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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내사마을-국수봉-치술령-박제상유적지
이종태 추천 0 조회 166 09.09.21 23:4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1. 일자 : 2009. 09. 05(월요일, 맑음)  

    
2. 산행지 및 개요 :  국수봉/치술령(800m) 

 

3.누구랑: 나 하나

 

4. 산행코스:  
  내사마을(10:10출발) - (2.5km,60) ->옥녀봉- (2.8km,90) ->국수봉-(1.5km,30)->서낭재

  - (1.5km,30)-> 콩두루미재- (1.5km,60)->치술령- (1.3km,30)->법왕사- (1.5km 30)

  - >박제상유적지  (산행완료:16:00 ,6시간소요)

 

4. 산행후기:

  

어제는 오랜만에 오대산을 산행하고 밤늦게 도착했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니 가뿐하다. 두동으로 가야하는데 어차피 등산복에다 장비까지 갖추었으니 내친김에 울산 다운동 내사 마을에서 치술령까지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두동까지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동생에게 내사마을까지만 태워 달라고 했더니 놀라는 기색으로 무리하지 말란다. 작년에 한번 가본 경험이 있어서 자신이 있는 터라 동생을 설득하여 내사마을까지 동생의 차를 타고 갔다.

  내사마을은 다운동에서 척과 방향으로 가다보면 중간지점에 두동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바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동네이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아주머니가 길가에 앉아 울산 배를 팔고 있다. 지나는 길에 말을 건네니 먹음직스런 울산 배를 두개나 공짜로 준다. 넉넉한 울산의 인심을 느끼는 순간이다.

  내사 마을은 국수봉 정상을 용의 머리로 본다면 꼬리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마을 입구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세 곳의 묘소를 잇 따라 지나고 나면 빽빽한 숲 사이로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능선을 따라 외길로 나있는 등산로는 왼쪽에 범서면 일대를, 오른쪽에 외사마을 끼고 끝없이 이어진다.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양쪽지역을 번갈아 굽어볼 수 있어 경치를 두 배로 즐길 수 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한동안 올라가다 보면 어느 틈에 나무는 간데없고 잡풀이 무성한 길이 이어진다. 언젠가 산불이 발생 해 소나무가 타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햇살이 유난히 따끔거린다. 빨리 이곳을 지나가고 싶지만 어지간히 지나가도 그 상태이다. 가파른 산길을 한동안 올라가니 마침내 산봉우리가 나타나고,  사방으로 탁 트인 능선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철탑 사이를 지나 한참을 가다보니 오른쪽 바위 위에 동양나일론 직원들이 만든 추모 비석이 보인다. 아마 산재로 인한 희생자가 아닌가 여겨진다.

  산봉우리 옆에 있는 산불예방 조망대 옆을 지나다 보니 예전에 없던 CCTV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제 산불도 최첨단 시설물이 설치되어 원거리까지 탐색이 되고 만약 불이 날 경우 경고음이 발생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북한의 임진강 댐 방류 시 관리부실로 경고음이 작동이 안 되어 인명피해가 났듯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으면 그저 무용지물일 뿐이다. 여기도 운용자의 관리 소홀이 염려 된다.

  철탑에서 옥녀봉 정상까지는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사방 시야가 트여있어 가슴속까지 후련해진다. 오래 방치된 듯 보이는 산소를 하나 지나면 신라시대 산성의 잔재인 것 같은 돌로 쌓은 성벽이 나타나고, 성벽 사이로 난 좁은 틈을 지나 한동안 올라가면 옥녀봉 정상이 나타난다. 

 옥녀봉 정상(416m)에 다다르니 사방에 거칠 것이 없는 완전한 전망대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돌아보니 다운동 아파트단지가 아득히 멀리 보이고 함월산 정상의 아파트들도 잡힐 듯 가까이 있다. 다시 고개를 천천히 돌리니 척과 마을과 척과 초등교, 함월산 정상을 비롯하여, 울산 시가지와 다운동, 문수산, 언양 반천, 두동 일대가 슬라이드처럼 펼쳐진다. 멀리 관문성도 보이고 북구 농소3동 달천마을과 척과마을을 경계 짓는 연화산도 낮게 내려다보인다.

