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아버지께서는 경남창녕의 한 시골마을에서 39년도에 태어나셨다. 3남1녀중의 막내로......
그리고 6. 25를 중학교때 맞이하시고, 고교를 졸업후 아버지는 창녕농고에 입학후 학내사고로 부산으로 전학해 해동고교를 졸업하셨다. (나도 그학교 출신이다) 그후 군입대를 하셨고, 만기제대를 하셨다. - 국민의 의무는 하셨다는 의미이다.
막내로 태어나신 아버지께서는 집안의 '망나니'셨던 20대를 보내신듯하다.
과거 내 어린시절 명절때, 제사등으로 대가족들이 모인자리에서 소란을 피우셨던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 소란은 주로 재산분배, 술등에 관한 문제에서 출발이된듯하다. - 내 기억에.....
68년도쯤이던가 가솔을 이끌고 부산 동대신동 동아대학교 담장옆 동네로 이주, 조그만 구멍가게로 생업을 시작하셨고, 그 이듬해부터 선견지명이 있으셨는지 [크레인]등의 중방비운용 기술학원에 다니시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곧 부산 구평동에 위치한 [극동철강주식회사-10년전의 한보철강]에 입사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술을 참으로 많이 드셨다. 내 초등 2학년때의 기억인데....... 그날이 월급날, 통금이 거의 다되어 가는 시각에 커다란 빵봉투를 안고 술떡이 되셔서 들어오면서 "이놈들! 내가 왔다!" 하시면서 함빡 웃으면서 들어오신다. 그런데 월급봉투에 남은 돈은 2만8천원...... 이버지 그당시 월급이 6~7만원정도였는데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 그날 아버지 어머니는 새벾까지 싸우셨다. - 월급의 나머지 부분은 외상술값을 갚는데 써버렸으니.......
그런생활이 약 10여년 흘러갔다. 중학교 3년때되던해 아버지께서는 중대결단을 내리셨다. 중동건설붐이 일어났을때 아버지께서도 자신의 기술분야로 [대림산업]에 소속되어 카타르에 진출하시게 된것 출발전날 아버지께서는 밤늦도록 잠을 못이루시고 마당에 나가 줄담배를 피우셨다. 그리고 당일 아침 부산역에서 우리에게 짤막하게 당부하셨다. "엄마 말 잘듯고, 공부 열심히 해라!" 그리고 엄마에겐, "내 갔다올께!"
아버지께서는 기차문에 서서 멀어질때까지 손을 흔드셨다. 이어지는 어머니의 통곡........ - 나는 그때는 어머니의 눈물의 의미를 몰랐지만, 세월이 꽤 흐른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버지의 중동생활은 그후 약 십여년간 지속되었다. 1년6개월에 한달정도의 귀국휴식을 반복하신것! 귀국하실때마다 느낀것은 아버지께서 많이 늙어서 오셨다는것 열사의 온도와 모래폭풍속에서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을까?
아버지께선 그렇게 해외생활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이별하셨다. 특히 그 부분, 할아버지먼저 돌아가신후 시골에 혼자 남은 할머니를 부산의 아들 3형제가 돌아가면서 모시게 되었는데 서로 안모시려는 패륜현상이 발생했던것! 어느해 아버지께서 귀국하셨다가 할머니와 지내다 출국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 어머니께 '어머니를 당분간만 우리집에 모셔 달라' 신신당부를 하시고 가셨는데 어머니는 아버지 출국후 다음날 바로 둘째형님댁에 보내버리고, 그 둘째동시는 다시 곧바로 큰형님댁에 보내셨고, 큰 형수는 곧바로 시골에 할머니를 보내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그 할머니께서 나무나 충격을 받으셨는지 그만 그 다음날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께선 해외 파견 종료후 술을 잘 안드셨는데 이때의 일이 심신에 사무쳐 술을 드시기만 하면 다시 형님들에게 찾아가 과도한 항의를 하다 싸움이 생기고 집에선 어머니에 폭행하는일이 자주 발생했다. - 형님들 그리고 그 아내들때문에 내어머니가 혼자 쓸쓸히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내가 자라오면서 결국 형제 가족도 분배의 정의가 서있지 않으면 우애가 형성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는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내 나이 40이 되니까 겨우 철이들었던것 같다. 어떤일이 있어도 부모형제에 의지 해서도 아니되고 내가 자립을 하지않으면 안된다는것을....
3년전 아버지생신때 모든가족 - 부모, 두여동생부부 앞에서 나의 결단을 말씀드렸다.
아버지어머니께선 유산에 얽힌, 윗대조상봉양에서 발생했던 형제불화를 극복하시고 다시 왕래를 하시고 호형호제를 재개 하시고, 동생부부들앞에선 내가 더 열심히 살아, 성공하여 우리부모님을 편안히 모실것이라고.....
그후 나는 내 아내와 열심히 도전을 해왔다. 그리고 아이들! 작년에 어린것들을 유학보낸다고 하니 걱정이 되신 모양이다. 그러나 곧 우리를 대견해 하신다. "언제 너희들이 이렇게 아이들을 유학보낼정도로 해놨느냐? 나는 너거 큰집들이 자석들 번듯하게 키울때 아무것도 못해줬는데...." 하시면서 또 눈물이다. 나는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선 열사의 나라에서 수십년간 생고생 하시었기 때문에 제가 대학공부도 마치고, 이렇게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게 된겁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선 내 사무실인근의 조선부품회사에서 중장비기사로 근무하신다. 그때 38년전에 배웠던 기술이 아직도 많이 쓰이는 기술이다.
아버지께 배운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안정적일때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 을 배웠다. - 그때 가게를 계속 하셨으면 술 좋아하시는분이 게으른 스타일이 몸에 배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께서는 장차 한국사회에 기술인력 이 필요할것으로 예견하시어 중장비기술을 배우신것
또 하나 한국의 아버지상에 대해서 배운것 - "나는 아무리 고생하고 괴로워도 오로지 내가족 내자석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도 견딜수 있다"는 [다이하드]의 정신이다.
지금 나는 나의 아버지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위대하다. 그리고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무언의 가르침대로 내가족 내자석을 위해 낮과 밤, 휴일에도 목표를 위해 도전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첫댓글 무언의 가르침을 통한 깨음.. 그리고 행할 줄 아는 의지.. 니한테 럽다.
열심히 살아라...덕슥아...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