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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르베시-고사인쿤드
1월6일 (금)
06:00 기상
06:30 식사
07:00 출발
샤브르베시(1,467m)-툴루샤브르(2,250m)
고사인쿤드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오늘 우리들이 가려는 코스가 가장 무난한 길입니다. 카트만두에서 버스로 순다리잘까지, 거기서부터 걷는 코스는 치소바니, 쿠툼상, 곱테, 고사인쿤드를 지나는데 멀고도 지루한 코스. 둔체에서 동쪽 큰 계곡을 따라 신곰파쪽으로 오르는 코스는 가장 가까운 코스지만 험난한 코스입니다.
두물머리(랑탕 콜라와 보테 콜라) 랑탕 입구를 지나 뱀부 못 미쳐 우회전하는 코스인데 시작부터 급한 오르막입니다. 선두에 선 리마 클라이밍 셰르파가 천천히 우리를 이끌어 가고, 가이드 핀조의 풍물 소개를 들으며 고소 적응을 해 나갑니다. 점점 아래로 깊어지는 랑탕 계곡은 웅장하기만 합니다.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북사면을 돌아 나가면 다랭이논이 나타나고 근처에 따망족 집들이 보입니다.(랑탕 이야기는 지난번 탐사기 모음집에 자세히 소개)
가다 쉬다를 반복해 가니 우리 옛날 산마을 입구에 있는 서낭당 같은 곰파가 보이고 곧이어 산비탈에 길게 형성된 마을, 툴루샤브르가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툴루샤브르는 빅샤브르(big syabru)라고도 한답니다. 마을에 들어오니 좁은 길 양쪽으로 여행객을 기다리는 롯지가 즐비합니다. 이 산비탈 마을에 롯지가 스무 군데나 있습니다. 또 짓고 있는 롯지도 보이고요. 그중 우리 숙소는 라마호텔입니다. 오늘 오후는 내일 격한 고도 산행을 위해 휴식합니다. 막 튀겨 내놓은 한 대야 고소한 강냉이, 우물우물 집어먹으며 다리를 풉니다.
점심을 먹고는 끼리끼리 주위를 산책하기로 합니다. 눈이 밝은 김영채 선생이 동쪽 다랭이논 건너편 하얀 건물을 가리키며 ‘저기 저 집은 교회 같다’는 말에 귀를 쫑긋합니다. 내 눈에는 여느 집들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도 김선생 말에 동조합니다. ‘그럼 한번 가 보자’ 내가 앞장을 서서 길을 나섭니다. 나와 박 선생, 장산선생, 홍선생, 연선생, 이선생 길은 따라 가까이 가 보니 정말 교회 건물이었습니다. 현관 위의 십자가, 룽다 끝에도 십자가가 분명한 교회였습니다. 이런 심산 고적한 곳에 교회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대문은 잠긴 채로. 한참을 넘어다 보니 누가 교회 건물 밖에 있었습니다. 그도 우리를 보더니 다가와 문을 열어주며 들어와도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 교회 몇 안 되는 신도입니다. 오늘은 금요일, 교회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닫힌 유리창 안을 들여다 보니 소박한 제단 위의 십자가, 강대상과 마루 바닥이 눈에 비칩니다. 이 교회에는 현재 4,50명이 출석한다고 합니다. 목사님과 가족은 우리 숙소가 있는 마을에 있다고 알려줍니다. 청년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녁 한가한 시간에 목사님을 한번 뵈어야겠다고 혼자서 계획합니다.
라마호텔의 유능한 2세 경영자 젊은 딸(스물 서넛이나 되었을까 우리들 앞에서 스스럼 없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이 운영하는 한뼘가게(건물 한쪽 벽면에 있는데 있을 건 다 있어 이 가게 이름을 그렇게 붙였음)에서 책을 네 권 삽니다. 책이름은 ‘easy trek-the lower langtang in nepals himalayas'. 50쪽 가량의 영문판으로 그림을 섞어 넣은 재미있는 책 같아서 석위, 희경이, 병현에게 한 권씩 주기로 합니다.
햇볕은 따숩고 눈 앞의 전경은 아름다워 롯지 앞 의자에 몸을 묻고는 명상에 잠깁니다.
깜빡 졸음에 빠집니다. 여기가 바로 샹그릴라, 또다른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디서 노랫소리가 나는 것 같아 얼풋 정신이 듭니다. 아이들 소리 나는 곳으로 갔습니다. 스노우폴롯지, 야크롯지, 러블리롯지, 피스롯지, 고센롯지......아이들은 좁은 마당이 깨끗이 청소된 피스롯지 앞에 있었는데 휴대용 녹음기 음악을 들으며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네 명의 네팔리, 따망족 아이들. 가만히 들으니 그 노래는 내 귀에 익은 찬송가. 크리스마스 캐롤이잖아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다 찬송하여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아니, 이 산 속에, 랑탕 계곡이 저 아래 아득히 내려다 보이고 고사인쿤드 설산이 험한 산성처럼 둘려 있는 이 오지에 찬송가라니, 이건 정말 뒤집어질 일이네, 아까 본 교회와 지금 여기 이 아이들의 찬송가..... 나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 내가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니 그중 한 녀석이 다가와 먼저 나더러 “are you christian?” 하고 묻는 게 아니겠어요? 깜짝 놀란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손을 내밉니다. 사지에서 믿음의 식구를 만나 살아나는 기쁨을 느낍니다. 할렐루야.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 찬양이 나온 거지요
처음 만난 친구는 러미스(15살), 그리고 디라즈(14살), 람바라얀(아순, 14살), 라즈(9살), 그리고 얼마 후에 나온 수바스. 라즈를 빼고는 모두 교회에 다닌다고 합니다. 그리고 디라즈의 아버지가 아까 찾아갔던 교회의 목사님이라는 걸 알고는 또 한번 놀랐습니다. 이 피스롯지는 목사 사모인 어머니가 운영하는 집이며, 자기는 카트만두 찬데비 마하라잔에 있는 기독교 학교 엘림 키드 아카데미에, 사촌 아순은 랄리푸르에 알파 하이스쿨에 재학하고 있으며, 지금은 방학이라 집에 와 있다고 얘기해 줍니다. 찬송가 듣는 것도 놀랍고 재미있었지만 그들의 부모, 목사님을 뵙고 싶어 저녁 식사 후 6시 경에 ‘너희 집에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디라즈와 그의 사촌 아이에게 전했습니다. 아이들도 좋다 합니다.
