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말년에 가장 이뻐한 중신은 이용익이다. 걸음이 빨라 하루에 천리길을 왕복한다던 그는 임오군란 때 민비가 장호원으로 피난하자 왕과의 연락을 맡으면서 왕과 왕비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총애를 받은 이유는 무슨 벼슬자리를 시켜도 수탈해 먹은 재물을 혼자 챙기지 않고 대부분 고종에게 상납했던 탓이다. 1888년에 함경도 남병사를 시키자 광산을 개발해 금을 덩어리로 고종에게 안기고 백성의 고혈을 빨았다. 이 때문에 민란이 일어나자 고종도 어쩔 수 없이 파직시켰지만 곧 복직되어 고종과 민비의 비자금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용익은 화폐 발행도 적극 추진했다. 화폐 발행은 당연히 국가 전체의 경제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고종 연간의 화폐 주조는 대부분 재정 보완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액면가를 높임으로서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어 고종대 내내 악화 남발은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어 국가경제를 망쳤다. 이용익은 1898년께도 백동화를 남발해 물가를 폭등시키고 그 남는 이익을 왕실재정을 담당하던 내장원으로 돌렸다. 그래서 독립협회의 대표이던 정교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했다.
이용익은 차관 도입에도 적극적이어서 일본만이 아니라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에서 차관 도입을 추진했다. 차관을 들일 때는 차관제공국과 나름대로 약정서를 맺고 돈의 용도를 명시하게 된다. 대부분은 광산개발, 도로의 개발 등 개화에 필요한 사업에 쓰기로 했지만 실제의 용도는 상당 부분이 고종의 금고로 들었다.
이런 딴 주머니 말고도 고종이 왕으로서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자금은 얼마나 될까. 1894년의 갑오개혁이후 정부의 재정과 왕실의 재정이 분리되고 정부재정은 탁지부에서, 왕실문제는 궁내부에서 맡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궁내부 안에 내장원을 설치해 전적으로 왕의 개인자금을 담당하게 했다. 1905년에 일제의 보호국이 되면서 재정정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조사된 1904년 궁내부의 실수입은 대략 4,874,000원을 넘는 액수였다. 이 해 국가의 실수입액 11,207,591원의 약 44%를 웃돈다. 궁내부의 수입은 국고금에서 지급되는 것과 내장원에서 조달하는 금액이 있었는데 내장원에 의해 조성된 금액은 3,320,000원이었다. 이를 국고 실수입액과 다시 비교해 보면 근 30%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내장원의 돈이 워낙 많다 보니 정부가 왕실 쪽에서 돈을 빌어서 때우기도 했다. 정부 재정으로는 관료의 급료도 제대로 못주는 실정이라 1900년대에 들면 내장원의 돈을 빌어 쓰고 그 대신 내장원에서 세금을 받아 쓰도록 했다.
고종이 직접 지금하는 돈을 내탕금이라 한다. 공식적 통계로 찾을 수 있는 이 돈의 용도 중에는 왕실의 사업운영에 지출된 돈도 있다. 왕실사업으로 투자했다고 알려진 것은 대한 천일은행, 경원철도, 한미전기회사 등에 들어간 자금을 들 수 있다. 이 방면의 돈이 제대로 투입되고 근대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져왔다면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국으로 자주적 발전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지 최근 들어 몇몇 학자들은 고종의 비자금이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열심히 돈을 긁어 모은 것도 다 나라를 위해서라는 논리다. 그러나 실제로 근대화에 들어간 돈은 극히 적고 대부분이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제례비용, 궁궐이나 왕릉 개축비용, 군비 등에 들어갔을 뿐이다.
한 예로 대한제국 최초이자 최후의 전함 양무호를 보자.
대한제국
최초의 전함 양무함의 최초 함장은 신순성이다. 이 배는 미쓰이 물산에서 1903년에 구매된 것으로 그 매매 과정은 일본 정부의 하야시 공사에게 상세히 보고되었다.
양무함은
불행히도 그 이름처럼 명예롭지 못했다. 인천을 모항으로 하여 위용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운용비의 감당이 어려워 운항조차 어려웠고, 1904년 2월8일 러일 전쟁 발발 당시 일본군에 강탈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함장은 인천항 감리에 보고하고 감리는 출항을 하지 못하도록 부탁을 했다 하고, 다시 헌병사령관 이지용이 일본특명전권공사 임권조(하야시 공사)에게 이런 강탈이 자의로 발생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요청을 하였다. 참으로
비참한 표현으로 나라의 모양은 말이 아니었다. 이 당시 함장은 신순성이 아니라 김성진(金成鎭)이었는데, 일본군 수병과 화부들이 갑자기 승선하여 이미 강제 출항한 것이다. 2월9일 일본 수군과 함께 승선을 한 이는 대한제국 군물조사위원 김윤복으로 일본군 장군의 명에 따라 러시아 함대의
정찰을 하여 일본에 보고하고 나중에는 양무함을 일본 해군에 인도하였다고 일본 정부는 기록한다. 즉 대한제국의 전함으로 위장된 일본의 첩보 전함이 된 것이다.
김윤복은
1905년 2월 27일
일본군 육군통역에 임명되어 6월 10일 까지 일본군의 승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되었고, 윤치호는 양무호의 수석 엔지니어로 회상을 하였다.
