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서산 79코스 제1부
대산버스터미널-서산수협-대산정형외과-
-큰매남골-작은매남골-삼호아파트(틀목)-
대산5리마을회관-각골소류지-붉은부리들-
롯데케미칼사택-영자모골입구-김홍욱묘역-
먹수지-화곡저수지수로-화곡1리마을회관
2023년 2월 21일
1.옥녀봉 김홍욱 묘역과 삼길산 평신진
두루누비에서 서해랑길 79코스를, '조용한 숲길과 고즈넉한 마을길을 지나 풍부한 서해의 해산물을 만날 수 있는 코스'라고 소개하며,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며 낚시꾼들이 많이 모이는 곳인 '삼길포항'과 '정박 중인 배 위에서 어부들이 갓 잡은 생선으로 뜬 회를 먹을 수 있는 '삼길포선상어시장'을 관광 포인트라고 안내한다. 시점은 서산시 대산읍 대산리 대산버스터미널, 종점은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서산아라메길관광안내소 앞이다. 거리 12.2km, 소요시간 4시간, 난도 보통이라고 한다. 주요 경로는 '대산버스터미널 - 3.4Km - 롯데케미칼사택 - 3.1Km - 화곡1리마을회관 - 1.5Km - 화곡어린이집 입구 - 2.85km - 봉화대 입구 - 0.45km - 전망대 - 0.9Km - 아라메길관광안내소'이다. 관광 포인트로 삼길포항과 삼길포선상어시장을 강조하였지만, 실제로 탐방하여 보니 길손의 눈에 더 감격적인 곳들이 가슴에 큰 물결을 일으켰다. 대산읍 대산리의 까딱산, 매남골, 몰니산, 대로리의 붉은부리들, 물안지, 김적&김홍욱 묘역, 화곡리의 먹수지, 드넓은 화곡1리 들녘, 삼길산, 평신진 터, 삼길나루 벚꽃길 등이 지금도 가슴에서 출렁인다. 비바람에 고생하였지만 아름다운 우리 국토의 서해랑길 79코스를 2부로 나누어 기록한다.
제1부 : 대산버스터미널 대합실에서 30여 분 동안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 뒤 버스터미널 앞 서해랑길 79코스 시작점 표지판 앞에서 서해랑길 79코스 탐방길을 출발한다. 서해랑길 78·79코스 안내도는 시작점 표지판과 떨어져서 버스터미널 위쪽 서산농협 옆에 세워져 있는데, 그 이유는 터미널 입구가 사람들이 붐비기 때문에 안내도 설치 장소로 부적합하여 한가한 곳에 설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지역이 대산읍 중심지 지역으로 관공서와 교육 시설들이 밀집해 있다. 대산읍 중심지는 대산1리와 대산6리 지역으로 북쪽의 까딱산과 남쪽의 망일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대산1리 지역은 까딱산 아래에 대산행정복지센터와 대산초등학교, 대산6리 지역은 망일산 아래에 대산 중·고등학교를 품고 있다.
서해랑길은 서산수협 앞에서 정자동1로 횡단보도를 건너 국도 제29호선 충의로 서쪽 보도를 따라 북진한다. 서쪽 지역에는 대산지구 한성필하우스 아파트 단지 고층빌딩숲이 솟아 있다. 정자동3로 앞 충의로 서쪽 보도에서 충의로의 횡단보도를 따라 동쪽 보도로 건너가 대산정형외과 앞으로 이어간다. 대산정형외과 맞은편 충의로 서쪽 보도에는 대산농협과 그 부속업체 농협주유소와 하나로마트 등이 자리한다. 79코스 초반 탐방에서 길손의 눈에는 대산지구 한성필하우스 아파트 단지, 대산정형외과, 그 맞은편의 대산농협과 부속업체이다. '시작이 반'이듯이 출발지에서 이곳까지 오면 낯선 탐방길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사라지고 가야할 탐방길이 그려진다. 아쉬움이 있다면 출발지에서 너무 허겁지겁하여 대산읍행정복지센터와 대산초등학교가 있는 대산1리 중심지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다. 그쪽 방향으로 건너갔다가 충의로의 동쪽 보도를 이용해 북진하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산정형외과 입구 위 충의로에는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이정목 오른쪽 들길로 나가 충의로의 첫 번째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대산가구백화점 언덕으로 오르고 다시 두 번째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충의로의 삼호아파트(틀목) 버스정류소 앞으로 이어간다. 이곳까지 오는 들녘은 법정리 대산4리이며 행정리 매남리(梅南里) 지역으로 큰매남골, 작은매남골이라 이르는 것 같다. 이 매남리 들녘은 자연 용출수의 수량이 많아 날이 가물어도 가뭄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에 전해 내려오는 '매남리 쌀바람' 이야기는 공동체 삶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어느 해 모내기철에 서산 일대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농민들은 모내기를 하지 못하여 가뭄으로 시름하자 고을 원님은 기우제를 지내기로 하였다. 그때 매남리의 한 농민이 건조한 북서풍인 하늬바람이 불어오자, “쌀바람이 불어온다.”고 좋아하였다. 매남리는 지하수가 많아 물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농민의 말은 물 걱정을 하고 있는 많은 농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원님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만 괜찮으면 좋다고 하는 이기적인 농민을 불러들여 볼기를 치도록 하였다." 공동체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매남리 농민의 이기적인 태도는 모두의 마음 속에 잠복해 있다. 그것을 표출하느냐 않느냐가 문제이다. 그러나 자신이 남보다 나은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남의 아픔을 진실로 제 아픔처럼 공감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을 때 공동체는 평화와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구현한다.
