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암성 (11)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앙브뤼메지의 지하도
판사는 촛불을 들고 내려갔다. 제브르 백작이 뒤를 따랐다. 보트를레도 사다리를 디뎠다.
그가 내려가면서 기계적으로 세어 보니, 사다리에는 18개의 단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촛불이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지하실을 그의 눈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땅바닥에 내려가 보니, 고약한 냄새 - 썩은 냄새가 났다.
그러자 갑자기, 떨리는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뭔가요? 왜 그러시지요?"
"보트를레군...."
하고, 피욜 씨는 더듬거렸다. 그는 너무나도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판사님, 침착하시지요."
"보트를레군, 저기에...."
"뭔가요?"
"저...., 제단에서 떨어진 돌 밑에 뭐가 있어..., 돌을 밀었더니 손에 닿지 않겟나... 오, 끔찍스러워라!"
"어디 있습니까?"
"이 쪽에.... 냄새가 나지 않나? 옳지, 거기.... 그것 봐...."
그는 촛불을 들어 땅바닥에 누워있는 물체를 살며시 비추었다.
"아앗!"
보트를레는 질겁을 하며 외쳤다.
세 사람은 얼른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반쯤 벌거벗은 시체가 끔찍스럽게 뒹굴고 있었다.
몰랑몰랑하고 푸르스름한 살이, 군데군데 찢겨진 옷 사이로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머리였다. 아까 떨어진 돌덩어리로 으깨진 그 머리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 있었다.
보트를레는 얼른 바깥으로 나왔다. 조금 후에 피욜 씨가 올라와서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수고가 많았네, 보트를레 군. 숨은 곳을 발견한 것 외에도, 두 가지 점에서 자네 판단이 옳았다는 걸 알았네. 첫째, 레이몽드 양이 쏜 사나이는, 자네가 처음부터 말한 대로, 확실히 아르세느 뤼팽이었어. 다음에, 그가 확실히 에티엔 드 보드레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어. 셔어츠에 E.V에라는 머리글자가 있었거든.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 어떤가?"
보트를레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자네는 내 말을 안 듣고 있나?"
"아니요. 듣고 있습니다."
피욜 씨는 계속해서, 시체가 뤼팽임에 틀림없음을 증명하려고 들었으나,
보트를레는 건성으로만 듣고 있었다. 거기에 백작이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하나는, 이튿날 셜록 홈즈가 이 곳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리는 편지였다.
"잘 됐다! 가니마르 형사부장도 오고, 이건 재미있겠는걸."
하고, 피욜 씨는 유쾌한 듯이 외쳤다. 그러고는 또 한 통의 편지를 읽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더욱더 잘 됐어. 이 양반들이 와도 별로 할 일이 없겠는걸. 보트를레군, 오늘 아침에, 바위 위에서 어부가 젊은 여자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디에프에서 알려왔군 그래."
보트를레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시체라고요...?"
"젊은 여자의 시체래.... 상처투성이여서, 오른팔의 부어오른 피부에 금팔찌가 박혀 있지 않았더라면, 신원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적혀 있어. 그런데 레이몽드 양은 오른팔에 금팔찌를 끼고 있었거든. 그러니 이건 분명히 백작님의 불쌍한 조카따님에 틀림없어. 어떻게 생각하나, 보트를레 군?"
"글쎄요.... 저로선, 모든 것이 맞아들어갑니다.
모든 사실이, 제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가정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난 잘 모르겠는데."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하십시오. 저는 4시나 5시쯤에 돌아오겠습니다. 학교는 할 수 없지요. 밤 12시 기차로 가지요 뭐,"
보트를레는 자전거를 집어 타고 떠나갔다.
디에프에 도착한 그는 <라 비지>신문사에 들러, 최근 2주일 동안의 신문을 조사했다. 그런 뒤에, 거기서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앙베르뫼 마을로 달려가, 면장과 사제 신부와 지서장을 만났다. 성당의 종이 3시를 쳤다 그의 조사는 끝나 있었다.
그는 신바람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되돌아옸다.
