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6:1-11
찬송가 397장 “주 사랑 안에 살면”
첫 소산을 중앙 성소에 바침(1~4)
신명기 26장은 신명기 4장 44절부터 28장 68절까지 이어지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 부분에 해당하며, 오늘 살펴볼 1절부터 11절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 적용 부분으로, 농사 지어 얻은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며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한 곳에 정주하여 자기 땅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푸르른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면서 소와 양을 키워, 먹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소와 양을 키우는 일을 아예 멈추지 않겠지만 가나안 민족들이 그랬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가도록 삶의 형태를 변화시켜 나가야 했습니다. 그 땅에 정착하자마자 먹고 살아가는 주된 방편이 변화될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바뀌는 삶의 양식에 따라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방식도 새로워져야 했습니다.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시는 땅은 이스라엘이 정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서 얻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도 우리 힘으로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터요, 가족이며, 심지어 나에게 주신 재능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은유로 달란트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주이십니다.
이 전제에 대한 동의가 있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아래에서 살아간다는 동의 없이는 절대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처음 토지 소산을 거둔 후에,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즉 중앙성소로 가서 제사장에게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중앙 성소는 처음에는 실로였고, 다윗 이후로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모세가 이토록 중앙 성소를 강조하는 까닭은 여러 곳에 흩어져 여호와를 섬기게 될 경우, 가나안 토착 종교의 영향으로 그 예배 자체가 변질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절을 보면,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나아가 자신들이 수확한 첫 곡식을 제사장에게 바칩니다. 바치면서 선포합니다. 일종의 선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약속의 땅에 이르렀고, 정착했고, 처음 농사 지어 얻은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추수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풍요로움을 제공해주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처음으로 햇곡식을 얻은 그 자체가 감사의 제목이 아니라 자신의 조상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신 데 대해 감사하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단순한 추수의 기쁨을 올리는, 해마다 얻게 되고 열게 되는 초막절과 같은 추수감사의 제사가 아닌, 구원의 첫 걸음으로, 가나안 땅에 정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감격을 첫 곡식을 드림으로 표현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표현을 여섯 차례에 걸쳐서 사용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변화했고, 그에 따른 생활 양식도 바뀌었기 때문에 이런 외적인 환경의 변화에 발 맞추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서도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에 맞서 때로는 현장예배를 중단해가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실내 마스크 지침도 의무가 아닌 권고가 되는 환경의 변화에 맞게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우상은 바로 안락함. 편안함입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기력이 쇠하고, 또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 외에 일상생활은 이전처럼 하면서도 예배는 온라인을 고수하는 분들이 있다면,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는지,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신실하게 함께하신 하나님께 대해 감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스라엘은 이전에 그 땅을 차지했던 가나안 부족들과는 출발부터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민족들은 농사의 신 바알이 물과 땅을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땅을 주시고, 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신명기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같은 땅을 디디고 살아가면서도, 누구를 바라보고 섬기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 세계관의 첫 단추로, 모세가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첫 수확물을 가져와 예배하면서 감사할 것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5~9)
(5-9)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자기 고백이 이어지는데, 바로 자기 조상들의 미천함과 그럼에도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고백합니다. 자신의 조상이 방랑하던 사람, 땅 한 뼘 없이 떠돌았던 아람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여기 아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아람 지역에서 머물렀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애굽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번성한 민족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방랑하다로 사용된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죽어가는’, ‘길을 잃은’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 심각한 기근으로 기본적인 생존조차 위협 받았던 야곱 일가의 위태로웠던 상황을 표현합니다.
그렇게 애굽에 안착했던 이스라엘이 애굽의 억압과 학대로 신음하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첫 수확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 이 모든 고백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선물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점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점, 한 점은 의미 없는 것 같지만 수많은 점을 찍어 결국 화가가 의도하는 형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오기까지, 기반 없이 그 땅을 일구고 농사 지어가며 첫 수확을 하나님께 가져오기까지 하루도 쉬운 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거둔 날 돌이켜 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역경, 견뎌야 했던 아픔, 그럼에도 힘을 내어야만 했던 어려웠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보니 어느새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확의 기쁨을 가지고 서있었던 적 있지 않습니까? 그 수많은 날들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베푸신 은혜가 참으로 놀라웠다고 고백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을 건지셨던 것처럼 죄와 사망 권세 아래에서 구원의 여망이 사라져버렸던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는 동안 신실하게 함께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들이시는 동안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신실하게 함께해주십니다.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할 수 있는 까닭은, 과거 애굽에서 노예로 지냈던 삶의 비참함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 권세 아래에서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의 막막함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비참함 속에서 기진하여 일어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던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지금까지 내 삶을 인도해오신 하나님,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사가 있으십니까? 감사를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흔적을 아무것도 아닌 듯 취급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감사를 기쁨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10~11)
(10-11)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의 제물을 사회적인 약자들, 본문에는 객, 곧 나그네만 나와 있으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처럼 의지할 대상이 없는 사람들과 나누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늘 추가되는 것이 레위인들,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웠던 레위인들과도 나누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는 사회적인 약자를 늘 돌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정의를 베푸는 그들을 향해 손을 펴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4장 같은 곳에서도 과부의 겉옷을 저당 잡았다고 해도 해 지기 전에 되돌려주라고 말씀하시는 등, 이들의 곤고함과 궁핍함을 더하게 만드는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풍요는 그들만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라고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성장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눈물 흘리고 어려운 사람들이 없는지, 이 지역 사회 속에서 말씀의 등대일 뿐만 아니라 어려운 삶을 지속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손과 발로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주신 것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기꺼이 나누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처음 거둔 곡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또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섬겨야 할지 늘 고민하게 하옵소서. 육신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버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변화가 우리 가운데 필요합니다.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날마다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늘 기억하게 해주셔서, 겸손하게 하시고 늘 주신 것으로 감사하는 일상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풍성하게 주신 것을 나눌 넉넉한 마음 주셔서 온전한 주님의 손과 발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을 기경해주시고, 옥토 같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가나안 땅에서 처음 얻은 곡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2.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듯이, 나를 인도하신 과정에 대해서 써보세요.
3.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나그네와 레위인과 더불어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오늘 나는 어떻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4.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었는데 이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하는 신앙의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나는 이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