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난 날을 기억한다.
먼지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ㅡ"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이것은 왕가위의 영화 '화양연화'의 서두에 떠오르는, 어떤 소설을 인용한 자막이다.
나는 이 영화를 어떤 여인과 개봉관에서 보았다.
그땐 이 영화가 우리 관계에도 '예고편'인지 몰랐다.
왕가위 표 영화는 그의 열혈 매니아들이 말해주듯 분명 사람을 매혹시키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로서는 꼭히 뭐라고 꼬집을 만한 대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열혈남아' '아비정전' '타락천사' '중경삼림' 얼핏
그의 필모그라피를 떠올려 보면 그의 영화 세계는 거의 하나같이 '떠도는 인간'을 그린 것 같다....
자살한 장국영, 살인적인 눈빛을 간직한 양조위, 묵직한 유덕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여배우들 ㅡ유가령, 장만옥, 임청하 등 그의 영화를 장식한 배우들은 모두 그의 영화에서 비로소 튀어나온 듯한,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을 듯한 인물을 연상케 한다.
그의 영화의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그림자' '유령' 을 연상케 한다.
아무래도 이 왕가위라는 감독은 중국의 전통 민예 '그림자 극'의 명수인 것 같다.
영화의 제목인 화양연화는 '인생의 절정의 시기'를 뜻하는 중국의 사자성어로,
영화의 아이러니컬한 주제를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화양연화는 단지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애틋함으로 기억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오지 않은 시절'을 얘기할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 인생의 화양연화는 그처럼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지난 시절의 그림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미래의 그림자....
영화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같은 시기에 한 집에 세 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각자 배우자가 있는 그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여염집 남정네와 아낙네를 연상케 하지만,
각자의 배우자를 서로의 배우자에게 내통당한 불륜의 공동 희생자로 등장한다.
두 집 다 전형적인 중간층 맞벌이 부부인데 그들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내통한 게
이사온 후 부터인지 이사 오기 전에 이미 이루어진 관계인지 모호하다.
이 영화에서는 특이하게 그들 각자의 배우자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단편적인 뒷모습으로만 잠깐 나타난다든지 목소리로만, 심지어는 벽 모서리를 스치는 손가락으로만 나타난다.
대신 그들을 연기하는 것은
그들의 각자의 배우자, 남자와 여자이다.
각자 신문기자와 여비서로 일하는 남자와 여자는 그들 각자의 불성실한 배우자의 잦은 부재로 인해 서로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 자체가 아이러니컬하다.
이것은 마치 갇힌 미로 속의 짝짓기와 같다.
각자의 배우자가 각자의.배우자와 그들 모르는 곳에서 딴짓을 하므로 그들은 불가피하게 서로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는 식이다...
더우기 1960년대의 홍콩의 가옥은 세입자들이 서로 옷깃을 스칠 정도로 협소하고 조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도에서, 계단에서, 공동 주방에서 자주 집을 비우는 각자의 배우자를 둔 이들은 쉽사리 마주친다.
영화에서는 그런 순간들을 숨막힐 정도로 희박한 정서를 내장한 밀도 있는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준다.
꽉 끼는 중국 전통 원피스를 입은 장만옥이 집앞 골목에서 산 국수를 채운 마호병을 들고계단을 오르면, 외로움이 묻어나는 어깨를 가진 축축한 눈빛의 사나이 양조위가 어딘가로 외출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온다...양조위는 좁은 계단에서 비켜서고 그들은 잠깐 눈빛이 스친다.
그러던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배우자가 내통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 발견의 과정이 한 편의 추리소설이다.
그들 각자의 배우자들 서로의 불륜 과정을 재구성해내는 그들의 공동 작업이.
그것을 위해 그들 둘이 정작 남몰래 밀회를 갖는 남녀가 된다.
"그 넥타이 아내가 사준 거에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저희 남편도 하나 있는데..."
하고 여자가 대답한다
"그 가방 제 아내도 하나 들고 다니는 걸..."
하고 남자가 덧붙인다.
그들은 일본 출장이 잦은 여자의 남편이 늘상 똑같은 선물을 두 개씩 산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부주의하게도 그것을 남용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 그들은 똑같은 넥타이 똑같은 가방을 공유하게 되었을까.
불륜은 불륜을 부추긴다? 일종의 정서적인 스와핑을 은밀히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에서 결코 한번도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불륜 남편 불륜 아내는 이 영화가
내장한 미스테리다.
그들은 그림자이고, 그들의 남편이며 아내인 남자와 여자는 그림자의 그림자이다.
두 남녀는 그들 스스로의 감정이 아니고, 각자의 부정한 배우자의 감정을 대역한다.
하나의 밀회를 캐기 위해 이루어지는 밀회.
식당 장면.
남자가 여자의 접시에 캐첩을 덜어준다.
"전 좋아하지 않아요. 아내는 이걸 즐기는가 보죠?"
"남편은 이걸 잘 먹나요?"
그러한 연기가 감추고 있는 것은 그들 각자에 대한 진정한 감정이다.
그 감정은 서로의 배우자의 감정의 배후에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운명을 가졌다.