어둠이 내려 랜턴을 챙겨 들고 나갔습니다. 낮에 아이들을 만났던 곳으로. 박종웅 선생과 둘이서.
디라즈의 아버지 걀상 따망(Gyalsang Tamang)은 1973년생이니까 올해 39세의 젊은 목사입니다. 처음 만나 본 얼굴로는 4,50대처럼 보였습니다. 어두운 불빛에 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보라고 준 책자를 보니 어린 시절 몸이 아프고 영혼이 매우 곤고하였다고 합니다. 이름도 처음에는 카지(Khaji)였는데 10살 쯤 되어 기절하여 신을 만나는 일이 있고 나서 Gyalsang Tamang(따망족 말로 ‘혼절, 기절’의 뜻을 가짐)으로 바꾸었답니다. 아버지는 라하르키알 따망, 어머니는 돌마 셰르파로 같은 부족의 아내를 맞지 않아 배척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큰형 앙다와, 둘째형 밍마르, 그리고 누이, 걀상 3남1녀의 막내였는데 아버지는 불교 축제(Gyawa) 때 음악을 담당하는 등 조상과 이웃이 모두 불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던 그가 열 살 때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축을 돌보러 숲속에 들어 갔을 때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혼절하게 되는데 그 상태에서 '그림자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림자 사람들’은 자기를 부처님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특별한 항아리를 준비시켰는데 적은 용량의 항아리 물이 놀랍게도 가족이 충분히 쓰고도 남을 만큼 채워지기도 하며, 석 달 후에는 항아리 주둥이에서 파란색 나무가 자라나기도 하는 신비한 일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림자 사람들’은 그 항아리를 나무 상자에 넣어두라고 말했다지요. 아버지가 그 말대로 향나무로 상자를 짜 넣어두었는데, 그 상자를 열었을 때 항아리 주둥이에서 새싹이 올라오고 꽃이 피는 기적을 보았다고 합니다.
열두 살 때 아버지가 예티호텔 주인한테서 받아온 성경을 처음 보게 되었답니다. 어떤 여행자가 두고 간 책이었습니다. 싱곰파에서 치즈공장 일을 거들던 형 밍마르가 롯지를 개업하였는데 그 롯지에 우연히 외국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존과 단, 조이 세 사람. 식사 때 기도를 하는 이들을 보고 밍마르는 제 동생이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들임을 직감하고 동생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때 걀상은 이곳에 없었고 여행객은 비행기를 타야 할 사람들이었기에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움직여 2주 후에 존과 네팔인 기독교 성경녹음담당자 바르나바스가 오게 되어 예수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열 다섯 살, 그때까지 자기가 그 이름에 절하고 있는 35명의 신들 중에 예수의 이름은 2번째 자리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그림자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는데 ‘너는 더 이상 나를 섬길 이유가 없다. 내 뒤에 나보다 위대한 이가 오고 있다. 너는 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예수를 따르라’고 말해 그대로 따랐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마음이 편안해졌고 바르나바스의 말을 계속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서 죽은 이유, 정의와 의식, 율법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40장의 그림을 통해 성경의 원리가 그대로 마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서 염주를 떼어내고 벽에서 온갖 장식물을 떼어냈습니다. 어머니 돌마도 그때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나는 많이 알지는 못해도 이제부터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섬기겠습니다.’ 아버지는 항아리에 불을 붙이고 세 번 절하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1993년 우기 때 어머니가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예수와 함께 있기 위해’ 떠났다고 합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헬람부 셰르파 중 최초의 기독교인이며, 아버지는 셰르파어, 따망어 찬송가를 작곡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분으로 거듭났고, 형 밍마르와 형수 카르마는 포카라 성경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셰르파어로 복음 메시지를 녹음했고 신약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과 조카 아이들을 카트만두에 있는 기독교학교에 보내 예수의 제자가 되게 돕고 있습니다. 걀상 따망 목사님의 마지막 말, ‘형제가 운영하는 고센롯지, 아내가 운영하는 피스롯지, 그리고 3년간 보여준 비전의 이 마을이 모두 나의 증언자입니다.’
(* 위 내용은 걀상 따망-조상 때부터 골수에 박힌 불교도가 어떻게 기독교인 되었는지를 기록한 소책자 ‘The Name Above All'을 참고하였습니다. gyalsang20@yahoo.com)
걀상 씨 집에서 돌아오니 아직도 초저녁. 3층 로얄스카이라운지^^에서 특별한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머리털 나고서 처음 듣는 말(毛生之後 初聞之言) 천지, 지용희 선생이 그렇게 판을 만든 주인공이었습니다. 은근히 오래 웃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꾼 샘이퐁퐁, 퐁퐁샘이.
하이차이 뿌이며는 차이 빠이요
하이차이 뿌이며는 차이 빠이다
하이빠이도 노이빠이도
하이차이 뿌이며는 차이 빠이다
중국말의 억양을 살려 또박또박 말하는 대사가 왜 그렇게 우스운지 모두들 ‘모/가/지에 알통 배기’게 웃어댔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대사와 억양만 듣고 웃었습니다. 고개짓하며 ‘뿌이다 빠이다’ 해대니 우스웠지요. 그 말뜻을 알아 듣고는 정말로 ‘배꼽이 빠지게’가 아니라 ‘모/가/지에 알통 배기’게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이타이 뿌리면 잘 빨아지지요. 흰빨래도 누런빨래도 하이타이 뿌리면 잘 빨아지지요^^.