김윤복과
함께 당시 통역관 및 정탐의 역할을 했던 인물로는 외동에 살던 김명숙(金明叔)과 내동 출신의 김내선(金乃善)이 있다. 이
전쟁에서 또 다른 일본 측 기여자는 협률사를 설립한 정치국으로 당시 대한협동우선회사 총무(부사장)으로 있으면서 현익호를 이용하여 일본군의 명에 따라 인천병참사령부의 군수품의 수송을 차질 없이 수행하여 공훈을
인정 받게 되었고, 당시 현무호의 선장인 김성진(김聲振)과 함께 1909년에 훈장 서훈과 함께 상금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양무함의 의미가 없어지자 팽을 당해야 했다. 하야시 일본공사가 대한제국의 정부에 전하길 ‘전함은 미쓰이 물산에 의해 안전하게 보관중에 있으며, 1안으로 한국
군부의 사용 의지가 있으면 군부에 인도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2안으로
한국 군부의 위임에 의하여 유지 사용을 방법을 강구할 것이니, 처리 방법을 미쓰이 물산에 알려 달라’고 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정부는 전함을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고 이를 간파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손에 쥐고 농락을 한 것이었다. 이어서 하야시 공사는 2 안의 수용을 종용하여 미쓰이 물산에 넘기게 하되, 한국의 위탁을
받는 식으로 했다. 배의 국적은 한국이나 실 사용은 일본이 계속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양무호는 원래의 모습인 상선으로 다시 모습을 바꾸어 일본의 미쓰이 물산에 의해 취항을 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미쓰이 물산으로부터 막대한 방위비를 들여 양무함을 사들이고, 일본의 전쟁을 위하여 역할을 하다고 다시
헐값이 되어 상선으로 모습을 바꾸고 미쓰이 물산이 실질적 소유주가 되어 버렸으니, 일본은 대한제국의
영토에서 대한제국의 돈으로 러시아와 희희낙락한 전쟁을 하고 대승을 거두며 극동 아시아의 패권자가 되었다.
김윤복은
현재의 역사에서 반민족 친일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위험한
상상이기는 하지만 혹시 일본 정부에 깊숙이 침투한 비밀 요원이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하는 의구심이 있다.
양무함의
뒤를 이어 광제호가 1904년 12월에 대한제국에 인도되어
신순성이 다시 함장이 되었다. 광제호는 양무함과 달리 인천해관의 관세수입자금으로 일본에서 신규 건조되어
조달된 것으로 지금의 해경의 역할을 했으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그 임무를 허망하게 마치고 총독부
관용선이 되고 말았다.
이 고종의 국가재정면 운영을 보면...
그당시 조선재정은 토지세와 해관에서의 무역세금으로 운영되었는데 궁핍해 관리월급도 못 줄지경이었다.
1882년 5월 22일 서양과 최초로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또한 불평등, 굴욕적 조약이었지만 세관의 입장에선 조선이 처음으로 부산 개항 후 7년 만에 ‘관세 자주권’을 보장받은 조약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외국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대한 지식이나 서양인과 소통할 수단과 이를 운영할 인력도 갖추지 못했다. 더구나 관세를 수납할 은행이나 근대적 부두 등 항만시설도, 창설에 필요한 자금까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이 새로운 조직 도입을 앞두고 불가피하게 청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정부는 1883년 4월 24일 현재의 관세청에 해당하는 조선해관본부인 총해관(總海關)을 창설하고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총세무사로 그리고 6월 16일 인천해관을 개설해 해관장(海關長)에 영국인 스트리플링을 임명했다.
개청 당시 인천해관에 배치된 직원들은 모두 외국인으로 영국인 1명, 독일인 3명과 러시아, 프랑스, 미국, 청국, 이탈리아인 각 1명씩 9명이었다. 조선인으로 인천해관에 처음 배치된 사람은 홍우관, 남궁억 등으로 1883년 설치된 관립영어학교 동문학(同文學)에 입학해 1년간 영어를 배운 제1회 졸업생이었다.
1883년 6월 16일 인천해관이 개설되면서 인천항은 본격적인 개항장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관세(關稅)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예에 따라 일반 품목의 경우 상품 값의 10%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9월 19일부터는 인천, 부산, 원산 등지의 개항장에 감리(監理)를 두어 해관 업무를 감독하도록 했고, 10월 8일에는 해관세(海關稅) 수납은행으로 일본제일은행의 각지 지점이 지정됐다. 그러나 11월 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수정, 조인하면서 일반상품의 관세율은 7.5%로 낮아지게 됐다.
해관은 자체적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기관으로 해관 운영비와 해관요원들의 보수는 해관수입금에서 우선적으로 지출됐다. 그리고 조선의 근대화 사업을 위한 자원금으로 이용됐고, 국가채무를 변제하는데도 사용됐다. 해관 수입금은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와 톤세 등의 합으로 이뤄졌는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수입품에 부과하는 관세였다. 그러나 위정자들이 관세 전반에 관해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었고, 정부는 관세의 수입을 단지 궁핍한 재정을 타개하기 위한 국고 수입증대 신재원으로만 파악했다.
고종이 해관의 수입을 뺏으려했는데 강경하게 버티던 미국인 관리때문에 못했을 지경이었다.
요즘 민주당 사람들 국고돈이 자기들 주머니 돈인줄 착각하나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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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친일이랄것도 친중이랄것도 친미랄것도 없는것이 이세계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
고정된관념은 버리고 변해가는 세상에서 변해가는 그죠!
@철마2002 중궈 시다바리는......
친중이 왜 위험한지... 알고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