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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사랑이다(2)
무굴제국의 옛 수도 아그라 - 파테뿌르 시크리
10일 아침, 무굴제국 3대 악바르 황제가 14년간 수도로 삼았던 파테뿌르 시크리에 도착했다. 악바르는 첫째 아내로 힌두교인을, 둘째 아내로 터키 출신의 무슬림을, 셋째 아내로 남인도 고아 출신의 크리스천을 아내로 맞았다. 그런데 이 세 아내와의 사이에서 단 한 명의 아이도 얻지 못했다. 상심한 그가 간절한 바람을 안고 이 곳 파테뿌르 시크리를 찾아 기도를 올렸는데, 마침내 한 이슬람교 성자의 예언을 받아 첫째 부인으로부터 아들을 얻었다. 이에 감사하는 의미로 당시 수도였던 아그라에서 약 40Km떨어진 외딴 사막 마을이었던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워낙 물이 부족한 도시였던 탓에 악바르 사후, 다시 아그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무굴제국의 선대 왕들은 스스로 시인이고 예술가였다고 하는데 악바르만은 글조차 깨치지 못한 문맹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를 받아들여 민족의 대통합을 이루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아 인도의 민족문제가 바로 종교문제였음을 일찍 깨달았던 모양이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과 지원만은 누구 못지않았다고 하며 뛰어난 군사 책략가이자 합리적인 정치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파테뿌르 시크리는 붉은 사암으로 축조된 성으로 궁전의 대리석과 우람한 정문은 인도에서 가장 완벽한 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첫째 왕비의 방에 새겨진 문양과 조각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이 가장 잘 돋보이는 힌두 양식의 성이다. 또 왕의 침소는 여름에 쾌적한 상태가 유지되도록 침상을 높이고 방의 배치와 높이를 과학적으로 건축한 것이 인상적이다. 물이 부족한 이곳에서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어놓은 거대한 물 저장고 안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해 보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왕궁의 각층 처마마다 줄지어 매달려 있는 크고 둥근 커텐 고리는 이곳이 비바람 없는 사막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화려하게 꾸며졌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무심한 시간의 흔적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지금은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보호하고 있다지만 그 옛날 주인이 떠나버린 왕궁은 집 없는 이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하고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했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심지어 대리석 주춧돌에 구멍을 뚫고 동물을 묶어놓았던 자리까지도 볼 수 있다.
여름 궁전 앞에 위치한 분수연못에 바람에 흔들리는 우거진 수생식물이 보이고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의 물소리와 푸른 하늘을 떠도는 파랑새의 지저귐이 들려온다고 상상해 본다. 그림처럼 아름다웠을 궁전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속삭임이 세월을 넘어 지금도 바람처럼 내 앞에 떠도는 듯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그라성
다음으로 우리가 방문한 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그라성이다. 밖에서 보면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난공불락의 이 요새는 이중 삼중으로 이루어진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어떤 이들은 머리카락 한 올도 낄 수 없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이라고 표현한다. 다리를 건너 이중으로 이루어진 굴과 성벽을 지나면 여러 개의 붉은 성문을 만나게 된다. 석양이 내려 앉아 하늘의 색과 더욱 닮아가는 시간이면 아그라성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햇빛을 받아 그 장엄함과 위엄을 눈부시게 드러내고 있었다. 외부의 모습은 붉은 성인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가 모두 순백의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꾸며진 것을 보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악바르의 강력한 권력의 상징물인 아그라성은 군사기지로서의 기능도 함께 갖추어 지어졌다. 공개되지는 않지만 지금도 아그라 성의 한 편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여 군사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악바르 황제에 의해 지어진 이 성은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거대한 규모와 구조, 요새와 궁전으로서의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놀랍도록 정교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악바르가 짓고 건축광이었던 그의 손자 샤자한에 의해 호사스런 왕궁으로 꾸며진 아그라성은 무굴제국 이슬람양식의 백미로 생각된다. 보석으로 꾸며진 내부 공간까지 모두 둘러보면 악바르가 문맹이었다는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왕궁은 대리석에 갖가지 문양으로 홈을 파내고 보석을 채워 넣는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기법으로 장식되었는데, 벽면에 화려하게 채워졌던 보석들은 영국 통치 당시 영국군에 의해 약탈당했다고 한다.
