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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제458호
못난 남편 만나 고생이 많았소. 다른 사람에게는 모나게 굴지도 못하면서 당신에게만 모나게 굴어 미안하오. …포천에 와서 휴가 한 번 제대로 갔다 오지 못하고 쉬는 날 누구에게 화내지도 못하고 내 스스로 이를 삭이느라 술을 먹어야 했소. …내가 없더라도 쭛쭛이(아들), △△이(딸)를 잘 대해주오. …당신에게 정말 할 말이 없소. 미안하다는 말 이외엔.”
경기 포천시 여중생 살인사건의 담당 형사로, 사건 해결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10월16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포천경찰서 강력 1반장 윤석명 경사. 그의 유서에는 평소 다정다감하고 따뜻했던 그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딸 아들의 이름을 세 번이나 이어 적으며 이들의 행복을 비는 아버지였고, 노모가 자신 때문에 충격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들이었으며, 유서의 시작과 끝을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메울 만큼 정 깊은 남편이었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윤경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울 뿐”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다정다감한 면모 유서에 담겨
윤경사가 주위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10월11일. 그의 경찰관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포천서 형사계장 이모씨에게 “뒷머리가 당겨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게 마지막이었다.
부인 안모씨와 연락이 끊긴 것도 그날이다. 남편을 마지막으로 보던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안씨는 남편과 연락이 끊기자 바로 이동통신사를 찾아가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요청했다. 하지만 대답은 “개인정보를 유출할 수 없다”는 거절이었다. 12일 포천경찰서장의 확인서를 들고 다시 찾아가 부탁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락 두절 상태가 이어지자 동료 경찰관들은 혹시 사고가 난 것이 아닌가 싶어 주변 병원들을 뒤지기 지작했고, 안씨는 경찰청의 확인서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렇게 닷새가 흐른 뒤, 결국 윤경사는 등산로에서 제초제를 마신 채 숨져 있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아직 남편을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안씨는 “15일 경찰청의 확인서를 들고 가니 비로소 휴대전화 위치추적 결과를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전원이 끊긴 장소가 내 근무처인 포천우체국 근처였다. 남편이 죽기 전 바로 내 곁에 왔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무너져내렸다”며 “혹시 사라진 날 바로 위치추적을 했다면 그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오열했다.
수사 이후 매일 자정 넘어서야 귀가
윤경사의 죽음이 많은 이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까닭은, 그가 ‘과묵하고 책임감 강한’ 전형적인 형사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이죠. 현아(포천 여중생 살인사건 피해자)가 없어지고 한 달이 지나도록 행방을 모르던 때였어요. 경기지방경찰청에서 지원 나온 형사랑 같이 수사를 시켰는데, 밤 11시가 넘어 들어온 그 형사가 다시는 윤경사랑 같이 일 안 하겠다고 투덜대는 겁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커피 한 잔을 안 마신다는 거예요. 지금 현아 부모는 딸 생각에 잠 못 이루고 있을 텐데 한가하게 몸 녹일 시간이 어디 있냐고, 오히려 쏘아붙였다고 하더군요. 그 말 듣고 윤경사를 보니 코가 꽁꽁 얼어서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어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힘들다’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저 묵묵히 자기 책임만 다하는 친구였어요.”(포천서 김종욱 수사과장)
김종욱 과장은 윤경사의 죽음 이후 사흘 밤을 꼬박 새우며 빈소를 지켰다. 18일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담배를 피워 문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날이 많아졌다. 강력반 최고참으로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경사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경사는 키 175cm, 몸무게 80kg의 건장한 체격. 82년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 몇 년을 제외하고는 죽 강력반 형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동기들에 비해 승진은 늦었지만, 각종 무술에 능하고 겁이 없어 범인 검거 실적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가 특히 역점을 기울인 일은 여학생 강간 사건이었다. 중학교 1학년 딸을 키우는 아버지였던 윤경사는 지난해 경기 포천 일동에서 여중생, 여고생들만을 골라 잇따라 강간한 전과 5범을 잡고 나서 “이제야 두 발 뻗고 자겠다”며 홀가분해했다고 한다.
