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현종산(縣鐘山) 지맥(支脈)이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뻗어 있어 산이 중첩(重疊)되어 있고 산 넘어 해안촌인 오산3리 무릉동(武陵洞)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은 매화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그 건너편에 금장산(金藏山) 지맥인 대령산(大靈山)과 남수산(嵐峀山)이 좌우로 바라보이며 남쪽은 산 넘어 신흥리 대잠동(大岑洞)과 경계를 하고 있다. 북쪽은 7번국도와 인접한 금매1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3㎞ 거리에 성류굴이 있다.
2. 마을의 역사
매화1리에는 대가실(竹浦), 나마실(那阿谷), 번덕골(池潭谷), 관음절(觀音절)의 자연부락이 있으며 1914년에 매화2리에 있던 원남면 소재가 매화1리로 옮겨왔다.
1) 대가실(竹浦)
1780년경(조선 정조)에 강릉인 죽포(竹浦) 최배한(崔配漢)이란 선비가 그의 조부를 추모하여 조부의 호(號)를 따서 이곳에 매죽당(梅竹堂)을 창건하고 후진을 육성하였다 하여 이곳을 대가실(竹浦)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2) 나마실(那阿谷)
1810년경에 진성이씨(眞城李氏)인 성순(聖淳)이 입향(入鄕) 개척(開拓)하였고, 이어 삼척심씨(三陟沈氏)가 살았으며, 그후 안작대기(安作芝)라는 영남(嶺南)의 명풍수(名風水)가 이곳을 지나다가 산세(山勢)와 지형(地形)을 살펴보고 향후에 많은 각성(各姓) 사람이 이곳에 자리 잡을 것이라 예언하고 이곳을 “나마실”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3) 번덕골(池潭谷)
지난 날에 큰 홍수(洪水)가 나서 못(池)이 생겼고 주위의 경관이 아름다워 번덕골(池潭谷)이라 하였다 한다.
4) 관음절(觀音절)
지난날 이 골에 관음사(觀音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이곳을 관음절이라 하였다 한다.
1) 관산재(冠山峙)
매화1리 번덕골(池潭谷)에 위치한 산(山)의 형세가 조선시대의 관모(冠帽)와 흡사하다 하여 관산재(冠山峙)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2) 장수바위
지난 날에 한 장수가 목이 말라 샘물을 찾던 중 마을 동쪽 산등(山嶝)에 있는 바위 틈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어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에 지금도 무릎을 꾼 흔적이 남아 있어 장수바위라 부르고 있다.
3) 죽포사(竹浦祠)
1863년(철종 14년)에 죽포동에 창건한 사우(祠宇)로서 영조4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킨 매죽 최경원(梅竹 崔景遠)공과 문학이 출중하여 후진을 가르친 죽포 최배한(竹浦 崔配漢)공, 그리고 1794년(정조 14년) 공령시(功令試)에 뽑혀 관동빈여록(關東賓與錄)에 등재 되어있는 죽사 최주태(竹社 崔柱台)공의 삼위(三位)를 추모하여 향인(鄕人)들이 세웠다. 그러나 1868년(고종 5년)에 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4) 경충단(景忠壇)
1456년에 육신제공(六臣諸公)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서 순절한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 정재 최시창(貞齋 崔始昌)공과 절효(節孝) 최면(崔沔)공 두 부자의 위패(位牌)를 충남 공주에 있는 동학사지(東鶴寺址) 내 숙모전(肅慕殿)에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는 바 1932년에 공의 후손들이 죽포동에 있는 종택기지(宗宅基地) 옆에 단(檀)을 설치하고 그 충절을 기리는 제향을 매년 유림과 함께 올리고 있다.
5) 울진기미독립만세기념탑과 비
이 기념탑과 비는 1989년 4월 11일에 기공하여 1991년 8월 15일에 세워진 것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메아리 칠 때, 이 고장에도 군민의 대다수가 4월 11일을 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당시의 거룩한 충성심을 영세(永世)에 기리기 위해 군민의 치성(熾盛)의 성금과 국비 지원금으로 국내 최초의 스텐레스철탑(높이 15m)과 기념비(높이 3.3m)가 만세를 불렀던 구장터에서 바라보이는 건너편에 세워졌다.
6) 성황당지(城隍堂址)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제관을 엄선하여 목욕제계하고 동리의 안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지성을 드리던 곳이었다. 그러나 1972년경에 새마을사업으로 인하여 철폐되고 농경지로 변했다.
제2절 매화2리(梅花二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매화천을 끼고 있으며 서쪽은 남수산(嵐峀山), 남쪽은 매화천 상류로 매화1리 기양리와 인접되고 북쪽은 금매2리인 몽천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매화2리는 구장터 가치마 최촌(崔村) 윤촌(尹村)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고, 동리 이름을 매화(梅花)라고 하는 데는 세가지 이유에서 연유되었는데 첫째 이 마을의 형상이 남수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흡사 매화꽃잎과 같고 또 부근의 산봉우리가 매화꽃과 같다는 데서 연유되었고 둘째로 조선조 광해군 때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 기자헌(奇自獻)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주위의 들에 해당화가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야다강매(野多江梅)라는 시(詩)를 읊었던 연유로 매야(梅野)라 하다가 후에 매화(梅花)로 바뀌었으며, 셋째 조선 선조 때 윤여호(尹汝虎)옹의 부인 공인(恭人)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조상이 살던 영덕군 매일동(梅日洞)의 매(梅)자를 따서 매화(梅花)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 구장터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초기까지 이곳에 5일장(五日場)이 열렸으나 후에 면소재지가 매화1리로 옮겨감에 따라 장터도 매화1리로 옮겨 갔으므로 이곳을 구장터라 부르게 되었다.
