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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묵상글 ( 연중 제11주일. - 시달리고 기가 꺾인 이들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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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시달리고 기가 꺾인 이들의
오늘 주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많은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으시는 겁니다.
왜 뽑으셨고 왜 열둘을 뽑으셨을까요?
열둘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의 전후 맥락을 보면 열두 사도를 뽑는 더 절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주님께서는 많은 안타까움을 표하시는데 그 안타까움이 대단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의 안타까움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양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습니다.
그리고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그런데 군중은 누구에게 시달리고 왜 기가 꺾여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참고하면 강도들에게 시달리고,
불충한 집사들에게 시달립니다.
강도들은 그저 양들을 팔아먹고 잡아먹으려만 든다고,
불충한 집사는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나눠주지 않고
술이나 먹고 종들을 학대한다고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바가 있지요.
강도들이란 세상 권력자들과 악덕 기업가들일 수도 있고,
불충한 집사란 우리 공동체의 책임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 의해 양처럼 순하고 힘없는 군중이 시달리는 것도 안타깝지만
오늘 주님의 더 큰 안타까움은 그런 양들을 지켜주고
종들에게 먹을 것을 줄 목자와 집사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 양들이 기가 꺾인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달려도 내 편이 되어줄 목자가 있다면 기가 꺾이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 편이 되어줄 목자가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안타깝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한탄하시며
열두 사도를 착한 목자와 충실한 집사로 뽑아 세우십니다.
우리 모두는 양들이기도 하고 목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종들이기도 하고 집사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종들이고 양들이며 주님의 집사이고 목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주님의 집사로 부르시고
주님의 목자로 뽑으신다면 어떻게 응답하실 겁니까?
순종하시겠습니까? 불순종하시겠습니까?
순종은 하지만 억지춘향입니까? 기꺼이 응답하실 겁니까?
영예롭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부담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자를
고쳐 주게 하시는 것이니 이것을 우리는 영예롭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적으로는 그럴 힘이 없고 그래서 부담스럽지만
신앙적으로는 영예로 생각하고 주님의 힘이 입어 그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고 하십니다.
먼저 이스라엘에 가고 나중에 이방인들에게도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밖으로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기 전에
안에서부터 그러니까 나부터 그리고 같이 사는 사람부터 돌봐야겠습니다.
세상의 복음화 전에 나의 복음화와 공동체의 복음화를 하고,
밖의 병자와 허약한 이를 치유하기 전에 안에서부터 치유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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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란 하늘 나라, 즉 천국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 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안에 있고 일상의 작은 체험에서 시작됨을 말하고 계십니다.
하늘나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과 순수성을 간직하는 것이며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지속적으로 사랑안에 함께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른 이들이 사랑할 때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나온 좋은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고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사람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며 하느님 나라의 참 의미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의 사랑으로 부터 힘을 얻을 때에만 존재하고 사유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마음깊은 곳으로부터 힘을 얻을 때에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삶은 높은 곳을 향한 삶이며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며 세상을 뛰어 넘는 삶입니다.
크고 위대한 일에 대해서는 부푼 꿈을 간직하면서도 작고 미소한 일 앞에서는 겸손하게 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벌써 하늘나라를 사는 셈입니다.
불안속에서도 유지되는 마음의 평정, 평화롭지 못한 세계 앞에서도 변함없이 간직되고 있는 평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일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가슴을 채우고 있는 무한한 세상에 대한 꿈,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만족, 더 큰 완성을 떠올리며 살아있는 성실, 바로 이곳에서 하늘 나라는 시작됩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안에는 지상에서 이미 하늘나라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관을 이 땅과 지상의 재물, 지상의 안락, 지상이 줄 수 있는 것에 두는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환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사랑과 기쁨과 단순성을 지니고 살아갈 때 하늘나라는 바로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상기합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몬카다(Moncada)의 성체기적
스페인 - 1392년
성탄절 전야였다.
방금 시계탑의 종이 열 한 번 울렸다. 곧이어 그 종은 첫번째 신호를 울렸다. 차가운 저녁바람은 자정미사를 초대하는 이 기쁨의 종소리를 몬카다 마을의 골목길을 지나서 또 더 멀리 논과 오렌지가 심어진 과수원 들판을 지나 발렌치아 시까지 실어갔다.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들 자신의 집에서 나와 차가운 북동풍 속으로 들어갔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바람을 자신의 따스한 고향에서 내몰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바람은 아기예수를 위하여 한시도 주저하지 않고 떨면서 어둠 속을 지나갔다.
