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 이미지를 이처럼 선명한 시각 이미지로 바꾸어 보여 주는 시도 드물 것이다. 여자의 길고 흰 두 손이 건반을 두드리고, 그 피아노 연주 소리는 손가락들의 재빠르고 현란한 움직임과 함께 마치 물에서 금방 건져 올려 퍼덕거리고 있는 물고기의 비늘 빛처럼 싱싱하다. 이윽고 피아노 속에서 튀어나온 빛은 꼬리를 물고 쏟아져 바다 전체가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다에 파도가 인다. 그것은 시퍼런 칼날처럼 날카롭다. 연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서정적 자아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든다. 이렇게 이 시는 ‘여자의 손가락→ 물고기→튀는 빛의 연속→바다→파도→칼날’이라는 감각적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음악 소리는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만 보인다. 시가 자기의 한 본성으로 누리고 있는 특권적 감각의 영역, 그 하나 공감각적 이미지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는 실험적 기법과 과감한 비유를 통해 순수 이미지 추구에 몰두했던 감각적이고 주지적인 전봉건의 대표작 중 하나다.
오페라 미용실 / 윤석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무잎 음표들이 옹알거릴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둥,
백지에 오선을 굿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벼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단풍/ 박성우
맑은 계곡으로 단풍이 진다
온 몸에 수천 개의 입술을 숨기고도
사내 하나 유혹하지 못했을까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앉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다방 늙은 여자
볼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부르다 만 슬픈 노래를 마저 부르려는 듯 그 여자
반쯤 지워진 입술을 부르르 비튼다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
지우다 만 입술을 깊은 계곡으로 떨군다
점묘/ 박용래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二重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나비 / 문인수
저 긴 수평선, 당신도 입 꽉 다물고
오래 독대한 흔적이 있다.
바람 아래 모래 위 우묵한 엉덩이 자국이여
온 몸을 실어 힘껏 눌러앉았던
이 뚜렷한 부재야말로 날개 아니냐
저 일몰 속 어디 어둑, 어둑,
훨 훨 훨 깔리는 활주로가 있다.
달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노작문학상> 수상작인 <달북>을 보자. "수상작<달북>은 원숙과 독창이 자연스럽게 어울린 명품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라는 김주연의 평처럼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라는 표현은 매끈하고 깔끔하며 견고하고 단단한 진술이다. 침묵이라 하면 <닫힘>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데 그것을 뒤집어 '만개한-'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깊은 연륜에서 비롯된 원숙한 사유가 아니면 끌어 올수 없는 것이다. 침묵의 만개함,-그것은 깊은 사유와 지혜를 바탕으로 어떤 경지에 이르러서야 해득되는 게 아닐까? 다시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라며 그 선문답같은 뭉퉁한 사유로 따뜻하게 감싸주는 포근함이 시인에게는 있다. 시인의 눈은 물상을 넉넉하게 통과시키는 프리즘이다. 그리고 그 프리즘을 통과한 스펙트럼은 뚜렷하고 선연한 가시광선으로 分光되어 나타난다.
이 시에서는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라는 구절이 절창이 아닐까 싶다. 시인은 따스하고 깊이 있는 넉넉한 안목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암흑의 밑을 타개는 예리한 비수도 더불어 소지하고 계시다. 허지만 전혀 아프지가 않다. 그의 날카로운 비수는 찌른 게 아니라 투둑, 타갰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 아픔은 비명을 지를 만큼의 순간적인 날카로움이 아니라 치유불가능의 상흔이 되어 둔한 충격으로 오히려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고 잊혀지는 것 보다는 그것이 상처이든 추억이든 오래 남아 길게 회억되는 각별함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그만큼 덜 도회적이라는 것.-그것 또한 문인수시인의 인간적인 매력이 아닐까 싶다.
내가 그의 시를 읽으면서 이런 '타갠다'와 같은 토속적인 말들을 만나는 재미도 놓칠 수 없었다. 그 어원까지를 밝히기는 힘들지만, 타갠다는 건 예리한 물건으로 짜르는 게 아니라 둔하게 둘 이상으로 분할하는 의미가 큰, 토박이말이라고 짐작한다. 밀쳐 나오는 중량감을 어쩌지 못하고 투둑투둑 터져 버리는 제 안의 용서들, 그랬다, 시란 자기용서라는 그의 고백처럼 제 안의 열정들이 그렇게 타개져 나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깡깡깡'이라든가 '논두렁논두렁', '구절양장구절양장' '왜곡, 왜곡' 과 같이 단어를 중첩 사용하여 자기만의 새로운 의성어나 의태어를 연출함으로써 운율을 자아내어 시의 맛을 더하고 있다.