 옥녀봉은 옥황상제의 딸인 옥녀가 매년 음력 보름날 밤이면 내려와 놀다가 그 아래 비단바위에 옷을 벗어놓고 밧줄을 타고 바위 밑의 샘물에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실제로 옥녀봉 아래에는 높이 30m, 길이 80m의 바위가 있다. 영남알프스 태극 종주대가 세워놓은 옥녀봉 입석 안내문도 선명 하다.

  옥녀봉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내리막길을 가는데 아주머니 두 분이 올라오다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한적한 산길에서 나 홀로 등산객을 만나니 신기한 모양이다. “오늘은 등산객이 없었는데....” 하면서 반갑게 말을 건넨다. 척과 마을에 사는 분들인데 도토리를 주우러 왔다고 한다. 차비가 없어 걸어온다고 농담을 하니 돈을 빌려 주겠다면서 맞장구를 친다. 

  아주머니들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다시 가는데 좌측 정지불 골짜기에서 돌 깨는 소리가 요란하다. 10년 넘도록 돌을 깨어 낸 산허리는 내장을 허옇게 드러낸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자연을 이렇게 파괴하면서까지 현대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 과연 인간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인가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 씁쓸함이 인다.

  내리막길이 끝나고 나면 가장 혹독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국수봉 정상으로 치닫는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지레 좌절감이 들지만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시험대라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가파른 경사를 지나 바위틈새를 빠져나와 정상까지 가는 데는 45분 정도. 정상 못 미쳐 30여m 지점에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정상보다 오히려 전망이 더 좋아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마을과 멀리 도심 경치가 성취감을 더해준다. 등산로 정비 사업으로 트라스도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여기서 5분 정도 북쪽으로 가니 국수봉 정상이 나타난다. 여기도 깔끔하게 잘 정비 되어 있다. 이정표도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표기해 놓아 보기가 좋다. 예전에 아침 일찍 쑤비와 함께 올라와 쉬던 곳인데 지난주 쑤비가 어디론지 사라져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빨리 꼭 돌아 왔으면 하는데.... 오늘 따라 쑤비생각에 혼자 먹는 점심이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다

 범서읍지에 따르면 국수봉은 원래 한자로 國讐峰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모든 산들이 신라의 경주를 중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자세인데 반해 유독 국수봉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고 해서 원수를 의미하는 讐자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박제상의 충절이 있은 후로는 국가를 수호하는 국수봉(國守峰)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치술령으로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 숲속 길을 내려와 은을암 가는 길을 가로질러 산속으로 진입하면 해돋이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 한 켠의 납골묘를 지나면 서낭재 팻말이 보인다. 이어 능선을 오르면 두동 삼동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이른다.

  삼동안(은편, 만화, 이전리 3개리를 일컫는 말)의 들녘은 어느새 가을로 물들어 가고 있다. 이곳에서 치술령에 이르는 능선은 도토리 나무가 유독 많아 가을만 되면 온 산이 도토리 천지이다. 편안한 능선을 따라가면 비조마을에서 돌기마을로 넘어가는 콩두루미재가 나온다. 이 고개는 옛날 두동 인근의 나뭇꾼들이 나무를 하러 오기도 하고 봄 이면 아낙들이 나물을 캐러 오곤 하던 곳이다.

  능선길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갈비봉에 이르고 이어 헬기장을 만난다. 이 지점은 작년 가을 가족들과 함께 도토리를 엄청나게 주운 곳인데 아직은 때가 일러서 그런지 도토리는 보이질 않는다. 이 길은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만치 익숙한 길이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오르내리던 길.... 특히 작년 한 해 동안 고향에 머물면서 더욱 친숙해진 길이다. 언제 와 봐도 정답고 올 때 마다 반가이 맞아주는 길이다.

  헬기장을 지나 마지막 고비를 올라가면 신모사지가 설치된 높이 785m의 치술령 정상이다. 양 사방으로 보이는 풍광을 이러 저리 살피면서 10여분 가량 서북 능선의 억새풀 길을 헤쳐 내려가니 망부석이 나타난다. 치술령 망부석에 얽힌 이야기는 이전 산행 후기에도 소개한 바 있지만 다시 한번 적어 볼까 한다. 망부석의 전설은 전국 곳곳에 전해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제상 부인이 남편을 그리며 통곡하다가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이 곳 망부석의 전설이다.