맨 앞의 의자에는 이미 다섯 살 정도의 명랑한 농부의 딸이 어머니와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열망에 가득차 아기예수, 마리아와 요셉, 천사, 구유, 목자들, 그리고 많은 작은 촛불을 보기 위하여 빨리 서둘러 집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 생기있는 작고 검은 눈동자는 목자들을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성스럽게 왼쪽 제단에 마련된 허름한 마구간의 마리아와 요셉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어머니에게 여쭈어보았다.
“엄마, 구유는 비어 있는데, 그럼 아기예수는 어디 었어요?"
“미사가 끝난 후에 신부님께서 가져다 놓을 것이란다. 그러면 볼 수 있을 거야. 잠시만 기다리면 돼요. 그리고 조용히 하거라 얘야!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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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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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연중 11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과 하느님 백성의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 도착하고 난 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게약체결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계약 체결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사제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독점적인 수취자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사명과 함께 보편적 구원의 도구가 되고, 하느님께서는 사제들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민족을 당신께로 이끌게 될 것을 밝히십니다
<제2독서>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의롭게 된 우리에 대한 증언입니다. 곧 그리스도 한 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났고 모든 이가 구원을 받았음을 확인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군중을 위해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군중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길잃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파견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회개하여 새롭게 하느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 역시 단지 복음의 수취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 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엾은 마음”은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그런데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것은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은 아닐까요?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지 않음이 아닐까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아픈 마음을 같이 지니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미’는 그 마음을 가슴에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하오니,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곳으로 가게 하소서!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게 하소서!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게 하소서!
해야 할 바를 그만두지 않고 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으며 지켜야 할 바를 끝까지 지키게 하시고,
내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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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약속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열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 얼마나 큰 사랑이 우리를 위해 주어졌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 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은 바로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로 받은 것이니 기쁘고 감사히 적극적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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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 27일에 부르클린 교구에서 21명의 ‘종신부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제가 함께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도 5년 동안 공부하였던 형제님이 종신부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가족처럼 서로 아껴주는 따뜻한 공동체입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관심이 있었기에 2명의 사제가 나왔고 이번에는 종신부제가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 너희는 주님께 일꾼을 청하여라.” 부르클린 한인성당은 주님께 일꾼을 청하였고 하느님께서는 2명의 사제와 1명의 종신부제를 보내 주셨습니다. 부제님은 지난 성령강림 대축일에 처음으로 부제 복사를 하였고, 강론을 하였습니다. 3개 공동체의 합동미사였기에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로 강론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던 스테파노 부제처럼 복음을 전하는 부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였던 스테파노 부제처럼 신앙의 모범이 되어 주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제가 있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도 6명의 복사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저도 이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복사들의 맏형으로 대학에 갔지만 복사를 서는 진석이가 있습니다. 특수학교를 다니면서 말이 없었던 진석이의 동생 민석이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지금은 눈을 감고도 종을 칠 수 있는 능숙한 복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곧 대학에 가는 훈이는 훤칠한 키가 영화배우 같습니다. 훈이 동생 민이는 활달한 성격으로 복사단을 기쁘게 합니다. 병천이는 복사대장이 되어서 3개 공동체의 미사에도 복사들을 잘 이끌고 있습니다. 병윤이는 과묵한 성격이지만 할 말은 다하는 복사입니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이 복사들 6명이 모두 이태리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복사들이 성지순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복사들 중에도 일꾼을 뽑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성서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봅니다.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제자들에게 병을 고쳐주는 능력과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어 백성들에게 보내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봅니다. 죄 중에 있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 이야기 하는 바오로 사도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축구공은 순간 우리들의 감격하게 하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주고 우리에게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빛을 줍니다. 축구선수들은 게임에서 이기면 많은 보상을 받습니다. 군 입대를 면제 받기도하고, 두둑한 상금을 받기도하고, 프로 선수들은 연봉이 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시는 그 모든 일을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백성을 위해 제자를 파견하시고 목숨까지 바치셨지만 또한 아무런 보답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을 통해서 늘 주님과 함께 기쁨을 느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생기가 넘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주님의 제자로서 사명을 다하다가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는 길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첫째는 나를 어둠에서, 나를 죄악에서 구해 주실 분은 하느님뿐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거저 받았으니 거주 주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욕심과 이기심에서 자유로워져야합니다. 끝으로 죄 많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들도 이웃을 위한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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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신자의 행복한 삶
-성소, 친교, 선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는 깨어 눈만 열려 있으면 곳곳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성서안에서, 전례안에서, 공동체안에서, 자연안에서, 서로간의 대화안에서, 역사현실안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니 모두가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대상이 됩니다. 성서를 읽으며 주님을 만나듯 일상을 통해서도 주님을 만납니다.