목탁은 살구나무로 만든다
새벽 / 문인수
살구나무의 일생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면서
신새벽이 낳는 알일까
대가리 뭉툭한 질문 같은 것이 떠오른다
한 줄로 길게 찢어지는 이 구멍은 또 무엇인가
웃는 눈, 입 같다
거기 귀를 갖다대니
새파란 하늘냄새가 살구 맛 난다
허공은 허공끼리 잘 흘러들고 나는구나
밤새도록 반짝반짝 어둠을 파내던 별들이, 저 향 맑은 소리가 전부 목탁 속으로 들어 갈 때
예불은 끝나고
만상이 서로 이 닦은 듯 개운하게 다가오는
신새벽. 여명의 고요한 배냇짓을 보라
목탁의 아가미가 숨쉬는 것인데
나도 가만히 따라 웃고 싶다.
깊은 산사, 새벽예불을 끝내고 촉촉이 젖은 법당 앞을 내려선다. 새벽은 스스로 항상 이처럼 말갛고 개운하게 시작되는 것이다. 만상이 신생의 몸짓으로 가만가만 뒤척이고 있다. 그는 이것을 고요한 배냇짓이라고 부른다. 신새벽이 낳는 알, 살구나무의 일생이 송두리째 빠져나간 그 목탁의 아가미에선 그 목탁처럼 뭉툭한 선문답이 흐른다. '허공은 허공끼리 잘 흘러들고 나는구나' 와 같은 사유에서 새파란 하늘 냄새의 후각적 이미지와 살구 맛을 읽어내는 그 미감까지 넘나드는 그는 서정의 본질에 충실한 시인이다.
메시지 / 자크 프레베르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닫은 문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깨문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넘어뜨린 의자
누군가 연 문
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
누군가 건너지르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집 / 이용악
밤마다 꿈이 많아서
나는 겁이 많아서
어깨가 처지는 것일까
끝까지 끝까지 웃는 낯으로
아이들은 층층계를 내려가버렸나 본데
벗 없을 땐
집 한 칸 있었으면 덜이나 곤하겠는데
타지 않는 저녁 하늘을
가벼운 병처럼 스쳐흐르는 시장기
어쩌면 몹시두 아름다워라
앞이건 뒤건 내 가차이 모올래 오시이소
눈감고 모란을 보는 것이요
눈감고
모란을 보는 것이요
( ) / 박진환
엎드려 뻗쳐
일어서
일어서
엎드려 뻗쳐
흩어져
모여
흩어졌다
다시 모여
선착순 집합
3열 횡대로
헤쳐 모여
앞줄 앉아
뒷줄 앉아
다음 줄 앉아
앞줄 일어서
뒷줄 일어서
다음 줄 일어서
별 명이 없는 한
계속 반복
일제히 기합 받는
사단 연병장
철자법 / 문인수
겨울 포도원의 포도나무 넝쿨들은 줄줄이 팽팽하게 가로질러 놓은
철선을 따라 삐뚤삐뚤 끌려가고 있다
그래, 삐뚤삐뚤 삐져 나오는 이 철자법!
울퉁불퉁 만져지는 것이 거친 계류같다. 결박당하지 않는
혈행(血行)이 있다. 이걸 붉게 마셨구나 혹한의 한 복판에다가
굵게 양각하는, 그렇게 계속 길 뚫는, 오 오매불망오매불망 가는,
자필의 끔찍한 기록이 있다. 달콤한 사랑.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엔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는 숨쉬는
것조차 짐 아닐까 싶은데
노구를 떠난 거동일랑 전부
잇몸으로 우물거려 대강 삼키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아낙들을 부르는 손짓,
저 허공의 반경 내엔 그러니까 아직도
상처와 기억들이 잘 썩어 기름진 가임의
구덩이가 숨어 있는지
할머니, 손수 가꿨다며 호박잎 묶음도
너풀너풀 흔들어 보인다.
옛말에 ‘무릎이 귀를 넘도록 산다’더니 저 할머니 평생 굽이굽이 아흔아홉 고개 거뜬히 넘었지만 이제 제 무릎고개 하나에 숨이 차는구나. 할머니에게도 애호박처럼 풋풋한 날들 있었으리라. 양 볼에 저승꽃 말고 분홍빛 복사꽃 피우던 날도 있었으리라. 지겟다리 같은 할머니 무릎 아래 푸르고 젊은 것들 찬란히 빛난다. 뜨겁던 여름날의 매미소리 잦아들면 모든 푸른 것들도 찬 서리 속으로 벋어 가리라. 겨우내 가파른 무릎 고개 지나 모든 늙은 것들 꽃잎으로 다시 오리라. -시인 반칠환
<청각적 이미지>
유리의 技術 /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끓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환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매미 울음에 / 박재삼
우리 마음을 비추는
한낮의 대숲에서 매미가 우네
그 소리도 가지가지의 매미 울음
머언 어린 날은 구름을 보아 마음대로 꽃이 되기도 하고 잎이 되기도 하고 친한 이웃 아이 얼굴이 되기도 하던 것을
오늘은 귀를 뜨고 마음을 뜨고,
아,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또는 대님 푸는 소리로까지 어여삐 기삐 그려낼 수 있는
明明한 明明한 매미가 우네
바다 2 / 정지용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 했다
푸른 도마뱀 같이
재재발렸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들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정곡 / 장인수
저수지에 돌을 던진다
풍덩!