바다에서 불어 오는 거센 바람을 가슴에 담뿍 받으면서, 힘차게 페달을 밟고 있었다.
앙브뤼메지가 보였다. 그는 저택으로 총하는 비탈길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길을 가로질러, 가로수에서 가로수로 줄 하나가 처져 있는 것이 별안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보트를레의 자전거는 줄에 걸려 사정 없이 넘어져 뒹굴고 말았다.
요행히 돌더미에 부딪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보트를레의 머리통은 박살이 날 뻔했다.
보트를레는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난 뒤에 무릎 살갗이 벗겨지고 여기저기 멍든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른쪽으로 조그만 숲이 이어져 있었으니, 범인은 그리로 달아났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줄을 풀었다. 그런데, 줄이 매어져 있던 왼쪽 나무에 쪽지 하나가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는 그 것을 펴 보았다.
< 세 번째의, 그리고 마지막 경고! >
그는 저택으로 돌아와, 판사가 정해 놓고 일하는 1층의 방으로 갔다.
피욜 씨는 서기 앞에 앉아서 뭔가 쓰고 있다가, 서기를 내보낸 뒤에 소리쳤다.
"아니, 어떻게 된건가? 보트를레군? 손이 피투성이가 아닌가?"
"별 것 아닙니다.... 다만, 자전거가 이 줄에 걸려서 한바탕 굴렀을뿐입니다. 그런데 이 줄이 이집 세탁장의 빨랫줄이라는 걸 아셔야만 하겠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라고!"
"저는 여기서도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겁니다. 누군가가 여기서도 줄곧 저를 지켜 보고 저의 얘기도 엿듣고 있는 겁니다."
"정말 그럴까?"
"틀림없습니다. 그게 어떤 놈인지, 판사님께서 찾아 내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로선 약속했던 설명이나 해드리고 끝장을 내야겠습니다. 제게는 지금,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글세, 그것 참..."
"쳇! 두고 보십시오,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어쩃든 서둘러야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곧 정리해 버려야겠습니다. 크비용 반장님이 주워서 판사님께 드린 그 종이 조각에 관해서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으셨겠지요?"
"절대로 아무한테도. 하지만, 그런 것에 무슨 가치가 있겠나?"
"있고말고요. 그런데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아직까진 그 쪽지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보트르레는 갑자기 말을 끊고 판사의 손을 자기의 손으로 꼭 누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쉿! .... 누가 엿듣고 있어요. ... 밖에서..."
모래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보트를레가 창가로 달려가 내다보았다.
"벌써 사라져 버렸어요.... 그러나 꽃밭이 짓밟혔을걸요..."
그는 창을 닫고 돌아와 앉았다.
"보십시오. 적은 이제 조심조차도 않게 되었습니다.... 놈들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그는 그 종이 조각을 탁자에 펴 놓았다.
"이 종이엔 점과 숫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네 째 줄은 지금 문제가 안 되는 것 같고, 그 밖의 줄엔 5이상의 숫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다섯 개의 홑소리글자를 알파벳 순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결과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a.a..e..e.a.
.a..a...e.e. .e.oi.e..e.
.ou..e.o...e..e.o..e
ai.ui..e ..eu.e
"보시다시피, 이것만 가지곤 아무것도 알수가 없습니다. 이걸 푸는 열쇠는 매우 쉽고도 어렵습니다. 쉽다는 건, 홑소리를 숫자로 바꿔 놓고, 닿소리르 점으로 바꿔 놓기만 했을 테니까요. 그러니 매우 어렵긴 하겠지만, 불가능하지야 않겠지요"
"꽤 어렵다는 건 사실이야."
"그럼 풀어 봅시다. 둘째 줄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둘째 부분에서 점을 닿소리로 바꿔 놓고 보면, demoiselles(아가씨들)이란 낱말밖엔 그럴사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쉬잔과 레이몽드의 두 아가씨일까?"
"틀림없습니다."
"그 밖엔 모르겠지?"
