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우리교회가 속한 '예장 고신'에서 매월 발행하는 "월간고신 생명나무"의 청탁을 받아 쓴 글입니다.
<월간고신 생명나무 2016년 8월호 고신설교>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의 의미
로마서 15:22-33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서론
이 세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들 중에는 재정적으로 넉넉한 교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법상 공식적인 표현은 아닙니다만, 흔히 자립교회라고 하고, 미자립교회라고 합니다. 교인들의 헌금을 통해서 교회의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하여 다른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자립하여 넉넉한 교회는 부족한 교회를 돕고, 재정적으로 부족한 교회는 넉넉한 교회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일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여유 있는 교회는 돕는 일에 인색하거나 그 일에 대해 교만해지려 합니다. “우리는 몇 개 교회를 돕고 있다”라고 자랑하려 합니다. 반면, 부족한 교회들은 넉넉한 교회에 후원 요청하는 것을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운 마음을 가집니다. 우리 시대의 양극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들이 아직은 훨씬 더 많이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재정이 넉넉한 교회로 하여금 “너희들이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다. 그러니 자랑하라.”라고 가르칠까요? 성경에서는 넉넉하지 못한 교회로 하여금 “너희들이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항상 고개를 숙여서 넉넉한 교회에 요청해야 한다.”라고 가르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을 가리켜 ‘디아코니아’(diakoni,a), 즉 ‘섬김’과 ‘봉사’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을 매우 당연한 일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넉넉한 교회는 부족한 교회를 돕고, 부족한 교회는 여유 있는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서로 섬기며 참된 다아코니아(섬김과 봉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 사실이 로마서 15:22-33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론
Ⅰ. 본문 해석
본문의 배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갈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로마 교회에 방문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가지 못하였는데(참고. 1:13), 이제 곧 방문할 것을 로마서라는 편지를 통해 알리고 있습니다(22-23절).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에게 가기 전에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할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25절) 예루살렘에 들린 뒤에 로마에 갔다가 서바나(스페인)로 갈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28절)
바울은 로마로 갈 것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로마여행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예루살렘에 가는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방문 계획과 목적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까? 그리고 그것을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무엇을 가르치려고 할까요?
26절을 보시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얼마의 금액을 헌금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고린도후서 8:1-5에도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모여진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은행의 온라인 이체방식을 통해서 전달하면 간단하겠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바울이 직접 들고 가는 것입니다.
헌금전달 = 성도를 섬기는 일
그런데 25절을 보면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헌금을 전달하러 간다”라고 말하지 않고 “성도를 섬기는 일로 간다”라고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31절에도 보시면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섬기는’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인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섬김, 봉사, 사역이라는 뜻입니다. 한글성경은 ‘디아코니아’라는 말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내가 헌금을 전달하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라고 하지 않고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7절에는 헬라어로는 조금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긴 하지만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을 헌금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섬기고 봉사하며 사역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통해서 ‘헌금’의 의미, 헌금이 다른 교회를 돕는 일에 사용되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고후 8:4,19-20; 9:1,12-13에도 사용됨).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돕는 일은 단순한 이웃돕기가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낯선 사람들에게 베푸는 선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섬김과 봉사입니다.
기쁨으로 섬긴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
다른 교회를 돕는 일이 단순한 이웃돕기가 아니라 섬김과 봉사이기에 26절에 보면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고, 27절에서는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위치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는 일을 단순히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섬기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감당한 교회들의 ‘섬김’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일이 로마로 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기에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여행일정을 알리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행 일정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드러낼 성도들의 ‘섬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Ⅱ. 헌금을 통한 섬김과 사역
헌금을 통해 섬기는 우리들
여러분들은 매주일 예배 중에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헌금 시간이 있으니까 할 뿐, 그 헌금이 어떻게 쓰여지는 지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심지어 예배 중에 드려진 헌금이 목사에게 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헌금은 교회의 재정을 위해 수고하도록 부름 받아 섬기는 집사들에 의해 교회 안팎의 여러 용도로 사용됩니다. 말씀봉사자를 위한 생활비(고전 9:4-14; 딤전 5:17-18), 성찬음식 구입비, 교육비, 전도비, 구제비(행 4:32-37), 선교비(빌 4:15-19), 예배당 유지를 위한 비용, 그 밖에 여러 용도로 지출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교회를 돕기 위해서(행 11:27-30; 롬 15:26; 고전 16:1-4) 사용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할 디아코니아, 즉 섬김과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이 드린 헌금은 섬김과 봉사의 방편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드린 헌금이 재정적 도움이 필요한 교회에 전달되어 섬김과 봉사로 사용됩니다.