파르르 열리며
수면에 동그란 과녁이 생긴다
과녁의 正鵠에 깊이 박히는 돌
신기하다
무언가를 던지면
순간 순식간
자신에게 닿는 무언가의 존재에게
저수지는 中心을 내어준다
명중!
잠시 후 흔적없이 과녁을 소멸시키는 저수지
저수지는
자신의 중심을 뚫고 들어온 존재들을
고요와 격랑의 아득한 틈으로
발바닥에 흐르는 끈적한 시간 속으로
질을 지나 자궁 속으로
着 착 착
들어앉힌다
저 갈대밭 / 강희안
누가 저 갈대밭에
능금 두 알 숨겨두고
밤새
끼륵끼륵대다가
달빛조차 숨은
적막을 틈타
누군가와 모올래
사각사각
시린 속살 베어 무는지
그것만은
오롯이
神만이 알어리랏다
귀뚜리도 잠든 새벽녘
한 줄금
비릿한 단내가
풍겨왔으렷다
톡톡 / 류인서
그 여자는 매니큐어 바르기를 좋아한다, 올 터진 스타킹, 갈라진 손톱,
분홍빛 벌레구멍, 찢어진 나비날개, 솔기 끝 어디에든
손가락 만한 매니큐어를 만지작거리며 그 여자는
금간 애인과의 사이를 어떻게 메울까 한동안 훌쩍거리다,
고양이처럼 달랑 의자에 올라앉아 엄지발톱에 톡, 톡 매니큐어를 바른다
그래, 톡 톡 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것도 괜챦겠다
톡, 메밀밭 메밀꽃이 하얗게 귀 트이는 소리
톡톡, 호박잎 위에서 배꼽 달팽이 발가락 펴는 소리
톡톡톡, 등푸른 오이가 칼날 위를 뛰어가는 소리
톡톡, 끝여름밤 귀뚜라미망치로 휘어 사라져가는 철길 두드리는 소리
톡톡, 글자 위를 기어가는칠점 무당벌레 오자탈자 골라내는 소리
톡톡, 별고둥이 버얼건 폐선 밑바닥에 달라붙어 노크하는 소리
이제 울음 그쳤니? 톡톡, 구름이 눈썹창 여는 소리
물꽃 / 김영식
냄비 속 물이 끓는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
흰 챠도르 두른 물의 분자들이 비등점까지 솟구쳐 오른다
물 갈피에 갇혀 있던 막막한 기다림들이 일제히
둥근 수면을 떠밀며 돌기하고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하는 꽃몽오리들
푸르르푸르 새의 부리처럼 지저귄다
어둠 속을 고요하게 흐르기만 하던,
샘에 앉아 기껏 허공의 얼굴이나 비추던 그녀는
얼마나 목이 타는 말을
제 뼈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간절한 것들은 모두 꽃이 된다고 물은 지금
최초의 설렘인 듯 최후의 결심인 듯
전심전력으로 피어나고 있다 몸속에
뿌리, 줄기를 감추고 있는 저 구름가계의 족속들은
더러는 수증기가 되어 천정까지 발돋움 한다
무수한 골짜기와 봉우리가 일어섰단 스러지고
흰 머리칼 쓸어 넘기며
젖은 입술 흔들어대며
가스레인지 위로 화르르 끓는 절정을 토해내는 그녀의,
뜨거운 혓바닥이 밀어 올리는 수천의 아우성들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리는 무뇌아처럼 지금
세상에서 가장 짧은 생을 가진
슬픔이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다
겨울밤 / 이재무
싸락눈이 내리고 날은 저물어
길은 보이지 않고
목쉰 개 울음만 빙판에 자꾸
엎어지는데 식전에 나간 아부지
여태 돌아오시지 않는다
세 번 데운 황새기 장국은 쫄고
벽시계가 열 한시를 친다
무거워 오는 졸음을 쫓고
문꼬리를 흔드는 기침 소리에
놀래 문 열면
싸대기를 때리는 바람
이불 속 묻어 둔 밥
다독거리다 밤은 깊어
실강 뒤지는 새앙쥐 소리
서울행 기적 소리 들리고 오 리 밖
상여집 지나 숱한 설움을 짊어지고
된바람 헤쳐오는 가뿐 숨소리
들린다 여태 아부지는 오시지 않고
씨앗의 힘
-가벼워짐에 대하여·10
이지엽
씨앗가게 앞에 서면
무숭숭 뚫린 황망한 家系 사이로
좌르르 쏟아지는 어머니의 12월,
왜 들여다보고 싶은지
어머니는 기집애가 참아야지 구신거리면
누나는, 엄만 왜 애먼 나만 갖고 그러느냐고 앙당거리고
너도 애비같이 속창시 없는 것이라고 구신구신거리고
중학 안 보내줄 때도 그러더니 또 그런다고 앙당앙당거리고
장지 덧문 사이로 더러 내리는 눈발도
한 번 기웃거리다가 참견하면서
그렇게 한겨울 밤이 스르렁 넘을라다가도
구신구신 앙당앙당
어떻게 넘을까 싶은데
나는 건넌방에 누워 그 대화를 엿듣다가 말다가
눈 내리는 사정이 더 궁금해져
기어코 토방까지 기어나오곤 했다
눈은, 웃뜸 영심이 고애 눈썰미처럼
참 곱게도 오는 것이어서
그 소리들은 오싹거리며 이부자리를 파고 든 이후에도