며칠전의 기사가 나라 공동체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현실에 대한 진단입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세상’이라 했고 ‘침몰하는 난파선’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귀기울여야 할 예언적 진단입니다.
“대전환이 필요한 때에 대환란이 닥쳤다. 실망하고 비관하여 관망하는 태도로는 위기를 돌파할 수도 복음의 원수를 몰아낼수도 없다. 깨어 기도하며 사방을 살피자.”
“대한민국은 압축성장에서 압축소멸로 치닫고 있다. 벼락발전에서 벼락소멸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기적의 나라에서 인간이 만든 재앙의 나라로 돌변하고 있다. 나라를 살려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인간공동체로서 본질과 속성이 사라지고 삭막한 사막으로 바뀌고 있다. 위로는 국가의 공적인 보편적 역할이 실종되고 아래로는 시민들의 인간적 관계의 그물망이 해체되고 있다.
대한민국民國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물질과 땅만 남는은 대한물국物國과 대한 토국土國도 막아야 한다. 개인이든 집안이든 나라든 안에서 스스로 망할 징조를 보인 다음에야 밖에서 망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외국에 침탈을 당한 것이 아니다. 즉 망국이 아닌 스스로 멸국의 길을 가고 있다. 지금 당장 나라를 살리는 혁명이 시작되어야 한다.
정치혁명과 사회혁명, 정신혁명과 인간혁명이 절실하다. 그 혁명을 싹틔우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숱한 난관을 극복해온 우리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절대로 그럴수는 없다.”
예언자적 비분강개한 애국자요 열사의 외침처럼 들립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화급한 주제입니다. 모든 혁명의 기초는 내적혁명이요 영적혁명입니다. 우리로 하면 통절한 회개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 책임을 다하며 제대로 주님을 향해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늘 새롭게 우리 삶의 목표는, 삶의 방향은, 삶의 중심은, 삶의 의미는 세상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이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희망상실, 의미상실, 중심상실, 방향상실의 연옥같은 세상에서도 참된 신자의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살아야 하고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정신건강, 영혼건강의 영약인 희망, 기쁨, 평화, 감사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첫째, 성소와 응답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 앞서 사람을 찾아 오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광야여정 여러분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들을 독수리 날개에 태워 데려왔듯이 우리도 알게모르게 당신 독수리 날개에 태워 지금 여기까지 데려다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통해 우리는 사제들의 나라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온세상의 주인이자 중심이신 하느님을 잊음이 재앙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백성을 대변한 중재자 모세를 통해 당신 백성에게 살길을, 응답을 촉구하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하느님은 새모세인 예수님을 통해 열두 제자를 불러 주시어 사도로 삼아 사명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새롭게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장엄한 권고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러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화해에로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소에 응답하여 화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 만남과 친교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자 형제들과의 만남이요 친교입니다. 파견과 선교에 앞선 충전시간이기도 합니다. 밖에서 사도의 선교사로 살기 전,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과의 관계를, 동료 형제들과의 관계를 깊이 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기 전부터 주님은 제자 교육에 충실했음을 봅니다. 말그대로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보고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 배워야 할 바 이런 연민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 공부, 말씀 공부에 전념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당대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부단히 배우며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했을 것입니다. 교황님이 강조하셨듯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세 스타일을, 즉 친밀함, 연민의 마음, 부드러움을 배웁니다. 이제 제자들의 공부가 무르익어 파견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주님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파견을 준비하라는 말씀이 분명하니 다음 전개되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내 자신이 주님의 일꾼으로 충실히 일할 때 주님은 일꾼들을, 성소자들을 보내주십니다. 주님과 관상의 친교가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은 파견과 선교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파견과 선교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존재이유가 선교입니다. 길잃은 양들 세상에 당신 열두 제자를 사도로 파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전이나 오늘이나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이 길잃은 양들입니다. 세상 곳곳에 차고 넘치는 길잃은 사람들입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잃고 살기에 죄도 병도 많은 세상에 차고 넘치는 괴물들과 폐인들입니다. 당대의 파견되는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은 고쳐 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3.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고, 4.마귀들을 쫓아 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오늘 복음의 요약이자 정수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파견되기전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 치유되고 살아나고 온갖 영적나병들이 깨끗해지고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마귀들, 세속주의, 물신주의, 광신의 이념의 마귀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사실 영적으로 내적으로 위 4항목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죄인들이자 병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도 영적나병환자들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도 하늘 나라의 실현이 되고, 이런 선교활동과 더불어 살림의 기적, 치유의 기적이요 우리의 온전한 치유의 구원도 이루어집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선교의 대원칙입니다. 참으로 건강하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입니다. 저절로 따라오는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의 삶입니다. 오늘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랑의 실천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의 관상 은총이 선교 활동의 샘입니다. 참된 신자의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1.성소와 응답에 충실하십시오.
