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사야 48,17-19 마태오 11,16-19
우상숭배로부터 하느님 신앙으로 나아가기
최고선의 가치로부터 공동선의 가치로 우리의 성찰이 옮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이 오래되고 끈질긴 풍조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에덴 동산 시절부터 활약해 온 마귀의 세력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수하로 삼고
죄를 저지르게 하고 있어서 생겨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될 수 없었고, 오히려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된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거짓 목자들의 우상 숭배를
따라하다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감수성을 아예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최고선 가치들에 무심하고 우상 숭배에 기울어졌던 백성들에게
한탄하였고(이사야 예언서 48,18-19), 유감스럽게도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여전히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어 있던 세태에 대해 한탄조로 말씀하셨습니다(마태오 11,16.18-19).
우상 숭배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최고선의 가치들에 대한 영적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같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도 우상숭배자들이 꾸며 놓은
거짓 가치들에 현혹되면 하늘 나라 대신에 지옥 나라가 펼쳐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를 선사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비록 당신이 오해를 받아
십자가형을 받아 죽임을 당하시면서도 그 전에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임을
누누이 약속하시면서 당신 현존의 징표와 조건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 징표를 따라서 그 조건을 채우기만 하면, 예수님 당시의 어리석은 유다인들처럼
우상숭배에 빠지는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풍성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노선을 계승하는 역대 교황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현존하시는 양식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말씀으로서 그분은 선포되는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신앙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루카 24,13-35).
둘째는 성찬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신 그분은 성체성사에서 거룩하게 변화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루카 24,13-35; 22,19-20).
셋째는 사랑의 섬김으로서,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서로에게 발을 씻어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요한 13,5.14-15.34).
넷째는 세례 받은 모든 신자에게 성령께서 이끌고 계시고 이를 알아볼 능력인 신앙 감각이 있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요한 6,56; 14,20).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로가 서로 안에
존재하시듯이,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 믿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다섯째는 둘이나 셋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신자들이 각자의 신앙 감각에 입각하여
평등하게 논의에 참여하여 공동으로 합의하는 교회 구조를 이룩하는 것입니다(마태 18,19-20).
그리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화의 빛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다섯 가지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성을 온 세상에 증거할 수 있게 되고, 사회의 구성원들도 우상숭배의
풍조에서 벗어나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 가치를 체화하신
존재로서 그분의 현존 자체가 이 가치들을 자동으로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이 최고선의 가치와 배치될 뿐만 아니라
이 가치들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우상들과 맞서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든 우상들은 거짓 자유로 포장하여 자유를 억누르고, 돈을 섬기게 만들어 평등을 해치며,
기득권 카르텔로 정의를 짓밟는 사회적 불의를 용납하고, 전쟁을 선호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반평화적이고 반생명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게 되면 이 최고선의 가치들을
수호하고 증진시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삶을 역사 안에서 계승하게 됨으로써 교회가 세상에 대해 최고의 봉사를 하는 것이며,
또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도직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건, 또 얼마마한 성과를 내건 상관없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책임이
바로 우상숭배 풍조에 맞서고 하느님 신앙의 감수성을 살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최고선 가치의 수호로 인해 이룩되는 사회적 변화를 인간화와 민주화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사회에 대해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요 사회가
교회로부터 입을 수 있는 최대의 혜택입니다.
인간화와 민주화의 원리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면 적어도 우상숭배의 풍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임으로 최고선의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
우상숭배 풍조를 배격하고 하늘 나라를 이룩하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마태 11,19).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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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사야 48,17-19 마태오 11,16-19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조건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 ‘자기중심’이라는 명찰을 떼어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도
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진정한 천상의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감옥이 워낙 깊고 그 벽이 두터워서 그곳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어렵기에
‘철들자 망령’이라는 말이 나왔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과 당신을 두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며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객관적이라기보다 자신을 둘러 싼 주관적이라는 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전전 교구장이신 지학순 주교님께서는 ‘욕먹는 신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신품 받는 그날에 그 말씀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왜 하필이면 욕 먹는 신부람’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주교님의 그 말씀이 ‘줏대 있는 사제의 삶’,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뿌리도 없고 부평초처럼 기준도 없는 판단이 빚어낸 말들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줏대 있는 사람들은 비록 세상의 비판을 받더라도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고 때로
외롭고 힘들더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민심을 ‘장터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에 비유를 하십니다.
철부지 아이들이 떠드는 말, 노래가 어떤 기준이 있겠어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민심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있지요.
인기라는 것, 한때 얻은 평판은 안개와 같아서 해가 나면 언제 있었나 싶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데요.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오 11,18-19ㄱ)
이렇게든 저렇게든 세상 사람들은 말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터의 아이들의 노래와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며
이런 진리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ㄴ절)
믿는 이들의 많은 교우들이 신앙을 ‘마음의 평온’으로 꼽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유를 대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함이고
가정이 건강과 복을 얻기 위함’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서 생명를 잃었고 주님께서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세상에 아부했다면
그들은 적어도 생명을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뜻을 어긴 분들이시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분들은 적어도 세상의 복과 평화만을 구하지는 않지요.
그리스도께서 가신 ‘줏대 있는 길’을 따르려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은 자기중심에서 가족들을 위하고 건강을 챙깁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며느리라 시어머니를 거스를 수 있음을 시사하셨습니다.
혈육이라고 해서 나와 가깝다고 해서 가던 길이 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서
복음의 가르침을 위해서 신조를 지키고 생명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따르는 박해와 고통도 감수해야 하지만
줏대 있는 신앙인이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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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 바오로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사야 48,17-19 마태오 11,16-19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지만, 유다인들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도 마음을 열지 않는 완고한 이 세대를 비난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혼례를 거행한 뒤 시장에 모여 춤을 추었고,
장례 뒤에는 죽음을 슬퍼하며 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른들의 이러한 생활 양식을 모방하여, 어린이들은 피리를 불며
춤을 추거나 가슴을 치며 곡을 서로 주고받으며 놀았나 봅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즐거운 가락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데,
다른 무리의 아이들은 함께 흥을 내고 어울려 춤을 추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울한 곡을 연주하거나 장송곡을 불러 보아도 함께 슬퍼해 주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거나 곡을 하는 아이들에게 장단을 맞추지 않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종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그는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고행자의 삶을 삽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마귀 들린 자’로 취급하면서 배척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선포하시고
죄인들과 어울리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면서, 단식을 하고 죄인들과 어울리지 말라며 배척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그것이 조작된 것인지 참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워 주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열어 예수님의 상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이웃과 형제의 상처에 눈을 떠야 합니다.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