악바르 황제가 어렵게 얻은 아들을 위해 지었다는 자한기르 팰리스는 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며, 붉은 사암에 새겨진 갖가지 문양과 둥근 지붕의 탑이 이슬람 건축 양식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또 붉은 성벽 끝의 대리석 팔각타워인 무삼만 버즈는 샤자한이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 샤자한은 1666년 숨을 거둘 때까지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타워 발코니에서 야무나 강 건너편에 있는 그가 사랑했던 아내의 무덤, 타지마할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샤자한의 유일한 낙은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일이었다고 한다. 한때는 황제로 무굴제국을 호령했던 그가 이곳에 유폐되어 눈물의 나날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그 슬픔의 깊이가 어땠을지 짐작이 된다. 사랑했던 사람의 아름다운 무덤을 바라보며 그가 흘린 눈물은 아마도 야무나 강을 건너 타지마할로 흘러들어가 지금도 타지마할의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고 있지 않을까.
아그라성에는 수많은 기둥들이 있다. 하늘을 향해 뻗은 듯한 하얀 기둥들은 화려한 문양과 조각들을 품고 오랜 세월을 곳곳하게 서 있다. 바람과 비와 낙서에 벗겨지고 형태만 유지된 기둥들도 있다. 바람에 잎을 흔드는 정원의 수목을 바라보며 생명을 갈망하는 석상처럼 보여 애잔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함께 시작된 것처럼 각각의 기둥마다 신비스러움을 풍기고 있는 기둥들. 시간의 흐름에 켜켜이 쌓아 둔 간절한 열망을 승화시켜 숨 쉬고 꽃피는 날이 오기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을 보러 간다. 누구나 인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타지마할일 것이다. 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건축미나 예술의 우수성 또는 역사적인 가치보다는 그것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타지마할에 간다고 생각하니 그것에 얽힌 이야기가 먼저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오면서도 부풀어 오르는 기대와 설렘을 감출 수가 없다.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입구는 3곳으로 되어있다. 우리는 관광객이 밀리는 시간을 피해 오후 3시쯤 북쪽 문을 통해 입장했다. 소남의 말에 의하면 해가 질 무렵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타지마할을 보는 것은 또 다른 행운이라고 한다. 오랜 경험으로 상황에 알맞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짚어가며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소남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전용버스에서 내려 타지마할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차장에서부터 운행되는 셔틀버스나 전기자동차로 갈아타고 1Km거리의 타지마할 입구까지 가야한다. 새로운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하면서 관광 수입을 올리기 위한 상술도 없지 않아 엿보이지만 영원히 보존해야 할 문화재가 자동차의 배기가스로 인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니,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소남의 말에 따라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아치형정문을 통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타지마할을 바라본다. 처음에 크게 확대되어 부분만 보이던 것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작아져 정문을 완전히 통과하자 비로소 순백색의 아름다운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준다.
아! 타지마할. 순결한 신부의 모습 같기도 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 한 마리가 분수연못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좌우로 늘어선 수목의 호위를 받으며.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있을까. 타지마할을 에워싼 정문이나 그 밖의 부속 건물들은 모두 붉은 사암으로 되어 있어서 순백색의 타지마할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축미를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건물 구조까지 서로 조화를 이뤄 그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특히 해질 무렵 노을빛에 물든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일은 심연 깊숙이 감추어진 알 수 없는 슬픔을 끌어올리는 일임을 순간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의 궁극은 그리움이나 깊은 슬픔과 맞닿아 있다고 표현한 고 박완서님의 글이 지금에서야 이해가 된다.
건물 앞에 조성된 네모 반듯한 사분정원은 십자형으로 교차되는 수로로 사등분되어 있다. 사분정원은 이슬람교에서 파라다이스, 즉 천상의 낙원을 상징한다고 한다. 4개의 수로는 생명의 원천을 나타내는데 수로가 교차되는 중앙연못은 인간과 신이 만나는 장소를 나타낸다고 해서 그런지 더 웅장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것이 이슬람의 기본 정원양식이다.