"아니요. 마지막 줄의 한 가운데가 끊겨 있는 것을 실마리로 하여, 같은 식으로 알맞은 말을 찾아보면, 당연히 aigulle(바늘.첨탑)란 낱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옳아.... aigulle란 낱말임에 틀림없구먼..."
"이젠 마지막의 낱말인데, 처음의 두 글자가 닿소리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여기에 알맞은 낱말은 네 개가 있습니다. 즉, fleuve(강), preuve(증거), pleure(운다),그리고 creuse(속이 빈, 구멍 뚫린)입니다. 처음의 세 개는 aiguille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마지막의 creuse를 취합니다."
"그러면 aiguille creuse(구멍 뚫린 바늘, 속이 빈 첨탑)란 말이 되는군. 자네의 해석이 옳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나?"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더 두고 봐야겠지요.... 이 aiguille creuse라는 수수께끼같은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그보다도 더 주의하고 있는 건, 이 종이의 재료입니다. 지금도 이런 양피지를 만들어 내고 있을까요? 게다가 이 네겹으로 접은 데가 헐어 있는 점이며...., 특히 윗면에는 이렇게 빨간 봉랍의 자국이 있어요...."
이 때 보트를레는 얼른 말을 끊었다. 서기 브레두가 문을 열고, 검찰 총장이 갑자기 방문했다고 알렸기 때문이다.
"경찰 총장님께서 이 앞을 지나가시다가, 잠깐 한 마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서, 대문 앞에서 뵈었으면 하십니다."
"이상한데...."
하고, 피욜 씨가 중얼거렸다.
"어쨋든 가 보자, 보트를레군, 잠깐만 실례하겠네."
판사는 나갔다. 그러자 서기는 문을 닫아 잠그고는,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뭘 하는 거요?"
보트를레는 깜짝 놀라 외쳤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얘기하기가 더 좋지 않겠나?"
하고, 브레두는 대꾸했다.
보트를레는 옆 방으로 통하는 다른 문쪽으로 뛰어갔다. 보트를레는 그 순간 알아챘던 것이다. 공범은 바로 판사의 서기, 브레두였던 것이다!
브레두는 쌀쌀하게 웃었다.
"여보게, 젊은 친구. 그 문의 열쇠도 내가 갖고 있다네."
"그럼 창이 있다!"
"너무 늦었어."
브레두는 권총을 쥐고 창 앞에 버텨 서면서 말했다. 빠져 나갈데라곤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도 대담하게 탈을 벗고 나오는 적에 대해서는 스스로 몸을 지키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보트를레는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불안으로 가슴을 죄면서 팔짱을 꼈다.
"좋아, 얼른 끝내 버리자."
서기는 중얼거리면서 시계를 꺼냈다.
참으로 무섭게 생긴 사나이엿다. 마치 거미의 몸처럼 길고도, 가는 다리에 팔은 커다랗고, 몸통은 크고 동그란데, 얼굴은 우락부락했다.
보트를레는 다리가 막 떨리고 휘청거려 앉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해 봐라, 뭐가 필요한지를..."
"그 종이다. 사흘 전부터 찾고 있는 중이다."
"없다."
"거짓말 마라. 내가 들어왔을 때, 지갑 속에 넣는 걸 봤다."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우리를 귀찮게 굴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하란 말이다."
그는 여전히 권총을 겨눈 채, 보트를레에게 다가왔다.
그 힘찬 말투, 매서운 눈, 쌀쌀한 미소, 보트를레는 몸이 오싹했다.
보트를레가 진짜 위험을 느껴 본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놈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적이라는 느낌이 들엇다.
"또 다음엔?"
하고, 소년은 목멘 소리로 말했다.
"그 다음엔? 그뿐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브레두는 다시 입을 열었다.
"1분밖에 없다. 자, 결심해라. 서투른 수작 하지 말고... 어서 그 종이를 내놔."
보트를레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그의 바로 눈앞에는 새카만 권총 구멍이 열려 있었다. 구부린 손가락이 방아쇠를 꼭 누르고 있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어서 그 종이를 내놔, 그렇잖으면...!"
