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85
1월29일[연중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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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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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Z407sFY-hU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8403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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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행복한 삶의 비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얼굴이 어디 있나 한번 찾아봤습니다. 어머니 품에 포근히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갓난아기 얼굴, 그보다 더 행복한 얼굴은 없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행복함과 평화로움이 아기 얼굴에 묻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찾아보았습니다. 세상 전체가 자신의 장난감인양 쥐락펴락 거드름을 피우는 몇몇 야심 많은 정치인들 표정에서는 행복함이나 편안함보다는 극도의 불안과 초조, 두려움의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가난함, 소박함, 온유함, 수용성, 작음…. 이런 단어들은 이 시대에 다들 꺼려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서, 특별히 그리스도교 수행생활에서 아주 긍정적 색조로 바뀝니다.
돌아보니 수도원 입회 초기만 해도 제 각오는 대단했습니다. '궂은 일은 내가 먼저'라는 구호 아래 '시켜만 주면 뭐든 다 한다'는 굳은 각오로 따지지 않고, 불평불만하지 않고, 그 어떤 일이든 고분고분 다 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생각하고 위만 쳐다보며 모두를 우러러보며 살다 보니 마음이 그리도 편했습니다. 내 견해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 의견에 따르다 보니 다툼도, 의견 차이도, 스트레스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 완벽한 평화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첫서원을 하고, 종신서원을 하고, 서품을 받고, 책임자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초심은 슬슬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이제 내가 뭔가 좀 해봐야겠다. 이제야말로 내 포부를 마음껏 한번 펼쳐볼 때다'는 생각이 슬슬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로 마음의 평화라든지, 행복한 생활은 끝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날이면 날마다 이리저리 부딪치는 상처투성이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내 계획과 내 주장만을 내세우다 보니 사사건건 이웃들과 충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충돌로 입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고, 상처 부위는 곪아터지고 그야말로 고통의 세월이 시작된 것입니다.
돌아보니 그 모든 괴로움은 결국 '내가 무엇인가 한번 해보겠다' '내가 주인공이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지금에야 어렴풋이 알게 됐습니다.
마음에 '내'가 가득 참으로 인해 가난함, 소박함, 온유함, 작음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 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 어렵지만 행복한 삶의 지름길임을 언제나 체험하며 삽니다. 아쉽지만 내 의견을 접고 이웃 뜻에 따른다는 것, 서운하지만 내 의지를 접고 공동체 결정에 순응한다는 것, 정말 괴롭지만 내 계획을 포기하고 하느님 뜻을 추구한다는 것, 그것이 행복의 보증수표이자 평화로운 수행생활의 본질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수도자로서 가장 행복할 때는 내 뜻대로 뭔가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품에 온전히 안기는 때라는 것을 요즘에야 깨닫습니다.
내 의지를 과감히 접고, 바보처럼 이웃 품에 안길 때 상상할 수 없는 천상 평화와 내면에서부터 진정한 행복이 어느새 소리 없이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 손 안에 노는 것, 그분 품에 안기는 것, 그분 선택에 따르는 것, 그것이 때로 서운하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신앙인들 본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 그 안에는 묘하게도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아직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역경은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시입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깨치는 순간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신앙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자리하실 때, 그분께서 우리 중심에 살아계실 때, 우리는 그 어떤 세찬 역풍 앞에서도 보란 듯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그리스도 그분께서 형성돼 있다면 세상 그 어떤 풍랑 앞에서도 내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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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rehJXGfA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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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대답해주면 지금 너의 행복 수준이 얼마인지 알려줄게!>
저는 어릴 적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경험하며 덕분에 ‘행복’이란 목표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두려웠던 죽음의 공포가 행복하니까 줄어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진복팔단, 곧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동물-인간-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각 존재는 자신이 행복이라 믿는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여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이먼 시넥의 골든 서클 이론입니다. 인간의 뇌는 이유(Why) - 방법(How) - 목적(What)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음의 영역이고, 방법은 이성의 영역이며 목적은 육체의 영역입니다. 사람에도 깊이가 있는데 동물과 같은 사람은 목적을 먼저 생각하고 영적인 사람은 이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유가 중요한데, 동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동물이라 믿습니다. 곧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나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왜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지, 내가 왜 슬퍼해야 하는지, 내가 왜 온유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당해야 하는지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그저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상어는 사람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어는 그저 생존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기처럼 무조건 내 앞에 있는 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덥석 물어보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배를 채울 필요가 없거나 맛이 없으면 물었다가도 그냥 놓습니다. 만약 그런 존재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반드시 “나는 나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배만 곯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채워야 할 행복의 정도가 그저 동물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구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노숙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면 근처에 그분들이 거저 숙박을 할 수 있게 나라에서 만든 시설들이 존재합니다. 거기 가면 이슬을 맞지 않아도 되고 따듯한 물도 나와서 몸도 씻고 빨래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밖에서 얼어 죽을망정 그곳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일까요? 나의 자유를 침해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인데 타인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지만 않는다면 밖에서 떨면서 자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만약 노숙자로 살면서 살기 힘들고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런 분들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누구의 아빠”, “나는 누구의 남편”, “나는 누구의 딸”이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이유(why)가 나가 아니라 타인이 되어버린 결과입니다. 타인이 자신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 안에 들어오려면 그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내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나는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저는 부모의 굳은 살을 보면서 내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녀로 살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부모의 마음이 아픈 것을 보면 나도 행복하지 않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 인간의 행복 정도에 오릅니다.