스멀스멀 내 꿈 사이를 기어다녔다
그 꿈의 웃시렁에 대롱대롱 매달린
씨 오쟁이에서는 까맣고 또글또글한 씨앗들의 소리가 밤새
튀밥 튀며 날아오르기도 했는데
오늘 씨앗가게 앞에 서니
천안으로 시집간 누나, 식당 주방에서 애들 학비는
거뜬히 번다며 웃던 누나, 보고 싶다
이 땅 여자들이 끌고 가는 단단한 삶의 알갱이들
단호한 응집력이 구신구신 앙당앙당
내 종아리를 푸르게 때리고 지나간다
NOSTALGIA / 신석정
끝내 나비는 꽃잎파리에 붙은 떨어질줄 모르는 한 장의 郵票였습니다.
그래도 봄은 가버리던데요, 뭐…….
이윽고는 새끼들을 데불고 떠나야할 아득한 고향이기에 제비들은 선선의 위험 한 스테 - 지에서 니그로 보다도 서러운 望鄕歌를 부르나 봅니다.
옥쪼륵 빡쪼록 조래 조래……
옥쪼륵 빡쪼록 조래 조래……
아주 머언 옛날 삼단같은 머리를 따느린 시설스런 우리 누나가 가르쳐 주던 제비의 망향가를 외우며 지금 나는 니그로 같이 아득한 참으로 아득한 고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시는 6․25 전란이 끝난 54년 6월에 쓰여진 작품으로 ‘제비→ 고향→ 누나’로 이어지는 연상 작용을 근거로 고향을 간절히 희구하고 있다. 고향은 현실의 비극을 잠시나마 우회시키고 지연시키는 여유의 공간이다. 1연은 ‘나비’가 “꽃잎파리에 붙”어 “떨어질줄 모르”는 것을 응시하는 정적의 시간이다. 시적 자아는 잠시 동안이나마 자연의 응시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시적 자아는 “한 장의 郵票”같아 봄을 꽉 붙잡고 있던 ‘나비’의 인식에서 나아가 2연에서 “그래도 봄은 가버”렸다는 허망감을 표출한다. 이것은 비정한 역사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봄’의 시간대로서, 당대적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가혹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명력을 상실한 시적 자아는 3연에서 ‘제비’와 만나 그들의 “서러운 望鄕歌”를 들으며 ‘고향’의 공간으로 연상을 진척시킨다. 그 고향은 비극적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새끼들을 데불고 떠나야할 아득”한 공간인 것이다. 여기서의 ‘제비’는 시적 자아의 투사적 상관물로서, 고향을 아득한 거리로 파악하는 의식을 노정한다. 이는 현실을 떠날 수 없는 시적 자아의 역사적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4연의 “옥쪼륵 빡쪼록 조래 조래”의 의성어에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시적 자아가 두 가지 의미를 겨냥하여 만든 조어(造語)로 볼 수 있다. 이를 풀어보면 하나는 ‘옥조르고 꽉조르고 졸라 졸라’이며 다른 하나는 ‘윽 쪼르륵 팍 쪼르륵 저래 저래’이다. 전자는 미․소 양대 진영의 분할 점거라는 명분으로 우리를 억압하는 당시 상황의 암유이고, 후자는 가난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싸움과 도적질을 서슴지 않던 당시 서민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 자아는 5연의 과거의 시간으로 퇴행하여 “아주 머언 옛날 삼단같은 머리를 따느린 시설스런 우리 누나”의 연상으로 나아간다. 여기서의 ‘누나’는 시적 자아에게 있어 ‘어머니’와 동일한 이미지로서 따뜻한 모성의 원형이며,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또한 누나가 “가르쳐 주던 제비의 망향가”는 시를 부드럽고 간절한 분위기로 이끌어 인식의 단조로움이나 지나친 감상에서 벗어나 시적 미감(美感)을 자극하도록 만들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 자아는 맑고 풍요로운 “니그로 같이 아득한 참으로 아득한 고향을 생각”하는 마지막 단계의 연상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사슴 / 박두진
──삐이 뱃쫑! 뱃쫑
하는 놈도 있고
──호을 호로롯
하고 우는 놈도 있고
──찌이잇 잴잴잴!