충의로의 삼호아파트(틀목) 버스정류소 앞에서 충의로 동쪽 보도를 따라, 대산읍 대산4리(매남리) 표석이 세워져 있는 대산4리 마을 입구를 지난다. 이 지역을 매남리(梅南里) 작은매남골이라 이르는 것 같다. 이곳에서 충의로 동쪽 보도를 조금 더 따라가면 대산5리 마을회관 입구, 이곳에서 서해랑길은 충의로와 헤어져 오른쪽 대산5길로 진입하여 대산5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이어간다. '꿈과 희망이 살아있는 대산5리 마을' 표석과 마을회관&경로당을 지나면 앞쪽 멀리에 가야할 대산읍 대로리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빌딩이 솟아 있고, 왼쪽으로 서쪽에는 망일지맥의 몰니산이 구름 속에서 모습을 보인다. 망일지맥은 78코스 출발지인 도성3리 마을회관 가까이에 있는 부성산과 78코스 환성3리 마을의 망뫼산, 대산읍 대산리 망일산과 몰니산을 이어서 가로림만 대산읍 오지리의 자용산을 거쳐 벌천포구 오배산에서 맥을 다하고 바다에 풍덩 빠진다. 망일지맥 산줄기를 산행하지 못했지만 서해랑길을 탐방하며 망일지맥의 산봉들을 살피니 서산 지역의 지세와 위치를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대산읍을 대표하는 명산은 망일지맥의 최고봉 망일산이다.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 선생이 망일산 백옥대에 올라 읊은, '登望日山白玉臺(등망일산백옥대, 망일산 백옥대에 올라)'를 음미해 본다. "白玉臺高近紫冥(백옥대고근자명) 백옥대 드높아 하늘에 가깝고/ 俯看南極壓滄溟(부간남극압창명) 굽어보는 남극 푸른 바다 눌렀구려/ 雲收大野峯巒出(운수대야봉만출) 넓은 들에 구름 걷히니 산봉우리 드러나고/ 潮落平沙島嶼青(조락평사도서청) 조수 물 나간 평시에는 섬들만 푸르더라/ 萬里乾坤雙轉穀(만리건곤쌍전곡) 멀리 건곤에는 해와 달이 뜨고 지고/ 百年身世一浮萍(백년신세일부평) 백년살이 이 내 몸은 하나의 부평초라/ 乘風欲訪蓬瀛去(승풍욕방봉영거) 바람 타고 신선이 사는 곳 찾아가려다가/ 回首人間夢已醒(회수인간몽이성) 인간에 머리 돌려 꿈을 깨었더라" 이 시를 통해 대산읍 지역이 더 친숙해지고 망일산에 올라서 넓은 들, 바다와 섬을 조망해 보겠다는 욕망이 솟아난다. 이 시의 핵심은 결구에 있는 것 같다. 신선이 사는 이상세계를 찾아가려는 꿈을 깨고 인간 세상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것, 이것이 학주 선생의 핵심 사상일 것이다.
서해랑길은 목쟁이골 갈림길에서 대산큰빛성결교회와 엘림어린이집으로 가는 오른쪽의 대산5길과 헤어져, 왼쪽 목쟁이골 들녘의 농로를 따라 롯데케미칼사택아파트 방향으로 이어간다. 목쟁이골을 지나면 각골소류지가 나오는데, 각골소류지 너머 언덕에 포도원교회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주택들이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농가들일까? 길손의 눈에는 포도원교회와 신앙인들이 공동으로 거주하는 주택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이 위치하는 걸 보면 개인들이 이곳에 주택을 신축하였거나 주택업자가 건축한 주택을 개인이 분양받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길손은 짐작만 하며 수로 옆 농로를 따라 대산리에서 대로리로 넘어간다. 앞쪽에서는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가 손짓하고 그 왼쪽 구릉지에서는 단성목장의 초지가 비바람 속에서도 푸르게 빛난다.
대산읍 대로리 붉은부리들이 드넓다. 들길에 비바람이 몰아쳐 우산을 받치기가 힘들다. 드넓은 대로리 붉은부리들, 길손은 비바람 속을 홀로 걷는다. 인생은 어차피 홀로 견뎌야 하는 것, 길동무가 동행하면 미지의 길을 가는 두려움을 덜 수 있겠지만 결국은 홀로 버텨내야 하는 것, 가도가도 끝없을 것 같은 붉은부리들 들길에서 길손은 목놓아 외쳐보고 싶다. 사막 같은 메마른 도시의 복판에서 떨어져 나와 비바람 몰아치는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겨울 들판에서 삶의 뜨거움이 복받치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비에 젖는 새하얀 곤포사일리지보다 더 또렷하게 들판에서 걸어온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 없어도 지금 그대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그대여, 험한 세상살이 끝나는 날까지 나, 당신과 동행하려고 합니다." 환각의 소리가 붉은부리들에서 메아리친다.
앞쪽의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는 가까운 듯,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듯, 멀게만 느껴진다. 그 서쪽에는 몰니산과 남북으로 늘어선 북쪽의 둥근산이 낮지만 의젓하게 동쪽의 붉은부리들을 내려본다. 둥근산 아래에 대로리 명지마을이 있으며, 둥근산 능선 오른쪽 비탈면에 삼국시대 백제고분인 대로리 명지고분(大路里明智古墳)이 있고, 둥근산 정상에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유적이 있다고 한다. 이 주거유적은 대로리 명지 지역이 인간 삶의 자취가 유구함을 증명한다. 그런데 명지의 한자가 불분명하다. 明智가 맞을 것 같은데 明知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아마 明知는 明智의 오기(誤記)일 것이다.
롯데케미칼사택 서남쪽, 명지마을 아래에는 물안지(池), 명지지(明智池)라고도 불리는 대산저수지가 있다. 대산저수지는 농업 관개용 2종 저수지로 1976년 1월 1일 착공하여 1978년 1월 1일 준공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역 도로명은 물안1로를 중심으로 물안1길, 2길, 3길, 4길이라고 명명된다. 이 지역에서는 물안, 물안지(池)를 중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산저수지의 원래 지명은 물안지였을 것이며 긴요한 농업용수 공급처로서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물안과 물안지는 무슨 뜻일까? 그 지명 유래가 궁금하다. 물안은 단일어일까? 물과 안의 합성어일까? 합성어라면 물안은 물의 안쪽이라는 뜻이 되는 듯. 이 물이 바다를 나타낸다면 이 물은 둥근산 서쪽의 가로림만 바다인지, 붉은부리들 동쪽의 대호지만 바다인지 분명히 구별할 수 없다. 다만 대로1리 지역이 가로림만 바다에 가까이 있어서 가로림만 바다의 안쪽이라는 의미의 물안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물안지의 물은 수로를 통해 대호지만 바다 근처의 농지에 물을 공급한다. 대로리는 가로림만과 대호지만에 둘러싸인 대산읍 지역 중에서 내륙 안쪽에 위치한다.
물안지를 올려보며 물안지에서 흘러내리는 수로 옆 농로를 따라오르다가 롯데케미칼사택 앞 수로의 다리를 건너 물안3길을 따라간다.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담벽을 오른쪽으로 돌아 물안3길을 따라가며 동쪽을 바라보면서 다시 현 위치를 가늠한다. 대로리 들녘이 드넓게 펼쳐지고 그 너머는 대산읍 운산리 지역으로 대호지만에 접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운산리 지역은 대호방조제 축조로 인해 조성된 대호지와 접하고, 그 아래쪽은 대산읍 화곡리 대호방조제와 삼길포항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비구름 내려앉은 대로리 들녘은 봄맞이 노래를 부르는 듯 겨울배웅을 탄식하는 듯 환희와 비애가 바람에 뒤섞여 소용돌이치며 대호지 방향으로 날아간다.
물안3길을 따라 영자모골 고개를 넘으면 옥녀봉이 방긋이 솟아 보인다. 두루누비 79코스 소개와 79코스 안내도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79코스 탐방길의 주요 탐방지인 김적&김홍욱 묘역은 옥녀봉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영자모골 입구에는 태양광발전소가 조성되어 있고, 영좌동길을 따라 영자모골 방향으로 이어가면 푸른 초지가 반짝이는 단성 농장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영자모골 입구에서 물안3길은 끝나고 도로명 대로화곡길이 시작된다. 대로화곡길은 화곡1리 마을회관 입구까지 이어지고 그곳에서 도로명을 반곡길에 넘겨준다. 대로화곡길을 따라 김적&김홍욱 묘역 앞에 도착, 숨을 고른다. 김적과 김홍욱이 누구일까?