행복은 이제 생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누군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하지만 나만을 만족시키던 동물적 행복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을 느낍니다. 이런 사람이 먹고 마시고 돈이나 명예욕으로 살아가는 동물적 인간을 볼 때는 불쌍함을 느낍니다. 7조 원의 재산을 모았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 받은 한룽 그룹 류한 회장은 다시 태어나면 그저 가족과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죽기 전에 비로소 가족의 행복이 동물처럼 생존을 위한 행복만을 좇을 때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만약 세속-육신-마귀의 욕망 추구가 행복이라 여기는 이가 있다면 아직 동물적 행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가족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화 ‘정이’(2023)에서 내용상 안타까운 것은 딸이 사이보그 엄마를 풀어줄 때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존재는 “나는 나”로 살아갑니다. 생존만이 행복이고 돈과 음식과 힘만이 행복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보그 엄마는 죽더라도 딸을 위해 싸울 때가 더 행복했습니다. 딸은 엄마에게 그 행복의 가능성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행복하다 할 수 있는 이유는 동물보다 더 뜨거운 가족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자녀 행복의 수준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실 나의 ‘이유’(why)를 다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나는 가족을 위해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이 나를 존재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다시 눈을 만들어주고 생명을 되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자동차의 존재 이유가 자동차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부모도 존재하게 만든 창조자가 나의 존재 이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바꿔주러 오셨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살과 피가 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하는 성체가 바로 하느님의 피 흘림임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거하게 되시고 이제 나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하느님만 있으면 되니 이 세상 것들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게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슬퍼집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인데 하느님의 자녀 수준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고 다른 수많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 믿지도 않고 그저 인간으로, 혹은 동물로 살아감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온유합니다. 자기 힘으로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하거나 화낼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의로움에 주립니다. 오직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움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자비롭습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또한 마음이 깨끗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됩니다. 세상의 생존 법칙에서 벗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해를 받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 자기를 나라고 하고 누구의 자녀나 남편이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하느님이라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교만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나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권에 당첨되어 이제 돈을 바꾸기만 하면 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것만 대답해주십시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행복은 우리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 믿음이 내가 어떻게(how) 살아야 하는지 알려줄 것이고 무엇을(what)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삶이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시작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사는지 생각해봅시다. 나를 기쁘게?, 가족을 기쁘게?, 하느님을 기쁘게? 이것이 나의 행복 정도를 말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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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엠이 부부모임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에 대한 나의 느낌은?’이라는 주제로 나눔을 하였습니다. 함께 했을 때의 기억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여행을 갔을 때, 식구들과 한 침대에서 누워있을 때, 손자가 태어났을 때와 같이 작고 소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행복과 행운’의 차이를 읽었습니다. 4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행운은 쉽게 찾지 못하고,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복권을 사지만 당첨될 확률이 적은 것과 같습니다. 3잎 클로버는 행복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돌아보면 행복은 쉽게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와 같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물과 같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행운’은 많지 않았습니다. 외모와 체격이 크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발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술적인 감각도 별로 없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거의 문맹과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행복’은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4년 전에 이곳 뉴욕으로 왔는데 다정한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동료사제들이 있습니다. 새해 첫날에는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무덤 성당과 부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축복도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조배하러 가니 수사님이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 또한 행복입니다. 매주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에 가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기쁨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3달만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교우들과 함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미사를 봉헌할 때가 행복합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직원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매주 새로운 지면을 만드는 것은 때로 전쟁과 같습니다. 