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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스크랩 동굴의 비유로 바라보는 철학함 혹은 배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상상력
은하수 추천 0 조회 768 17.02.18 18: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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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비유로 바라보는 철학함 혹은 배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인간에게 자유와 계몽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철학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동굴의 비유 속에 나오는 상승과 하강과정을 통해 좋음의 형상을 아는 자(철학자)가 무지한 자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계몽주의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비유로 자주 인용되곤 한다.

계몽주의는 구시대적이라는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동굴의 비유는 폐기되어야 하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여기서는 하이데거의 ‘비은폐성(al?theia)’ 개념을 통한 동굴의 비유 해석을 살펴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함 혹은 배움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동굴 비유 개요


플라톤의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는 왜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해 답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 대답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철학자들이 좋음(善)의 이데아를 아는 자들이라는 것이고, 어느 누구도 좋음을 알기 전에는 정의(正義)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507a) 좋음의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알려달라는 글라우콘의 요청을 받고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좋음의 이데아를 닮은 것으로써 처음으로 태양의 비유’를 이야기 한다.

태양이 가시(可視)적인 세계에 빛을 비추면서 시각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 주듯이, 좋음의 형상이 가지(可知)적인 세계를 비추면서 인식하는 자에게 힘(dynamis)을 주어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508a)

그리고 나서 그는 선분 비유 1]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좀 더 실감 있는 설명을 하게 된다.



1]선분 비유 : 선분 왼쪽 부분은 가시적인 영역에 해당하고 오른쪽 부분은 가지적인 영역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는 각각의 부분을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 네 부분으로 구분됨. (510a 이하), <국가>, 플라톤, 박종현 역주 참조

가시적인 영역 (감각 대상들)

가지적인 영역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것들)

모상 (그림자)

실물들 (동식물/일체의 인공물들)

수학적인 것들 (도형들, 홀/짝수)

이데아 또는 형상

상상, 짐작

믿음, 확신 (신념)

추론적 사고

지성에 의함 앎 의견

의견, 판단(doxa)

지성(no?sis)



동굴의 비유 첫 단계는 커다랗고 깊숙한 동굴 안에 있는 죄수의 상황에서 출발한다. 동굴 속의 죄수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져 있어 몸을 돌릴 수 없기 때문에 벽면에 비춰진 그림자만 보고 있다. 동굴 안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보면, 동굴 벽과 입구 중간에는 담이 있으며 이 담 뒤에는 불빛이 켜져 있어서 담과 불빛 사이로 사람들이 인공물들을 들고 오가고 있다. 불빛과 인공물은 각각 동굴 밖 태양과 실제 인공물들의 모방이며 사람들은 이 모방의 모방인 동굴 벽면의 그림자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이것은 현실이고 당연한 일상이다.


이때 이 죄수들 중 누군가가 갑자기 풀려나, 고개를 돌려 몸을 움직이며 불빛을 바라보도록 강요받는다. (2단계) 그는 작은 담을 지나 벽면의 그림자를 만들었던 인공물들과 불빛을 보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어둠의 세계에 적응했던 눈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면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다음 단계로 누군가가 거칠고 험한 동굴의 오르막길을 통해 그를 억지로 그곳에서 끌어내며 햇빛 비치는 곳으로 나오게 한다. 하지만 겨우 동굴 속 불빛에 익숙해진 눈으로 태양빛을 보기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는 햇빛 비치는 곳으로 나왔으나 눈이 광채로 가득 차서 진실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밤을 기다려 물 위에 비친 실물 혹은 달빛과 별빛에 비친 사물들을 보면서 시력이 적응하기까지 시간을 갖는다. 결국 그는 달빛에 적응하고 태양 아래의 실물들과 마침내 태양 그 자체까지도 보게 된다. 그는 태양 자체를 관찰하면서 태양이 가시적인 세계 안의 모든 것들을 관장할 뿐 아니라 동굴 안에서 보아온 모든 것들의 원인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3단계)


이런 결론에 도달한 후에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살던 곳의 동료 죄수들을 불쌍히 여기며 동굴로 돌아가게 된다. (4단계) 다만 동굴로 돌아갈 때는 동굴에서 나올 때와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물론 그와 더불어 새로운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그림자만 보고 그것을 진리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들이 동굴 밖에서 실물을 보고 돌아온 그의 말을 거짓으로 간주하고 죽이려 드는 위험이다.


