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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한국, 신화의 섬
S# 1. 기관실 전경
주기관을 비롯한 각종 보기들이 귓속을 막는 듯 울리는 시끄러운 소음. 바로 그때, 기관실 저변으로부터 치솟으면서 범람하는 살벌한 물결 소리···, 그 위로 기기들의 소란스런 진동에 휩싸여 한 순간 뒤흔들리는 부원들의 헝클어진 표정들.
S# 2. 주기관 대판(帶板)
썰렁하게 비치는 주기관 대판 틈새로 얼렁거리는 ‘역발산’의 몸체와 군색한 그의 얼굴빛, 그런대로 파도를 잘도 타듯 버티고 있다.
S# 3. 냉각기 옆 캐스케이드 탱크
희맑게 피어오르는 증기를 받치고 선 ‘역발산’···. 그런데 그 옆 연료유 이송 펌프 곁이다. 밸브 핸들을 들고 버티고 있는 약간 비대한 몸집의 ‘대머리’ 최득만, 그의 얼굴에 창백한 그늘을 덮씌운 채 마치 헐떡이는 거위처럼 뒤뚱뒤뚱 콘솔 쪽으로 걸어 나온다. ‘역발산’과는 대조적인 샛노랗게 질린 표정의 그가 착잡한 얼굴빛으로 기관실을 지키고 있는 성윤기 앞으로 다가가자 대뜸 다급한 목소리로 재우친다.
최득만 일기사님. 지금, ‘SOS’, 긴급구조 신호를 타전하고 있을까요?
갑작스럽게 웬 뚱딴지같은 자신의 주장을 뱉는 최득만에게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이고 대꾸하는···.
성윤기 물론 통신장이 이미 타전했겠죠.
최득만 (더 말이 없는···)
옹고집 같은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피우는 최득만을 외면하듯 입을 다물고 그의 곁에서 묵묵히 떠나는 성윤기, 전령기 쪽 우현태 곁으로 뚜벅뚜벅 다가선다.
성윤기 (가라앉은 목소리) 이기사! 직접 바깥을 내다보고 현황을 한 번 더 말해 주겠나?
우현태 (미처 발음이 터지지 않은 입안 소리로) 네····?!
그 순간, 우현태에게 꽂히는 성윤기의 시선···. 상대방을 자극하는 서글서글한 눈빛이다.
S# 4. 충계 위
더할 나위 없는 호기심을 띄워 상층 층계 위로 묵묵히 응시하는 우현태에게···.
성윤기 (더는 말이 없는)
우현태 (펼쳐내는 바깥의 정경) 물론 그곳은 자욱한 ‘해무’가 가렸을 더없이 음산한 바닷가, 그 신비스런 무인도다.
(환영) 파도가 암벽을 핥듯이 커다란 지느러미를 치고 있다.
우현태 (토해내는) 그 모든 전경을 이제야 직접 보고서 똑바로 상황판단을 한다는 게 언제까지 전령기 원반 위로 넋을 뺏긴 채 버티고 있는 것보다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성윤기 (잠시 침묵을 지키는 우현태에게) 어때? 탈출구야 없지 않을 테니 까!
우현태 (결심을 굳힌 즛) 네, 다녀오겠습니다!
성윤기 (어딘가 응시하듯 던지는 향수 어린 그의 눈빛)····.
그제 반기듯 호기심 가득한 엷은 미소마저 띄운 우현태, 거수경례를 던지자마자 서둘러 계단 위로 휑하니 몸을 날린다.
S# 5. 기관실 상단 층계
그 위로 감도는 스산한 냉기···. 축축한 습기가 가라앉은 공간, 그 동안 온통 구름덩이처럼 떠돌던 뜨거운 증기가 바깥에서 몰려든 차가운 대기와 맞부딪치는 현상이다.
그런 기관실 상층, 소나기를 한 바탕 맞은 듯한 주변, 여기저기 비치는 물체 위로 가지런히 맺힌 잘은 물방울들, 전등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그 물방울들은 증기가 훈훈히 피어오르는 석쇠 형 발판 틈새로, 그리고 널찍한 공간을 거의 차지한 주기관의각각 2개의 고·저압 실린더를 덮씌워 둔 철판 위로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곳을 휘둘러보며 지나치는 우현태, 얼결에 발걸음을 위쪽 층계의 발판 위로 멈추자 휘둥그렇게 눈을 뜬다.
S# 6. 동 기관실 상단 층계 위
뭉실뭉실 밀려드는 자욱한 해무, 그것은 유동하는 희뿌연 구름덩이처럼 별안간 시야를 가로막은 채 비친다. 내처 갑판 위 현통로 쪽으로 나서는 우현태의 콧등 앞에 쏟아지듯 아치형 목재 선회계단의 길쭉한 통로를 꽉 틀어막고 있다.
우현태 (주절대는) 짙은 연무(煙霧)···, 아니 ‘역발산’이 말했던 ‘··· 해무(海霧)’, 그것이다. 바로 그게 바깥의 써늘한 대기와 어둑한 그림 자를 동반하고 기관실의 열기에 흡수되자 얼굴을 비벼대며 흩날리는 것이다.
S# 7. 시야의 전경
동시에 어렴풋이 펼쳐지는 경관. 그것은 언뜻 상념에 사로잡히는 듯 천일야화의 현실처럼 비쳐진다.
(환영)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년 ‘알라딘’과 그의 램프, 그리고 하얗게 피어 날리는 연기 속의 요술쟁이 ‘지니’···.
우현태 (환영을 지켜보는)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게다가 그녀의 도움 으로 어느 동굴 속에서 탈출하는 그 소년···. 음, 어떤 낭만적인 이야기가 줄거리도 없이 연상되듯 신비스럽게 펼쳐지는군.
S# 8. 채광창 밑의 하얀 안개
전등 빛을 좇아 매달린 연기 같은 안개, 우현태의 어깨를 짚고 실타래처럼 기어오르다가 희맑게 풀리면서 그 형체가 사라진다.
습기를 오롯이 머금은 채광창과 전등 커버 주변, 군데군데 총총히 맺혀 빛나는 자디잔 물방울들···. 그런 현상을 지켜보는 우현태, 해무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뛰어들자 언뜻 습한 감촉을 깨우친다.
우현태 (뱉어내는) 음, 목덜미에 부딪치는 섬뜩한 냉기···!
S# 9. 깜깜한 층계 안쪽
기관실 불빛과 소음마저 차단된 고요, 대기 속에 일고 있는 현통로 바깥에서 밀려드는 차디 찬 수포, 목덜미로 부슬부슬 비벼댄다.
갑판 현 통로 위로 더듬더듬 올라서는 우현태, 무엇 하나 분간할 수 없는 칠흑의 밤빛에 싸여 있는 주변이다.
우현태 (밤눈을 부릅뜨는) 동공을 넓혀 주변을 얼른 내다보고 싶군. 부슬거 리는 눈앞의 안개라도···.
그러나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주변···. 여전히 깜깜하다.
S# 10. 극히 음산한 바닷가
외계와도 같은 적요 속에 묻힌 선현 통로 위에서 이물 쪽 방향으로 발걸음을 더듬더듬 옮겨가는 우현태, 파도가 쳐올 때를 감안해서 지주에 걸쳐 그물처럼 쳐져 있는 난간 곁으로 가깝게 다가선다.
우현태 (어둠 속 난간을 더듬는) 선현에서 파도를 얻어맞거나 그 동요 때문에 미끄러져 바다 위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영상) 시야의 어둠 속으로 그려보는 그 난간은 물론 선현으로 나란히 간격을 둔 채 세워진 철봉 굵기의 지주로써 횡으로 걸려 있다.
(대사 연결) 그러니까 여기는 얼마 전 ‘역발산’이 걸어 나섰던 고물 쪽과는 반대 방향이다.
걸음을 옮기다가 말고 손잡이의 난간을 붙잡는 우현태···.
(대사 연결) 이게 곧 ‘생명선’이라 일컫는 핸드레일(Hand Rail)이다.
S# 11. 어둠 속 현 통로 위
그 동안, 파도소리가 왠지 들려오지 않는 주변이다. 그곳으로 귀를 기울이고 ‘핸드레일’이란 난간을 더듬거리며 걸어 나가는 우현태.
(영상) 저만치 5, 6미터 앞 마주치는 단층건물 벽 쪽에서 꺾어 돌아나가는 ‘ㄱ’자형 현 통로. 역시 거기도 한 길 반 밑의 주갑판, 떨어지지 않게 가로막고 있는 난간. 거기서 파도막이로 세워진 우현 현장(舷牆) 아래로 주갑판에 닿는 깊은 낭떠러지···.
우현태 음, 도무지 캄캄해서 무엇인가 비치지 않는군.
S# 12. 같은 곳
시야, 언뜻 비치는 안개 속에 흐르는 미세한 빛발, 선창의 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전등의 불빛이다.
우현태 (그 빛을 내다보며) 아늑한 느낌의 빛살···, 그걸 쬐면 그만큼 동 공이 작아져서 곤란하다.
그 빛을 등지는 우현태, 성큼 걸음을 앞으로 옮긴다.
S# 13. 회오리 바람소리
머리 위, 귀를 기울이게 하는 그것은 허공을 울리면서 스쳐가는 ‘하늘 바람’ 소리다.
E 흉흉흉···
···
우현태 (들으며) 기상이 나쁠 때 멀리 뻗혀 있는 불안스런 저기압 권의 회오 리 바람소리다.