브레두는 되풀이 했다.
"옛다!"
하고 보트를레는 외쳤다. 그가 지갑을 꺼내 서기에게 내밀자, 서기는 얼른 그것을 낚아챘다.
"좋았어! 너도 그만하면 됐다 좀 겁쟁이지만, 상식은 있군. 자, 그럼 이만 실례한다. 그는 권총을 집어 넣고, 창의 자물쇠를 돌렸다. 이때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뛰어내리려다 말고, 지갑 속을 살펴보았다.
"이런 죽일 놈 같으니! 이 안엔 종이가 없잖아? 잘도 속였구나."
그는 이를 갈면서 다시 방안으로 뛰어내렸다, 두 방이 총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보트를레가 권총을 쏘았던 것이다.
"빗나갔다, 애송아!"
하고, 브레두가 소리를 질렀다.
"손이 떨리고 있지 않나. 무서운 모양이지?"
그들은 맞붙어 방바닥 위를 뒹굴었다. 밖에서는 누군지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이내 상대방에게 깔려 꼼짝 못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손이 칼을 치켜들었다가 내리쳤다.
바로 그 순간, 보트를레는 어깨에 고통을 느끼며, 그의 손은 축 늘어졌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의 저고리 안 호주머니를 뒤져 그 종이를 꺼내 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창을 뛰어 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여러신문은, 앙브뤼메지의 저택에서 일어난 최근의 사건들-예배당의 속임수, 아르세느 뤼팽과 레이몽드양의 시체의 발견, 판사의 서기 보레두에 의한 보트를레의 부상 등을 보도하고, 다음의 두 뉴스도 실려 있었다.
그것은 가니마르의 행방 불명과 셜록 홈즈의 납치사건이었다.
홈즈는, 런던 한복판에서 대낮에, 도버행 기차를 타려고 하다가 납치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뤼팽의 일당은, 17세 소년의 놀라운 지혜로 한때 무너질 뻔했다가,
또다시 되살아나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뤼팽의 두 강적, 홈즈와 가니마르는 제거되었다.
보트를레는 싸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이러한 적과 싸우기란 불가능했다.
기암성 (12)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뤼팽과 보트를레의 대결
그로부터 6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 - 그 날은 7월 14일(프랑스 혁명 기념일)의 전날이었다.
한 사나이가 객실에서 홀로 신문을 앞에 놓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굳센 얼굴 모습에, 기다란 금발의 젊은이였다. 좀 불그스름한 그의 턱수염은 그 끝이 짤막하게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옷차림은 영국 목사처럼 수수한데, 그 사람됨은 어딘지 모르게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그랑 주르날> 신문에는, 기다란 활자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이 금방 눈에 띄었다.
--- 우리 신문은 이지도르 보트를레 씨로부터, 그의 폭로 기사를 독점 게재키로 허가를 얻었다. 내일 수요일에, 우리 신문은 당국에서 알기도 전에, 앙브뤼메지 사건의 모든 진상을 발표할 것이다.---
금발의 사나이는 누군가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10시구나, 전보를 받아 보았다면, 곧 올텐데...."
이윽고,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그는 얼른 나가서 한 소년을 맞아들였다.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데, 얼굴은 매우 창백해 보였다.
그들은 한참동안 말없이 쏘아보고 서 있었다.
"고맙네, 보트를레 군."
금발의 사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내 편지를 받아보고, 진상의 폭로를 이 회견 뒤로 미뤄 준데 대해서, 그리고 이 회견에 기꺼이 응해 준 데 대해서 감사해야겠어."
"기꺼이라기보다도...."
하고, 보트를레는 씽긋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뤼팽씨. 그 편지 속의 협박은 내게 대해서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를 겨냥하고 있었으니 만큼, 더욱 효과적이었지요."
"별수가 없었네."
뤼팽도 웃으면서 대꾸했다.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써 봐야지. 나는 자네가 자신의 안전 같은 건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는 걸, 겪어 봐서 알고 있거든. 자네는 브레두에게도 반항을 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최후 수단은 자네 아버지뿐이었어..... 자네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 점을 이용했던 것뿐이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거지요."