동굴의 비유는 동굴 안(현상계) → 동굴 입구(이데아) → 다시 동굴 안(현상계)으로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설명해주는 동굴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첫 번째 과정(1→2단계)과 도덕적 의무감 혹은 연민만으로 쉽게 설득되지 않는 3번째 과정(3→4단계)에 집중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2.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며


먼저 동굴 비유에 나오는 첫 번째 변화 과정(1→2단계)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벽면에 비추는 그림자를 진리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돌려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로 하여금 일상을 살펴볼 수 없도록 하는 수많은 장치들에 둘러 쌓여있는 현실을 돌이켜 볼 때, 동굴의 비유에서 지금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과정은 바로 일상적 삶의 마찰력을 넘어서야 가능한 첫 번째 과정이다.


동굴의 비유 첫 단계에서 플라톤은 인간을 한마디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물의 ‘그림자’이다. 죄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그림자가 다른 어떤 것의 그림자인 줄 모르고 있다. 또한 그는 자기가 보는 그림자야말로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그림자의 원천, 즉 불빛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자를 그림자로서 보지 못한다. 죄수가 죄수인 것은 동굴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존재자)들에 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비은폐성(al?theia)’의 개념을 통해서 살펴보자. 2]


2]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을 시작한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고 있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다. 첫 번째, 동굴의 비유에는 명확하게 “말해진 것들”로서 파이데이아(교육)와 진리와의 관계로서의 본질이 나타나 있는데, 사물들의 모습은 이데아의 드러남 없이는 은폐된 채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동굴의 비유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원래 진리에 대한 그리스어 낱말은 흔히 생각하는 ‘일치’니 ‘올바름’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알레테이아는 ‘비은폐성’을 의미하는 진리 개념에서 ‘올바름’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의 시원적인 본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비은폐성을 탐지, 인지, 사유, 진술들과 같은 플라톤적인 연관 속에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비은폐성을 이데아의 억압 속에 방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동굴의 비유’ 해석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영식, 범한철학 제48집 참조)



진리라는 낱말은 그리스어로 알레테이아(al?theia)이다. 알레테이아란 말은 a(非)라는 부정어와 l?theia(망각)로 구성되어 있다. 즉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참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은폐된 것으로, 더 이상 은폐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이해했다. 은폐됨 없이 있는 그것은 그렇기에 은폐되어 있음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따라서 참된 것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떤 다른 것, 즉 은폐되어 있음을 더 이상 자체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고 은폐성과의 투쟁으로부터 쟁취해온 것이다. 그리스인에게 진리는 일종의 결핍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진리라는 말이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뜻하고 있다니 기이하지 않은가! 3]


하이데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은폐성에 대한 기원을 확증하기 위해서 플라톤 이전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증인으로 데려온다.

“자연은 자신을 숨기기를 좋아한다.” 4]