후주가이도 고주가이도 너무 마이 뿌이며는 쎄가 터이고
후주가이와 고주가이를 냅다 마이 뿌이며는 속이 터인다
아래는 박 선생이 음식 먹는 습관을 보고 그대로 따라 부른 내 노래입니다. 사탕을 먹을 때 옆에서 우드득우드득 소리가 나면 그건 망치입니다. 내 짝꿍 망치는 음식을 먹는 법이 남다릅니다. 너무 빠릅니다. 번쩍하는 번개 저리가라^^입니다. 좀 동작이 굼뜬 사람 숟가락 들고 반찬을 일별할 시간이면 그는 벌써 밥을 반이나 먹은 상태입니다. 그는 반찬 투정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밥과 국 한 그릇이면 다 좋습니다.
그런데 올라온 밥상에 고춧가루와 고추장류 또는 후춧가루 등의 향신료 이것들이 없으면 이상합니다.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도 맛을 보아가며 조금 넣어 먹는 게 아니라 무조건 타고, 뿌리고 봅니다. 벌겋게 비벼놓은 비빔밥은 안 됩니다. 다시 주방으로 가 고추장 단지를 안고 와서 크게 한 숟가락 퍼 넣고 다시 태극기 빨강색으로 비벼야 직성이 풀립니다. 나이를 먹어 가며 밥은 더욱 천천히, 음식은 싱겁게 먹어야 한다는데...... 그래서 후춧가루나 고춧가루를 많이 먹으면 혀가 터져 마비되고 드디어는 위장에 문제가 생긴다는 걸 샘이퐁퐁 흉내 내어 본 것입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을
비바람 땡볕으로 이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주님을 모시듯 밥을 먹어라
햇빛과 물과 바람, 농부까지 그 많은 생명
신령하게 깃들어 있는 밥인데
그렇게 남기고 버려버리면
생명이신 주님을 버리는 것이니라
사람이 소중히 밥을 대하면 그게 예수 잘 믿는 거여
밥되신 예수처럼 밥되어 살거라
쌀 보리 밀 옥수수 물고기에 온 만물들은
자신을 제단 위에 밥으로 드리는데
그렇게 사람들만 밥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생명 세상을 열겠느냐
사람은 생명의 밥을 먹고 밥이 되어 사는 거여
(이현주,·‘밥을 먹는 자식에게’ 전문)
1월7일 (토)
06:00 기상
06:30 식사
07:00 출발
툴루샤브르(2,250m)-두르사강(2,650m)-포프랑단다(3,250m)-싱곰파(3,350m)
오르는 일만 남은 하루입니다. 계속 오르는 것이 일과지만 부대장님과 핀조 씨, 클라이밍 셰르파가 우리 팀의 트레킹 속도를 적당히 조절하여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백여 미터 오르고 나선 아래를 내려다 봅니다. 자연의 일부로 납작 엎드린 따망족 마을들, 다랭이논과 어울려 정겹기 짝이 없습니다. 또 오르면 오를수록 깊어지는 랑탕의 검은 계곡, 저 아래로 해서 강진곰파까지 갔던 때를 기억해 내기도 합니다.
두르사강에서 잠시 쉴 때 우리 시골마을 미나리꽝 같은 곳에 자라고 있는 풀을 보았습니다. 언뜻 보니 창포 같아서 다가가 잘라서 냄새를 맡아보니 영락없는 창포였습니다. 이 행동을 보고 있던 잘 생긴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이 풀이름이 무어냐고. 그랬더니 그 청년 왈, ‘시다’라고 합니다. 창포를 ‘시다’라고 부르나 봅니다. 청년 이름은 나왕 따망(Ngawang Tamang, 20)입니다. 내가 이번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류를 가리키며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소나무는 탕신, 전나무류 고프레설라라고 일러 줍니다. 여기 소나무는 우리 소나무와는 잎이 좀 다릅니다. 잎이 길며 아래로 탐스럽게 쳐져 있습니다.
수림 지역 통과합니다. 거의 원시림 수준. 거의 세 사람이 끌어안아야 안길 만큼 굵고 키는 커서 곧장은 올려다 보이지가 않습니다. 한참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 키를 가늠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점심을 먹을 데가 나타났습니다. 포프랑단다. 지금까지 본 가네쉬히말 전망 중 최고입니다. 올라가면 갈수록 또다른 풍경이 우릴 기다리고 있겠지만 가네쉬히말의 눈맛 참 대단합니다. 뷰포인트. 날도 따뜻하여 야외에서 김치볶음밥으로 점심을 대합니다. 포프랑단다의 롯지 사우지는 크리스챤인가 봅니다. 여기 룽다에도 성경구절이 적혀 펄럭입니다. 옆에 앉아 있는 청심국제고 전희진 학생에게 해석을 부탁했습니다. 히브리서 14장29절이라고 적혔는데 돌아와 우리 성경을 보니 히브리서 12장29절로 ‘for our God is consuming fire’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의 뜻입니다.
오늘의 목적지 싱곰파에 다다르기 직전 쉼터에서 대원들에게 숲해설 한 자리 펼쳐 봅니다.
<여러분, 여기 울창한 원시림 보이시죠, 지금 보이는 수종은 주로 전나무류와 랄리굴라스입니다. 전나무류는 굵기 6m 이상, 높이 50m이상으로 수령 100년 이상 된 나무들입니다. 오는 길에 보인 붉은 껍질을 한 것은 네팔의 국화 랄리구라스입니다. 봄이면 네팔 어디서고 볼 수 있는 꽃입니다. 특히 3,500m 전후의 수목한계선에서 피어나는 꽃은 더욱 아름답다고 합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그 고통을 감내한 후 피는 꽃이라면 아름답지 않은 게 하나도 없을 듯합니다, 등이 따숩고 배가 부르면 공부가 잘 되지 않는 법입니다. 4, 5월 붉게 또는 희게 온 산을 뒤덮는 장관을 연출한다 하니 그때 다시 한번 이곳을 여행합시다.