직원들이 함께 하기에 부족한 제가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채워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참된 행복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루가 복음 19장을 보면 예리코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자캐오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리 자캐오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허전하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캐오를 무시하였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를 부르셨고, 자캐오의 집에서 하루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자캐오는 자신의 가진 재물의 반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세리 자캐오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캐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고 불쌍한 이들을 보살펴 주고 도와주며 그들과 하나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우리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의무이며, 그와 같은 삶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참된 행복을 얻는 것은 지위, 능력, 가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자캐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의 이정표를 보면 안심하고 갈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이정표인 주님을 바라보며 행복의 길,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충실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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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의 중심 주제는 산상설교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중에서도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이다. 두 독서가 함께 이 행복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복음은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스바니야는 주님께서 오실 날, 가난하고 순박한 정신으로 그분께 나오는 모든 이에게 마지막 날에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한다. 가난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판단에 신뢰심을 갖고 자신을 내맡기는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자기 포기를 말한다. 이러한 가난은 회피해야 할 저주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높은 목표이다. 이 가난이라는 것은 항상 정의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의무와 결합하여야 한다. 이렇게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은 살아남게 되고,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스바 3,12) 또한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과 사기를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스바 3,13)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과 겸손하다는 것은 일치한다. 이 개념을 통해 예언자들은 메시아를 예고한다.(참조: 즈카 9,9)
복음: 마태 5,1-12: 산상 설교.
오늘 복음의 참 행복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도 극적인 삶으로 사신 것들이다. 이 가르침 하나하나를 그분의 삶을 통해 입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산상설교는 모든 윤리 규범을 초월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정상적 지혜가 부서지고 만다. 그 지혜는 하느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 즉 우리 자신이 회개할 때만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산상설교의 메시지는 회개에 대한 권고(마태 4,17 참조)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1절), 산 위에서 법을 가르치는 새 모세처럼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바위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참조: 1코린 3,3)에 새겨진 그리스도인의 새 법으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 산상설교는 가난해서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가난해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고, 박해를 받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 박해를 받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10절)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모두 회개하여 이루어야 할 최상의 목표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예루살렘 성경은 이 구절을 가난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훌륭히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스바니야서의 가난의 영적인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가난의 덕이라는 것은 비록 우연히 소유하였을지라도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한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지적인 능력, 사고, 계획, 우리의 성성까지도 포함하여 우리가 선익을 위해 소유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그분을 통해 자신을 무한히 부유하게 하고, 또 그분이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가난하건 부유하건 상관없이 다른 모든 행복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첫 번째 행복의 정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지는 집착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해방되어 있느냐, 그리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통해 부유해지고 그분께 받은 선물을 나눌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근본적인 회개를 해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시는 것, 이것이 인간의 오만과 자만심의 틀을 뒤엎으시는 하느님의 변함없는 모습이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세속적인 견지에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러주셨음을 상기시키면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6-27)라고 한다. 이것은 모든 선이 하늘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 누구도 마치 자기 스스로 부유한 듯이 여겨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에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1코린 1,31) 한다.
가난한 정신은 모든 행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빈부에 아무 관계 없이 가난하건 부유하건 모든 재물에서 집착을 버려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 앞에 올바른 회개를 통하여 그분으로 부유해지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그런 마음이다. 이러한 나눔을 통하여 자기만족이나,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즉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그분을 자랑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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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
산상설교에 있는 ‘참 행복 선언’ 말씀은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의 ‘행복’은 일반적인 의미의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 안식, 기쁨, 생명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참 행복’입니다.