타지마할은 건축광이었던 샤자한이 세계 유명 건축가들을 불러 모아 만들었다. 높이는 67m, 전체가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설계는 이란 출신인 우스타드 이사(Ustad Isa)가 맡았고 이탈리아 피렌체의 건축방식으로 지어졌다. 동원한 인부만도 매일 2만여 명이었으며, 그 인력 중 1천 명은 디자이너 또는 아름답게 꾸미는 내장공이었다고 한다. 페르시아, 이집트, 이태리 등지에서 초빙되어 온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의 고도의 기술과 예술 감각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자재는 중국에서 가져온 비취와 버마의 루비, 다마스커스의 진주, 멀리 이태리에서 운반 된 흰 대리석이다. 타지마할 정원은 길이가 남북 560m에 너비는 동서 305m로 광활한 평지 위에 조성되어 있다. 정원 잔디밭엔 페르시아 문양을 상징하듯 별모양이 수놓아져 있고, 주변에는 상록수가 푸르다. 그 위에 기단의 크기는 사방 95m, 본체는 사방 57m, 높이가 67m이다. 기단 네 모서리의 첨탑 높이는 43m이며 묘당의 영역을 분명히 구분해준다. 첨탑의 상부는 93도 밖으로 약간 휘어져 있어 지진이 발생했을 때 묘당이 파손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자연재해까지 고려한 묘당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오늘 날 못지않게 지혜로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건물 위 중앙의 큰 돔 주변에는 4개의 작은 돔이 있고 내부는 텅 비어있다. 중앙 돔은 순전히 외관을 위한 허구의 구조물인데, 대리석을 돔형으로 쌓아올린 기술이 놀라웠다. 타지마할 자체는 완전한 좌우대칭의 모습으로 서 있다. 양쪽 22개의 첨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데 모두 지진과 천둥에 잘 견디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마치 거대한 사원 같기도 하고 또 궁전 같기도 하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가까이 가서 보면 상상외로 크다. 균형 잡힌 비례, 수려한 곡선미, 우아하고 화려한 대리석 장식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조각은 상감과 양감이다. 상감으로 매운 재료들은 햇빛을 받아 벽면이 유난히 빛났다. 재료들이 색깔별로 외국에서 수입된 보석, 준 보석, 대리석이기 때문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주에는 꾸르안(경전)의 글귀가 조화 있게 새겨져 있다. 내부는 상하로 나뉘었다. 무덤을 누가 해칠까 염려했던지, 상층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무덤은 그 아래 지하층에 숨겨져 있다. 누군가가 처음 보면 그 진위를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래위로 똑같이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저렇게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고 기리게 할 만큼 한 남자의 완벽한 사랑을 받은 그녀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한 여자를 그토록 사랑한 샤자한은 또 어떤 남성이었을까. 샤자한은 무굴 제국의 위대한 영광의 한 상징이다. 그는 세련된 예술적 센스를 가진 위대한 군인, 정치가이자 행정가였다. 비록 무자비한 정치가였을지라도 샤자한은 사랑과 애정에 있어 위대한 능력을 소유한 남성이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타지마할은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한 불멸의 사랑에 대한 표현으로 지금도 세계적 기념물로 남아 있다.
샤자한의 절대적 사랑을 받은 뭄타즈 마할은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위대한 지성을 소유한 여성으로 전해진다. 그녀는 샤자한의 부왕인 자한기르의 스무번째 아내이자 여성정치가로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누르자한의 조카로 15세에 시장에서 샤자한을 처음 만나 서로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사랑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그리고 19세의 나이가 되어 샤자한과 결혼한 그녀는 일생을 남편을 위해 헌신하면서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샤자한은 그녀와 함께 모든 국가 문제를 의논했으며, 심지어 전쟁터에까지 왕비를 데리고 갈 정도였다. 한창 전쟁 중이던 전쟁터의 막사에서도 출산을 감행했다고 하니, 이는 그들의 지독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샤자한이 데칸 고원에 원정 중이었을 때, 뭄타즈 마할은 브르한 프르촌에 가서 14번째의 왕자를 출산하던 중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1630년 그녀의 죽음으로 샤자한의 삶은 깊은 공백으로 가득차게 되고 거의 2년 동안 완전한 슬픔 상태에서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632년 아그라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묘지를 건설하기 시작해 22년이나 걸려 1653년에 완공했다. 2만 명의 노동자와 장인들의 노동력이 투입되어 완성된 타지마할은 하얀 대리석에 사랑과 영혼의 꿈을 묘사함으로써 무굴 인도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 되었다.
