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아버님도 모르는 사실이 많이 있으므로 혹시라도 읽으시며 충격받지 마세요.
시간이 많이 지난일이라 내가 생각해도 참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여러 대골2세,3세들이 살아가며 용기를 잃지 않는데 도움이 될수 있으면 합니다.
--내 인생의 숨겨진 2년--
1988년 봄
난 아버님께 알리지 않고 해양대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이유는 땅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살고 싶었기 때문에......
1986년 초
고3때 해양대학교를 택했던 이유는 학력고사 점수가 생각만큼 나오지 않아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학교를 찿던바
바로 해양대학교가 딱 그조건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고3때 너무 음악에 빠져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암튼 주위사람들로 부터 무사히 도망을 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부산에 도착하여 근처 여관에서 아버님과 하루밤을 자고 다음날
아마 1996년 2월 14일 오전 이별을 하였다.
학교에 들어가니 이건 학교가 아니고 거의 신병훈련소 수준이었다.
부모님들이 가자마자 팔각모를 쓴 조교놈들이 갑자기 욕을 해대며, 온갖종류의
얼차려와 구타등으로 시간가는줄 몰랐다.
역시 고교때 아끼던 머리를 박빡 밀린후 (거의 교도소 수준) 전투복을 지급받고
2주간 매일 훈련과 구타 얼차려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하였다
1중일에 몇일씩 ROTC 기수빠따 라는 명목으로
곡괭이 자루로 42대씩(해양대 항해학과 42기) 엉덩이에 도장을 찍고
(이때 만큼 많이 맞아본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것이다. 죽일놈들)
새벽부터 일어나 4킬로정도씩 구보를 하고 매일 선착순에 기초군사훈련,
온갖종류의 PT체조 종류별로 200~300회씩 하며 이곳이 바로 지옥이구나 하며 생 각을 했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여기서 그만두고 나간다고 하면 맞아죽을것으로 생각하였기에
몸과 마음을 텅 비우고 그놈들이 시키는 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나중 실미도라는 소설과 영화를 보며 아 바로 그런곳과 다를바가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드디어 2주간 거의 폐인이 되어 다리를 절뚝거리며 광주로 첫 외출을 나갔다.
부모님을 뵌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었음.
이땐 온몸이 골병이 들고 얼어터져서 거울보고도 내가 난줄 잘 모를정도였음.
짧은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던날 고속버스 차창넘어로
배웅나온 아버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많이 울었음(왜? 아직 어렸으니까)
감옥같은 학교로 돌아와서 생각하기도 싫었던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집에서 청소한번 제대로 안해봤었는데 화장실 변기도 손걸레로 빤짝거리게
닦으며 왜 이짓을 해야하나 하고 신세 한탄을 무척 많이 했다.
그러나 남자가 한 번 택한길 여기서 말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꾹꾹 참고 버텨나갔다
드디어 여름방학 진해 신병훈련소로 군사훈련을 받으러 갔다.
첨엔 엄청 걱정했었는데 학교생활에 비하면 군대 훈련소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즐기며 훈련을 하던중 너무나 반가운 정자고모가 통닭을
사들고 면회를 왔었다.
아마 훈육관이 정자고모의 미모에 끌려 규정을 무시하고 면회를 시켜준것 같았다
. 정자고모 그땐 너무 고마왔어
그럭저럭 1년이 가고 2년째가 되었다.
가장 힘들었던점 : 영도 일주 구보(18Km),
밤마다 엉덩이에 불나던일 (이유없이 개패듯 맞았던거 같다)
그해 여름에 남해 송정해수욕장에서 2주간 해양훈련(수영)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느꼈던 점 - 아무리 연습해도 맥주병은 뜨지 않는다.
이후 난 지금도 수영을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길이 내가 갈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학년때는 너무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으나
2학년이 되자 남은 인생에서 무얼하고 살것인가가 중요한 당면과제가 되었다.
내 어릴때 장래희망은 의사가 되는거 였는데 왜 이러고 있나?하며...
드디어 운명의 1998년 대학 3학년이 되었다.
더이상 미적거릴수가 없어 집에서 등록금을 가지고 과감한 결단으로 학교에서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때 생각으로는 ROTC를 중도에 그만두었으므로 몇일내에
징집영장이 나올걸로 생각하며 군대가기전 맘껏 놀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음주가무에 빠져 흥청거리던중 1달이가도 영장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회에 돈이나 벌어 그동안 못해봤던 일이나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남은 돈으로 광주에서 작은 탁구장을 하나 인수하였다.