하는 놈도 있고 온통 산새들이 야단이었습니다.
바다 / 박희진
바다, 바다, 바다, 바다,
無窮動 바다,
차츰 그 바다에 가까이 가서야
목청이 열렸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
마치 처음으로 질러보는 음성인양,
진정「아아」라는
母音이 있기에 구원이 되는 셈.
"삐이 뱃쫑" "호을 호로롯" "찌이잇 잴잴잴" 등은 直喩的이다. 여러 가지 새들의 소리를 직접 흉내낸 것으로 낱말로서의 의미는 완전 배재되어 있다. 오직 소리만이 존재한다. 즉, voice가 아닌 sound의 상징인 것이다. 반면 박희진의 「바다」는 바다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간접적으로 擬聲化시킨 것이다. 즉, 실제의 소리가 아닌 관념상의 의미로 대치시킨 것이다. 작자의 恣意的인 음성기호로서 '바다'가 쓰였다. 이는 이센손(Jon Eisenson)이 그의 「The paychology of speech」의 개념으로 든 ㉠口頭表現(oral symbol) ㉡ 몸짓(gesture visible word) 중에서 ㉠에 해당하다.
제목:( )
산을 통째로 볶아내고
비틀어 짜내는 염제의 심술
보다 못한 그가
폭군폭군 종일 외쳐댔다
<미각 이미지>
북신/ 백석
거리에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어쩐지 향산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어 걸고 국수에 치는 도야지 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믄드믄 백였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 고기를 물구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
북관 / 백석(白石)
명태 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그느슥히 여진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백성의 향수도 맛본다
무제(無題) 1 / 허영자
돌 틈에서 솟아나는
싸늘한 샘물처럼
눈발에 고개드는
새파란 팟종처럼
그렇게
맑게
또한 그렇게
매웁게
적막한 식욕 / 박목월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床에 올라
새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食性.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손과 주인이 겸상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너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보이소 웃마을 이생원 앙인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이 가는
쓸쓸한 음식.
이 시에서는 '싱겁고 구수한' 메밀묵 맛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오히려 아름다운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인간미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미각적 감각은 감각 자체로 끝나지 않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전통적인 인간미로까지 확장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메밀묵이 새 사돈을 대접하는 상에까지 오르는 소중한 음식임을 환기시키면서 결국은 미각적 이미지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사회적 식사 / 박지웅
갈비를 뜯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매일 동료들과 어울려
이 식탁을 잡으러 다녔는지 모른다
영양같이 뛰어다니는 식탁을 위해
우리는 동물의 힘으로 모였는지 모른다
식탁 머리맡에서 우두머리가 먹고
나와 동료는 식탁을 둘러싸고 앉았다
식탁의 등을 파먹다, 오호라!