 이 금언은 숨겨진 채 남아 있으려는 것이 모든 존재자(자연)의 본래적이며 내적인 경향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주변에 놓여 있는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통해서도 진리를 만날 수 있지만 그저 보이는 부분만을 보아서는 그 진리를 볼 수 없다. 그 본질은 발견하기 위해서는 중심으로 가야하고 숨겨진 부분을 찾기 위해 계속된 투쟁이 필요하다. 어찌 보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역시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겉으로 보이는 외모와 신체에 유혹된다. 하지만 모두들 알고 있다. 그 사람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여기서 플라톤이 동굴 안의 죄수들에게도 언제나 이미 빛이 주어져 있다고 보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단지 죄수들만이 이 사실을 모를 뿐이다. 이러한 무지 속에서 죄수들은 빛으로서의 빛 자체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은 동굴의 비유 첫 번째 단계에 진리의 본질 물음에 관련하여 이미 어떤 중요한 암시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숨김의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은폐성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의 상태에서도 비은폐성이 존재하지만 결박된 자들은 이러한 비은폐된 것들을 비은폐된 것으로 만나고 있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논거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죄수의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비은폐성에 대한 자기인식 5] 이 되는 것이다. 그림자를 그림자로 보고, 그림자와 빛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첫 번째 변화 과정이 가능한 전제 조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변화 과정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이 동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쇠사슬로부터의 풀림 그것은 해방의 입문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는 것이 다른 사람의 강요로 혹은 우연한 사건으로 이루어질 경우 빛으로의 방향전환과 지향은 결코 쉽지 않다. 갑작스럽고 단순한 쇠사슬의 제거만으로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질문을 지속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다.

참된 해방은 해방되는 자 자신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자기의 존재 근거 안에 서게 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이다.6] 첫 번째 변화를 겪은 죄수가 이전의 구속 상태로 되돌아가려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의 풀려남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불가피한 것이다. 참된 해방이 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이란 바로 쇠사슬로부터의 해방이 ‘자기 자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3]알레테이아라는 낱말의 형태와 의미구조는 독일어 죄(Schuld)와 짝을 이루고 있는 무죄(Unschuld)라는 표현과 일치되지는 않지만 그것과 상응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p21~22

4]앞의 책, p24

5]여기에서 말하는 인식은 자기 수련에 의한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 오직 인식만을 통해서 진실을 만나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가 이루어지기 최초의 각성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의 해석학>, 푸코, 심세광 옮김, 1982년 1월6일 강의 참조

6]철학의 학문성과 하이데거, 이유택, 존재론 연구 6집, 257p~283p, 한국하이데거학회, 2001



3. 햇빛 비추는 곳으로


동굴 비유의 세 번째 단계는 모두 동굴 밖에서 이루어진다.

쇠사슬로부터의 해방이 소극적이고 갑작스러운 해방이었다면, 동굴 밖에서 일어나는 단계는 적극적이지만 느리게 이루어지는 진정한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굴 입구로의 상승은 노동과 긴장을 요구하며 노력과 고통을 예비한다. 여기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너무 성급하게 목표를 달성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빛에 대한 이러한 느린 적응과정을 통하지 않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갑자기 빛 가운데서 뜨게 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망가져버린 눈과 영원한 어둠일 뿐이다. 답답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동굴 밖에 막 나온 이가 활동하기에는 낮보다는 밤이 훨씬 더 낫다. 밤의 어둠 안에서 달빛과 별빛으로 실물들을 볼 수 있게 되고, 점점 더 미명의 밝음에 적응해 나가 드디어 빛에 대한 자유를 획득하여 태양 빛이 가득한 낮에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살펴볼 수 있는 날이 오게 된다.

하이데거는 동굴 밖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해방 과정은 고통과 수고 이외에도 밝은 빛과 친숙해지기까지 필요한 많은 시간과 단계들을 지겨워하지 않고 참아내는 인내와 용기를 강조한다. 영영 밤의 어둠 속에 갇혀 흐릿한 사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초초해 하는 마음을 이겨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밤의 정적과 어둠이 무섭다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새벽을 기다려야 한다.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한꺼번에 몇 계단씩 오르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7]


7]<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p48~56



4. 철학함 혹은 배움


동굴의 비유는 바로 철학함의 과정이다. 즉 플라톤에게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죄수 상태에서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 그 자체를 보게 되는 과정 모두를 철학함 혹은 배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철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동굴의 비유 첫 번째 단계에서 고개를 돌리는 변화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철학을 할 필요가 있어야 하는데, 일상의 삶을 진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슬을 끊고 몸을 돌리는 과감한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이데거가 말하는 철학의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철학의 정체성은 그의 사유를 끌어가는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이 철학인지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에게 철학은 철학함이고, 철학함이란 ‘사람으로 거기 있음’이다.