(환영) 소용돌이치는 그 흉흉한 바람 밑에서 그 동안 바다를 누볐던 천지호가 지금 무엇을 어이없이 들이박고 있다. 그러고는 그 아름다운 비너스의 볼륨과 선으로 조형된 이물, 볼썽사나운 형태로 변모되어 진통을 겪고 있다.
(대사 연결) (시선을 던지는) 그 이물 쪽을 가리고 있는 선교건물조차 보이지 않 는군.
어둠 속 선체의 중앙에 위치하여 선미와 선교를 잇고 있는 구름다리 쪽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던지는 우현태, 하지만 그 구름다리 곁의 펌프실, 그리고 구름다리 아래쪽 주갑판 위로 하늘을 찌를 듯이 세워진 아름드리 마스터···, 등등 모두가 비치지 않는다.
(대사 연결) 뿐만 아닌, 구름다리 끝 선교건물 앞으로 마치 개선문처럼 두 개의 아름드리 문형(門型) 기둥처럼 세워진 삼손 포스트(Samson Post). 일 명 킹스 포스트(King's Post)라고 일컫는 그게 모두 상상 속의 그림처 럼 영 비치지 않는다.
S# 14. ‘하늘 바람’ 소리
E 흉흉흉···
허공으로 한 번 더 귀를 기울이는 우현태. 멀리서 적적하게 울어 에는 그것은 숫제 고요의 어둠을 더불어 들여 주변을 둘러싸듯 천지호를 휘덮고 있다.
S# 15. 선미 단층건물의 옥상
키 높이 위의 좌우 현 널찍한 공간의 구명정 갑판에는 선체가 뒤흔들릴 때마다 데비트(Davit)에 걸려 있는 두 척의 구명정이 삐꺽거린다. 그런 현상을 어둠 속으로 지켜보면서 잠시 생각 속에 잠기는···.
우현태 곧 그걸 타고 바다를 향해 떠난다고 했던 ‘역발산’이다?! ‘거대 한 고래도 아닌, 백상아리를 잡으러···!?’ 핑계가 그때 그것 밖에 없었던 것 같은 그였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가 곧장 고물 쪽으로 걸어 나간 후 그 ‘스크류’와 ‘암 바위’에 휘감겨 있 는 낚싯줄을 걷어내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지만 거긴 이쪽에서는 내다볼 수 없이 정반대 방향의 등 뒤쪽 15미터 안팎 떨어진 거리로 단층건물의 벽에 시야가 가려져 있다.
S# 16. 선미루 갑판 위 (회상)
언뜻 떠올려진 방과 후의 저녁 무렵···, 그때(1회. 폭풍 주의보 S# 26. 선미루 갑판) 선미 단층건물 옥상에서다. 난간에 가슴을 받치고 선 채 등과 어깨를 곱사등처럼 구부린 백만복 조리장, 호박씨 같은 금니를 드러내며 선미루 갑판 위의 몇몇 부원들에게 뭐라고 떠들어댄다.
백만복 (E) 고사를 지내며 모두들 한잔씩들 하세요. 푸짐히 차려뒀으니까.
(연상) 선미루 갑판에서 가까운 거리에 보이는 백만복 조리장의 선실, 그리고 그 앞 쪽으로 마치 우람한 아궁이에서 담황색 연기와 열기를 내뿜는 보일러의 연돌···, 바로 그 앞, 기관실 지붕의 옥상 한가운데로 두꺼운 유리창들이 나란히 몇 개인가 끼워져 있는 채광창(採光窓)···.
그런데 약간 등을 돌려 주변을 다시 돌이켜보는 우현태,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자신의 머리 위로 시선을 옮긴다.
우현태 (생각 속에 잠긴) 이상하다? 채광창에서 새어 나오는 훤한 불빛이 웬 장막에 가려있다.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려보는 우현태, 역시나 도무지 무엇이 비치지 않는 주변이다.
(대사 연결) 어떻게 된 것일까? 건물의 외벽이 시야를 막고 있는 것일까? 물론 거 긴 머리 위쪽이다.
시꺼먼 빛깔의 방수용 캔버스에 싸인 구명정이 시야를 가리고 있다. 역시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주변이다.
(대사 연결) 갑갑하군. 혹 내가 야맹증 환자만 같다?! 오늘 낮에 잘못 스쳐버린 자외선 때문에 시신경이 약간 손상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비타민 A 가 언제부턴가 부족했던가?
찬찬히 다시 사방을 살필 수밖에 없기에 좌우로 잠시 몸을 움직이는 우현태.
S# 17. 감감하게 감아두는 눈
주갑판 위쪽을 머릿속으로 비쳐보는 우현태. (연상)
저만치 감겨진 눈앞으로 봉우리 무덤처럼 나란히 놓여 있는 모두 여섯 개의 화물창과 그 창구···. 또한 주갑판 위 그곳에는 화물유를 데우는 증기의 굵고 가는 파이프라인이 즐비하게 얽혀져 있다. 그런 설치물들은 선교건물 앞쪽 네 개의 화물창이 있는 주갑판에서도 마찬가지다. 곧 그곳을 가려둔 선교는 하얀 페인트칠로 새롭게 단장된 3, 4층의 서구식 주택의 건물과 비슷하게 닮아 있다.
바로 시야에 두루 비춰 보이는 그 주변···.
우현태 (흥얼거리는) 아담한 선교건물의 양현에는 불워크(Bulwark)라 일컫는 파 도막이. (지그시 감겨진 눈으로 선교 쪽 주변을 일깨우는) 곧 두꺼운 철 판이 난간처럼 둘러싸여 있는 통로의 파도막이 철판.
거기서 다시 주변을 환기 시키는 우현태···.
(연상) 그러니까 선교 단층건물 좌우현 통로 곁 벽면에 항해사와 통신사의 선실이 붙어 있다. 그 좌우 현통로에서 이물 쪽으로 나서면 역시 좀 규모야 작지만 선교건물 앞쪽의 주갑판과 그 위로 걸쳐진 구름다리. 그 구름다리로 곧장 나가면 바로 선교에서 바라볼 때 약 40미터 전방이 그 이물···.
순간,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파도 소리.
E 철썩···!
···
기우뚱거리는 선체···. 동시에 그 소란한 귓전의 소음을 좇아 꾹 난간을 움켜잡자 퍼뜩 눈을 뜨는 우현태.
그 찰라 굉음을 동반하며 덮쳐든 파도, 선체를 둥 떠올린 채 칠흑의 어둠을 뒤흔들어댄다.
E 콰광 쾅!
···
이물 쪽에선가 지척에 떨어진 폭음과도 같은 굉음이다. 게다가 뒤이어지는, 온통 요란하게 스치는 파도의 소음.
E 쏴아!
···
동시에, 희끄무레한 빛이 주변에 비쳐지는 듯···. 그런 빛살은 주갑판 위로 스치면서 어둠속으로 쉬이 사라져간다.
우현태 (터뜨리는) 뭐 대단한 파도는 아니군. 다만 주기적인 조수를 타고 이따 금 크고 작게 닥쳐드는 것이다.
E 쏴아···
한 바탕 스쳐 지나는 파도 소리. 이내 소음은 어둠의 꼬리를 물고 정적 속에 가라앉는다. 정작 이때 다시 터트려진 감탄의 혼잣소리···.
우현태 옳거니,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군!
눈두덩 가까이 얹혀 감감한 빛을 띄운 안개, 바람결을 타고 희뜩희뜩 흩날린다. 점점 눈이 트이듯 저 너머 무엇인가가 이제는 희미하게 드러날 것 같은 시야···.
(대사 연결) 그런데, 저게 무엇일까?
S# 18. 건넌 편 밤빛 속
한 겹의 베일을 벗기듯 어둠속을 투시해보다가 소스라쳐 크게 치켜뜨는 눈···.
그 순간, 어둠속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거대한 괴물··· 내다보면서 화들짝 뒷걸음쳐 주춤거리는 동작.
우현태 아, 무엇인가!?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쳐드는군?!
갑자기 웬 괴물인가?! 밤하늘을 휘덮은 검독수리의 날개가 병아리 채듯 한 인간의 보잘것없는 몸뚱어리를 노렸던 형상이다.
(대사 연결) (신음 소리) 아아, 이런 괴물을 당장 어떻게 때려눕힐 수가 없다. 더 욱이 맨주먹으로···. 도망칠 레야 칠 수 없는 것, 빠져나올 레야 나올 수도 없다.
시야를 완벽하게 가로막고 주변을 휘덮여버린 커다란 날갯죽지, 순식간 거뭇한 윤곽을 드러낸다.
(대사 연결) 음, 그 날카로운 발톱에 채이지는 않았군. 아아···. 이처럼 자 신이 위약할 수 있을까. (싸늘한 간담을 겨우 짓눌리며 그제 상대가 아무것도 아닌 양 심호흡을 하는) 무엇 때문에 그렇듯 놀라 버린 나 자신이 더 이상 수치스러울 수 없군!
한 발짝 물러선 발걸음을 겨우 앞으로 다가세우는 우현태.
S# 19. 어둠 속 던져 둔 시선
내처 그 무시무시한 괴물의 정체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시선.
우현태 (그러나 자각하는) 밤하늘을 에워싼 거창한 덩치, 지금껏 찾지 못했던 어떤 섬일 뿐···. 그것이 좌우, 이물과 고물 방향으로 쩍 어깨를 벌리고 갑작스레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휘둥그레 눈을 다시금 치켜뜬 우현태, 곧 그 섬의 중턱에서 위쪽으로 눈길을 옮겨간다.
