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정천맹주 1 오대산(五臺山). 산서성(山西省) 북동부에 있는 불교의 명산이다. 최고봉은 북대(北臺)의 두봉(斗峰)으로 삼천사십척(三千四十尺)이라 한다. 문수보살이 수도하던 청량산에 해당한다고 여겨져 불교의 사대영산(四大靈山)으로 꼽히는 산이다. 오대(五臺)란 중대의 취암봉, 동대의 망해봉, 서대의 괴월봉, 남대의 천수봉, 북대의 두봉을 말함이다. 십오야(十五夜)의 달빛은 오대산 전체를 골고루 비추고 있었다. 서대의 괴월봉의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 기암절벽이 무수하게 연이어 있는 장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은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천험(天險)의 절지, 때문에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인 간인 바에야 그곳에 오르기 전 재빨리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정천맹. 아직 날아오르지 않은 잠룡(潛龍))들의 심처. 중원 정파무림의 천하기재들이 모여 있는 중원의 마지막 남은 태양이 바로 정천맹이다. 아직 작은 하늘에 웅크리고 있는 잠룡들은 승천의 날을 기다리며 검을 갈고 있었다. 정천맹과 십 리 가량 떨어져 있는 숲 속. 구천광마는 마지막 점검을 하는 듯 뒤쪽으로 도열해 있는 무사들을 스쳐 보았다. 일천의 정예는 일당백의 전의와 살기를 불태우며 안광을 뿜어내어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 들었다. 또한 그 옆으로 도열해 선 마령검사 이백 명은 그 모습 그대로 만으로도 신앙 같은 믿음을 주었다. "일당백의 중원단 고수 천 명, 일 갑자의 내공과 공격 일변도의 가공할 악마의 검초만 시전 하는 마령검사 이백, 어떻소, 이 정도면 정천맹을 능히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의 옆에 서 있는 한령빙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들로 정천맹을 깨부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외다." 필사의 각오가 그의 눈빛 속에 있었다. 이미 구파일방은 거의 다, 무너졌다. 정천맹, 이들만 괴멸시킨다면 천하는 이미 그들의 손에 떨어진 것과 진배없었다. 당연히 그 들의 전의가 불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한 명의 흑의인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부복했다. 정찰병이었다. "정천맹은 쥐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아직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구천광마는 흉광을 빛내며 입맛을 다셨다. "기습이라…… 왠지 비겁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군. 그러나 저들의 존재를 완벽히 소 멸시켜야 본 천의 중원 군림이 가능한 일이다." 천하가 선물로 준비되어 있는 일. 하잘것 없는 이유 하나로 날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혈성추혼마는 뼈에 각인된 용해린을 떠올리며 내심 고개를 저으며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방해자만 없다면 일은 쉬울진대……." 그도 그럴 것이 꼭 그가 하는 일이면 놈이 나타나 방해했던 것, 놈의 모습을 보면 신물이 날 정도였다. 구천광마 수하들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각인시켰다. "모두 각오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결전은 우리의 사활이 걸린 일이라 생각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목숨을 걸고 정천맹을 날려 버린다." 수하들의 눈에 살기가 감돌고, 그것을 보며 구천광마가 나직하게 외쳤다. "가자!" 그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뒤를 따라 천 이백여 명의 흑의복면인들과 마령 검사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검은 벌떼들이 떼지어 날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대전, 양문룡은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의 뒤, 긴 탁자가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고 탁자를 마주 보고 제일 상석에는 천궁황 이 앉아 있고, 그의 뒤에는 양무룡이 서 있다. 천궁황의 평소와는 다른 침중한 모습은 또 다른 그의 일면을 보는 듯했다. 그는 연신 술 호 리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태껏 천패대공 용잠과의 약속에 따라 그는 정천맹을 일으켰고, 웬만큼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나 그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발검의 시간을 위해 달려왔건만 막상 상대를 앞에 둔 이 순간 그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백 년이 넘게 살았고 수많은 싸움을 치뤄 보았지만 우습게도 오늘만큼 긴장해 본 적이 없던 그였다. 탁자를 마주보고 세 사람이 같이 앉아 있었다. 천하의 천궁황과 동석하고 있는 세 사람, 두 명의 노인과 한 명의 노니(老尼)였다. 그들 세 사람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검(劍). 그들을 본다면 누구나 검을 보는 듯 여길 것이다. 그들은 검 자체였다. 평상시에도 검과 하 나가 되는 경지에 이른 인물들, 천하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오직 셋 뿐이었다. 십대고수의 삼검, 바로 그들이다. -제왕검(帝王劍) 초무극(楚武極). -천룡신검(天龍神劍) 공손수(公孫壽). -보타신니(普陀神尼). 검에 관한 한 더 이상 오를 것이 없다고 하는 인물들이었다. 가장 좌측에 앉아 날카로운 예기를 흘리는 백의노인. 그가 바로 제왕검 초무극이었다. 그의 성명절기인 제왕어룡검(帝王馭龍劍)은 십리 밖의 적도 베어 버린다고 알려져 있다. 천룡보와 함께 무림 이대 세력으로 일컬어지는 제왕검문의 문주이기도 했다. 제왕검문은 정 천맹의 총단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옆에 앉은 청의 노인, 그는 가슴까지 늘어진 하얀 수염에 붉은 홍안의 얼굴을 지 니고 있었다. 