어린 나무의 싹이 자라서 저렇게 크고 우람한 나무로 자란 것을 보며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평지든 비탈이든, 옥토든 돌밭이든 한군데 자리를 잡으면 수십 년 수백 년 말없이 자랍니다. 평생 한 켤레의 신을 신고 수백 년을 견뎌내는 나무들, 우리 인간과는 판연히 다릅니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든 아무 불평 없는 말없는 성자(聖者)는 나무입니다. ‘격(格)’이라는 한자를 보세요. 나무(木)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것(各), 그것이 격(格)입니다. 오래 참고 잘 견디며 불평이 없는 것, 서로 곧게 자라 하늘을 우러르며 팔 벌리는 삶, 늘 푸르름, 말 없음, 제것을 나누어 줄 줄 앎, 동물들이 가지지 못한 그것을 격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나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닮고 싶어 겨우 무얼 좀 가지면 그때 거기 인격(人格)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품격(品格)을 갖추게 되는 법입니다. 특히 오래된 나무, 고목에는 감히 범접치 못하는 신령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3천 미터가 넘는 이 고산에 서 있는 큰 나무들은 모두 성자요 우리의 스승입니다. 경배하고 절을 받을 만한 귀한 존재들입니다.>
싱곰파에 도착하여 따뜻한 음료수와 오렌지 대접을 받습니다. 저녁밥을 먹기 전에 또 강냉이 튀긴 것이 한 대야 쏟아져 들어 옵니다. 간단히 요기를 한 뒤에 시간이 남아 야크치즈 공장을 방문했으나 겨울이라 생산 과정은 볼 수 없었고 직원 한 사람이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보여 줍니다. 한 조각을 맛보았는데 시큼하고 퀴퀴한 게 된장국에 길들은 우리 입맛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포터들의 한판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포터짱 나이케한테 선물을 전달하고 난 후 따망족 전통춤과 노래가 싱곰파를 롯지를 흥겹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진도 아리랑과 철돌이 특별무용으로 답례, 그리고 모두들 레쌈피리리로 한바탕 어울어졌습니다.
1월8일 (일)
06:00 기상
06:30 식사
07:30 출발
싱곰파(3,350m)ㅡ촐랑파티(3,654m)ㅡ라우리비나야크(3,910m)ㅡ고사인쿤드(4,380m)
네팔 여행을 나와 두 번째 주일입니다. 산은 높아지고 기온은 점점 떨어지는데 우리 전대원들이 무사히 이 산행을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코스는 이번 트레킹 전 구간 중 가장 힘든 구간이라고 박부대장님 설명합니다. 물론 내일 4,600m 라우리비나야크 패스가 있지만 거기는 4,380m 고사인쿤드에서 출발하여 오르는 구간이 짧고 바로 내려가는 길이라 오늘보다는 쉬울 거라는 것입니다. 모두들 긴장하여 몸과 마음을 무장합니다. 아닌게아니라 3천 이상의 고산에서 상대고도 바로 1천 미터 가량을 치고 오르니 숨가쁘게 생겼습니다.
출발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이상한 나무둥치가 보입니다. 핀조 씨가 알려 주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싱곰파 주변의 원시림이 난데없는 불을 맞아 저렇게 시커멓게, 볼썽사납게 서 있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보이는 밑둥은 그냥 숯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고 애처롭습니다. 무슨 일로 불이 났는지 모르지만 수백 년 원시림이 무방비 불길 속에 질렀을 비명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수목 한계선을 지나고 랑탕리룽뷰 호텔을 지나 눈 쌓인 고갯길을 올라 갑니다. 라우리비나야크 호텔에 도착하니 점심 때입니다. 점심을 먹기 전 벽에 걸린 야크털 흰색 모자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고사인쿤드 산 모양과 그 아래에 LAURIBINAYAK 3900이라 새겨진 모자인데 여준이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가격은 심 피디의 흥정 끝에 4달러.
한쪽 벽에는 고사인쿤드 영문 소개, 또 한쪽엔 사진과 함께 <save Red Panda> 글자가 선명합니다. 레드 팬더는 대나무 숲에 서식하는 이 지역의 멸종위기 동물입니다.
Gosainkunda
Location_ 28°500″East. 85°24.96″North
Area_13.80㏊
Length_625.55m
Breath_302m
Altitude_4,000~4,700m
Flora_Meconopsis dhwojii. Aconitum. Spicatum. Nardostachys grandiflora.
Fauna_Brahminy Duck. Common Teal. Bar_Heated Goose. Brown Dipper.
Threats_Water Pollution. waste disposal. Excessive use of timber and firewood.
Economic Contribution_.Waterhead of Trisuli and Devahat hydro_power.
Li sted in Ramsar_23 September, 2007
Gosainkunda site level management plan approved by GON:14 oct 2008
언제쯤 호수가 나타날까 기대하며 걷던 중 산비탈을 돌자 얼어붙은 위에 흰눈이 덮인 호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짝궁이 조사하여 유인물로 만들어 온 안내서에 보니 쿤드는 ‘호수’라는 뜻입니다. ‘쿤드’ ‘쿤다’는 서로 넘나들며 사용됩니다. 제일 먼저 나타난 바하이라브쿤다. 어마어마한 계곡 깊숙이 만들어진 호수. 신비하기만 합니다. 지금은 호수의 물이 보이지 않지만 이 높은 고산의 계곡에다 누가 만든 작품인지 여름날 이곳을 지난다면 맑고 푸른 호수에 그만 풍덩 빠지고 싶어질 호수입니다. 호수의 가장자리는 얼지 않고 물이 보이는데 그 모양이 제3의 눈을 닮았습니다.