(대사 연결) (저절로 입술에서 빚어진 차라리 감탄스런 신음소리) 아아···. 이 게 무슨 변조인가!
허연 솜덩이 같은 운무(雲霧), 섬 중턱에서 부풀리면서 용트림질치고 있다. 덩이지은 구름처럼 구불텅구불텅, 등성이 위로 뒹굴러 무서운 어떤 정체를 가려놓은 듯 섬 꼭대기를 휘덮고 있다.
(대사 연결) (떠올린) 곧 ‘역발산’이 말했던 그 ‘해무’다. 마치 자욱한 연기에 둘러싸인 한가운데로 활활 타오르는 신비의 활화산이라고나 할까. 그 야말로 심안 써늘한 장관이다.
S# 20. 장엄한 웬 광경
한 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는 우현태. 어림잡아 길이 백 미터의 천지호를 직립 시켜도 보다 훨씬 높은 등성이 위로 던져내는 희한에 잠긴 눈빛이다.
그런데 섬 꼭대기 둘레로 구름덩이처럼 형성된 운무, 불어제치는 ‘하늘 바람’을 맞아 더 이상 뒹굴려 피어오르지는 못하고 주변에 날린다. 다만 그 위쪽 밤하늘에 깃털처럼 하얗게 깔린 조개구름 틈새로 얼굴을 내미는 몇 개의 잔별들···, 파르스름하게 비치는 듯 사라진다.
아니 환영과 같은 그 별들은 파르르 빛살이 흔들리다가 사라져버린 듯 더는 보이지 않는다.
S# 21. 낮게 내려앉은 밤하늘
그곳으로 마치 원형을 이룬 운무 속에 싸여 숨어 있는 섬 꼭대기, 그 위로 잔별이 그새 비쳤던 어느 청명한 호수처럼 투시되어 있다. (환영)
그런 형상은 언뜻 천지(天池)와 같은 그 이름이 떠올려지는 흡사 신비의 베일에 가린 백두산 영봉의 그 못과 닮아 있는 듯 오묘하고 심오한 느낌이다.
우현태 (속으로 뇌는) 바다를 누비는 천지호(天池號), 그리고 백두산 영봉 의 ‘천지(天池)’! 그야 발음과 그 한자의 뜻이 흡사한 것처럼 저 섬 꼭대기 위로 투시된 현상(現像)으로써 또한 여러 갈래 뻗쳐드 는 사상과 더불어 무엇엔가 신기하게 일치돼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모든 게 불가피한 어떤 역사를 이곳에 장식해 왔던가, 싶 다. 곧 이걸 두고 ‘역발산’이 ‘한국, 신화 같은 섬’이라고 일렀 던 것인가?! 폭풍우 몰려드는 질펀한 바다 한가운데로 홀연히 치솟 아 올라 분노하는 웬 신화의 섬을 탄생시키고 여태껏 천지호를 벼르 고 이끌어 들였던 것처럼···. 게다가 그 섬을 장악한 주신은 저 신비의 활화산마냥 타오르는 운무에 둘러싸인 꼭지 위로 좌상한 어 떤 형상을 하고 분분한 ‘하늘 바람’을 일으키면서 호통을 치고 있 는지 모른다.
불현듯 몸서리를 느끼는 우현태, 그런 자신을 심호흡으로 가다듬고 다시 뇐다.
(대사 연결) 고고한 그와 같은 현상은 이미 오늘밤 그 주신이 ‘천지호의 최후’ 를 이곳에서 장식하길 예고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거기에 탑승하 고 있는 부원들의 운명은 벌써부터 이곳의 그 불길한 그림자에 가려 있었던 것이다.
S# 22. 캄캄한 밤하늘
반향 되는 ‘하늘 바람’, 마치 태곳적 소리처럼 들려온다.
E 흉흉흉···.
···
우현태 천지호가 어쩔 수 없는 마력에 이끌려 들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태곳적 부터 오늘 밤에 이르기까지 숱한 날짜를 헤아리게 하는군.
별스런 의혹에 사로잡혀드는 우현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어떤 알 수 없는 형상의 주신이다.
(대사 연결) 그러니까 언젠가부터 각박한 인간사로부터 견딜 수 없어 질펀한 바다 한가운데로 쫓겨버린 주신은 이곳에 축소된 신화의 섬을 탄생시켜 두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 속에 잠기는) 하지만 주신의 정체는 무 엇인가? 왜 그것은 끝내 여기서 사망을 불러들이는 것일까? 아, 인간 사와는 영 외면해 버린 이곳은 외계와 같은 신비와 장엄과 노여움이 분분히 서려 있다.
그러다가 중얼거림은 다시 이어진다.
(대사 연결) 감히 이 영역에 천사가 날아든다면?
S# 23. 밤하늘, 저 먼 바다 위
(환영) 날아들고 있는 아리따운 천사 하나. 그런데 천사는 밤낮의 경계 선상에서 일진의 회오리바람을 얻어맞자 날개가 접히고 뜯긴 채 마침내 곤두박질치면서 납빛의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다.
우현태 (부르르 몸을 떨어 붙이는) ‘그까짓 것’···. 해괴한 환영일 뿐이다?!
S# 24. 우현태, 크게 돌이키는 숨길
그러다가 얼마큼 식어진 심안을 누르며 웅얼거리는 혼잣소리···.
우현태 가련한 천사, 지금 어디에서 거친 파도에 휩쓸려 어떤 구조를 요청 하고 있을까? 천사니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S# 25. 천사가 낙하하는 바다 (환영)
그 천사로부터 등을 지면서, 잠시 후···.
우현태 (뱉어내는) 섬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는 똑바로 파악해 둬야만 되겠 지.
(O.L.) 갑자기 어둠을 뚫는 한 줄기의 빛살···, 바라보며 흠칫 온몸을 움츠리며 눈을 치뜬 우현태, 암벽 쪽으로 시선을 던져 둔 채로다.
(대사 연결) (다시 뱉어내는) 본선 선교에서 비추고 있는 발광신호용 서치라이트 다.
이리저리 주변을 관찰하고 있는 우중충한 빛살, 광휘에 반사되는 것은 암벽에 휘덮인 자욱한 안개의 포말이다.
곧 암벽 중턱에서 두꺼운 층을 형성한 운무, 그것은 뭉게뭉게 부풀리며 섬 꼭대기로 유동하는 형태로써 한갓 생소한 형상 밖에 지나지 않지만 역시 어둠속의 장관이다.
S# 26. 어둠 속, 뻗치는 빛의 자락
무엇 하나 암벽의 표면을 요연하게 비쳐낼 수 없는 서치라이트, 밤하늘 밑에서 여기저기 찔러대다가 암벽 맞은편으로 길게 뻗혀 옮겨간다.
자욱한 운무는 바다 쪽에서도 넓게 깔려 있다. 그곳 먼 거리에서 내다보면···.
(환영) 곧 파도가 무수한 조개의 무리들로 행렬을 짓듯 번쩍거린다. 그건 조수와 함께 한 번씩 세력을 동반하고 밀려오는 파도 더미다!
그 바다 위로 밤하늘을 길게 훑어내는 서치라이트, 쉬이 그 빛살은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간다.
S# 27. 칠흑빛 속의 정적
어렴풋이 비치는 그림자의 형체···. 운무가 스멀거리는 음습한 암벽 표면에 투시되는 웬 형상들이다. 거기에는 연륜을 헤아릴 수 없는 묵은 이끼가 축축한 태곳적 물기를 머금고 뻔질거리는 듯··· 암벽 밑둥치로 바다와 연접해서 긴 동굴을 이룬 형상은 설핏 기괴하게 비친다.
깊숙이 들여다보이는 그곳은 물론 운무가 뿌옇게 찬 동굴 안쪽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넘실거리는 물결, 그 위로 비치는 궁형의 벽 쪽에서 번지르르 흘러내리는 물기와 그 주변의 으스스한 흔적들···.
거기서 들려오는 웬 박쥐들이 날뛰는 소리.
E 푸드덕!
···
그리고 그 날개 소리에 이어 잦아드는 정적. 숫제 벽 쪽 어디선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그곳에 귀를 기울이는 우현태···.
E 똑똑···!
들려오다가 곧 이어, 물결 위로 스치는 바람소리.
E 휙!
정적을 이끌면서, 갑자기 벽을 타고 흐느끼는···.
E 으흐흐···!
어떤 악령의 일그러진 웃음소리, 그 위로 스치는 냉기어린 바람소리에 실려 사라지다가 돌연히 터트려져 반향 돼 가는 호방한 웃음소리 ···.
E 으하하···!
···
사라지면서 어디선가 사납게 일어나는 파도와 바람소리를 타고 멀리서 들려오는 부원들의 비명소리···.
동시에 비쳐지는 그들의 환영과 희미하게 이어지는 환청···!
S# 28. 신화 속, 어느 소인의 나라
언뜻 반향 되는 웬 환청 속의 울부짖음···.
(환영) 폭풍우를 조우한 조그만 배, 깨어지고 침몰되자 목숨을 잃고 있는 어느 소인국 선원들의 절규. 그러다가 거친 풍랑에서 간신히 헤쳐 나와 이곳 동굴 속으로 마력에 이끌리듯 표류된 몇몇 소인국 선원들···. 음흉한 어떤 악령 앞에 엎드리고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걸어 갖은 아양을 떨고 애원하고 있는 건지 아뜩하고 난감한 광경이다.