김적&김홍욱 묘역은 조선시대 문신인 김적(金積, 1564~1646)과 김홍욱(金弘郁, 1602~1654) 부자(父子)의 묘소와 김홍욱 신도비가 있는 구역이다. 김홍욱은 경주 김씨 학주공파의 중시조로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5대조이자, 영조 때의 영의정 김흥경의 고조부이며,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김홍욱의 집안에서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경주 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고 한다. 김적은 관직에 나갔지만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하여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아들 김홍욱이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김홍욱과 친분이 있던 효종이 김적에게 하사한 가옥이 경주 김씨 학주공파 종가가 되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김적과 김홍욱 묘소에 올라가고 싶지만 주어진 7시간 30을 탐방안내팀에서 1시간이나 앞당겨서 묘소에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묘역 입구 쉼터에는 최근에 세운 학주 김홍욱 선생 연보비와 시비 및 묘비와 신도비, 설명안내판이 서 있고, 묘역 입구의 비각(碑閣) 안에 김홍욱 신도비(金弘郁神道碑)가 모셔져 있다. 신도비 비액(碑額)은 '증이조판서시문정김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諡文貞金公神道碑銘)'이라고 전서로 새겨져 있다. 김홍욱은 황해도 관찰사였던 1654년(효종5)에 소현세자(효종의 형)의 부인인 회빈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줄 것을 효종에게 상소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의 강직한 절개를 높이 여겨 1718년(숙종44)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이듬해에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諡號)까지 받게 되었다. 묘역에 얽힌 사연은 눈물겹다. 아버지를 사랑한 홍욱은 아버지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아버지 김적 곁에 묻혔고, 아버지 홍욱을 사랑한 맏아들 김세진(金世珍)은 아버지 사후 20년이 흘러서 1674년 덕원에 유배 중이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찾아가 비문을 받아 두었다가 1772년(영조48) 5세손 김구주(金龜柱)가 세웠다. 여기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우암 송시열의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공(金公)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에서 서문을 생략하고 그를 기리는 사언시 번역문을 읽어 본다.
공(公)을 위해 피눈물을 닦으면서 공의 사적을 이렇게 적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강직했던 공이여/ 재주가 높고 뜻이 고결했네/ 마음에 충효를 간직하여/ 힘써 옛 철인을 따랐네/ 병자년과 정축년에/ 나라가 위태로웠는데/ 공은 바로 그때/ 사초(史草) 쓰는 게 직책이었지만/ 강개한 마음이 복받치어/ 실성한 사람 같았다네/ 격렬한 충성심은/ 말을 하면 사리에 맞아/ 선비들이 그를 따랐고/ 명망과 여론은 갈수록 중하였네/ 적신이 국권 잡자/ 하늘을 덮을 듯한 그 세력에/ 너도 나도 그에게 달려갔지만/ 공만은 퇴연하여/ 거세게 흐르는 물속에/ 우뚝 솟은 기둥이었네/ 세상이 다 눈 흘겨도/ 공은 더욱 돌아다 보지 않았고/ 성조 초기에 와서/ 두 원로가 있었는데/ 공은 그들을 보좌하여/ 세도에 도움을 주었으니/ 밝고 밝은 성주께서/ 공을 왜 모를까마는/ 말 한마디가 뜻을 거슬러/ 은의가 끝맺음 못하였네/ 공이야 또 무엇을 걱정하랴/ 사람들의 공의가 있고/ 해와 달도 바뀌어서/ 그때 그 시절 아닌 것을/ 왕의 말씀 따사로워/ 하늘같이 인자하시니/ 오직 이 무덤 앞의/ 초목도 영화 머금어/ 천추만세 두고두고/ 고이 길이 잠드시리" 한국고전번역원, 양홍렬 번역, 1982
김적&김홍욱 묘역 입구에서 먹수지골 언덕을 넘어 먹수지골로 내려간다. 예전에 이곳은 '묵수지(墨水池)'였는데 한자어 '묵(墨)'을 먹으로 발음하여 먹수지라고 불린다. 먹수지골은 대산읍 화곡1리 지역이다. 화곡1리 지역은 드넓은 평야를 이룬다. 그 중앙을 화곡저수지의 수로물이 가로지른다. 화곡2리는 화곡저수지 위쪽으로 현대오일뱅크사원아파트가 있는 곳이고, 화곡3리는 삼길포항과 대호방조제가 있는 지역이다. 대산읍 화곡리는 화곡 평야와 서해 바다 대호지만 만입부, 들과 바다 모두를 차지하고 있는데, 대호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대호지만은 대호지가 조성되었다. 화곡리를 대표하는 명승지는 삼길산과 삼길포항이다. 서해랑길 79코스는 삼길산 자락의 삼길나루 벚꽃길을 따라 삼길포항으로 내려간다.
대로화곡길을 따라 화곡평야 들길을 걷는다. 비는 그치지를 않는다. 비구름은 들녘을 덮어 주고 삼길산 머리를 감싼다. 그동안 들길을 거쳐온 탓인지 들길은 드넓지만 홀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앞쪽에는 삼길산 오른쪽에 서산수골프&리조트 건물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동화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건물 상단부이다. 삼길산 아래에는 화곡1리 마을이 펼쳐져 있다. 화곡저수지에서 흘러오는 수로의 다리를 건너 반곡길 갈림목에 이른다. 오른쪽 반곡길은 서산CC옆 '삼길포7로'로 이어져 대호지와 대호방조제로 나갈 것이다. 드디어 화곡1리 마을회관 입구에 이른다. 대로화곡길은 이곳에서 끝나고 모든 도로명은 반곡길이다. 이곳이 화곡1리 반곡(盤谷)골이며 오른쪽 지역에는 조선시대 때 평신진(平薪鎭)이 설치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평신경로당이 있으며 이곳을 평신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평신진(平薪鎭)은 1711년(숙종 37)~1895년(고종 32)에 충청도 북서부 해안을 수호한 진(鎭)으로, 세곡미 등 각종 물자를 운송하는 선박의 보호가 평신진의 주요 임무였으며, 목장(牧場)을 관리하는 임무도 있었다고 한다. 평신진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위치가 바뀌었다. 가장 먼저 1701년(숙종 27)에는 대산읍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항금산(亢金山) 아래에 설치되어 약 10년간 운영되다가 망일산(望日山) 아래로 옮겨졌다. 이후 1772년(영조 48)에 다시 삼길산(三吉山) 아래로 옮겼다. 망일산 아래가 바로 대산읍 내 구진(舊鎭)이며, 삼길산 아래가 지금의 대산읍 화곡리 평신진 터이다. 평신진은 1895년 행정 구역 개편과 육로 수송의 발달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지금 사라진 평신진이 있던 평신마을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꺾어 화곡1리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화곡1리 마을회관 옆 뜰에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영세불망비,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는 공덕비에 길손은 큰 관심을 두지 않지만 비석들을 잠깐 살폈다. 그런데 이들 비석에 대한 설명안내판이 없다. 탐방을 끝내고 알아보니 이 비석들이 화곡리비석군(花谷里碑石群)이라 소개되어 있다. 3기는 개항기인 고종 연간 1878~1884년에 세워졌으며, 1기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세워졌다. 이 비석들은 19세기 대산읍의 지역 역사를 복원하는 데 참고 자료로 활용되며,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대산읍에서 벌인 개간·개척 사업의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고 한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거리 : 12.35km 중 6.6km
전체 탐방시간 : 2시간 50분 중 1시간 26분
대산버스터미널 앞 가로등 기둥에 서해랑길 79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오른쪽 산은 까딱산이다.