‘구원’은(‘참 행복’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신앙인의 삶’은, ‘참 행복’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삶’의 시작이고, ‘그 삶’을 미리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0-12ㄴ)
이 말씀에서 ‘의로움 때문에’ 라는 말과 ‘나 때문에’ 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고,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또는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종교박해를 받아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모욕, 거짓말, 온갖 사악한 말’은 박해자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방법들입니다. 여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는 말씀은, 박해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것과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되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모욕, 박해, 거짓, 온갖 사악한 말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쁨의 원인이 되기는커녕 참기 힘든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박해 너머에 있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이고, 나중에 누리게 될 그 영광을 생각하면서 지금 받는 박해를 참고 견디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박해만 보이고, 하늘나라의 영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을 어리석고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그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도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1-42)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라는 말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함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사도들이 박해를 받았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더욱 열성적으로 복음을 선포했다는 점입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한다는 믿음과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열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온유’와 ‘자비’는 ‘박해에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또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앙갚음하지 않는 것, 박해자들의 악을 사랑이라는 선으로 물리치는 것, 그리고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온유’와 ‘자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스테파노가 순교했을 때, 만일에 당시의 신자들이 박해자들에게 앙갚음했다면, 즉 박해자들을 심판한다는 명목으로 박해자 사울을 제거했다면, 우리는 위대한 사도 바오로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앙갚음하지 않고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 가르침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마음의 가난함’과 ‘마음의 깨끗함’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재물의 힘’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을 제대로(온전히) 받으려면, 마음속에서 탐욕을 버려야 하고, 재물에 대해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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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신약 성경에서 ‘행복하다’ 또는 ‘행복하여라’라는 표현과 함께 전해지는 말씀은 모두 행복 선언에 속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런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을 향하여 말씀하신 마태오 복음의 내용은 운문 형태로 전해지며 ‘참행복’ 선언으로 불립니다. 문자로 기록하는 것이 쉽지 않아 대부분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고대 사회에서 운문 형태는 기억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참행복 선언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였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합니다.
복음서에서 참행복으로 불리는 본문은 두 가지입니다. ‘진복팔단’으로도 불리는 오늘 복음과 함께 루카 복음에서도 행복 선언을 찾을 수 있습니다(루카 6,20-23 참조). 두 행복 선언이 강조하는 점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굶주리고 (의로움에) 목마른 사람들과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주제는 공통적으로 행복 선언의 끝에 자리하면서 시대 배경을 잘 보여 줍니다.
행복 선언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미래에 올 보상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행복 선언은 위로의 말씀이면서 신앙인들을 향한 윤리적인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게 합니다. 만일 지금 그렇지 못하다면 현재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도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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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이창원 다니엘 신부님(한마음한몸운동본부 국제험력센터장]
<진정한 행복은 '욕심을 내려 놓는 것>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 월급 빼고 모두 오른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물가는 치솟고 통장의 잔고는 점점 비어갑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0D) 선진국 대열에 들었다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휘청거릴 정도인데. 하물며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빈곤한 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더 큰 고봉을 겪을까요?
유엔세계식량계획( FP이 발표한 2022 세계 식량 위기 보고서를 보면 2021년에 53개 국가에서 총 1억 9.3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위기 상태로 식량 지원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코로나와 기후 위기가 더해지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식량과 에너지 및 금용 위기가 한층 더 고조되는 상황에서 기아 문제는 사상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탄자니아에서 선교사로 있었음 때. 제가 있던 마을 사람들도 정말 가난했습니다. 좁은 훔집에서 대부분의 부모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냈는데. 먹을 것이 부족해 매일 끼니를 격정해야 했습니다. 씻고 마실 물도 모자라서 오염된 물을 길어와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어려운 삶 안에서도 늘 감사를 잊지 않고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것을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작은 것에 행복해하며 잘 웃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잘 옷지 못했습니다. 분명 그들 안에서 물질적으로 가장 큰 부자였음에도 더 편하고 좋은 것들음 찾으며 욕심음 부리고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돈이나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내려놓는 것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총은 감사와 나눔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의로움을 찾으며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위해 힘쓰는 이들, 그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님 성탄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구유 안에서 성탄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가난하게 평생을 살아가셨으며. 가난하게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난을 사랑해야 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덕 실천으로 초대받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 삶을 통하여 가난한 삶을 사셨지만 그 어떤 것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신가요? 만약 행복하지 않다면 지금 어떤 것에 욕심을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욕심을 내려 놓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자신의 것을 나눌 때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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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재혁 요한 사도 신부님]
<행복은 ‘지금 여기’>
교우 : “신부님은 언제 가장 행복하세요?”
사제 : “저는 교우분들과 주님을 믿고, 공동체가 함께 미사를 봉헌할 때 행복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사제를 만난 분들은 참으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언제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늘 대답을 망설입니다. 스스로 성찰해보았을 때, 제가 행복을 자신 있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는 행복을 갈망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살아가는 모든 이가 그토록 원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것, 질병 없이 삶을 살아가는 것, 죽음을 피해 장수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할 겁니다. 이처럼 오늘날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척도는 생로병사를 극복하는 것과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이란 주님 안에 머물며, 세상 안에서 이웃과 부대껴 살아가는 삶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행복은 ‘지금 여기’에 충실히 머무는 이들의 삶 한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죄와 잘못으로 인해 고통받고 후회하며 살아가는 삶을 바라지 않습니다. 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며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순간에 온전히 그리고 충실히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창 신부가 서품 성구를 정할 때, 우연히 그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저는 속으로 ‘멋있는 성경 구절을 정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짧은 제 인생과 사제생활을 돌아보니, 기뻐하는 이들과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느낍니다.