우현태 (신변에 머문 몸서리쳐지는 현실을 떠올리고 부르짖는) 오늘밤 목숨 을 뺏길 수야 없지 않는가. 과연 이러한 곳에 배를 타고 들어왔을 줄이야···, 어젯밤 아니 그 전날의 꿈속에서도 전혀 느껴보지 못 했던 것이다. 어째 그 옛날 이런 망측한 일을 잠재의식 속에서나 간 직하고 있었던가?!
S# 29. 다시 떠올려진 주변 (환영)
비쳐지는 섬 꼭지 위로 노여움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형상인가의 주신, 그리고 밑둥치의 기괴한 동굴 깊숙이 공존하고 있는 악령의 구렁텅이 속으로 감히 천지호를 타고 들어온 부원들···.
우현태 그들은 태곳적부터 오늘밤에 이르기까지 그 주신과 악령이 서로 내통 하고 어떤 죽음을 불러들였을지 모를 고고한 울음소리를 못내 듣고 있었던가?!
계속 연상되면서 사로잡힌 아련한 의식 속의 환영, 그리고 부르짖음···.
(대사 연결) (당혹스런 알지 못할 환영을 떠올린 채) 부원들이 불가피한 죄를 언 제 저질렀기에 넋을 뺏기고 천지호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럴만한 뾰족한 까닭이 기억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바 다란 낭만과 신비감을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이었을 뿐 그곳에서 고독 하게 살아온 죄 밖에 없지 않았던가. 그럴 텐데 이런 역운이 냉엄한 어떤 권위 앞에 마침내 닥쳐올 줄은 미처 옛날에 몰랐던 것이다.
우현태, 우두커니 느끼고 있는 가운데 다시 누군가가 흥얼거리는 혼잣말에 귀를 기울이듯 외쳐내는···.
(대사 연결) 이곳이야말로 어떤 꿈속도 아닌, 어떤 돌연변이적인 사고에서 온 것이라 하더라도 뚜렷한 현실과 그 장소라면 아 여기가 곧 그 ‘신화 같은’ 섬이다! 게다가 그와 같은 이상하리만큼 놀랍고 우아스런 엉뚱한 경지에 쫓겨든 사실일 텐데 그때 ‘역발산’의 말이 정녕 옳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럴 리 없겠지만 자신의 운명을 짐작한 그리고 음흉한 음모를 품고 암벽을 들이받았음으로 해서 일어난 천지호의 그 장렬한 생애와 더불어 함께한 모두가 어 쩔 수 없는 비운을 맞이하고 있다. 그 옛날 바다를 누비던 배가 거대한 하나의 고래처럼 보였는데 지금 암벽 밑둥치에 뱃머리를 부딪고 기진하고 있는 꼴이란 흡사 주둥이를 날려버린 한 마리 미미한 벌레마냥 서글프게 비친다. 다만 제 힘껏 암벽에 주둥이를 받아버린 그 무모한 투지만은 장하고 무상하다 할까. 그러나 역시 그것도 가소로운 짓이다. 그런 뜻밖의 비명으로 해서 육박해드는 천지호에 탑승하고 있는 많은 부원들의 불 길한 예감, 그리고 진한 그림자가 덮씌워 버린 이 모든 구렁텅이 속에서 감히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없잖아 있다면 대체 어디일까? 아무튼 이제는 그 방법을 강구해야만 되리라.
그렇듯 머릿속에서 흐르는 환영을 함께 떠올리다 마는 우현태.
S# 30. 어둠 속의 그림자
그제야 줄곧 버티고 있는 자기 자신을 좀은 애처롭게 느껴 보는 우현태, 한 번 대담하게 가슴을 벌리면서 호흡을 더 크게 들이키고 찬찬히 주변을 살펴내기 시작한다.
그때, 누군가가 곁으로 더듬거리듯 다가오는 기척···.
E 두···닥!
두···닥!
···.
우현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다보자 왠지 들려오지 않는 기척···. 그새, 주변의 그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그림자.
우현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니 분명히 발자국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울려오자마자 사라졌던 것 같은데···. 혹 나 자신처럼 심약한 한 부원이 어디서 더듬거리다가 무엇엔가 겁을 집어삼키고는 어디 로 뛰어들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글쎄, 그런 부원이 허우적거 리며 밖으로 나타났었다면, 우선 (잠시 충동질을 일으키듯) 놀라지 않게 기척을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그와 함께 이곳에 버티고 서서 담담한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 걸.
S# 31. 현측, 흔들리는 물체
그때서야 얼핏 더듬거리듯 다가서는 하나의 그림자, 보일러실 바깥 어둠속에서 나타난 듯 어쩌면 가상의 형체만 같다.
우현태 (그에게 마음 속 소리로) 누구세요?
그림자 ···.
우현태 (멀거니 비치는 그림자만 지켜보는)
그림자 (E) (언뜻 말하는) 무시무시한데요?
우현태 (받아내는) 그래요?! 캄캄한 곳에서 코앞의 섬을 내다보니까요.
그림자 (E) 히야, 자욱한 안개가 정말 신비스럽지 않아요?
우현태 섬을 가리고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니요?
그림자 (E) 글쎄요. 여기가 무인도인 것 같은데, 대체 어딜까요?
우현태 어깨를 쩍 벌리고 즐비한 기암괴석이 세워진··· 그렇지, 그 ‘병 풍도’일 거요.
그림자 (E) 맞아요. 바로 거기죠.
우현태 리아스식 해안의 검푸른 바다 위 외딴 곳에 솟아나 있는, 곧 어렴 풋한 기억속의 그 섬이지만···. 만약 그곳을 두고서 홀연히 캄캄 한 바다 한가운데로 솟아 있는 것 같다. ‘음산하다’, ‘전율적이 다···.’ 그래 누구처럼 신비스런 단어를 읊듯 던진다면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그림자 (E) 정말 그래요? 그까짓 걸 가지고 뭘 그토록 모든 것을 공교롭게 일치시켜 이상야릇한 느낌만으로 내다보고 있습니까, 글쎄. 일단 보 일러 실로 들어가 봐야만 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그러고는 훌쩍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환영과 같은 가상의 그림자.
우현태 글쎄, 그림자에게 생트집처럼 반기를 들고 싶었을 거야!
이윽고 몸을 돌려 고물 뒤편으로 내다보는 우현태, 휘둥그레 다시 눈을 뜬다.
S# 32. 은백색 바다
파도굽이 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다가 회오리바람에 실리고 있는 자욱한 안개···.
E 휘익, 휙!
···
막 소용돌이쳐대며 운무를 걷어붙인 회오리바람이다. 그것은 깎아지른 기괴한 형상의 암벽 저쪽으로 하얀 수포자락을 끌고 달려가 부딪치면서 섬 끄트머리 저 멀리 달아난다. 그러는 동안 어두컴컴한 바다 위로 쭈뼛한 암초가 둘, 셋··· 드러나다가는 피어 날리는 안개 속으로 쉬이 사라져간다.
우현태 (흥얼대는) 신비스런 자연의 조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이 모든 것을 화폭에 담을 수 있는 능력자로서 곧 솔거의 화필쯤이라면 분 명 감동적인 훌륭한 작품을 여기서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우선은 암벽 쪽 여기저기 탈출구를 쫓아가야만 되는 것이다.
그제야 건넌 편 섬을 소상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우현태, 써늘한 운무가 휘덮인 섬 중턱을 뚫어지게 내다보면서 어느덧 생각이 달라져 버린 듯한 눈빛이다.
(대사 연결) (흥얼대며) 하긴 선체 곁으로 섬이 있으니까 대수롭지 않은 양 여 겨졌던 탈출구이지만···.
S# 33. 울울한 운무 속
겨우 암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 흐릿하게만 비치는 시야.
우현태 아예 암벽을 타기에는 틀려 있었던 게 아닌가? 하지만 만약, 저 ‘병풍도’ 중턱이든가 꼭대기 위로 반드시 올라서야 한다면···?!
(환영) 어둠이 깜깜하게 싸여 있는 ‘병풍도’ 암벽의 형체···.
해파리처럼 물기를 잔뜩 머금은 해묵은 이끼, 뻔질거려서 무엇 하나 붙잡을 게 없는 절벽이다.
(대사 연결) 그러니까 영화의 제목이 어쩌면 ‘파도’가 아니었던가?! 그때의 한 두 장면이 선히 떠오르는군.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 어느 영화관에서 단체로 관람했던 그 영화의 몇몇 장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회상) 거룻배를 탄 한 젊은이, 부지런히 노를 젓고 있다. 그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웅장한 대리석 기둥과 같은 가파른 암벽으로 둘러싸인 절해의 고도다. 거기에는 먹구름이 몰려드는 하늘을 받치고 있고, 자욱한 운무조차 휘덮고 있는 어느 고고한 수도원이 그 섬 등성이 위로 축조돼 있다.
마침내 거룻배에서 내린 젊은이가 그 수도원을 향하여 아슬아슬 암벽을 타고 있다. 그럴 때 폭풍우를 동반한 파도가 암벽을 맹렬히 할퀴기 시작한다. 젊은이는 그 거친 파도에 휘감겨 들면서 험준한 암벽 위로 기어오르는 악전고투를 계속한다.