대장이 숨통을 물어 끊을 때
나는 내 뒷다리에 힘을 주고 이리저리
이 식탁의 관절을 끊느라 무척 애썼다
아 참 육질이 좋다 참, 좋구나
어리고 부드러운 살, 먹는다, 씹는다
아 어금니에서 자꾸 빠져나오는 만족의 힘이여
뼈만 남은 식탁에 밥을 얹고 웃는 힘이여
식사가 끝나면 발톱을 닦고 이빨을 고르는
짐승의 솜씨를 가진 멋진 동료여
여럿이 있으면 우리는 왜 동물이 되는가
땡감 / 이재무
여름 땡볕
옳게 이기는 놈일수록
떫다
떫은 놈일수록
가을 햇살 푸짐한 날에
단맛 그득 품을 수 있다
떫은 놈일수록
벌레에 강하다
비바람 이길 수 있다
덜 떫은 놈일수록
홍시로 가지 못한다
아, 둘러보아도 둘러보아도
이 여름 땡볕 세월에
땡감처럼 단단한 놈들이 없다
떫은 놈들이 없다
화장터 / 최치언
아주 놀라운 일이었지
내가 장작더미위에 누워 화장을 당하고 있었던 거야
가족들은 타오르는 불 밖에서 춤을 추고
나는 불 안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지 이내
내 몸에서 믿기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
먹지에 돋보기를 대듯 살갗이 구슬구슬 타들어가기 시작했지
먼저 왼팔이 안으로 꺾어 들어가고 눈알이 팝콘처러 부풀어 오르다
터져버린 거야 눈물도 나지 않더군 두 발을 꽁꽁 묶었던 밧줄이
맥없이 팅겨졌지만 뛰쳐나갈 수 없었어 그때 동생이
부지깽이로 내 배를 푹 찔러보는 거야 장난처럼 비명도 없이
젓가락을 받아들이듯 내 배가 내장을 쏟고 말았지
구린 날들이 일제히 새털처럼 꼬스라 들고 말았지만
누군가 가족사진을 내던지고 저주를 퍼붓고 있었지
저건 죽어서도 구린낸를 풍기는군
그러나 내 귀는 이미 쪼그라들고 말들은 혓바닥에
붙어 버렸지 아 그때 나는 처음으로 말의 맛을 알고 말았지
텁텁하고 누런 피의 맛 그리고 나는 이렇게
뼛가루로 뿌려지고 있는거야
식구들은 강 저편에서 새벽이 오기 전에 쓰러져 잠들었지
어머니가 조용히 일어나 말간 숯불을 들춰 보는 거야
식구들 몰래 숯불에 감자를 구워먹는 저 여자는
다시는 처녀가 될 수 없는 어머니는
울고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러니 너는 배고프지 않니
주둥이 미어터지도록 어서 너도 한 입 베어 물렴
작 익은 허기 한 근
客 氣 / 안도현
이불 뒤집어쓰고 엎드려
황금빛 귤 까먹는다
귤처럼 새큼한 년 하나 어디 없나
생각한다
사내 혼자 자는 밤
얼마나 많아야
해탈, 하는 것이냐
위대한 식사 / 이재무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 이윤설
비린 게 무지하게 먹고팠을 뿐이어요
슬펐거든요. 울면서 마른 나뭇잎 따 먹었죠, 전어튀김처럼 파삭 부서졌죠.
사실 나무를 통째 먹기엔 제 입 턱없이 조그마했지만요
앉은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 깨끗이 아작냈죠.
멀리 뻗은 연한 가지는 똑똑 어금니로 끊어 먹고
잎사귀에 몸 말고 잠든 매미 껍질도 이빨 새에 으깨어졌죠.
뿌리째 씹는 순서 앞에서
새알이 터졌나? 머리 위에서 새들이 빙빙 돌면서 짹짹거렸어요
한 입에 넣기에 좀 곤란했지만요
닭다리를 생각하면 돼요. 양손에 쥐고 좌-악 찢는 거죠.
뿌리라는 것들은 닭발같아서 뼈째 씹어야해요. 오도독 오도독 물렁뼈처럼
씹을 수록 맛이 나죠. 전 단지 살아있는 세계로 들어가고팠을 뿐이었어요.
나무 한 그루 다 먹을 줄, 미처 몰랐다구요.
당신은 떠났고 울면서 나무를 씹어 삼키었죠.
섬세한 잎맥만 남기고 갉작이는 애벌레처럼
바람을 햇빛을 흙의 습윤을 잘 발라 먹었어요. 나무의 살집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죠. 푸른 생선처럼 날 것의 비린 나무 냄새.
살아있는 활어의 저 노호하는 나무 비늘들.
두 손에 흠뻑 적신 나무즙으로 저는 여름내 우는 매미의 눈이 되었어요.
슬프면 비린 게 먹고 싶어져요,
아이 살처럼 몰캉한 나무 뜯어먹으러 저 숲으로 가요.
조태 칼국수 / 고형렬
눈이 우르릉거리는 사나운 날엔 국수를 해 먹는다. 애곤지 알이 명태머리 꼬리가 처박는 폭설. 된장을 푼 멸치국물이 가스불에 설설 맴도는, 까닭없이 궁핍한 서울. 엉덩이 들고 홍두깨로 민 반죽을 칼질하고 밀가룰 뿌려놓은 긴 국숫발. 바다 모래불 가 눈발을 그리는 20년 객지, 하며 창밖에 펄펄 날리는 하늘 눈사태 바라보는 나는 이런다,
이런 날은 이 조태 칼국수만이
저 을씨년하고 어두운 날씨를 이길 수 있다.