샤자한은 야무나강 건너편에 타지마할과 똑같은 건축물을 검은 대리석으로 지어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이 두 무덤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으려 했다. 아내의 타지마할은 흰색 대리석이지만, 강 건너 자신의 무덤은 검은 색으로 설계하여 왕비를 잃은 슬픔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저지되어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샤자한의 셋째 왕자 아우랑제브는 샤자한이 타자마할 건축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어서 군대를 움직여 아그라에 입성, 두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샤자한을 아그라성에 유폐시켰다. 샤자한은 사망할 때까지 8년 동안이나 이곳에 살았다. 그는 매일 야무나 강 건너 아내의 묘지인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깊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사랑의 이야기는 참 많이 있다. 우리의 사랑은 언젠가 끝이 나게 되어 있고, 그 사랑이 끝이 나고 남겨진 사람의 슬픔을 통해 비로소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것 같다. 상대의 영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실체을 보게 된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여행이 끝난 지금도 눈앞에 타지마할을 떠올리자니, 샤자한의 사랑과 영혼이 타지마할을 에워싸고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하다. 타지마할을 보고 난 지금, 이제 나는 여행자를 두 부류로 나누게 될 것 같다. 타지마할을 본 사람과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으로, 그리고 인도에 다녀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계단식 우물 찬드바오리
11일 아침 전용버스를 타고 아그라를 떠나 자이푸르로 향했다. 3시간 가량을 달려 라자스탄 주의 아바네리에 먼저 내렸다. 아바네리에는 사람의 손으로 파 내려간 세상에서 가장 깊은 우물 찬드 바오리가 있다. 우물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깊고 웅장하다. 3,500개의 계단과 계단이 물고 물리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절묘한 기하학적 문양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9세기 경에 건축되었다는 찬드 바오리는 역대 왕들이 목욕하는 곳도 있고, 비상시에 인접 사원으로 탈출할 수 있는 비상통로도 있다고 한다. 1200년 전 인도인들의 건축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그들의 건축 기술 수준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다시 차를 타고 자이푸르로 향하는 동안 창밖을 보니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거리도 깨끗해지고 사람들의 집이나 마을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정갈하게 보이며 사람들의 모습도 활기에 차 보인다. 여자들이 입은 사리의 색깔마저도 델리의 그것보다는 더 화려하고 선명하게 보인다. 이곳 라자스탄 주는 인도에서 비교적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높고 잘 사는 곳이라고 한다.
핑크시티 자이푸르
인도의 사막도시 자이프르. 인도 연방의 15개 주 중 하나인 라자스탄주의 수도로 인도 북서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도로와 철도 등 교통망이 정비된 상공업 중심지이다. 옛 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는 질서정연한 바둑판 모양의 넓은 거리로 구획되어 있는 계획도시이다.
핑크시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시내로 들어서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시의 벽면을 장식하는 핑크빛 건물 때문인 것이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에드워드 7세가 왕세자 시절,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왕자를 환영하기 위해 온통 핑크색으로 장식했는데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 한다. 현재도 건물을 증,개축 할 때는 주변과 비슷한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한다. 아직 경제발전이 따르지 못해 도시의 특성을 살린 핑크시티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보이지만 궁전만큼은 핑크빛과 비슷하게 붉은 색으로 말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이곳은 라자스탄만의 독특한 인도 문화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색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막문화가 주는 강렬한 색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이푸르는 한 마디로 낭만이 살아있는 도시 같다. 사막의 쓸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데 모든 인도의 전통 음악 중에서 이곳의 음악은 최고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해질 무렵 긴 그림자를 드리운 사막 위 낙타의 모습과 애조 띤 가락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인도 음악을 떠올리자니 평화롭고도 잔잔한 여운이 마음을 짙게 물들인다. 이 여운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휴게소 기념품점에서 인도의 전통악기 시타르와 타블라로 연주되는 CD음반 한 장을 구입해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인도 전통음악을 들으며 이곳에서의 추억을 잔잔히 떠올려 보리라 생각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천문대 잔타르 만타르
자이푸르 옛 시가지에는 유적이 많이 있다. 천문대 매표소 앞에 헤나(Henna)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모두들 팔이나 손에 다양한 문양을 그려 넣었다. 헤나 나무에서 추출한 헤나는 이집트가 원산지라고 하는데 모발염색이나 타투를 하는데 사용하는 천연염료이다. 나는 장미 문양을 부탁해서 팔에 그렸다. 보통 1주일 정도 유지된다는 이 문양이 인도 여행의 상징처럼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며, 행여나 지워질세라 염료가 다 마를 때까지 팔을 쳐들고 돌아다녔다.