2.만남과 친교의 삶으로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를 깊이하십시오.
3.파견과 선교에 충실하십시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는 그날까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로 파견되어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늘 나라를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사는 제자요 사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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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제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다.’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파견되기 전에 먼저 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잘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 뽑으시는 장면을 우리는 볼 수 있는데 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돈이 많은 것? 아니면 박식한 것? 물론 그러면 더욱 좋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열두 사도는 특별히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로, 사도로 뽑힌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예수님 하나로 세상을 살고, 그분 하나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제인 제가 사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하실지 모릅니다만 저는 사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뽑혔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른다고 응답하고 그분의 말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빛은 어둠을 찾아가야 빛나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야만 짠맛을 냅니다. 이것이 파견입니다. 세상의 어둠에서 용기 있게 소리치는 것, 자신을 버리고 복음을 위해 봉헌하는 것. 이것이 파견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파견된 자들, 파견받은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내가 다 주어도 다시 하느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기도 쪽지
이곳 성지에는 독서대 앞에 기도 틀이 있습니다.
이 기도 틀은 기도 쪽지를 꽂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기도 성무일도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그 기도 안에 쪽지에 적어놓은 내용들을 넣어 기도합니다.
많은 신자분이 적어놓고 쪽지는
그 수만큼 각양각색의 기도가 들어있습니다.
건강 회복을 위한 기도
직업과 학업에 관한 기도
혼인과 잉태에 관한 기도
나라의 정치를 위한 기도
화합과 일치를 위한 기도
저는 매일 이러한 지향의 기도를 봉헌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뜻에 맞도록 모두 이루어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저는 믿습니다. 모든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말입니다.
아버지 뜻에 맞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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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떻게 하면 인생을 사랑과 친절로 수놓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답을 내놓았습니다.
“남에게 특별히 친절한 행동을 한 가지씩 하라. 당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상에 참여하라.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격려하라. 자기가 한 말을 성실하게 지켜라. 사람들이 베푸는 선물에 고마워하라.”
어떻습니까? 그렇게 특별한 내용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대답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의 대답이었습니다. 인류가 가진 믿음과 철학을 토대로 탄생했던 중요한 종교, 철학 저작들을 동원해서 지혜와 통찰을 말하도록 만든 인공지능의 대답입니다. 기계의 대답이어서 실망스럽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세상의 지혜를 교육해서 한 말이라 관심이 생깁니다. 모든 지혜를 종합하면 특별한 무엇인가가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지혜는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당연히 행동하는 것이 지혜였으며,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줄여 나가는 것이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자신의 서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 3,23)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 주신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사랑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가엾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의 뜻은 ‘내장이 끊기는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말로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라고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간이 문드러지거나 새까맣게 타는 모양을 의미합니다. 몸속 장기는 감정과 기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지요. 기분 나쁠 때 음식을 먹으면 체하는 사람 있고, 신경이 예민해지면 대장이 과민해져서 설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한 두통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은 군중의 아픔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함께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픔을 함께 할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 하십니다. 이 일꾼에게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처럼,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꾼은 성직자, 수도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모두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랑을 수확할 일꾼이 되어야 하는 우리가 많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아닌, 나 자신부터 주님의 일꾼이 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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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으로 사람이 된다(나쓰카리 이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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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가 하늘나라입니다>
내가 가까이 부르기에
기꺼이 내 곁이 되어 준 그대는
이제부터 나의 때와 나의 곳입니다
그대가 나의 때와 나의 곳이요
내가 그대의 때요 그대의 곳이니
그대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니 가서 선포하십시오
그대가 머무는 때와 곳에서 당당하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 가까이 있는 이들은
하늘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가 있는 곳이 하늘나라요
그대가 있는 때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 머무는 때와 곳에서
앓는 이들은 나을 것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 머무는 때와 곳에서
서러운 이들은 위로받을 것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 머무는 때와 곳에서
버려진 이들은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 머무는 때와 곳에서
쓰러진 이들은 일으켜질 것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 머무는 때와 곳에서
더러운 이들은 깨끗해질 것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 머무는 때와 곳에서
악은 힘을 잃고 선은 살아날 것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 머무는 때와 곳에서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솟아날 것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니
그대 머무는 때와 곳에서
미움은 시들고 사랑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대가 하늘나라이어야 합니다
그대가 하늘나라로 물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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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허석훈 루카 신부님. 서울주보. 2023.06.18. <한강성당 주임>
달라도 너∼무 달라, 아름다운 공동체!