(대사 연결) 긴 여로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자 수녀가 돼버린 그 젊은이의 연인 을 만나기 위해서였던 게 아닌가. 어쨌든 그때, 운명의 여신은 죽 음은커녕 아름다운 연인을 재회할 수 있도록 용서했었던 것이다. 온 갖 고난과 위험을 무릅쓴 젊은이의 용기와 의지를 찬양한 것과도 방불한 그만큼 숭고한 사랑이 연인들의 가슴 속에 열렬히 불타고 있 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숫제 면제부가 떨어져 있었는지 모를 일이 다. 그러나 그 누군가의 경우, 젊은이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이 를테면 그가 더욱이 지금 낮도 아닌 밤 암벽을 타는 예의 모험을 한 다는 것도 그렇지만···. 처음부터 어떤 숭고한, 위대한 사랑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겨루는 것도 아니기에 결코 대의명분 조차 서지가 않는다. 하기야 이제 와서 다만 자기 자신의 안전과 가냘픈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분투한다는 것은 자기 혼자 살기 위해 서 비열한 안간힘을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그래서 그것은 저 섬 꼭지 위에서 호통을 치고 노니는 주신과 암벽의 그 깊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악령조차 그 자를 용서하지 않을 듯 오히려 가차 없이 처단해 버릴 것이다.
그러던 잠시 후 우현태, 토해내는 혼잣말의 탄식소리···.
(대사 연결) 아, 아···. 그럼 탈출구는 영 막혀 있단 말인가?
S# 34. 웬 상대방의 형체
곁으로 어렴풋이 다시 나타나서 언뜻 말하는···.
그림자 (E) 구조대가 이리로 올 테지요!
우현태 음, ‘구조대?’ 하지만 그것이 언제쯤 올 수 있다는데 대해서는 아찔한 느낌뿐이요!
저 자욱한 운무에 휘덮인 섬 꼭지 위를 하염없이 쳐다보는 우현태, 그 동안이다. 얼떨결 누군가에게 부르짖듯 말하는, 얼핏 비치는 형체다.
그림자 (E) (들리는 듯한 목소리) ‘흠, 여기서는 아예 어떤 구조대라도 기 대하지 마세오!’
우현태 ···.
S# 35. 화재 현장 (환영)
섬 꼭지 위로 뿜어 올리는 시커먼 연기···. 하늘을 휘덮듯이 훨훨,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이다.
그 언젠가 어느 고층건물의 화재 현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환시현상을 일으키는 듯···, 기억을 돌이키는 우현태의 침울한 표정.
한 순간 불길에 갇힌 여러 생명들과 함께 절망감에 싸이면서 겨우 지워지는 기억의 편린들···.
그러자 삭막한 현실 속에 다시 묻혀 드는 우현태,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가 역설적으로 뱉어내는 웬 낯선 목소리.
그림자 (E) 지금, SOS는 타전중일 테니까요.
우현태 하기야 늦지 않게 구명정을 타고 적당한 상륙지점을 찾으면 어떨까 요? 암벽 뒤를 돌아 나가면 될 것 같은데···?!
그림자 (침묵)
우현태 음, 침묵은···?! 비로소 신변에 죽음의 장막을 치고 있는 음흉한 묵비권이다. 서서히 ‘탈출자’를 포박하기 위해 밀착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군. 하지만 그건 오직 한 길 밖에 없는 해결책 일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오른 우현태, 새삼 그림자의 침묵을 힘 있게 깨뜨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
(대사 연결) 다만, 아직은 파도와 싸우며 천지호를 고수해야만 되는 거요!
S# 36. 선교 위
다시 비추는 서치라이트의 불빛, 희번덕희번덕 머리 위로 스쳐 지나자 운무 자욱한 바다 쪽 저 멀리, 막 산더미를 이룬 채 두루마리 치고 몰려오는 파도를 비춰대고 있다.
우현태 (빛살을 지켜보며) 자, 우선 기관실을 확보해야만 된다!
그와 동시 강렬한 어떤 의무감에 쫓기는 듯한 얼굴빛의 우현태, 황급히 기관실로 뛰어 들어가고 있다.
S# 37. 층계 밑으로 내리는 발걸음
우현태, 자신에게 쏠리는 핼쑥한 표정의 눈총들, 얼마 전 이곳 층계를 내리던 ‘역발산’의 행동거지가 일순 머릿속에 비쳐진다.
우현태 지금 ‘나’ 자신도 그와 비슷하게 비치는 것일까? 어쨌든 부원들에 게 바깥의 현황을 그리고 탈출의 방도를 어떻게 간략하게 보고해 야 좋을까? 하여튼 ‘천지호 선체를 확보해야만 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막연한 변명일 뿐이다.
암담한 그림자만 가리는 우현태의 그지없이 초조한 얼굴 빛.
S# 38. 바닥철판 위
막 층계에서 기관실 바닥철판 위로 비틀거리며 내려서는 우현태, 곤혹스런 그에게 쏟아지는 웬 침울한 부원들의 눈빛···.
성윤기가 또한, 그의 곁에 접근한 우현태에게 ‘어떻게 탈출구가 없어?’ 하고 캐내고 싶은 의욕조차 비치지 않고 외면하는 듯 곁눈질을 힐끗 다른 곳으로 던져낸다. 수상스런 분위기다.
우현태 그 동안 모든 현황을 이미 간파하고 있는 부원들이다. 도대체 그 누 군가가 어떤 상황설명을 해두었던 것일까?!
시무룩한 그런 성윤기에게 더 뭣을 보고해야 좋을지 모를 우현태. 서먹한 느낌만을 던지듯 암울한 주변을 살펴내는 성윤기의 눈빛이다.
S# 39. 제 자리에서 서성거리는 부원들
우현태의 출현은 마냥 대수롭지 않은 눈빛의 성윤기, 제 자리를 지키는 다른 부원들과 더불어 모두가 나름대로 은밀한 눈빛을 띄우고 있다.
그들에게 이유 없는 질시의 눈빛을 던지는 우현태, 동시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 묵묵한, 의구심조차 없는 그들의 행동거지에서 성윤기 일기사를 똑바로 다시 내다보며 일말의 기대감에 묻혀드는···.
우현태 무엇 때문일까? 물론 만약의 경우, 여러 부원들과 함께 헤엄을 쳐야 되고 암벽을 타는 게 최선의 지름길이라면?! 하긴 그 실력이야 인정 할 밖에 없겠지만, 어쨌든 그라면··· 정녕 가능할까? 하기야 H해 양대학 동기동창들 간에 ‘물개’란 별명까지 붙어 있었던, 그러니 까 그는 왕년의 학창시절 올림픽 배영선수 후보였지 않았던가!?
S# 40. 내다보이는 울울한 운무 (환영)
그 속에서 성윤기, 암벽 중턱 위로 악전고투 기어오른다. 하지만 그의 등줄기를 할퀴는 파도···.
그런 파도의 냉도를 느끼는 우현태, 어슬렁거리듯 발걸음을 전령기 쪽 가까이 옮겨간다.
우현태 (아득한 두려움에 잠기는) 그럴 테지. 해수온도는 지금 몇 도나 될까?
E 소란한 소음을 펴고 질주하는 주해수 펌프···.
그 앞으로 다가가는 우현태. 축관실 쪽 저만치에서 흰 마스크를 낀 한상오 기관장이 눈에 띈다.
S# 41. 주기관 대판 사이
홀연, 비치는 한상오 기관장을 내다보는 우현태, 그 동안의 의식을 긴장감 속에서 돌이키는 의혹···.
우현태 아, 그가··· 언제, 내려와 있었을까? 그리고 부원들에게 모든 현 황을 알리고 어떤 지시를 해두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조금 전이다. 어둠 속 바깥 현측 통로에서 코앞에 비치던 병풍도를 떠올려 둔 우현태. 그때, 누군가가 곁으로 스쳤던 그림자와 인기척의 기억들이 반사적으로 풀리는···?!
(대사 연결) 어쩌면 바로 한상오가 내 등 뒤쪽 저편의 좌현 통로를 돌아서 곧장 기관실로 들어선 것일까!?
전령기 건넌 쪽에서 걸어 나오는 한상오. 잠시 그와의 대면을 피하듯 허리를 굽혀 시선을 냉각기 밑으로 떨어뜨리는 우현태.
S# 42. 인서트
아름드리 해수관에 붙은 수은온도계의 눈금, 14°C로써 눈 속을 우벼파는 듯한 싸늘한 느낌이다.
S# 43. 전령기 앞
한상오 (다분히 꾸중이 담긴 목소리) 이 사람 봐, 이기사! 어디로 배회하고 있는 거지? 지금은 ‘스텐바이’ 상태야! (부동자세로 버텨 선 우현 태에게 거침없는 어조로) 별 다른 명이 없는 한 기관실을 확보토록 해!
우현태 ···.
한상오 (덧붙이는) 알겠지만 여기는 무인도 ‘병풍도’야. 제자리에서 대기 해!
우현태 네···. (가볍게 절감하는) ‘그랬다. 역시···. 기관장의 심중은 물론, 곧 여기가 짐작했던 대로 그곳이다!’
언뜻 주기관 가감변 핸들 앞에 버티고 있는 성윤기 일기사에게 시선을 던져 둔 우현태, 비상태세 시 자신의 위치를 찾아 전령기 쪽으로 다가서면서 발걸음을 멈춘다.
우현태의 시선이 떨어진 계기판에는 즐비하게 부착된 주기관 고압계기의 지침, 분출의 틈만을 노리는 긴장감에 묻혀 있다. 그런대로 뚝 영점(零點)에 떨어져서 창백한 침묵을 물고 있는 저압계기의 지침. 그 순간, 어디론가 귀를 기울이는 우현태···.