자이싱 2세가 만들었다는 천문대는 18세기 초 무굴제국의 두뇌가 집약된 석조 건축물로 잔타르 만타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림자가 가리키는 분 단위의 시간까지도 현재와 일치하고 있다 하니 참으로 그 정교함과 과학적 원리가 놀랍기만 하다.
돌과 대리석을 이용하여 만든 기묘한 모양의 건축물들은 언뜻 보기에는 커다란 예술작품 같이 보이지만 모두 천체 관측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해시계와 적도시계을 비롯하여 일식과 월식, 별자리와 계절풍을 관찰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들은 천체 관측소라기보다는 창의적으로 독특하게 설계된 조각공원을 보는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세계 최대의 해시계 삼랏 얀트라이다. 시간당 최대 4미터까지 움직이는 거대한 바늘을 가지고 있는 이 해시계는 그 면이 자이푸르의 위도인 27도 만큼 기울어져 있다. 수준 높은 천문지식과 탁월한 예술적 감각이 어우러져 완성된 걸작이다. 인류의 지적 호기심이 인류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시간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티팰리스
잔타르 만타르를 나와 비둘기가 모여 있는 광장을 건너니 시티팰리스 입구이다. 인도에서는 비둘기 또한 신으로 모셔져 누군가는 항상 먹이를 주고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시티팰리스는 1728년 자이싱 2세가 건축한 궁전으로 구시가의 1/4쯤 되는 공간을 차지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007 옥토퍼스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돌아가면 그 영화를 다시 찾아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티팰리스 일부 건물에는 아직도 왕과 왕족이 살고 있고, 상징적 존재로 마하라자(왕)라고 불리며 자선사업에 참여하거나 지역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궁전의 건물들은 박물관으로도 활용되고 관광객은 박물관 쪽 구역을 포함한 일부만 출입이 허용된다. 박물관에는 역대 왕들이 쓰던 무기와 의상, 검 등을 전시해 놓았다. 가구나 의상, 마차까지도 살펴보고 나니 비록 작은 왕국이었긴 하나 대제국 못지않은 영화를 누린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박물관 밖의 정원에서 라젠드라 게이트로 들어가면 왕의 공식 접견실 앞에 엄청나게 큰 은항아리 2개를 볼 수 있다. 힌두교에 대한 믿음이 두터웠던 마호싱 2세가 영국의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갈 때, 갠지즈 강물을 담아갔던 물통이라고 한다. 항아리의 무게는 345Kg이며 900L의 물을 담을 수 있다. 성수가 흐르는 땅을 떠나면 자신의 카스트를 잃는다는 힌두교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하니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는 노력이 이렇게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거대한 은제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바람의 궁전 하와마할
12일은 여행의 마지막 날로 하와마할과 암베르성 관광을 마치면 다시 델리로 돌아가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저녁 비행기를 타게 된다. 이른 아침 서둘러 체크아웃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자이푸르 시내를 통과하는 길에 선명하게 붉은 색체의 하와마할을 보게 되었다. 바람의 궁전이라는 하와마할은 자이푸르의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 중의 하나라고 한다. 세상 밖으로의 출입이 제한되었던 왕궁의 여인들이 도시 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람이 잘 통하는 격자형 창문을 만들었다. 이 창문은 바람도 잘 통하지만 안에서 볼 때는 밖의 모습이 잘 보이고,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만든 것으로 격자의 두께와 각도가 놀랍도록 과학적이고 정교하다고 한다. 1799년에 세워진 하와마할은 라자스탄만의 독특한 궁궐문화를 보여준다.