서해랑길 79코스 시작점 표지판과 함께 서해랑길 79코스 탐방 출발을 기념한다.
서산버스터미널 위쪽 서산수협 오른쪽 앞에 서해랑길 78·79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건너편에 까딱산이 보인다.
서해랑길 79코스는 거리 12.2km, 소요시간 4시간, 난도 보통이며, 서산아라메길 삼길나루길 구간과 잠시 동행한다.
서해랑길 79코스의 경로는 대산버스터미널, 대산5리회관, 롯데케미칼사택아파트, 화곡어린이집, 삼길나루길, 삼길포항이다.
대산버스터미널 앞 가로등 기둥에 서해랑길 79코스 시작점 표지판, 서산수협 앞 왼쪽에 서해랑길 78·79코스 안내도가 있다.
서산수협 앞 정자동1로 횡단보도를 건너 국도 제29호선 충의로를 따라 서북진한다.
대산버스터미널과 서산수협 앞에 서해랑길 79코스 시작점 표지판과 서해랑길 78·79코스 안내도가 각각 설치되어 있다.
국도 제29호선 충의로를 따라 대산5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국도 제29호선 충의로 건너편 보도를 따라오다가 횡단보도를 건너 대산정형외과 앞쪽으로 건너 왔다.
충의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대산정형외과 앞쪽에서 맞은편의 서산대산지구 한성필하우스 아파트 단지를 바라본다.
국도 제29호선 충의로 서쪽 보도에 대산농협과 농협주유소가 자리한다.
충의로의 대산정형외과 버스정류소에서 서해랑길은 충의로 오른쪽 아래 매남길을 따라 들녘으로 내려간다.
국도 제29호선 충의로 동쪽에 대산정형외과와 녹십자약국이 자리하고 있다.
대산읍 대산리 243-33 지역, 대산5회관 1.1km, 종점이 삼길포항 11.8km 지점이다. 오른쪽 매남로를 따라 들녘으로 내려간다.
매남길에서 왼쪽 충의로 지하통로 입구를 지나 건너편 대산4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대산가구점 방향으로 이어간다.
매남로에서 대산4길로 들어와 오른쪽 뒤를 바라보면 까딱산이 부드러운 능선을 그린다. 까딱산 오른쪽 아래에 서산시 대산읍 대산리 중심지가 자리하며 79코스 출발지인 서산버스터미널과 서산수협도 그곳에 있다.
법정리 대산리에서 이 일대는 행정리 매산리에 속하며, 큰매남골과 작은매남골이 있는데, 까딱산 북쪽 지역인 이곳은 큰매남골이라 이른다. 중앙 뒤쪽은 지새고개이며 그 너머는 대산읍 운산리 지역이다. 이 일대는 지하에 수원이 풍부하여 가뭄에도 피해가 없다고 한다. 극심한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고 있을 때 이곳은 아무 걱정이 없다는 듯 매남리의 한 농부가 가뭄을 몰고 오는 건조한 하늬바람을 ‘쌀바람이 불어온다'고 좋아 하여 원님이 징벌을 내렸다는 '매남리 쌀바람'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대산4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대산가구백화점 앞을 통과한다.
대산4길을 따라 대산가구백화점을 지나오면 왼쪽에 충의로의 지하통로 입구가 있고, 오른쪽 뒤의 지역은 작은매남골이다.
대산4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오면 충의로의 삼호아파트(틀목) 버스정류소이다. 버스정류소에서 뒤돌아보면 충의로 왼쪽 아래 걸어온 대산4길과 대산가구백화점, 파란 지붕 농가 앞의 지하보도통로, 오른쪽 뒤에 망일산이 보인다
대산4리는 행정리인 매남리라고 불리는 듯. 이 오른쪽 지역이 매남리 작은매남골 지역인 것 같다.
국도 제29호선 충의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건물 대산5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꺾어 대산5길로 이어간다.
충의로 대산5길 입구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삼길포항 10.7km 지점이며, 오른쪽에 대산5리 마을회관이 있다.
충의로를 따라 대산5길 입구로 왔다. 오른쪽에 삼호아파트 단지가 있으며, 맨 끝에 망일산이 솟아 있다.
충의로에서 대산5길로 들어와 대산5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왔다. 맨 오른쪽 아래 충의로의 지하통로는 대산6길이다.
대산5길을 따라간다. 서해랑길은 맨 뒤에 보이는 롯데케미칼사택아파트 앞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은 대산큰빛성결교회와 엘림어린이집으로 가는 대산5길이고, 서해랑길은 왼쪽 들녘의 농로를 따라 맨 뒤에 보이는 롯데케미칼사택아파트 앞으로 이어간다. 왼쪽 지역을 목쟁이골라 이르는 듯.
대산읍 대산리 1378 지역, 롯데케미칼사택 2km, 삼길포항 10.5km 지점이다. 왼쪽의 목쟁이골 들녘으로 이어간다.
농로에서 보면 동쪽 언덕에 대산큰빛성결교회와 엘림어린이집이 보인다. 이 지역을 각골이라 이르는 듯.
왼쪽 지역을 목쟁이골이라 이르는 듯. 들녘의 농로를 따라 왼쪽 맨 뒤의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앞으로 간다. 오른쪽 구릉 뒤 지역을 큰덕암골이라 이르는 듯.
목쟁이골을 지나 오른쪽 동쪽을 바라보면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큰덕암골이며 중앙 뒤쪽을 작은듬배라 이르는 듯.
큰덕암골 들길을 따라 중앙에 보이는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앞으로 이어간다. 왼쪽 바로 옆에 각골소류지가 있다.
각골소류지(沼溜地)라고 불리면 이곳도 각골일까? 중앙 뒤에 포도원교회가 있고, 마을 주택들이 고급스러워 보인다.
고급스런 주택들이 있는 산등성이까지는 대산읍 대산리 지역, 그 뒤쪽은 대로리 지역이다. 뒤쪽에 몰니산이 구름에 덮여 있다. 몰니산은 망일지맥 망일산에서 이어져 가로림만 대산읍 오지리 자용산으로 벋어내려 오배산에서 가로림만 바다에 빠진다.
오른쪽 뒤의 들을 붉은부리들이라 이르는 듯. 앞의 수로 옆 농로를 따라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앞으로 이어간다. 대산읍 대산리에서 길을 건너 대산읍 대로리로 넘어간다. 뒤쪽 중앙 구릉지에 단성목장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대산읍 대산리에서 대로리로 넘어와 붉은부리들 농로를 따라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앞으로 이어간다. 단성목장이 푸르다.