8월 보름께 열리는 ‘자나이 푸르네마’ 고사인쿤다 페스티벌은 힌두교 최고의 축제랍니다. 일년 열두 번이나 되는 샤브르 축제 중에서도 물론 가장 성대하고요. 축제 기간에 숙소는 동이 나고 호수 주변에 흰옷 입은 순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합니다. 내 눈에 주위가 흰 눈으로 덮여 어떻게 보면 여름날 성지를 찾은 순례자들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라스와트쿤드, 바하이라브쿤드, 큐마차쿤드, 에클레쿤드, 자쿵출리쿤드, 두드쿤드, 찬드라쿤드, 라가트쿤드, 바타스쿤드, 라니쿤드, 라자쿤드, 나우쿤드, 체라쿤드, 틴출리쿤드, 가네쉬쿤드, 수리야쿤드, 아마쿤드......안내 책자에 수없이 많은 호수들이 있습니다. 어느 소개서에 보면 크고 작은 108개나 되는 호수가 있다는 데 그도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호수도 있고 작은 호수는 또 한겨울 눈이 내려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4,000m 높은 곳에 생겨난 호수라니 놀랍고 더욱 신령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곳이 네팔의 최대 성지가 되었나 봅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바람이 불고 춥습니다. 목을 거북이 모양 바싹 움츠리고 한발 한발 돌길을 더듬어 갑니다.
심시메 빠니마 쟌네 버이만
거르처끼 진더가니만
너자우 뻐러 아우 워러워러
띰로 머추 메로 뽀코 처러
1월9일 (월)
06:00 기상
06:30 식사
07:30 출발
고사인쿤드(4,380m)ㅡ라우리비나야크(4,610m)ㅡ페디(3,730m)ㅡ곱테(3,430m)
이제 최고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 날입니다. 몸들이 무겁습니다. 거울을 못 본지 몇 날인지 모릅니다. 꺼칠한 수염에 떡진 머리에 고소로 약간씩 부은 얼굴....내가 내 얼굴을 만져 봐도 이상한데 남들이 보면 무어라 할까요. 물론 우리 일행은 예외입니다. 모두가 같은 몰골인데요 뭘. 새벽녘 소피 때문에 여러 차례 들락날락. 몸을 으스스 떨며 방문을 나올 때면 계곡을 휩쓸어 오는 바람이 숭숭 뚫린 롯지의 판자벽에서 웁니다. 그러면서 ‘너 나오기만 나오면 잡아먹는다고 으르렁거리는 듯합니다.
올라가는 길 큰 바위에 핀 노란색 지의류(地衣類)가 한겨울 히말라야에 한 가지 환한 천연색이 되어 있습니다. 곱은 손으로 촬영을 하긴 했는데 제 색깔이 나올지...., 영업을 하지 않는 롯지 한 옆 돌틈에서 움직이는 새를 보았습니다. 제대로 날갯짓도 하지 못하는 거무데데한 메추리만한 새였습니다. 다친 새는 아닌데 재빠르지도 팔락거리지도 새.
인도의 설산에 한고조(寒苦鳥)라는 새가 살았답니다. 이 새는 둥지를 틀지 않고 사는데 낮에는 햇볕이 따뜻하게 드는 곳에서 지내니 둥지가 필요 없지요. 그러다가 해가 지고 살을 에는 바람이 불면 추위에 몸서리치며 내일은 집을 지어야지, 집을 지어야지 하며 밤을 지샙니다. 아침이 되어 해가 나면 다시 양지쪽에 나가 어젯밤 그 고통을 잊고 맙니다.
그 훈계조 상상의 새가 한고조라는데 내가 만난 이 새가 바로 한고조 같습니다. 분명히 사진을 두 컷트나 찍어 두었는데 집에 와 보려고 하니 영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먼 설산 상상 속으로 날아갔나.
강 선생은 계속되는 고소로 아주 힘들어 하고 친절한과 아이들도 두어 명. 정상에 오르기 직전 토꼬마는 손이 어니 온몸이 떨려 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박선생이 손난로를 장갑 속에 넣기도 하고 창현이 아빠는 자기 겉옷으로 덮어 챙기며 응급조처를 합니다. 바람과 추위와 배고픔으로 정상에선 단체사진 한두 장 찍고 이내 하산합니다. 내리막은 급합니다. 까마득한 계곡 아래에서 안개를 동반한 눈보라가 우리에게 덤벼드니 무거운 발걸음만 바빠집니다.
페디까지 내려와 점심을 먹습니다. 뜨거운 국물과 국수. 이곳 페디는 1992년 타이에어버스가 안개에 휩싸여 방향을 잃고 그만 절벽에 부딪쳐 승객 전원 사망한 곳이라고 합니다. 고사인쿤드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한국인 의사도 한 명, 봉사 활동 차 네팔로 들어오던 길에 사고를 당하여 고귀한 뜻으로 산화했다고 나중에 김대장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점심을 마치고는 오늘 숙소가 있는 곱테로 계속 하산길입니다. 내려가야 할 길이 저 아래 보입니다. 언덕을 넘은 길은 보이지 않지만 오늘 중엔 끝나는 길입니다. 쏟아지는 눈속에 가물거리는 길은 무서울 정도입니다. 계속되는 눈은 그칠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눈발이 조금 굵어지니 온통 눈 세상입니다. 히말라야 산사람이 되어 가는지 아이들의 말도 끊기었습니다. 긴 트레커의 행렬에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스틱으로 눈더미에 낙서를 남깁니다.
시계(視界) 제로, 침묵 산행!
예상 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게 목적지 곱테에 도착합니다. 눈비에 옷은 젖고 마음은 눅눅해집니다. 어두운 롯지 다이닝룸에 빼곡히 둘러 앉아 서로 눈만을 응시합니다.
