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우 바오로 신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로마 10,9-18 마태오 4,18-22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믿음과 선포’라는 주제를 묵상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어부였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전합니다(1,40-41 참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믿음 선포로 예수님을 만난 뒤 그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믿음을 전하며 주님을 믿도록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믿음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참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듣지 않고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데,
선포의 내용은 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사로운 내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믿음의 내용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전해 준 신앙의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우리도 후손들에게 믿음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복음화의 방법은 삶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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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로마 10,9-18 마태오 4,18-22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2019년 다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침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파견과 선포로 이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 기사는 참 담백합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간결한 언어로 이어집니다.
부르시는 분이나 부르심 받는 이들의 심리 묘사도 부연 설명도 없이 착착 진행됩니다.
너무 간결해 건조해 보이지만 덕분에 모호함 없이 명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마태 4,18).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혼자셨네요. 오늘은 특히 호숫가를 지나시는 예수님이 "홀로"이셨음이
눈에, 그리고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이끌려 들어간 광야에서 목숨을 건
단식 여정을 거치신 뒤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셨지요. 그렇게 얼마간 그분은 혼자셨을 겁니다.
성 삼위 하느님과 일치 안에 계시는 그분께는 홀로이심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인성을 입으셨으나 홀로 충만하고 완전하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 충만한 사랑을 나누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서 함께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오늘이 그 역사적 순간이지요.
"그들은 어부였다"(마태 4,18).
예수님께서 어망을 던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십니다. 어부들입니다.
다른 이들, 좀 더 학식 있는 세도가의 전도 유망한 젊은이를 원하셨다면 성전이나 회당 근처에
가셨겠지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현장에서 땀흘려 노동하며
일상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특별할 것 없이 일상 안에 움직이는 우리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예수님은 상대방의 일상성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존중하십니다.
어부들에게 '힘들게 그러고 살지 말고 다른 일을 하자'고 꾀시는 게 아니라,
어부로서의 자질과 경험을 살려 진짜 어부로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신 겁니다.
언젠가 낚시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낚시는 운에 달렸는지 기술에 달렸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내심, '물고기가 와야 미끼를 무는 거니까 순전히 운에 달린 게 아닐까' 선입견을 가지고
물은 건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운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기술이라고요.
다가감, 집중력, 인내,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알아차리는 섬세함과 민감함, 최적의 순간을
포착해 낚아챔, 밀고 당김, 힘 조절...
어부의 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모든 일과 노동에는 나름대로의
영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걸 발견하면 일상이 새롭고 경이로운 영성의 장이 되고,
간과하고 무시하면 지루하고 피곤한 소모적 일터일 뿐이겠지요.
"그물, 배, 아버지"(마태 4,20.22).
부르심을 받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곧바로" 버린 목록입니다.
"그물"은 생계 유지의 직접적 도구이고, "배"는 그보다 좀 더 규모 있고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운송 수단도 되는데 둘 다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기를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자산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혈연으로 묶인 일차적 가족관계입니다.
이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세상 원리와 혈연에 집착하는 삶을 초월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지상 원리에 자신을 묶기보다 천상 원리에 속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고요.
당시 한창 노동 중이던 그들이 그 순간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소홀히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해방자 메시아의 출현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망하고 꿈꾸면서
일상에 충실히 몸담고 있던 중이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본질인 선교 사명의 원리를 들려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먼저 말씀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느님의 뜻을 말씀과 행동으로 전하십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듣는 이의 귀뿐만 아니라 마음도 울립니다.
가르침과 기적뿐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까지도 선포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이 선포를 들은 이는 믿게 됩니다. 말씀이신 성자와 그분이 이루신 하느님 나라를 믿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친히 희생되신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말씀이 목 끝까지 차올라 이를 선포하러 달려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존재로 들은 말씀이 그의 심장에서 타오르기 때문에 그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그의 믿음과 고백이 울려퍼지면, 들은 누군가의 귀와 마음에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가 충실히 채워오던 일상의 자리에서 그 선포를 껴안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고백하러 또 달려나갈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의 고리는 파견과
선포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일상을 채워가는 가운데 믿고 듣고 파견되고 고백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례와 함께 성령의 인장을 받은 우리는 존재 전체로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정체성과 실존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으셨기에,
우리는 온 존재로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우리의 선포는 온 존재로 이루어집니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화답송).
그러니 말주변이 없다고 숫기가 없다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빛, 미소, 손짓, 말투, 움직임, 관심,
기도, 눈물과 한숨에서도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주님의 충실한 제자이고 사도인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지난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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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형 미카엘 신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로마 10,9-18 마태오 4,18-22
예수님을 따르는 이 여정을 끝까지 걷고 싶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태오 복음 4장 18-22절)
예수님을 따름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 하신 예수님의 초대에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제자로 따라나섭니다. 게다가 이전까지 생계 수단이었을 그물과 배는 물론 가족마저 버려두고
그분을 따릅니다. 이런 그들의 응답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과 영감을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용감하게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해서, 그 순간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자기 안위를 염려한 나머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했고(마태 26,69-75)
안드레아는 오천 명을 먹인 기적에 앞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안 좋은 상황에 금세 실망하기도 했습니다(요한 6,8-9).
또 제베대오의 아들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양 옆자리에 앉고 싶은
인간적인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었지요(마르 10,37). 하지만 예수님과의 여정을 통해 이들은
교회의 반석으로, 순교자로, 마지막까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제자로 변모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여정으로 초대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매 순간 회개하고
주님을 따르는 그 여정 말입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안드레아 사도의 전구를 청하며,
이 멋진 여정을 우리도 기쁘고 담대하게 걸어가기로 다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라렛선교수도회 박재형 미카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