S# 44. 층계 위 바깥 통로
그곳은 운무 자욱한 기관실의 출구 아치형 층계 쪽 바깥 밤빛 속이다. 거기서 들려오는, 구름다리 철판 위로 뛰어드는 발자국 소리···.
E 투닥투닥!
···
선미건물을 돌아 내처 우현 현 통로 위로 달려드는 발자국 소리, 이어지면서 동시에 웅성거림이 일어나는 보일러실 상단층계 위···.
그러자 누군가가 기관실 안쪽으로 목을 빼내어 크게 소리친다.
목소리 (E) 펌프수! 어이, 펌프수!
김대영 (보일러실에서 대답하는 기죽은 목소리) (E) 어이, 누구야?
목소리 (E) 선장이 불러. 어이, 빨리···!
S# 45. 기관실 바깥 현 통로
당혹스런 그들의 목소리,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현 통로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러고 잠시 후, 펌프수와 갑판부원인 듯한 그들의 발자국 소리, 음산한 바닷가 어둠속으로 사위어 간다.
S# 46. 보일러실 층계 쪽
그 모든 소란스런 생각을 잠시 떨쳐버리게 하는 누군가의 그림자. 우현태의 머리 위 상층 발판 틈새로 흔들리는 한 부원의 몸짓. 조경욱 일조수다. 그가 보일러실 층계의 계단을 밟으며 험난한 항해를 즐길 때처럼 어기적어기적 내려선다.
우현태 그로서는 지금이야말로 의식적으로 절망감을 잊기 위해, 아니면 자기 가 합기도 유단자로서 무술인 다운 가장 용기 있는 척 의젓한 태도 다.
순간 조경욱의 눈빛이 부원들에게 부딪히자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희극적인 장면을 내다본 듯이 히죽거리기까지 하는 잘 박힌 하얀 이, 드러내며 막 바닥철판 위로 내려선다. 그에게 우현태, 못내 자기도 가슴을 으쓱 펴고 태연자약한 몸짓으로 응수한다.
우현태 음, 그들이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분주하게 움직이는군요!?
조경욱 아, 화물을 이송 시키려는가 봐요.
우현태 그랬군요!? 하지만 이 엄청난 불가항력적인 상황 앞에서··· (그러 다가) (E) ‘도대체가 인명은 물론 선체를 구해야만 될 최선책이 꼭 그것’이었을까?
S# 47. 주갑판 쪽, 펌프실
기관실 바깥 펌프실에서 작동되고 있는 워싱톤 화물유 펌프의 굉음···!
그것은 간격을 둔 채 규칙적으로 기관실 격벽을 울리고 있다.
E 쿵쿵!
쿵쿵!
···!
조경욱 (대뜸 무엇이 켕기듯 혼잣소리로) 옹졸한 놈들···. 후, 제멋대로 야. 그저 모두 살아보겠다고들···?!
우현태 (눈을 던지는) 왜··· 뭣 때문이요?
조경욱 (뭔가 꼴불견스런 일을 당한 듯이) 이것, 보일러실에서 기원들이 야 단법석이요. 되게 호통치고 내려오긴 했지만···.
S# 48. 기관실의 부원들
우현태, 언뜻 둘러보면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원들이다. 하지만 착잡한 얼굴빛을 사뭇 감추지 못한 그들은 여기저기서 뒤뚱거리는 거위들처럼 긴 목을 흔들어대듯 육신을 가눠댄다.
한 동안 울려오는 화물유 펌프의 굉음이 그치고 난 얼마 후···. 느닷없이 크게 덮치는 파도의 소음 속에서 전율을 일으키는 선체, 용수철 튀듯 치솟는다. 동시에 기가렸다는 듯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전령기의 울음소리···.
E 카르릉!
카르릉!
···!
그 순간 썰물지는 듯 휩쓸고 나가는 파도소리···.
E 쏴···!
···
그새 원반 위로 뒤흔들리는 전령기의 지침, 갑자기 ‘전속 전진’을 가리키고 멈춘다. 뜻밖의 명령이다. 그 순간이다. 전령기 원반을 지켜보는 부원의 의아한 눈빛···.
우현태 아, 묵시적인 획책이다! 하지만 분명치 않은 시간차의 결행은 막 밀 려나가는 파도를 타고 막무가내 돌진하겠다는 갑작스런 명령이 그것 이다!
S# 49. 역전기의 플라이휠
바람개비처럼 돌아가자 대번에 기관실을 울리는 소음.
E 탕탕탕···!
···!
하얀 연기처럼 퍼지는 포화증기 속에서 ‘역발산’의 검붉은 얼굴이 쳐들린다. 그의 머리 위쪽에서 막 링크 바가 궁형의 궤도를 좇아 구불텅구불텅, 원호를 그려댄다. 그와 동시, 전진위치를 포착한 성윤기, 황급히 시동변을 열어젖뜨린다.
S# 50. 전율하는 천지호
기우뚱 흔들리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어 붙이는 선체. 전진 전속으로 박차를 가하는 크랭크, 그것은 숨 가쁜 회전을 일으키는 원운동을 그려댄다.
E 쏴···!
···
고물 쪽에서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물결소리, 뻗치는 가운데 최대 회전수로 치닫는 프로펠러 샤프트···, 축관실의 전등 빛에 부셔 번쩍번쩍, 은빛을 뿌린다.
그것은 갑자기 저돌적인 마찰음을 선저에 깔아 붙이면서 휘어질 듯이 암초에 부딪히는 굉음을 동반한다.
E 콰강, 깡!
···낑낑!
축관실을 뒤흔드는 요란한 진동이다.
우현태 (신음소리) 아, 스크류의 날개와 키가 탈락하는 굉음!
주변에서 자지러지듯 숨길을 몰아쉬며 울부짖어대는 각종 보기들···. 아예 각양각색의 소음으로 아수라장이 된 기관실은 돌변된 상황 속이다. 하지만 멈칫멈칫 어디론가 돌진하는 천지호.
S# 51. 갑자기 돌변된 기관실, 전경
뿌옇게 메우는 포화증기, 그 속에 갇혀 비틀거리며 무게 중심을 잃고 만 부원들, 넘어지고 일어선다.
우현태 음, 울분과 통쾌가 교차되는 도가니 속의 지옥과도 다를 바 없군! (흘리는 신음소리) 아, 불이 나는군! 이거야 시공을 초월한 고성을 방가하는 천하의 무법자다. 어느 태곳적 고도에서 백공천창이 되어 가며 그 홀로 독킹을 즐기고 있다.
어이없이 뱉어진 우현태의 독설, 엷은 웃음기가 입술에 번진다. 천지호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죽음의 기를 쓰고 돌진한다. 그러면서 주춤주춤, 연방 암벽 을 쥐어박아대는 뱃머리···. 충격적인 반동을 일으킨다.
S# 52. 애절한 경적 소리
울리면서 이윽고 늘어지는 전령기 체인·····.
E 축, 축···!
삽시간 기력을 잃은 듯 원반 위에 떨어지는 전령기의 지침, 다음 순간 기관정지 위치를 가리키고 뚝 시치미 떼듯 멈춰 버린다.
S# 53. 시야에 가린 포화증기
또다시 뿌연 장막을 쳐 버린 채, 삭막한 허탈감을 몰아들이는 기관실··· 그 공간 속으로 온통 시야를 가린 채 피어 날리는 포화증기, 써늘한 선저의 냉기에 부딪히는 구름덩이처럼 어릿어릿 부풀려 흩날린다.
그 속에서 불그레한 전등 빛을 받아내는 부원들, 여기저기 우두커니 버텨 서 있다. 그러는 동안 주기관의 정지는 더없는 긴 휴식을 예고하고 있다.
우현태 음, 그런데 선장은 과연 어디에다 선체를 몰아둔 것일까? 한 동안 집 요한 행위는 육박전과 다를 바 없었던 게 아닌가. 필시 학창시절 권투 선수 생활을 했던 선장으로서 무서운 도전만 같다.
(회상) 링 위로 올라 혈투를 벌이고 있는 구인모 선장.
S# 54. 기우뚱거리고 있는 천지호
갑자기 가벼워진 선체가 뒤흔들리면서 동요하는 형태다.
우현태 육감적으로 아까보다는 거센 파도다. 다소 전진했던 만큼 변경된 위치에서 바람의 방향이 뒤바뀌어져 있는 듯···. 마치 공선 때의 뱃머리가 어느 방파제 바깥에서 너울성 파도에 부딪치고 있는 형태처 럼 다를 바가 없다.
정처 없이 뒤뚱거리는 나룻배 위에 실린 부원들처럼, 자못 기관실은 을씨년스런 풍경이다.
S# 55. 가감변 핸들 앞
향수어린 눈시울로 주기관을 지긋이 지키고 서 있는 성윤기. 그 옆, 기록 데스크 앞에 서 있는 한상오···, 마스크를 낀 채로 꽤 음울한 눈빛의 표정이다. 바로 그가 곁에 버티고 선, 좀 키가 작달막하게 보이는 하원식 삼기사로부터 기관일지와 벨북을 받아 든다. 그것을 데스크 위로 펼치고 그간의 상황을 훑어 내리는 시선, 기름으로 얼룩진 지면에 최후의 주기관 컨디션을 기재하고 자신의 사인을 휘갈기는 한상오.