1월10일 (화)
06:00 기상
06:30 식사
07:00 출발
곱테(3,430m)ㅡ타레파티(3,690m)ㅡ마긴고트(3,420m)ㅡ쿠툼상(2,470m)
타레파티까지는 약간의 오르막,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입니다. 어제 내린 눈이 거의 2,30cm에 육박합니다. 박 부대장님은 안전 산행을 거듭거듭 부탁합니다. 내리막길이라고 방심하다가는 사고로 이어지니 눈길의 안전 장비, 스패츠와 아이젠, 스틱을 챙겨 가자고 말입니다. 눈길 산행에 발은 무겁습니다. 방한모에 선글라스에 눈과 귀가 차단되니 감각이 무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실족 사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타레파티에선가 마긴고트에선가 아니면 그 중간 어디선가에서 잠깐 볼일 보러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아주 예쁜 화장실을 만났습니다. 네팔의 화장실이 다 그렇듯이 흰 도자기 변기에 물을 담아두는 파란색 플라스틱 물통, 거기에 손잡이가 달린 노란색 작은 물그릇 이렇잖아요? 제가 예쁘다고 한 건 변기였습니다. 이 집 것은 돌로 깎아서 만든 변기였습니다. 얼마나 예쁘던지요. 둘러친 판자는 서로 꼭 맞지 않았지만 조금씩 벌어져 있는 틈으로 밝은 빛이 줄줄이 평행을 이루며 화장실 안으로 비쳐 들었습니다. 알록알록 자연 조명까지 되어 히말라야 아름다운 화장실 품평회를 한다면 보나마나 일등상 감이었습니다.
점심은 덴뚝. 우리 수제비하고 똑 같습니다. 핀조 씨가 밀가루를 반죽하여 ‘뚝뚝 뗀다’고 하여 덴뚝이라고 재미나게 말해 줍니다.
전나무류 수목지대를 벗어나자 어안(魚眼) 렌즈로 세상을 보듯 이제 딴 세상이 열립니다. 먼 데까지 조망이 가능합니다. 네팔로 들어오는 비행기가 카트만두에 내려 앉을 때 보이는 굵은 산맥과 산꼭대기까지 올라 붙은 마을들이 이제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쿠툼상에 도착하여 짐을 넣고 나니 여기서도 먹거이 튀긴 것(팝콘)이 한 대야씩 나왔습니다. 막 튀겨낸 거라 맛이 좋았습니다. 해가 서산에 걸렸을 때 모두들 저녁 노을 찍기에 바빠졌습니다. 멀리 출렁이는 고산준령과 운해를 놓칠 수 없다며 카메라를 들고 서성거렸습니다. 황혼에 물든 산자락의 실루엣은 누가 찍어도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트레킹 시작할 때 맛있던 음식들이 끝날 때가 되어서 그런지 먹성이 한풀 꺾이고 남는 반찬들이 늘어갑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김 대장님이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깁스를 한 불편한 팔을 하고는 대원 못 미더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한달음에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카트만두에서 순다리잘까지는 차량으로, 오토바이로, 치소바니부터는 걸어서 왔다고 합니다. 박부대장님이 김 대장님에게 신고합니다.
신고합니다. 히말라야오지학교탐사대 28명과 딸린 식구와 일체의 장비를 2012년 1월5일 샤브르베시에서부터 동년 1월 10일 쿠툼상까지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아무런 사고 없이 대원을 인솔하여 왔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히말라야오지학교탐사대부대장 박종익. 충성!
말은 생략한 채 김 대장님과 박 부대장님은 서로 끌어안고 그간의 안부를 대신하였습니다. 어두운 저녁 난롯가에서 보인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눈덮인 험한 산을 넘어온 대원들과 아픈 몸을 하고 거꾸로 산길을 오르내리면 달려온 김영식 대장의 귀한 마음과 발걸음에 모두들 박수로 환영하였습니다. 나마스테!
1월11일 (수)
06:00 기상
06:30 식사
07:00 출발
쿠툼상(2,470m)ㅡ치플링(2,170m)ㅡ파티반장(1,830m)ㅡ치소바니(2,160m)
장산 선생의 구령에 맞춘 체조 후에 어제 박부대장으로부터 인계 받아 일정을 설명합니다. 내리막길 주의, 7시간 이상 산행, 호흡 조절, 자신의 건강 체크 하면서 내려가기....
마을 이름이 인상적입니다. 찰랑파티, 쿠툼상, 치플링, 파티반장, 치소바니.....점심은 사방이 유리창으로 둘린 정자식 근사한 식당 라마 게스트하우스입니다. 간판엔 컴퍼터블 앤 클린 레스토랑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곳에서 특별식 티베찬브레드 ‘란’을 주문했습니다. 아울러 김치볶음밥. 철돌이 연선생이 이 음식을 아주 좋아하여 무려 8장을 한 자리에서 뚝딱 해치웁니다.^^
김 대장님, 내려 오는 길에 네팔 주점을 보아 두었다며 그리로 안내합니다. 임시로 대나무로 발을 엮듯 만든 주막집에서 한 컵씩 창을 시킵니다. 막걸리와 흡사한 게 뿌연 색과 시큼한 맛이 정말 막걸리와 똑 같습니다.
마을을 지나 오르막길이 나타나자 리마 셰르파는 망설임 없이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빗물로 인해 움푹 패인 계곡길이었는데 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랜드캐니언의 축소판 같았습니다. 함께 오른 심피디는 이곳을 미니어쳐 촬영장으로 쓰면 제격일 거라고 귀뜸합니다. 거의 한 시간이나 그런 길을 걸어 오르니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힘에 벅찬 듯 의균이는 아예 큰숨을 몰아 쉬며 그대로 누웠다가 일어납니다.
멀리서 꿈틀거리는 운해를 보며 치소바니 도착했습니다. 오늘 저녁 이 치소바니 숙소가 이번 트레킹의 마지막 롯지입니다. 배정된 방에 올라가 보니 여기는 롯지가 아니라 정말로 호텔급으로, 이름은 치소바니(네팔말로 ‘차가운 물’이라는 뜻)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는 기분좋은 숙소였습니다. 꼭 일주일만에 떡진 머리에 물을 공급하며 그동안 등졌던 세속으로의 귀환 의식을 혼자서 거행하였습니다. 우리 방은 해가 뜨는 동향의 전망이 최고인 방이었습니다.