왼쪽 뒤에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가 있고 앞에는 대로리 붉은부리들이 펼쳐져 있다.
대산읍 농로를 따라 대산리를 거쳐 대로리 붉은부리들로 넘어왔다. 왼쪽 뒤에 대산큰빛성결교회, 오른쪽에 포도원교회, 중앙 맨 뒤에 삼호아파트와 그 앞의 대산5리 마을회관이 가늠된다.
망일지맥(望日之脈)의 해발 170.7m 몰니산(沒泥山)이 구름에 싸여 있다.
대산읍 대로리(大路里) 들녘의 수로 옆 농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다. 몰니산(沒泥山)은 위치 확인 지표가 되어 준다.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에 속한 법정리 대로리(大路里)의 ‘대로(大路)’는 말 그대로 큰길이라는 뜻이다. 마을 앞에 사람들이 많이 통행하는 한길이 있어서 마을의 명칭을 ‘한길말’이라 하였다가 ‘말’자가 탈락하여 ‘한길’이라 하였다. 후에 이를 한문으로 표기함에 따라 ‘대로’라고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반곡리(盤谷里), 노상리(路上里), 노하리(路下里), 기은리(其隱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 서산군 대산면 관할의 반곡리, 노상리, 노하리, 기은리의 일부를 통폐합하여 대로리라 하였다. 1991년 12월 행정 구역 개편 때 대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서산군 대산읍 대로리가 되었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의 통합에 따라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뒤에 몰니산, 오른쪽 뒤에 둥근산. 둥근산 아래에 대로리 명지마을이 있으며, 둥근산 능선 오른쪽 사면에 삼국시대 백제고분인 대로리 명지고분(大路里明智古墳)이 있고, 둥근산 정상에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유적이 있다고 한다.
몰니산(沒泥山)을 중심으로 대로리와 대산리가 나누어져 있다. 면적은 넓지만 대부분이 산지이고 평지는 명지동 부근과 남서쪽의 해안가에 펼쳐져 있다. 대산읍의 다른 리와 마찬가지로 큰 하천은 없지만 관내의 물안지[명지지(明知池)라고도 불림]를 통해 농사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사용하고 있다. 대로리는 대산읍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다. 세 개의 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중 대로3리의 인구가 가장 많다. 인구수가 대로3리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는 이곳에 롯데대산석유화학 사원 아파트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기반은 물안지의 물을 이용한 논농사 위주의 농업이다. 바다에 접해 있는 대로1리에는 과거 염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이 매립되어 농토로 활용되고 있으며, 일부는 염전에서 양식장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대로리에는 국도 29호선, 국도 38호선 두 개의 국도가 지나간다. 대로리는 국도를 통해 북동쪽의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서쪽의 기은리, 남동쪽의 대산리와 맞닿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중앙 뒤에 명지지(明智池), 물안지라고도 불리는 대산저수지가 있다. 맨 뒤에 둥근산, 그 아래 대로리 명지마을이 자리한다.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오른쪽 뒤에 옥녀봉이 보이며 그 자락에 김홍욱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서해랑길은 그 앞으로 이어간다.
대산읍 대로리 100-37 지역, 삼길포항 8.7km 지점. 서해랑길은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오른쪽을 돌아 옥녀봉으로 이어간다.
물안지(대산저수지)의 물이 수로를 따라 대로리 들녘으로 흘러내린다. 중앙 뒤쪽은 거쳐가야 할 대산읍 화곡리 지역이다.
수로 옆 농로를 따라 올라가 맨 왼쪽 수로 다리를 건너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를 오른쪽으로 돌아나간다.
왼쪽 뒤에 대산저수지(물안지), 맨 뒤에 둥근산이 솟아 있다. 수로 다리를 건너 물안3길을 따라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담벽을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중앙 맨 뒤 대산리 삼호아파트 앞 충의로에서 대산5리 마을회관 앞으로 들어와 걸어온 왼쪽 들길이 한눈에 보인다.
앞쪽은 대산읍 대로리 들녘, 들녘 끝부터 뒤쪽은 대산읍 운산리 지역이다. 하얀 곤포사일리지가 줄지어선 대로리 들녘의 농로를 따라와 물안지 수로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수로 옆 농로를 따라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앞쪽으로 왔다.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담장 옆 물안3길을 따라 오른쪽 언덕을 넘어 중앙 뒤 옥녀봉 자락으로 이어간다.
물안3길을 따라 롯데케미칼사택 아파트 담벽을 돌아 언덕으로 올라가다 뒤돌아보면 삼호아파트로부터 들녘의 농로를 따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덕 왼쪽 뒤에 영자모골 지역이 있어 영자모골 언덕이라 불러본다. 물안3길을 따라 영자모골 언덕을 넘는다.
물안3길을 따라 영자모골 입구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중앙의 송전탑 구릉 오른쪽으로 돌아 왼쪽 옥녀봉 자락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쪽에 가야할 삼길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언덕에서 북동쪽 방향을 조망하면 대로리의 넓은 들녘과 왼쪽 뒤에 화곡리의 삼길산이 조망된다. 중앙 뒤쪽에 삼길포항과 대호방조제가 있을 것이고, 이 들녘은 대호방조제에 의해 조성된 간척농지일 것이다.
왼쪽 영좌동길을 따라가면 영자모골이 있다. 영자와 영좌는 표기만 다르지 같은 지명인 것 같다. 물안3길은 영자모길 입구에서 끝나고 건너편은 대로화곡길이다. 서해랑길은 대로화곡길을 따라 오른쪽 초록 창고 앞을 돌아 옥녀봉 자락으로 이어간다.
영자모골 입구에 태양광발전소가 조성되어 있다. 영자모골 위쪽을 영좌동이라 이르는 듯.
대로화곡길을 따라 왼쪽의 구릉을 돌아간다. 송전탑 맨 뒤 끝쪽에 삼길포항과 대호방조제가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대로리의 간척농지가 드넓다. 물안지에서 공급하는 수로가 중앙을 통과하고, 뒤쪽은 대산읍 운산리 지역, 왼쪽 뒤에 삼길포항과 대호방조제가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중앙 뒤에 보이는 영자모골 언덕을 내려와 대로화곡길을 따라 푸른 지붕 창고 앞을 지나왔다.
김적과 김홍역의 묘가 옥녀봉 자락에 있다. 옥녀봉 자락의 김적 및 김홍욱 묘역 앞으로 대로화곡길을 따라간다.
대로화곡길을 따라 옥녀봉 자락의 김적 및 김홍욱 묘역 앞으로 이어간다.
옥녀봉 아래 김적 묘와 그 오른쪽 아래에 김홍욱 묘가 조성되어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돌아 묘역 앞으로 간다.
중앙 뒤의 영자모골 언덕을 내려와 영자모골 입구에서 대로화곡길을 따라 와 푸른 지붕의 창고 앞을 거쳐왔다.