보트를레가 대답했다.
"어쩃든 좀 앉게나, 보트를레군. 그리고 내 감사는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내 변명만은 거절하지 말아주게."
"변명이라니요? 왜요?"
"브레두가 자네에게 폭력을 쓴 데 대해서 말일세."
"사실 그건 나도 놀랐어요. 그건 평소의 뤼팽식의 행동은 아니었으니까요. 단도로 찌르다니...."
"그건 내 지시가 아냐. 브레두는 신입생이거든. 내 부하들이 일을 맡아 하면서, 그 판사의 서기를 우리 편에 끌어들이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들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요."
"사실 브레두는 특별히 자네만을 맡아 보게 했으니까. 그는 우리에게 귀중한 존재였어. 그런데 풋내기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빨리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좀 지나쳤던 거야. 그래서 자기 혼자 생각으로 자네에게 칼질까지 했기 때문에, 우리 계획도 잡쳐 버리고 말았다네."
"뭘요! 그까짓 건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 그래서 난 그 녀석을 톡독히 혼내 줬지. 하지만 그 녀석의 입장으로 보면, 자네의 조사가 자꾸만 진행되니까 당황했던 거지. 자네가 우리를 몇 시간만 더 가만히 있게 해 주었던들, 자네 역시 그런 변은 당하지 않았을 거야."
"그랬더라면, 나도 가니마르나 호움즈와 같은 운명을 당했을 거란 그런 말씀이죠?"
"맞았어. 어쨌든 자네에게 상처를 입힌 것을 알고 난 몹시 걱정했어. 오늘도 자네의 창백한 안색을 보니, 미안하기 짝이 없구만. 지금까지 나를 원망하고 있진 않겠지?"
"내가 만약 그럴 생각만 있었다면, 가니마르의 동료들을 얼마든지 데리고 올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를 믿고 이렇게 무조건 만나 주시니, 이제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나이의 싸움은 참으로 이상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더 이상 예의바를 수가 없었다. 뤼팽은 매우 침착했으며, 흥분한 빛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또다시 벨이 울렸다. 뤼팽은 얼른 문을 열러 나갔다. 그는 곧 편지 한 통을 들고 돌아왔다.
"잠깐 실례하겠네."
뤼팽은 그렇게 말하고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전보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읽었다.
그러더니 그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맑아지고, 몸은 꼿꼿해지고, 이마의 핏대가 부풀어올랐다. 그는 다시 투사가 된 것이다.
자신을 가지고, 사건과 인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는 전보를 탁자 위에 놓고, 그것을 주먹으로 쥐면서 외쳤다.
"자, 보트를레 군, 이제 우리끼리 정말 솔직한 얘기를 해 보세!"
보트를레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 보려는 자세를 취했다.
뤼팽은 침착한, 그러나 쌀쌀한 말투로 시작했다.
"탈은 벗어 던지세. 공연히 발라맞추는 짓거리도 그만두세. 우린 서로 상대방을 잘 알고 있는 적이야. 서로 적으로 행동하고, 적으로서 상대하세."
"적으로서요?"
보트를레는 깜짝 놀랐다.
"그렇지, 적으로서 상대하는 게 옳아. 그건 나로선 무척 괴로운 일이지만, 그리고 적에 대해서 괴롭다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말야. 그렇지만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세. 그러니 이런 기회를 잘 이용하란 말이야. 난 자네한테서 약속을 받지 않고선 여길 떠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있을 뿐이지."
보트를레는 더욱도 놀라 가지고 얌전하게 말했다.
"이건 참으로 뜻밖입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난 당신을 그런 분으론 도무지 생각지 않았는데요. 왜 그렇게 성을 내십니까? 협박인가요? 우리가 적이라니..., 왜 그렇습니까?"