천룡신검 공손수였다 불문의 심후한 심공을 바탕으로 펼쳐내는 천룡항마검식은 웅장함에 있어서 천하제일이었다. 천룡보의 태상보주로 공손혜의 할아버지였다. 마지막으로 온화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노니, 검의 명가인 보타암(普陀庵)의 암주인 보타신 니였다. 그녀의 대자대비검식(大慈大悲劍式)은 수비식에 있어서 천하제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바로 정천맹의 호법들이었다. 앉은 순서대로 일호법이 제왕검 초무극이었고 이호법이 천룡신검, 그리고 삼호법이 보타신 니였다. 또한 이 자리에는 없지만 창해약선 담대우가 정천맹의 제사 호법이었다. 그는 지금 이 자 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양문룡은 오랜 시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혈마천에서 파견된 무사들은 천 명이 넘을 듯하며 곧 공격을 가해 올 것이라 합니다." 천궁황이 조용히 음성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양문룡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신중하게 말했다. "적들은 아마도 입구에 펼쳐져 있는 진을 파괴하고 들이닥칠 것입니다. 능히 맞부딪쳐도 정 천맹의 힘은 그들을 누룰 수 있으나 그리되면 우리측 또한 피해가 클 것입니다." "허면……?" 양문룡의 입술 끝이 살짝 말아 올려졌다. "공성계(空城計)를 쓰는 것이지요." 2 스스슷……!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자라 있지 않은 넓은 공지에 밤이슬 처럼 내려서는 수많은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의 앞에 선 인물. 흑의를 입고 전방을 살피는 그의 안광은 대기를 양단할 듯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는 바로 구천광마였다. 그의 뒤에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일천 이백의 혈마천의 고수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도열해 있었다. "음…… 이곳이 분명할진대……." 그들의 앞에는 넓은 국화 밭이 펼쳐져 있을 뿐, 정천맹의 성곽은 물론 모옥 한 채 보이지 않았다. 구천광마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다 갑자기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설마 저것은 천지마라멸겁진(天地魔羅滅劫陣)!"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천지마라멸겁진. 그것은 하늘과 땅을 가둔다는 전설의 진법이었다. 천지마라멸겁진에 갇히게 되면 극히 평범 한 인간이 돼버린다. 즉, 태초의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특히 마기(魔氣)를 부수는 데는 당금 어떤 진과도 비교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염라대왕만 데 려다 놓는다면 영락없이 진이 펼쳐진 곳이 지옥이라는 말이 들릴 만큼 진을 설치한 시전자 도 치를 떤다는 죽음의 절진이었다. "저 진세에 가려 정천맹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군." 한령빙마를 돌아보며 물어 오는 구천광마의 얼굴에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책이 없겠소?" 한령빙마는 그의 물음에 어이없게도 피식 살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이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진법을 파해할 수 없으면 파괴해 버리면 되는 것!" 자신감을 보이는 한령빙마가 손짓을 하자 뒤에서 두 명의 무사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왔다. "마종사뇌 군사가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보내준 벽력진천뢰(霹靂震天雷)요" "벽력진천뢰!" "그렇소. 군사께서는 정천맹에 다지문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만일 그가 진법을 펼 친다면 이것으로 그 진법을 깨부수라 했소." 혈성추혼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늘조차 무너뜨려 버린다는 벽력지천뢰! 그리 간단한 것을……!" 한령빙마가 작은 상자에서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흑구(黑求)를 꺼내어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잘 보시오! 이 벽력진천뢰의 위력을!" 휘익! 한령빙마의 손이 뿌려지자 벽력진천뢰가 암천을 가르며 국화밭으로 날아갔다. 웅후한 내력의 힘으로 날린 벽력진천뢰가 오색의 국화꽃이 피어 있는 꽃밭에 내리꽂혔다. 콰콰콰콰……쾅! 엄청난 폭음이 천지를 떨어 울리고, 국화잎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의 순간 이었다. 자욱한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으며 국화잎을 감추었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자 과연 정천맹의 모습이 드러났다. 수십 개의 고루 거각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높다란 성곽은 그 고루 거각들을 감 싸안 듯 둘러져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은 밤이 주는 음침함 때문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부족했 다. 그러나 벽력진천뢰로 죽음의 절진이라 불려지는 천지마라멸겁진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박살내 버렸다는 기쁨은 그들의 눈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혈성추혼마는 아직도 검은 연기를 피어 올리는 벽력진천뢰에 위력에 감탄 어린 얼굴로 한령 빙마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역시 하늘도 무너뜨린다는 벽력진천뢰요!" 구천광마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급히 수하들을 돌아보고 손을 앞으로 내저었다. "진격(進擊)하라!" 