2) 가치마(柯村)
번덕골의 가치골에 살던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이곳으로 이주(移住)하면서 먼저 살던 곳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가치마다 하였다고 전한다.
3) 최촌(崔村)
강릉최씨(江陵崔氏)가 지금의 북면 고목리 무령현(武靈峴)에 입향하여 살다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이곳에 와서 최씨(崔氏)가 집단을 이루고 살았으므로 최촌이라 전하고 있다.
4) 윤촌(尹村)
파평윤씨(坡平尹氏)가 기성면 삼산리에 입향하여 살다가 1558년경에 이 마을에 와서 개척(開拓)하여 대대(代代)로 살았으므로 윤촌(尹村)이라 하였다 한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96가구 중 파평윤씨(坡平尹氏) 21, 강릉최씨(江陵崔氏) 15, 담양전씨(潭陽田氏) 11, 영양남씨(英陽南氏) 5, 신안주씨(新安朱氏) 5, 평산신씨(平山申氏) 4, 기타 35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남수산(嵐峀山)
영양군의 일월산(日月山) 지맥(支脈)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높이 475m) 웅장한 산이다. 남사고(南師古)선생이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또 임진왜란 전에 일본의 풍신수길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현소(玄蘇)라는 일본의 고승(高僧)을 밀파(密派)하여 명산의 정기(精氣)를 쇠진(衰盡)시킬 목적으로 남수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또한 한발이 심할 때에 남수산 정봉(頂峰)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면 효험을 얻는다고 한다.
2) 동제(洞祭)
동리 중앙에 위치한 큰 팽나무 아래에 우물이 있었는데 매년 동민들이 제관(祭官)을 엄선하여 식수(食水)로 인한 모든 잡병이 없도록 제사를 올리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수도가 설치되어 우물은 매몰되어 놀이터로 변했다.
3) 만흥학교(晩興學校)
중권 제Ⅲ편 제2장 참조.
4) 3.1독립만세 기념탑과 비
하권 제Ⅲ편 제1장 제5절 만세기념탑비 참조.
5) 울진공립농민학교지(蔚珍公立農民學校地)초등학교 졸업자에 한하여 1년간의 선진농업 기술교육 과정으로 1939년에 매화2리(지금의 해군부대 자리)에 설립된 학교로서 1940년 1월에 제1회 졸업생 30여명을 배출하였고 1944년에는 5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되어 울진공립여자실천학교가 되었다.
6) 울진공립여자실천학교지(蔚珍公立女子實踐學校地)
초등학교 졸업자 중에서 선발하여 2년간 양잠, 재봉 등의 과정을 이수하는 학교로서 1944년 초에 매화2리에 설립되었고 1945년초에 울진읍으로 이전되었다.
제3절 금매1리(金梅一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근남면 직복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매화천을 경계로 매화2리와 금매2리 몽천동과 인접되며, 남쪽은 매화1리, 북쪽은 근남면 구산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약 2㎞ 북쪽에 성류굴이 있다.
2. 마을의 역사
1) 쇠니이〔蘇老村〕
1400년경에 이조 초기 단천군수(端川郡守)를 역임한 영양인(英陽人) 남득공(南得恭)이라는 선비가 경주에서 입향(入鄕) 개척(開拓)하여 살면서 쇠니이(蘇老村)라 하였고 1880년경부터 금답(金畓)이라고도 하였다. 금답(金沓)이라 함은 뒷산에 금(金)이 나고, 마을 앞에는 비옥한 토지가 많다는 뜻이며, 쇠니이(蘇老村)라 함은 인생이 늙으면서도 다시 소생(蘇生)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2) 장징이〔長井, 長亭〕
1640년경에 삼척김씨(三陟金氏)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가뭄이 심하여도 석천(石泉)의 우물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여 장징이(長井)라 하였고 또한 장정(長亭)이라고 정(亭)자를 쓰는 것은 망우당 곽재우(郭再祐)장군이 임진란을 평정한 후에 휴양 차 소실(小室)의 고향인 장정동(長亭洞) 방어사곡(防禦使谷)에서 10여년간 체류하면서 정자(亭子)를 짓고 죽세공(竹細工)으로 생계를 이어간 데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3) 대좌비〔對座碑〕
영양남씨가 분가(分家)하여 살던 곳으로 지금도 한 두집이 살고 있는데 뒷산 봉우리에 대좌비(對座碑)가 있었다 하여 대지비라고 전하고 있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56가구 중 영양남씨(英陽南氏) 10, 강릉최씨(江陵崔氏) 8, 김녕김씨(金寧金氏) 6, 울진장씨(蔚珍張氏) 4, 삼척김씨(三陟金氏) 3, 흥해배씨(興海裵氏) 3, 기타 22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쇠니이(蘇老村)의 명기(名基)
1400년경에 입향 개척한 영양남씨(英陽南氏)가 한 터에서 600년 동안 대대로 자손이 이어져 살고 있다.