S# 56. 선체의 좌현, 크게 부딪치는 파도
E 철썩!
···!
순식간 웬만큼 바람직했던 안도감마저 부수뜨린 파도소리에 이어 울려 퍼지는 선체의 굉음···.
E 컹, 컹···!
···!
우현태 어째 배가 폭풍우 중심권에 들어선 듯 파격적인 강도다.
비틀거리는 육신을 가누며 그새 돌변된 바깥의 정황을 쫓아가는 우현태.
S# 57. 어둑한 바다, 몰려드는 험악한 파도
(환영) 들쑥날쑥 솟아난 어느 암초지대 위로 나포된 거대한 흰긴수염고래 한 마리가 탈출을 시도하듯 몸부림치고 있다.
우현태 ‘맨 이터(Man Eater)’. 그 영악한 ‘백상아리’와 같은 악상어의 거대한 덩치가 암석 틈에 얹혀 꼬리지느러미를 치고 발악하고 있는 형상이다.
(환영) 흰 배때기가 암초에 찢기자마자 허연 살점을 드러낸 채 검붉은 피를 펑펑 쏟아내고 있는 흰긴수염고래.
S# 58. 기우뚱 솟구치는 거구의 선체
(환영) 연이어 파도를 얻어맞자마자 어마한 중력을 틀어 안은 채로 곧 흰긴수염고래가 암초 위로 아찔하게 떨어져 내린다.
우현태 (그 순간 뱉어진 신음소리) 아, 위험하다!
온통 전율하는 선체의 진동과 그 굉음, 울려 퍼지는 기관실. 자지러지는 각종 기기의 소음 그 속에서 울려온 단말마의 날카로운 굉음···! 이어지면서 삽시간, 캄캄한 어둠을 깔아 붙인 저변의 정적을 꿰뚫고 뻗쳐 온 차디찬 물결소리.
E 콸콸콸···!
···!
S# 59. 돌변된 기관실, 상황
급기야 황량한 공간 속이다. 곤두세워진 육신들 사이로 화들짝 쫓기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 동시에 어디론가 비켜나서는 부원들의 분주한 움직임, 그리고 복창되어 퍼져나가는 격양된 구호 소리···.
하원식 이야, 해수다!
박수한 선저파공!
조경욱 위로 전달!
최득만 우현 기관실 선저파공!
우르르, 구석진 격벽 쪽으로 몰려가는 부원들. 또한 그들과는 반대방향의 층계 위로 뛰어오르고 있는 ‘역발산’.
우현태 (지켜보는) 음, 설마 그가···. 혼자서 도망질이나 치는 위인은 결 코 아니다. 그는 곧바로 현황을 내다본 대로 폐색용의 각종 도구부 터 챙기려 기관창고 쪽으로 화급히 내닫는 것이다.
S# 60. 기관실, 바닥철판 위
그 사이, 몸서리치듯 떨어 붙이는 부원들의 시선들.
E 덜덜덜···!
해수 줄기가 틀어 막힌 바닥철판, 그 한 장을 스크레이퍼와 드라이버를 들고 들춰내는 ‘발설자’와 조경욱. 그 순간이다. 철판을 걷어차듯 새하얗게 치솟아 오르는 펀펀한 해수 줄기, 당장 파도 더미로 기관실을 휘덮어 버릴 세찬 기세다.
한상오 (마스크 속에서) 뭣들 하는 거야! 이봐··· 넋 놓고 지켜보면 어떻 게 하겠다는 거야? 비상 펌프부터 돌려!
치솟아대는 해수 줄기를 허망하게 지켜보는 몇몇 부원들, 마구 꾸짖어대는 한상오 기관장을 힐끗 쳐다보다가 후닥닥, 흩어지면서 펌프 쪽으로 달려 나간다.
S# 61. 비상펌프를 둘러싼 부원들
기관실 우현이다. 비상펌프 곁에서 한상오 기관장과 함께 부산을 떨어대는 부원들, 그런데 갑자기 그곳에서 터져 흐느끼는 소음···.
E 쒜···!
···
드레인 코크에서 희뿌옇게 퍼져 층계를 휘덮고 날리는 부연 포화증기, 그 속에서 비틀거리며 나타나고 있는 ‘역발산’, 목재 플러그와 쐐기며 걸레 뭉치를 왼팔로 한 아름 부둥켜 안고 오른손에는 큰 무쇠 해머의 자루를 움켜쥔 채 층계 밑 바닥철판 위로 재바른 걸음으로 내려서고 있다. 그와 동시 한상오, 느닷없이 양팔을 벌리고 ‘역발산’을 가로막은 채 우뚝 버텨 선다.
한상오 이사람 봐···. 이건, 안 돼! 아주 바윗덩이에 플러그를 꽂으려는 거야, 뭐야?!
완강한 한상오의 저지에 주춤 물러서는 ‘역발산’.
S# 62. 치솟는 해수더미
세찬 분수처럼 쏟아지면서 넓게 널브러지는 물결 위로 아무 저항 없이 던져져 있을 뿐 속수무책인 ‘역발산’의 시선.
한상오 ‘역발산’! 뭘 하려는 거야? 쐐기로써 여기를 틀어막기는 어림없는 작업이야. 일단··· ‘시 체스트‘ 쪽에서 대기 해!
E 칠거덕···!
칠거덕···!
···
링크 바가 튈 듯이 오르내리는 비상 펌프. 게다가, 저편에서 용량이 적은 빌지 펌프조차 작동되고 있다.
S# 63. 짙게 깔리는 뿌연 포화증기
비상 펌프와 함께 더욱 가속되고 있는 각종 배출 용도의 펌프들, 더욱 소란스런 기기의 소음을 펼치는 가운데 점점 해수의 침투량과 배출량이 자웅을 겨루듯 한꺼번에 동원되고 있다.
S# 64. 기관실 전등 빛
갑자기 어둔 그림자가 가리는 천장의 전등. 그와 동시, 숨 가삐 콘솔 곁으로 달려 나가는 우현태, 순식간 부하변동을 일으키는 보일러 컨디션을 간파한 듯 보일러실과 통하는 전성관의 마개를 빼어든다. 그리고는 잔뜩 폐부를 팽창시켜 동관 속에 공기를 연거푸 입으로 불어넣자 얼른 귀를 갖다 댄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일어나지 않는 보일러실의 반응···. 허전하다.
우현태 (초분에 쫓기는 착잡한 얼굴빛) 아니, 언제부터 근무 장소를 이탈한 기원들이다?!
더욱 짙은 어둠을 드리우는 전등 빛, 그 아래로 또한 느림보처럼 그만큼 더뎌져가는 모든 펌프의 동작.
S# 65. 창백한 얼굴빛의 조경욱
화가 훅 치미는 듯 이윽고 그가 층계 위로 식식거리며 뛰어오른다.
그 와중에 이를 데 없이 다급해진 우현태, 그 역시 조경욱을 좇아 층계 위로 내닫는다.
S# 66. 층계 위 보일러실
기원들을 마구 꾸짖어대는 머리 위의 갈한 목소리, 우현태의 귓속에 박혀든다.
조경욱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얼빠진 놈들아··· 아직은 엄연한 근무시 간이란 말이야!
S# 67. 보일러실
뛰어들어 선 우현태, 크게 눈을 떠 주변을 휘 둘러보는 그의 시야, 숫제 보일러실 당직자가 보이지 않은 자못 난감한 광경이다.
텅 빈 공간의 어둠속에서 분통만 터뜨리는 조경욱, 그나마 쫓기던 끝에 연료펌프의 증기변을 혼자서 조작하고 있다.
연소실 앞으로 붙어 있어야만 될 기원들은 언제부턴가 아무도 비치지 않는다. 그 가운데 보일러의 압력지침이 뚝 떨어져 내리는 계기판···.
S# 68. 동 보일러실 상단 층계 위
얼핏 비치는 안전모를 챙겨 쓴 두 기원들, 그 동안 침실에 둘러 구명조끼마저 짊어진 채로 엉거주춤 계단을 밟고 내려서고 있다. 그것도 여섯 명의 기원들 가운데 겨우 박수도와 임흥길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시선을 던져둔 채 판 엔진 쪽으로 급히 달려드는 우현태.
S# 69. 보일러 연소실
그새 연소실 앞에서 응급조치하고 있는 조경욱, 연료 분사변을 재바르게 조종하고 있다.
그럴 때 겨우 급박한 현황을 간파한 두 기원들, 보일러실 상단 층계 위에서 바닥철판 밑으로 내려서면서 뒤늦게야 수면계의 수위를 더듬고 양기 급수변에 각각 응급조치를 분담하듯 서둘러 달려간다.
S# 70. 보일러실
순간, 파도가 좌현 격벽을 호되게 때리는 소음···.
E 철썩!
세찬 파도의 소음과 더불어 진동하는 선체를 한쪽으로 기우뚱 몰아붙이는 굉음.
E 우르렁!
···
그러고 연거푸 상층 도어 쪽에 강력하게 부딪치는 파도, 허연 너비를 지어 보일러실 안으로 쏟아진다. 그 파도에 휩싸인 누군가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상단층계에서 질급을 삼키고 뛰어들고 있는 그는 갑자기 넘쳐 들어온 강물 같은 파도 속에서 구명조끼만을 짊어진 채 어디서 안전모를 날려버렸던지 허겁지겁 층계 밑으로 내려선다. 흠뻑 젖은 자신의 몸뚱어리부터 말리겠다는 속셈뿐인지 곧장 연료 히터 곁으로 뛰어드는 이민섭 오기원이다.