소리 없이 암천을 나는 야조처럼 일제히 일천 이백의 신형이 밤공기를 가르며 정천맹의 정 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구천광마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이 모두 어디에 갔단 말인가?" 혈성추혼마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잘못된 것 같소이다!" 구천광마 얼굴이 보기싫게 일그러지며 이를 갈아붙였다. "으으…… 공성계였군." 한령빙마의 송충이 같은 검미가 꿈틀거리며 역팔자로 치켜져 올라갔다. "그렇다면 놈들은 빈 성을 양보하고…… 우리를 포위했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의외로 똑똑한 말을 하는 놈이 누군가 했더니 무공에 미친 노물이었군." 스스스……! 한 인영이 어둠을 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구천광마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낯익었다. 천하십대고수중 일황이라 불리는 천궁황이었다. 천궁황이 앞으로 나섰다. 순간, 방원 백장 주위에 수백 명의 백의를 입은 정천맹 고수들이 검광을 번쩍이며 혈마천 무사들을 둘러쌌다. 달빛에 반사된 그들의 모습은 마치 반딧불처럼 반짝거렸다. 구천광마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으음……! 이런 일이…… 천궁황…… 네 놈이 정천맹에 몸을 담고 있었다니……."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나 두려워 할 구천광마가 아니었다. 구천광마는 급히 혈성추혼마와 한령빙마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공격하시오." 순간 구천광마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애라!" "와아아아……!" 그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혈마천의 무사들은 제각기 병장기를 뽑아 들고 살기를 불살랐 다. 정천맹의 무사들도 엄중한 신태로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문득 천궁황의 외침성이 일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 것이다!" 채앵……! 창창창……! 만월이 뿌려 대는 교교로운 달빛 속에 때아닌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불꽃이 암천을 대낮처럼 밝히며 혈전의 막이 올랐다. "늙은 거지, 네놈은 내 차지다!" 구천광마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검을 뽑아 섬전같이 내려그었다. 구천광마의 검에서 묵빛 기류가 스물스물 피어오르다 이내 한 줄기 묵광으로 변해 천궁황을 향해 쏘아졌다. 쏴아아앙……! 천궁황은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서며 한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마치 활을 쏘듯 나머지 한 팔 을 뒤로 당겼다. 그러자 그의 움켜쥔 주먹에서 활 모양의 강기가 구천광마를 향해 폭사되어 날아갔다. 슈가아아앙! 구천광마는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헉! 무형천궁시(無形天弓矢)!"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천광마는 급히 검을 내리그으며 강기를 쪼개갔다. 콰쾅! 동시에 그의 신형이 삼 장여쯤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구천광마는 수중의 검을 고쳐 잡으며 천궁황을 노려보았다. "흥! 그 동안 놀고 있지만은 않았군." 양무룡의 검은 가히 빛살과 같은 빠름이었다. 말 그대로 섬전(閃電)! 그의 검이 허공에서 번쩍일 때마다 여지없이 하나의 잘려진 목들이 밤하늘에 뿌려졌다. 그렇게 몇 명을 베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등을 파고드는 하나의 검이 있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회전시키며 뒤를 향해 검을 날렸다. 땅! 살이 베이는 섬칫한 감각의 소리가 아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검을 누군가 막은 것은……, 그는 자신의 검을 막은 적을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일개 수하가 나의 검을 막아내다니!" 그렇다. 그의 검을 막아낸 자는 아직까지 자신의 검에 목숨을 잃었던 자들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눈빛! 그들의 눈빛은 잿빛, 죽어 있는 눈빛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무조건 공격 일변도의 악마검식을 익혔다는 마령검사였다. 순식간에 상황이 돌변했다. 마령검사로 인해 지금 정천맹의 무사들도 어려운 국면에 빠져들고 있었다. 인성이 없는 자의 무지막지한 공격, 그것은 아무리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극한의 수 련을 쌓은 정천맹의 무사들이라 할지라도 움찔 뒤로 물러나게 하기에 충분한 두려움으로 작 용했다. 양무룡은 옆으로 물러서며 다시 마령검사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휙! 마령검사는 방어할 생각도 하지 않고 양무룡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왔다. 양무룡이 마령 검사의 옆구리를 도륙한다면 자신은 가슴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나 정천맹에서도 제일 검사로 불리는 양무룡이었다. 쾌검사(快劍士)에게는 달리 초식이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검을 틀었다. 틀어진 검의 방향은 바로 마령검사의 검극, 이어 마령검사의 검극을 살짝 튀겨 방향을 엇갈리게 한 다음 그는 그 힘을 빌어 마령검사의 팔목을 내리그었 다. 사각! 묵직한 느낌이 적의 손목을 베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툭! 쨍그랑! 마령검사의 베어져 나간 손목이 꿈틀거리자 그때까지 쥐고 있던 검이 달그락거리며 바닥에 서 소리를 냈다. 다시 그의 검이 마령검사의 목줄기를 파고들었다. "헛! 끄르륵……!" 마치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마령검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양무룡은 고개를 돌려 마령검사를 찾았다. 