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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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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禪詩 스크랩 선종의 中國詩歌에 대한 영향과 그 공헌 3 /송행근
원명 원적 추천 0 조회 51 18.12.06 22: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종의 中國詩歌에 대한 영향과 그 공헌 3 /송행근

 唐代詩歌를 중심으로 -


3.2. 王維

 

詩佛 王維(700761)는 성당 때 시인으로 자가 마힐摩詰이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 및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매우 뛰어나 살아 생전에 남종화의 원조와 당대의 명필 및 비파의 명연주자 등 다채로운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왕유는 62세로 죽을 때까지 무후武后·중종中宗·예종睿宗·현종玄宗·숙종肅宗 등 무려 다섯 왕을 섬기며 살았을 만큼 곡절 많은 삶을 영위하였다.

 

왕유가 활동했던 성당에는 도교가 크게 흥성하긴 했지만 유불도 삼교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활발히 성행하였다. 왕유의 사상적 변화를 살펴보면 당시의 이같은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소년기에는 유가적 삶을 목표로 과거에 급제하려 노력하였고 청장년에 이르러서는 도가에 심취한다. 그러나 만년의 왕유는 선종에 완전히 귀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안록산의 난을 겪으면서 불교에 귀의함은 물론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佛理로써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비록 왕유가 만년에 선종에 귀의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있어 선종은 모태신앙과 같은 것이었으며 생활의 일부였다. 이처럼 왕유가 선종을 생활화하면서 몸소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첫째, 왕유는 어려서부터 죽는 그날까지 불교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에 심취되어 있었다. 왕유의 어머니 최씨는 대조선사에게서 30여년간 사사를 받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왕유는 750년 모친 최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청시장위사표請施莊爲寺表'에서 그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망모고박릉현군최씨臣亡母故博陵縣君崔氏 신의 亡母, 博陵縣君 최씨는

사사대조선사삼십여세師事大照禪師三十餘歲 일찍이 대조선사의 문하에서 삼십여년 사사하셨습니다.

갈의소식褐衣蔬食 신의 어미는 거친 옷과 채식,

지계안선持戒安禪 계율을 지키며 참선하셨습니다.

락주산림지구적정樂住山林志求寂靜 산림에 즐거이 머물며 寂靜을 구하는 일에 뜻을 두셨습니다.

 

왕유의 어머니 최씨가 사사한 대조선사는 북종 神秀嗣法弟子인 보적普寂(651739)의 시호로 최씨는 북종선의 보적선사에게 선의 가르침을 받아 중국여인들이 바라마지 않는 비단옷조차 몸에 걸치지 않고 거친 옷과 채식 그리고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한평생을 보냈다.


이러한 모친 최씨의 불교적 삶은 왕유에게 선종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선종의 분위기에 심취케 하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나아가 선종적 가정환경은 그가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힐維摩詰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摩詰이라 하며 훗날 아무런 욕심을 갖지 않고 경전을 읽고 참선에만 몰두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성당의 사회적 상황에 따른 왕유 자신의 신변 변화이다

문학·음악·회화 등에 다재다능했던 왕유는 개원 9(721) 진사라는 벼슬로 첫 관리생활을 시작하지만 당시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몇 차례의 좌천생활을 경험하면서 세계관의 변화를 겪는다


특히 755년 당 왕조의 부패에 분개한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현종은 사천성으로 피난하고 수도 장안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장안에 남아 있던 왕유는 반란군에 의해 菩提寺에 구금된다. 왕유는 약물을 복용하고 이질병을 가장했으나 반란군측은 그를 낙양으로 이송하여 給事中 벼슬을 강요하였다. 이때의 부역은 왕유에게 굴욕으로 환원되어 망천장輞川莊에 은거하며 시와 그림 및 선에 몰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왕유와 선사들의 활발한 교류이다. 성당의 지주계급과 지식인들이 대부분 선을 애호하고 선종 승려들과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음은 당시의 일반적인 유행으로 왕유가 활동하던 시대는 '남방에는 혜능, 북방에는 신수(南能北秀)'라고 불릴 정도로 두 분파가 선의 정통성을 놓고 투쟁하던 무렵이다. 왕유는 당시 남북종 최고의 선사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교류하였다. 대표적으로 북종선의 선사로는 보적普寂과 의복義福을 비롯하여 정각淨覺·혜징惠澄 등이며 남종선의 선사로는 신회神會와 원공瑗公을 비롯하여 선선사璿禪師·원숭元崇 등이다.