1월12일 (목)
06:00 기상
06:30 식사
07:20 출발
치소바니(2,160m)ㅡ보르랑반장(2,451m)ㅡ물카라(1,855m)ㅡ순다리잘(1,460m)ㅡ카트만두
출발 전 행동을 마치고 학생대원들의 특별체험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탐사대의 짐을 지고 나르던 포터의 힘든 형편과 수고를 얼마간이라도 느껴보자는 의미로 학생대원들이 그 짐을 대신 지고 가는 일입니다. 대나무 소쿠리로 만든 짐통, 도꼬를 어깨로 지는 게 아니라 이마로 버텨 짐을 지는 방식인데 네팔리 포터보다 덩치는 훨씬 큰 우리 학생들이 글쎄 그 짐을 이마로 지고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창환이, 진헌이, 두 손은 이마에 엮인 끈을 잡아쥐고 버티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두 발로 일어서긴 했지만 똑바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얼른 달려간 설캅스, 박부대장이 잡아 주며 겨우 내려 놓을 수밖에요. 금산 홍 선생은 예의 ‘안돼~~’라는 말로 소리치고^^.
치소바니는 바로 국립공원 ‘시바푸리(Shivapuri) 경계지역입니다. 숙소를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립공원 매표소가 나타납니다. 카트만두 북쪽에 있는 자연생태가 잘 보존된 이곳을 국립공원으로 정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2,483m의 시바푸리 산이 이 지역에 솟아 있기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되었고, 또한 수도 카트만두의 상수도원이 공원의 남쪽 끝 순다리잘 근처에 있기에 정부 차원의 관리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우리도 이 나라의 정부시책에 적극적으로 발맞추어 봅니다. ‘공원 지역 쓰레기 줍기’. 준비한 쓰레기 봉투에 널린 쓰레기를 하나하나 주워 담아 버립니다.
높은 산을 넘어온 우리들이 걷기에 아주 그만이었습니다. 잔잔하며 아기자기하고 숲속의 길들이 마냥 정다웠습니다. 널따란 공간이 허락되는 곳에는 여지없이 마을이 보였습니다. 열매 맺은 유채를 베어 말렸다가 멍석 위에 놓고 수확하는 풍경, 그 옆에서 비누 방울을 만들어 날리는 아이들, 밥그릇에 비눗물을 풀어 놓고는 녹이 슨 쇠파이프로 찍어 ‘후’하고 불어 날립니다. 내가 다가가 쇠파이프를 달래서 한번 부니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습니다. 편안하고 아늑한 시바푸리 국립공원을 통과합니다.
오늘 점심은 물카라. 물카라는 차량으로 빙 돌아가면 치소바니까지 20여 킬로미터, 우리처럼 걸어서 지름길로 관통하면 8 킬로미터 지점에 있습니다. 물카라 카마호텔 양지쪽에 마련된 식탁에서 라면떡국으로 트레킹 마지막 성찬을 즐깁니다. 마침 도착한 일본인 트레커 두 명을 우리 식탁에 초대하여 따뜻한 라면떡국 한 그릇을 함께 합니다. 카트만두에서 의류사업을 한다는 젊은 여자는 식사 후 우리 대원들 모두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맑은 물이 그득한 계곡이 나타났습니다. 여기가 어떤 데인가 둘러보는데 김 대장님과 핀조 씨, 상수원 지역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고 보니 물이 아주 맑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산악 지역의 큰물들은 모두 석회석 물로 희뿌연 색 두드콜라였는데 여기 물은 큰물고기가 헤엄치는 게 그대로 들여다 보이는 새파란 물이었습니다. 여름에 고사인쿤드 호수의 물빛이 이럴 거라고 상상해 봅니다. 이 물은 카트만두 시민의 상수도원이기도 하고 바로 수로를 타고 내리며 발전(發電)을 하는 다목적 수원(水源)이기도 하답니다. 공원 지역을 빠져 나옵니다. 날이 따뜻하고 좋으니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도시가 가까웠나 봅니다. 나들이옷으로 갈아 입고 나선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순다리잘. 우리 트레킹의 종점입니다. 사람과 오토바이와 버스가 엉켜 있습니다. 오만가지 소리에 귀가 멍합니다. 전세버스로 40분이면 카트만두에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오늘 날이 무척이나 좋은 오후 순다리잘에서 보름 동안의 가네쉬히말과 고사인쿤드 트레킹을 모두 마칩니다.
소설가 박범신은 히말라야에서 네 가지를 보았다고 썼습니다. 길, 사람, 햇빛과 바람, 마지막으로 설산.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속도를 다투지 않는 수많은 길과 본성을 잃지 않은 사람과 문명의 비곗덩어리를 가볍게 뚫고 들어와 내장까지 밝혀주는 투명한 햇빛과 바람, 마지막은 만년 빙하를 이고 있어도 결코 허공을 이기지는 못한 설산(雪山)이라고 했는데 보름 동안 나는 무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며 누구를 만났을까요?
이어서 소설가는 ‘행복하고 충만되기 위해 내가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행복해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어렴풋하게 찾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나는 무얼 깨닫고 무얼 찾을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가야 그때사 무얼 조금 보고 느끼고 깨닫을 수 있을 듯합니다.