“형사는 감정이입이 없으면 범인한테 덤벼들 수가 없어요. 살인사건을 보면서 ‘뉘 딸이 죽었나’ 하면 무슨 분노가 일겠습니까. 누구 하나 없어지면 다 내 딸 같고, 누가 험한 일 당하면 내 동생한테 무슨 일 생긴 것 같고 해야 이 일을 할 수 있지요. 윤경사는 여학생 상대 범죄를 볼 때마다 모두 자기 딸 일처럼 가슴 아파했어요.”(동료 형사)
윤경사의 부인 안씨도 “남편은 현아 수사가 시작된 뒤 거의 매일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는데, 피곤한 얼굴로 들어왔다가도 잠들어 있는 딸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현아 죽인 놈을 빨리 잡아야 하는데’ 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거친 형사였지만, 평소의 그는 누구보다도 마음 여리고 가정적인 남자였던 것이다.
동료들 사이에서 윤경사는 ‘현찰맨’으로 불렸다. 신용카드 한 장 없이, 현금과 직불카드만 쓰는 그를 짐짓 놀리는 별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늘 바깥 생활을 하느라 고3 아들, 중1 딸과 더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박봉의 경찰관 살림에도 윤경사가 30평대 아파트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알뜰’했기 때문이다. 그는 집에서만큼은 힘든 바깥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고, 부인과 자식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기만을 바랐다.
가정적이고 과묵하던 그가 미궁에 빠진 수사 사건의 책임자로서 받았을 스트레스의 강도가 어땠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이 사건에는 언론과 여론의 관심이 온통 집중돼 있었다.
윤경사의 처남 안모씨는 “사건을 맡은 뒤 머리가 많이 세고,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말수가 적은 사람인데도 ‘사건이 해결되지 않아 힘들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기억했다. 동료 형사들도 “형사가 주위의 관심이 몰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날 만큼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게다가 강력반 경력만 10년이 훌쩍 넘는 베테랑이었으니, 자존심과 명예의 손상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윤경사의 안타까운 죽음은 사건 발생 1년여가 넘도록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는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환기했다.
사건 피해자 엄현아양은 2003년 11월5일 오후 6시16분쯤 포천시 소흘읍 추산초교 후문에서 친구와 헤어진 뒤 집으로 향했다. 이미 해가 진 뒤라 거리는 온통 컴컴했다. 엄양은 1분 뒤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고, 오후 6시18분에는 엄마와 휴대전화로 통화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6시19~20분 사이 엄양의 휴대전화전원은 분리됐고, 그 후 94일 만인 2004년 2월8일 그는 포천의 한 도로변 배수로에서 알몸의 시신으로 발견됐다. 심각하게 부패된 채 버려진 시체의 손톱과 발톱에는 서툰 솜씨로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꼭 범인 잡겠다” 동료들 결의 다져
마치 영화 ‘살인의 추억’을 모방한 듯, 배수로에 시체를 숨기고 종이상자로 가려놓은 범행 현장에 여론은 경악했고, 언론은 ‘신(新)살인의 추억’이라며 들끓기 시작했다.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의 시작이었다.
윤경사는 아직 엄양의 시체가 발견되기 전인 ‘실종사건’ 당시부터 이 사건의 담당 반장이었다. 그는 40여명의 특별수사본부 형사와 함께 저인망식 수사를 벌였다. 현장 수색에 연인원 6000여명이 동원됐고, 휴대전화 통화내역 2만3000여건, 차량 2300여대, 종이상자 300여개 등에 대한 범죄 연관성 수사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포천 보험설계사 살인사건 등 3건의 살인사건이 해결됐지만 엄양 사건의 범인만은 잡히지 않았고, 윤경사는 형사로서의 허탈함과 부담감을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
“경찰관 생활 20여년 동안 이렇게 깜깜한 사건은 처음이었어요. 제보 한 건 없고, 심지어 장난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지요. 여성을 상대로 한 동일 수법 전과자와 변태성욕자, 인근 공사장의 인부까지 범죄 개연성이 있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훑으며 찾아헤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고, 담당자들은 지쳐간 것이죠. 하지만 이제는 거의 다 찾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잡을 수 있어요. 그것도 머지않은 시간 안에요.”(포천서 김종욱 수사과장)
김과장은 “수사 내용이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이제 초기 수사 대상 가운데 80% 정도의 잔가지는 떨어냈다. 남은 20%를 압축하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초기 언론에서 의혹을 제기했던 인근 공단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배제한 것 등이다. 엄양은 절대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타지 않았고, 동생에게도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여러 번 일러두었을 만큼 조심성이 많은 학생이었다. 게다가 외국인 노동자 강간범은 보통 1회 강간 후 도피하는 행태를 보이지, 낯선 이를 살인까지 하지는 않는다.
김과장은 “초기에는 무동기 범죄가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 사건의 시작과 끝, 원인과 과정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연말 안에 꼭 범인을 잡아 윤경사 영전에 사진을 가져다놓겠다”고 다짐했다.