 

실제 이 시기에 왕유는 비록 조정 관직을 수행하기는 했으나 장안에서 날마다 십여명의 승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그들과 심오한 철리의 토론을 즐겼다. 또 그의 서재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茶具··經案·승상繩床뿐이었고 퇴궐 후에는 향을 피우고 앉아 선경을 송독誦讀할 정도로 선종적인 삶을 실천하였다.

 

왕유는 선의 체험을 그대로 詩化했던 시인으로서 중국시가사상 선시를 문학적으로 가장 잘 체현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래서 왕유와 동시대의 시인이었던 원함苑咸'수왕유酬王維'에서

"당대시장當代詩匠 왕형은 당대의 詩匠,

우정선리又精禪理 또 선리에 정통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시 가운데 선사상이 농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녹시鹿柴·목란시木蘭柴·조명간鳥鳴澗·죽리관竹里館·신이오辛夷塢·과향적사過香積寺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녹시鹿柴'를 살펴보자.

 

녹시鹿柴

 

공산불견인空山不見人 빈 산에 사람 보이지 않고

단문인어향但聞人語響 말소리만 들리네

 

반경입심림返景入深林 반사되는 그림자 깊은 숲에 들어와

부조청태상復照靑苔上 다시 푸른 이끼 위에 비치고 있네

 

시인은 순간적인 직관으로 빈 산의 석양 무렵 깊은 숲 속에 비쳐 드는 한 줄기 저녁 햇살에 반사되는 이끼의 푸른빛과 들릴 듯 말 듯한 사람의 음성을 담담한 심정으로 묘사하였다.

 

이 시에서 삼라만상은 저물어 가는 저녁 햇살 아래서 비로소 그 숨겨진 모습을 드러낸다. 실로 한낮의 작열하던 태양이 그 열기를 거두어 갈 때의 고요함() 속에서 비춤()은 사물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이때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더욱 밝아진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수동적으로만 바라보던 자연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윽고 저녁 어스름이 숲 속에 깔리면 시인은 숲 속에 조용히 앉아 순간순간 변하는 자연현상들이 모두 허망한 환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시의 특징은 단지 20자의 글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幽人'의 음성과 깊은 숲 속에 스며드는 한 줄기의 저녁 햇살을 연결시킴으로써 텅 빈 산 속에 단지 사람 소리의 메아리만 들려 와 더욱 쓸쓸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왕유가 추구하고자 했던 세속의 먼지와 시끄러움을 멀리하는 이며 또한 의 경지이다. 또한 이 시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숨겨져 있어 잘 파악되지 않는 경치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청대의 조전최趙殿最는 그의 동생 조전성趙殿成이 쓴 [우승집주右丞集注]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승은 선리에 정통하여 그의 시를 아무리 뒤집어 보아도 그 진실을 보기 어렵다. 그는 中道의 진리를 깊이 체득하였으니 '空外의 소리''수중의 그림자'. 그 향기는 과일의 즙과 같고 그 열매는 참외와 같이 달며 잘 익은 술과 같다. 使人이 찾아도 그 틈을 찾을 수 없으며 좇아가고자 해도 갈 수 없으니 그의 자취가 할 뿐이다. 오직 홀로 그 에 도달했도다.