이웃의 미소가 나의 미소가 되고, 이웃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는 것은 겸손함을 지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5절의 말씀은 행복을 찾는 신앙인들에게 현 재의 행복을 느끼고 실천하게끔 이끄는 좋은 묵상 구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1월을 마무리하며, 나의 행복은 ‘지금 여기’에 펼쳐져 있음을 알고 믿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또 이웃에게 미소 지어줄 줄 아는,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다짐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행복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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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최광경 비오 신부님]
<행복을 전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먹고, 당신의 거룩한 마음(聖心)을 간직한 사람은 가난해도, 굶주려도, 또 지금 울어도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시대에는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겨졌고,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은 하느님께 벌을 받았다고 여겨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이 겪는 불행은 본인들 능력 탓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잘 살고 못 산다는 기준은 인간이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유하거나 가난하게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빈부의 격차 또한 인간이 만드는 것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는 인간에게 마냥 축복을 가져다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낳습니다. 빈부격차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지구 한편에서는 영양의 과다 섭취로 병들지만 다른 편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축복하고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기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들을 축복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에게 축복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그들을 위한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합니다.
이 세상에는 가난도 있고 굶주림도 있고 슬픔과 아픔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은 계속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주위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하느님의 현존과 축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축복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하느님의 축복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 축복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오늘은 세계 각국의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사랑과 기도를 실천하는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대구대교구는 해외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직접 지원하는 ‘생명사랑나눔운동본부’를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해외 원조 주일을 맞아 우선 이날 하루만이라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수많은 이웃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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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재중 베드로 신부님]
<참 행복에로 ‘다시 태어나기'>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동창 모임 중에 ‘요즘 웹툰이나 소설, 드라마의 트렌드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동기 중 한 명이 ‘환생’, ‘회귀’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두들 의아해했지만 최근에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진양철 회장의 비서실장을 배신한 회장 손주가 ‘머슴이 자기 것을 갖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시 태어나세요.”
왜 이 세대에 환생과 회귀가 인기 주제로 떠올랐을까? 그것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노력해도 지금의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 무력감, 자괴감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세요’라는 말은 지금 이 삶에서는 신분 상승, 인생역전은 없다는 것, 희망을 갖기가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하느님의 ‘다시 태어나기’와 이 세대의 ‘다시 태어나기’는 닮아있는가?
하느님의 ‘다시 태어나기’는 강생과 부활, 성체성사라는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서 사는 모습으로,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모습으로, 보잘것없는 빵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다시 태어나기’는 신분 상승으로 남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더 큰 권력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자신의 원한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봉사하기 위해, 죄를 없이 하여 죄인들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이미 ‘다시 태어나기’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를 통하여 어리석은 것이, 약한 것이,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이 하느님의 선택으로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 강한 것이, 하느님의 자랑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개의 참된 복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행복이요, 주님과의 일치됨으로써 누리는 참 행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다시 태어나기’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만이 우리는 세상의 행복과는 다른 주님의 행복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애써 외면하려는 행복의 빈칸을 기쁘게 채우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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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 안에 내가 있답니다>
마태오 5,1-12ㄴ (참행복)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음 안에 내가 있답니다>
마음 안에
내가 있답니다
탐욕이 없는
가난한 마음 안에
더불어 사는 하늘 나라가 있으니
하늘 나라를 사는 나 역시
가난한 마음 안에 있답니다
슬픈 이와 함께하는
슬퍼하는 마음 안에
따뜻한 위로가 깃드니
위로를 받는 나 역시
슬퍼하는 마음 안에 있답니다
작은이를 품는
온유한 마음 안에
어머니 품 같은 땅이 있으니
땅을 품는 나 역시
온유한 마음 안에 있답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안에
의로움이 차고 넘치니
의로움에 흡족한 나 역시
의로움을 갈망하는 마음 안에 있답니다
버려진 이를 보듬는
자비로운 마음 안에
살리는 자비가 있으니
자비를 입는 나 역시
자비로운 마음 안에 있답니다
위선을 씻어낸
깨끗한 마음 안에
선하신 하느님께서 계시니
하느님을 보는 나 역시
깨끗한 마음 안에 있답니다
차별과 배제를 거슬러
평화를 이루는 마음 안에
평화의 하느님께서 계시니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나 역시
평화를 이루는 마음 안에 있답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마음 안에
의로운 하늘 나라가 있으니
하늘 나라를 사는 나 역시
의로움으로 박해받는 마음 안에 있답니다
마음 안에
내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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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을 모심으로써 행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날이 많이 춥습니다. 마음만은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행복에로 초대하십니다. 이 시간 참된 행복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 430억원, 건강과 바꿀 수만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많은 돈을 얻는 행운을 쥐었지만,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으며 감사의 마음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돈은 나에게 슬픔만 가져다주었다. 내 인생을 파괴했다.” 고 말한 뒤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전주의 87세된 김소관 할머니는 시장에서 잡곡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십니다. 하루 벌이가 1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3,000원을 꼬박꼬박 ‘자선남비’에 넣었다고 합니다. “늙은 나이지만 일을 해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행복”이랍니다.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소유와 지배를 통해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거기서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서 옵니까?