"우리는 결코 철학의 “밖에” 서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혹시 철학에 대한 어떤 지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우리는 이미 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자신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이미 철학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철학하지” 않아도 철학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실존하는 한, 언제나 필연적으로 철학한다. 인간으로 거기 있다는 것은 철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은 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철학을 했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본질은 한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8]


그런데 삶이 철학이고 철학함이 곧 삶이라면 도대체 새삼스럽게 ‘철학 안으로의 진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인용문이 담긴 책의 제목이 <철학입문>임을 감안하면 그 의도가 더욱 궁금해진다.

우리에게 ‘철학입문’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철학의 ‘밖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철학 안에 있다는 사실 내지 철학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여전히 ‘잠재적인’ 철학자일 뿐이다. 철학입문이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철학을 흔들어 깨우는 것, 철학함에 발동을 거는 것이다. 9] 이러한 의미의 철학입문을 하이데거는 철학을 ‘자유롭게 하기’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철학은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철학은 우리의 가장 고유한 본질의 내적인 필연성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철학은 우리의 본질에게 그의 가장 고유한 품위를 내어준다." 10]


그렇다면 현실을 인식하고 고개를 돌릴 수 있도록 하는 것, 하이데거의 언어로 다시 질문해 보면 잠자고 있는 철학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연상시키면서 플라톤은 당시의 교육과는 다른 새로운 배움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당시의 교육관에 따르면 교육이란 선생이 학생의 영혼 속에 지식을 집어넣는 것인데, 소크라테스가 행했던 배움의 방식은 학생의 눈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어 올바른 대상을 향하도록 하는 데 있다.(518d)

직적접인 지식의 전달에 집중한 것이 아닌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방법.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내걸었던 두 가지-비은폐성의 인식, 자발적 해방 의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어떤 하나의 기교, 어떤 기술을 통해서 철학함의 상태로 옮겨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무지(無知)에 대한 무지를 깨닫도록 하는 소크라테스의 방법 11] 이 우리에게 철학함의 유효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8]<철학입문>, 하이데거, 이기상/김재철 옮김, 까치글방, p15

9]하이데거에서의 철학과 철학함의 의미, 이유택, 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KINX2000095380

10]<철학입문>, 하이데거, 이기상/김재철 옮김, 까치글방, p16

11]여러분들 중 몇몇은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비판했던 ‘무지한 스승’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비판했던 것은 ‘바보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로서 사용되는 ‘소크라테스주의’이다. “우리는 지적 질서 속에서 한 명의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라고 주장한 자코토 역시 가르치는 자(가장, 스승) 자신이 먼저 해방되는 것을 ‘보편적 가르침’의 전제 조건으로 보고 있다. <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p41



5. 자유롭게 질문하기


이제 동굴의 비유에서 가장 설득되지 않았던 동굴로의 귀환을 언급하면서 마무리 하려고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자가 동굴 안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동료에 대한 연민과 의무에 가깝다. 하지만 오늘날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철학을 일깨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동굴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의(定義)하는 철학자의 모습은 현재의 사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는 철학자를 죽음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 즉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정의한다.12]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철학자는 더 이상 죽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죽음이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결론은 단지 어느 철학자도 거기에까지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 이상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뿐이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형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그가 여전히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철학을 깨우지 못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원적(始原的) 진리로서의 비-은폐성은 단순히 전통적인 빛의 형이상학이 지향하는 밝고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은폐와의 투쟁관계 속에 있는 생기의 사건(Geschehnis)을 의미한다. 13]

여기서 진리란 우리 인간이 지속적인 긴장상태 속에서 이미 스스로 도달한 수준을 ‘매 순간 창조적으로 초월할 때’ 비로써 가능할 것이다.


동굴로의 귀환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처음에 질문했던 철학함 혹은 배움이란 자신이 있는 곳에서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아무런 의지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갖고 있지 못하는 현재의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철학할 것인가 혹은 배움의 지름길에 대한 방법론이 아니다.