 

'녹시鹿柴'에서 잘 나타나듯이 왕유의 인식, 즉 자연이란 한 순간에 변하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선종의 유심주의적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선종의 색공 관념은 세계가 궁극적으로 객관존재의 과정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일체 사물의 현상은 '寂滅'에 귀결된다고 설명한다


왕유의 유심주의적 인식이 잘 드러나 있는 '목란시木蘭柴'를 보자.

 

목란시木蘭柴

 

추산렴여조秋山斂餘照 가을 산 남은 빛을 거둬들이고

비조축전려飛鳥逐前侶 날던 새들도 짝을 지어 돌아가네

 

채취시분명彩翠時分明 푸른 햇살에 빛나던 산 빛마저도

석람무처소夕嵐無處所 가을 저녁 어스름에 사라지는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예리한 관찰을 통해 석양의 남은 빛이 가을 산에서 사라지고 하늘을 날던 새들도 모두 둥지로 돌아간 뒤 한때 푸른 햇살에 빛나던 산 빛이 사라지는 가을의 고요한 저녁풍경을 묘사하였다.

 

시인은 여기에서 '녹시鹿柴'와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계의 生滅變化를 자신의 직관 속에 응집시키고 있다. 또 시인은 모든 아름다운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夢幻과 같은 의 허망부실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아름다움) 현상에 대한 허망부실의 인식 밑바탕에는 선의 色空사상이 농후하게 깔려 있다. 이는 [열반경]에서

"여조비공如鳥飛空 마치 허공을 나는 새처럼

적불가심迹不可尋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는 것이나 [화엄경]에서

"료지제법적멸了知諸法寂滅 제법적멸을 깨달은 자

여조비공무유적如鳥飛空無有迹마치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라는 구절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청대의 서증徐增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힐정대웅씨지학摩詰精大雄氏之學 마힐은 불교의 가르침에 정통했으며

편장사구篇章詞句 개합성교皆合聖敎 그가 쓴 모든 문장은 붓다의 가르침에 부합된다.

 

 

이것은 왕유 시의 핵심을 명쾌하게 지시하고 있다.

 

신이오辛夷塢

 

목말부용화木末芙蓉花 나무 끝에 부용꽃

산중발홍악山中發紅萼 산 속에 붉게 피었네

 

간호적무인澗戶寂無人 개울가 인적 없는 집에

분분개차락紛紛開且落 어지러이 피었다 지네

 

이 시는 언뜻 보면 목련 핀 산 속의 움직임()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시인은 이 시에서처럼 대지에 내리는 가랑비의 모습, 들녘에 쌓이는 낙화, 깊은 계곡에서 우는 새, 희미한 등불 주변에 모여드는 곤충들, 미풍에 흔들리는 실버들 등을 즐겨 묘사했는데 이것들은 한결같이 '動中靜' 혹은 '靜中動'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시인이 표출한 '움직임'은 자연계의 운동변화와 생기발랄한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말하는 공허한 취산생멸聚散生滅일 뿐이며 감각적으로도 고립된 단편적 영상으로 시인은 단지 자신의 허융담박虛融淡泊한 정서를 자연의 고요한 動景에 일치시키고 있을 뿐이다


실제 시인이 묘사하고자 하였던 '動景'의 목적은 취산생멸 하는 현상에 있지 않다

그것은 동과 정이 서로 교차되어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시각에 보여 지는 모든 변화 현상이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동시에 들려지는 모든 변화 현상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특히 모든 변화 현상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허망부실과 무상변화는 최종적으로 '詩中有畵 시 속에 그림이 있다'는 왕유의 시만이 자아낼 수 있는 독특한 경지를 창출하였다.