2) 열녀 전경순 열녀각(烈女閣)
하권 제Ⅱ편 제1장 제7절 열녀 참조.
3) 성황당(城隍堂)
장정동의 우물을 성황신(城隍神)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제관을 엄선하여 목욕제계하고 마을의 무병과 풍년농사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황제를 올리지 않고 있다.
4) 방어사곡(防禦使谷)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祐)가 임진란을 평정한 후에 이곳 방어사골에 살면서 장정동 동쪽에 있는 산정(山頂)에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진지(防禦陣地)를 구축하였는데 지금도 큰 바위에 구멍 뚫린 흔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연유로 “방어사곡”, “방우실골”이라 전하고 있다.
5) 장정저수지(長井貯水池)
1975년경에 착공하여 3년여(三年餘)만에 준공된 이 저수지는 장정동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담수량도 풍부하여 금매리 앞 들에 관수하고 있다. 또 주위의 산과 계곡의 경치가 아름답고 조용하며 잉어와 붕어 등 많은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어 낚시꾼들이 찾아들고 있다.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매화천이 흐르고 건너편 7번 국도변에 금매1리가 있다. 서쪽은 남수산(嵐峀山) 지맥이 마을 뒷산이며 남쪽은 매화 2리와 인접하고 북쪽은 근남면 구산리와 경계를 이루며 1.5㎞ 거리에 성류굴이 있다.
2. 마을의 역사
금매2리를 몽천동(蒙泉洞)이라 하는데 1630년경에 매오공(梅塢公) 윤몽열(尹夢說)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몽천(蒙泉)이라 하였다고도 하고, 또 이우당(二友堂) 주개신(朱介臣)공과 윤몽열(尹夢說)이 이곳에 정자(亭子)를 짓고 몽천(蒙泉)이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언덕에 서당(書堂)을 짓고 어릴 때 덕(德)을 키운다 하여 “蒙以養正, 蒙以育德”의 몽(蒙)자와 샘물천(泉)자를 따서 동명(洞名)을 지었는데 몽천서당에서 유래되었다.
3. 성씨별 가구 분포
총 68가구 중 의령남씨(宜寧南氏) 13, 영양남씨(英陽南氏) 10, 파평윤씨(坡平尹氏) 10, 신안주씨(新安朱氏) 10, 울진장씨(蔚珍張氏) 4, 기타 21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영귀정(?歸亭)
제Ⅳ편 제2장 제3절 2. 정(亭) 참조.
2) 이우당(二友堂)
제Ⅳ편 제2장 제3절 당(堂)참조.
3) 몽천사(蒙泉祠)
제Ⅳ편 제2장 제3절 사(祠)참조.
4) 몽천서원(蒙泉書院)
제Ⅳ편 제2장 제3절 서원(書院) 참조.
5) 삼조어비각(三朝御批閣)
제Ⅳ편 제2장 제3절 2. 각(閣) 참조.
6) 서당골〔書堂谷〕
유림(儒林)들이 서당에 모여 글을 읽던 곳이라 하여 서당골이라 하였다.
7) 독치골〔獨峙谷〕
이 고을에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재가 늪고 우뚝 솟아있는 독봉(獨峯)이라 하여 부르던 이름이다.
제5절 오산1리(烏山一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7번국도 서편에 현종산 지맥(支脈)이 둘러 쌓여있으며, 남쪽은 덕신1리와 경계를 이루고 현종산이 바라보인다. 북쪽은 오산2리며 마을 중앙에 오두산(烏頭山)이 가로 놓여있다.
2. 마을의 역사
1) 오천(烏川)
1520년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인 상희(商喜)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마을 뒷산이 까마귀 머리 모양 같고, 앞 냇가에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였다 하여 오천(烏川)이라 불렀다 한다.
2) 백옥당(白玉堂)
1730년경에 영해(寧海)에서 온 백씨(白氏)라는 선비가 이 곳에 백옥당(白玉堂)이라는 정자를짓고 훈장(訓長)을 지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3) 오두산(烏頭山)
마을 뒷산의 작은 맥(脈)이 마을 중앙에서 서쪽으로 뻗혀 있는데 그 산 모양이 까마귀 머리 모양과 같다 하여 오두산이라 부른다.
4) 갯초들
소하천 변에 있던 갯벌을 제방을 축조하여 농경지로 개간하여 들이 되었다 하여 갯초들이라한다.
3. 성씨별 가구 분포
총 124가구 중 김해김씨(金海金氏) 15, 평산신씨(平山申氏) 9, 경주이씨(慶州李氏) 8, 파평윤씨(坡平尹氏) 5, 안동김씨(安東金氏) 4, 울진임씨(蔚珍林氏) 4, 영양남씨(英陽南氏) 4, 울진장씨(蔚珍張氏) 4, 충주유씨(忠州劉氏) 4, 연일정씨(延日鄭氏) 3, 경주최씨(慶州崔氏) 3, 기타 61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성황당(城隍堂)
이 마을에는 성황당이 두 곳에 있는데 바다쪽에 있는 성황당은 풍어(豊漁)를, 마을 서쪽에 있는 성황당은 풍농(?農)을 각각 기원하는 곳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성황제를 올리고 있다.