다른 무사들을 상대하기보다 마령검사를 상대하 는 것이 아군에게 피해가 적게 오는 것이다. 보타신니와 혈성추혼마의 싸움은 절정에 달했다. 혈성추혼마는 그의 독문무기인 혈성비표를 한꺼번에 십여 개나 날리며 보타신니를 공격했으 나 보타신니의 보법이 절륜한 데다 그녀의 검법이 사뭇 날카로워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기는 어려웠다. 마찬가지로 보타신니 또한 그에게 접근하기 어려운지라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커억……!" "크아악……!" 폐부를 후벼파는 듯한 비명성은 그칠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장내로 뛰어드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백여 명이 넘는 무리들의 선두 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해왕신검 해천웅과 백치 여인 해옥랑을 품에 안은 창해약선 담대우였다. 그들을 뒤따르는 이들은 해천웅의 수하들인 백팔수신위였다. 담대우의 진정한 신분은 네 명의 정천맹 호법 중 사호법이었다. 그런 신분이 있었기에 그는 용해린이 정천맹에 올 것을 알고는 처음부터 정천맹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담대우가 손가락으로 흑의인들을 가리키자 해왕신검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대해의 용사! 해왕신검이 너희들을 처단하겠다!" 외침과 함께 그의 검이 달빛에 반사되며 엄청난 빛무리를 뿌려댔다. "크억!" "켁!" 해천웅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혈마천의 무리들이 하나 둘 이승을 하직하고 있었다. 그의 수신위들도 전장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땅바닥은 이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일 각여가 흘렀다. 사방에는 죽은 시신들이 즐비했다. 양측은 실로 대등한 세를 유지하며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정천맹 쪽이 불리 해져 갔다. 그 이유는 마령검사들 때문이었다. 열 명이면 십대고수조차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그들이 가세하자 상황은 혈마천 쪽으 로 기운 것이다. 구천광마는 어느 새 전권을 물러나 있었다. 상대하고 있던 천궁황은 오십여 명의 마령검사 들을 붙여둔 채. 그는 장내를 둘러 보았다. 전반적으로 혈마천이 우위를 점해 가고 있었다. "흐흐, 일황과 삼검이 정천맹에 모두 웅크리고 있음은 확실히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혈마천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천궁황은 오십여 명의 마령검사들이 상 대하고 있었고 삼검은 혈성추혼마와 한령빙마와 더불어 오십여 명의 마령검사들에게 둘러싸 여 쉽게 몸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머지 백 명의 마령검사들은 전장을 휘돌며 닥치는대로 정천맹 고수들을 쓰러뜨리고 있었 다. 천궁황은 그런 모습을 보며 눈에서 불이 일었다. '으음, 혈마천에 제대로 대항해 보기도 전에 무너지려는가.' 쓰러지는 정천맹도를 뻔히 지켜보면서 그는 도와 줄 수가 없었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오십 여 명의 마령검사들을 상대하는데 몸을 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상황은 언제나 돌변하기 마련이다. 쿠아아앙……! 돌연 천지를 찢어발길 듯한 굉음이 울리며 시꺼먼 물체가 구천광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헉!" 돌연히 날아오는 물체에 구천광마는 기겁을 하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다음 순간, 그 물체는 보타신니와 싸우고 있는 혈성추혼마에게 날아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때마침 보타신니의 검이 그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헉!" 혈성추혼마는 경악성을 내질렀다. 동공이 점점 확대되며 그 물체의 모습을 확인했다. 거무스름하고 긴 몽둥이! '창룡노……!' 그는 대경한 나머지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창룡노는 이내 그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케엑!" '혈성추혼마는 피를 뿌리며 오 장여나 날아가서야 땅바닥에 널브러질 수밖에 없었다. 제길, 저놈과 나는 악연이었어. 사사건건 나의 일에 끼어들더니만…….' 이내 그의 고개가 꺾였다. 십대고수 중 사마는 이제 삼마만을 남겼다. "창룡노!" 혈성추혼마를 관통한 창룡노를 확인한 천궁황의 입에서 반가움에 사무친 듯한 환호성이 터 져나왔다. 그의 환호에 대답이라도 하듯 하나의 인영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용해린이었다. 그는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삼검을 포위, 압박하고 있는 마령검사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풍(風)―!" 일갈을 터트리며 주먹을 말아쥐며 앞으로 내질렀다. 천뢰권황의 천뢰삼권 중 일권이었다. 휘류륭―! 쾅! 쾅쾅! 권풍(拳風)이 난무하며 권풍에 격중된 마령검사들이 심장에 사발만한 구멍을 내며 나가떨어 졌다. "파(破)―!" 또 한 일갈이 터지며 용해린의 주먹이 휘둘러지자 둥그런 강기들이 무수하게 만들어졌다. 천뢰삼권의 이권이었다. 둥근 강기들은 그대로 마령검사들에 부딪쳐 갔다. 쾅! 쾅! 둥근 강기에 격중된 마령검사들은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삼검을 포위하고 있던 마령검사 오십여 명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으으……! 주먹만으로 마령검사들을 꿰뚫다니. 천뢰권황의 천뢰삼권이다. 무적해룡이 천뢰 삼권마저 지녔을 줄이야." 한령빙마가 부랴부랴 전권에서 물러나며 경악성을 발했다. 용해린이 펼치는 것이 천뢰삼권 임을 알아본 것이다. 맨주먹으로 천하제일인에 올랐던 천뢰권황의 무공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공포에 젖어들 때 용해린은 천궁황을 포위하고 있는 마령검사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온 몸에 뇌전(雷電) 같은 기운을 휘감고서 말이다. 번개의 신이 있다면 지금 용해린의 모습일 것이다. 