 “박제상은 신라시조 혁거세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파진찬 물품(勿品)이다. 제상이 벼슬길에 나가 삽량주간이 되었는데, 고구려와 일본에 인질로 보냈던 보해(寶海)와 미해(美海)를 보고 싶어하는 눌지왕이 왕자들을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이에 제상은 고구려에 사신으로 들어가 왕을 설득하여 보해를 모시고 돌아왔다. 그러자 눌지왕은 대단히 기뻐하면서도 왜국에 가 있는 미해도 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에 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율포(栗浦)에 나가 왜국으로 갔다. 그의 아내가 포구로 달려갔으나 이미 배는 떠나간 뒤였다. 왜왕에게 신임을 얻은 박제상은 그들을 안심시킨 다음 안개 낀 날을 택해 미해를 신라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남아 스스로 붙잡히게 되었다. 온갖 회유와 고문으로 왜왕은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권했으나, 신라의 개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될 수 없다는 박제상의 말에 불태워 죽이고 만다. 왜인들이 박제상을 고문할 때 갈대 위를 걷게 했는데, 갈대에 있는 거뭇거뭇한 빛은 그의 피가 묻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박제상의 부인은 세 딸을 데리고 왜국이 보이는 치술령에 올라서 울다가 굳어져 돌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망부석이다. 세 딸 중 두 딸도 함께 죽어서 혼백이 모두 새가 되었는데, 이들의 혼백이 날아오른 곳은 비조(飛鳥)라는 지명으로 바로 우리 동네이다. 그리고 산으로 날아간 혼백은 국수봉 아래에 있는 바위에 숨었다고 하여 이곳을 은을암(隱乙岩)이라 한다. 또한 사람들이 부인을 달래 내려오게 하려고 하자 다리를 버티면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여 그곳을 벌지지라 한다.”


  이런 전설과 함께 또 한가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참새미에 관한 것이다. 망부석에서 100m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의 무사귀환을 빌면서 이 곳 참새미 물로 연명하였다 한다. 일명 망부천이라고도 부른다. 훗날 지역 유림들이 그 정절을 기리어 봄과 가을에 향제를 지낼 때 이 곳의 물을 길러 목욕하고 이 물로서 밥과 재물을 지었으며 이 샘은 겨울철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또한 물맛이 좋고 깨끗하다고 한다. 지금도 새어 나온 맑은 물이 고여 있다.


  망부석에 앉아 박제상의 전설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오던 길을 우측으로 돌아 법왕사, 박재상 유적지 가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길은 경사가 매우 심하고 미끄러우니 관절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0여분 조심스레 내려와 법왕사에 도착한 후,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따라가니 저수지가 하나 나온다. 저수지 아래에 위치한 옻밭 마을을 지나 잠시 더 내려가면 박재상 유적지에 다다른다.

  박제상 유적지는 박제상과 그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매년 제사를 지내오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 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전 소실된 것을 다시 복원한 후로, 지금은 울산의 관광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은 치술령과 국수봉 일대를 종주한 의미있는 하루였다. 그동안 수차례 올랐던 길이지만 워낙 코스가 다양하고 긴 관계로 한번도 종주를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데 드디어 오늘 그 일을 해 냈다. 아울러 나의 체력을 다시한번 점검하고 더욱 자신감이 갖게 된게 너무도 기쁘다. 오늘도 축복받은 하루... 파이팅!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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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9.22 08:56

    첫댓글 형님 대단하십니다 언제이렇게 또 국수봉~~~치술령까지 까지종주를 아무튼 수고헀습니다 잘밨습니다

  • 09.09.25 12:47

    오빠 오랫만에 올리셨네요 ... 나도 산을좋아하고 많이 다니지만 우리 마을에 이렇게 멋있고 좋은 산이 있다는것을 새삼느끼게 하네요 ... 무엇이 바뿐지 내려가면 올라오기 바빠서 동네 뒤산을 제대로 산행한번 못했네요 언제 시간되면 나도 곡 한번 가보고 싶네요. 잘보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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