자기 배려가 이루어지는 각성 순간 혹은 무지에 대한 무지를 깨달을 수 있는 자기 나름의 질문 던지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롭게 질문하기’ 14]가 가능할 때 바로 철학함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의 교육 혹은 학교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의 삶은 어쩌면 자신에게 맡겨진 선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참된 철학자란 항상 죽음을 연습하고 있으며 따라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참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혼적인 상태에서 더욱 가능하고 죽음은 혼과 육체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이돈>. 플라톤, 박종현 옮김

13]하이데거의 ‘동굴의 비유’ 해석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영식, 범한철학 제48집에 나온 하이데거의 <플라톤의 진리론> 재인용

 14]하이데거가 말하는 ‘철학을 자유롭게 하기’는 결국 ‘자유롭게 질문하기’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권위에도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 태도. 자신이 근거삼고 있던 그 근거 자체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다면, 그 지점이 바로 철학함 혹은 배움이 일어나는 최초의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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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상상력


/ 임영근 도서출판 지식의 풍경 대표


고요의 바다


어렸을 때, 달 착륙 생중계를 보지 못했던 일이 내내 아쉬웠다.
그때 나이가 대여섯 살이었는데,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으니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시골에서 시내로 전학 간 뒤의 일이었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 장면을 집에서 보았다거나 제주시 동쪽에 있는 사라봉에 제주 시내 애 어른 할 것 없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보았다며 자랑하는 도시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저 부러워하며 듣기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아폴로 11호 이야기는 인기 있는 주제여서 어린이 잡지에도 자주 실리곤 했다. 아쉬운 마음을 보상이라도 하려고 했는지 기사가 실릴 때마다 열심히 읽곤 했다. 달에는 바람도 불지 않고 우주인들도 붕붕 날아다니듯 걸을 수 있다는 대목이 신기하기만 했다. ‘아폴로’ 라는 우주선 이름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 ‘아폴론’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아폴론 신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가장 숭배해 마지않던 신이라는 사실은 훨씬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두고두고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된 문구는‘ 고요의 바다’ 였다. 아폴로 11호가 착륙했다는 그곳. 달에는 물이 없으니 당연히 바다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잡지에 실린 흑백 사진과 고요의 바다라는 문구가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도 달 표면 지도에 나오는 무슨 무슨 바다라고 된 이름들과 숭숭 뚫린 분화구, 회색 빛 땅과 검은 그림자가 어울린 달 표면 사진을 보면서 마냥 신비로워하기도 하고, 아무런 생명체도 없다는 생각에 순간 오싹해지는 상상도 하곤 했다.


달 표면 이름에 얽힌 내력에 대해서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제목도 멋들어진 『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책에 실린 「 플라톤의 요구」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부분 월식. 달에 드리운 지구의 그림자가 보인다. ?iStockphoto.com/cinoby


두 개의 그림자


플라톤보다 100년쯤 뒤 인물인 아리스타르코스(기원전 310경~230)는 지구와 태양의 크기를 추론한 일로 유명하다. 월식 때 달을 보면 지구 그림자가 드리워져 마치 초승달처럼 보인다.

작은 원 위에 큰 원의 그림자가 드리운 모양새다. 이걸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쯤은 단박에 알 수 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작은 원(달)과 큰 원(지구)의 곡률의 차이에 주목해 지구가 달보다 세 배(참 값은 네 배) 크다고 추론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의 크기도 추론했다. 이번에도 발상이 놀랍기만 하다. 방법 자체는 직각삼각형의 삼각비를 이용한 간단한 것이었다. 반달일 때 지구 달 태양이 직각을 이룬다는 것을 추론해 냈다.

이제 그때, 달 지구 태양이 이루는 각도를 재면 태양까지의 상대적 거리를 알 수 있고 태양의 크기도 추론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태양이 지구보다 300배 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의 크기에 비해 너무 작게 잡은 값(실제 태양의 부피는 지구의 130만 배)이지만 부실한 도구로 순전히 기학학적 추론을 통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제, 큰 것이 작은 것 주위를 돈다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므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추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동설이 등장했다.