왼쪽에 김홍욱 신도비각이 세워져 있고, 오른쪽에 설명안내판과 최근에 세운 여러 비석들이 서 있다.
문화재명 김적 및 김홍욱 묘역, 종별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410호. 소재지 :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산1-2외 2필지. 소유자(관리자) : 경주김씨 단구자공종회, 경주김씨 학주공파종회. 지정면적 : 분묘4기, 신도비 1기 8.341m²(2,523평)
지정사유 : 김적 묘는 언덕 경사면에 자연 석축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장대석으로 구획한 계체석 위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음. 향하여 오른쪽에 묘표석이 있으며 그 아래쪽 양쪽에 망주석과 동자석, 문인식이 서 있고 묘표석의 머리는 조각과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아들 홍욱(弘郁)이 주관하여 세웠으며 포저 조(趙翼)이 찬하였음. 문인석은 화려한 금관 조복형으로 조각솜씨가 뚜렷하며 석물이 운형을 유지하고 있음. 김홍욱묘는 자연석축을 쌓아 묘역을 만들고, 위에서부터 날개가 달린 봉분 앞에 상석, 그 아래에 문인석 1쌍과 망주석 1쌍이 있음. 묘역 입구에 1772년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비명은 1674년에 장자 세진(世珍)이 덕원에 유배 중이던 우암(尤庵)을 방문하여 받아두었다가 1746년 박필주(朴弼周)가 묘지명을 완성하고 이제(李縡)가 신도비명 후기를 찬한 것을 1772년 5세손 구주(龜柱)가 세웠음. 김적 묘는 석물이 조성 당시 무덤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김홍욱 묘는 역사적으로 뚜렷한 인물의 무덤으로, 주변의 신도비와 함께 역사적 가치가 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고자 함.
최근에 세운 학주 김홍욱 선생 연보비와 시비 및 묘비와 신도비, 설명안내판이 묘소 입구 소공원에 세워져 있다.
題清風寒碧樓(제청풍한벽루) 청풍의 한벽루에 제하다
快閣苕嶢枕碧灣(쾌각초요침벽만) 높고 산뜻한 누각은 푸른 물굽이 가로질렀고
江光搖漾翠屏間(강광요양취병간) 강빛은 푸른 병풍 사이에서 일렁이네
壺中世界乾坤闊(호중세계건곤활) 병 속 같은 세계의 하늘과 땅은 드넓고
鏡裏人家日月閒(경리인가일월한) 거울 속 인가의 세월은 한가롭구려
俯檻澄波魚競躍(부함징파어경약) 난간 밑 맑은 물에는 물고기 뛰어놀고
當簷高樹鶴飛還(당첨고수학비환) 처마 끝 높은 나무에는 학이 돌아드네
他時願作神仙尉(타시원작신선위) 권하노니 다른 날 신선이 되어
倘許丹梯再得攀(당허단제재득반) 혹여 붉은 사다리 다시 오를 수 있을지
西紀 2017年11月27日 慶州金氏鶴洲公派宗會 賜額 聖巖書院 謹竪
登望日山白玉臺(등망일산백옥대) 망일산 백옥대에 올라
白玉臺高近紫冥(백옥대고근자명) 백옥대 드높아 하늘에 가깝고
俯看南極壓滄溟(부간남극압창명) 굽어보는 남극 푸른 바다 눌렀구려
雲收大野峯巒出(운수대야봉만출) 넓은 들에 구름 걷히니 산봉우리 드러나고
潮落平沙島嶼青(조락평사도서청) 조수 물 나간 평시에는 섬들만 푸르더라
萬里乾坤雙轉穀(만리건곤쌍전곡) 멀리 건곤에는 해와 달이 뜨고 지고
百年身世一浮萍(백년신세일부평) 백년살이 이 내 몸은 하나의 부평초라
乘風欲訪蓬瀛去(승풍욕방봉영거) 바람 타고 신선이 사는 곳 찾아가려다가
回首人間夢已醒(회수인간몽이성) 인간에 머리 돌려 꿈을 깨었더라
서산 김적 및 김홍욱 묘역은 조선시대 문신인 김적(金積, 1564~1646)과 김홍욱(金弘郁, 1602~1654) 부자의 묘소와 김홍욱 신도비가 있는 구역이다. 김홍욱의 문집 『학주선생전집(鶴洲先生全集)』에 따르면, 김적은 관직에 나갔지만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하여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당시 김적이 주변 사람들과 교유한 흔적인 단구대와 용유대는 지금도 남아 있다. 김홍욱은 1635년(인조13)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내려가서 청나라에 맞서자는 강경론을 주장하었으며, 1650년(효종1) 이후 집의, 승지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황해도 관찰사였던 1654년(효종5)에 소현세자(효종의 형)의 부인인 회빈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줄 것을 효종에게 상소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의 강직한 절개를 높이 여겨 1718년(숙종44) 이조판서로 올려졌고, 이듬해에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諡號)까지 받게 되었다. 김적 묘는 부인 화순 최씨의 묘와 나란히 조성되었으며, 상석, 동자상, 문인석, 망주석, 묘비 등의 석물(무덤 앞에 돌로 만든 물건)이 배치되어 있는데 17세기 무덤의 석물 변화가 잘 드러난다. 묘비는 조익(趙翼)이 지은 비문을 아들 김홍욱이 써서 세웠는데 덮개돌에는 용과 구름 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김홍욱 묘는 부모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남동쪽으로 100여m 떨어진 자리에 조성되었다. 부인 동복 이씨의 묘와 나란히 놓여 있으며 상석, 문인석, 망주석, 묘비를 두었는데 망주석과 문인석을 제외하고 모두 최근에 만든 것이다. 묘비는 1746년 박필주(朴弼周)가 지은 비문을 새겨 세웠다가 1995년에 새로 세웠다. 김홍욱 신도비는 1674년 맏아들 김세진(金世珍)이 덕원에 유배 중이던 송시열을 찾아가 비문을 받아 두었다가 1772년 5세손 김구주(金龜柱)가 세웠다. *신도비 :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김홍욱 신도비(金弘郁神道碑)가 앞에 있고 그 왼쪽 뒤에 김홍욱 묘역(墓域), 그 왼쪽 위에 홍욱의 아버지 단구자(丹丘子) 김적(金積) 묘역이 있다. 김홍욱은 당색으로는 서인이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5대조이자, 영조 때의 영의정 김흥경의 고조부이며,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김홍욱(金弘郁)[1602~1654]은 1654년(효종 5) 7월 효종에게 응지상소(應旨上疏)[나라가 어려울 때 임금이 직접 구언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완남군 이후원(李厚源)[1598~1660]에게 편지를 보내 “부모님 곁에 묻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인조 때 사사된 민회빈 강씨와 유배되어 죽은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어서 심한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원은 김홍욱의 유명에 따라 장례를 주관하였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김홍욱의 죽음을 원통해 하면서도 화가 두려워 조문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장례를 마친 후 그해 9월 20일 김홍욱의 고향 대교리(大橋里)에 임시로 묘를 썼고, 이듬해인 1655년(효종 6) 11월 16일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족보에 기록된 「묵수지침임지원(墨水池枕壬之原)」이 바로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먹수지]인데 아버지 김적(金積)의 산소 옆이다. 그 후 118년이 지난 1772년(영조 48)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글로, 1674년(현종 15) 김홍욱의 맏아들 김세진(金世珍)이 유배 중이던 송시열을 직접 찾아가 받은 것이다. 또한 이재(李縡)가 신도비명 후기(後記)를 찬한 것을 계기로 윤득화(尹得和)가 본문을 쓰고, 유척기(兪拓基)가 전서를 써 각자까지 이루어졌으나 건립에 이르지는 못하다가, 1772년 5세손 김구주(金龜柱) 등의 주선에 힘입어 비로소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이 때 현손 김한록(金漢祿)이 찬한 신도비명 추기(追記)가 첨각되었다. 묘비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학주공파와 성암서원(聖巖書院)의 협조로 1995년에 새로 조성하였으며, 묘비명은 1746년(영조 22) 박필주(朴弼周)가 지은 것이다.