참된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행복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인간 내면의 욕구 충족 상태, 만족한 삶입니다. 우리는 소유, 지배, 사랑 중 어느 것에 만족을 추구해야 할까요? 사랑입니다.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덟가지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간략하게 묵상해 보겠습니다.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분께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베푸는 마음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또 주고 싶은데 더 줄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의 상태가 마음의 가난입니다.
여러분은 가족을 위해 또 이웃을 위해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건강도 없어서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이 없다고 하더라도 줄 수 있습니다. 기도로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봉쇄수도원에서 일생 기도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남의 도움 없이 살 만큼 큰 부자도 없습니다. 마지막 장례를 스스로 치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했습니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고 공명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 그 이면에 있는 사랑을 생각하며 나도 그러한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온유는 흔들림이 없는 상태입니다. 단순한 부드러움이나 따뜻함이 아닙니다. 어떤 처지나 상황 여건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하느님 편에서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해보면 금방 압니다. 마음 안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면, 외풍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성당에도 그룹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파’가 있습니다. 바오로파 아폴로파, 대파, 실파, 양파, 쪽파.... 있듯이 신부파, 수녀파, 회장파...사람을 따라가며 끼리끼리 뭉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4. 의로움에 주린 사람은 행복합니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순명하고, 금식을 통해 마음을 비우며 욕망의 절제로 재물을 이웃과 나누는 실천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요셉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약혼자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시의 법대로 하면 마리아는 돌팔매질로 죽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으로 배려했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5.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이 무엇이든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도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고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행위야말로 자비로움의 절정입니다. 요한사도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니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며 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곧 용서를 청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평온한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많은 순교성인 성녀들은 박해와 죽음 앞에서 마음이 시끄러웠을까요? 혼란스러웠을까요? 그들은 평화로웠습니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차지했기 때문에 육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내 마음의 욕망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진리를 증거 하다 보면 기득권의 반대에 부딪히고 미움을 사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진리 안에 머물게 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지금의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면 더 큰 것을 놓치게 됩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의로움은 단순히 정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따라서 사랑 안에서 나오지 않은 정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조카들이 있는데 큰 조카는 서울의 유명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가 학과 대표직을 맡고 정의구현에 앞장섰던 때가 있습니다. 그는 데모하는 학생들의 앞에 섰습니다. 그것도 몽둥이를 들고. 어깨도 다쳤습니다. 결국은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고 저는 삼촌으로서 그에게 반성문을 요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판사를 찾아가 사정하며 제가 교육을 잘하겠다고 해서 옥살이를 면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몽둥이를 들었으니 폭력이지, 어찌 정의구현을 하겠습니까? 의로운 방법으로 의로움을 구해야지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어찌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의로움은 사랑 안에서 나온 상대를 위한 배려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 알게 모르게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주님께 매달리고 의탁하여 행복을 지켜야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차지하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늘의 큰 상이 우리의 것입니다. 한 주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항상 행복하십시오.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정진석 추기경)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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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저는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 꽤 많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스키도 또 골프도 이제까지 해 본 적이 없어서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을 부러워할까요? 굳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부러움도 없고, 못한다고 해서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하지 못하지만, 꼭 해 보고 싶은 것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토바이 타는 것입니다. 특히 쿠바 혁명가인 체 게바라가 젊은 날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여행했었다는 글을 읽으며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 오토바이 위에는 단 한 번도 올라가 본 적도 없습니다. 전에 살았던 강화도에서는 종종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며 어렸을 때의 소망이 떠오르면서 부럽기도 하면서 또 그들이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그들과 나란히 신호대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차림새였습니다. 오토바이 타는 한 사람을 볼 때는 멋있었는데, 똑같은 차림새에 개성이 전혀 보이지 않아 실망한 것이지요. 남만큼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남을 쫓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기 개성을 드러내며 자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더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신 하느님 뜻에 어떤 삶이 맞을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어렵고 힘들어도 나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처럼 사는 삶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 역시 옳지 않습니다. 자기 고유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의 삶,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행복 선언’을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주님만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며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만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과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참조)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관심을 기울이는 날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가난한 이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가 될 것을 다짐하고 또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과연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다시금 묵상하면서 사랑하며 사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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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행복 레슨>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인데 그 시작 부분을 언뜻 보면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군중이 있는 곳에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고, 굳이 산으로 올라가 거기까지 따라온 제자들에게만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런데 이것은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행복 lesson을 배제하신 겁니까? 이는 어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레슨을 해주는데 돈 많은 집 아이들만 제자 삼아 피아노 레슨을 해주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제자로 삼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까?