하와마할 앞의 가도에 코브라를 앞에 두고 병모양의 악기를 부는 인도인을 보았다. 악기 소리를 듣고 코브라가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코브라는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일단 밖으로 나오면 목부분을 부풀리고 세워서 적을 경계한다고 한다. 청각은 거의 없고 시각이 좁은 코브라가 악기 끝에 검정색이 있어 그것을 보기 위해 몸이 따라가기 때문에 몸을 흔드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라자스탄의 아름다운 철옹성 암베르성
암베르성 또한 독특한 라자스탄만의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자이푸르가 오늘날 라자스탄의 수도라면, 암베르성은 1037년부터 1726년까지 용맹하기로 소문난 라지푸트족의 카츠와하 왕조의 수도였던 곳으로 미나 왕에 의해 건설되었다. 1592년 무굴황제 악바르와 혼인동맹을 맺은 자이푸르의 라자만싱 왕이 원래 성이 있던 이곳에 새로운 성을 건설하여 700년 동안의 수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암베르성이 이렇게 화려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카츠와하 왕국이 무굴제국과 혼인으로 화친을 맺었기 때문이다. 또 무굴제국의 부자 갈등에도 휘말리지 않고 자기 나라를 잘 지켜냈고,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무굴제국의 쇠퇴와 운명을 함께 하지 않았다. 영국 통치 시대에 용병들이 영국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도 영국 편에 서서 폭동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영토를 더욱 넓혔다. 이후 라자스탄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높은 돌산자락의 언덕에 위치한 암베르성에 코끼리택시를 타고 오르는 동안 아래로 보이기 시작하는 무굴 양식의 호수정원이 인상적이다. 코끼리를 신으로 모시는 곳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탈 것으로도 이용하는 곳이 있다. 같은 인도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많은 문화적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델리에서는 힌두들이 소,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 식사에 주로 닭고기와 양고기가 나오는데, 다른 지역 특히 무슬림이 사는 마을에서는 소고기를 먹기도 하고 파는 곳도 있다고 한다.
암베르성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크기와 규모가 크고 호화롭다. 붉은 사암과 대리석을 이용해 힌두와 이슬람 양식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졌으며 성안의 궁전에는 연회장, 도서관 등이 있고 정원과 큰 연못도 갖추어져 있다. 이 궁전 안에서 뒤편 산등성이의 사원까지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방까지 만들어 넣어 전쟁에 대비한 요새의 기능까지 갖추어진 곳이라고 한다.
궁전 내부는 화려한 색체의 모자이크와 벽화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 당시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맨 위층에는 여름 궁전이 있고 아래에 겨울 궁전이 있다. 여름 궁전에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2개의 물탱크가 있고 여기에 처마를 가로지르는 작은 관들의 촘촘한 구멍으로 물이 빗살처럼 흘러내리게 하여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지도록 설계되었다. 겨울 궁전에는 많은 거울 조각들로 벽과 천정을 장식하여 추운 겨울에 빛이 반사되어 더 따뜻해지도록 지어져있다. 사막의 산자락에서 더위와 추위를 이기기 위한 과학적인 설계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사막의 돌산자락에 건설한 암베르성이나 규모가 거대한 여러 건물들을 둘러 보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지릿한 아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화된 기계 장비를 사용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지하까지 뚫어 거대한 이 요새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예들의 피와 땀과 죽음으로 얼룩졌을까 생각하니 몸서리마저 쳐진다.