김홍욱의 신도비와 묘역은 서산시 대산면 대로리 먹수지마을 뒤편 옥녀봉 아래 산사면에 위치한다. 신도비는 장방형의 화강석 대좌(臺座) 위에 오석(烏石)을 세웠으며, 전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크기는 높이 221㎝, 너비 88㎝, 두께 43㎝이다. 신도비의 보호각은 1983년에 조성된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二翼工)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이다. 신도비에서 150m 지점에 묘역이 있는데, 묘비와 문인석·동자석·망주석 등이 조성되어 있다. 2011년 현재 김홍욱의 신도비와 묘소는 서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묘소는 부인 동복 오씨(同福吳氏)와 쌍분이다. 묘역의 석물 중 망주석과 문인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근에 새로 만든 것이다. 2010년 12월 3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로 지정되었다. 김홍욱은 경주 김씨 학주공파의 중시조이다. 김홍욱의 집안에서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경주 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 신도비의 건립 과정은 당시의 정치적 동향과 연계되어 있어 주목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홍욱 묘역 입구에서 대로화곡길을 따라 먹수지 고개를 넘어 먹수지마을로 내려간다.
먹수지 고개를 넘어 '묵수지(墨水池)'에서 대산읍 화곡리 '먹수지'로 지명이 변화된 먹수지 마을을 내려본다.
언덕에 푸른 초지(草地)가 넓게 조성되어 있다. 마늘밭인가?
옥녀봉이 동쪽으로 부드럽게 내리벋는다. 맨 왼쪽 먹수지 고개를 넘어 대로화곡길을 따라 내려왔다.
먹수지마을을 돌아와서 먹수지 고개와 풀밭인지 마늘밭인지 확인하지 못한 언덕을 뒤돌아 보았다.
대로화곡길을 따라 화곡리 들녘을 지난다. 중앙 오른쪽은 서산수골프&리조트일 것이라 추정한다.
대로화곡길에서 동남쪽으로 대산읍 화곡1리 들녘을 조망한다. 왼쪽 뒤에 대호방조제에 의해 대호지가 형성되어 물길이 중앙 뒤쪽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추정한다.
대로화곡길은 왼쪽으로 꼬부라져 돌아간다. 왼쪽 뒤에 서산수골프&리조트 건물이 살짝 보인다. 오른쪽 골짜기 뒤쪽에 대호방조제에 의해 형성된 대호지의 물길이 올라오는 지역이 있을 것이다.
오른쪽에 축사와 농가가 있다. 중앙 뒤쪽은 대호지 물길이 올라오는 지역일 것이며 왼쪽 산봉 뒤에 서산 수골프장이 넓게 자리할 것이라 추정한다.
왼쪽 뒤에 삼길산, 중앙에 서산수골프&리조트 건물이 보인다. 오른쪽 산봉 뒤에 골프장이 넓게 자리할 것이다.
화곡1리 들녘 뒤 중앙에 화곡1리 중심지, 그 뒤에 삼길산, 오른쪽에 서산수골프&리조트 건물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화곡1리 마을회관을 거쳐 중앙 뒤쪽 화곡로로 이어간다. 왼쪽 맨 뒤 산줄기 너머에 가로림만 만입부 동쪽에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과 대산산업단지가 있을 것이다.
화곡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수로의 다리를 건너 화곡1리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중앙에 삼길산이 솟아 있다.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에 속한 법정리인 화곡리(花谷里)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개화리(開花里)의 ‘화’자와 반곡리(盤谷里)의 ‘곡’자를 따서 화곡리(花谷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반곡리, 개화동 등 관련 지명이 확인된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대산면에 소속된 반곡리와 개화리 두 지역을 하나의 지역으로 통합하면서 화곡리가 만들어졌다. 행정 구역의 변화 없이 이어져 오다가 1991년 대산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서산군 대산읍 화곡리가 되었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가 통합되면서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가 되었다. 북쪽에는 삼길산(三吉山)이 바다 바로 옆에 솟아 있고, 남쪽에는 화곡저수지가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 대호방조제로 생긴 대호지가 위치해 있고, 대호방조제를 통해 당진군 석문면과 이어져 있다. 북쪽의 삼길산 주변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탄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화곡리는 대산읍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화곡2리에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1,332명이 살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 현대오일뱅크 사원 아파트가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대호방조제 건설 이전의 화곡리는 삼길산 밑의 반곡리에서 이루어지는 농업과 삼길포의 실치잡이가 주요 산업이었다. 현재는 같은 화곡리 내에서도 남쪽과 북쪽의 경제적 기반이 판이하다. 남쪽은 화곡저수지 주변의 논농사와 특산물인 포도 재배를 통한 농작물 수입이 기반인 반면, 북쪽은 삼길포항을 중심으로 관광객 대상의 요식업 등의 서비스업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다. 화곡리의 주요 관광 자원으로는 삼길포항과 삼길산, 그리고 삼길산에 있는 해월사 등이다. 삼길포항에서는 매년 6월 삼길포 우럭 축제가 열린다. 삼길포에서 잡히는 우럭과 삼길포를 대표하는 선상 횟집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삼길포 우럭 축제는 서산의 대표적인 먹거리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삼길산은 삼길포항의 뒤에 위치해 있는데, 이 산에 대하여 『서산군지(瑞山郡誌)』[1927]에는 “풍경이 매우 뛰어나서 봄바람 불고 가을 달이 밝을 때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라는 기록을 인용하여 놓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다리에서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수로 하류를 바라본다. 맨 왼쪽 길은 대호지와 삼길포항으로 이어지는 삼길포7로이다.
위쪽 화곡저수지에서 수로를 따라 물이 흘러내린다. 화곡저수지가 있는 곳이 화곡2리 지역이며 맨 뒤 산줄기 뒤에 대산산업단지와 가로림만 만입부인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이 있을 것이다.
대산읍 화곡리를 대표하는 해발 166m 삼길산 (三吉山)이 흰구름을 머리에 이고 솟아 있다.