<후각적 이미지>
두메산골 1 / 이용악
들창을 열면 물구지떡 내음새 내달았다
쌍바라지 열어제치면
썩달나무 썩는 냄새 유달리 향그러웠다
뒷산에도 봋나무
앞산두 군데군데 봋나무
주인장은 매사냥을 다니다가
바위틈에서 죽었다는 주막집에서
오래오래 옛말처럼 살고 싶었다
4행시 / 김영랑
얼결에 여흰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우에 처얼석 갯물이 놓이듯
얼컥 니이는 훗근한 내음
나무도마 /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화색(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텨가 내려지고 있었다
삼립 소보루빵 / 김진완
집었다.
뛰어!
빨리! 더 더 빨리, 나는 다리가 짧아 흙먼지가 소보루루소보루루루 따라오지 콧속 먼지 냄새. 화끈 달은 내 몸내, 땀내, 단내. 뻐드렁니 종화녀석 한입 물기 전, 썩은 이빨내. 개천물 시궁창내. 황사 덮인 하늘 뾰죽뾰죽 간지럼 먹이는 강아지풀내.
밥 먹어
안 먹어
뭣 먹었니?
등을 쳐내려 엄지에다 모아
바늘끝 할매 머릿기름 냄새, 담바꼬 냄새
툭,
검은 피비린내
꽉, 체했구나 고모 로션 냄새. 다이알비누 냄새. 펌프물 녹냄새
두 발을 마룻장에 걸치고 혀가 발고락에 닿을락말락 비 맞은 워리
'저리 가', 개 냄새
사춘기 형 여드름보다 더 우둘투둘한 삼립 소보루빵
오만가지 냄새 부풀다 오돌토돌 소보루소보루 엉긴
소보루빵.
내가 훔친, 삼립하고도 소보루빵.
갔던 벽 / 이병률
벽을 찔러 조심스레 들어내어 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육백여 년 동안 그려진 그림이 수십 겹이라는 사실에 미어지는 걸 받치느라 나는 가매지고 무거워진다 책 냄새를 맡는다 살 냄새였던가
'시몽' 연작시 1번 머리칼 / 구르몽
시몽, 너의 머리칼 숲속에는 / 커다란 신비가 있다
너는 건초(乾草)냄새가 난다 / 너는 짐승이 자고 간 돌냄새가 난다
너는 무두질한 가죽냄새가 난다 / 너는 갓 타작한 밀냄새가 난다
너는 장작냄새가 난다 / 너는 아침마다 가져오는 빵냄새가 난다
너는 무너진 토담에 핀 꽃냄새가 난다 / 너는 복분자딸기냄새가 난다
너는 비에 씻긴 두류냄새가 난다 / 너는 저녁때 베어들이는 등심초와 양치풀냄새가 난다
너는 호랑가시냄새가 난다 너는 이끼냄새가 난다
너는 생나무울타리 그늘에서 열매 맺고 시든 노랑풀냄새가 난다
너는 꿀풀과 나비꽃냄새가 난다 / 너는 거여목냄새가 난다 너는 우유냄새가 난다
너는 회향풀냄새가 난다 / 너는 호두냄새가 난다
너는 잘 익어 따낸 과일냄새가 난다 / 너는 꽃이 만발한 버들과 보리수 냄새가 난다
너는 꿀벌냄새가 난다 / 너는 목장을 헤지를 때의 삶의 냄새가 난다
너는 흙과 시냇물냄새가 난다 / 너는 정사(情事)냄새가 난다
너는 물냄새가 난다 / 시몽, 너의 머리칼 숲속엔 커다란 신비가 있다.
여름날 / 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젋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초여름/ 이시영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앞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어
노오란 꽃잎들을 와르르 포도 위에 쏟아놓는다
그 위를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년 둘이
허연 다리를 허벅지까지 드러낸 채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걸어간다
어디서 훅 풀 비린내가 스쳐온다
3월 / 조은길
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햇살에 안겨 배냇잠 자는 모습 보면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뽀오얀 수증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주고 요구르트도 나누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가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이 보고싶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 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 아--
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3월 구석구석마다 젖내가...... 어머니
그립다
모자 / 송찬호
난 어떤 밀고자를 알고 있다
저기 그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다
벌써부터 그의 머리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난다
귓속으로 한 웅큼 동전이 쏟아진다
자, 보세요 얼마나 잘 익었는지......