윤경사의 죽음 앞에서 동료 경찰관들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넘어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강력반 형사들은 “죽음과 부상 늘 곁에 … 남의 일 같지 않아”
“비보를 접하고 한숨을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받았는데도 말 없이 울기만 한다. ‘괜찮아. 사고 난 곳은 다른 데야.’ 그래도 계속 운다. ‘괜찮대두. 난 안 죽어.’ 한참을 울더니 이렇게 말하더라. ‘오빠야, 내가 돈 벌어올 테니까 경찰관 그만두면 안 돼?’ 귀여운 우리 여우 마누라. 전화를 끊고, 끊은 지 두 달 된 담배를 빌려 하나 피워 물었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전기가 나를 찾는다. 술 마신 사람 둘이서 싸우고 있다고 한다. 무섭다. 정말 무섭다. 출동하기 싫다. 하지만 기어를 넣고 달린다. 우리 여우 얼굴이 떠오른다. 나… 안 죽을 게… 절대로.”
경찰관 순직사건 뒤 한 일선 경찰관이 인터넷 통신망에 올린 글이다. 언제나 죽음의 위협과 맞서 싸우는 젊은 경찰관의 고뇌가 생생히 담겨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범인 검거 과정에서 숨지거나 다친 경찰관 수는 1998년 98명에서 2003년 167명으로, 6년 새 70.4%나 증가했다. 6년간 통계를 합치면 직무수행 중 순직한 경찰관은 244명, 부상한 경찰관은 4590명에 이른다. 강력반 형사들에게는 죽음과 부상,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가 늘 따라다니는 셈이다.
이들에게 윤경사의 자살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한 경찰관은 “무엇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높은 양반들은 우리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여기고 가만히 앉아서 ‘실적!’ ‘해결!’ 쥐어짜기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죽어나가고 상처받는 우리 마음은 어디다 털어놓나”라고 안타까워했다.
93년 경찰대를 졸업하고 경찰에 투신했던 허금탁 변호사는 3년 만에 변호사로 전업했다.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느낀 좌절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57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근무한 뒤 그가 받은 시간외수당은 고작 2750원. 그는 경찰관을 무조건 굶겨놓고 왜 부패하냐고 몰아붙이는 현실에 분노했다고 털어놓았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일선 형사들의 월 평균 시간외근무는 172시간이지만, 이 가운데 시간외수당이 적용되는 것은 73시간뿐이다. 만성적 예산 부족 때문이다.
강력반 형사들이 받는 한 달 30만원의 수사비도 현실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잠복근무 며칠 하고 나면 바닥이 나버리고, 지방에서 데려온 참고인들에게 택시비와 숙박비라도 마련해주려면 개인 돈을 털어야 하는 것이다.
날마다 범인들과 맞닥뜨리는 이들에게 지급되는 호신 장비도 사용이 극히 제한되는 총기뿐이라, 가스총 따위의 호신용 무기는 개인 돈으로 따로 사야 한다.
사는 동안 열악한 환경에 시달리는 경찰관들은 죽은 뒤에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 전과 10범의 강간 폭행 사건 용의자를 붙잡으려다 그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한 고 이재현 경장의 유가족에게 나라가 지급한 돈은 각종 보상금과 위로금, 퇴직금을 다 합해 4658만원뿐. 남은 가족들을 위해 전국의 경찰관은 7억원의 성금을 모았고, 함께 사망한 고 심재호 경사의 유가족과 나누어 각각 3억5000여 만원씩을 전달했다. 경찰관의 아픈 삶을 이해하는 ‘이심전심’이 낳은 결과였다.
하지만 가슴이 아파도 경찰관은 바쁘다. 그들의 현실은 분노와 슬픔까지 묻어두게 만든다. 윤경사의 죽음에 대해 한 강력반 형사에게 물었을 때 그는 “남의 일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오래 생각할 틈도 없다. 나는 우선 하루쯤 쉬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얼굴 가득 짙게 깔린 피로와 우울이 지금 우리 경찰관들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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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꼭 윤경사님처럼....국민을 위한 경찰이 되겠습니다...
좋은데가서 편하게 사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경찰 ... 많은 인내를 요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과 다른 희생,봉사정신 !! 이런 분들이 있기에 대한민국 경찰은 그 이름에 자부심을 느낌니다.
윤경사님 고곤의 명복을 빕니다.. 저도 꼭 훌륭한 경찰이 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도의 길을 가는 경찰관이 되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윤경사님...꼭..국민을 위한 경찰이..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질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