 

조명간鳥鳴澗

 

인한계화락人閒桂花落 사람 한적한데 계화 떨어지고

야정춘산공夜靜春山空 밤은 고요하고 봄 산은 텅 비어 있네

 

월출경산조月出驚山鳥 달 떠오르니 산새 놀라

시명춘간중時鳴春澗中 봄 시내에서 간간이 지저귀네

 

이 시는 봄날 한적한 산 속에서의 정취를 잘 그려내고 있다

시의 구성을 살펴보면 1·2구에는 깊은 밤 고요한 산중의 정경 속에서 계수나무 꽃이 조용히 떨어지고 있을 뿐 어떠한 새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고요함()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다. 3구에서는 고요하던 봄밤의 산중에 갑자기 달이 떠오르자 산새가 놀라서 우는 모습이

4구에서는 놀란 산새의 울음소리가 광대한 밤하늘의 적막을 흔들고 있다.

 

이 시의 표현수법은 '신이오辛夷塢'와 같다. 시인은 매우 空寂한 의경을 그린 다음 산중의 개울에서 들려 오는 새 우는 소리로써 '움직임()'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묘사하는 새 우는 소리는 시인이 승인하고 있는 객관 사물의 운동 변화의 결과는 아니다. 즉 시인에게는 새 우는 소리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골의 개울에서 우는 새 소리를 형상화하여 내재된 이념을 표현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는 선가에서 흔히 말하는 '정중동'妙理가 시적인 흥취로 승화되어 있으며 작품 전체가 閒靜하면서도 言外之意의 그윽한 맛이 풍긴다.

 

특히 이 시는 남조 梁代의 시인 왕적王籍

"선조임유정蟬噪林愈靜 매미 우는 소리에 숲은 더욱 고요하고

조명산경유鳥鳴山更幽 새 우는 소리에 산은 더욱 그윽하다"

를 연상케 한다. 단지 왕유는 왕적과 달리 매미 소리가 아닌 새 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深山密林의 조용하고 그윽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명대 호응린胡應麟은 그의 에서 '조명간鳥鳴澗''신이오辛夷塢'와 더불어 '入禪'의 작품이라고 하면서

"독지신세양망讀之身世兩忘 읽으면 자신과 세계를 모두 잊어버리고

만념개적정萬念皆寂靜 만가지 생각이 모두 고요해진다" 고 하였다.

 

죽리관竹里館

 

독좌유황리獨坐幽篁裏 대숲에 홀로 앉아

탄금부장소彈琴復長嘯 거문고 뜯고 길게 소리 내어 읊네

 

심림인부지深林人不知 깊은 숲 사람들 알지 못하니

명월래상조明月來相照 밝은 달이 와 서로 비추고 있네

 

이 시는 세간과는 멀리 떨어진 깊숙한 대숲에서 느낀 천연의 즐거움을 묘사하였다

시인은 홀로 마음껏 거문고를 타다 이따금씩 길게 휘파람을 불어 보는데 그윽하고 고요한 대숲이라 그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단지 저 하늘의 명월만이 댓잎 사이로 그 은은한 빛을 비춰 내려와 동무가 되어 준다


이처럼 시인은 대숲 속의 그윽함을 감상하는 한편 내심의 고독을 체득하는 가운데 고요함과 적막함의 즐거움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청유적정淸幽寂靜의 극치요, 하나의 완전한 공적의 경지임에 틀림없다

이 시에서 피세탈속적避世脫俗的이고 물외초연物外超然의 사상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죽리관竹里館'을 보면 대숲 속에서 홀로 거문고를 타고 휘파람을 부는데 오직 명월만이 '知音'하여 깊은 숲 속으로 스며들어와 자신을 비추니 시인은 마치 온갖 심사를 단지 저 명월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듯하다.

 

그래서 청대 당여순唐汝詢[당시해唐詩解]에서 이 시에 대해

"림간지취林間之趣 임간의 정취를

인부이지人不易知 뭇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데

명월상조明月相照 명월만이 밝게 비추어 주니

사약회의似若會意 흡사 그 뜻을 아는 듯하다"

라고 평했다.