2) 오산항(烏山港)
1960년 이후에 축항공사를 실시하여 방파제 100m가 축조되었고 1990년도에는 일종항(一種港)으로 승격되어 현재 공사 중인 바 죽변항과 후포항의 중간지점에 있어 풍랑으로 위급할 때에는 어선대피소의 역할을 하며 각종 해산물(海産物)의 물양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6절 오산2리(烏山二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산 능선(山 陵線)을 넘어 7번국도이며, 남쪽은 오산1리와 인접하고 북쪽은 오산3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또한 마을 앞 바다에 높은 바위가 많아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이 마을은 1670년경에 안동김씨(安東金氏) 성구(成九)라는 사람이 개척하여 리명(里名)을 “지심”이라 하였는데 1680년에 울진임씨(蔚珍林氏)가 입주(入住)하면서 뒷산에 대나무가 무성해지고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면서 초산(草山)이라 개칭하였다 한다.
1) 엄나무고개
마을을 개척할 무렵에 고개마루에 엄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엄나무고개라 하였으며 지금도 몇 그루가 남아 있다.
2) 범골
옛부터 골이 깊고 험하여 범이 잘 나타난다 하여 범골이라 하였는데 숲이 우거졌을 때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다녔다 한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86가구 중 울진임씨(蔚珍林氏) 22, 김해김씨(金海金氏) 14, 경주최씨(慶州崔氏) 7, 진주강씨(晋州姜氏) 5, 성주도씨(星州都氏) 5, 삼척김씨(三陟金氏) 5, 밀양박씨(密陽朴氏) 3, 평해황씨(平海黃氏) 3, 밀양손씨(密陽孫氏) 3, 기타 19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특산물
어촌으로 방어,광어,문어 등 많은 해산물이 생산된다.
2) 성황당
매년 정월대보름날과 팔월보름날에 제관을 선정하여 풍년농사와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제7절 오산3리(烏山三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동해와 접하고, 서쪽은 산(山) 능선이 매화1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오산2리, 북쪽은 근남면 진복2리와 인접해 있다.
2. 마을의 역사
1725년경에 삼척김씨(三陟金氏)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에 해변의 갯벌에는 해당화가 곱게 피어있고, 또한 해변이 기암절벽(奇巖絶壁)으로 형성되어 자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園)을 연상케 함으로 마을의 이름을 무릉(武陵)이라 하였다 한다.
1) 절골
신라(新羅) 말경(末頃)에 도승(道僧)이 와서 작은 절을 지었다 하나 지금은 사지(寺址)가 농경지로 되어있다.
2) 고래바위
바위모양이 고래와 흡사함으로 고래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3) 해명산의화낙지(海明山衣化落地)
마을 북쪽에 있는 산 끝이 바다와 인접하여 있고 경치가 좋은 곳이다.
4) 복바위(福岩)
마을 북쪽에 있는 산(山) 끝에서 약 300m거리의 바다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갈매가 앉으면 큰 고기떼가 모여든다고 하여 복바위라 전해지고 있다.
5) 국립수산진흥원종묘배양장
국립수산진흥원에서 설치한 종묘배양장으로 1989년부터 넙치, 전복, 연어 등 종묘를 배양하여 앞바다에 방류, 어민 소득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6) 염전(鹽田)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에 이 마을에 염전이 있었는데 생산된 소금은 보부상과 시장에서 팔려 마을의 소득이 많았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66가구 중 김해김씨(金海金氏) 13, 울진임씨(蔚珍林氏) 11, 파평윤씨(坡平尹氏) 5, 안성이씨(安城李氏) 5, 영해박씨(寧海朴氏) 4, 담양전씨(潭陽田氏) 4, 평창이씨(平昌李氏) 3, 김녕김씨(金寧金氏) 3, 성주도씨(星州都氏) 3, 기타 15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성황당(城隍堂)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과 8월 10일 밤중에 제관이 동민의 안녕과 풍년농사 그라고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전에는 남쪽과 북쪽에 각각 성황당이 있었으나 남쪽 성황당은 폐지되고 북쪽 성황당만 남아 있다.
제8절 덕신1리(德新一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을 뒷산이 덕신2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남쪽은 현종산이 바라 보이고 500m 거리에 망양휴게소가 있으며, 기성면 망양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은 오산1리와 인접해 있다.
2. 마을의 역사
1) 큰골〔大谷〕(숫골 또는 숫거리)
1590년경에 경기도 평택에서 온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이 길고 넓다 하여 큰골(大谷)이라 하였다.
2) 환리(環里)(고랭이 또는 고리)
1600년경에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산(山)모양이 가락지(고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환리(環里)라 불렀다 한다.
3) 후리(厚里)
1765년경에 연일정씨(延日鄭氏)인 인징(仁徵)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그물(網)로 고기를 몰아서 잡는다 하여 후리라 하였고 또 마을 뒷산이 그물처럼 둘러쌓였다 하여 후리라 하였다고도 한다.
1) 덕신역(德新驛)
옛날 군내(郡內)의4개역 중의 하나인 덕신역은 중등마(中等馬) 2필, 복마(卜馬) 5필, 역리(驛吏) 27명, 역원(驛員) 10명, 역비(驛婢) 천명(千名)을 두었던 곳이라 한다.
2) 성황당(城隍堂)
3개 자연부락(自然部落)마다 성황당이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성황제를 올리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대곡동의 성황당은 매년 단오(端午)날에 한번 더 제사를 올리고 있다.