인도는 ‘신화와 신들의 나라’라는 표현이 딱 맞는 나라이다. 집집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신들의 대지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신을 포용하고 맨발의 성자와 무소유의 걸인들과 첨단과학이 함께 존재하는 나라, 명상과 사유를 통해 삶을 추구하는 곳이다. 인도의 어디를 가나 역사와 종교와 철학과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찾아와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머무르며, 안식을 찾고,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는 인도를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나라로 표현한다. 다양한 문화, 종교, 인종, 언어를 가지고 있는, 인류 역사 발전의 처음과 끝을 보여주는 방대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을 바라보는 데는 다양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시각이 요구되는 만큼 독특한 매력과 함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얼굴이다가도 이내 얼굴을 바꿔 독을 품은 독사의 얼굴을 하는 야누스의 속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인도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하나의 불문율처럼 인도에서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인도 경제의 허브 뭄바이는 영국 식민시대에 세워진 영국식 고풍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조화를 이룬 깨끗한 거리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슬럼 지역이 존재할 정도로 극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곳이라 한다. 카스트제도의 철폐는 법제화 되었다지만, 신분 차별의 관습은 뿌리 깊게 남아 있고 고질적인 빈부 격차 문제도 심각하다. 어느 나라나 가난의 문제는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고 해결하려는 내부의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인도인들은 상당히, 아주 철저히 개인적이다. 나와 관련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는 사고방식, 부와 가난에 대한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고방식, 그것이 보여주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는 뭄바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의 가장 큰 병폐는 물질적 차이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다. 이러한 무관심이 만들어 놓은 빈부 격차의 해결 없이 진정한 인간적 평등을 이룰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극치점을 볼 수 있는 뭄바이는 세계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 한다. 인도의 경제를 뒤흔드는 뭄바이의 비즈니스맨들과 인텔리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두뇌회전이 빠르고 외국인을 대하는 매너가 철저히 계산되어 있는 세련됨을 보여준다고 한다.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상황에 필요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인도인, 그래서 인도에서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인도는 인구만큼이나 많은 성장 가능성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IT와 서비스 부문을 기반으로 성장하면서 서서히 슈퍼코끼리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도의 IT소프트웨어 서비스 기술과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할리우드 영화가 맥을 못 추는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인도이다. 한 해 1천여 편의 인도영화들이 쏟아져 할리우드 영화들이 낄 틈이 없다. 인도인들은 영화에서 환상을 보고, 현실을 위로 받고, 다른 민족을 껴안는다. 내가 인도 영화를 보고 좋았던 까닭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나 보다 생각하니 인도 영화의 제작 의도는 분명히 성공한 것 같다.
경제 규모로 보아도 인도가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아직 1인당 국민 소득은 낮은 편이지만 11억 명의 풍부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데다 인구 증가율이 중국보다 높다. 구매력이 두텁고, 고급인력이 풍부하다. 매년 배출되는 대졸자들은 대부분 영어 구사력이 뛰어나고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 높은 수준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경제 협력에도 용이하며 인건비도 저렴해 다국적기업들은 인도를 생산기지 및 미래시장으로 매우 중시하고 있다.
무질서 하면서도 질서를 유지해 가는 나라,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아름다움과 가치를 속에 담고 있는 나라, 인도는 더 이상 한 지역이 아닌 세계의 중심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다양성을 바탕으로 발전해 가는 인도의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그들의 힘과 잠재력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인도를 이야기하면서 4명의 인물을 빼놓고 이야기하면 뭔가 허전할 것 같다. 앞에서 말한 간디와 그의 동반자 네루, 동시대를 살아간 아름다운 시인 타고르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집의 마더 테레사까지. 그들의 삶이 인도를 움직이는 힘이고 인도의 빛이며 인도의 역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여행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막스뮐러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강연에서 인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연이 베풀 수 있는 모든 부와 힘과 아름다움을 가장 풍족하게 타고 난 나라를 전 세계에서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인도를 택할 수밖에 없다’인도 전체를 보지 못했어도 백배 공감이 되는 말이다. 말로만 들어왔던 히밀라야 인접 지역의 천혜의 절경도 궁금하거니와 영국, 프랑스, 포르투칼의 식민지 영향으로 유럽의 어느 휴양지 못지않게 독특하고 아름답다는 남인도의 해변도 거닐어 보고 싶다. 다양한 문명과 아름다운 자연이 공존하는 인도를 꼭 한 번은 둘러볼 기회를 가져보라고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라고도....