온몸에 뇌전을 휘감고 있던 용해린이 다 시 주먹을 내뻗었다. "뢰(雷)―!" 콰콰콰―! 전신에 흐르던 뇌전이 주먹을 통해 마령검사들을 휘감았다. 콰츠츠츠……! 번개가 작렬했다. 그리고 장내에는 숯처럼 검게 그을린 시신들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실로 가공할 위력의 천뢰삼권이었다. "으으으……! 엄청난 위력이다." 구천광마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무적을 자랑하는 마령 검사들이 저리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용해린이 어느 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죽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오는 용해린, 하나 방금 전에 그의 신위를 본 구천광마는 웃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면서 용해린은 장난처럼 주먹을 휘둘러 댔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주위로 다가서던 혈마천 무사들이 수십 명씩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뢰권이 담긴 주먹이기에 어느 누구도 성하지 못했다. 모두 염라전 명부에 목숨을 등록할 수밖에. 어느 새 용해린은 삼십 장 이내로 가까이 다가들었다. 구천광마는 다급해졌다. "마령검사들은 모두 무적해룡을 공격해라!" 악을 쓰듯 남은 마령검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구천광마였다. 그의 명에 따라 정천맹을 공격하고 있던 마령검사들 백여 명이 모두 용해린에게 달려들었 다. "많을 수록 좋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용해린이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런 그를 향해 백 명의 마령검사들이 가공할 검기를 뿜어내며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카카카카! 사위를 메우는 가공할 검기였다. "아!" "멈춰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삼검의 두 눈에는 다급함이 어렸다. 아무리 천뢰의 무공을 익힌 무적해 룡이라 해도 동시에 달려드는 백 명의 마령검사들은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삼검이 용해린을 도우려 몸을 띄우려 했다. 하나 그들을 천궁황이 말렸다. "안심하게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니. 본 맹의 맹주가 그리 쉽게 당할 수야 없지 않은 가?" "아!" "그럼 저 아이가 용해린?" "음. 듣던대로 대단하구려." 삼검은 천궁황에게서 장래 맹주에 대해서 이야기만 들어왔다가 비로소 오늘 보게 된 것이 다. '해룡천왕의 무공에 고금제일인에 근접했다는 천뢰권황의 무공을 이었다니…… 맹주로서 전 혀 손색이 없다.' 삼검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용해린을 주시했다. 콰콰콰콰! 마령검사들에 포위된 용해린의 전신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기류가 흘렀다. 두 발을 어 깨 넓이로 벌리고 선 그는 두 팔마저 활짝 펼친 상태였다. "멸절(滅絶)―!" 한소리 거대한 외침과 함께 그는 주먹을 말아 쥐고는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굉렬하게 부딪 쳤다. 콰아앙―! 굉량한 굉음이 두 주먹이 부딪친 곳에서 터졌다. 그 순간 부딪친 주먹에서 생성된 가공할 기운이 물결이 넓게 퍼지듯 퍼져나가며 마령검사들을 휘감았다. 콰콰콰콰! 주변의 땅거죽들이 갈라지며 산산히 부서진 가루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천뢰권황이 말년에 천뢰삼권의 정화를 모아 만든 멸절이라는 초식의 가공할 위력에 마령검 사들이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가루로 화한 것이다. 실로 전대미문의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충격의 여파는 용해린을 멀리서 포위해 들던 혈마천의 삼백여 무사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 다. "으으으……! 인간도 아니다." 구천광마는 전율에 휩싸이며 할 말을 잃었다. 한령빙마가 그를 일깨우지 않았다면 계속 그 렇게 멍하니 있었을 것이다. 구천광마 곁으로 한령빙마가 몸을 날렸다. "철, 철수합시다." 그 말을 하는 한령빙마도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전신을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구천광마가 전장을 돌아 보았다. 장내는 어느 새 혈마천의 무사들이 전멸 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용해린의 가공할 신위에 고무된 정천맹 무사들이 폭풍의 기세로 혈마천 무사들을 몰아붙이 고 있었다. 혈마천의 세력은 순식간에 삼분지 일로 줄어들었다. 구천광마는 다급히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철수한다!" 그 말을 하는 그의 몸은 벌써 밤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겠다는 듯.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살아남은 혈마천의 무사들이 분분히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 며 밤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더 이상 그들을 뒤쫓을 필요는 없었다. 살아 돌아간 적은 채 삼할도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정천맹의 손실은 전체의 일할도 되지 않았다. 용해린이 적절한 시기에 도착해 마령검사들을 격퇴했기 때문이다. 3 "시신을 옮기고 부상자를 파악하여 빨리 치료해라." 천궁황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담대우와 해천웅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사호법. 마침 때맞춰 와 주었네. 부상자가 이리 많으니 할 일이 태산이네." 천궁황은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대협은 뉘시고, 또 안고 있는 아리따운 처자는……?" 담대우가 말했다. "이 분은 해왕맹의 부맹주 해왕신검이시고 저 옆의 소저는 맹주의 따님이신 해옥랑소저입니 다." 