그러니까 일반 군중은 놔두고 제자들만 데리고 올라가 행복을 가르치신 것이고, 결과적으로 제자가 아닌 군중에게는 ‘행복 배제’와 ‘행복 차별’을 하신 것입니까?
우리의 주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은 산 위로 올라오라는 뜻이고, 그런 열정이 있는 사람만이 힘들어도 산 위까지 올라와 주님의 행복 레슨을 받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저희 형제들에게 오르간 레슨을 해준 적이 있고, 저의 레슨을 받은 형제가 100명을 넘는데 배우고픈 열망이 커, 저에게 끝까지 배우고, 지금까지 오르간을 치는 형제는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행복 레슨도 이처럼 배우고픈 열망이 커야지만 배우는 것인데 주님의 행복 레슨은 이 세상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행복이기에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만나는 산까지 올라야 배울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 중에,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가?” 이런 시편이 있는데 복음에서 산은 하느님 계신 산이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 레슨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이 세상 나라의 행복과 다릅니다. 부자가 행복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가난도 물질적 가난이나 마음의 가난이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야 참으로 행복합니다. (현재 우리의 번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잘못 번역되어 있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욕심이 없는 사람 정도인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난은 욕심이 없는 가난 정도가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것입니다.
왜냐면 영으로 가난해야지만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소유해야지만 물질이 아니라 영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성령 충만하면 그것이 참 행복이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가난뿐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 조건은 이 세상 나라의 행복 조건과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박해가 없는 것이 행복 조건인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이런 것들을 오히려 감수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영으로 행복할 수 있는데 이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고자 하느님의 산으로 오를 제자가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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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찾으라, 회개하라, 행복하라”>
-선택, 훈련, 습관-
새벽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제 첫시집 ‘하늘과 산’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니까 1997년 손수 제본하여 만든 것이니 26년전 작품입니다. 모두 제가 지금도 아끼는 시이고 그중 ‘하늘과 산’은 자주 인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기 35년 동안 가장 많이,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과 하늘입니다. 바로 하늘과 불암산의 관계를 주님과 나의 관계로 빗댄 시입니다. 정말 날로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가 깊어졌으면 소원이겠습니다.
혼자서는 못삽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4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2003년부터 매해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정해 이날 특별헌금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세계 여러 나라들을 돕는데 쓰고 있습니다. 이 또한 더불어 삶의 사랑 실천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9명의 소규모 젊은 남녀들의 피정팀에게 ‘명상기도’방법을 가르치고 실습도 했습니다. 모두가 신자인줄 알았는데 후에 알고보니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등 다양한 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강의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명상기도 방법을 택하여 청했던 것 같습니다. 좌우간 이분들에게 강조한 것도 영성생활에서 선택과 훈련, 습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참 좋은 선택을 하셨으니 아름다운 수도원에 피정을 온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좋은 선택 또한 은총입니다. 명상기도 참 좋은 선택입니다. 선택에 이어 한결같은 훈련입니다. 도대체 수행생활에서 훈련아닌 것이 없습니다. 명상기도를 부단한 훈련하여 습관화하십시오. 성격이 바뀌고 운명이 바뀝니다. 부정적 비관적 수동적 인생관에서 긍정적 낙관적 적극적 인생관으로 바뀝니다.”
요지의 내용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행복입니다. 참행복 역시 은총에 이어 우리의 선택과 훈련, 습관에 달렸습니다. 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찾으십시오.