3) 연신굿
5년마다 무당을 청해서 마을의 무병(無病)과 풍농(?農),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행사를 연신굿이라 하는데 지금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4) 망양휴계소
덕신1리 최남단 7번 국도변에 망양휴계소가 설치되어 많은 차량이 정차하고 관광객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제9절 덕신2리(德新二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7번국도가 있어 덕신1리와 경계를 하고, 서쪽은 현종산 지맥(支脈)으로 둘러쌓였으며, 남쪽은 기성면 망양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북쪽은 신흥리와 경계를 하고 있는 산간(山間)마을이다.
2. 마을의 역사
1) 한밭〔閑田?項田〕
1390년경에 평해황씨(平海黃氏)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산(山)고개가 사람이 목과 같다 하여 항전(項田)이라 하였는데, 그 후 1630년경에 성주도씨(星州都氏) 이량(爾良)이라는 사람이 입주하여 조용한 곳이라 하여 한밭[閑田]이라 한 것이 시작되어 계명(啓命)이라는 사람이 한밭(閑田)이라 개칭하였다고도 한다.
2) 항실(項實, 項谷)
이 마을의 산마루가 사람의 목과 같다 하여 마을 이름을 항실(項實)이라 부르고 또 마을의 계곡(溪谷)이 낭떠러지가 많아 항곡(項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3) 밤월[夜月]
1900년경에 경주에서 온 이백우(李伯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망월(望月)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특히 달밝은 밤에 동해를 바라보면 달빛, 파도, 바위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하여 다시 밤월이라 하였다 한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42가구 중 성주도씨(星州都氏) 36, 기타 6가구다.
4. 마을의 특징(特徵)
1) 신흥사지(新興寺址)
제Ⅳ편 제2장 제3절 2. 사원(寺院) 참조.
2) 성황당(城隍堂)
한밭(閑田)과 항실(項實)에 성황당이 있는데 정월 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마을의 무병(無病)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3) 촛대바위
옛부터 마을에 촛대와 같이 생긴 바위가 촛불과 같이 비쳐준다 하여 촛대바위라 한다.
4) 탕건바위
바위 모양이 탕건과 같이 생겼다 하여 탕건바위라 한다.
제10절 신흥1리(新興一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마을 앞으로 소하천(小河川)이 흐르고 7번국도를 건너 오산1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서쪽은 백호등(白虎嶝)을 넘어 기양1리와 인접하며 남쪽은 이울동(以蔚洞)과 접하고 북쪽은 1㎞ 거리에 면소재지인 매화1리가 있다.
2. 마을의 역사
1) 대잠(大岑) 혹은 대점
1520년경에 순흥안씨(順興安氏)인 언문(彦文)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마을이 높은 곳에 있다 하여 대잠(大岑)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2) 몰개골(沒開月)[사곡 : 沙谷]
1620년경에 인동장씨(仁同張氏)와 영양남씨(英陽南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마을 앞의 계곡(溪谷)이 뜨고 지는 달모양과 같다 하여 몰개골(沒開月)이라 하였다. 그 후 1880년경에 마을 앞 백사장(白沙場)에 망월(望月)이 유난히 밝게 비치므로 사곡(沙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69가구 중 인동장씨(仁同張氏) 22, 영양남씨(英陽南氏) 12, 경주이씨(慶州李氏) 7, 김녕김씨(金寧金氏) 4, 순흥안씨(順興安氏) 3, 기타 21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배나무터
옛날에 자연생 배나무가 있었던 곳으로 삼복(三伏) 더위에도 시원하여 마을 사람들이 점심때 이곳에 모여들었고 또 조선시대에 고을 원님이 유림(儒林)들과 이곳에서 더위를 식히며 시(詩)를 읊었다 한다.
2) 원등이
옛날에 고을 원님이 이 등선에서 쉬어 갔다 하여 원등이라 하였다 한다.
3) 송암정
우거진 소나무 밑에 병풍(屛風)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 곳으로 원님이 이 곳을 지날 때마다 쉬어갔다 한다.
4) 암자바위
사곡동 뒷산에 있는 바위로 이 바위에서 불공을 드렸다 하여 암자바위라 한다. 지금도 간혹 자식 없는 여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한다.
5) 대점성황당(城隍堂)
400년~500년 쯤 된 느티나무(거목:巨木)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마을의 무병(無病)과 풍농(?農)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올리고 있다
6) 사곡성황당(城隍堂)
마을 입구에 있는 큰 바위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대잠동과 같이 정성을 드려 동제를 지내고 있다.
제11절 신흥2리(新興二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에는 현종산 기슭에서 발원(發源)되는 소하천이 동해로 흐르고 산 너머에는 덕신2리가 있다. 서쪽은 중첩된 산이 기양리와 경계를 이루며 남쪽은 기성면과 경계를 하고 북쪽은 신흥1리 대잠동과 인접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1) 북수골(北水谷)
옛날에 이 마을을 개척하여 살던 사람이 부자(富者)가 되어 오래 살도록 하는 뜻에서 부수동이라 하였다 하며 그 후 인동장씨(仁同張氏)인 중엽(重燁)이라는 선비가 입주하며서 마을 앞의 냇물이 북쪽으로 흐른다 하여 북수골(北水谷)이라 개칭하였다 한다.
