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의 어필 특징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 1552~1608, 1567~1608, )는 글씨를 잘 쓰고 난과 대나무를 잘 그렸다. 많은 글씨가 남아 있으나 대부분 목판에 새겨 먹으로 찍어낸 인본(印本)이다. 고궁 박물관도 다수의 선조 어필 현판을 소장 하고 있는데, 이 현판들은 후대의 국왕들이 당시 남아있던 선조의 어필들을 새겨 궁궐의 건물들에 걸게 한 것으로 판단된다.
선조의 일반 서예 작품들에 보이는 글씨체는 해서, 행서, 초서, 행초서, 등이며 행초서는 특히 높은 수준으로 평가 받는다. 굵고 힘차며 대담한 느낌의 글씨를 썼는데, 이런한 특징은 조선 전기의 송설체(松雪體)와 대조를 이룬다. 석봉(石峰) 한호(韓濩, 1543~1605)를 사자관 (寫字官)으로 등용하여 석봉체(石峰體)를 이루도록 후원하고, 석봉체 한자 교재를 보급함으로서 왕실뿐 아니라 나라 전반에 걸쳐 서예의 흐름을 크게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看取淺深愁(간취천심수) > 현판/ 선조 어필, 해행서, 제작연도 미상, 나무,
120.3X41.5cm
창덕궁 후원 영화당(暎花堂)에 걸었던 현판이다. 당나라 시인 이군옥의 오언시 ‘원객’을 각각 한 구절씩 새긴 4조의 현판 중 마지막 구절로 ‘내 마음의 근심은 가늠하기 어렵다’ 뜻이다. 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온 명나라 장수에게서 글씨를 요청받아 썼다 한다.
궁궐지에 의하면 영화당에는 선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었다.
※ 원객(遠客)
遠客坐長夜 (원객좌장야) 나그네는 긴 밤을 앉아 세우고
雨聲孤寺秋 (양성고사추) 외로운 절에서 듣는 가을밤 빗소리
請量東海水 (청량동해수) 동쪽바다 물의 깊이를 재어 보게나
看取淺深愁 (간취천심수) 내 근심보다 깊은지 얕은지
< 남린화원(南隣華園)을 지나며 >을 새긴 현판/ 해행서, 1726년, 나무,
142.6X68.3cm.
莫怪頻過有酒家 (막괴빈과유주가) 주막집을 자주 지나가도 이상타 말라
多情長是惜年華 (다정장시석연화) 다정한 마음 늘 가는 세월이 아쉽다네.
春風堪賞還堪恨 (춘풍감상환감한) 봄바람은 즐길 만도 하고 한스럽기도 하니
纔見花開又落花 (재견화개우낙화) 겨우 꽃피는 것을 보았더니 또 꽃이 지는구나.
당나라 시인 홍도의 칠 연시로 창덕궁 후원 존덕정(尊德亭)에 걸었던 현판이다. 현판 상부 우측 가장 자리에 새겨진 선묘어필(宣廟御筆)이란 글자를 통해 선조 임금 사후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존덕정은 인조(仁祖 22년) 1644년에 만들어졌으며 당시에는 육모정이라고 불렀다. 선조, 인조의 어필 현판과 현종 어필 편액이 걸려있었다.
< 증점(曾點) >을 새긴 현판/ 선조 어필, 해서, 제작연도 미상, 나무, 53.5X47cm
春服初成麗景遲 (춘복초성여경지) 봄옷 막 지어 입고 고운햇살(또는 경치) 더딘 봄날
步隨流水玩晴漪 (보수유수완청의) 흐르는 냇물 따라 걸으며 맑은 물 감상 하네
微吟緩節歸來晩 (미음완절귀래만) 느린 가락을 낮게 읊으며 느지막이 돌아오는데
一任輕風拂面吹 (일임경풍불면취) 불어오는 산들바람 얼굴을 스치네,
송나라 주희(朱熹)가 지은 칠 연시 ‘증점’의 앞부분으로 창덕궁 후원 청의정(淸漪亭)에 걸었던 현판이다. 현판 상부 우측 가장자리에 ‘선묘어필’, 하부 좌측 끝에 ‘현 임금의 병오년 겨울에 새로이 새겨 받들어 걸다(當저丙午중모계봉) ’현 임금‘이 어느 왕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히 알 기 어렵다. 원래 있던 현판이 낡아 글씨를 그대로 옮겨 새겨 새로운 현판을 제작하여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청의정은 1636년(인조13년)에 세웠다
< 林風滌煩(임풍척번) > 현판/ 인조 어필, 해서, 제작 연도 미상, 나무, 127X33cm.
‘ 숲정이 바람근심을 씻다’라는 뜻으로 존덕정(尊德亭)에 걸었던 현판이다. 인조의 친필 글씨를 새겨 만들었다. 척번(滌煩)은 세상의 어지럽고 번거로움을 씻어 없애 버리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차(茶)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현판 자체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궁궐지(宮闕志)에서 글씨의 주인과 현판을 걸었던 장소를 확인 할 수 있다.