*참가대원 인상기
김영식 대장님, 멋진 코스로 순례의 길을 잡아 이끄시고 꼭 필요한 정보로 이번 히말라야오지학교탐사대의 발자취를 귀하게 만들어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박종익 부대장님, 대장님이 자리를 잠시 비우셨을 때 부대장님의 빈틈없는 배역은 이미 준비된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는 훌륭한 역할을 스스로 해내실 분입니다. 친절한종민씨 김종민님, 늘 어려운 역할을 자청하시어 멋지게 해내십니다. 어린 학생의 보호자로 안내자로 친구로 인상을 심어놓았습니다. 장산 최장원님, 별명은 ‘만년청년’.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히말라야에 설산에 녹음되었고 어린 학생들의 귀감이 될 패기는 히말라야 준령에 어려 있습니다. 망치 박종웅님, 일을 쌓아 두지 못하는 단점은 있지만 늘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찰찰불찰 적반하장 고춧가루 박 망치, 깔끔하고 마스크 훌륭합니다. 이 상호님, 누구보다 네팔을 사랑하는 사람, 준비성이 아주 뛰어난 사회 선생님이라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분이십니다. 토꼬마님, 사진 속에서 제일 크게 웃는 선생님, 아이들과 함께 놀게 될 때 우리는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채영수님, 예성여고 가정 선생님. 중학생과 함께 서 있으면 중학생, 고등학생과 함께 서 있으면 고등학생이 되는 병아리 선생님. 남효희 원평중 1학년. 자유곡은 ‘나비야’ 정도. 청심국제중 이주현이와 함께 8차탐사대의 마스코트. 지용희 선생님, ‘동구밖 과수원길’ 노래가 나올 때부터 알아 보았습니다. 좌중을 휘어잡는 스토리텔링 솜씨에 모두들 귀를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毛生之後 初聞之言’부터 최신 중국유행가 ‘하이빠이 노이빠이’, ‘모가지에 알통 백이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와 함께 3층 로얄스카이라운지에 있다면 날 샐 각오를 해두어야 합니다. 권현진 선생님, 가다 보면 선두되는 우리 마을 부녀 회장. 산을 좋아하는 포지티브싱커로 항상 새로워 다 그녀를 좋아합니다. 철돌이 연철흠선생님, 우리 오지학교탐사대의 연예대장님. 누가 웃고 있다면 그 옆에 언제나 있는 분, 핀조 씨조차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걱정하는 따망족 어린이를 웃기고 울리는 놀라운 재주꾼입니다. 원선웅이, 친절한과 원영미팀장의 조카, 키가 훤칠합니다. 나중에 훌륭한 산악인이 될 꿈나무입니다. 제일 멀리 순천에서 올라오신 멋쟁이 김영채 선생님, 산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김대장님과 함께 큰일을 맡아 하실 한국적 동량임을 증명하는 지구과학 선생님입니다. 설상욱님, 미남의 산악인 캅스 광주의 인물이며 창환이 아빠입니다.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언어 구사력으로 어떤 분야라도 다섯 시간 이상 특별강의가 가능합니다. 청소년 문제나 산과 관련 주제라면 시간을 몇 시간 더 늘릴 수 있습니다. 백수 송충수님, 하얀 머리털 날리며 설산을 오르내릴 때 도인풍(道人風). 히말라야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상실님, 트레킹의 의미를 가장 잘 알고 계신 말없는 트레커. 전희진 청심국제고 1학년, 우리말보다 영어가 더 수월하다는 녀석. 붙임성도 좋고 인상이 좋아요. 이동준 부천의 중학교 2학년, 아직은 어린 학생이지만 이번 트레킹으로 몸과 마음이 청년으로 나가는 획기적 단초가 되었을 것입니다. 임의균, 독일 전차병 노래에 이어 러시아 코사크 기병대의 노래를 원어로 씩씩하게 불러대는 녀석. 일본 관광객을 만나더니 일본어로 스스럼 없이 주고받는 솜씨, 도대체 이 아이의 언어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순진무구한 소년, 괴짜로 알려져 어려운 때가 많았을 터이나 전도가 양양한 기대주입니다. 금산에서 오신 홍광일님, 털털하며 남과 잘 어울리지만 성격은 아주 급해 손해 볼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장산 선생의 소개로 우리 오지학교에 등록하신 산꾼입니다. 장길문 선생님, 이번 탐사대 대원 중 최고 연장자, 1940년 생이니까 일흔이 넘었지만 걷는 일에 관해서는 텍스트. 뚜벅뚜벅 빈틈없는 트레커로 세계 여러나라 여행이 취미랍니다. 전공은 영어. 이준희 충주시청 지역개발과에 재직 중 길게 휴가를 내어 네팔로 왔답니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까지 등정을 했다니 산을 아주 좋아하는 분입니다. 첫걸음에 의욕이 넘쳐 힘에 겨운지 고소 증세를 보였습니다. 강도규 선생, 강릉 출신의 수학 교사입니다. 김대장과 같은 울타리 학교에서 근무하는 관계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아직 걷을 준비가 덜 되어 힘든 산행을 계속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추억을 히말라야에서 받은 줄 압니다. 멋진 선생님. 이진헌, 전주고 3학년으로 히말라야 고사인쿤드로 졸업여행을 온 건실한 학생입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우리 히말라야오지학교탐사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심웅섭 청주케이비에스 피디님, 오지학교탐사대 주요멤버로 대상에 대한 감각과 터치가 훌륭합니다. 우리 탐사대를 외부에 알리는 최전방 지휘관입니다.
이상은 네팔리 이장 윤석주가 전하는 가네쉬히말과 고사인쿤드 2012년 1월 소식이었습니다. 나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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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적자생존이 절실히 느껴지네요 일정 ,에피소드,인물평등 꼼꼼 하네요
저도 메모하는 습관을 갖겠어요 이장님.
역시 적자생존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삶의 지혜인 것 같습니다. 적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글이십니다. 선배님의 여행기는 저에게 새로운 면을 보여주셨습니다.
윤석주 자문위원님, 사랑합니다.~~~
적자생존은 위대하다!!!!!! 적반하장 반성하라!!!!! 그동안 훌륭한 글 올리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걸었던 히말라야 그 배경에
철돌이 영채 토꼬마 샘이퐁퐁 적반하장 의균이.......
그 캐릭터가 뿜어내는 진한 배역이 어울어져
멋진 여행이 완성되었나 봅니다.^^
하이고 참 대단하십니다^^ 읽으니 새록새록 그때 느낌이 살아나네요.
늘 새롭게 사시는 모습, 너무 보기 좋습니다.
읽기만 하고 댓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세심한 기록과 검토를 거친 살아있는 보고서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