대의 감사가 은연중에 담겨 있었다. 해천호는 용해린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말해 보시오. 다 들어드리겠소." 불쑥 한마디 던지는 해천호, 그는 용해린이 마음 속에 담고 있는 생각을 읽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용해린은 그런 해천호를 보며 감탄했다. 그는 주저없이 입을 열었다. "오해가 풀리실 때까지…… 중원 침공을 미뤄 달라는 것입니다. 열쇠는 따님이 쥐고 있으니 따님이 기억을 회복할 때까지만이라도." 해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년(半年)을 양보하겠소." 이어 그는 해천웅을 쳐다보았다. "너는 용공자와 함께 중원으로 떠나 기필코 싸움을 저지시켜라!" "알겠습니다, 형님!" 해천웅은 주먹을 쥐며 다짐했다. 용해린은 그런 해천웅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촉박하외다!" "알겠소, 지금 당장 떠납시다." 용해린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해옥랑을 돌아 보았다. "해소저, 나는 가봐야 하오." "저도 따라갈래요." 해옥랑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떨어뜨릴 듯한 표정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용해린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해옥랑을 타일렀다. "해소저는 아직 몸이 아파서 안되오." "힝……." 해옥랑이 칭얼대듯 입을 열었다. 그런 해옥랑을 용해린은 잘 타일렀다. "여기서 아버님과 함께 몸을 요양하고 있으시오. 반드시 다시 돌아올 테니." 용해린을 따라가고 싶은 해옥랑이었지만 그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 들었다. "빨리 돌아와야 해요?" "알았소.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돌아오리다." 다짐을 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천웅은 해천호를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형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모쪼록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두 사람이 먼저 가라. 곧 수하들을 딸려 보낼 테 니." "알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의 신형이 해왕대전의 창문으로 사라졌다. 해옥랑은 창가에 서서 저 멀리 날아가는 용해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놓 지 않았다. 그런 딸아이의 모습을 보며 해천호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나이가 그렇게 되었는가? 시집을 보낼 나이가……?" 그도 시선을 들어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하나 망연히 그러고만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곧 수하들을 딸려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해왕맹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