"내 얘길 들어봐. 어떻게 말을 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하나의 사실에 있는 거야. 확실함,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사실에. 그건 말이야. 내가 최근 10년동안, 자네같이 강력한 적을 만나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야. 가니마르나 셜록 홈즈 따윈 어린애같이 대했었지. 그런데 자네에 대해선, 나는 늘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됐어. 아니, 그 보다도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됐단 말이야. 그래. 현재로선 내가 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이지도르 보트를레가 아르센 뤼팽을 이기고 있는 거야. 내 계획은 다 뒤집혀 버렸어. 내가 어둠 속에 감춰 두려고 애쓴 것을 자네는 다 밝은 데로 끌어내고 말았어. 자네는 내 방해만 하고, 내 길을 막아 버리는 거야. 정말 지긋지긋하다... 브레두가 자네에게 말했는데도 소용이 없었기에, 이제 내가 직접 자네에게 똑똑히 말해 두는 거야."
보트를레는 머리를 흔들었다.
"결국, 어떻게 하나는 겁니까?"
"가만히 있으라는걸세! 저마다 제 할 일이나 하라는 거지."
"다시 말해서, 당신은 마음대로 도둑질을 하고,
나는 나대로 그냥 돌아가서 공부나 하라는 건가요?"
"공부를 하든 말든, 자네 좋도록 하면 돼. 내겐 상관 없는 일이니까...
다만,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둬 달란 말이야."
"어째서 내가 그렇게 방해가 된단 말씀입니까?"
뤼팽은 보트를레의 손을 꽉 잡았다.
"잘 알고 있잖아! 모르는 척 하지 말아. 지금 자네는 나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쥐고 있어. 자네는 그 비밀을 알아 낼 권리는 있겠지만, 그것을 공표할 자격은 없잖은가?"
"내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암, 알고 있고말고, 나는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자네의 생각과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었어. 브레두가 자네를 습격했을 때, 자네는 모든 것을 말해 버릴 뻔했어. 그랬는데 자네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폭로하기를 늦췄던 거야. 그런데도 오늘은, 이 신문에 약속을 했겠다! 기사는 다 준비돼 있겠지. 그래서 내일은 발표가 될 것이고..."
"맞았어요."
뤼팽은 일어서서 한쪽 손을 흔들면서 외쳤다.
"결코 발표시키지 못할거야!"
"아니, 발표합니다!"
보트를레는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맞서서 쏘아보았다. 그러자 뜻밖이 힘이 보트를레의 온몸에 용솟음쳤다.
마치 그의 가슴 속에서 어떤 불꽃이, 새로운 감정, 대담함, 자존심, 투지, 모험심에 불을 질러 놓은 것과도 같았다. 한편 뤼팽도, 원수의 칼앞에 나선 결투자처럼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기사는 넘겨 줬나?"
"아직 안 넘겼소."
"지금 갖고 있나... 몸에?"
"그렇게 바보인 줄 아시오!"
"그렇다면?"
"겹봉투에 넣어서 기자에게 맡겨 놓았소. 내가 밤 12시까지 신문사에 가지 않으면, 그대로 인쇄하기로 돼 있소이다."
"이런 고약한 놈같으니! 선수를 쳤구나."
뤼팽은 화를 버럭 냈다. 이제는 보트를레도 승리감에 취하여, 조롱하듯 비웃었다.
"웃지 마라, 이 녀석아!"
하고, 뤼팽은 호통을 쳤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는 구나. 내가 하려고만 한다면... 이런, 웃고 있어!"
그들 사이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한참 후, 뤼팽은 한 걸음 걸어나가
보트를레의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랑 주르날> 신문사로 뛰어가라."
"싫소!"
"편집장을 만나라."
"싫소!"
"편집장에게, 기사가 틀렸다고 말해라."
"싫소!"
"다른 원고르 써라. 앙브뤼메지 사건에 관해서 세상에서 믿고 있는 대로 정식 발표해라."
"싫소!"
뤼팽은 택상 위에 있는 쇠자를 집더니, 그것을 뚝 부러뜨려 버렸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그는 이마에 구슬처럼 맺히는 땀방울을 씻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자기의 뜻에 거역을 당해 본적이 없는 그는, 이 젊은이의 옹고집에 쩔쩔매고 있었다.