그러나 장사라고는 해본적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3달만에 망해서 말아먹고
무언가 먹고살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생각도 할겸 부산 영도의 빈민촌에 수녀님들이 운영하던 야학에서 애들에게 영어 수학
등을 가르키며 기생하였다. 한 2달 그러고 나서 광주로 올려니 가진돈이
다떨어져 차비가 없었다. 그때 수녀님께서 고생했다며 광주갈 차비를 만들어
주셔서 무사히 광주까지 올수 있었음
(아니면 부산에서 노숙자가 되었을지도 모름)
광주에 와서 돈을 만들기 위해 광주천변 도로공사장에서 잡부로(노가대)일을
하였고 그외 남는시간에 주택수리공사장에서 등짐을 날랐던 기억이 있다.
그때 막노동하는 사람들과도 많이 사귀었다.
하루일이 끝나고 같이 냄새나는 오두막에서 자고 막걸리를 마시며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며...참 새롭고 독특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으로 앞으로 닥쳐올 어떤 어려움이라도 헤쳐나갈수 있는 용기가 생겼는지도 모름
그렇게 돈을 모아 무언가를 시작하려는데
당시 내가 할줄 아는 거라곤 기타치는거 밖에는 없었으므로
지하실을 월세로 임대하여 그 장소에 무허가 음악학원을 차렸다.
전봇대마다 광고(찌라시)를 붙이며 음악학원의 절반가격으로 가르켜 주겠다고
....일종의 덤핑
수강생이 늘기전까지는 밥도 못먹고 굶기도 많이 했는데
당시 친구가 쌀과 김치등은 원조해줘서 근근히 먹고 살던 기억이 있다.
당시 재미있었던 일 하나;지금도 그친구 만나면 얘기하며 웃는다.
내가 몇일 굶으며 지하실을 지키고 있는데 방위받던 친구가 왔다.
그때 그애가 나를 보고 자기 버스비(1000원)를 주며 무언가 사먹자고 했는데
너무 굶어서 라면을 먹을수는 없고 동네 슈퍼에서 위에 부담을 가장
적게 줄수있는 음식 - 오뚜기 스푸를 사다 끓여먹던 일이었다.
덕분에 그애는 집까지 걸어가야했다. - 고마운 놈
그러던중 수강생이 대충 50~60 명선이 되자 생활고가 해결되고
입이 쫙 벌어지며 수강료로 건물임대료, 생활비를 해결하고 악기를 샀다.
정말 뿌뜻하였음
그러면서 늘 마음속에 꿈꾸어 왔던 밴드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하며 수강생중
똘똘한 애들 몇명을 골라 5인조 밴드를 만들어 열심히 악기(기타, 드럼, 올겐,
베이스등)를 가르키며(애들이 완전히 생초보였으므로) 2달만에 10여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연습만 하면 뭐해? 대중앞에서 공연을 해야지 하는 푸념을 들으며
(얘들이 생초보를 가르켜 놨더니 요구사항이 늘어가더라고)
여기저기 공연 스케줄을 잡았다. 전남대와 조선대 앞 카페를 빌려 데뷔무대를
성공리에 끝내고(이때 대표곡은 나의 자작곡 1곡이 있었고 나머지는 당시
유행하던 음악들이었음) 각종 학교 축제공연을 맡았다(아마 연주료가 싼맛에
우리가 하지 않았을까) , 목포대, 보건전문대, 동신대등 열심히 공연을 하고
명절날에는 시골마을 노래자랑 반주를 해주며 살았다.
이때 보건전문대에 아버님이 아시던 이교수라는 분이 계셔서 혹시 들킬까봐
고민하던 기억이 있음.
근데 축제때 술취한 놈들 앞에서 공연하려니 별놈이 다 있었다.
돌던지는 놈부터 괜한 시비거는놈등...
이해 여름 장마철에 지하실에 물이새서 자다가 물속에 빠진 기억이 남
이날밤 새벽까지 물퍼내느라 잠을 설쳤다.
또하나 재미있는 기억 - 유선방송을 보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새벽에 다른집 유선방송선을 몰래 따와서 중고 TV에 연결해서 봤었다.
이후 본의아니게 그집 주인을 외면하고 다녀야했음
시간은 흘러 1998년 겨울이 왔다.
그래도 이렇게 살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그해 겨울 무모하게 학력고사를 봤다.
당시 털털거리던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학력고사 당일 늦잠을 자다가
일어났는데 밖을 내다보니 눈이 쌓여있었다. 급하게 서둘러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중 눈길에 미끌어져 허공을 가르며 나가 떨어졌음..
허공에 오토바이와 몸이 솟구쳤을때 별생각이 다들었다
이제 내가 죽나보다..부터 무사해야 할텐데등등...