그들의 밀회는 모텔로까지 발전한다.
"당신 솔직히 말해봐요. 나몰래 사귀는 여자 있지?"
여자가 남편을 추궁하는 시늉을 한다.
"무슨 소리야. 쓸데 없는 소리 말어."
"솔직히 말해봐요. 여자 있지?"
"그래...."
못 이기는 척 남자가 고백을 하자 여자가 화들짝 남자의 뺨을 때리는 시늉을하고 갑자기 흐느낀다.
"왜 그래요? 솔직히 인정했을 때 그렇게 대해서는 안되는 거에요...다시 해봐요."
남자가 여자를 추스린다.
"아...못 하겠어요. 도저히....."
그들은 기껏해야 그들 각자의 아내와 남편을 연기하는 리허설에 열중한다.
서로를 배웅하는 징면에서까지 그들의 연기는 이어진다.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가 내통을 시작하는 장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가면 늦지 않을까?"
"아뇨. 매일 밤 늦는 걸요."
"그럼 좀더 산책이나 할까요?"
"아뇨. 남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러다 여자는 기겁을 한다.
어디가 그들 각자의 배우자의 내통의 장면이고
어디가 그들 자신의 감춰진 감정인지
모호한 혼란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와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없는 딜렘마에 빠졌다.
결국 그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한 감정을 지탱하지 못하고 헤어진다.
남자는 인도차이나로 전근을 가고,
여자는 남아서 이사를 간다.
그 후로도 오래도록 그들은 유령으로 서로의 주변을 맴돌다가 끝내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남자는 고색창연한 앙코르 사원의 무너져 가는 기둥에 난 구멍에다 대고 그의 사랑을 밀봉하고 긴 회랑을 걸어나온다.
여자는 어딘지도 모를 빈 방에서 그때를 회상한다.
이것은 순애보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특이한 순애보이다.
칼 융에 의하면 우리들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거느린다고 한다.
우리들 자아의 열등한 성향 , 부도덕한 감정, 드러내 놓을 수 없는 욕망이 바로 그것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흔히 자신의 그림자를 상대에게 투사하거나 역투영 되어오면 거부감과 격렬한 수치심을 느낀다.
배우자의 불륜이 우리에게 그토록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의 내면에도 도사리고 있는 똑같은 불륜에의 감정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융의 그림자 이론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두 남녀가 서로를 통해 맞닥뜨린 것이 바로 그들 자신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들은 단지 선수를 빼앗겼기 때문에 후수를 둘 기회를 박탈당했는지 모른다.
최소한 그들이 서로에 대해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이 각자의 배우자의 불륜을 통해 맞닥뜨린 것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그림자였다.
각자의 배우자들을 통해, 그리고 각자의 배우자들처럼' 그들 자신도 불륜의 그림자를 만났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끝내 이루지 못한 원인이었다.
그랬으므로 그들은 끝내 그림자로서만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림자로만, 실재를 거세당한, 애초에 아련한 추억으로서만 남는 사랑은 시간 속에서 언제까지나 원본이 없는 사본의 사본, 흔적의 흔적으로만 남은 사랑이리라.
https://youtu.be/bOq_jnvDXV8?si=JxEl-RSM8ilkeRfG
첫댓글
저도 재밋게 밨네요
감정에 충실한
꽃 처럼 아름다운 사랑ᆢ
진짜 영화다운 영화!!
글쎄 어떻게 보면 '감정에 충실한지도' 모르겠네요.
실은 감정에 충실할 수 없었던, 그래서 슬프게 끝맺을 수밖에 없었던, 온통 바램으로만 끝난 사랑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는...ㅎ
김민기 노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생각나네요.
@지솔
이룰 수 없는줄 알면서도 ᆢ
그래서 ㅎ
역설적으로 저는 이 영화만큼 '밀도 있는' 사랑 이야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솔
공감 합니다~
사랑의 밀도
@지솔
댓글
공감
서글픈 사랑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스토리 보다 영상미
불난것 같은 다량 의 담배연기
만옥의 의상등
영상에 촥~ 안기는 ost
지솔님은 영화평론가
정말 훌륭합니다
과찬이십니다 라고 했으면 좋겠지만
내가 사용하는 어법이 아니라서.....
솔직히 그냥 껌 씹는 정도의 글입니다. ㅋ
불행한 시간들이
화양연화의 시간들로 바뀌는 전개..
그러나 결론은 또 헤어짐..
그러나 그 화양연화의 시간들은 가슴속에 남아 있으려니...
룰루님은 요즘 바야흐로 한창 화양연화 아니신가?
@지솔 어떤 의미의 화양연화 인지는 모르겠으나...남자라는 존재를 빼면 그럭저럭..ㅋㅋ
메디슨 다리류의 영화 인가 보네요..
감정보다 이성적인것을 선호하여
메디슨 류의 영화를 보면 사랑 이야기라 하는데
전 그냥 불륜 영화로 느끼는 건조한 인간이죠,
불륜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죠.
그렇게 사물을 납작한 시선으로 보는 건 문제라고 여겨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