천궁황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오! 해대협이시군요. 익히 대해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본인은 정천맹의 태상호법을 맡고 있 는 천궁황이라 하외다." 해천웅이 포권을 취하며 호방하게 말했다. "익히 명성을 들었습니다만 오늘 보신 무위는 진정 명불허전(名不虛傳)이외다." "별말씀을…… 그런데 듣자 하니 해옥랑소저는 신주오룡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하던 데……." 담대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용맹주를 뵙고 말씀드리지요." 해천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맹주라니……? 무적해룡을 말하는 것인가?' 그가 의아해 할 때 용해린은 창룡노를 어깨에 메고 그들에게로 오고 있었다. 정천맹도들은 경이의 시선과 존모의 뜻을 담고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용해린의 뒤를 따라 그제서야 도착한 진천유개 만자량과 공손혜가 따르고 있었다. 용해린의 걸음이 천궁황의 앞에서 멈춰 섰다. 두 사람의 눈이 부딪쳤고 이내 용해린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소질 용해린이 삼가 백부님을 뵈옵니다." "허헛! 그래, 네가 수고했구나." 천궁황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용해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났으나 서로를 알 수가 있었다. 천궁황은 용해린의 모습에서 의제인 천패대공 용잠의 모습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십 년 동안 혼자서도 대견하게 컸구나." "모두가 두 분의 염려 덕분입니다." "녀석!" 용해린을 다독거리던 천궁황이 이내 몸을 틀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분주히 시체와 부상자를 치우고 있는 정천맹의 모든 무사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모두 들으라! 맹주께서 도착하였다!" 순간 모든 무사들이 용해린을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웅후한 외침을 토했다. "제마멸사(制魔滅邪)!" "마불승정(魔不勝正)!" '맹주? 맹주라니?' 돌연한 상황에 용해린은 미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맹 주라 하다니. 그는 급히 천궁황을 돌아 보았다. "백부님, 이게 어인 일입니까? 맹주라니요?" 천궁황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중원의 힘이 모아진 정천맹은 본디 혈마천을 상대하기 위해 자네 아버 지와 내가 만든 것, 그러나 지금껏 맹주의 자리가 비어져 있었네. 맹주감을 찾지 못한 것이 었지. 하나 이제는 그 맹주를 찾았지. 천하를 뒤져도 너만한 맹주감도 없지." "백, 백부님!" 용해린이 당황해 천궁황을 불렀다. 하나 그는 모른 체 했다. 처음 정천맹을 만들 당시 천궁황은 맹주의 지위를 용해린을 염두에 두었었다. 그의 무적해 룡의 명성이 개방을 통해 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도 다 그 일의 일환이었다. 용해린은 할 말을 잃었다. 장내의 정천맹 무사들은 하나같이 존모의 표정으로 그를 우러러 보고 있었다. 방금 전에 보 여준 가공할 신위는 그들을 단 한 번에 사로잡을 만한 것이었다. "맹주가 너무 조용하군.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주거라!" 천궁황의 말에 용해린은 장내를 다시 둘러보며 할 수 없이 손을 흔들었다. "와아!" "맹주만세! 정천맹만세!"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이어졌다. 얼떨결에 그는 정천맹의 맹주직을 받아들인 것이다. 장내는 어느 새 안정되고 뒷처리에 분주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세나." 천궁황이 사람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해천웅이 용해린에게 다가오며 반갑게 말했다. "용공자! 그 동안 건강하셨는가?" "부맹주께서는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해천웅이 손가락으로 담대우를 가리켰다. 용해린의 시선이 손가락 끝을 향했다. "약선어르신, 그런데 저 여인은…… 해옥랑?" 용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해왕맹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중원에 들어와 있는지를 알 리가 없었으니. 해천웅이 천궁황에게 달려가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천궁황이 고개를 끄덕 이자 해천웅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용해린 앞에 다가왔다. "나를 따라오게나." 용해린은 영문도 모르게 해천웅을 안내하는 한 무사를 따라 정천맹 안의 한 건물로 들어갔 다. 그의 뒤를 해옥랑을 안은 담대우가 따르고 있었다. 공손혜는 멀건히 용해린의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또…….' 할아버지 공손수의 품에 안겨 있던 그녀의 두 눈이 커져 있었다. '저 여인도 혜린오빠의 여인인가……? 순 바람둥이! 도대체 몇 명이나 더 있는 거야?' 아늑한 분위기가 풍겨져 나오는 침실. 하나의 탁자를 마주보고 해천웅과 담대우, 그리고 용해린이 마주 앉았다. 담대우의 말을 들은 용해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까지 기억을 못 찾았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모든 내상과 외상은 치료되었지만 옥랑소저의 기억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 "음."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는 혈마천의 저지를 무수히 받아 왔네. 그때마다 옥랑 소저는 끊임없 이 기절했었네. 싸울 때마다 그녀를 깨어 있게 한 이유는 충격요법 때문이네." "충격요법이요?" "그렇지. 그것이 마지막 방법이지." 자신들이 공격받을 때마다 해옥랑을 보게 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상황을 계속 떠오르게 하는 것. 