경험담
제가 말씀봉사하고 있는 교회는 재정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몇몇 교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우리교회를 후원하고 있는 어떤 교회의 목사님께 “후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하지요.” 여전히 많은 교회들이 디아코니아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통해 사역하는 우리들
앞서 말씀드리기를 ‘섬기는’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가 섬김, 봉사라는 뜻 뿐만 아니라 ‘사역’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가 사도행전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에서도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사도의 직무에 해당하는 ‘말씀 사역’이라는 번역의 원어가 바로 ‘디아코니아’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난외주에는 “헬. 말씀의 봉사에”라고 되어 있어서 ‘디아코니아’(봉사)가 사용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섬김과 봉사의 일일 뿐만 아니라 사역이기도 합니다. 흔히 말씀 사역(디아코니아)을 감당하는 목사, 강도사, 전도사를 가리켜서 ‘사역자’라고 합니다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들만이 사역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사역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예배 중에 헌금을 드리고, 그 헌금은 곧 ‘디아코니아’(사역)에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마땅한 의무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은 마땅한 의무입니다. 섬김과 봉사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감당할 일입니다. 오히려 도울 수 있는, 아니 섬길 수 있는 형편에 처한 것으로 감사해야 하며, 섬길 교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현재 다른 교회를 돕고 있는 교회도 언제 어느 때에 도움을 받을 처지에 놓일지 모릅니다. 갑자기 예배당에 화재가 발생한다든지 하는 불확실한 미래는 언제든지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와 동일한 고백을 가진 고신교회가 섬길 것입니다.
Ⅲ. 섬김을 넘어 교제로
교회의 한 몸됨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은 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가 감당한 것은 그 교회들이 멀리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교회는 유대인들의 교회요 한 교회는 이방인들이 교회이지만, 영적으로는, 본질적으로는 하나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
이 사실은 헌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26절을 보시면 ‘연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헌금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wni,a)라고 되어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교제’ 혹은 ‘사귐’라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할 때의 ‘교제’가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재정이 넉넉한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 교회를 돕는 것, 부족한 교회가 여유 있는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예배 중에 드려진 헌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이 바친 헌금이 다른 교회로 전달되면서 자동적으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고백이 헌금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은 성도의 교제요,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편이며, 우리의 고백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교단 교회의 하나됨
기독교보나 월간 생명나무 같은 교단의 언론은 교단 내의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하는데 특히 교단 내 어려움을 당한 교회나 목회자가 있을 때에 알리는 일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교단의 개체교회와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당한 교회와 목회자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한 교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갖습니다.
정리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생각한다면, 재정이 넉넉한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 교회를 돕는 일에 있어서 교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도울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반면 도움을 받아야 하는 교회들은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죄의식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받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말씀의 원리에 따라 실천하는 일일 뿐입니다.
여유 있는 교회가 부족한 교회를 돕고, 부족한 교회가 여유 있는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단순한 이웃돕기가 아닙니다. 동일한 신앙고백으로 묶여져 있는 교회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섬김과 봉사, 그리고 사역을 넘어 교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통해 서로 섬기게 하시고, 봉사하게 하시며, 사역하게 하십니다. 나아가 동일한 신앙고백 안에 있는 성도들을 교제케 하십니다.
결론
동일한 신앙고백으로 묶여져 있는 고신교회의 성도 여러분~! 사실상 교회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이 다른 교회를 위해 사용될 때에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가 받는 후원을 통해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이 그러한 것처럼 기쁘게 헌금합시다. 그리고 그렇게 기쁘게 드린 헌금으로 서로 섬기고, 봉사하며, 사역하고, 교제합시다. 섬길 수 있음에, 봉사할 수 있음에, 사역할 수 있음에 감사합시다. 이 일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여러분 모두가 섬기는 자요 봉사자며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헌금을 통해 디아코니아(섬김, 봉사, 사역)와 코이노니아(교제)를 실천합시다.
서울에서 한길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고 있는 손재익 목사는 교단 헌법이야말로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 정치원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믿고, 그에 따라 개혁교회 건설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