두 번째 그림자는 한 세대쯤 뒤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막대기의 그림자이다. 막대기 하나와 기하학적 추론으로 지구 둘레를 계산한 이야기다. 에라토스테네스(기원전 276~194)는 저 전설 속의 알렉산드리아도서관 관장이었다고 한다.

하짓날인 6월 21일 정오가 되면 시에네(아스완)에서는 우물 속에 태양이 비친다는 글을 읽게 된다. 북회귀선이 지나는 곳이었다. 하짓날 시에네에서는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온다는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6월 21일 정오에 알렉산드리아에 막대기 하나를 꽂고 막대기가 그림자와 이루는 각도를 쟀다. 그 다음부터는 중학생도 할 수 있는 간단한 계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엇각의 원리에 따라 막대와 그림자가 이루는 각도가 원호의 중심각과 같다고 추론하고, 중심각과 원호의 길이를 알면 전체 원둘레는 간단한 비례식으로 구할 수 있다. 막대와 그림자가 이루는 각도 7.2도, 걸음꾼을 시켜 잰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사이의 거리 925km. 7.2 :925 = 360 : 지구 둘레, 이런 식을 얻을 수 있고, 이것을 계산한 결과값 46,250km는 참값 4만km와 큰 오차가 없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막대기 하나로 지구 둘레의 길이를 추론했다.



상상은 추론에 앞선다


두 사람의 고대 지성이 이룬 성과는 기하학적 추론의 놀라운 사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플라톤의 『국가』 제7권에서 “생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실재와 접촉하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과목으
로 거론하고 있는 기하학과 천문학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는 사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월식 사진을 보여 주고‘ 큰 원과 작은원의 비례 관계를 구하시오’라는 문제를 내거나 막대기를 꽂아 놓은 원 그림 보여 주고 ‘원 둘레를 구하는 식을 세워 보시오’ 하는 식으로 문제가 주어졌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중학생 수준의 수학을 배운 학생들은 대부분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 것이다. 실제로, 아들애 한테 에라토스테네스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중학교 수학 책에 실려있어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위대한 점은 문제를 간단히 풀 수 있는 기하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간단한 지식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늘 보던 모습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이다. 이렇게 보면, 모든 발견은 의미의 재발견이고, 이것은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여러 가지 사물을 서로 연결하는
시인의 능력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은 상상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조차도 자신의 이론을 세울 때, 계산은 다른 수학자에게 맡겼다고 하지 않는가?


이성이 올바른 추론을 하도록 격발하는 장치는 상상력이다. 상상력 없는 이성은 단순한 계산 장치로 전락할 것이며, 이미 오래 전부터 복잡한 계산은 컴퓨터의 영역으로 돌려지고 있다. 자연계에 실재라는 것이 있고 그런 실재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탐구를 촉발하는 것은 상상력이며 이성이나 추론 또는 계산 능력은 이런 상상력을 뒷받침하고 입증해 주는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플라톤이 의도한 진정한 “전향”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말한 지식, 추론, 신념, 상상으로 이어지는 혼의 단계는 수정되어야 한다.


필연의 왕국


플라톤이 말하는 실재의 세계가 있다면 그곳의 모든 사태는 필연에 따라 전개될 것이다. 가히 필연의 왕국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필연의 왕국에서는 이성적인 능력 하나로 모든 사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학 문제를 풀듯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간다면 어떤 문제든 풀리게 되는 그런 세계, 합리적으로 구성된 세계일 테니까.