그렇게 해서 해옥랑의 기억을 되살리려 하는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재 해옥랑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 서 그녀가 기억을 잃기 전 마지막에 보았을 용해린의 얼굴을 본다면 혹 기억을 되찾지 않을 까 하는 것이 담대우의 생각이었다. 담대우는 그간의 사정을 다 얘기했다. 해천웅이 굳어진 얼굴로 용해린을 돌아 보았다. "이제 옥랑이는 잠시 후 깨어날 것이니, 무적해룡 그대가 알아서 하시오." "그런 일이……." 용해린이 무어라 하려 할 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모든 것을 용해린에게 떠맡긴 채로. 고개를 흔들던 용해린은 이내 해옥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치가 되어 그의 손에 이끌려 해왕맹으로 갈 때는 그래도 아주 건강했었다. 하나 지금은 눈에 띌 정도로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할 수 없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그는 담대우가 건 해옥랑의 수혈을 풀었다. 그렇게 시간이 약간 흘렀을 때였다. 문득 해옥랑이 뒤척이더니 조용히 눈을 떴다. 그건 백치의 눈빛이 아니었다. 혜지가 가득하고 정기넘치는 해옥랑 본래의 눈빛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전혀 낯선 곳에 자신이 와 있음을 안 것이다. "……!" 그러다 문득, 방 안에 그녀 자신 말고도 또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낀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려졌다. 용해린의 모습이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박히듯 들어왔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용해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순간. 주르르륵! 용해린을 보는 해옥랑의 눈에서 주르르 두 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해소저……!" 용해린은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순간. 배시시……! 해옥랑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실로 눈부신 미소였다. 기나긴 어두운 통로를 통과하고 비로소 맑은 햇빛을 본 사람의 해맑은 미소였다. 그렇다. 그녀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다. 혈마천이 그녀를 죽이려 무수한 고수들을 파견했고 해천웅과 담대우는 그 난관을 뚫고 나왔 다. 그런 와중에 그녀의 정신은 현실과 꿈에서 끊임없이 오락가락하게 됐었다. 그리고 그 얽히고 설킨 혼돈의 상황이 용해린을 보게 되면서 명확해진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진정으로 아름다웠다. "전, 아주…… 오랜 꿈을 꾸었던 것 같군요." 백치의 목소리가 아니라 해옥랑 본연의 목소리였다. 또한 이전의 남자 같은 굵은 목소리가 아니라 여성스러움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용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대는 잠시지만 아주 오랜 악몽을 꾸었소." "그러나 너무나 생생히 남아 있는 꿈이에요." 해옥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용해린을 주시했다. "고마워요." "무엇이 말이오?" "그 오랜 악몽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되었던 건 그대의 얼굴이었어요." "아!" 용해린은 낮게 탄성을 발했다. 해옥랑은 용해린을 뚫어질 듯 쳐다 보았다. "그리고……." 해옥랑이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볼에 언뜻 붉은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앞으로도 저의 빛이 되어 주길 바라겠어요." "예?" 용해린의 두 눈이 커졌다. 해옥랑의 말은 그녀 자신의 일생을 용해린에게 맡긴다는 얘기였 기 때문이다. "소, 소저!" 용해린의 말을 해옥랑이 끊었다. "다른 말은 말아요. 그리고,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해서 안된다는 말도 하지 말아요. 그런 것 에 연연할 이 해옥랑이 아니니." "난 책임져야 할 여인이 한둘이 아니오." 그러나 해옥랑은 상관하지 않았다. "무얼 새삼스럽게 그래요?" 어느 새 해옥랑의 말투가 바뀌었다. 이전의 바다에서 처음 만났던 때 그 당당하던 목소리로. "둘이나 열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난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다만 당신의 마음에 내 가 들어갈 자리만 있으면 되요." "허어……." 용해린은 할 말을 잃었다. 또 다른 여인이 그의 여인으로 다가든 것이다. 싫은 것은 아니었 다. 처음 마룡방을 단죄하러 갈 때 보았던 그녀의 영상은 그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었고, 그녀 를 신주오룡에게서 구했을 때와 백치가 된 그녀를 해왕맹으로 데리고 갈 때 이미 그녀는 그 의 가슴 한 구석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정해진 일이었어.' 그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맹주께서 난리를 치시겠구려." "걱정 말아요. 아버님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실 것이니." 용해린이 자신을 허락하자 해옥랑은 입가에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리 와요." 와락! 해옥랑이 그를 바싹 끌어당겼다.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거에요." "읍!" 졸지에 그는 그녀에게 입술을 허용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강렬하게 붙었다. 해옥랑은 격렬하게 용해린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의 혀가 얽혔다. "허허! 맹주, 축하하외다. 장래 천하제일인을 조카사위로 맞이하시게 되셨으니." "모든 것이 담어른의 덕분이외다." 