어느 수도자가 그의 스승에게 “하느님을 섬기는 보편적인 길을 하나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답니다. 그러자 스승은 “사람들에게 어떤 길로 가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배움으로 섬길 수도 있고, 기도로도 섬길 수 있는가 하면, 단식으로 섬길 수 있고, 먹음으로써 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기 자기 마음을 살피고, 자기 길을 가야 한다.”라고 답하였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을 만나 섬기는 것으로 같지만, 그 모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을 교훈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 둘 곳 없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당신의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아 가까이 부르시고, 당신의 능력을 나누어 주시며, 하늘나라를 선포할 사명을 맡기십니다. 우직하지만 성미가 급한 베드로부터 세리인 마태오, 이성적으로 꼼꼼히 사고하는 토마스, 혁명당원인 시몬, 후에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사람을 뽑아 세웁니다.
예수님과 기쁘게 동고동락할 친구가 열두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열두 명의 사도들이 지닌 개성이 각각 너무 독특하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각기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매력에 열두 명이나 인생 전부를 걸고 모였다는 사실은, 정말 생각할수록 환상적인 일입니다.
우리도 모두 예수님을 위하여 이 자리에 있습니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나와 다른 생각에 화나고, 화나서 다투고 미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서로의 개성이 충돌할 때,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불리고 뽑힌 사람들로 이 자리에 와 있다면, 열둘의 제자들이 다양한 개성에도 불구하고 힘을 모아 예수님을 증거하고 서로 사랑하였듯이, 우리의 삶 역시 이를 지향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제자들의 삶을 통해 바라보건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의 가장 유용한 선물은 ‘정직한 자기 개방’과 ‘진지한 긍정의 시선’입니다. 누구도 타인에게 받는 긍정 없이는 자신을 기쁘게 수용하는 내밀한 즐거움을 얻을 수도 없고, 삶을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인정이 되는 따뜻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제자들이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섰듯이, 우리도 그렇게 이웃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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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연중 제11주일. 키엣 대주교님.
선교는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바라보는 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루 동안 다른 사람의 눈을 마주보고, 말하고, 마음을 들여다보려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 할 시간이 없기에 서로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시간에 쫓기고,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 불안하여 허둥대며 밖으로만 뛰어나가느라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뒤돌아 볼 시간이 없습니다. 바쁘다는 핑게로 가까운 이웃의 비극을 외면한 적도 많습니다.
그 사람의 눈을 자세히 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깊이 이해할 때 가엾은 마음도, 공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눈에서 마음까지의 거리는 닿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멀기도 하지만 가깝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을 열어 준다면 깊은 길도 볼 수 있지만, 닫아버리면 티끌조차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좁고 긴 터널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자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가엾은 마음도 들지 않을 것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의깊게 바라본다는 뜻이며 그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많은 군중을 마주하고 계셨지만 그들 각각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기에 예수님께서는 한명 한명을 유심히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도, 실현될 수 없는 사랑도 아닌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허둥대며 고통받고 갈망하는 군중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한치의 주저도 없이 그들에게 위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3가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소통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고개들 들어 다른 사람의 눈을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면 도움을 줘야하고 그러면 나의 시간과 돈을 빼앗길 수도 있기에 외면합니다.
직장의 동료들을 보십시오, 혼잡한 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행복한 모습입니까? 아니면 외로운 영혼들의 모습입니까? 그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신 그 눈빛으로 세상과 그들을 한번 더 바라보고, 그들과 마음을 나누어 보십시오.
연민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십시오.
나의 욕망을 채우기에도 바쁘고 지쳐 다른 사람을 돌 볼 여유가 없어 점점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닫아버린 마음의 문은 점점 차가워지고 굳어져만 갑니다. 굳어버린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눈빛을 읽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고 마음의 움직임을 느껴 보아야 합니다. 타인의 아픔에 눈물 흘리고, 그들의 불행에 같이 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과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십시오.
선교는 자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비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천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자비의 사랑만이 다른 사람을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 대한 증거자가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소통과 자비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것을 알았다면 이미 선교를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자비의 주님, 저희가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가까운 이웃들의 눈과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랑과 지혜를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가족들과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2. 타인의 어려움을 마주했을때 가장 먼저 드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3.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조화롭게 사는 것이 선교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선교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공감은 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고 그 마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전달되는 것이 진정한 공감입니다. 오늘 나와 가까운 사람의 눈을 보고 그의 마음을 읽고,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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