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20)
영원히 사는 것을
본문 : 계21:1-7
고대 그리스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벽 빛을 다스리는 여신
‘에우스’가 있었는데,.....
에우스가 트로이 왕자였던
티토니우스를 보고 반해
그를 납치하게 되었습니다.
그 둘은 사랑하게 되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죽지 않는 신이고
티토니우스는 인간이기에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우스는 신들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제우스에게 가서....
“자신의 남편 티토니우스가
영원히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제우스는 그녀의 청을 들어 주어
티토니우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매우 행복했지만,....
에우스는 신이기 때문에 늙지 않았지만....
티토니우스는 사람이기 때문에
점점 늙어갔습니다.
40년 50년 60년이 흐르면서
얼굴에 흰 머리카락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굵은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허리가 굽어졌습니다.
몸은 바짝 말라 볼 품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에우스는 후회를 하였습니다.
제우스에게 소원을 말할 때
한 가지를 빠뜨린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오래 사는 것만 소원했지.....
병들지 아니하고
늙지 아니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부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에우스는 남편 티토니우스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방에 가두었고......
한 동안 ‘에오스, 에오스’하는
부르는 구슬픈 소리가
이어지더니 결국 매미로
변해버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이런 신화로 나타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은 결국 죽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권력을 지니고
천하를 호령했던 진시황도
늙어죽지 않기 위해 사방으로....
‘불로초’를 구하고자 했지만
결국 늙어 죽었습니다.
성경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고백이 무엇입니까?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예, 성경은 분명히 ‘영생’에 대한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생’,
곧 영원히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영생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각 종교마다 제각기 이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해답을 줄려고 노력을 합니다.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
내 것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윤회’라는 말로
영생을 설명하려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으로 다시 환생하기도 하고,
짐승이나 벌레로 환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살생을 금하는 것입니다.
돼지가 할아버지일수도 있고,
닭이 증조 할아버지일수도 있고,
개가 고조 할아버지도 될테니
함부로 살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 들어온 쥐 새끼나
뱀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 집과 연관된 식구나
친척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를 비롯한 세상의 종교들은
영혼 불멸설로 영생을 설명하려 합니다.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세상을 떠돌아 다닙니다.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유언을 합니다.
“아들아 내개 내 재산을 전부 물려줄테니
내 제사를 잘 지내라.”
그리고 제사 때마다 밥 얻어먹으러 옵니다.
길어야 삼대를 넘기기 힘듭니다.
겨우 5-60년 얻어먹으면 잊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영혼불멸설은 ......
기독교의 영생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사죄와 몸의 부활이 전재된 영생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죄 사함이 없는 영생은 참된 영생이 아닙니다.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영생은
영생이 아닙니다.
짐승이나 벌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또 영혼만이 자연적으로
영생하는 영혼불멸도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의 불멸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몸이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몸을 능히 변화시키셔서
썩지 않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를 받을 것을 믿습니다.
완전히 질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만 변화되느냐?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변화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변화시키실 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새 하늘과 새 땅”이요,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릅니다.
<계21:1-2>
1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5-7절>
5절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절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벧후3:10-13>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렇습니다.
그곳은 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새 세상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된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얽매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죄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4절>
3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담과 하와가 죄를 이은 이후로
인간에게 주어졌던
모든 고난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새롭고 의로운 존재로 영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3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성경이 가르치는 영생은,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이 변화된 몸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루할 틈조차 없습니다.
아니 지루하다는 개념조차 없는 곳입니다.
고통도, 눈물도, 후회와 탄식도 없는
기쁨과 찬양과 감사만 있습니다.
<여기서 누리는 영생>......
그런데 성경은 이 영생을
죽은 다음에만 누리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누리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서 얻었다는 말은 과거사입니다.
이미 얻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이미 영생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개그 콘서트 - “누려~”).
이호운 목사님께서 찬송가 436장에서 쓰신
가사처럼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사십시다.
“나이제 주님이 새생명 얻은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생명 내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안에 살리라.”
<영생의 자격>.....
영생의 자격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알다’라는 말의 히브리말 ‘야다’는
지식적인 앎을 넘어서는,
체험적인 앎을 가리킵니다.
그 이유는 이무리 소중한 것이 있어도
알지 못하면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귀한 보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면 한갓 돌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딛1:2-3>
2절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절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11:25-26>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단순히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으로
생각하지 말고....
신앙적 사건화(faith event)해야 합니다.
신앙적 사건화 하지 않으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사도신경의 마지막이 영생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이렇게
끝맺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종착역입니다.
최대의 목표입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이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낚시꾼이 제일 아쉬울 때는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가 아닙니다.
월척을 다 잡았다가 놓쳤을 때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성도들을 이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이 영생을 확신한다면
그 어떤 고난도 우리를 믿음에서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의 소망을 품고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영생의 소망을 품고 믿음을 지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