삼길산(三吉山)은 충청남도 서산시의 대산면 화곡리에 있는 산이다. 조선조에는 산 앞에 평신진(平薪鎭)이 위치하여 있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평신읍지』에 삼길산이 기록되어 있고, 『1872년지방지도』에도 삼길산, 평신진, 삼길포가 나와 있다. 또한, 『서산군지』(1926)에는 "삼길산을 오르면 당진, 면천의 여러 산들은 바둑판에 붙은 바둑돌 같고 삼길(三吉)의 바다 빛은 한 폭의 흰 명주가 매달린 듯하다. 풍경이 매우 뛰어나서 봄바람 불고 가을 달이 밝을 때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들 사료를 통하여 산 이름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엿볼 수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또한, 삼길산과 삼길포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도 분명치 않다.(네이버지식백과)
왼쪽 구릉지 오른쪽 끝에 대산읍 화곡2리 화곡저수지와 그 뒤쪽 산등성이의 현대오일뱅크사원아파트 건물이 가늠된다.
대로화곡길을 따라 왼쪽에 보이는 화곡1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길은 반곡길이다. 중앙에 삼길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가 반곡골이며 오른쪽 앞에 평신경로당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 평신진(平薪鎭)이 있었던 것 같다.
오른쪽 반곡길 방향을 살피면 반곡길은 서산CC옆 '삼길포7로'로 이어져 대호지와 대호방조제로 나간다.
오른쪽 맨 뒤 먹수지고개에서 대로화곡길을 따라 화곡1리 들녘을 가로질러 반곡길 갈림목으로 왔다. 왼쪽은 반곡길이다.
중앙에 솟은 삼길산 아래가 반곡(盤谷)골이며 오른쪽 지역에 평신진(平薪鎭)이 설치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평신마을이라 불리는 듯. 이곳에서 대로화곡길은 끝나고 도로명은 반곡길로 바뀐다. 왼쪽 반곡길을 따라 화곡1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의 반곡길 언덕에 스피커탑이 솟아 있는 화곡1리 마을회관이 보인다. 오른쪽 반곡길을 따라 회관 앞으로 올라간다.
중앙 뒤에 서산수골프&리조트 건물이 살짝 보인다. 앞에 보이는 마을은 화곡1리 반곡(盤谷)마을이며 평신진(平薪鎭)이 있었다고 하여 평신(平薪)마을이라고도 이르는 것 같다.
조선 후기 충남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반곡(盤谷)마을에 설치되었던 진(鎭)인 평신진(平薪鎭)은 1711년(숙종 37)~1895년(고종 32)에 충청도 북서부 해안을 수호한 진으로, 종3품의 첨사가 관할하였다. 또한 평신진은 목장까지 관리하는 겸목관 체제를 채택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해안 방비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집중적으로 시행하였다. 더욱이 서산과 태안 지역은 세곡미 등 각종 물자를 운송하는 조운의 주요 경유지로, 양선(糧船)의 보호는 평신진의 주요 임무였다. 양선의 호송 구역은 안흥에서 경기도 풍도까지였다. 이 외에도 평신진에서는 도서 지방의 수색 정찰과 금산(禁山)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866년(고종 3) 2월 11일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탄 로나호가 평신진의 이도면 영전리 조도 앞바다에 몰래 정박하자, 당시 평신첨사 김영준과 해미현감 김응집 등이 쫓아 보낸 사건이 일어났다. 한편 평신진의 첨사는 감목관과 겸직하여 목장(牧場)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후기 영조부터 헌종 연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 중 「평신진지(平薪鎭誌)」를 살펴보면 평신진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위치가 바뀌었다. 가장 먼저 1701년(숙종 27)에는 대산읍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항금산(亢金山) 아래에 설치되어 약 10년간 운영되다가 망일산(望日山) 아래로 옮겨졌다. 이후 1772년(영조 48)에 다시 삼길산(三吉山) 아래로 옮겼다. 망일산 아래가 바로 대산읍 내 구진(舊鎭)이며, 삼길산 아래가 지금의 대산읍 화곡리 평신진 터이다. 평신진은 1895년 행정 구역 개편과 육로 수송의 발달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건물과 토지는 개인에게 매매되어 성터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평신진은 조선 후기 삼남 지방의 원활한 양곡 수송과 왜구 방어를 관장하던 거점 진지였다. 평신진 관련 사료와 연구 자료를 통해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양곡의 수송 방식, 군사 제도, 감목관의 역할, 그리고 이양선 출몰과 대처 양상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화곡1리 마을회관, 오른쪽에 화곡리비석군(花谷里碑石群)이 있다.
화곡리비석군(花谷里碑石群) 4기 중 3기를 담았다. 오른쪽부터 첨사박후윤묵영세불망비, 첨사김후완식영세불망비, 행첨절제사김후윤옥영세불망비이며, 대정십일년□□(大正十一年□□) 비석은 왼쪽에 있는데 사진에 담지 못했으며 다른 1기는 쓰러져 있다.
화곡리비석군(花谷里碑石群)은 서산시 대산읍 화곡1리에 있는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세워진 4기의 비석을 이른다. 대산읍 화곡1리 마을회관 앞에서 동쪽으로 화곡리 비석군이 세워져 있다.
1.첨사박후윤묵영세불망비(僉使朴侯允黙永世不忘碑)는 귀접이 양식으로, 1884년(고종 21)에 건립되었다. 전체 높이는 128㎝, 비신은 높이 112㎝, 너비 53㎝, 두께 16㎝이다.
2.첨사김후완식영세불망비(僉使金侯完植永世不忘碑)는 1878년(고종 15)에 건립되었다. 기단부에 안상과 복연화문이 양각되어 있고 비좌가 있다. 이수와 비신은 하나의 석재로 되어 있으며, 이수 전면과 후면에 각각 두 마리의 용이 쟁투하는 모습이 반원형을 이루며 양각되어 있다. 비신에 김완식의 공적을 4연시로 기록하였다. 전체 높이 205㎝, 비신 높이 150㎝, 너비 61㎝, 두께 17㎝이다.
3.행첨절제사김후윤옥영세불망비(行僉節制使金侯胤鈺永世不忘碑)는 1880년(고종 17)에 건립되었다. 이수 뒷면에는 물고기 무늬가 있고, 앞면에는 삼각형, 사각형이 연이은 모양의 기하문이 양각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95㎝, 너비 39㎝, 두께 15㎝이다.
4.대정십일년□□(大正十一年□□) 비석은 방형으로, 1922년에 건립되었다. 비신의 일부가 땅에 묻혀 있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일본인 와다나베가 저수지를 만들고 바다를 막아 개척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비신 높이 39㎝, 너비 88㎝, 두께 23㎝이다. 화곡리비석군에는 원래 개항기의 비석들만 있었는데, 이곳에 일제 강점기 때 세운 비석을 추가하여 현재 4기의 비석이 한 곳에 세워져 있다. 19세기 대산읍의 지역 역사를 복원하는 데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대산읍에서 벌인 개간·개척 사업의 현황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