2) 이울(李蔚?以蔚)
1627년경에 평창군수(平昌郡守)를 지낸 이대인(李大仁)이라는 선비가 자기의 성(姓)을 따서 이울(李蔚)이라 하였고 또 울진군과 평해군의 경계가 이 마을의 남단(南端)이므로 이 마을부터 울진(蔚珍)이라 하여 이울(以蔚)이라 전하고 있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70가구 중 인동장씨(仁同張氏) 15, 경주이씨(慶州李氏) 8, 김녕김씨(金寧金氏) 5, 광산노씨(光山盧氏) 3, 기타 39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효자각(孝子閣)
하권 제Ⅱ편 제1장 제5절 효행 참조.
2) 효자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남북으로 왕래하는 상인들의 대로(大路)가 이 마을의 들을 지나가게 되어 있는데 상인들의 패싸움으로 살인사건이 빈번히 일어나므로 살치들이라 하였다가 효자각(孝子閣)이 세워진 이후에는 효자들이라 하였다고 한다.
3) 북수동 성황당(城隍堂)
성황신을 모시는 곳으로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마을의 무병 무사와 풍농(?農)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다가 1990년 이후 미신을 타파하는 뜻에서 성황제를 폐지하였다.
4) 이울동 성황당(城隍堂)
400년~500년쯤 된 큰 느티나무를 성황신으로 모시는데 이 마을은 특이하게 삼신위(三神位)이다.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제관을 엄선하여 3일전부터 금기(禁忌)하고 목욕제계(沐浴齊戒)하여 마을의 무병 무사와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12절 기양1리(基陽一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매화천을 건너 매화1리이고 서쪽은 소령산(小靈山)지맥인 망방산(望邦山)이 마을 뒷산이며 남쪽은 기양2리, 북쪽은 매화2리다.
2. 마을의 역사
1) 지품(池品)
1658년경에 평산신씨(平山申氏)가 개척하였다 한다. 1650년전에는 이 마을 중앙에 큰 지당(池塘)은 매몰되고 서향(西向)의 맞은편 마을은 유실(流失) 폐허되었다. 폐허된 마을 주민들이 지당이 매몰되어 평지가 된 이 곳으로 이주(移住)하면서 지품(池品)이라 하였다 하며 또 지당 자리에서 우물을 파다가 귀중한 물품이 나왔다 하여 지품이라고 전하고 있다.
2) 영시골(永示谷)
골이 깊고 산이 높아 한발(旱魃)이 심하여도 개울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여 영시골(永示谷)이라 하였다 한다.
3. 성씨별 가구 분포
총 71가구 중 울진장씨(蔚珍張氏) 12, 평해황씨(平海黃氏) 10, 삼척김씨(三陟金氏) 7, 인동장씨(仁同張氏) 5, 남양홍씨(南陽洪氏) 5, 평산신씨(平山申氏) 4, 기타 28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성황당지(城隍堂址)
옛부터 성황신을 모시고 성황제를 올리던 곳이었으나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이후 1977년에 미신이라 하여 철폐되고 지금은 어린이 놀이터로 변했다.
2) 명당묘지(明堂墓地)
경주 양동이씨(陽洞李氏)가 폐허된 마을에 살 때에 배를 타고 지당(池塘)을 건너가 묘(墓)를 쓰고 경주 양자리(陽子里)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 후손들이 조상묘(祖上墓)를 찾기 위하여 이 마을에 왔으나 마을의 위치가 바뀌어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한다. 이 묘지는 명당자리라 하여 누구든지 음력 8월에 먼저 벌초(伐草)를 하면 1년동안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3) 황성일(黃聖一) 효자비(孝子碑)
하권 제Ⅱ편 제1장 제5절 효행 참조.
제13절 기양2리(基陽二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북쪽은 신흥리, 서쪽은 소령산(小靈山)의 지맥인 망방산(望邦山) 맥이 뒷산이며 남쪽은 기양3리 북쪽은 기양1리다.
2. 마을의 역사
1) 영양(影良?永陽)
1670년경에 전주이씨(全州李氏)인 태영(泰英)과 인동장씨(仁同張氏)인 중생(重生)이 같이 살면서 연양(軟陽)이라 하다가 마을이 양지 바르고 따뜻하다 하여 영양(永陽)이라 하였다 한다.
2) 옹기점(甕器店)
1600년경에 김씨(金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살면서 토질(土質)이 옹기 굽기에 적합하여 옹기를 만들어 생활을 이어갔다 하여 옹기점이라 하였다 한다.
3) 와수골〔瓦水谷〕
이 마을을 개척한 이태영(李泰英)이라는 사람이 이 골에서 기와를 만들었다 하여 와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4) 횟골〔灰谷〕
옛날 이 골에서 회(灰)를 만들었다 하여 횟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5) 곱새뫼등
산등(山嶝) 모양이 곱새등과 같고 이 등에 묘를 쓰면 후손이 곱새가 난다 하여 곱새뫼등이라 하였다 한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54가구 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9, 인동장씨(仁同張氏) 13, 기타 12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성황당지(城隍堂址)
성황신을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성황제를 올리던 곳이었으나 1959년 사라호태풍으로 성황당이 유실된 후 성황제는 폐지되었다.
2) 저수지(貯水池)
1960년대에 와수골 안쪽에 저수지공사가 착공되어 후에 준공되었는데 주위에 많은 굴참나무가 무성하여 경관이 아름답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저수지에 담수어(淡水魚)가 많아 낚시꾼들의 발길이 연중 이어지고 있다.