그는 보트를레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려 놓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 다오, 보트를레. 마지막의 발견으로 내가 죽은 것을 확인했으니까. 이 점에 관해서는 조금의 의문도 없다고, 그렇게 말해 다오. 내가 그러기를 바라니까. 모두가 내가 죽은 줄로 알고 있어야만 해. 그렇게 말해야 해. 무엇보다도 네가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네가 만약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네 아버지는 오늘 밤에, 가니마르나 셜록 홈즈처럼 납치당할거다."
보트를레는 빙그레 웃었다.
"웃지 말고 대답해 보게."
"대답하지요. 거역하는 건 대단히 안됐지만, 난 얘기한다고 약속했으니까 얘기해야겠소"
"그럼 내가 말한 대로 얘기해."
"난 진실대로 얘기할 거요."
하고, 보트를레는 정색을 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런 건 당신이 이해 못 할지도 모르지만, 진실은 큰 소리로 말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기사는 내가 쓴대로 실릴 겁니다. 뤼팽이 살아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뤼팽이 왜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죽은 줄 알아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의 이유도 알게 될 것이고요."
그리고,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 아버지는 납치되지 않아요."
두 사람은 또다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서로 상대방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서 있었다. 한참 후, 뤼팽이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내일 새벽 3시에, 내가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내 부하 두명이 네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네 아버지를 끌어 내다가, 사니마르와 셜록 홈즈가 있는 곳으로 보내도록 마련돼 있다."
보트를레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반말지거리로 대꾸했다.
"하하, 선생께서 모르고 계셨구먼. 내가 예방책을 써놓았다는 것을! 그래, 내가 어리석게도 우리 아버지를 들판의 외딴 집으로 들어가시게 할 만큼 순진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나?"
오, 젊은이의 얼굴 위에 빛나는 유쾌한 웃음! 그의 입술 위에 떠오른 빈정거리는 웃음, 그리고 당당하게도 반말지거리를 함으로써 대번에 적과 같은 수준으로까지 뛰어오른 이 젊은이!
그는 계속 했다.
"알겠나, 뤼팽. 자네의 커더란 결점은, 자네의 계략이 늘 완전무결하다고만 믿고 있는 점이네, 자네는 스스로 내게 졌다고 말했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네! 결국, 자네는 언제나 자네가 이기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남들에게도 계략이 있다는 걸 잊고 있어. 내 계략이야 매우 단순한 것이지만 말야."
그의 말은 매우 시원스러웠다. 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사슬에 매인 사나운 짐승을 건드리고 있는 장난꾸러기 꼬마처럼, 씩씩하고 활달하게 방 안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정말 이 순간에야말로 그는, 이 대모험가에게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엄청난 복수를-세상에도 무서운 복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을 끝마쳤다.
"뤼팽, 나의 아버지는 사봐 같은덴 계시지 않아. 프랑스의 그 반대쪽, 어느 큰 도시의 한복판에, 20명이나 되는 우리 편 사람들에게 보호를 받고 계시다네,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나? 세르부르의 병기고의 한 직원 집에 계시다네. 거기는 밤이면 문이 닫히고, 낮에도 출입증을 갖고 안내인과 함께가 아니면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 곳이야."
그는 뤼팽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친구에게 얼굴을 찡그려 보이는 아이들처럼, 뤼팽을 잔뜩 약올렸다.
"더 할말이 있나, 선생?"
조금 전부터 뤼팽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서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행동으로 나오려는 것일까?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가지의 결말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즉, 적을 즉각 철저하게 쳐부순다는 것뿐이었으리라. 그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금세라도 보트를레에게 덤벼들어 목을 죌 것만 같았다.
"더 할말이 있나, 선생?"
하고 보트를레는 되물었다.
그러자, 뤼팽은 탁자 위에 전보를 집어 보트를레에게 내밀면서 태연스럽게 말했다.