여행은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해주고, 알지 못했던 나를 알게 해준다. 내가 밟았던 땅을 궁금하게 하고 애정을 갖게 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역사에 아파하고, 그들의 속삭임에 귀기울이고 싶어진다. 그리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여행은 돌아와서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짧지만 한편으로는 길었던 이번 여정을 되돌아보고 쓰던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하니, 여행길에 나선 이들에게 들려주는 시성 타고르의 음성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게 있어 인도는 사랑이었다.
『 평온한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내 사랑을 여비로 만들어 당신에게 드립니다.
여행길엔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할 테니까요.
우리 모두 서로에게 진정한 사랑을 나눠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그네끼리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받기를 바랍니다. 』
<참고문헌>
허경희,『인문학으로 떠나는 인도여행』, 인문산책, 2010.
전세중,『인도여행』, 문현, 2012.
최현주,『 그여자, 인도여행』, 엑스오북스, 2012.
법정,『인도기행』, 샘터,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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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따뜻하고 근사하고 값진 여행하고 오셨네요. 잘 읽있어요~
인도를 여행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좀 더 여유있게, 베풀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지요~~ 기회되면 꼭 한 번 다녀보시기를....
인도는 사랑이라는 말... 그리고 처음처럼님의 글을 읽으면서 인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뭉클뭉클... 타지마할은 꼭 가봐야겠죠? 처음처럼님 대단하다 이러면서 야금야금 읽어가고 있었는데 참고문헌은??? 암튼 대단하셔요. 저는 요번에 라오스를 다녀왔는데요 처음처럼님처럼 기억이 생생하진 않네요, 약간의 아쉬움도 있고요. 덕분에 인도에 가고픈 맘이 들어요. 다음번 여행때 참고해서... 남겨놓은 글에서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
인도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제가 쓴 글이 의미있는 글이 되었네요 ㅎ ㅎ .이제는...눈이 나빠져서 책을 잘 못 읽으니 어휘도 짧아지고 표현력, 기억력까지 형편없어 ㅜㅜ 내 능력으로 뭔가를 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그나마 애써 다른 사람들의 책이라도 읽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차원으로 후기 써서 올립니다. 여행기라기 보다는 독후감이라 생각하고 읽으세요 ㅎ ㅎ
같이 인도 다녀온 사람으로 이글의 독자로서 최고의 수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두번 세번 천천히 읽어보며 복습도하고 각각의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을 곱씹을 수 있었어요. 참고문헌은 단지 정확한 년도와 왕과 지역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조금 참고한것 뿐인게 보입니다. 7박9일의 일정 내내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글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어서 다시 한번 좋았던 기억을 되살 릴 수 있었습니다. 인도는 사랑이다. 라는 제목 속에 모든걸 함축했네요. 제목 너무 좋아요. 매일 매일을 한권의 책으로 쓸만큼 느낌이 많았던 인도여행이었지묘. 대작 쓰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이것도 줄여 줄여 쓴게 보입니다. ㅎㅎ
조아님^^* 역시 함께 다니신 분이라 제 생각을 다 읽어내시는군요~~ 너무 쓸게 많아서 뭘 버리고 뭘 써야할 지 고민 많이 했답니다. 우리가 나누고 느꼈던 매일 매일의 이야기를 모두 쓰려했다면 아직도 끝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인도는 그런곳이었지요ㅎ ㅎ아마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렇게 이야기거리가 많은 곳은 찾기 힘들것 같습니다.~~
인도~~ 꼭 가보고 싶은 나라 중 하나인데, 처음처럼님은 친구분들과 재밌게 다녀오셨네요. 인도 가기 전에 다시 꼭 읽어봐야겠어요. 근데 언제 갈 수 있으려나....
꿈꾸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를 잡게 되겠지요^^* 비갠뒤님께도 늘, 항상, 언제나ㅎㅎ 고마움이 먼저 앞섭니다^^ 화이팅!!!
비갠뒤님 고양올레에서 한번 인도여행 추진하여 함께 가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저도 인도여행 1명 추가요^^
저도 또 가고 싶습니다 ~~만년설이 보이는 히말라야 가까이, 그리고 라다크로....
딱 1년뒤에 처음처럼님이 간 길을 제가 더듬어 더듬어 갈것 같네요 다시 한 번 후기 읽고 마음 다지면서 준비하는 이 기쁨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