후끈한 열기가 방사되고 있는 곳에서 그는 온몸을 웅크러뜨리며 힐끔 곁눈질을 띄워 주제 사납게 턱을 떨어 붙인다.
이민섭 어취! 다들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빨리 피난가지 않고서··· 지금 으춰, 구름다리 위까지 파도가 넘쳐들고 있어요. 츠츠.
조경욱 임마, 정신차려! (미간을 좁혀 벌컥 소리쳐 덧붙이는) 이야, 군대생 활에서 빠다를 몇 대나 얻어 맞았어? 이거야 원,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 어째 배운 놈이 더해. 어이, 학사(學士) 밀수꾼은 어디 갔 어? 또 어디로 감추려 간 거야! 그리고, 다른 두 멍청이들은 어디로 도망갔어?
이민섭 츠츠. 지금 선실에서 모두가 퇴선장비를 챙기고 있어요.
조경욱 이런 제길, 벌써 보따리를 챙겨?! 황금만 꿈꾸는 자식. 이것 봐, 먼 저 살려고 하는 자가 먼저 죽는다는 걸 몰라?
소리쳐 이민섭을 쏘아붙이는 조경욱의 열띤 눈길···.
S# 71. 연료 히터 곁
우현태 앞에 버텨 선 조경욱, 잠시 흥분하는 자기 자신을 못내 자제하는 듯한 약간 계면쩍은 눈초리를 어둠속으로 감춘다. 그러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저변으로 귀를 기울이는 조경욱, 그러고 다음 순간 후닥닥 기관실 층계 밑으로 줄달음쳐 내려간다.
우현태 (그런 조경욱을 지켜보는) 음···. 수분이 흐른 동안 제대로 펌프 가 작동되지 못했던 만큼 더욱 침투된 해수 량 때문인가?!
이윽고 박차를 가해가는 그 동안의 느릿한 펌프들의 소음, 간파하는 우현태의 시선에 그제야 상승기세로 되돌아서는 보일러 압력계기···.
그러자 들려오는 기갈 들린 그 누군가 마스크 속의 목소리, 층계 밑 바닥철판 저변에서 찢어진다.
한상오 (OFF) 뭣 해? 이젠··· 덤벼야 될 게 아니야!
S# 72. 보일러실 외벽
갑자기 파도를 크게 얻어맞는 굉음과 함께 요란한 진동을 일으키며 뒤흔들리는 선체···.
E 츠얼썩!
쏴···
그 순간, 다시 상층도어를 울컥 틀어막는 파도, 갑자기 둑을 무너뜨린 홍수처럼 난간과 석쇠 형 발판을 후려치며 쏟아지자 보일러실 바닥에 육중한 무게로 부딪친다.
E 털썩!
···
동시에, 휘어져 비산하는 파도와 응집되는 물결의 소음에 덮씌워져 사시나무처럼 떨어 붙이는 바닥 철판, 그 위··· 물벼락을 잽싸게 피한 기원들과 우현태의 파리한 눈빛.
흰 거품을 물고 펀펀히 널브러진 물결 위로 침침한 안개 같은 앙금이 가라앉는다.
한순간 그 물안개 속에서 누가 가장 겁에 질렸을까, 서로의 비열한 자화상을 훔쳐보는 듯 엇갈리는 박수도와 임흥길의 두려움에 찬 눈빛들.
S# 73. 기관실 층계 밑
가속돼 울려 퍼지는 웨어스 펌프의 소음에 언뜻 귀를 기울이는 우현태.
E 치거덕치거덕···!
···!
그 속에서 물결을 차대는 구둣발, 어느 사이 아련한 그 물결소리가 끊어지고 거푸 찢어지는 목소리.
한상오 (OFF) 이봐, 거기서 얼어붙지는 않아! 정신 차려··· 똑바로 공구 를 잡아 둬!
S# 74. 보일러실, 천장
한결 어둠을 벗기고 있는 전등 빛. 어둑한 그 빛살을 좇아 더욱 가속되는 각종 펌프들의 소음, 퍼뜨려지는 곳에서 갑자기 정체 모를 단음의 굉음이 울리면서 웬 물결소리에 깔리는 정적.
E 킹···!
굉음은 무쇠뭉치가 쇠붙이 위에 튕겨지는 울림이다.
E 킹···!
···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를 긴박한 생각이 스치는 우현태의 표정···.
그러는 동안 다시 ‘킹···!’ 하고 주변의 그 모든 소음을 한 순간 흡수해 버리는 굉음···, 그것은 간헐적으로 반향 되면서 신경을 더욱 예리하게 자극한다.
그와 동시, 층계 밑으로 조경욱을 좇아 내닫기 시작하는 우현태의 발걸음.
S# 75. 기관실, 층계 위
널찍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주기관, 중간층계 옆 석쇠 형 발판 밑으로 마치 거인의 주검의 상자처럼 드러누워, 시야를 뿌옇게 가린 채 피어오르는 증기 틈새로 비친다.
그 속으로 엉거주춤 내려가고 있는 우현태, 갑자기 소스라치듯 눈을 내리깔고 후들후들 허벅지를 떨어 붙이는 발걸음을 층계의 계단 위로 멈춘다.
S# 76. 시선이 떨어진 바닥철판 위
뭉클거리는 어둠이 덮씌워진 기관실의 공간, 그 바닥철판 위에서 전등 빛에 반짝이는 싸늘한 물결. 출렁거리는 해수 더미의 소리만이 귓속에 박힌다.
동시에, 휘덮인 캄캄한 어둠 속 시야에 비쳐지는 기관실의 전경···.
(환영) 뜨거운 열기로 달궈진 주기관의 동체를 비롯한 각종 보기가 차가운 해수더미에 부딪치면서 쩍, 쩍··· 갈라져 비산하는 듯 선연하게 비쳐지는 형상의 물체들.
그곳은 아득한 칠흑의 미궁 속이다. 그 한가운데서 귀를 뚜드리고 튕기는 쇠붙이의 혼미한 굉음···.
E 킹···!
···
그러나, 그것은 번쩍 정신을 되 차리게 하는 예리한 울림이다. 그 서슬에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진정시키는 우현태, 힘주어 난간을 움켜쥔 채 다시 층계 밑으로 내린다.
E 쿵쿵쿵···!
연속으로 뻗치는 주해수 펌프의 굉음···, 점점 크게 들려온다.
S# 77 주기관 대판 건넌 쪽
냉각기 밑으로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있는 차분한 얼굴빛의 부원들, 그들의 모습 위로 한 순간 쳐들리는 묵직한 쇠붙이 해머의 머리, 그리고 다음 순간 해머는 공중에서 원호를 그리듯 내리 떨어진다.
E 킹···!
···
냉각수 흡입용 파이프 위로 부딪치고 있는 쇳소리···.
우현태 (귀를 기울인 채 더듬어내는) 시 체스트와 연결된 킹스톤 밸브다. 그것을 폐색해 둔 채 흡입 측 아름드리 파이프를 절단하고 있다.
안간힘을 다하는 누군가에게 최후의 기도를 노리는 한상오 기관장. 그리고 그의 주변에 버텨 선 몇몇 부원들의 침울한 모습.
우현태 펑펑 침투, 범람하고 있는 해수를 곧 냉각기를 통해 선외로 배출시켜 보겠다는 누군가의 기발한 착상이다. 아니‘역발산’의 집념과도 같 은 발악적인 발상과 그 의도야 말로 역설적으로 한상오의 명령이다.
S# 78. 흡입 측 아름드리 해수 파이프
연방 부딪쳐 튕겨지듯 울리는 그 쇳소리···.
E 킹···!
···
굉음의 진원지를 좇아 층계에서 내린 우현태, 구둣발로 덤벙덤벙 물결을 튀기며 달려 나간다.
S# 79. 동 흡입 측 아름드리 해수 파이프
해머를 휘둘러대고 허리를 펴자마자 힘차게 구부리는 ‘역발산’,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 새까만 눈썹을 적시는 이마에 맺힌 식은 땀방울··· 해머가 떨어지는 곳으로 파이프 위에 꽂힌 커다란 비트, 그것을 두터운 가죽장갑으로 움켜쥐고 있는 조경욱.
몇 장의 바닥철판을 걷어낸 차디찬 해수더미 속에 하반신은 물론 가슴까지 깊게 빠뜨리고 있는 조경욱, 추위를 이겨내듯 몹시 턱을 떨어 붙이며 비트 위로 떨어뜨린 그의 시선.
불티가 튀는 비트의 머리, 그 밑의 칼날 쪽에서 듬성듬성 잘려나가는 파이프.
S# 80. 파이프에 꽂힌 비트 위
계속 무거운 해머를 내려뜨리는 ‘역발산’의 매질. 그 밑으로 작업용 장갑으로 비트를 검어 쥔 조경욱, 그리고 그들의 곁에서 고집스레 작업을 독려하고 있는 한상오 기관장. 또한 그들의 곁에서 차분한 눈빛으로 기관장의 명령을 솔선수범하듯 묵묵히 일거리를 거들고 있는 ‘발설자’ 차정수 조기장.
그러나 비상시 작업이었기에 기관장에게 지휘 명령권을 송두리째 빼앗겨 시무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성윤기 일기사를 비롯한 다른 몇몇 부원들,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운 초조한 얼굴빛으로 주변에 버텨 서 있다.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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