무엇보다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주님과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찾으며 주님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집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관계가 우리 영적 삶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제1독서의 스바니야 예언자의 권고가 고맙습니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구체적으로 의로움을, 겸손함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의롭고 겸손합니다.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요, 수도자는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진리이신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입니다.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애송시 중 한 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이 고백에서처럼 하루 이틀이 아닌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찾으며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사랑의 맑은 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방황하지 않습니다. 일일시호일, 늘 좋은 날에 늘 새로운 날입니다. 이래야 안주가 아닌 정주의 삶입니다. 주님을 찾는 일 역시 우선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회개하십시오.
회개 또한 참 좋은 날마다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살아계시기에 회개입니다. 하느님 거울에 날 들여다 보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참나의 발견이요 제자리에서 제대로 제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회개에 따른 참 겸손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고백은 그대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를 통한 이런 깨달음이 겸손이요 이런 겸손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다음의 고백은 얼마나 겸손하며 삶의 진실을 직시하고 있는지요! 꼭 저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역설의 진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신의 한 수는 이토록 오묘합니다.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무명의 이들이 교회를, 수도원을, 세상을 지킵니다. 참으로 회개로 겸손한 이들만이 이렇게 일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셋째, 행복하십시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참행복의 비결을 보여주십니다. 죽을 때까지 끝없는 노력의 훈련을 요하는 결코 완성이 없는 미래로 활짝 열려 있는 수행의 참행복입니다. 바로 성인이 되는 길은 이 참행복의 길뿐입니다.
십계명은 너무 소극적입니다. 금령만 지키다 보며 거기서 끝나지 이웃과의 적극적 사랑의 관계는 맺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한계입니다. 모세도 예수님의 이런 경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새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모세를 격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상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는 좋은 신자가 될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신자. 자비로운 신자, 온전한 신자가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결코 참행복도 없고 성인도 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열려 있는 삶이 아니라 자기 안에 닫혀진 이기적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계명을 전제로 하고 적극적 자기개방의 나눔과 사랑이 절대적이요, 바로 오늘 산상설교중 진복팔단 참행복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런 삶자체가 참행복이니 바로 하느님이 직접적 배경이, 보상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 불가의 성철 큰 스님은 물론 종파를 초월하여 대영성가들이 공감하며 극찬한 참행복의 내용들입니다. 영원히 하느님의 나라로 열려 있는, 완성이 없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참행복입니다.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처럼 느껴지는 참행복의 수행들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한결같은 열정으로 참행복을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마지막 말씀이 우리의 분투의 노력에 불을 붙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자신의 성덕 점수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100점 만점에 20점은 기본으로 하고 8개 항목을 각자 10점 만점으로 계산해 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미완성의 참행복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참행복의 절정에 하느님 곁에 계신 예수님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유일한 참행복의 길이겠습니다.
참행복한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하는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부단히 주님을 찾는, 부단히 회개하는, 부단히 참행복을 추구하는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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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늘 복음(마태5,1-12)은 '참행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참행복 선언은 '아홉 가지'입니다.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박해와 사악한 말을 듣는 사람들!
아홉 가지 행복 선언 중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일까?'
'육이 가난하다.'고 말할 때의 그 의미는 '육을 위한 양식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가난하다'고 말할 때의 그 의미는 '영을 위한 양식의 부족함'을 의미하는 '내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것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영으로 채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곧 이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이고, 끊임없이 회개하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거룩한 영의 충만함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참행복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연중 제4주일'인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육체적 가난 때문에 질병과 기아와 기후 재난으로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는 날이고, 그들을 위해 특별 헌금을 봉헌하는 날입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정성과 마음을 모으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사람들이며,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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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DnW-ex9S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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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
참된 행복을
주님께
묻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행복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바라보며
주님 없이는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슬픔도 주고
받으면
행복이 됩니다.
행복은
주님에게서
시작됩니다.
행복이 깨어나야
우리의 삶도
깨어납니다.
하느님 중심의
행복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알아보고
만나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야말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행복의
나라입니다.
행복의
최전선에 계시는
주님과 함께
행복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합니다.
마음의 가난함을
슬퍼할 줄 아는 슬픔과
성숙한 온유와
목마른 정의와
마음의 깨끗함과
평화의 실천과
모욕과 박해가
참된 행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행복입니다.
삶은
행복을 향하고
행복은 삶을
가치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분이신지를
묻는 행복입니다.
새로운 모습의
행복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반대쪽에 있는
우리가
십자가의 참행복을
깨닫습니다.
십자가는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를
만나는 은총가득한
주일 되십시오.
여기에서
다시 시작되는
참된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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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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