"이봐, 아가야, 이거나 읽어 봐라."
보트를레는 상대방의 태도가 너무나도 부드러운 데에 갑자기 불안해져서 정색을 했다.
그는 그 종이를 폈으나, 이내 얼굴을 들고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첫 글자쯤은 알겠지. 전보를 보낸 곳의 이름말이다. 잘 봐라, 셰르부르란 것을..."
"그래... 그래...."
보트를레는 더듬거렸다.
"그래..., 셰르부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도 역시 명백하지 않으냐? '짐은 다 옮겼다. 친구들도 같이 떠났다. 아침 8시까지 기다림. 이상없음.' 그래 뭐를 모르겠단 말이냐? '짐'이라는 말인가? 쳇! '보트를레의 아버지'라고 쓸 수는 없지 않겠나? 그 다음은 또 뭐야? 어떤 방법으로 그런 일을 했나고? 20명이나 호위가 있었는데, 네 아버지가 셰르부르 병기고에서 끌려 나간 기적 말이냐? 쳇! 그런 것쯤이야 어린애 장난이지! 어쨌든 짐은 보내 놓았다. 어때, 할 말있니, 아가야?"
보트를레는 온몸을 긴장하고 죽을 힘을 다해서 태연스런 얼굴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떨리고, 턱은 씰룩거리고, 눈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슨 말을 좀 더듬거리는가 싶더니, 입을 다물고는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 아버님...아버님..."
이 뜻하지 않은 결과는 뤼팽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도 했지만, 한없이 감동적이고 순진한 느낌을 자아내게도 햇다. 뤼팽은 그렇게 울먹이는 모습을 차마 볼수가 없다는 듯이 모자를 집었다. 그러나 문 앞까지 가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 망설이다가, 천천히 되돌아왔다.
조용한 흐느낌 속에 , 소년의 두 어깨는 애절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뤼팽은 그 위로 몸을 구부리고 말했다.
"울지 마라, 아가야. 일단 싸움판에 뛰어든 이상, 이런 일쯤은 각오해야 돼. 힘을 내어 참아야지."
그 목소리에는 조금도 승리자다운, 사람을 모욕하는 듯한 데는 없었다.
뤼팽은 부드럽게 게속햇다.
"네 말이 옳아. 우리는 적이 아냐.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너에 대해서, 너같이 총명한 존재에 대해서, 어쩐지 호감과 감탄을 느껴 왔다. 그러니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아라. 하지만 이 말은 꼭 해두고 싶구나. 내게 맞서는건 그만두어라... 이건 허영심이나 경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너도 알겠지만, 싸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얼마나 무궁무진한 계책이 있는지 너는 잘 모르고 있다. 네가 알아 내려고 헛수고를 하고 있는 그 에귀유 크뢰즈(AIGUILLE CREUSE)의 비밀만 하더라도, 굉장한 무진장의 보물일지도 모르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희한한 은신처일지도 몰라... 내가 거기서 끌어 낼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생각해 보아라! 나는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수 있다는 걸 너는 모르고 있어... 그런데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승리를 잡았다고 믿는 순간에, 그것은 네게서 빠져 나가 버리고 만다. 제발 그만둬! 그렇지 않으면, 나는 부득이 너에게 고통을 주지 않을수 없게 돼. 그건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고는 보트를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이렇게 되풀이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가야. 그만둬 다오! 난 너에게 고통을 주고 싶진 않다."
보트를레는 얼굴을 들었다. 이제 울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결정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뤼팽에게 말했다.
"만약에 원고를 고쳐 써서, 당신이 죽은 것으로 한다면,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주시겠다고 맹세하시겠습니까?"
"맹세한다. 내일 아침 7시에, <그랑 주르날> 신문의 기사가 내 요구대로 돼 있으면, 내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를 풀어 드리겠다."
"좋아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보트를레는 말했다.
그는 얼른 일어나서 모자를 집어들고, 뤼팽에게 인사를 하고는 방을 빠져 나갔다.
뤼팽은 보트를레가 나가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가엾은 녀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