 

과향적사過香積寺

 

부지향적사不知香積寺 알지도 못하고 향적사 찾아가다

수리입운봉數里入雲峯 구름 깊은 곳에 들었네

 

고목무인경古木無人逕 고목 속으로 길은 사라졌는데

심산하처종深山何處鐘 어디선가 종소리 들려오네

 

천성연위석泉聲煙危石 개울물은 괴이한 돌부리에 울리고

일색랭청송日色冷靑松 햇빛은 소나무에 차갑게 빛나고 있네

 

박모공담곡薄暮空潭曲 해질녘 고요한 연못가에 앉아

안선제독룡安禪制毒龍 선정禪定에 들어 번뇌를 잠재우리

 

이 시는 장안 부근 終南山에 있는 香積寺의 경치를 그리고 있는데 천연의 妙境이 실로 탈속적 정취에 깊이 젖어들게 한다. 이 시는 첫 구에 '알지도 못하고(不知)'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인의 자연스럽고도 허심한 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어디선가(何處)''사람 없는데(無人)'와 서로 호응하면서 하늘을 가릴 정도의 고목으로 가득 찬 산림 속에 사람의 발자취 하나 없고 홀연히 절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향적사의 그윽한 적막감을 창출하고 있다. 게다가 기암괴석 사이로 '흐느끼는' 산 개울 소리, 푸른 솔 숲 사이로 비쳐드는 '차가운' 햇빛 등은 울창함 속에 정적이 감도는 산색을 이루면서 더욱 향적사의 깊고 그윽하며 적막한 경지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2구에서 시인은 돌연 禪語를 혼용하여 세속 초탈적 寓意를 한층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 毒龍은 여기에서 온갖 '헛된 생각'이나 '번뇌망상'을 가리키는 것으로시인은 '정려靜慮'의 최적 조건인 그윽하고 고요 적막한 산사에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무념무상의 참선 삼매경에 빠져들어 현실의 일체를 잊고 세속적 망념을 제압하기를 동경하고 있다.

 

청계淸溪

 

청동견원산淸冬見遠山 맑은 겨울날 먼 산 바라보니

적설응창취積雪凝蒼翠 쌓인 눈에 푸른빛이 어렸어라

 

호연출동림皓然出東琳 나 호연히 동림을 나왔으니

발아유세의發我遺世意 세속에 뜻을 두지 않네

 

이 시에서 왕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에 주관적 감정을 불어넣어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 자신의 '한담'한 사상 감정을 반영시키고 있다. 특히 시인은 겨울날 먼 산을 바라보며 쌓인 눈에 푸른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 갑자기 세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시적 자아를 발견한다. 이처럼 깨달음을 통한 정신적 해방은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禪宗은 현세에서의 내심의 자아해탈을 중시하였으며 특히 일상생활의 자잘한 일들 가운데서 계시를 얻고 대자연의 감상과 도야 속에서 초월적 깨달음을 획득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서 송대 갈입방葛立方은 왕유의 산수시에 대해

"심융물외心融物外 마음은 物外와 융합되어 있으며

도계현미道契玄微 도는 현미와 계합되어 있다"

고 평하였다.

 

지금까지 녹시鹿柴·목란시木蘭柴·조명간鳥鳴澗·죽리관竹里館·신이오辛夷塢·과향적사過香積寺·청계淸溪 등을 살펴보았다. 왕유 시의 가장 큰 장점은 자연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포착, 응결하여 動靜一如의 시계로 환원시키는 한편,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닌 인생의 원숙한 통찰을 담고 있는 데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원숙한 통찰력은 선종의 접촉을 통해서 체득한 內心自證心法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선종의 유심주의적 관념이 그 바탕을 굳건히 이룬다.

 

유대걸劉大杰이 왕유 시를 평하기를 

"畵筆禪理 그리고 詩情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고 지적했는데 왕유 시에 대한 선종의 영향을 한마디로 명쾌하게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출처 http://www.buljahome.com/songchol_file/9_folder/file9-8b.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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