제14절 기양3리(基陽三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산능선이 덕신2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대령산맥(大靈山脈)이 마을 뒤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갈면리와 인접하고 북쪽은 작은 산과 터밭[基田]을 지나 기양2리가 있다. 그리고 서면 왕피리와 갈면리에서 흐르는 냇물이 합류되어 마을 앞을 흐르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1) 두태〔斗基洞〕
1466년경에 삼척김씨(三陟金氏)인 두만(斗滿)이라는 농부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자기의 이름 두(斗)자를 따서 두기(斗基)라 하였다 하며 1500년경에는 충주지씨(忠州池氏)인 서룡(瑞龍)이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는데 가세하여 지금은 지씨(池氏) 후손이 번창하고 김씨(金氏) 후손은 그렇지 못하다.
2) 터밭〔基田〕
1540년경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두기(斗基)라는 기(基)자를 따서 터밭[基田]이라 하였다 한다.
3) 곰시골(古茂谷)
1620년겨에 울진임씨(蔚珍林氏)가 입주(入住)하여 골이 깊고 옛부터 산림(山林)이 무성하다 하여 곰시골이라 하였다 한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67가구 중 충주지씨(忠州池氏) 18, 울진임씨(蔚珍林氏) 11, 죽산안씨(竹山安氏) 3, 경주이씨(慶州李氏) 4, 남원양씨(南原梁氏) 3, 김해김씨(金海金氏) 3, 기타 25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성황당지(城隍堂址)
성황신을 모시고 엄선된 제관이 동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올리던 곳이었으나 1959년 사라호태풍으로 유실(流失)되었다.
2) 사명당지(泗溟堂址)
마을뒷산을 넘으면 뾰죽한 봉우리가 있고 그 봉우리에 수백년이 된 작은 소나무가 있는데 이곳에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수도(修道)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은 불공을 드리는 여인(女人)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3) 투장골(投葬谷)
마을 앞의 봉우리에 어떤 사람이 밤에 몰래 묘(墓)를 썼는데 그후로 마을에는 사람, 가축, 재물에 폐가 심하여 못살 지경이 되었다. 이에 동민이 의논하여 그 묘를 이장하고 나니 동리가 평온하였다 한다.
4) 기양저수지(基陽貯水池)
1970년도에 착공하여 1977년에 완공된 저수지로 농경지에 관개(灌漑)를 하고 있으며 또한 경관이 아름답고 담수어(淡水魚)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낚시꾼과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제15절 갈면리(葛綿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뒷산 능선을 경계로 기성면 삼산2리와 인접하고 서쪽은 금장산 지맥이 중첩되어 있으며 고초령(高草嶺)가 대령산(大嶺山)이 높이 솟아 있다. 남쪽은 마을 중앙을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갈마점(葛麻店) 윗골에서 길곡리와 경계를 하고 북쪽은 기양리저수지 상부(上部)에서 기양3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갈면리에는 소로실(蘇老室), 갈마점(葛麻店), 잿마[峴村], 솔밭마[松田村], 구석마[隅村], 강변주막거리(江邊酒幕거리), 고초령(高草嶺)이 있다.
1) 소로실(蘇老室)
1574년에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지낸 인동인(仁同人) 장귀석(張貴碩)이라는 선비가 선친(先親)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은둔하던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新岩里)에서 울진으로 이거(移居)하여 울진입향조(蔚珍入鄕祖)가 되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젊은 사람은 늙지 말고 늙은 사람은 다시 소생(蘇生)한다는 뜻에서 마을이름을 소로실이라 하였다 한다.
2) 갈마점(葛麻店)
칡과 삼이 많이 생산되므로 갈마점이라 하며, 장귀석(張貴碩)의 둘째 아들 응복(應福)을 분가시킨 곳이라 전한다.
3) 잿마[峴峙]
높은 산 밑은 낮은 산 비탈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잿마라 한다.
4) 솔밭마(松田)
노송(老松)이 많은 곳에 마을이 이루어졌다 하여 솔밭마라 전한다.
5) 구석마[隅村]
산모퉁이 구석진 곳에 몇집이 살고 있는데 이곳을 구석마라 한다.
6) 강변(江邊)
냇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이곳을 강변이라 하는데 옛부터 낚시와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뒷바라지 때문에 형성된 마을이라 한다.
7) 주막거리(酒幕거리)
옛부터 영양군 수비면으로 왕래하는 상인들이 고초령 재 밑에 쉬어가는 주막이 있다 하여 주막거리라 한다.
8) 고초령(高草嶺)
1780년경에 초계정씨(草溪鄭氏)인 정교흠(鄭敎欽)공이 자기의 고조부(高祖父)인 수택(洙澤)공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입향(入鄕) 개척하였으며 이어서 남양홍씨(南陽洪氏)가 가세하였다. 전성기에는 10여가구가 성황당(城隍堂)을 모시고 살았으나 지금은 소개되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
9) 산신터(山神터)
이 골을 대리골이라 하는데 골막바지에 큰 바위가 있어 인동인(仁同人) 장응령(張應齡)이라는 사람이 3년간 신(神)에게 기도한 곳이라 하여 산신터라 전한다.