그러나 아쉽게도 이 빵을 모자로 뒤집어야 한다
난 모자 앞에서 늘 망설이는 편이다
아름다운 여자 아름다운 집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처럼
난 하나의 모자를 고른다. 그렇게
한 권의 훌륭한 책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언젠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내 고단한 몸을 누일 때 그것이
머리 위로 천천히 들어올려지겠지
죽은 나비를 집어올리듯이
저기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다
보라,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인사는
이것을 만지작거리며 반가워하는 것이다
이 경의를,
빵 굽는 냄새나는 이 모자를
<촉각적 이미지>
(1)촉각투사
폐경기/ 박진성
앙상한 개가 이 새벽에 핥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女性이다 불면을 죽어라 핥아내면
당신의 아침이다 월경 멈추던 즈음에
어머니는 불 켜진 새벽 마루에서 자주 마늘을 까거나
콩나물을 다듬는다 몸에서 핏덩이를 뱉는 대신
마늘 쭉정이라든가 시든 배춧잎을 오래된 습관으로
잘라내는 거다 생후 사십오 일 된 애완견은
무거운 상징을 핥는다 정신없이 낼름대는 혓바닥이
아무렇게나 드러난 허벅지에 닿았을 때 나는
개의 몸부림을 거둔다 아침 햇살 자글자글 끓고 있는
어머니의 눈가 주름살…… 애써 눈 돌리며 어머니 원피스를
기저귀처럼 허벅지 아래로 감싼다 곁에 누워
강아지 구석구석을 만져주었다 내 손등이며
귓불이며 무릎을 핥고 있는 어린 목숨 건너
싱싱한 날것으로 어머니 살갗 내음 달라붙는다
아침 댓바람에 숨의 결 따라 한참을 울었다
서러움이라고 쓰지 말자, 어린 개가
눈언저리를 열렬하게 핥아내는 거였다
사물의 꿈 1/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2)반사질감
국수/ 이재무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동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순결들!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발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얌념을 넣고
코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친정 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위험한 家系․ 1969/기형도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 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 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춘설(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 뿌리와
서늘하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금 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숭 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 입이 오믈 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 움직이지 않던
** 솜을 두어서 지은 옷
고양이 잡기 / 박지웅
고양이를 잡을 때는 손에서 살기를 빼야 한다
--살기? 내가 그걸 죽이려 했단 말이야?
--아니, 잡으려는 생각 말이야.
옳거니, 나는 생각의 근시를 벗는다
내 음성이 휘둘렸을 채칙이나 부름이 지녔을 목줄
재촉하여 부르고 낚아채려는 손을, 손에서 뺀다
몇 겹이나 포개어 낀 장갑 같은 생각, 생각!
내 손에는 수갑처럼 달린 생각
네가 다니는 목마다 걸어놓은 올무와 포획, 치워낸다
누대에 거쳐 매복한 이 수렵의 기운!
한 놈 두 놈 걸어 나온다
--나는 너에게 적지였으니, 너의 생각이라는 불온한 종족을 발견했다
나는 손에 남은 포위를 걷어 낸다
정신 집중하여 손에서 집착을 떼어 낸다
생각은 집요하다, 독하게 붙어 파고드는 거머리들
나는 불을 들어 생각의 등을 쓸어내린다
떨어져 바닥에 우글거리는 무례하고 말랑한 생각들.
이제 나는 물체처럼 손을 내려 흐르는 물에 담근다
몸이 빠져 나간다 손끝으로사람이 빠져 나간다
나는 장소가 된다. 나는 물 한 모금이 된다
낙동강.4-제삿날 밤/ 김명수
할아버지 제사가 들던 날 밤은
차가운 동짓달 열엿새 밤이었다.
은함재를 넘어오는 싸늘한 밤바람에
문풍지가 울어대던 겨울날 밤이었다.
지방을 써 붙이고 향불을 피워도
아버지는 그 밤에도 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몇 번이나 삽짝 밖을 기웃대도
멀리서 아득히 개만 짖었다.
제관도 없이 제사를 지낸 밤은
새벽도 좀체 오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좀 으스스 추운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차가운 동짓달 열엿새 밤'과 '싸늘한 밤바람' '문풍지가 울어대던 겨울날 밤'이란 시행들이 연달아 나오며 우리의 촉각을 자극시켜, 마치 차디찬 겨울 바람에 살이 닿은 것 같은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런 촉각적 이미지에 의해서 제관도 없이 제사를 지내는 집안 분위기가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추운 겨울밤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관을 해야 할 아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고 새벽이 되어 가는 그 때의 어머니의 가슴 속을 아픔과 절망으로 휘잉 휘잉 불어가는 겨울 바람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교감 / 정현종
밤이 자기의 심정처럼
켜고 있는 街燈
붉고 따뜻한 가등의 정감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가등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
이 시는 사물인 가등과 안개를 의인화 시켜서 시인 나름의 느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안개 낀 밤 가등을 보면 안개는 빛을 빨아 없애려는 것 같고, 가등의 그 불빛은 안개를 빨아 없애 빛을 확산시키려는 모습처럼 느껴지는데 이를 두 사물의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 이고 있다는 다분히 촉각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관감각적 이미지>: 심장의 고동이나 맥박, 호홉 소화 등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 현상과 관계 있는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