이런 필연의 왕국이 그림자처럼 비치는 모방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모방의 세계는 실재처럼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필연의 왕국 같은 완벽한 질서를 이루며 운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재가 그림자에 반영되는 과정에서 끝없는 노이즈가 간섭하고 우연적인 요소도 계속해서 끼어들게 될 것이다. 필연의 왕국에 대비하여 보자면 우연이 출몰하는 세계쯤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온갖 노이즈와 우연에 실재가 가려져 있는 세계에서 실재를 발견해 내려면 상상력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재의 세계를 보고 온 자가 동굴에 내려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플라톤의 설명으로는,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온 자는 어둠에 적응될 때까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을 잘 볼 수 없어 죄수들과의 경쟁에서 뒤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실재의 세계가 동굴의 벽면에 비치는 과정에서 생기는 노이즈 외에도 그림자들 사이의 충돌과 운동이 생겨나면서 실재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요소들도 생겨나 버릴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실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연이 출몰하는 세계에서 반드시 유리하다고만 볼 수 없다. 그 사람이 새로 우연의 세계를 탐구하지 않는 한, 죄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도 상상력을 혼의 가장 저급한 부분으로 취급할 수 없다. 노이즈와 우연성에 가린 실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연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상상력을 강조한다고 해서 수학적 인식의 중요성을 가볍게 보려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이 토대를 놓은 확실한 지식에 대한 요구는 이후 서양 문명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두 사람 이외에도 여러 그리스의 수학자와 기하학자가 추론적 사고의 힘으로 큰 진보를 이루었고,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가히 과학과 수학의 시대라 할 만큼 플라톤이 놓은 토대에 힘입어 화려한 물질문명을 이룩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계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문제를 똑같은 잣대로 취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굴 속에는 죄수와 스크린 사이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죄수들 사이의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굴의 비유에서는 이 문제를 논의할 틀이 없다. 이를테면 실재를 보고 온 현자가 있다 치자.

이 현자가 모든 죄수에게 실재의 세계가 있으며 죄수들은 모두 실재를 향해 가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 다음 현자와 죄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담벼락에서 모상을 나르는 사람들을 갈아치우는 일? 죄수들을 모두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 그렇다면 텅 빈 동굴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물질의 세계와 달리, 자의적 인간들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자연계에서 보이는 노이즈나 우연성보다 더 복잡한 우연성들이 얽혀 있다.

인간 사회의 문제도 수학 문제처럼 명쾌하게 해결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수학적 사고가 아무리 확실한 진리를 보장한다 해도, 수학적 사고의 틀로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플라톤의 요구


코페르니코스가 지동설을 발표하고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견하여 실제 관측을 통해 지동설을 확증하고 가톨릭교회와 날카롭게 대립하던 16세기 중반. 달 표면의 산맥과 운석구덩이 따위에 이름을 붙이는 과제가 예수회 신부이자 볼로냐대학 교수인 리치올리에게 주어졌다.


리치올리는 『새로운 알마게스트Almagestum novum』(1651)라는 책을 펴 내며 그 일을 해냈다.

‘ 비의 바다’,‘ 감로주의 바다’ 같은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달의 지명은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고요의 바다’도 그중 하나다.


운석구덩이에는 주로 천문학 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붙였다. 리치올리가 가장 좋아했다는 튀코 브라헤가 남쪽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고, 코페르니쿠스도 한자리 차지했다.
리치올리가 달에 지명을 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망원경을 발명한 갈릴레이 덕분이었는데도 그 이름은 쏙 빠져 있다. 갈릴레이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겠지만, 가톨릭교회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일면일 것이다.


앞서 말한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와 에라토스테네스는 에우독소스, 아르키메데스 함께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남쪽에 튀코가 있다면, 북쪽에서 그에 상응하는 자리는 플라톤에게 바쳐졌다.

천문학에서 눈에 보이는 것 뒤에 있는 진짜 질서를 찾으라는 플라톤의 요구에 그 나름의 경의를 표한 것이리라.


이제 또 다른 플라톤의 요구를 상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특정계급의 특별한 행복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행복”을 찾으라는 요구. 이 요구를 해결하는 데는 어떤 상상력이 필요할까?



참고 자료


플라톤, 천병희 옮김『, 국가』, 숲.
울프 다니엘손, 이미옥 옮김,『 시인을 위한 물리학: 우주의 신비
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코리브르.
이광식,「 아득한 우주 거리, 과연 어떻게 잴까?」,『 나우뉴스』,
한국천문연구원의 달 착륙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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