10) 고초령(高草嶺)의 도적(盜賊)바위
이 령(嶺)은 해발 700m로 울진~영양간의 경계지역이며 30여리가 무인지역(無人地域)으로 도적들이 간혹 나타나 상인들의 금품을 탈취함으로 도적바위라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산령(山嶺)에는 보부상(褓負商)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고 도적들이 나타났던 일화도 있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121가구 중 인동장씨(仁同張氏) 15, 홍천용씨(洪川龍氏) 8, 김녕김씨(金寧金氏) 8, 원주변씨(原州邊氏) 8, 초계정씨(草溪鄭氏) 6, 거제반씨(巨濟潘氏) 6, 강릉최씨(江陵崔氏) 6, 경주이씨(慶州李氏) 4, 삼척김씨(三陟金氏) 4, 영양남씨(英陽南氏) 3, 기타 53가구다.
4. 마을의 특징
이 마을은 갈피(葛皮)와 면(綿), 송이가 많이 나고 농토가 비옥하여 갈면(葛線)이라 하였다고 한다.
1) 창호지(窓戶紙)
갈면리?길곡리?기양리 등지에서 창호지 원료인 저피(楮皮)가 많이 생산되고 냇물이 깨끗하여 질이 좋은 창호지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2) 성황당(城隍堂)
성황당은 소로실과 갈마점에 1개소, 갈면에 1개소가 있는데 당사(堂舍)는 없고 수백년 된 나무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목욕제계하고 동리의 안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그리고 또 이 마을에는 개별적으로 큰 나무나 바위에 지성을 드리는 집도 많다.
제16절 길곡리(吉谷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금장산(金藏山) 지맥의 능선이 기성면 이평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영양군 수비면 수하리 동편 능선이 영양군과 경계며, 남쪽은 온정면 선구리와 접하고 북쪽은 갈면리와 인접하여 있다.
2. 마을의 역사
1) 삼단(三檀)?사달(沙達)
이 마을은 1400년경에 구씨(具氏), 고씨(高氏), 안씨(安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세사람이 함께 성황당을 모셨으므로 이곳을 삼단(三檀)이라 하였는데 후에 사달(沙達)이라 하였다 한다.
2) 대밭마[竹田洞]
김씨(金氏)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한 뒤에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정착하여 살았는데 마을 주위에 대밭이 많다 하여 대밭마[竹田洞]라 하였다고 전한다.
3) 광대골(廣大谷)
광대사(廣大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광대골(廣大谷)이라 전한다.
4) 길마(吉馬)
조선(朝鮮) 초기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선비가 말을 메어두고 용변(用便)을 보고 오니 말이 없어 졌기에 찾아보니 말이 이 마을에 누워있으므로 이곳 마을의 산세(山勢)가 말의 안장과 흡사하다 하여 길마(吉馬)라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안쪽에 있는 마을을 내길마(內吉馬) 바깥쪽에 있는 마을을 외길마(外吉馬)라 하였다고 전한다.
5) 오봉골(五峯谷)
옛날에 오봉사(五峯寺)라는 절이 있었던 골이라 하여 이 골을 오봉골이라 한다. 지금도 절터 흔적이 남아있고 골 입구에 암자(庵子)가 있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51가구 중 경주이씨(慶州李氏) 4, 경주최씨(慶州崔氏) 6, 전주이씨(全州李氏) 4, 김녕김씨(金寧金氏) 4, 김해김씨(金海金氏) 3, 기타 30가구다.
4. 마을의 특징(特徵)
1) 광대골 석탑
광대사가 있었던 절터에 작은 석탑(石塔)이 있었는데 1950년경에 없어졌다. 현재 경주 박물관 뒷마당에 있다.
2) 성황당(城隍堂)
이 마을은 자연부락마다 성황당이 있는데 3개부락에 있는 성황당은 당집이 있고 2개부락은 큰 나무와 큰 바위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내길마에 있는 성황당은 그 마을에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되었고 그외 4곳에 있는 성황당은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목욕제계하고 동리의 무병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특히 광대골 성황당은 상단(上단)과 하단(下단)이 있는데 하단은 보통의 성황제의 예에 따라 제사를 올리고 있으나 상단은 제사 때 어물(魚物)을 일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불교의식(佛敎儀式)으로 제사를 올린 것이 전래된 것 같다고 한다.
첫댓글 금매2리의 역사가 구구절절 하네
내 고향은 그저 울진군 매화리라고만 기억하는데...역사도 뭣도 모르면서 참...남사시럽네..선남씨! 고향에 대한 공부기회..고마워요. ㅋㅋ
위의 광대골 석탑 하루밤새 도둑맞았다, 연도는 50년대가 아니고 1960년대다,높이3-4미터 무개2-4톤정도 되는데 내가 어릴적밤에 도둑들이 깜쪽같이 훔처갔다,우리탑밭 중앙에 있어서 지나가던 중이 할머니에게 원한대로 준다고 팔라고했대.탑앞에 찍은사진도있고,어느겨울 아침에 잊어버렸다고 야단났었다.25년전에 경주박물관에서 찾아가라고 연락온걸 삼촌이 갔더니 박물관뒤에 여러탑들과 석여있더란다.탑밭도 남의밭이 됐고 이젠 울진군에서나 찾아서 복원할는지..꼭 찾을 필요도없고..
선남씨 정말대단하네요 내가나고자란곳에 관해 오늘처음알았네요 고마워요
선남아 고생했네
너무 소중 한 공부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