나중 의대 다니며 당시 미끌어졌던 언덕을 보며 감회가 새로웠음
그래도 어찌어찌 일어나 아픈 몸과 마음을 이 끌고 시험을 보자는 일념으로
고사장에 들어가 감독교사에게 사정하며 시험을 보았다.(시험시간 40분 지각)
그러나 뿌린 만큼 거둔다고 학력고사 점수가 거의 총점의 절반수준으로 나왔다.
이때 들었던 감명깊었던 말 .. 옆 친구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된단다(명언이긴한데 무지 기분 나빴음). 하며
일찍감치 포기해라...던 말 이었음 - 나쁜짜식
우여곡절끝에 1989년 이 밝았다.
연일 계속되는 공연과 연습으로 지쳐있던 5월 어느날 지하실 밖에
누가 찿아왔다며 나가보란다.
나가보니 눈앞이 캄캄해지며 어찌할바를 몰랐다.
왜냐 그자리에 아버님이 어떻게 알고 오셨으므로...
당시 무슨말을 했는지는 하나도 생각이 안남..아버님은 생각나시나 몰라
아버님이 집에 가신후...많은 생각을 하였다.
이제 더이상 이렇게 살수는 없다며 지하실과 밴드를 해체하고 악기를 처분하였다
당시 음악은 취미이자 부업이었고 평생의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음 .
이때 드럼치던사람은 강원도 동해에서 치과원장님으로 있고
노래부르던 남자애는 LG카드에서 근무하고 있고
여자애는 울산에서 애엄마가 되어 열심히 살림을 하고있고
나에게 욕을 제일 많이 먹던 기타리스트는 전주에서 주유소 소장
베이스치던애는 잘 모름(내가 중간에 짤랐으므로:해고)
올갠치던애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있으며.
신디사이저 하던애는 장성에서 안경점 사장으로 있다.
가끔 만나지만 정말 그땐 재미있었던 시절이었다라고 의견일치를 보고있다.
그후 전남대 후문에 삭월세방을 얻어 석유곤로로 밥을 해먹으며 두문불출
시험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때가 아마 5월 18일이 아닌가 생각됨
혼자 방에 쳐박혀 나름대로 공부하며
매월 모의고사문제집을 사다가 혼자 시험보고 채점하고...
마침내 12월 학력고사날이 왔다.
진인사 대천명,, 뿌린대로 거두리라 라는 생각으로 시험을 치루고 나와서
그동안 정들었던 월세방과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계림동 집에 들어갔다.
합격자 발표날 아버님과 둘이서 대학게시판을 기웃거리던 생각이 난다.
합격자 명부에 수험번호와 내 이름이 있었다.
이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후 궁금한점이 하나 있었다.
왜 ROTC 자퇴한 사람이 입영영장이 나오지 않았는가? 그것도 2년간이나 ...
나중 알아보니 학교에서 병무청에 제때통보를 하지 않았었음
하늘이 도왔나 - 근데 이게 의대 입학하기전 말썽을 일으키게 될줄이야
나중 기회가 되면 의대다니던 시절얘기에서 언급하겠음
아버님도 모르는 사실이 많죠? 시간이 많이 흘렀으므로 비밀을 공개합니다.
알아도 어떻하겠어 라는 심정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고야~~그 나이에 어쩜 그리 많은 인생경험을했니..정말 산전수전 다 겪었구나..난 이나이되도록 뭘하고 살았나 뒤 돌아보게되고 암튼 너 참 머찐넘이다..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핑도네..이제 태영이도 학교에서 왔고 자야겠다..성준아 화이팅!!
어휴! 정말 상상도 못한 엄청난 고생을 했구나! 경순이 말처럼 눈물이 핑돌고 가슴이 아려오네. 아빠<작은오빠>는 더 그러시겠지. 다 젊은날의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하렴.
그래서 내가 오빠를 좋아하지~~~~~~~잉! 물론 오빠가 겪은 어려움을 내가 반이라도 느낄진 모르겠지만 ....
성준아. 대단하다~~~ 멋진 놈이야!!!
오랫만에 나타나더니 왜 이렇게 내가슴을 저리게 만드니? 그래도 너는 참 멋진 구석이 있구나 오늘의 고난은 내일의 영광을 위한 디딤돌 이란말이 생각 난다 아픔을 통해 멋지게 성숙한 성준이 보고싶다
책 한 권 쓰면 베스트 셀러 되지 않으까?
성준아,.정말로 .사나이중에 사나이다 참으로 훌륭하다,....
^^ 엄마가 인쇄해서 책상에 놔 둔걸 읽었거든요 .. ^^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이랄까 ? 하여튼 존경스럽고 .. 작은일 가지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제가 왠지 부끄럽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