안에서의 결과를 밖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던 해천웅과 담대우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해옥랑이 잃었던 기억을 찾은 것은 물론 두 사람이 맺어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해천웅이 담대우에게 포권을 취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외다." "허허, 제게 부탁할 일이 아니고 황아에게 부탁해야겠지요." 근 한달 동안 붙어 다니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담대우의 손녀인 담황아와 용해린과의 관계도 잘 아는지라 해천웅이 그러한 말을 한 것이다. 해옥랑이 나이가 두 살 많다 하더라도 십 년 넘게 용해린과 사귀어온 담황아에 비할 수는 없었다. 방 안에서 들려 오는 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발걸음들을 옮겼다. * * * 쾅! 무림이 뿌리째 뒤흔들리는 일이 벌어졌다. ―여의총(如意塚)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여의총에는 고금십병의 수위를 다투는 신병 여의가 감추어져 있다고 했다. 아수라혈과 더불어 하늘의 힘마저 거역할 수 있다는 역천쌍병 중의 다른 하나였다. 여의. 그 형태나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것은 그러나 무림사가 시작된 이래로 꾸준히 이어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그것이 묻혀 있는 곳이 여의총이었다. 게다가 여의총에는 상고의 절대 무공 비급들과 구파일방의 진산 비급들까지 소장되어 있다 고 전해졌다. 지금 그 여의가 잠들어 있다는 여의총이 발견된 것이다. 그 충격적인 소문은 밤 사이에 천하에 널리 퍼져갔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소문을 퍼뜨리 는 것처럼. * * * 그 다음 날 아침, 십대고수의 일옹으로 불리는 곤륜일옹이 곤륜산의 영물인 대독응(大獨鷹)을 타고 정천맹에 나타났을 때 정천맹은 때아닌 홍역을 앓아야 했다. 곤륜일옹의 손녀가 혈마천에 납치됐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독응곡(獨鷹谷)의 모든 대매들과 수하 무사들을 이끌고 날아왔던 것이다. 정천맹의 대전, 긴 탁자에는 정천맹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집결해 있었다. 태상호법 천궁황. 일호법 천룡신검 공손수. 이호법 제왕검 초무극. 삼호법 보타신니. 사호법 창해약선 담대우. 총군사인 다지문성 양문룡은 탁자 앞에서 회의를 주최하고 있었고 자전신룡 양무룡이 그를 호위하듯 뒤에 서 있었다. 정면의 탁자 위에는 어젯밤 맹주직에 오른 무적해룡 용해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납덩이를 삼킨 듯이 무거웠다. 그 이유는 하나. 구파일방이 간밤에 거의 괴 멸될 지경까지 갈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전서구을 통해 날아왔기 때문이었 다. 다지문성 양문룡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화산을 제외한 구파일방이 어젯밤 혈마천이 심어 놓은 간자들의 손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 을 입었다고 합니다. 구파일방의 세력은 이미 봉문(封門) 직전이며 그들은 다시 세력을 확장 하기 위해 역천쌍병 중 여의가 묻혀 있다는 여의총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좌중은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룻밤 사이에 그 소문이 천하에 퍼졌다는 것은 혈마천이 본 정천맹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천하에 퍼뜨린 것이기에 실로 무수한 함정이 있을 것입니다만 무림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 른 채 여의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현재 천하의 뭇 고수들과 은거 고인들까지 여의총으로 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으음. 심각하군." "여의총에서 실로 피 튀기는 살상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고, 그리 되면 실로 무림의 크나큰 손실이 되겠구먼." "막아야겠지." 양문룡이 좌중을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침에 곤륜일옹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는 따님을 납치한 흉수들이 남긴 한 장의 서찰 때문 입니다. 서찰에는 딸을 찾고 싶으면 여의총으로 오라는 말만 남겨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곧 우리들도 여의총으로 가는 바, 그 이유는 혈마천에 역천쌍병의 하나인 아수라혈이 있다 는 보고 때문입니다." "악마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격이군!" "아수라혈을 상대하려면 여의는 반드시 맹주께서 얻으셔야 하겠군!" 좌중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양문룡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보고에 의하면 혈마천의 일천 혈왕마군을 비롯한 주 세력이 여의총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 다. 그것으로 보아 혈마천은 여의총에서 천하의 향방을 결정하려는 의도인 만큼 본 맹도 모 든 전력을 투입해 혈마천과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겨룰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말을 끝내고 양문룡이 용해린을 돌아 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용해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가올 이번의 대전(大戰)은 앞으로 천 년의 천하의 향방이 걸린 일이니 만큼 반드시 이겨 야 합니다." 용해린은 좌중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힘주어 바라 보았다. "정(正)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맹주님도 옥체 보중하시기를." 정천맹에서 수천의 무사들을 태운 수천 마리의 대독응이 하늘로 떠올랐다. 목표는 여의총이었다. 바야흐로 천하의 향방이 걸린 마지막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